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새로운 무공 마라천류
중양절은 양을 나타내는 숫자가 두 개 겹치는 날이라고 하여 예로부터 명절로 여겨왔다. 많은 이들은 이날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고 국화전을 부쳐 먹기도 하고, 조상에 제를 지내곤 한다.
동정호 어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려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음식을 장만하여 동정호 곳곳에서 제를 지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저녁 무렵부터는 강풍이 불어오기 시작햇다. 마치 바다에서처럼 파도가 치고 호수를 채우고 있던 물은 거칠게 요동쳤다.
“ 와우! 호수에서도 파도가 치네요.”
남궁운화는 허옇게 일어나는 수면을 보며 놀란 듯 소리쳤다. 그녀와 연우강은 선실 삼층 지붕에 만들어진 전망대로 올라와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파도가 몰아치는 호수는 장관이 따로 없었다.
“ 무섭지 않습니까?”
연우강은 전망대 가장자리에 있는 난간을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거친 파도가 밀려오면서 배가 상하로 요동치고 있었다.
“ 아주 재미있는데요.”
남궁운화는 출렁이는 배에 몸을 맡기며 깔깔거렸다.
철썩!
커다란 파도가 측면을 때린 듯 갑자기 배가 우현으로 크게 기울었다.
“ 어머!”
한순간에 중심을 잃은 남궁운화는 주르르 밀려갔다.
그녀는 손을 빙빙 돌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배가 기울어지는 각도가 워낙 커 계속해서 뒤로 밀려날 뿐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 쯧!”
연우강은 혀를 차며 마라천력을 일으켜 남궁운화를 끌어당겼다. 마침 기울었던 배가 다시 원래대로 복원되면서 중심을 잡으려 몸부림치던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향해 달려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연우강이 마라천력으로 끌어당기고 남궁운화는 달려가는 상황이니 그 다음 결과는 뻔했다.
턱!
힘차게 달려가던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품에 철썩 안겼다.
“ 앗!”
남궁운화는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 음! 머리에서 물 냄새가 납니다. 남궁 소저.”
연우강은 코를 남궁운화의 머리에 대고 킁킁거렸다.
“ 미, 미안해요, 연 공자.”
남궁운화는 어쩔 줄 몰랐다. 가슴은 둥둥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 시작됐습니다. 남궁 소저.”
“ 네?”
남궁운화는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객잔에 있던 자들이 드디어 파도치는 호수로 뛰어들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 정말요?”
남궁운화는 몸을 돌려 호숫가로 시선을 주었다.
선착장 주변에 있던 객잔을 비롯하여 화선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 서둘러라!”
빗속에서 나직한 외침이 들려왔다. 곧이어 십여 명씩 탄 배 수십 척이 파도를 뚫고 나아갔다.
“ 수영궁이 군산에 있어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 주로 중양절 파도치는 날에 군산 근처에서 목겨됐다고 하니까, 그 근처에 있을 겁니다.”
“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궁운화는 다시 호숫가로 시선을 주었다.
배들은 계속해서 선착장을 떠나고 있었다.
배들이 나가는 건 이곳 선착장뿐만이 아닐 테다. 선착장이란 선착장은 물론이고 미리 군산으로 들어가 있는 자들까지 보물을 찾아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 보물은 인연이 닿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빨리 간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호수로 나가면 고생만 진탕 하게 됩니다.”
“ 그런데 범천조화신기를 얻으면 어떻게 할 거죠?”
문득 궁금했다.
“ 범천조화신기를 얻으러 온 게 아닙니다.”
“ 그럼요?”
“ 범천담대세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온 겁니다. 그리고 처리할 놈도 잇고요.”
“ 그럼 누구에게 줄 생각이죠?”
“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지약 언니는 어때요?”
“ 소명공주요?”
“ 네.”
“ 그녀를 줘도 상관은 없는데......”
“ 그걸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범천조화신기가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배후가 대단한 자가 가져야 합니다.”
“ 아래층에 있는 그분 정도?”
“ 그렇죠.”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결과를 원하는 거죠?”
