소설리스트

황금백수-64화 (64/232)

제1장 환관 유설연피묻은 감과를 먹은 이유

“ 다시 말해 보게.”

‘ 역시.’

남철진은 내심 감탄했다.

그를 거악단구라고 부르는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아들이 살해됐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순간에 본래의 신색을 회복하고 있다.

원래 강한 권력을 지닌 자는 참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입만 열면 알아서 해주는 자들이 있는데 굳이 참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수도하는 고승처럼 한순간에 감정을 정리해버린 것이다.

“ 사망폭풍의 작전은 지금 도독동지로 있는 첨목장군 양성일 장군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고 선봉을 맡았던 자들이 흑랑기였습니다.”

“ 계속하게.”

“ 양성일 장군은 흑랑기 대주인 연우강에게 적진 깊숙이 들어가 교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 그 임무를 연우강이 나갔단 말인가?”

주진무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흑랑기 전원이 출병한 게 아니고 일부만 출병했다고 했었다. 그런 경우엔 통상적으로 믿을 만한 부하를 내보내지 지휘관이 직접 나가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묻는 말이었다.

“ 연우강이 올렸던 보고서를 바탕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전하.”

“ 쉬운 임무였던 모양이군.”

일부 지휘관들이 공을 쌓기 위해 쉬운 작전은 본인이 직접 나가고, 어려운 임무는 부하에게 맡기곤 하는 작태를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 그게......”

남철진은 말끝을 흐렸다.

“ 쉬운 임무가 아니었단 말인가?”   자살행위에 가까운 짓을 거리낌없이 해버린 것이다.

“ 그렇습니다. 전하. 구 할 이상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최악의 임무였다고 합니다.”

보고서를 토대로 조사하면서 가장 애매한 부분이었다. 정병이 아니라 죄수들로 이루어진 흑랑기를 내보냈다는 건 그만큼 임무가 힘들었다는 의미고 실제 결과도 그랬다.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연우강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임무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맨 처음엔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 죽을 걸 알면서 나갔다는 말이 되는 건가?”

“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연우강이 흑랑기를 데리고 적진으로 들어간 후 고립되자 군왕세자께서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들어가셨습니다.”

“ 그렇다면 연우강이 내 아들을 살해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네. 진무사.”

“ 저는 그 부분은, 추악한 욕심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추악한 욕심이라면?”

“ 그 전투에서 북로정군은 최고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 그러니까 자네 말은 연우강이 무상의 공을 가로채려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건가?”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연우강은 군을 나왔네. 진무사.”

“ 그건 함께 살아나왔다는 그자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 그들이 비밀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전하.”

“ 그럼 그들을 찾으면 그때 일어났던 일의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군.”

“ 문제는 그들 네 명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 무슨 소린가?”

“ 원래 흑랑기는 범죄자들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 범죄자들이었다면 병부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가?”

“ 금옥에서 출발한 자들에 대해선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군왕세자님처럼 현지에서 흑랑기로 들어간 자들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 지휘관이었던 양성일 장군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비로소 방문 목적을 꺼냈다.

사실 그가 응천부를 방문한 이유는 주무상에 대한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는 사실을 보고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독동지 양성일을 조사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미 처리가 끝난 사안으로 후군도독부 이인자를 다시 조사한다는 건 아무리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는 금의위라도 불가능하다. 자칫 잘못하면 금의위가 오군도독부를 겨냥하고 수사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후군도독부가 부담스러운가?”

주진무는 남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금의위란 거대 조직은 명분과 실리를 바탕으로 움직인다. 그런 그들이 이미 정리된 일을 다시 들춰낸다는 건 그 일을 통해 뭔가를 얻고자 함이다.

북로정군의 최고 무장이었던 양성일을 영입한 후군도독부는 오군도독부 중에서도 최고의 권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금의위나 동창의 위세를 위협할 정도다. 심지어 황제는 금의위 영반보다 후군도독부 도독과 독대를 더 많이 한다는 말까지 들려온다.

그 후군도독부의 권력 핵심에 있는 자가 바로 양성일이고 금의위나 동창으로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금의위는 국면 반전을 위해 무상 사건을 빼든 게 분명했다.

“ 저희들은 황제폐하의 신하일 뿐입니다. 전하.”

“ 명분은 항상 그랬지. 아무튼 자네 말은 잘 알았네. 조만간 북경으로 가서 첨목장군을 만나보도록 하겠네. 하지만......”

