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68화 (68/232)

제 5장 모욕

“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아요.”

삼층 선실로 들어서자마자 남궁운화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왜요?”

연우강은 찢어진 옷을 벗으며 물었다.

“ 그 사람은 동창의 이인자잖아요.”

“ 겁났어요?”

“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연공자와 저는 칼날을 밟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가 꿈을 꾼 것 같다고 말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동창의 이인자면 명나라 최고 권력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요리한 것도 부족하여, 그의 부하 중 한 명을 기절시켜 버렸다. 머리가 열 개라도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하지만 그를 우호세력으로 만들었잖아요.”

“ 사실은 그게 더 불가사의해요.”

“ 나보다 높은 사람이나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를 할 때는 들이댈 여지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먼저 파악해야 하고, 그 다음엔 들이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 들이댈 수 있는 자라면?”

“ 만일 상대가 유설연이 아니고 유 공공이었다면 저와 남궁 소저는 중원을 떠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 유 공공에게는 먹히지 않지만 유설연에게는 먹힌다는 말이군요.”

“ 그렇습니다. 소저.”

“ 그걸 어떻게 알죠?”

“ 대화 중에서도 나왔지만 유설연의 목표는 제독동창입니다. 그걸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대화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그걸 잊으면 이렇게 됩니다.”

연우강은 오른손으로 제 목을 스윽 그었다.

“ 그럼 어르고 달랬던 것들이 전부 계산에서 나온 거란 말이네요.”

“ 더불어 상대방이 빠져나갈 여지를 줘서도 안 됩니다. 유설연 그자의 인생 목표는 제독동창이고, 제독동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대야벌을 없애는 공을 세우는 겁니다. 결국 그의 목표는 저와 같은 대야벌의 몰락이라는 거지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언정 지금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단지 기분 나쁘다고 판을 깰 정도로 머리가 나쁜 자가 아닙니다.”

“ 바로 그거예요. 연공자. 일이 끝나고 났을 때 그가 연 공자를 표적으로 삼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사실 남궁운화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 점이었다.

물론 친구 어쩌고 하는 말이 오가긴 했지만 필요하면 친구도 버리는 게 권력의 속성 아니던가.

“ 그래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날 건드리면 유덕 그 영감처럼 만들어버리겠다고 말입니다.”

“ 그럼 그게.....”

남궁운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덕의 손바닥에 비수를 꽂고 기절까지 시켜버린 그의 행동을 조금 과하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실력을 숨기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때론 난 이런 사람이야 하고 보여줄 필요도 있습니다.”

“ 그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유설연 그가 이곳으로 올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나요?”

“ 꼭 유설연이 아니라도 상관없었습니다. 금의위의 남철진도 차기 영반으로 거론되는 자니까요.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 그런데.....”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우강은 범천조화신기에 대한 소문이 돌자 고서점에 들러 호남에 대한 책자 몇 권을 읽더니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범천조화신기 소문이 나고 동정호를 찾은 첫 번째 사람이 그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도착하고 나서 사흘 만에 유설연이 나타났다.

호남이 작은 마을도 아니고, 범천조화신기에 대한 소문만 돌았는데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곳에서 만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

“ 다른 곳은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이곳으로 온 이유가 궁금하다는 거죠?”

“ 그래요, 연 공자.”

“ 유설연과도 이야기 중에 나왔지만 전설 때문입니다.”

“ 수영궁이라는 그 전설을 말하는 건가요?”

“ 환선도 있습니다.”

“ 수영궁의 전설은 뭐죠?”

“ 아주 오래된 전설입니다.”

연우강은 동정호에 내려오는 수영궁에 대한 전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 그러니까 동정호 어딘가에 궁이 있고, 그 궁은 간혹 그림자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 고기잡이를 나갔던 많은 어부들이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됐다는 거죠. 그때부터 어부들은 그림자로 나타는 궁을 수영궁이라 부르며 매년 중앙절에 제사를 모셨고요.”

“ 그렇습니다.”

“ 그럼 환선은 뭐죠?”