“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는 없죠.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한 쪽은 약해지는 게 힘이잖아요.”
“ 너무 이용해 먹는 거 아닌가요?”
“ 그 녓거이 기분 나빠 할까 봐 겁나요?”
“ 범천담대세가의 삼공자도 꼼짝하지 못했잖아요.”
“ 약점이 많은 자는 권력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 약점이라면 가족을 말하는 건가요?”
“ 가족도 있고, 신분도 있고, 아무튼 가진 게 많으면 약점도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 그럼 담대만승이 너무 밀리는 거 아닌가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우강의 마를 듣고 있자니 담대만승은 막다른 길에 몰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아직은 계획일 뿐입니다, 남궁 소저. 실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하지만 연 공자는 한 번 뱉어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 제 의지대로 될 수 있는 건 반드시 지키지만 불가항력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그런데 안겨 있으니까 좋아요?”
“ 킥!”
남궁운화는 픽 웃으며 연우강의 품에서 벗어났다.
“ 그 웃음의 의미는 뭐죠?”
“ 연 공자를 따라 다니다 보니 닮아 가는 모양이네요.”
“ 날 닮는다는 건?”
“ 능구렁이가 다 됐다는 뜻이네요.”
“ 그건 능구렁이가 돼간다고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알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일단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고, 파도가 잠잠해지면 그때 떠나도록 하죠.”
“ 차는 제가 준비할게요.”
전망대를 떠난 두 사람은 선실로 들어왔다.
내공을 끌어올려 삼매진화로 옷을 말리고 차를 마시고 있을 즈음, 아래층에 있던 유설연과 우성연이 올라왔다.
“ 분위기 좋네.”
유설연은 두 사람을 보며 활짝 웃었다.
“ 남녀가 한 방에 있으면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잖아.”
“ 여자였어?”
유설연은 두 사람 곁으로 와 앉았다.
“ 설마 몰랐다는 건 아니겠지?”
“ 말을 해줄 때까지 기다렸지, 뭐.”
유설연은 남궁운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 찻잔 가져올게요.”
남궁운화는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누구지?”
유설연의 시선이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 네가 짐작하고 있는 그 사람.”
“ 남궁세가?”
“ 응.”
“ 그럼 남궁세가도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거야?”
찻잔을 준비하던 남궁운화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 건드리 거나 있어?”
“ 네가 옆에 있으면 앞으로 무림 최강 세력이 될 수도 있잖아.”
“ 설연, 네 일만 방해하지만 않으면 되잖아. 더불어 가끔 기름칠도 좀 하면?”
“ 호호호! 아무튼 뇌물을 주겠다는 말을 너처럼 공공연하게 하는 녀석은 살다 살다 처음이다.”
유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차 가져왔어요.”
남궁세가에 대한 이야기가 좋게 끝나는 듯하자 마음을 놓은 남궁운화는 찻잔을 유설연과 우성연 앞에 놓았다.
“ 노잡이들은 데려왔어?”
연우강은 두 사람의 찻잔에 물을 따르며 물었다.
“ 전부 데려왔다.”
“ 배를 조종해 본 자들도 있을까?”
“ 천밀사위는 아이 낳는 것만 빼고 모든 걸 다하는 자들이야.”
“ 제일 중요한 걸 못하는 녀석들이네.”
“ 호호호! 글쎄 너 같은 속물은 그걸 중요하게 여길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아야지.”
“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감당하기엔 파도가 너무 거칠어.”
“ 방법이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마.”
“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건데?”
똑똑똑!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 불렀어?”
“ 방금 말한 방법을 불렀다. 들어와.”
유설연은 밖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 부르셨습니까, 소제독님.”
안으로 들어온 육대는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이 배 움직인다고 했지?”
“ 그, 그렇습니다. 소제독님.”
“ 배를 조종해 본 경험은 있어?”
“ 이 사업을 하기 전에 바다에서 십여 년 동안 배를 탔었습니다.”
“ 내가 알기론 장강에서 배를 탄 걸로 아는데, 아냐?”
유설연은 육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 억!”
