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시비 걸기.
쐐애액! 슈우욱!
콰콰콰! 콰콰콰!
직경 백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소용돌이는 악마가 울부짖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토해내며 무섭게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소용돌이 바깥쪽부터 시작하여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물살은 점점 빨라지고경사가 지다가 중심은 분지처럼 푹 꺼져 있는데 그 깊이는 십여 장에 달했다. 그곳을 향해 물이 무서운 속도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물이 빨려들어 가는 부분엔 건물 지붕의 한 부분처럼 생긴 바위가 그림자처럼 언뜻언뜻 드러나곤 했다.
그 소용돌이에서 오십여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커다란 배가 멈춰 서 있었다. 그 배는 선착장을 떠나온 황룡호였다. 황룡호 삼층 지붕의 전망대에는 연우강 일행이 올라와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엄청나네요.”
남궁운화는 경악한 얼굴로 소용돌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정호 한가운데에서 이런 엄청난 광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 뭐라고 생각해?”
연우강 또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 소용돌이라면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동정호 주변 전설엔 소용돌이에 관한 건 없었다.
그는 대답을 구하는 얼굴로 유설연을 보았다.
“ 진식이야.”
“ 진식?”
“ 진식이 아니면 저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어.”
“ 저 정도면 동정호 주변엔 소문이 나야 하는 거 아닌가?”
“ 매년 저런 광경이 나타나진 않을 거야.”
“ 특별한 경우에만 그런다는 거냐?”
“ 응.”
“ 어떤 특별한 경우?”
“ 진식을 변경하거나 손보는 경우.”
“ 한번 설치하면 끝까지 유지되는 거 아냐?”
문득 전에 진식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 때문에 파천육기를 얻기는 했지만 진식은 여전히 어려웠다.
“ 변화가 거의 없는 곳에 설치된 진식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원래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이곳처럼 급격한 변화가 있는 곳에서는 진식이 왜곡되곤 해.”
“ 그럼 수영궁의 전설은 왜곡된 진식을 손보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말이구나.”
“ 그럴 가능성이 높아.”
“ 누구를 데리고 들어갈 거지?”
“ 성연하고 팔신장만 데리고 들어가는 게 낫겠지?”
“ 그렇게 하자.”
“ 육대.”
“ 하명하십시오. 소제독님.”
“ 우리가 들어가면 넌 천밀위사와 함께 군산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 알겠습니다. 소제독님.”
“ 밀사!”
“ 하명하십시오.”
“ 준비해.”
“ 준비 끝났습니다.”
“ 우린 끝났어.”
유설연은 연우강을 향해 말했다.
“ 우린 준비할 거 있어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이것만 있으면 되지 않나요?”
남궁운화는 지고 있던 봇짐을 툭 쳤다.
“ 뭐가 들었죠?”
“ 보름 가량 먹을 수 있는 육포, 연 공자 약, 물, 갈아입을 옷가지 그리고 철립하고 소소한 물건 몇 개요.”
“ 지금부터는 제가 질게요.”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등에서 봇짐을 벗겨냈다.
“ 그건 제가 지고 다니기로 했잖아요.”
“ 물 속으로 들어갈 때만큼은 제가 지고 다니겠습니다. 철립이 어디쯤, 오, 여기 있구나.”
봇짐 안을 뒤적거리던 연우강은 철립의 움푹 들어간 곳에 두었던 검은 주머니를 꺼내 남궁운화에게 건넸다.
“ 이건 뭐죠?”
“ 일단 가지고 계세요. 우리도 준비 끝났다.”
“ 어디 아픈 거야?”
조금 전 약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유설연이 물었다.
“ 내가 아파 보여?”
“ 전혀.”
“ 복용해도 몸에 도움되는 건 없는데 복용하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생겨.”
“ 무슨 말이 그래?”
유설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몸에 도움되는 게 없다면 몸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이고, 복용하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는 말은 병을 치료하는 약이라는 의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그냥 약을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힘이 없을 뿐이야.”
“ 무슨 소리죠?”
