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이왕 싸우려면 화끈하게.
실내엔 정적이 감돌았다.
유설연이 나가면서 한 말에 담대만승뿐만 아니라 남철진마저도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특히 유설연을 정적으로 생각했던 남철진이 받은 충격의 강도는 담대만승보다 더 강했다.
남철진은 유설연이 단순히 엉덩이 돌리는 기술이 좋아 그 자리에 오른 걸로 여겼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제 물건을 잘라 개를 던져줬다는 그 말이 곧 녀석의 삶이었다. 자신은 그런 녀석을 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지금껏 녀석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나 또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유설연.’
남철진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담대만승을 보았다. 지금은 일을 해야 할 때였다.
“ 만마림과 사월림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소, 벌주.”
“ 그러니까.....”
담대만승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편.
밖으로 나온 유설연과 우성연 두 사람은 가마로 향했다. 가마는 여덟 명이 매는 팔인교로, 앞뒤 길이 일 장 반, 폭 일장, 높이는 반 장에 달하며 웬만한 마차보다 더 컸는데, 가마 지붕 네 곳에는 창을 열더라도 햇빛이 들지 않도록 차양이 쳐져 있었다.
더불어 가마꾼들이 잡는 장대는 물론이고, 가마의 상당 부분이 쇠로 되어 있어 단순한 가마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엷은 붉은 색조를 띠는 이 화려한 가마를 북경에서는 만상교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제독동창 유 공공이 즐겨 타던 가마였던 것이다.
유설연과 우성연이 마차 앞으로 다가가자 공야일우를 비롯한 네 명이 다가왔다.
“ 모시겠습니다.”
공야일우는 유설연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 난 바로 떠나야 해요, 궐주. 여러분들로부터 극진하게 대접을 받았다고 아버님께 말씀드리겠어요.”
유설연은 싱긋 웃으며 가마를 매는 자 중 한 명을 향해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 북경으로 돌아가실 참입니까?”
공야일우는 가마 안쪽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 오랜만에 나왔는데 그냥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강호나 두루 구경하고 갈 생각이에요.”
유설연은 가마 안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 어디로 가실 참입니까?”
“ 성연이 이것이 동정호를 보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그곳에 갈 참이에요.”
유설연은 가마 안으로 들어가며 지나가듯 말했다.
“ 호남으로 가시겠단 말입니까?”
공야일우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세 명 또한 긴장한 얼굴로 유설연을 보았다. 자신들 또한 배웅이 끝나면 곧바로 호남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니 유설연의 방문이 아니었다면 벌써 호남으로 향하고 있었을 테다.
“ 호남에 무슨 일 있나요?”
유설연은 공야일우 일행을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 아, 아닙니다. 소제독.”
공야일우는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 그럼 다음에 봐요, 여러분.”
유설연은 싱긋 웃으며 마차 문을 잡고 있는 사내를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사내는 마차 문을 닫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곧 여덟 명의 사내는 가마 장대에 걸린 띠를 어깨에 걸쳤다.
“ 가요!”
마차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덟 명의 사내는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가마를 호위하고 있던 동창무인들이 동시에 움직이자 일행은 빠르게 멀어졌다.
“ 다음에 뵙겠습니다. 유 대협.”
멀어지는 유설연의 가마를 향해 공야일우는 크게 소리쳤다.
“ 호호호! 이제 경극은 끝났어요, 공야 대협.”
“ 으음!”
공야일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대단한 자군요.”
옆에 있던 금황련의 련주 칠기대장군 남옥은 놀란 얼굴로 멀어지는 가마를 보았다. 설마 유설연이 자신들의 의중을 읽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공야일우를 비롯한 자신들이 저들을 극진하게 영접했던 것은 담대만승을 의식한 의도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유설연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조심해야 할 자요, 남 련주.”
가마를 쳐다보는 공야일우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자신들이 그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용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갑시다, 궐주.”