“ 말 그대로 환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배를 말합니다.”

“ 그 두가지 전설과 범천조화신기를 연관하는 건.....”

“ 궁이 나타날 때마다 폭풍이 불었다는 건 무림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고,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능력을 지닌 배라면 노잡이들이 무인이라는 결론이 나오잖아요. 당연히 그 전설은 무림인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 그럼 범천조화신기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는 제삼의 세력이 그들이라고 보는 거예요?”

“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 왜 그런 짓을 하죠?”

“ 무슨 질문이 그래요?”

연우강은 간이 주방으로 가 술병과 술잔을 꺼내 가져오며 되물었다.

“ 범천조화신기는 황궐을 비롯한 네 개 단체를 부릴 수 있는 지존신물 같은 거잖아요. 그걸로 황궐을 비롯한 네 단체에게 명령을 내리는 게 더 낫지 않나요?”

“ 남궁세가의 가주 신물은 뭐죠?”

“ 창궁검이죠.”

“ 그 창궁검을 들고 남궁세가 무인 아무나 붙잡고 내 명령을 들어, 그럼 들어요?”

“ 지금은 들어요.”

“ 전엔?”

“ 거의 먹히지 않았어요.”

“ 지존신물이란 그런 겁니다. 남궁소저. 자격을 갖춘 자가 들고 있었을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거지 아무나 들고 있다고 해서 힘을 주는 게 아닙니다.”

“ 그럼 우리가 얻어도 소용없잖아요.”

“ 물론 우리가 얻는다고 해도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가능합니다.”

“ 누가 가능하다는 거죠?”

“ 첫째는 대야벌의 벌주 담대만승, 두 번째는 조금 전에 만났던 유설연, 세 번째는 금의위 진무사 남철진입니다.”

“ 일구 할아버지는 엄청난 수의 무인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했잖아요.”

“ 명령을 내릴 순 없지만, 뭔가를 요구할 수 있고,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도 있죠. 예를 들어 담대무궁이나 윤허가 그걸 얻게 되면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에게 자신이 벌주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가 얻으면, 대야벌을 탈퇴하면 그걸 넘겨주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연우강은 각 잔에 술을 따라 한 잔을 남궁운화에게 건네주었다.

“ 그럼 범천조화신기에 대한 소문을 낸 자들은 어떤 이익이 있죠?”

남궁운화는 술잔을 받아들며 물었다.

“ 대야벌 무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됩니다.”

“ 수영궁에서?”

“ 그렇습니다. 남궁소저.”

“ 아무래도 한 잔 해야겠어요.”

남궁운화는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 그런데 그들은 누구죠?”

그녀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 아직은 누구라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짐작 가는 단체가 있기는 합니다.”

연우강은 다시 남궁우노하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 그들이 누구죠?”

“ 영세오천의 한 곳인 밀천일 가능성이 구 할 이상입니다.”

“ 미, 밀천이라고요?”

남궁운화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 또 다른 적의 출현을 축하해야겠죠.”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

“ 드디어도착했네.”

담대무궁은 찰랑이는 수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범천조화신기에 대한 소문을 접한 건 보름 전이다. 소문을 듣고 많은 고민을 했다.

그 길로 천외흑막으로 달려가 막주의 목을 잘라 오면 가장 먼저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셈이고, 잠룡들 중 최고 평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벌주의 아들이란 신분이 있는데 굳이 최고 평점을 받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오히려 최고 평점보다는 범천조화신기를 얻어 네 문파의 지지를 얻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원들에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소문을 주시하면서 호남으로 향하는데, 중간에 범천조화신기가 나타난 장소가 동정호라는 소문을 접했다.

등천노사와 함께 전력 질주하기를 닷새, 드디어 물비린내로 가득한 동정호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지금 악양루 근처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등천노사의 셋째인 멸악사노 유옹설과 넷째인 마의혈노 잔석 두 사람을 먼저 보내놓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셋째와 넷째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노중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응설과 잔석이 세 사람 앞으로 날아 내렸다.