이번엔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강박공황증 같은 걸 거예요.”
“ 강박공황증?”
“ 약을 먹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을 말해요. 쉽게 말하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죠.”
남궁운화는 손가락을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 그러니까 우강 저자식이 저, 정신병자라고?”
유설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넌 내가 정신병자로 보여?”
“ 정신병자가 제 이마에 정신병자라 쓰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
“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가, 인마.”
연우강은 버럭 소리치며 남궁운화의 손을 잡고 수면으로 몸을 날렸다.
“ 가자, 성연. 신장은 우릴 보호해.”
“ 알겠습니다. 소제독님.”
유설연이 우성연의 손을 잡자, 유덕을 비롯한 여덟명은 두 사람을 호위하듯 둥글게 에워쌌다. 그러고는 동시에 수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먼저 날아 내린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물 위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 약을 먹지 않으면 어떤 증상이 있어요?”
두 사람을 따라 붙은 유설연은 크게 소리쳐 물었다.
바람이 워낙 강하고 파도가 쳐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 약을 거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 어떤 증상이 나타는지 아직은 몰라요.”
“ 단 하루도?”
“ 네.”
“ 병이네요?”
“ 강박공홍증이라고 했잖아요.”
“ 호호호! 아무튼 특이한 녀석이 분명하네요.”
유설연은 기분 좋은 웃음을 토해냈다. 완벽한 것처럼 보였던 녀석에게서 뜻밖에도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지부장님. 지금 웃을 때가 아니라고요.”
전면을 주시하고 있던 우성연은 질린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물이 소용돌이치는 소리가 잔뜩 굶은 맹수가 먹이를 앞두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 그럼 울까?”
“ 울 때는 더욱 아니죠.”
“ 그럼 어쩌라고?”
“ 정신을 집중해야 할 때란 말입니다.”
“ 이것아! 저건 우리를 초대하는 초대장이야.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 우릴 죽일 의사가 없다는 뜻이야.”
“ 연 공자 생각도 그래요?”
유설연의 말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우성연은 연우강을 보며 소리쳤다.
“ 그럴 겁니다. 어쩌면 저 안에는 우리를 초대한 자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 그럼 굳이 저런 엄청난 초대장을 보낸 이유는 뭐죠?”
우성연은 십여 장 앞에 있는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 저긴 거대한 전장입니다.”
“ 무슨 소리죠?”
“ 대야벌은 물론이고 강호에서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은 전부 저 안으로 들어갈 테고, 그들은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것 아닙니까?”
“ 그러니까 우리를 초대한 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기가 쉽겠군요.”
우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도착했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연우강은 소리치며 남궁운화를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 엄청나네.”
남궁운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용돌이 가장자리까지는 이 장 가량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물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 설연 저 자식 말이 맞습니다. 남궁 소저. 저놈은 거대한 초대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겁먹지 마세요.”
“ 그렇다고 해도 저 소용돌이에 휩쓸린 자는.....”
“ 강호 무림에서는 만용은 곧 죽음과 직결된다는 불문율이 있다는데 아닙니까.”
“ 그렇긴 한데.”
“ 절 믿으십시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마라천력을 끌어올리며 수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그가 밟고 있던 수면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 물로 만든 근두운인가요?”
“ 그럼 저는 손오공이 되는 겁니까?”
“ 호호호! 그런 전 뭐죠?”
“ 저팔계 하세요.”
“ 알았습니다. 손오공. 지금부터 전 저팔계입니다. 꿀꿀!”
깔깔대면서도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가슴에 푹 안겼다. 연우강의 의지를 받은 물이 소용돌이를 타면서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우강은 물을 끌어올려 앞과 뒤 그리고 좌우 측에 막을 쳤다. 그러자 천막을 친 것처럼 불어오던 강풍이 뚝 그쳤다.
“ 이런 것도 가능해요?”
남궁운화는 사방으로 둘러친 막을 경이로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는 이곳까지 오면서 계쏙해서 소위 물 반죽이라고 부르는, 물과 내기를 섞는 연습을 했다.