“ 군왕세자님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전하.”

남철진은 얼른 고갤르 조아렸다.

“ 그래야 할 게야. 만일 그 아이의 명예에 손톱만큼이라도 누가 된느 일이 일어나면 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 으음.’

남철진은 내심 신음을 흘렸다.

문득 잠자고 있는 사자를 깨운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사실 주진무는 남경으로 오기 전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족이었다. 아니 그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바로 황실에서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떠난 후 그동안 그를 따랐던 자들은 대부분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북경을 떠났다.

그렇게 정리됐던 자들이 주진무의 북영 행을 기회로 다시 뭉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 연씨 세가가 폭발했다고 하던데.....”

“ 그곳에서 대야벌 무인들의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 대야벌이 상단까지 노리고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군. 어떻게 처리할 참인가?”

“ 일단 연금석의 두 동생을 잡아들일 생각입니다.”

“ 대야벌에서 내줄 거라고 보는가?”

“ 그들은 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증거를 잡았단 말이군. 아무튼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전하.”

“ 금의위나 동창의 권력은 황실에서 나오고 황실의 권위가 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얻은 권력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는 걸 명심하게, 진무사.”

“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 일어나지.”

주진무는 남철진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 그럼 편히 수십시오. 전하.”

남철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오려는 듯 바람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깊게 심호흡을 한 남철진은 관정수를 데리고 응천부를 나섰다.

***********

먹구름이 산 정상을 감싸는 듯하더니 금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어느 순간부터는 거칠어지더니 사방을 후려쳤다.

거센 빗줄기를 뚫고 다섯 명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앞선 두 사람은 잔뜩 위축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뒤따르는 세 사람의 얼굴은 폭우를 쏟아 붓는 하늘만큼이나 잔뜩 흐려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상천의 군사인 뇌천 만우량과 범일승, 우담보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있는 두 사람은 금릉 연씨 세가 가주 연금석의 친동생인 연동석과 연은석이었다.

“ 천주님이 어디 계신다는 말입니까?”

앞서가던 연은석은 범일승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야벌과 손을 잡기로 결심을 하고, 범일승을 따라나섰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지만, 지금껏 들은 말이라고는 잘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천주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기쁜 마음에 따라나섰다. 그런데 범일승이 데려온 곳은 대야벌의 천주 처소가 아닌 깊은 산중이었다.

“ 지금 천정전에 계시네.”

“ 천정전이라면?”

“ 일다경 정도만 올라가면 나올 거네, 서두르게.”

“ 아, 알겠습니다.”

연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일다경 정도를 걸었을까.

문득 산자락이 뚝 끊기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 서, 설마.....”

연은석과 연동석은 해쓱한 얼굴로 범일승 일행을 보았다.

“ 동업을 할 수 없게 됐네.”

범일승은 나직하게 말했다.

“ 나, 나타나지 않겠소. 죽을 때까지 평생 숨어서 살겠소. 범 대협.”

연은석과 연동석은 뒷걸음질쳤다.

“ 황실이 나서지만 않았다면 해주었을 거네. 하지만....”

범일승은 고개를 저으며 오른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와 동시에 우담보의 손이 앞으로 향했고, 두 사람의 손에서 지풍이 쏘아져 나갔다.

퍽! 퍽!

비를 뚫고 나아간 지풍은 그대로 연동석과 연은석의 사혈을 때렸다. 두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 제기랄!”

범일승은 나직이 욕설을 뱉어내고는 연동석과 연은석의 시체를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렸다.

몸을 돌린 그는 만우량을 쏘아보았다.

무면천군단의 출병은 오로지 만우량의 머리에서 나왔고 그와 천주가 계획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대야벌이 최대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 험! 할 말 없소, 두 분.”

만우량은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덮으려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금릉 연씨 세가가 잿더미로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설사 금릉 연씨 세가가 잿더미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상관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곳을 공격하러 갔던 무면천군단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어떻게 처리할 셈입니까?”

범일승은 이내 얼굴을 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 해봐야 득 될 게 없다. 지금은 내일 방문하겠다고 전갈을 보내온 동창과 금의위 관리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 벌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일단 내려갑시다.”

세 사람은 빠르게 산 아래로 질주해 갔다. 일다경 후, 천상천으로 돌아온 그들은 삼매진화로 옷을 말린 후 천주 집무실로 들어갔다.

담대만승은 창가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 왔는가?”