“ 어떻게 됐는가?”

노중산은 셋째 멸악사노 유응설을 보면서 물었다.

“ 화선은 물론이고, 동정호 주변엔 빈방이 없습니다. 대형.”

“ 무인들이 많이 모여든 모양이군.”

잠시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노중산은 고개를 돌려 담대무궁을 보았다.

“ 오제께서 나와 있다고 들었네, 마노.”

“ 그분들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 함께 하진 않더라도 일단 대야벌 원들 아닌가. 지금 어디 계신가?”

“ 지금 파릉루에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담대무궁의 시선을 받은 유응설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 가세!”

담대무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다섯 사람이 파릉루에 도착한 것은 반 시진 후였다. 일층 식당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대부분은 도검을 소지한 무인들이었다.

담대만승 일행이 들어서자 차나 술을 마시고 있던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온 자가 담대만승임을 확인한 무인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 이층에 계십니다.”

유응설의 말에 담대무궁은 곧 이층으로 올라갔다. 약간은 어수선해 보였던 일층과는 달리 이층 무인들은 담대무궁 일행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층을 슬쩍 둘러보던 담대무궁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그의 시선이 멈춘 창가 쪽에는 다섯 노인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다섯 노인 앞으로 다가간 담대무궁은 포권을 취했다.

“ 어이쿠! 어서 오시게, 삼공자.”

다섯 명 중 왜소한 노인이 벌떡 일어나며 담대무궁을 맞았다. 반백의 머리에 검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는 이자는 오제의 대형 격인 북천검제 해상이었다.

“ 먼 길을 오셨소, 삼공자.”

뒤이어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우람한 덩치와 관운장 같은 탐스러운 수염을 자랑하는 이 사람은 남천도제 곽유산이었다.

해상은 야궐 출신이고 곽유산은 사자림 출신이지만 원래 소속이 범천담대세가였던 두 사람은 담대무궁을 잘 알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두 분.”

“ 이 친구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여기 창을 들고 있는 친구는 동천창제 상온걸이고, 주먹이 다른 사람보다 두 배나 커 보이는 이 친구는 서천권제 이적천, 하체가 유난히 긴 저 친구는 중천비제 운장이네.”

“ 처음 뵙습니다. 담대무궁입니다.”

“ 오제다!”

“ 오제?”

여기저기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상당수가 대야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천상천 천신군 처소에 틀어박혀 사는 오제의 얼굴을 몰랐던 무인들이 많았던 탓이다. 무인들은 놀란 눈으로 오제 일행을 보았다. 설마 그들까지 이 자리에 나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바로 그때 무인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름 아닌 구룡대군 윤허였다.

“ 하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오제 선배. 전 구룡대군 윤허라고 합니다.”

벌떡 일어난 윤허는 오제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 오! 자네가 바로 무궐의 기린아라는 구룡대군이구먼. 만나서 반갑네. 그런데 자네도 범천조화신기를 얻어로 온 건가?”

북천검제 해상의 시선이 빠르게 윤허의 전신을 훑었다. 윤허를 훑던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잠룡들 중 담대무궁을 따를 자는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윤허가 은연중에 발산하는 기운도 담대무궁 못지 않았다.

“ 그렇습니다. 선배.”

“ 범천조화신기를 얻어 어디에 쓸 참인가?”

“ 주인들게 정중하게 돌려줄 참입니다.”

“ 허허허! 그럼 우리와 부딪칠 수도 있겠구먼.”

“ 그래서 미리 인사를 드리는 겁니다. 소생이 무례하게 굴더라도 이해하 달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 응? 프! 하하하하! 으! 하하하하!”

해상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낮게 시작했던 그의 웃음이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음공으로 돌변하여 윤허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흠칫 얼굴이 굳어진 윤허는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천천히 밀어냈다. 그의 손이 자색으로 물들고, 커다란 태극문양이 가슴 앞에 나타났다.

자색 형태의 문양이 모습을 완전하게 갖추는 순간 소리 없는 암경이 태극 문양을 강타했다.