수백 번의 연습을 거친 결과 어느덧 물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완벽한 반죽을 해내는 수준에 올라섰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물 반죽이라 부르는 그것으로 장막을 친 것이다.
“ 마라천류라고 한 이유는 마라천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흐림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남궁 소저.”
“ 수천류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 이제 수천류만 완성했을 뿐입니다.”
“ 위력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저도 궁금합니다.”
“ 야, 이 자식아.”
바로 그때 옆에서 유설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설연을 비롯한 열 명은 등평도수 신법을 펼치며 물살을 따라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아가는 속도는 연우강의 움직임보다 훨씬 빨랐다.
“ 왜?”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 어떻게 한 거야?”
“ 물로 막을 친 거야.”
“ 그게 가능해?”
“ 난 가능해.”
“ 우리도 좀 끼워주면 안 되냐?”
“ 두 사람 이상은 무리야.”
“ 자리가 있잖아.”
“ 천천히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려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 야! 자식아, 야!”
이편을 보며 소리치던 유설연 일행이 시선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 바로 내려가는 게 편하지 않나요?”
남궁운화는 소용돌이 중심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기껏 해야 십여 장 남짓, 경공을 펼친다면 한 번에 도약할 수 있는 거리다. 무공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유설연 일행은 한 번에 십여 장을 날아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다. 굳이 물의 흐름을 따라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 자연적인 소용돌이라면 저곳을 향해 바로 날아가겠죠.”
“ 진식이라서 그렇다는 말이네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소용돌이 자체가 초대장이면서 진식이라면 흐름에 순응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다. 흐름을 거부하고 힘으로 밀어붙이게 되면 사문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타앗!”
“ 차앗!”
“ 이야압!”
바로 그때 소용돌이 가장자리 근처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기합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십여 명의 무인들이 소용돌이 중심부를 향해 몸을 날려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중심부에 도착한 그들의 신형은 빨려들어 가듯 안으로 사라졌다.
“ 무사할까요?”
“ 들어가보면 알겠죠.”
그 후로도 많은 무인들이 중심부를 향해 몸을 날려 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은 물살에 몸을 맡겼다.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한식경 정도가 흐른 뒤에야 비로소 중심부에 도착했고, 곧바로 마치 공간을 건너뛰듯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주변은 새카만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지?”
먼저 들어와 있던 유설연 일행을 발견한 연우강이 물었다.
“ 흐름을 타고 왔을 때만 생문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돼 있는 진식이야.”
“ 그럼 바로 뛰어들었던 자들은 어떻게 됐지?”
“ 아마 사문에서 헤매고 있든지 아니면 벌써 죽었겠찌. 횃불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네.”
유설연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언뜻 보기엔 통로처럼 보이는데 어둠으로 채워져 있어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 불이라면 내게 있지. 남궁 소저. 아까 줬던 주머니 안에 있는 걸 꺼내보세요.”
“ 이거요?”
남궁운화는 품속에 넣고 있던 검은 주머니를 열었다. 그러자 안쪽으로부터 푸른빛이 새어나왔다.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빛을 뿌리는 물체를 꺼냈다. 남궁운화가 꺼낸 것은 망사로 싼 깨진 야명주 조각들이었다. 야명주 불빛이 환하게 밝혀지자 일행은 주변을 살폈다. 일행이 있는 곳은 폭과 높이가 일 장 가량 되는 동굴 형태의 통로였다.
“ 생문이 여러 개 있나봐.”
주변을 살피던 유설연은 연우강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무인들이 지나간 흔적이 별로 없다는 말이야?”
“ 응! 그다지 많지 않아.”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일단 가보자.”
쿠르르!
막 걸음을 옮기는데 먼 하늘에서 천둥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지반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 얼마나 됐을 것 같냐?”
연우강은 벽을 살피며 물었다. 양측 벽면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 있어 얼마나 오래 전에 지어졌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 범천조화신기가 사라진 게 오백 년 전이니까.... 그동안 계속 이곳에 보관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오백 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겠지.”