육대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 장강수룡 육대. 장강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황룡채의 채주로 활동. 십오 년 전 장강수로채 총채주로 추대됐고, 십 년 전 장강 수적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때 실종됐다고 알려진 자, 동창 문서엔 그렇게 기록돼 있던데 맞아?”
털썩!
육대는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 손 씻은 지 십 년이 지났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소제독님.”
“ 과거 부하들은 아직 만나느냐?”
“ 가, 간혹 만나 술 한 잔 하곤 합니다.”
“ 지금 당장 불러와라.”
“ 알겠습니다. 소제독님.”
육대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갔다.
“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조사를 하고 다니는 거냐?”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유설연을 보았다. 자신 또한 무공을 익힌 무공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림에 염증을 느끼고 은퇴한 사람으로만 생각했지 장강수로채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 육대 그 녀석은 특이한 경우잖아.”
유설연이 웃으며 말했다.
“ 특이한 경우라는 건?”
“ 이 배는 일반 어선이 아니고 전투선을 개조한 거야.”
“ 그 정도로는 부족한데?”
“ 더불어 선착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잖아. 그 두가지만 해도 조사해 볼 가치는 충분해.”
“ 아무튼 권력층에 있는 녀석들은 사귀어 놓으면 편한 게 많아서 좋기는 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나갔던 육대가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 이십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 건 한 시진 후였다. 다시 출발 준비로 반 시진을 더 까먹은 육대는 보고를 하기 위해 삼층으로 올라왔다.
“ 내가 도와줘야 할 게 있나 보지?”
유설연이 육대를 보며 물었다.
“ 원래 이층인데 삼층으로 개조를 하는 바람에 배의 무게 중심이 위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 천근추로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소제독님. 매번 그럴 필요는 없고, 큰 파도가 측면으로 밀려올 때만 조금씩 해주면 됩니다.”
“ 알았다, 가자.”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육대와 함께 선장실로 향했다. 선장실은 객질 맨 후미의 오른편에 치우쳐 만들어져 있었다.
“ 원래는 중앙에 있었는데, 삼층으로 올리는 바람에 이편으로 옮겼습니다.”
연우강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육대는 선장실이 선미 한편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 출발하게.”
“ 알겠습니다. 출발한다!”
육대는 아래쪽을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출바알!”
아래쪽 노잡이 칸으로부터 복창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배 좌우 측에서 노가 튀어 나왔다.
쿵!
그리고 고수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노들이 일제히 물살을 갈랐다.
츄악! 츄악!
북소리가 잦아지고 노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방향을 바꾼 배가 파도를 헤치며 군산으로 향했다.
잠시 육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선장실을 나와 선수로 향했다. 다른 배들이 출발할 때보다는 많이 잠잠해졌다고 하지만 파도가 거친 듯 배는 심하게 요동쳤다.
갑판에는 천밀시위 오십 명이 절반으로 나누어 좌우 측에 포진하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올 때 천근추로 균형을 잡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그들을 지나쳐 선수까지 간 연우강은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 뭐 하는 거예요?”
뒤따라 온 남궁운화가 물었다.
“ 언젠가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 뭘요?”
“ 폭풍의 속을 달리는 배의 선수에서 뒷짐을 쥔 채, 성난 바다를 쳐다보는 거 말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 킥!”
남궁운화는 낮게 웃었다.
보통 사람은 지금 같은 경우라면, 설사 아니더라도 심오한 무공 구결을 떠올리기 위해 나왔다고 할 텐데 그는 단지 멋있게 보이기 위함이란다. 터무니없이 엉뚱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다. 서 있는 모습이 멋있는게 아니라 말이 더 멋있는 사람.
“ 왜 그러죠?” 둥그레졌다.
“ 무공을 연구하기 위해 이곳에 서 있다고 하면 좀 더 멋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그럴까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수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을 받은 물이 둥실 떠올랐다. 아마도 대야에 담는다면 한 대야 정도 될 듯했다.
그는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물을 가만히 응시하며 머릿속으로 검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그 앞에 있던 물이 검 형태로 변했다.
“ 별것 아니었네.”