끼이익!

잠시 버티는 듯하던 윤허의 신형이 뒤로 밀리면서 바닥이 파이는 거북살스러운 소성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윤허 뒤편에 있던 탁자들까지 밀리며 객잔 안은 엉망으로 변했다. 윤허 뒤편에 있던 무인들은 슬쩍슬쩍 물러나 자리를 피한 채 상황을 주시했다.

“ 크윽!”

탁자와 함께 일 장 가량 물러난 윤허는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 막아냈군.’

‘ 막았어.’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무인들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웃음으로 공격을 했던 해상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직 잠룡 딱지도 떼지 못한 윤허가 공격을 막아낸 건 의외의 사건이었다.

“ 자하신공이더냐?”

해상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오 성의 공력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저렇듯 쉽게 막아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선배.”

자세를 바로 한 윤허는 깍듯한 포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그 정도면 큰소리칠 자격이 충분하다. 윤허. 하지만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다음엔 오 성이 아니라 팔 성의 공력을 사용할지도 모르니까.”

“ 그럼 나도 구 성의 공력으로 막아야겠습니다. 더불어 범천조화신기를 두고 선배와 마주하게 된다면, 난 선배를 없애기 위해 내 동료들과 함께 협공을 시도할 겁니다. 선배.”

윤허는 미소를 머금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구 성의 공력을 사용하겠다는 윤허의 말에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해상의 수좌인 오제에는 전대 림주 두 명이 있다. 그 말은 곧 해상이 전대 림주보다 무공이 더 강하다는 뜻도 된다. 구 성의 공력을 사용하겠다는 윤허의 말은 조금 전 방어하면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 말의 진실 여부를 떠나 해상 앞에서 저렇듯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배포가 더 놀라웠다.

일행은 긴장한 얼굴로 해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짝짝짝! 짝짝짝!

그러나 해상의 대답 대신 박수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깨트렸다. 박수소리 또한 상당한 내공이 가미돼 있었다. 박수를 친 사람은 해상 옆에 앉아 있던 남천도제 곽유산이었다.

“ 훌륭한 무공이네, 젊은이. 자네 같은 젊은이가 많다는 건 우리 대야벌의 홍복이네. 앞으로도 계속 정진해 주기 바라네.”

“ 감사합니다. 선배.”

그만 끝내자는 의미로 받아들인 윤ㅁ허는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하고는 뒤편으로 밀려났던 탁자를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

“ 전 저 친구에게 가 보겠습니다. 어르신.”

담대무궁은 오제 일행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윤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영악한 놈.’

노중산은 담대무궁을 따르며 윤허를 쏘아보았다.

윤허가 오제를 도발한 건 의도적이었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이라고 해봐야 팔 할 이상은 대야벌 출신일 테고 만일 싸움이 벌어졌을 때, 상대가 오제거나 황궐 무인이라면 협공을 하는 것도 꺼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범천조화신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협공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함으로 해서, 오제를 비롯한 일명 상급자로 불리는 이들을 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더불어 오제의 수장인 북천검게와 대결을 함으로써 많은 무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번에 들어온 잠룡들의 수준이 역대 어느 잠룡보다 강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 없애야 할 놈이 한 명 더 늘었군.’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천천히 담대무궁을 따랐다.

윤허는 주변 무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 저 자는?’

윤허를 쳐다보던 노중산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윤허의 자리엔 그의 부하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막 자리에 앉은 윤허에게 차를 따라주는 자는 팔 조 조장인 무무대야 나천후였다.

“ 하하하! 오랜만이오, 윤 형. 나 형도 함께 있었구려.”

담대무궁은 활짝 웃으며 윤허와 나천후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 앉으시오. 담대 형. 그런데 임무는 포기한 거요?”

윤허는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 하하하! 임무는 내가 없어도 나머지 조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윤 형. 윤 형은 어떻게 하고 이곳으로 온 거요?”

“ 나도 마찬가지외다, 담대 형.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 한잔 어떻소?”