“ 크아악!”
“ 아악!”
이번엔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일행은 가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 진식이 아니고 기관이다.”
유설연이 작게 말했다.
“ 그럼 조금 전에 들려왔던 그 소린 기관이 작동하면서 나는 소리였을까?”
연우강은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하지만 근처에서는 미세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그럴 거야. 속도를 좀 내보자.”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나갔다.
그렇게 통로를 따라 일각 정도 이동했을 때 일행 앞에 막 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 문이네.”
유설연은 바닥을 살폈다. 바닥에 먼직 쓸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는 손가락보다 두께가 작은 구멍이 수백 개가 뚫려 있었다.
“ 암기 구멍인가 보네?”
“ 그럴 거야. 우리가 이곳을 떠나 돌아가는 순간이나 문을 잘못 열었을 때 발사될 거야.”
듣고 있던 우성연이 물었다.
“ 네 생각은 어때?”
유설연은 연우강을 보았다.
“ 남을 시험하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설연.”
“ 앞으로 계속 같은 배를 타야 하는데 머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 원래 동창이나 금의위 종자들은 부려먹기 적당한 놈만 살려서 데리고 가잖아.”
“ 멍청해서 쓸모가 없어.”
“ 자신의 그릇 크기를 제대로 파악해야 장수한다. 난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특히 죽여주기로 한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는 사람이다.”
“ 알았으니까 성연에게 설명이나 해줘.”
“ 그렇게 하지, 우 소협.”
연우강은 우성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다정스럽게 불렀다.
“ 마, 말씀하세요.”
우성연은 움찔했다.
“ 우선 우리 둘의 관계부터 정리하자고.”
“ 관계라면....”
“ 난 설연 저 자식 친구고, 우 소협은 설연을 상관으로 모시고 있잖아.”
“ 말을 놓겠다는 건가요?”
“ 혹시 관직 받은 거 있어?”
“ 관직은 아직.”
“ 난 군에 있을 때 정오품이었거든?”
“ 그래서요.”
“ 말을 놓겠다는 거지, 뭐.”
“ 편할 대로 하세요.”
“ 알았어. 그럼 편하게 말할게.”
“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죠?”
“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연우강은 우성연의 어깨를 와락 틀어쥐었다.
“ 아, 알았어요. 설명부터 해 주세요.”
“ 지금 이곳이 어떤 곳이지?”
“ 어떤 곳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잖아요.”
“ 맞아. 이 안에 들어온 자들을 보면 그래도 대야벌이나 강호에서 한가락씩 한다는 자들이잖아. 그런데 그놈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단 말이지. 곳곳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곳이라는데 너도 동의하지?”
“ 네.”
우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런 곳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주변을 샅샅이 살피는 습관을 길러야 해.”
“ 저, 저도 훑어봤는데요?”
“ 뭘 봤는데?”
“ 천장에 있는 구멍과 문이 열리면서 난 흔적들.”
“ 바닥에 나 있는 작은 흠집은 확인했어?”
“ 흠집이라고요?”
“ 응!”
“ 흠집이 있었나?”
우성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바닥을 살폈다. 연우강의 말처럼 작은 흠집이 있었다. 마치 호미 같은 걸로 찍었을 때 나타나는 그런 흠이 바닥 곳곳에 나 있었다.
“ 그게 바로 암기가 발사된 흔적이야.”
“ 이것들이 흔적이라면 암기는 어딨죠?”
“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바위 밑에 암기에 당한 시체들과 함께 있겠지.”
“ 아래로 쏟아버렸단 말인가요?”
“ 그건 아니고, 어떤 기관에 의해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바위가 돌아가는 거야.”
“ 아!”
그제야 이해가 간 듯 우성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 그걸로 끝나는 게 아냐, 성연.”
“ 그럼 뭐가 남았죠?”
“ 바닥이 돌아간다는 사실로부터 문도 돌아간다는 사실을 추론해 낼 줄 알아야 바닥을 제대로 살폈다고 할 수 있어.”