담대만승은 어색한 미소로 그들을 맞았다.

“ 처리는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벌주님.”

만우량은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 중앙에 있는 무릎 높이의 탁자 앞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탁자에는 찻잔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찻주전자를 잡고 삼매진화로 물을 데운 만우량은 찻잔에 물을 따랐다.

곧이어 범일승과 우담보가 자리하자 담대만승은 자기 자리고 가 앉았다.

“ 내일 방문하겠다고 한 자들에 대해선 알아보았는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담대만승이었다.

“ 동창에서는 화화호 유설연이라 자가 나오고, 금의위에서는 천리포영 남철진이라는 자가 온다고 돼 있습니다.”

“ 어떤 자들인가?”

“ 올해 스물일곱 살의 유설연은 제독동창의 수양아들이고 남철진은 북진무사입니다. 남철진의 나이는 서른두 살 입니다.”

“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군.”

담대만승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나이를 먹은 늙으이라면 돈이나 또는 다른 걸로 구슬려 볼 수 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뇌물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정면돌파 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 무공 또한 초특급으로 분류되는 자들입니다. 벌주님.”

“ 구술릴 방법은 없단 말인가?”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연씨 세가에 대해 나온 건 있는가?”

담대만승의 시서이 우담보에게로 향했다.

“ 금릉 연씨 세가에 대한 건은 특급으로 분류되고 있어 동창이나 금의위에서도 최고위층이 아니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 전혀 나온 게 없단 말인가?”

“ 그건 아닙니다. 금릉 연씨 세가를 공격한 단체에 대한 건 알아냈습니다.”

“ 무면천군단 말고 또 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만마림의 현의당과 사월림 살수의 시체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 현의당이나 사월림 살수들은 잠룡 십 조를 쫓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 아닌가?”

“ 잠룡 십 조가 금릉 연씨 세가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 그럼 그놈들이 금릉 연씨 세가에 화약을 설치했다는 말인가?”

“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우담보는 고개를 저었다.

“ 알 수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 실종 됐습니다.”

“ 실종?”

“ 금릉 연씨 세가에 들어간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그 후로는 그들을 본 자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 정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 뇌천 자네 생각은 어떤가?”

“ 금릉 연씨 세가 안에는 무면천군단 삼백, 현의당 무인 오백 명, 사월림 살수 이백, 그리고 검왕, 도왕, 권왕, 독왕이 있었습니다. 벌주님.”

“ 그들만 해도 천이군.”

“ 그렇습니다. 벌주님. 잠룡 십 조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들과 싸워 이길 순 없습니다.”

“ 그래서 자폭을 했단 말인가?”

“ 그건......”

만우량은 말끝을 흐렸다.

현장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들은 추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좋네. 일단 그건 그 정도로 하세. 지금은 금릉 연씨 세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담대만승은 화제를 돌렸다.

지금 당장 상의해야 할 것은 잠룡 십 조가 아니라 내일 들이닥칠 동창과 금의위였다.

“ 지금 대야벌은 최대 위기 상황입니다.”

만우량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 황궐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뇌천.”

“ 만마림의 림주 혼세신마 옥처인은 벌주님보다는 군마련의 련주를 더 따르는 자입니다. 더불어 무영이기도 하고요.”

“ 계속하게.”

담대만승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 그리고 사월림은 살수 단체입니다. 대야벌과 같은 광명정대한 조직엔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지요.”

“ 어떻게 하잔 말인가?”

“ 둘째 공자께서는 벌주님께 불만이 아주 많았습니다.”

“ 불만이 많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그 아이는 내 말을 거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네.”

담대만승은 얼굴을 찌푸렸다.

“ 불만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기회가 생기면 벌주 자리에 오르기 위해 세를 규합하고 있었습니다. 세를 규합하려다 보니 자금이 필요했고, 연금석과 연은석에게 손을 뻗치게 됩니다.”

“ 아들을 팔란 말인가?”

담대만승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만우량은 태연하게 응대했다.

“ 포기하셔야 합니다. 벌주님.”

“ 난 녀석을 평생 부려먹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네. 뇌천.”

“ 마음 속에 묻으십시오.”

“ 정녕 그 방법밖에 없는가?”

“ 황실과 전쟁을 하자고 하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만우량은 부처님께 절을 할 때처럼 양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 그럼 아들과 함께 만마림과 사월림도 함께 포기하란 말인가?”