연우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마라천력은 악마의 힘이라고 불리고, 주화입마 때 생성되는 흑풍과 결합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으로 변했다. 하지만 마라천력은 주가 아니고 보조적인 역할만 할 뿐이다. 더불어 마라천력만 놓고 본다면 웬만한 무인이면 펼칠 수 있는 허공섭물과 다를 바 없다.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그동안 그의 화두였다. 즉 마라천력이 주가 되고 무공이 종이 되는 새로운 힘. 그 힘을 창조하고 싶었다.
그 시작이 바로 눈앞의 물이다.
연우강은 검 형태로 변해 있는 물을 다시 주시했다. 그러자 그것은 이내 도 형태로 변했다.
“ 저건.....”
연우강을 지켜보고 있던 남궁운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연우강 앞에 떠 있는 물이 갖가지 모양으로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대부분 무기 모양이었다.
검이었다가 도가 되고, 창이 됐다가 방패가 되는 등 수많은 무기로 변했다.
“ 앗!”
신기한 얼굴로 물을 지켜보던 남궁운화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온갖 모습으로 변하는 물이 갑자기 자신의 얼굴로 변한 것이었다.
단지 얼굴 형태만 이루어졌다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놀랍게도 물로 만들어진 자신의 얼굴은 찡그리고, 웃고, 우는 듯 여러 가지 표정을 연출하고 있었다.
“ 전신상을 만들까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남궁운화를 보았다.
“ 그것도 가능해요?”
“ 물론입니다. 보세요.”
연우강은 슬쩍 눈을 감았다.
“ 연 공자.”
남궁운화는 뾰족 고함을 지르며 연우강의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얼굴 아래쪽으로 드러나는 몸은 이제 가슴까지 밖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옷을 입은 상태가 아니라 나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봉긋 솟은 가슴이 자신의 가슴을 옮겨 놓은 것처럼 닮아 있었다.
“ 원래 여자 몸 자체가 예술입니다. 남궁 소저.”
“ 그, 그래도 저건 아니잖아요.”
“ 싫어요?”
“ 아무튼 옷 입혀줘욧!”
“ 하기야 바람도 불고 비도 오니까 좀 춥기는 하겠네요.”
연우강은 히죽 웃으며 다시 검 형태로 만들었다.
‘ 마라천력으로 무기 형태를 만들어냈으니까......’
연우강은 천천히 검 형태를 띄고 있는 물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먼저 표면을 내기로 감싼 다음 그 안쪽으로 천천히 내기를 밀어 넣어 보았다.
퍽!
하지만 물 안쪽을 내기로 채우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절반도 채 밀어넣지 않았는데 검이 터져나가며 모양이 흐트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떨어져나간 물방울을 다시 모아 검 형태를 만들었다. 이번엔 전보다 좀 더 신중하게 접근했다. 하지만 물은 검을 만드는 재료인 쇠와는 달랐다. 쇠는 단단한 성질 때문에 웬만큼 내기를 밀어 넣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데, 물은 약간만 초과한다 싶으면 그냥 싶으면 그냥 터져 나가고 만다. 외부를 둘러싼 내기도 마찬가지였다. 그것 또한 물을 둘러싼 것이기에 약하기 짝이 없었다.
“ 지금 뭐하고 있는 거죠?”
궁금한 얼굴로 연우강을 지켜보던 남궁운화가 물었다.
“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 무기라고요?”
“ 그렇습니다.”
“ 물로 무길르 만든다고요?”
남구운화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 네.”
“ 그게 가능해요?”
“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실제 만들려니까 쉽진 않네요.”
“ 어떤 이론인데요.”
“ 쇠로 된 검이나 저 녀석이나 형태는 검이지 않습니까?”
“ 그런데요?”
“ 검에 내기를 밀어 넣는 것처럼 저 녀석에게도 내기를 밀어넣어 보려고요.”
“ 내기를 밀어 넣어서 쇠처럼 단단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 쇠처럼 단단하게 만들 거라면 굳이 물을 사용할 이유가 없지요. 물의 성질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려니까 어려운 거죠.”