“ 문도 돌아간다는 말인가요?”
“ 그렇지. 하지만 바닥철머 세로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거지.”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손을 잡고는 벽 앞으로 바짝 붙었다.
그르릉!
그와 남궁운화가 바짝 붙자마자 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돌았다.
“ 들어가자.”
유설연은 일행에게 소리치며 틈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를 필두로 우성연과 팔신장이 들어가고 나자 연우강과 남궁운화가 그들을 따라 몸을 날렸다.
쿠웅!
그들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둔탁한 소성과 함께 문이 닫혔다. 일행이 들어선 곳은 지이 이십여 장 되는 둥근 광장이었다. 지금까지 왔던 통로와는 달리 광장 안은 이른 새벽처럼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연우강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천장은 십여 장 정도로 높았는데 그곳엔 하나 박힌 야명주가 희미하니 빛을 뿌리고 있었다.
창! 창창창! 창창!
“크아악!”
“ 아악!”
이번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일행은 공터 중앙에 나 있는 통로로 몸을 날렸다.
통로는 계단처럼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일 각 정도 내달리지 또다시 막다른 장소가 나타났다.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이번엔 문으로 보이는 곳에 글이 씌어져 있었다.
제일관 내공관
천하제일의 내공이 있다. 익혀라!
태양광연강
벽옥수라강
현청쇄옥강
홍로진결
천허폐천진결
“ 이름은 그럴싸 하네.”
글을 읽고 난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라 대단한 무공들이야.”
“ 알아?”
연우강은 유설연을 돌아다보았다.
“ 혹시 원나라 때 황시에서 무공을 수집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어?”
“ 지금 처음 들어.”
“ 쿠빌라이 칸은 중원을 통일한 다음에 무공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그를 적극 도왔던 단체가 대야벌이야. 그들이 수집해 준 무공 중 각 분야에 걸쳐 다섯 가지씩 서른 가지를 추려냈는데, 저기 적혀 있는 것들은 내공심법 다섯 가지야.”
“ 대야벌 녀석들이 골라 줬으니 최강이란 말은 하기 뭐하고 보물이란 말이겠지?”
“ 그렇지.”
“ 재미있는 녀석들이네.”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앞으로 끌어들인 다음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 무슨 소리야?”
유설연은 바로 옆으로 자리하며 물었다.
“ 너 같으면 그렇게 고생해서 얻은 무공을 공짜로 주겠냐?”
“ 그럼?”
“ 아마 기둥에는 무공 구결의 일부만 있을 거야.”
그르릉!
나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돌아갔다.
그 순간에 다른 이들은 재빨리 안쪽으로 들어섰다.
“ 나머진 들어와서 익히라는 뜻?”
“ 어쩌면.”
문에서 물러난 연우강은 안쪽을 둘러보았다.
문 안쪽은 조금 전에 보았던 곳보다 훨씬 넓은 지금이 약 오십여 장 되는 광장이 있었는데, 다섯 방위를 접하며 십여 장 높이의 기둥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칼부림이 벌어지는 곳은 기둥 근처였다.
“ 가자!”
기둥 근처에서 싸우고 있는 무인들을 살피던 연우강은 광장 건너편에 보이는 통로를 향해 걸었다.
“ 기둥에 무공이 적혀 있나 보죠?”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따르며 물었다.
“ 그럴 겁니다.”
무인들이 싸우고 있는 장소를 피해 움직인 일행은 곧 출구에 다가섰다. 통로의 형태는 두 번에 걸쳐 왔던 곳과 다르지 않았다. 이관에는 다섯 가지의 경공술이 적혀 있었고, 삼관에는 권장지각, 사관에는 다섯 가지의 잡술이 적혀 있었고, 무인들끼리 치열하게 싸우는 장소도 그곳까지였다. 도법이 적혀 있는 제 오관에도 많은 무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기둥 근처에서 구결을 쳐다보고 있을 뿐 칼부림은 없었다.