“ 그거 좋지요. 주인.”

담대무궁이 활짝 웃으며 주인을 불렀다.

“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한편에 대히하고 있던 점소이가 쪼르르 뛰어왔다.

“ 여기 파릉전어석하고 모대주 다섯 병만 가져오너라.”

“ 알겠습니다. 손님.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점소이는 화살처럼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 그동안 어떠셨소?”

담대무궁은 윤허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과거 연우강에게 당할 때 함께 자리했던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윤허의 기도가 그 당시와는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었다. 일취월장, 일신우일신이란 말이 그에게 해당하는 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조금 전 해상의 공격을 무리없이 받아내는 광경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 천무비고와 승천비고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소이다.”

“ 비고에서 기연을 얻었다는 말이구려.”

“ 그런 셈이오. 담대 형. 담대 형도 그다지 나빠 보이진 않소이다. 그려.”

“ 하하하! 나야 뭐 늘 그렇잖소. 승천비고나 천무비고에 들어가도 특별히 볼 것도 없고... 주로 명상을 하며 지냈소.”

“ 하하하! 이거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외다. 그런 천무비고에서 기연을 얻는 나는 뭐가 되는 거요?”

“ 그거야 본인 능력이 아니겠소. 아무튼 오늘 술은 내가 사리다.”

담대무궁의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어렸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 탓이었다.

‘ 말이 통했나?’

담대무궁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치하 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천무비고와 승천비고 이야기를 꺼낸 윤허를 깔아뭉갠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윤허가 주목을 받게 되자 갑자기 다급해졌다. 물론 윤허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같은 장소에 있는 이상 그가 주목받는 걸 그냥 둘 수는 없었다.

‘ 이런 제길!’

담대무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무인들은 자신의 말에 놀라 입을 닫은 게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은 전부 계단으로 향해 있었는데, 네 명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앞선 두 사람을 쳐다보던 담대무궁은 넋을 잃었다.

수많은 여자를 보았고, 또 만나도 봤지만, 저들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이었다.

환관이 쓰는 관처럼 생긴 모자는 이마 위쪽과 정수리 위쪽을 뾰족하게 만들고, 중간에 오색 줄을 교차시켜 문양을 주었는데, 줄의 끝은 마치 장식처럼 귀를 지나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사슴과 학이 어우러진 붉은색 장포는 걸을 때마다 사각사가 소리를 내며 광채를 토해낸다.

마치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를 보고 있는 듯했다.

“ 내가 그랬잖아, 자식아. 너처럼 생긴 사내새끼가 화장까지 하면 변태새끼들만 양산한다고.”

“ 호호호! 사내들이 넋을 잃은 얼굴로 날 쳐다보면 얼마나 흥분되는지 넌 모르는구나. 계집들이 뜨거운 눈길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흥분돼, 사은.”

“ 변태 같은 놈.”

“ 나, 남자?”

담대무궁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남자라면 지금껏 사내를 보고 넋을 잃었다는 말이 된다.

갑자기 열이 확 솟구쳐 올랐다.

“ 호호호! 맞아요. 담대 소협. 나와 성연은 남자에요. 그렇다고 해도 담대 소협의 뜨거운 눈빛이 기분 나쁘진 않으니까 너무 서운해하진 마세요.”

유설연은 웃으며 담대무궁이 앉아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 조심해, 설연. 널 덮칠지도 몰라.”

나아가려는 유설연의 옷깃을 잡으며 연우강이 이죽댔다.  연우강 일행이 있는 곳과 담대무궁이 앉은 탁자 사이의 거리는 일 장 가량이었다.

담대무궁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자들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자들은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하다. 더불어 자신의 실수는 상대방 때문에 기인하는 것으로 단정짓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바로 상대를 꼼짝못하게 내리누르는 강력한 힘이다.

지금 담대무궁이 그런 상황이었다.

조금 전 유설연을 보며 넋을 잃었던 것은 사내를 여자로 오인한 자신의 눈 때문이 아니라 계집처럼 꾸미고 있는 유설연 탓이라며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시켰다.