“ 그럽시다.”
남옥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공야일우는 걸음을 옮겼다.
“ 경극이란 건 무슨 소리죠?”
우성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신장!”
유설연은 밖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 하명하십시오. 소제독.”
“ 지금부터 긴한 이야기를 할 참이에요.”
“ 강기막을 치겠습니다.”
“ 고마워요.”
유설연은 싱긋 웃으며 우성연을 보았다.
“ 중요한 얘긴가 봐요?”
“ 생각하기 나름이야.”
“ 생각하기 나름이란 건 무슨 뜻이죠?”
“ 공야일우 그자를 비롯한 네 명은 일부러 나에게 고개를 숙였단 말이야.”
“ 담대만승을 압박하기 위해서 그랬단 말이에요?”
“ 맞아. 지금 담대만승은 사면초가에 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거든.”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 이거죠?”
“ 그렇지.”
“ 그런데 왜 그냥 물러난 거죠?”
“ 무슨 소리야?”
“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담대만승이 무릎을 꿇었을 것 같던데요?”
“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아닌가요?”
“ 이것아, 대야벌은 천오백 년 역사를 지닌 곳이야.”
“ 그래서요?”
“ 단단한 쇠는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몰라?”
“ 계속 밀어붙이면 반발할 거란 말인가요?”
“ 당연히 그렇지. 이런 거대 단체일수록 강약을 잘 조절해 가며 다뤄야 하는 거야. 함부로 들이댔다간 내가 먼저 죽어, 이것아.”
“ 그럼 담대만승에게 했던 말은 다 뭐죠?”
“ 달래줄 사람이 있잖아.”
“ 남철진 진무사?”
“ 그렇지.”
“ 두 분이 짠 거예요?”
“ 이럴 땐 짰다고 하는 게 아니라 역할을 분담한다고 하는 거야.”
“ 호호호! 그게 그거잖아요. 그런데 지부장님은 어떤 결과를 원하는 거죠?”
우성연은 소리내어 웃었다.
대야벌의 벌주라는 담대만승이 지부장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 글쎄, 그건 아직 비밀이야.”
“ 헹! 이곳을 금릉 연씨 세가처럼 만들고 싶으면서, 비밀은 무슨.”
우성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 금릉 연씨 세가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 그럼 아닌가요?”
“ 가족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망하긴 뭐가 망해. 이것아.”
“ 정말 살아 있어요?”
우성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경에서는 물론이고 북경의 제독동창 앞에서도 유설연은 금릉 연씨 세가는 가주 연금석을 비롯한 가솔들이 몰살을 당했다고 하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나도 처음엔 금릉 연씨 세가 가솔들이 몰살당한 걸로 생각했어.”
“ 그런데요?”
“ 여러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어쩌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느데 담대만승을 보고 나서 확신하게 됐어.”
“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지부장님.”
“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건 다른 시체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는데 담대민의 얼굴은 왜 멀쩡했느냐 하는 거야. 아니 모든 건물이 잿더미로 변한 상황에서 담대민의 얼굴만 멀쩡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
“ 듣고 보니 그렇네요.”
우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 없이 지나쳤다.
머리 하나 정도는 온전한 채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곱씹어보니 왜 하필이면 담대민의 머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누군가 담대민의 머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해둔 게 아니라면 잇을 수 없는 일이야, 성연.”
“ 그 누군가가 연우강이란 말인가요?”
“ 맞아. 연우강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사람이 없어. 더불어 연우강이 그곳에 있었다면 부모님들이 당하도록 방치했을 리가 없잖아.”
“ 하지만 친부모가 아니잖아요. 더구나 그들이 죽으면 금릉 연씨 세가의 재산은 전부 그의 것이 되고요.”
“ 아무리 친부모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야. 설사 그렇게 해서 금릉 연씨 상단을 물려받는다 해도 얼마 못가.”
“ 금세 몰락한다는 말이에요?”