연우강은 기둥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광도구식이란 도법이 적힌 기둥이었다.
한참동안 구결을 읽어내려 가던 연우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광도구식은 몽요에게 주었던 도법 중의 하나로 대야벌에서 얻은 도법이다.
그런데 구결은 절반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 가지.”
연우강은 다시 일행을 이끌고 광장을 나섰다.
다시 일 각 정도 내달려 육관에 당도하자 비로소 아는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오른편에는 오제가 나란히 앉아 있고, 그들 옆에는 암대무궁과 윤허가 앉아 있었다.
중간 지점에는 황궐의 궐주인 구룡금창 공야일우와 금황련과 풍운련 련주와 천추림 림주가 앉았고 그들 옆으로는 군마련의 부련주 천광마자 낙천 일행과 무인들이 그리고 왼편엔 이지약 일행과 처음 보는 무인들이 뒤섞여 앉아 있었다. 광장 형태에 맞춰 둥글게 앉아 있는 그들의 시선은 전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벽면에는 선반처럼 불쑥 튀어나온 부분이 있고, 튀어나온 부분 밑바닥엔 야명주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야명주 아래쪽 벽면에는 가로 다섯 자, 세로 네 자 크기의 커다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앉아 있는 자들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다.
연우강은 그림을 보았다.
뿌연 흙먼지를 뿌리며 수백 마리 말들이 질주하는 그림이었다.
파! 득!
그리고 그림 아래쪽에는 금강지력으로 ‘파훼하라, 그럼 얻을 것이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 파천군마도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유설연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 파천군마도가 뭐지?”
“ 몰라?”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파천육기가 대야벌에 내려오는 전설이라면 파천군마도는 무림에 내려온 전설이야.”
“ 무림전설?”
“ 우주만옹 혁세걸이란 이름 들어본 적 있어?”
“ 아니.”
“ 넌 도대체 무림에 대해 아는 게 뭐냐?”
“ 강한 놈이 최고가 되는 곳, 그거 한 가지”
연우강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 아무튼 넌.”
“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곳이 무림이야. 인마. 잔말 말고 그 우주만옹인가 하는 거창한 별호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설명해 봐.”
“ 무림 최초의 암흑시대를 이끌었던 사람이야.”
“ 암흑시대?”
“ 대야벌에 의해 철권 통치가 이루어지던 시대란 뜻이야.”
“ 왜?”
“ 우주만옹 혁세걸이 그 당시 대야벌 벌주의 머리를 날려버렸거든.”
“ 정말?”
“ 천 초만에 목을 잘라버렸다고 하더라.”
“ 그게 가능해?”
“ 가능했으니까 저 그림이 파천군마도란 이름으로 내로았겠지. 저 그림 안에 우주일만검결이란 무공이 들어 있대.”
“ 대단한 사람이네.”
연우강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주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말만 그려져 있을 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 대야벌 소속이 아니면서 대야벌 벌주에 도전한 최초의 무인이었고, 벌주의 머리를 날려버린 최초의 무인으로 기록된 그가 남긴 그림이 바로 파천군마도야.”
“ 그건 그렇고. 대야벌 벌주의 머리를 날려버릴 정도로 엄청난 무인이 있었는데 암흑시대가 도래했다는 건 어패가 있는 거 아냐?”
“ 비무가 끝나자마자 그도 폐인이 됐거든.”
“ 동귀어진했다는 말이냐?”
“ 혁세걸은 살아남았고, 대야벌 벌주는 죽었으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혁세걸의 승리잖아.”
“ 그러니까 네 말은 저 그림이 파천군마도라는 거야?”
“ 아니라고?”
“ 당연히 아니지. 너 같으면 우주일만검결이라는 엄청난 무공이 들어 있는 그림을 저렇게 방치하겠냐?”
“ 그 말은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유설연은 말끝을 흐렸다.
연우강의 말이 틀리진 않다.
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면 파천군마도 앞에 정좌하고 있는 무인들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는 시선을 돌려 파천군마도를 보았다.
‘ 응?’