“ 누구냐?”

담대무궁 역시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유설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담대무궁의 목소리에 실린 내공은 무공을 아예 모르거나 삼류 무인이었다면 한순간에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상대는 동창 소제독인 유설연.

위협적인 표정은 물론이고, 내공을 머금은 목소리가 먹힐 상황이 아니다.

“ 이런, 화가 많이 났나 봐. 사은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오히려 배시시 웃으며 조금 전보다 더 여자 같은 행동을 하여 담대무궁을 도발했다.

“ 내가 그랬잖아. 사내새끼들은 원래 얼굴이 예쁘면 아랫 도리에 달린 걸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드는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 그러다가 아래쪽에 있는 그걸 확인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조금 전까지 잘생긴 얼굴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며 헐떡거렸다는 사실은 싹 잊어버려.”

“ 그렇게 끝나는 거야?”

“ 이 많은 사람들이 보았는데, 어떻게 그냥 끝내.”

“ 시간을 되돌리면 모를까, 이미 침까지 질질 흘렸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숨겨?”

“ 남탓공황증이라고 들어봤어?”

“ 남탓공황증이 뭐지?”

“ 모든 잘못을 상대방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들이 주로 걸리는 병이야.”

“ 그러니까, 자기는 완벽한 사람이라서 실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

“ 바로 그거야. 설연.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야.”

“ 그럼 조금 전 침을 질질 흘린 것도 내 책임이라는 거네?”

“ 넌 얼굴이 잘생겨서 상대방에게 혼란을 준 죄를 지게 된 거야.”

“ 그런데 책임은 어떻게 전가하는데?”

“ 남탓공황증과 항상 함께 나타나는 증상이 분노공황증이라는 건데 말이야.”

“ 화를 내서 책임을 전가시킨다는 뜻이구나.”

“ 그게 아니면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없잖아.”

“ 분노공황증의 증상이 심하면 상대방을 죽이기도 하겠네?”

“ 넌 그런 걸 즐기는 놈이잖아.”

“ 호호호! 맞아. 그런 죽음이라면 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

“ 아예 지금 죽여줄까?”

“ 난 처음 만났을 때 침을 질질 흘리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안 돼.”

“ 누구냐고 물었다!”

담대무궁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유설연과 연우강을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연우강과 유설연은 담대무궁의 외침을 무시했다.

“ 지금이라도 침을 질질 흘려줄까?”

“ 됐네요.”

“ 감히 나 담대무궁을......”

“ 이 녀석 거시기가 없소. 담대 소협.”

막 장력을 쳐내려고 하는데,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담대무궁은 급하게 내공을 거둬들였다.

“ 무슨 소리냐?”

담대무궁은 다시 물었다.

“ 호호호! 흥분하긴 했나보다. 사은. 무적뇌화결을 육 성까지 익힐 정도면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 듯한데 거시기가 없다는 말이 뭘 뜻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걸 보면 말이야.”

“ 무공을 익히는 기술하고 머리는 아무런 상관 없다는 것도 몰라?”

“ 정말?”

“ 당연히 상관없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운 좋은 종자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벌모세수하고, 개정대법으로 내공을 전이 받거든. 그럼 웬만한 무공은 육성까지 다 익힐 수 있어. 그게 업둥이하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종자들하고 차이점이야.”

“ 그럼 넌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거네”

“ 두말하면 잔 소리지.”

“ 호호호! 자화자찬 병은 고칠 방법이 없는 지독한 난치병이야, 사은.”

“ 그래도 느끼만족증보다는 낫지.”

“ 느끼만족증?”

“ 느끼한 시선을 받으면 흥분하는 체질을 말하는 거다.”

“ 하하하! 호호호! 그거 아주 멋진 병명이다.”

‘ 이것들이!’

급기야 담대무궁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내기를 끌어올려 양손에 집중했다. 무적뇌화결을 끌어올린 그의 양손에 푸른 뇌기가 일렁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이혈노 진석이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삼공자.]