“ 금릉 연씨 상단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상단을 구성하는 건 상인들이야. 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상단 자체를 꾸려갈 수가 없어. 네가 상인이라면 부모의 죽음을 방치한 자를 믿고 따르겠어?”
“ 좋아요. 그렇다 치고요. 그럼 지부장님 말은 연우강이 부모를 피신시키고 놈들을 유인해서 몰살시켰단 거예요?”
“ 응.”
“ 하지만 대야벌 무인은 천 명이 넘어요. 잠룡 십조는 함께 다니는 노인네들까지 전부 합친다고 해도 백 명이 채 되지 않고요. 잠룡 십 조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대야벌 정예를 상대로 동귀어진 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라고요.”
“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다는 생각이 강해져.”
“ 그 이유가 담대민 얼굴 때문이라는 거죠?”
“ 누군가 그 녀석 얼굴을 얼려놓았던 거야.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얼어 있던 얼굴이 폭발로 생성된 열에 의해 녹은 상태였고.”
“ 잠룡 십조에는 빙하빙백강을 익힌 수여설이 있으니까 머리를 얼리는 건 문제가 아닌데....”
우성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 왜?”
“ 담대만승에게 가져다 줄 것도 아니면서 굳이 머리만 보관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 담대만승에게 전해졌잖아.”
“ 그거야, 지부장님이.....”
우성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유설연을 보았다.
중간 과정이야 어찌됐든, 담대민의 머리는 그의 아버지인 담대만승에게 전해진 상태였다.
우성연은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설마 지부장님이 담대민의 머리를 가지고 대야벌로 올 거라는 걸 확신했단 말이에요?”
“ 맞아, 성연. 연우강 그자는 나나 남철진을 심부름꾼으로 선택한 거야.”
“ 그럼 서찰을 보낸 자도?”
“ 그렇겠지.”
“ 그가 진짜 노리는 게 뭐죠?”
“ 담대만승을 패륜 부모로 만들고, 만마림과 사월림을 대야벌에서 쫓아내는 게 녀석이 이번 일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거야.”
“ 패륜 부모라는 건?”
“ 담대민은 착한 아들이었다는 말이지.”
“ 그럼 담대만승은 패륜 부모가 되는 건가요?”
“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몇 가지 부류가 있어. 너와 나처럼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야망 때문에 자식을 버리는 경우도 있지. 똑같이 자식을 버리는 경우지만 세인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려.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동정을 얻는 데 반해 야망을 위해 자식을 버린 부모는 돌로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라고 욕을 먹지. 그런데 담대만승은 후자가 된거야. 물론 지금 당장 담대만승을 대놓고 욕하는 자는 없겠지만, 혹여 그가 대야벌이나 범천 담대세가의 장악력이 약해지면 약점이 될 거야.”
“ 그 일이 장차 담대만승의 목을 옭아맬 거란 말이군요.”
“ 그것뿐만이 아니야. 이번 일로 인해 만마림과 사월림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대야벌에서 쫓겨나게 생겼어. 그들 또한 앞으로 담대만승의 적이 될 거야.”
“ 혼세신만 옥처인과 사월 양도욱을 체포해 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성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장차 대야벌의 적이 될 자들인데 왜 체포해?”
“ 담대만승이 그들을 내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는 거예요.”
“ 당연하지.”
“ 대단하네요.”
“ 그럼 그 정도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유설연은 우성연을 흘겨보았다.
“ 지부장님 말고 연우강 말이에요.”
“ 무슨 소리야?”
“ 일은 지부장님이 하고 있지만 그건 전부 연우강의 머리에서 나온 거잖아요. 제 말이 틀려요?”
“ 맞아, 이것아.”
유설연은 빽 소리쳤다.
“ 맞은 정도가 아닌가 보네요.”
“ 그 말도 맞아.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소름 끼치는 놈이야.”
“ 지부장님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건 처음에네요.”