“ 벌주님께서는 동창과 금의위 조사에 적극 협조하시면 저절로 해결될 줄로 압니다. 그리고 대야벌도 쇄신이 필요한 시기가 됐습니다.”

“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조직이 너무 방만하면 효율적인 통치가 불가능합니다.”

“ 생각해 보겠네.”

담대만승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만 나가달라는 축객령이었다. 만우량은 범일승과 우담보에게 나가자고 고갯짓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문으로 향했다.

“ 범천조화신기는 어떻게 됐는가?”

막 문을 나서는 발걸음을 담대만승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만우량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 며칠 있으면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 무인들의 최정예가 대야벌을 떠나 호남으로 향할 겁니다. 벌주님.”

“ 알았네.”

세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어떻게 할 셈입니까?”

우담보는 만우량을 보며 물었다.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젠 대야벌도 변해야 할 때가 도래했소, 두 분.”

“ 변해야 한다는 건?”

“ 지금 대야벌의 가장 큰 문제는 하달된 벌주의 명령을 각 궐주나 련주 또는 림주들이 본인의 입맛대로 해석한다는 거요.”

“자의적인 해석이 너무 많다는 말입니까?”

“ 그렇소. 우 궁주. 난 벌주님의 의중이 최말단 무인들에게까지 그대로 전달되길 바라오.”

“ 천오백 년 동안 내려온 전통입니다. 만 대협.”

“ 전통도 물과 마찬가지요. 우 궁주. 정체돼 있으면 썩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그 전통 때문에 몰락하게 되오. 전통 또한 시대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오. 난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백인위원회를 없앨 참이오.”

“ 벌주 직위를 세습으로 하겠단 말입니까?”

“ 굳이 세습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소. 전대 벌주가 지목하는 자가 차기 벌주가 되는 그런 전통을 만들 참이오.”

“ 가능하리라 봅니까?”

우담보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 많은 자들이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만우량은 되물었다.

“ 그들이 대야벌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벌주가 될 수 있다는 야망 때문이었습니다. 야망을 이룰 수 없다면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잖습니까?”

“ 만일 우 궁주가 그들 입장이라면 어디로 가겠소?”

만우량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그렇군요.”

만우량의 말이 맞다. 설사 이곳을 나간다고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다. 물론 웬만한 문파는 강호에 지부 한두 곳은 있다. 하지만 대야벌을 나가는 순간 그들은 중소 문파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선택을 할 궐주나 련주 또는 림주는 아무도 없을 듯했다.

“ 아무튼 두 분의 도움이 절실하오.”

“ 알겠습니다. 만 군사. 그보다 그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연우강을 말하는 거요?”

“ 그렇소이다.”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건 나도 모르오.”

만우량은 고개를 저었다. 연우강의 무공이 생각보다 강하고, 지옥의 죄수들까지 녀석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을 공격했던 자들 때문이다.

무면천군단, 현의당, 사월림 살수, 그리고 검왕 일행.

결코 패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 동귀어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겁니까?”

“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소.”

“ 그럼 내일 천리포영과 화화호가 어면 뭔가 가닥이 나겠군요.”

“ 아마 그럴 거요.”

“ 알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우담보와 범일승은 만우량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천상천을 떠났다. 두 사람을 떠나 보낸 만우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번쩍!

우르릉!

쏴아아!

“ 클! 조금만 기다려라, 이놈아. 머잖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테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는 만우량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어찌보면 누군가를 비웃는 듯한 조소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만족스러운 듯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였다.

***********

대야벌 남문에서 시작한 긴장감은 순식간에 전 구역으로 퍼져 나갔다. 대야벌 각 세력의 수뇌들은 금일 동창과 금의위 무인의 방문 사실을 통보 받았고 아래 사람들에게 각별히 조심하라고 명을 내렸다.

내심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흥미로운 얼굴로 그들을 기다렸는데 놀랍게도 남천문을 통해 들어온 동창과 금의위 무이들은 천여 명에 육박했다.

대야벌이 생긴 이래 황실에서 이렇듯 많은 무인들이 나온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 온 자들은 다른 자들도 아니고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한다는 금의위와 동창 무인들이 아닌가. 남색 무복과 자색 무복을 걸친 자들은 호위하는 진형을 구축한 채 천천히 천상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그들의 중앙에는 커다란 가마 두 대가 자리해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대야벌 무인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휙! 휙휙! 휙휙

원호를 따라 난 길을 가고 있을 즈음, 동창과 금의위 무인 앞쪽으로 일단의 무리가 날아 내렸다. 그들은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 네 문파의 수뇌들이었다.