“ 이런 개호로잡놈들이!”

잔석은 전음을 보낸 다음 곧바로 연우강과 유설연을 향해 뛰어갔다. 그가 몸을 날린 이유는 담대무궁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또한 유설연과 우성연을 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욕정에 숨을 헐떡거렸던 것이었다. 사내 녀석들에게 당했다는 생각을 하니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반 장 거리를 남겨둔 지점에서 그는 양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렸다.

“ 개잡놈들!”

잔석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 위험해, 소제득!”

연우강은 유설연의 몸을 뒤로 끌어당김과 동시에 오른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소제독. 식경 정도 시간이 흘렀다.

참으로 절묘한 순간에 흘러나온 외침이었다.

환관이 쓰는 관과 비슷한 모자를 쓰고, 아래쪽에 물건이 없고, 계집의 목소리도 그렇다고 사내 목소리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소제독이란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자. 보통 사람들이라면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안쪽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대야벌에서도 한가락하는 강자들이다. 그들은 소제독이란 말에서 유설연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 혈노! 멈춰! 그는 동창의 소제독이다!]

담대무궁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다급하게 전음을 보냈다.

“ 억!”

잔석은 신음을 내뱉ㅇ며 오른손에 주입했던 내공을 거둬였다. 하지만 너무 창졸간에 들려온 전음이라 나아가는 속도는 미처 늦추지 못했다.

“ 감히 소제독을 시해하려고.....”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잔뜩 구부리고 있던 연우강의 다리가 활짝 펴지며 오른발이 잔석의 명치에 박혔다.

범천담대세가의 무인이고 등천사노의 일인이라고 해도 내공을 전혀 끌어올리지 않는 무방비 상태에서 타격을 당하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연우강이 작정을 하고 나선 상황이다.

퍼억!

연우강의 다리가 잔석의 뱃속에 박히자 잔석의 신형은 엉덩이가 뒤로 쑥 빠지고, 상체와 하체는 거의 붙은 것처럼 구부러진 채 날아갔다.

“ 크아악!”

콰앙!

처절한 비명에 이어진 잔석의 신형은 창문을 부수며 객잔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 막내야.”

노중산이 질겁한 얼굴로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멈추라고 했잖아, 사은!”

유설연은 전음을 보낸 것처럼 연우강에게 말했다.

“ 힘 조절이 내 마음대로 되면 난 벌써 이기어검술을 펼칠 수 있는 고수가 됐겠다. 인마. 그나저나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사은.”

“ 자기 잘못도 아니고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나선 건데 죽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 그것도 옳은 말이긴 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소제독이라는 거야. 사은. 방근 그자는 소제독을 암살하려고 했던 암살범이잖아.”

암살범이라는 말이 유설연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실내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침묵에 휩싸였다.

전후 상황을 따지면 암살을 시도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창 밖으로 날아간 자는 분명 소제독을 향해 살수를 감행했다. 진행 상황이 어찌 됐든 간에 암살범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 그럼 지금부터 암살범의 배후를 색출해 내야겠네?”

“ 당연히 그래야지.”

유설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휙!

바로 그 순간 조금 전 창문 아래로 몸을 날렸던 노중산이 날아올랐다. 그가 안고 있는 잔석의 팔이 힘없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미 죽었다는 의미였다.

잔석을 내려놓은 노중산은 유설연과 연우강을 향해 돌아섰다.

“ 내 동생이 죽었다, 놈들.”

노중산은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전 내공을 끌어올린 듯 그의 발은 바닥을 푹푹 뚫고 들어갔다.

“ 범천담대세가 가주가 나 소제독 유설연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단 말이더냐?”

유설연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했다.

더불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광포하게 변하며 주변 대기가 픽픽 터져나갔다.

주변에 있던 무인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설마 유설연의 몸에서 저런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올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탓이다. 그 앞에서 살기를 흘리고 있는 노중산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그의 기운은 강했다.