“ 칭찬이 아니라 두려워.”
“ 그 정도예요?”
우성연은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지금껏 십여 년 이상을 함께했지만 그의 입에서 두렵다는 말이 흘러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제독동창마저도 우습게 보았던 그가 아닌가.
“ 그놈이 화약으로 금릉 연씨 세가를 날려버린 이유를 알아?”
“ 잿더미로 만들려고 그런 거잖아요.”
“ 아냐, 이것아. 그놈이 화약을 쓴 이유는 나와 남철진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어.”
“ 심부름꾼으로 부려먹기 위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 비밀 유지 때문이야.”
“ 금릉 연씨 세가 안쪽 상황이 대야벌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란 말이죠?‘
“ 응!”
“ 그러니까 지부장님이나 남철진 진무사는 지금껏 연우강 그자의 꼭두각시 노릇만 한 셈이네요?”
“ 너 지금 나 약 올리는 거야?”
“ 제가 지부장님 약을 올릴 이유가 없잖아요.”
“ 그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을 굳이 확인하는 이유는 뭐야?”
“ 보통은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되면, 끌려가지 않기 위해 계획을 바꾸잖아요.”
“ 어떻게 바꾸는데?”
“ 옥처인과 양도욱을 잡아다가 목을 잘라버리면 연우강의 계획이 틀어지는 거 아닌가?”
“ 그럼 우리 계획은 어떻게 하고?”
“ 그걸 왜 제게 물어요. 지부장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우성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 알아서 할 게 없으니까 문제잖아. 이것아. 그놈이 세운 계획이 완벽해서 손을 댈 게 없다고.”
유설연은 버럭 소리쳤다.
연우강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유설연을 짜증스럽게 하였다.
“ 그럼 그 녀석을 이렇게 해버리면 되잖아요.”
우성연은 제 목을 스윽 그었다.
“ 일단 만나야 목을 그어도 그을 거 아냐.”
“ 지금 만나러 가는 거 아닌가요?”
“ 어디 있는지 알아야 만나지.”
“ 호남에 있을 거예요.”
“ 확실해?”
“ 범천조하신기는 대야벌 소속 단체 네 곳의 숨통을 거머쥘 보물이잖아요. 아마 녀석도 그곳으로 올 거예요. 그런데 만나면 정말로 목을 그어버릴 건가요?”
“ 글쎄.....”
유설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 이용할 수 있는 자라면 살려주고, 부담이 될 것 같으면 죽인다는 거네요.”
“ 내 삶의 방식이니까.”
유설연의 입가에 맺혔던 싸늘한 미소가 점점 커지더니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 이야기 끝났어요, 신장.”
유설연을 지켜보던 우성연은 밖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 해제하겠습니다.”
“ 친밀사위만 남기고 나머진 복귀하세요. 신장.”
“ 알겠습니다.”
“ 차 드시겠어요?”
우성연은 유설연을 보며 물었다.
“ 용정으로 하자.”
“ 준비할게요.”
우성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설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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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호는 엄밀하게 말하면 호수가 아니다.
왜냐하면 동정호 주변에 있는 네 개의 강, 즉 농수, 원수, 자수, 상수의 물이 들어왔다가 장강으로 빠져나가는 거대한 집수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라고 부르는 것은 남북 이백오십 리, 동서 사백 리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에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호수라는 말 대신 민물로 이루어진 바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호수 한가운데 군산이라고 불리는 섬까지 있으니 바다라는 말에 흠을 잡을 수도 없다.
아무튼 동정호는 거대한 크기와 더불어 수많은 전설과 절경까지 겸비하여 예로부터 호남 땅에 들른 시인묵갱이 반드시 찾는 장소가 됐고, 저 유명한 두보나 이백도 이곳에 와서 한바탕 시상을 풀어놓았다.
그 시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동정호 동편, 즉 악양성 서편에 위치해 있는 삼층 누각인 악양루다.