파천군마도를 주시하는 순간, 뭔가 번뜩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유설연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파천군마도를 보았다. 바로 그때 비아냥대는 듯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병신이 따로없네.”
‘ 저런 개자식.’
천광마자 뒤편에서 파천군마도를 지켜보던 철전 패왕 백독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파천군마도에 집중할 수 있었고, 뭔가 잡힐 듯 말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그런데 녀석들이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자꾸만 싸늘한 기운이 두통수에 와 꽂히곤 하여, 정신을 흐트러뜨려 간신히 잡아놓은 느낌을 앗아간 버린 것이었다.
‘ 참자, 참아.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했다.’
그는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백독수가 파천군마도에서 발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힘이었다. 정화하지도 않고, 이제 시작에 불과했지만, 조금만 더 집중하면 소기의 목적ㄹ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조금만 더.’
머릿속에서 불꽃이라 맹렬하게 타올랐다.
“ 누가 병신이라는 거지?”
“ 누가 됐든?”
“ 죽일 놈!”
또다시 날카로운 기운이 뒤통수에 박히며 불꽃처럼 일렁이던 느낌이 달아나자 짜증이 확 솟구쳐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낸 것이었다.
백독수는 고개를 홱 돌려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갑자기 잔석이 죽던 장면이 떠오르며 짜증이 더 솟구쳐 올랐다. 만일 그 자리에서 저 계집 같은 환관 놈이 없었다면 놈은 설설 기었을 것이다. 아니 이층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테다. 그런 놈이 소제독의 위세를 업고 잔석을 없애고, 담대무궁의 무릎을 꿇린 것이다.
아주 비열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 뭘 봐, 자식아.”
백독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연우강은 톡 쏘았다.
“ 지금 나보고 그런 거냐?”
그렇지 않아도 비열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자식아’라는 말을 듣자 노화가 확 치밀어 올랐다.
“ 그럼 날 쳐다본 새끼가 너밖에 더 있냐?”
“ 이런 개자식!”
백독수는 벌떡 일어났다.
“ 어쭈! 꼴에 성질은 있어 가지고, 네가 일어나면 어쩔 건데?”
연우강은 시비를 거는 건달처럼 백독수를 빤히 쳐다보며 이죽댔다.
“ 이분은 패천림의 림주님이시다, 놈!”
부하인 듯한 중년인 한 명이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백독수의 최 심복의 한명인 나후신권 사일후란 자로 패천십관 중 아홉 번째 관문을 담당하는 자이기도 했다.
“ 그래서 어쩌라고, 패천림의 림주니까 날 비웃어도 가만 있으라고?”
“ 림주께서 언제 네놈을 비웃었단 말이냐?”
“ 네 옆에 있는 놈에게 물어보면 될 거 아냐. 저 자식은 소제독의 위세를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라고 날 욕했어. 그것뿐만이 아냐. 소제독이 없다면 쥐새끼 밟듯이 밟아 죽여버렸을 거라고도 했단 말이야, 자식아.”
“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놈.”
“ 그놈에게 물어보라고 했잖아, 새꺄.”
“ 굳이 림주님께 물어보지 않아도....”
“ 맞다, 방금 그런 생각을 했다”
“ 리, 림주님.”
“ 걱정 말게! 일후! 난 소제독의 명예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네. 이건 저자와 나의 일이네.”
교묘한 언변이었다.
백독수는 소제독 명예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미리 말을 함으로써 유설연이 끼어들 여지를 미리 차단했다.
그는 슬쩍 유설연을 살폈다.
다행히 말이 먹힌 듯 유설연은 담담한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 넌 죽었다, 놈.’
백독수는 내심 중얼거리며 연우강을 보았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 나는 너같은 놈을 가장 경멸한다. 넌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쥐새끼 같은 놈이다.”
“ 야! 설연!”
연우강은 유설연을 불렀다.
“ 방금 저 놈이 날 쥐새끼라고 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그, 글쎄....”
유설연은 곤혹스러운 얼굴ㄹ 연우강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