“멈추게 마노.”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담대무궁은 결국 노중산을 말렸다. 분하지만 말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정말로 범천담대세가는 동창 소제독 암살범으로 찍히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될 터였다.

“ 삼공자님.”

“ 마노도 들었겠지만 저분은 동창의 소제독이시네. 비록 실수였다고 하지만 우린 큰 잘못을 저질렀네.”

담대무궁은 유설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무슨 의미냐?”

유설연은 여전히 싸늘한 기운을 풀지 않으며 물었다.

“ 범천담대세가는 결코 소제독을 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소제독. 실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여기 사은이 없었다면 난 죽을 수도 있었다. 담대무궁. 그런데 실수였다는 말 한 마디로 그냥 넘기자는 말이더냐. 너희 범천담대세가가 동창의 소제독을 우습게 볼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가문이란 말이냐?”

“ 소제독!”

담대무궁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 호호호! 담대 소협. 우리 지부장님은 마음이 너그러운 분이세요. 지금 저러는 것도 자신의 명예 때문이 아니라 동창의 명예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무릎 꿇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면 용서해 주실 거예요.”

유설연 옆에 있던 우성연이 훈수를 두었다.

털썩!

우성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담대무궁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자 노중산 일행도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 용서해 주십시오. 소제독.”

“ 용서해 주십시오.”

먼저 담대무궁이 용서를 빌고 이어 등천사노 세 명이 바닥에 머리를 대며 소리쳤다.

“ 흥!”

유설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 모르고 그런거니까 그만 용서해 줘라.”

“ 난 상관없어. 사은. 하지만 동창의 명예 때문에....”

“ 용서하십시오. 소제독.”

“ 용서하십시오.”

“ 저렇게 비는 데 용서해라, 인마. 동창 입장에서 범천담대세가 따윈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무림인 입장에서 보면 범천담대세가는 황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그런 집안의 아들놈이 무릎을 꿇는 것도 쉬운 일이 아냐. 그리고 우린 술을 먹으러 왔잖아.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그만 하고 보내.”

“ 그렇게 하지 뭐.”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담대무궁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거라.”

“ 물러가겠습니다. 소제독.”

“ 감사합니다. 소제독.”

담대무궁을 비롯한 등천사노는 잔석의 시체를 챙겨들고 일층으로 향했다. 그들이 나가자 다른 자들 또한 하나둘 자리를 떴고, 남은 사람은 연우강 일행뿐이었다.

“ 역시 권력자는 외로운 사람이 맞아.”

유설연은 피식 웃으며 조금 전 담대무궁 일행의 자리에 앉았다.

“ 이제 어떻게 할래?”

연우강은 유설연 건너편으로 앉으며 물었다.

“ 뭘 어떻게 하냐는 거지?”

“ 이제 담대무궁뿐만 아니라 오제 그놈들도 으슥한 곳에서 널 만나면 바로 살수를 펼칠 거다.”

“ 네가 옆에 있을 거잖아.”

“ 나보고 처리해 달라고?”

“ 잔석이란 놈을 없앤 게 그 때문 아냐?”

“ 그런 건 아냐.”

“ 그럼?”

“ 기회가 났을 때마다 정리를 하자는 주의거든.”

“ 그래 가지고 언제 다 정리하려고?”

“ 백수가 좋은 점이 뭔지 알아? 남는 게 시간이라는 거다. 더구나 난 아직도 서른도 되지 않았잖아.”

“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결한다는 거야?”

“ 해결이 아니라 정리.”

“ 어쨌든.”

“ 내가 가진 장점인데 최대한 활용해야지.”

“ 젊은 게 장점이라고?”

“ 젊음이 아니라 시간이 많은 게 장점이라니까 그러네.”

“ 끄응! 주인장, 여기 술하고 안주 가져와!

유설연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아래쪽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조금 전에 담대무궁 그놈이 시킨 걸로 가져와라.”

뒤이어 연우강이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 파릉전어석인데 괜찮겠습니까?”

“ ....!”

“ ......!”

“ 보기 싫은 놈!”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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