이백과 함께 당대의 최고 시성이라 불리는 두보가 악양루에 올라 지은 등악양루란 시로 인해 동정호 최고 명물로 자리 잡은 악양루는 호남성을 찾은 문인들이 반드시 들러가야 하는 성지처럼 변하였고, 수백 년 지난 지금에도 많은 문인들이 찾는다.
더불어 악양루 주변으로는 시인묵객과 유람 온 자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과 주루가 성행하는데, 특히 배에서 숙박을 하며 술을 마실 수도 있는 화선이 유명하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점심 무렵, 우산을 함께 쓴 두 사람이 악양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든 키가 큰 사내는 문사복임에도 불구하고 비단으로 지어진 고급스러운 옷을 걸쳤고, 키가 작은 사내는 평민의 행색이다.
행동거지를 보면 종자를 데리고 유람 나온 대갓집 자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문인들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유람객도 아니었다.
별다른 감흥 없이 악양루를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남경을 떠나온 연우강과 남궁운화였따.
두 사람은 환영축골공으로 얼굴을 바꾼 상태였다.
연우강은 시장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고 남궁운화는 그보다는 조금 준수한 모습이었다.
“ 미친 것들.”
악양루를 올려다보던 연우강은 툭 쏘아붙엿다.
“ 왜 그래요?”
남궁운화가 놀란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떻소?”
변성을 한다고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가늘고, 여자라고 하기엔 약간은 묵직한, 묘한 느낌을 주는,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난 소년의 목소리를 연상케 하였다. 그런 그녀는 덩치에 비해 꽤나 커 보이는 봇짐을 걸머지고 있었다. 종자로 변장을 하고 있어, 짐은 그녀 차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보물이라고 하기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연우강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 호호호! 여긴 문인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곳이지 우리 같은 무인들에게는 전망대 이상의 의미밖에 없어요. 연공자. 아무튼 올라가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일층과 이층을 지나친 두 사람은 삼층으로 올라 난간에 서서 동정호를 내려다보았다.
“ 와아!”
눈앞에 펼쳐진 호수 풍경에 남궁훈화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악양루에 오르면 호수가 만들어내는 수평선을 보게 된다고 하였던 누군가의 말이 맞았다.
바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평선과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물안개로 인해 시계가 짧아진 탓도 있지만 중원에서 가장 큰 호수라는 말은 맞는 듯했다.
“ 처음이에요?”
연우강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 이런 곳에 올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연 공자도 처음 아닌가요?”
“ 저야 뭐 어렸을 때는 사고 치기 바빴고, 나이 먹어서는 대부분 군에 있었으니까.”
“ 우린 둘 다 동정호는 처음이네요.”
“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감흥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 그럼 식사나 할래요?”
남궁운화는 봇짐을 내려놓았다.
“ 그게 낫겠습니다.”
두 사람은 비가 들이치지 않는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먼저 보자기를 꺼내 바닥에 깐 남궁운화는 이어 천으로 싼 상자 형태의 물건을 꺼내 가운데 놓았다.
아침에 객잔을 나서기 전에 분지한 도시락이었다.
삼층으로 된 도시락 맨 위쪽에는 밥이 들어 있고, 중간에는 생선 반찬이, 맨 아래층에는 야채가 담겨 있었다. 남궁운화는 젓가락을 연우강에게 건네고는 물병과 잔을 꺼내 한편에 놓았다.
“ 힘들지 않아요?”
젓가락을 받아든 연우강은 잔에 물을 따르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며칠 동안의 강행군으로 그녀의 몰골은 상당히 추레했다.
사실 남궁운화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금릉을 떠난 지 삼일 후다.
범천조화신기가 나타났다는 말을 허일구로부터 듣고, 호남으로 향하다가 숲에서 노숙을 하게 됐는데, 그때 남궁운화가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린 녀석이 혼자 길을 떠도는 게 불쌍하여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식사를 하면서 그가 남궁운화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두작군으로부터 배운 환영축골공으로 얼굴을 바꾸고 있었다.