“ 웬 놈들이냐?”

“ 누구냐?”

동창과 금의위 위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선두에서 마차를 이끌던 동창과 금의위 무인들은 버럭 소리쳤다.

“ 난 황궐의 궐주 공야일우외다.”

눈이 부리부리한 노인이 동창과 금의위 무인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소리쳤ㄷ. 내기가 잔뜩 내포된 그의 목소리는 앵앵거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난 금황련의 련주 남옥이외다.”

금황련 련주 남옥에 이어 풍운련 련주가 본인을 소개하려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 난.....”

“ 호호호!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여러분.”

탁!

나직한 웃음과 함께 가마 앞쪽의 창문이 열렸다. 창문 안쪽엔 패물이 주렁주렁 달린 의복을 걸친 두 사람이 관을 쓴 채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화화호 유설연과 화랑 우성연이었다.

“ 난 화화호 유설연이에요. 네 분. 그리고 저쪽에 있는 과묵한 청년은 북진무사 천리포영 남철진 대협이네요.”

“ 반갑습니다.”

“ 처음 뵙습니다.”

네 사람은 두 가마를 향해 동시에 포권을 취했다.

“ 호호호! 반가워요. 여러분. 우린 대야벌 벌주를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 안내하겠습니다. 첩....”

“ 난 특별히 관직이 없어요. 궐주. 그냥 소제독으로 불러주세요.”

“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제독. 모시겠습니다.”

황궐의 궐주 공야일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길을 잡았다. 원호 주변에 나와 있던 무인들은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금의위와 동창 행렬을 지켜보았다.

황궐의 궐주가 황실 무인들을 직접 안내한 것을 처음 본 탓이었다. 대야벌 무인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를 떴다.

“ 클클클!”

나직한 웃음과 함께 커다란 나무 아래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야장의 장주인 무원과 창노였다.

“ 그 웃음의 의미는 뭡니까?”

창노는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는 뿌연 먼지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감탄이네.”

“ 감탄?”

“ 화화호 유설연은 이제 스물일곱 살이고, 천리포영 남철진은 서른두살이네, 창제.”

“ 하지만 사내도 아니고 계집도 아닌 그놈은 제독동창 유공공의 수양아들이고 남철진 그놈은 차기 금의위 영반으로 길러지고 있는 북진무사지요.”

“ 황궐의 궐주가 직접 안내할 정도란 말인가?”

“ 공야일우 그놈 그렇게 안 봤는데, 오늘 보니 똥오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놈이었습니다.”

창노는 혀를 찼다.

지금껏 많은 관리들이 대야벌을 방문했다.

하지만 황궐을 비롯한 황실과 관련된 자들이 저렇듯 떼거리로 마중을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얼마전 도독동지 양성일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자들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행동하는 걸 보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럴 만한 이유가 있네.”

무원은 빙그레 웃었다.

“ 무슨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 유설연과 남철진은 황제의 특명으로 금릉 연씨 세가 폭발사건을 조사하러 온 조사관이네.”

“ 그렇다고 해도 저건 허셉니다. 형님.”

“ 허세라고 보는가?”

“ 허세가 아니라고 보십니까?”

“ 설사 허세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네. 창제. 더군다나 화화호는 대야벌 무인들 앞에서 무공자랑까지 했네.”

유설연의 웃음소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웃음에 내공을 실어 주변에 숨어 있던 대야벌 무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해놓았던 것이었다.

“ 자칫 잘못하면 만용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형님.”

“ 만용인지 자격이 있는 자들인지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네.”

“ 뭐가 확실하단 말입니까?”

“ 담대만승은 우강이와 비견될 정도의 녀석들을 적으로 두게 됐다는 거네.”

“ 그 녀석들을 우강이 녀석과 같은 수준으로 보는 겁니까?”

“ 이번의 일의 결과가 나오면 확실해지겠지만, 남철진을 몰라도 유설연은 우강이 녀석에게 결코 뒤지지 않네.”

“ 우리에게 좋은 겁니까?”

“ 아주 좋은 거네. 놈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네. 다른 건 몰라도 금릉 연씨 세가는 그대로 두었어야 했어.”

무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금릉 연씨 세가의 공격은 담대만승이 둔 최악의 패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성공했다면 그는 무림에 이어 상단까지 장악한 최최의 벌주로 기록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금의위와 동창아게마저 대야벌에 개입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까?”