연우강은 또다시 물로 만든 검에 내기를 집중했다. 이번엔 외벽에서 감싸지 않고 내부부터 조금씩 채워 나왔다. 물이 가득 든 대야 안에 돌을 집어넣으면 물이 넘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쪽으로 내기가 들어가자 물로 만든 검은 조금씩 커졌다. 연우강은 물의 검 내부로 밀어넣은 내기를 조금씩 압축해 보았다. 내기가 압축되면서 검의 크기는 다시 줄어들었지만 안쪽의 내기와 물이 따론 논다는 기분이 들었다.
“ 거참 쉽지가 않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입하던 내기를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다시 남궁운화의 얼굴을 만들었다.
“ 아래쪽은 안 되요.”
목 아래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자 남궁운화는 버럭 소리쳤다.
“ 자기 몸도 아니면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닙니까?”
연우강은 짖궂은 얼굴로 계속해서 육체를 완성해 나갔다. 쏟아지는 비는 물론이고 호수 물까지, 재로는 주변에 넘쳤다. 쏟아지는 빗물로 만든 여인상은 점점 커져갔다.
“ 하지 말라고.....”
연우강을 말리려던 남궁운화는 우뚝 동작을 멈췄다. 물로 만들어졌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표면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는 광경은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 굉장하네요.”
남궁운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예술과 외설은 백지 한 장 차입니다. 남궁 소저.”
“ 그런데 몽요 언니 몸인가요?”
“ 그렇게 생각하세요?”
“ 모르겠어요. 몽요 언니 같기도 하고....”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에 익은 것 같은데 딱히 꼬집어 누구 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연우강은 인물상의 형태를 흐트러뜨리며 물었다.
우선은 이것저것 만들어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참이었다.
“ 만들어 주려고요?”
남궁운화는 빙그레 웃었다.
연우강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 원래 음식과 같은 맛은 나지 않겠지만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죠.”
“ 돼지고기가 들어간 만두가 먹고 싶어요.”
“ 만두?”
“ 그동안 거의 생선만 먹었잖아요. 앞으로 당분간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못할 것 같아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 동정호 특산이라는 파릉전어석은 하루에 한 번 꼴로 먹었고, 생선 튀김, 생선 찜, 생선 볶음 등 이곳 음식엔 생선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만두 속까지 다진 생선이 들어갔다.
“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만두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남궁운화를 옆으로 끌어당긴 연우강은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 맛있게 만들어 주세요”
남궁운화는 빙그레 웃으며 물을 주시했다.
“ 먼저 만두피를 만들어야겠죠.”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오더니 만두피처럼 얇고 둥근 모양으로 변했다.
“ 만두피를 먼저 만드는 건 반칙이에요. 우선 반죽부터 해야 하잖아요.”
장난을 치기로 마음을 먹은 듯 남궁운화는 슬쩍 손을 휘둘러 물로 만들어진 만두피를 없애버렸다.
“ 반죽?”
“ 만두의 맛은 만두피에서 결정된다는 말도 몰라요?”
“ 정말 그래요?”
“ 그렇다니까요. 물론 만두 속에 들어가는 소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만두를 잘 만드는 요리사는 만두피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요. 너무 얇거나 반죽이 무르면 찔 때 터져서 틈으로 육수가 빠져나가 맛이 없어지고, 너무 단단하면 만두피에 육즙이 스며들지 않아 밀가루 씹는 맛이 강해져요. 적당한 반죽과 적당한 두께가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요.”
“ 요리는 제법 하나 보죠?”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헹! 어렸을 때 제 취미가 요리였다고요.”
“ 정말 요리하는 게 취미였어요?”
“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었잖아요. 가문 ㅇ리은 그 사람이 다 했으니까.”
“ 남궁관수?”
“ 네.”
“ 좋습니다. 지금부터 만두피를 만들어보도록 하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허공에 떠 있는 물에서 한 덩어리를 떼어내 남궁운화 앞으로 옮겼다.
“ 좌현 천근추!”