일부러 따라왔는데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어, 데리고 이곳으로 오는 수밖에 없었다.
“ 전혀.”
작은 그릇에 밥을 퍼 담고 있던 남궁우화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힘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즐겼다.
아마도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즐거웠던 적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이후 처음이다.
“ 불편한 것도 없고?”
“ 불편한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 잠자리도 불편하고 계속 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야 하잖아요.”
“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런 여행을 해보겠어요.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제겐 즐거움이에요.”
“ 남궁우화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 아무튼 난 모르니까 알아서 하세요.”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먹는 거에 집중했다.
“ 그런데 동정호가 아름답기는 하네요.”
남궁운화는 동정호로 시선을 주었다. 빗방울이 수많은 동심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에 새기기도 전에 금세 사라지고 말지만, 물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심원의 행렬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 열심히 움직이려면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합니다, 남궁소저.”
“ 여기서 더 많이 먹으면 연 공자는 돼지를 종자로 데리고 다녀야 할 걸요?”
“ 살쪘어요?”
“ 그럼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먹는데 살이 안찌고 배겨요. 더구나 연 공자는 간단하게란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연우강을 쫓아다니면서 놀란 점 중의 하나가 그의 식사 습관이었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먹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시간마저도 정확하다.
더불어 간단하게 먹는 법이 없다. 그의 식습관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을 먹는 것만큼이나 불가사의였다.
“ 제 인생 철학은 풍족할 때 잘 먹고, 잘 자고, 잘 입자입니다.”
“ 풋!”
남궁운화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우스워요?”
“ 그럼 우스울 수밖에 없잖아요. 연 공자는 지금껏 한 번도 부족하게 산 적이 없잖아요. 남궁세가 가주인 저보다 더 풍족하게 살았을 걸요?”
“ 지금까지는 없었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때가 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 억울해요?”
“ 안 먹고, 안 쓰고, 죽을 둥 살 둥 절약해서 돈을 모았는데 어느 날 그 돈이 홀라당 날아가 버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그동안 쫄쫄 굶었던 게 억울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 모아놓은 돈이 홀라당 날아갈 일이 없잖아요.”
“ 그건 남궁소저가 인간을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보통 매월 닷 냥씩 버는 사람은 이백 냥 정도만 모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저축을 하게 되거든요.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면 칠 년 정도면 그 돈을 모을 수 있어요.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나요.”
“ 어떤 문제가 일어난다는 거죠?”
“ 눈높이가 높아져 버린다는 겁니다.”
“ 눈높이가 높아진다는 건 무슨 뜻이죠?”
“ 전엔 한 달에 닷 냥 버는 사람들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제는 한 달에 열 냥이나 스무 냥 버는 사람들과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 그게 나쁜가요?”
“ 나쁘다는 게 아니라 스무 냥씩 버는 사람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투자하여 더 큰 사업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업이라는 게 열에 아홉은 실패하기 마련이지요.”
“ 그러니까 무리하게 돈을 벌려다가 모든 걸 잃는단 말이군요.”
“ 그렇습니다. 남궁 소저.”
“ 그럼 저축도 하지 말라는 건가요?” “ 그건 아니죠. 훗날에 대한 대비는 하되, 돈에 미쳐서는 안 된다는 거죠.”
“ 그래서 있을 때 잘 먹자?”
“ 전 있을 때는 고급으로 잘 먹고, 없을 땐 수준을 낮춰서라도 잘 먹자는 주의입니다. 이따 저녁 때는 파릉전어석을 먹으러 가요.”
“ 파릉전어석이 뭐죠?”
“ 저기 동정호에서 잡히는 열일곱 종류의 물고기로 만든 스무 가지의 생선 요리를 말하는 겁니다. 동정호에 들르면 반드시 먹어봐야 할 요리라고 하더군요.”