“ 담대만승은 만마림과 사월림을 버려야 하고 제 아들마저도 배신자로 만들어야 할 거네.”

“ 조금씩 무너지겠군요.”

“ 그렇지. 만마림가 사월림을 내치게 되면 각 단체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테고 담대민을 배신자로 만들게 되면 권력을 위해 아들마저 버리는 비정한 아비가 되는 거지. 놈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될 거네.”

“ 무섭군요.”

“ 뭐가 말인가?”

“ 모두 우강이 녀석 작품이지 않습니까.”

“ 무서운 건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네. 창제. 녀석은 자신의 실력을 숨기면서까지 지키고 싶어했던 집을 잃었네. 이제부너는 녀석도 참지 않을 거네. 아니 어쩌면 시작했는지도 모르지.”

“ 뭘 말입니까?”

“ 뭐가 됐든. 우린 상상했던 것 이상을 보게 될 거네.”

무원은 혼잣말처럼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 그런데 그 녀석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습니까?”

창노는 무원과 보조를 맞춰 걸으며 물었다.

“ 녀석은 물론이고 잠룡 십 조 조원들에 대해서도 들어온 게 아무것도 없네.”

“ 그게 가능합니까?”

창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우강을 비롯한 잠료 십 조 조원들이 사라진 것은 금릉 연씨 세가가 폭발한 다음이다. 거의 매일 그들에 대한 소식이 들어왔는데, 그날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 아무래도 하오밀문이 관여돼 있는 것 같네.”

“ 하오밀문이라고요?”

“ 하오밀문 문도들은 정보의 최초 생산자들이네. 그들이 입을 닫거나 의도적으로 다른 정보를 흘리게 되면 정보 단체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수 없지 않은가.”

정보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일상적인 말을 수합하여 가치를 지닌 구체적인 내용을 만들어낸 걸 말한다.

즉 그 일상적인 말을 듣는 자들이 바로 정보의 최초 생산자라고 할 수 있다. 이곳 대야벌에서는 야장인들이 될 테고 강호 무림에서는 객잔ㅇ나 주점의 점소이, 창기 등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된다. 그들을 통해 흘러 들어온 말이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수합되고 분리돼 하나의 정보를 이루게 되는데 그들이 입을 닫아버리면 정보의 흐름이 끊기고 만다.

물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지만 제한된 상황에서는 왜곡된 정보가 나올 수박에 없을 터였다.

지금 잠룡 십 조에 대한 정보가 그랬다.

그들과 비슷한 자들을 봤다는 내용이 간호 섞여 있긴 한데,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것들이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원천 정보를 생산하는 자들을 통제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오밀문이 관여돼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 그럼 녀석이 하오밀문까지 장악했다고 봐야 하는 겁니까?”

“ 그렇겠지.”

“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처럼 치밀한 사람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치밀하고 무섭고 잔인하지.”

“ 무섭고 잔인하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남궁세가를 그런 식으로 정래해 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요. 이왕 정리하는 김에 운화까지 정리해 버릴지는.”

창노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 허허허!”

무원은 터널 웃음을 터뜨렸다.

운화 보인도 아니고 할아버지인 창노가 애가 닳아 있는 모습이 우스웠던 탓이었다.

“ 웃을 일이 아닙니다. 형님.”

“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녀석의 할아버지를 직접 만나보라고 말이네.”

“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있어야 만날 거 아닙니까?”

“ 아무튼 기다려보게. 언젠가는 나타날 거 아닌가.”

“ 죽기 전에 손자를 안아보려면 한시가 급합니다. 녀석들보다 그들을 먼저 찾아보라고 해야겠습니다.”

“ 그렇게 하든지.”

무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언제 이렇듯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남만 오지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와 야장으로 숨어들어온 후 단 한번도 마음 놓고 웃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들어 참 자주 웃는 것 같다.

“ 이젠 너다, 남궁관수. 네 목을 햐애 검을 휘두르면 이놈은 산다.”

‘ 하지만 넌 죽을 맛일 거다. 담대만승.’

하늘을 향해 있던 무원의 시선이 천상천으로 향했다.

그의 짐작대로였다.

유설연과 남철진을 맞이하고 있는 담대만승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이었다.