바로 그때 뒤편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배가 우현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 반죽을 하려면 밀가루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을 힐끔 쳐다본 연우강은 다시 남궁운화를 보았다.
“ 맞다. 밀가루가 없네요. 음! 일단 내기를 한 덩어리 꺼내보세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남궁운화는 조금 전 상홍을 떠올리며 말했다.
“ 내기를 꺼내라고요?”
“ 그걸 밀가루라고 하면 되잖아요.”
“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연우강은 오른손을 활짝 펴서 내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에 투명한 내기가 둥근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며 자리했다.
“ 이제 섞으세요.”
“ 섞어질까요?”
“ 밀가루하고 물인데 섞지 못할 것도 없잖아요.”
“ 이건 밀가루가 아니고.... 이런 바보.”
연우강은 느닷없이 제 머리를 툭 쳤다.
“ 왜 그래요?”
남궁운화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고맙습니다. 남궁 소저. 남궁 소저 때문에 난제가 풀렸습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난제가 풀렸다는 건 무슨 소리죠?”
“ 만두를 만드는 방법, 그거였단 말입니다.”
물과 밀가루를 섞는 것가 같은 원리였다.
남궁운화의 말처럼 밀가루는 내기가 된다. 물에 밀가루를 타거나, 밀가루에 물을 타면 둘은 따로따로 놀지만 물과 밀가루를 섞어 반죽을 하면 금세 하나가 된다. 더불어 어떤 모양으로도 만들어 낼 수가 있다.
“ 최곱니다. 남궁소저.”
연우강은 물과 내기를 마구 뒤섞었다.
내기의 주입량이 점점 많아지면서 물은 점점 농밀해졌다. 하지만 연우강은 물에 주입하는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밀가루 반죽을할 때처럼 끊임없이 내기를 밀어 넣으며 물과 섞었다. 투명했던 물은 어느새 눈이 시릴 정도로 변했고, 가공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뭐, 뭐죠?”
남궁운화는 벌떡 일어나 소리쳐 물었다.
연우강 앞에 있는 그것은 여전히 처음의 물과 같은 상태다. 그런데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마치 거대한 크기의 벽력탄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 아직 멀었습니다.”
연우강은 계속해서 내기를 밀어 넣으며 압축했다. 이젠 섞는 수준이 아닌 반죽 수준이라고 해야 했다.
“ 검!”
연우강의 입에서 낮은 외침이 흘러나오고, 덩어리로 뭉쳐 있던 물이 검 모양으로 변했다.
“ 타앗!”
연우강의 입에서 짤막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물의 검은 공간을 단축하며 수면을 향해 폭사돼 갔다.
연우강의 머릿속은 계속해서 물의 검을 좇고 있었다. 물속으로 들어간 검은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더니 어느 순간 호수 바닥마저 파고들어 갔다.
그는 계속해서 물의 검을 조정했다.
‘ 백 장이라......’
“ 돌아와라!”
그는 커다랗게 소리치며 마라천력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렸다.
츄악!
잠시 후 물 속으로부터 검 모양을 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 창으로!”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검 형태를 띠고 있던 물은 창 모양으로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날아가는 속도는 변하지 않았다.
“ 둘로!”
그는 다시 명령을 내렸다.
창이 절반으로 부러지는 듯하더니 두 개로 나뉘고, 다시 세 개로, 네 개로, 그리고 수십 개의 화살 형태를 띠며 가공할 속도로 수면 위를 날아다녔다.
“ 뭐, 뭐죠?”
남궁운화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물론 만든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내기와 물을 이용하여 밀가루처럼 반죽한 저것은 정확하게 어떤 무공인지 정의 내릴 수가 없다. 무기를 날리는 게 아니니 이기어검술이라고 할 수도 없고, 강기를 조각조각 분리하여 날리는 탄강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하다.
“ 마라천류의 일 식인 수천류입니다.”
“ 마라천류라고요?”
“ 그렇습니다. 남궁 소저.”
연우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 우현, 천근추!”
“ 타앗!”
“ 차앗!”
“ 이야얍!”
우렁찬 함성과 함께 좌현으로 기울던 배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