연우강은 동정호를 가리켰다.
“ 또 살찌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운화는 열심히 젓가락을 놀렸다. 두 사람은 금세 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정리하여 봇짐 안으로 집어넣은 남궁운화는 이번엔 차가 들어 있는 작은 목갑을 꺼냈다.
이곳에 와서 구한 최고급 군산은침차였다.
목갑을 열고 찻잎을 꺼내 잔에 넣었다. 그러고는 물병을 잡고 삼매진화로 데웠다. 곧 뿌연 수증기가 도자기 병 입구로부터 솟아올랐다.
물병을 내려놓은 그녀는 김이 한숨 빠지길 기다렸다가 찻잔에 따랐다.
“ 한잔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궁 소저.”
“ 아는 사람이에요?”
남궁운화는 찻잔을 연우강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시야엔 잡히진 않지만 누군가 빠르게 이편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감지되고 있었다.
“ 남궁 소저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연우강은 찻잔을 들며 빗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곧 그의 시야에 검은 인영이 잡혀들었다.
“ 누구죠?”
남궁훈화는 검은 인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세모꼴 눈에 주먹코, 오른쪽이 약간 긴 염소수염, 키는 오 척 다섯 치, 오른 손등에 칼자국이 있는 영감입니다.”
“ 일구 할아버지네요?”
남궁운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얼른 봇짐을 뒤져 찻잔을 꺼냈다.
휙!
그녀가 차를 준비하고 있는 사이 인영이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왔다. 예상대로 그는 공공수 허일구였다.
“ 분위기 좋네.”
허일구는 올라오자마자 남궁운화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 어서 오세요, 할아버지.”
남궁운화는 웃으며 그를 맞았다.
“ 연 공자가 뭐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냐?”
“ 누, 누가 쫓아다닌다고 그러세요?”
남궁운화는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 그럼 아니냐?”
“ 전 강호경험을 쌓기 이해 연 공자를 쫓아... 차나 드세요.”
남궁운화는 따라두었던 찻잔을 불쑥 내밀었다.
“ 클클클! 아무튼 연 공자는 복이 터진 사람인 건 분명하네.”
“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강조할 필요 없어. 영감. 그건 그렇고 상황이나 말해 봐.”
“ 무인들이 개떼처럼 몰려들고 있어.”
“ 그런 애매한 보고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해. 보고를 할 때는 말이야. 어떤 조직에서 어떤 놈이 얼마큼 나왔는지,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해야 하는 거야.”
‘ 빌어먹을 자식.’
허일구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연우강을 돕고 있는 이유는 형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남궁세가가 진 채무 때문이다. 녀석은 남궁세가의 채무를 약간 탕감해 준다면서 무림이 정리될 때까지 정보를 물어오라고 하였다.
아마 노노태세가 아니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최고 어른인 된 달리 때문에 녀석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 제대로 된 보고서가 없어?”
“ 있다 자식아, 아주 상세하게 알아 왔다.”
허일구는 버럭 소리쳤다.
“ 그럼 시작해.”
연우강은 찻잔을 들고는 한쪽 기둥에 몸을 기댔다.
“ 아무튼 자넨.”
허일구는 품속에서 접힌 뭔가를 꺼냈다.
물이 들어가지 않는 방수포로 꼼꼼하게 싼 그것은 하오밀문 총단에서 입수한 강호 정세가 담긴 보고서였다.
“ 먼저 천상천 무인으로는 오제가 대야벌을 나섰네.”
“ 오제는 누구누구를 말하는 거지?”
“ 북천검제 해상, 남천도제 곽유산, 동천창제 상온걸, 서천권제 이적천, 중천비제 운장이네. 북천검제 해상과 남천도제 곽유산은 출신이 야궐과 묵야련으로 돼 있지만 원래는 범천담대세가 혈야대 출신이네. 그리고 동천창제 상온걸은 사자림 전대 림주고, 서천권제 이적천은 사해림 전대 림주, 중천비제 운장은 사월림 출신이네.”