지금껏 많은 이들이 대야벌을 방문하였고, 천상천에 와서 자신을 만났다. 하지만 앞에 있는 저들처럼 오만한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천리포영 남철진이란 자는 먼저 인사를 했으나 그나마 좀 낫다. 계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내도 아닌 놈은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인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

“ 난 대야벌 벌주 담대만승이오.”

결국 담대만승은 대야벌 벌주라는 대목에 힘을 실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 호호호! 난 화화호 유설연이에요. 벌주. 제독동창 되시는 분이 아버지시지요.”

유설연도 지지 않고 제독동창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 혹시 호가호위라는 말을 아시오?”

담대만승은 유설연을 쏘아보며 물었다.

“ 물론 잘 압니다. 벌주. 남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린다는 뜻 아닙니까.”

유설연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 그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 혹시 근묵자흑이란 말을 아세요?”

유설연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쁜 사람이 된다는 말이외다.”

“ 거기서 나쁜 사람을 권력으로 바꾸면 권력자 옆에 있는면 권력자가 된다는 뜻이지요.”

“ ......!”

담대만승은 할 말을 잃었다.

근묵자흑이란 말은 아버지가 권력자니까 유설연 자신도 권력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쉽게 말하면 까불지 말라는 듯이다.

“ 호호호! 놀란 모양이군요. 하지만 세상이 그런 걸 어떡해요. 억울하면 벌주도 정계로 진출하세요.”

“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유 대협. 이분은 다른 분도 아니고 대야벌 벌주십니다. 설사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셨다고 해도 유 대협처럼 하진 않소이다.”

보다 못한 만우량이 유설연의 행동을 책망하고 나섰다.

“ 넌 뭐지?”

유설연은 만우량을 빤히 쳐다보았다.

“ 난 천상천 군사 만우량이오.”

“ 관직은?”

유설연의 눈에서 싸늘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 나, 난.......”

만우량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 관직이 뭐냐고 물었어요, 만 대협?”

“ 관직은 없고, 대야벌 천상천의......”

“ 네 이노옴!”

순산 만우량의 말을 끊으며 유설연의 외침이 신래를 강타했다.

“ 커억!”

쿵쿵쿵!

만우량은 피 화살을 뿜어내며 뒤편으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무려 다섯 걸음을 물러난 그는 뒤편 벽에 의지해 가까스로 멈췄다. 하지만 극심한 내상을 당한 듯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호가호위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는 거다. 놈. 뉘 앞이라고 감히 멋대로 주둥일 나불거리느냐?”

만우량을 노려보는 유설연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 나, 난 천상천의 군사요, 유 대협.”

“ 천상천의 군사면 황제폐하의 명령을 수행 중인 천명사자를 막대해도 된다고 하더냐! 너희 천상천이 대명제국 황실을 무시할 정도로 대단한 곳이란 말이더냐?”

“ 그, 그건.....”

만우량은 할 말을 잃었다.

[ 사과하게.]

담대만승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들려오자 만우량은 시선을 돌렸다.

[ 유 공공의 권력이 곧 자기 거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놈일세. 저런 놈에겐 말이 통하지 않네.]

“ 죄송하게 됐소이다. 유 대협.”

만우량은 별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말로 유설연의 노화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 너는 상대가 기분 나빠 하면 못 이기는 척 사과를 하고, 상대가 아무 말 하지 않으면 득의만면한 얼굴을 하는 그런 자더냐?”

“ 지부장님. 사과를 했는데 받아들이세요. 저 녀석 나이도 있는데 너무 몰아붙이는 건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듯해요.”

보고 있던 우성연이 유설연을 말렸다.

“ 그렇게 생각하느냐?”

“ 그래요. 지부장님. 어린아이도 아니잖아요. 지부장님의 말씀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 호호호! 성연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미안하게 됐어요. 벌주.”

유설연은 활짝 웃으며 담대만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차가운 기운이 몰아치는 것처럼 싸늘했던 실내가 순식간에 훈훈해졌다.

‘ 으음!’

유설연을 지켜보던 담대만승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놀라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유 공공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고 하지만 저런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놈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뱀처럼 차가우면서도 사자처럼 강하다.

만우량은 대야벌 백대고수 서열엔 들어 있지 않지만 서열을 매긴다면 오십 위 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강자다. 그런 그를 단지 목소리만으로 내상을 입혀벼린 것이다.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 일이라 만우량이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제 스물 일곱 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가히 엄청난 내공이라 할 수 있었다.

권력뿐만이 아니라 무공으로도 큰소리 칠 만한 자였다.