“ 칠왕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지?”
“ 한 명의 칠왕에게는 승리하고 두 명의 칠왕에게는 패한다고 알려져 있네.”
“ 좋아. 그놈들에 대해선 그 정도면 됐어.”
“ 다음엔 범천조화신기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의 수뇌들이 대거 나섰네. 각 문파 당 이백 오십 명씩 총 천여 명이 호남으로 들어왔네.”
“ 대야벌에서 나온 자들은 그들이 전부야?”
“ 아니네, 군마련과 철무련, 패천림 무인들도 나왔네.”
“ 군마련이면 담대만승의 동생인 담대천호가 주인으로 있는 문파 아냐?”
“ 그렇네.”
“ 담대천호가 직접 나온 거야? 아니면....”
“ 부련주인 천광마자 낙천이 지옥군마대를 이끌고 나왔네.”
“ 부련주를 보낼 정도면 범천조화신기를 반드시 얻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하는 듯 동정호로 떨어지던 빗방울을 응시하던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허일구를 보았다.
“ 각 처로 향하던 몇몇 잠룡들도 방향을 바꿨네.”
“ 방향을 바꾼 자들은 누구누구지?”
“ 등천대룡 담대무궁, 구룡대군 윤허, 소명공주 이지약, 무무대야 나천후네. 그리고 황실에서는 동창 소제독이라 불리는 유설연이 나왔고, 차기 금의위 영반 재목이라는 천리포영 남철진이 호남으로 들어왔네.”
“ 많이도 들어왔군.”
연우강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 많은 정도가 아니네. 연 공자. 지금처럼 많은 무인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은 전례가 없었네.”
“ 천마삼경을 노리고 싸우던 자들은 어떻게 됐지?”
“ 생사림 림주였던 마수귀의 유명계가 사라지는 바람에 그쪽은 지지부진한 상태네.”
“ 암살대전은?”
“ 암살대전 역시 마찬가지네. 금릉 연씨 세가 폭발 사건으로 인해 사월림 살수들이 활동을 중지하고 귀환하는 중이고, 범천조화신기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서 외부로 나가 있던 무인들이 호남으로 모여들고 있네.”
“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닌데.”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 무슨 소린가?”
허일구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이왕 싸움을 시작했으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져야 한다는 뜻이야.”
“ 방법이 있는가?”
“ 투쟁 본능을 일깨워 주면 돼.”
“ 투쟁 본능?”
“ 목숨을 물론이고 모든 것을 걸고 화끈하게 한바탕 싸우게 하겠다는 거야, 영감.”
“ 방법이 있다는 말이군.”
“ 우선 이곳 상황부터 정리하자고.”
연우강은 물병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물병이 둥실 떠올라 그를 향해 날아왔다. 들고 있던 찻잔을 앞으로 내밀자 물병은 저절로 기울어지는 듯하더니 찻잔 안으로 물이 떨어져 내렸다.
“ 물이 식었을 텐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궁운화는 얼른 입을 닫았다. 물이 잔 안으로 떨어지는 순간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거였다. 찻잔을 채운 물병은 다시 허공을 날아가 남궁운화 앞에 멈춰 서더니 그녀의 찻잔마저 채웠다.
이번엔 뜨겁게 데워진 물이 물병에서 흘러나왔다.
“ 엄청나네!”
허일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연우강의 무공을 모르는 바도 이니었고, 삼매진화로 물을 데우는 건 자칭 고수라고 하는 자들은 대부분 구사하는 무공이다. 하지만 연우강처럼 허공을 격한 상태에서 삼매진화를 일으키는 무인은 아직 보지 못했다.
“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쳐야 하는 거야, 영감. 싸움도 마찬가지라고.”
연우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