아니 예상대로 다루기 곤란한 자였다.

“ 날 모욕 주기 위해 온 게 아니라면 앉게, 유 대협.”

담대만승은 차분한 얼굴로 자리하며 말했다.

“ 호호호! 너무 그러지 마세요. 벌주. 난 다만 만 대협께 세상이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유설연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건가?”

담대만승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굳이 이런저런 말로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도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 성연아.”

담대만승의 물음에 유설연은 우성연을 불렀다.

“ 여기 있어요, 지부장님.”

우성연은 가지고 있던 비단으로 싼 상자를 내밀었다.

“ 먼저 이걸 확인해 줘야겠어요, 벌주.”

유설연은 상자를 담대만승 앞으로 내밀었다.

“ 이건 뭐요?”

“ 먼저 열어보세요. 벌주.”

“ 설마 선물은 아닐 테고.”

담대만승은 태연한 얼굴로 비단을 풀고 상자를 열어보았다.

“ ........”

상자 안쪽을 쳐다보던 담대만승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상자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유설연을 보았다.

“ 내가 자른 건 아니니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세요. 금릉 연씨 세가 폭발 현장에서 발견한 건데, 시체들 중 상태가 가장 양호한 거고, 그 머리가 왜 폭발 현장에 있었는지 해명을 듣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유설연은 담대만승의 시선이 무섭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 대야벌 인물이란 말이오?”

“ 그래요, 벌주.”

“ 대야벌 무인을 아주 잘 아는 모양이외다.”

담대만승은 상자 안에 있는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설연을 향하고 있었다.

“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데 그 자만큼은 알겠더라고요.”

“ 그럼 유명한.......”

머리로 시선을 주었던 담대만승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놀랍게도 머리의 주인은 둘째인 담대민이었다.

둘째 아들을 가문의 배신자로 만들기로 했고, 저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자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담대민의 머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난 해명을 원해요, 벌주.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자는 귀하의 둘째 아들 담대민이에요. 담대민의 시체가 어떻게 해서 그곳에 있었는지, 황제폐하께서는 그걸 알고 싶어 하세요.”

하지만 담대만승은 아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한동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던 담대만승은 시선을 들었다.

“ 이놈은 가문을 배신하고, 날 배신했소.”

“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했단 말인가요?”

유설연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이미 담대만승이 저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 그렇소. 나 모르게 세력을 만들고 있었소.”

“ 그 세력이 만마림과 사월림인가요?”

“ 나도 최근에 그 사실을 알았소, 유 대협.”

“ 그럼 벌주는 금릉 연씨 세가 가솔을 도륙하고, 그 일을 숨기기 위해 화약으로 잿더미를 만든 그 사건과는 무관하단 말인가요?”

“ 그렇소, 유 대협.”

“ 호호호! 이건 참. 난 월척을 잡은 걸로 여겼는데, 피라미들만 걸려들게 생겼네. 지금부터는 남 진무사가 알아서 하세요.”

유설연은 낮게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떻게 하자는 거요, 화화호?”

남철진은 유설연을 향해 물었다.

“ 벌주는 혐의가 없는 걸로 드러났는데 여기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 혼세신마 옥처인과 사월 양도욱을 압송해 가자는 말이오?”

“ 그러는 수밖에 더 있어요?”

“ 그들을 데려가는 것도 벌주의 협조가 있어야 하오. 화화호.”

“ 설마 배신자들을 끼고 돌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유설연은 담대만승을 보았다.

“ 시간을 주시오, 유대협.”

“ 그들을 내쫓을 시간을 말하는 건가요?”

“ 그렇소. 대야벌 내에서 그들을 체포해 간다면 자칫 예상하지 못했던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소.”

“ 불상사라.....”

유설연은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남철진을 보았다.

“ 나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소. 화화호. 벌주께서 그자들을 우리에게 넘겨주는 게 훨씬 모양새가 좋소.”

“ 오늘 만남 결코 잊지 않겠소. 유대협.”

담대만승은 문으로 향하는 유설연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 말에 유설연은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가능하면 잊도록 하세요. 벌주. 세상 살면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누군지 아세요?”

“ 나 담대만승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지를 않는 사람이오, 유대협.”

“ 그럼 지금 알려드릴 게요. 벌주. 제 물건을 잘라 개 앞에 던져버린 놈과는 절대 상종하지 마세요. 그럼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거예요.”

유설연은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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