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75화 (75/232)

제 2장. 입맞춤

영세오천의 한 곳인 밀천은 백제의 은밀가, 산동의 수밀가, 동영의 풍밀가, 절강의 환밀가의 연합에서 비롯했다.

전부 바다를 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 터라 뱃길을 오가면서 친분을 쌓게 됐고, 당시 최강 해상세력이었던 은밀가의 제안으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다섯 가문의 힘은 너무 강대하여, 백제, 동영, 절강, 산동은 너무 비좁았다. 결국 네 가문은 광활한 대륙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들 연합을 밀천으로 불렀다.

영세오천의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야망을 불태웠던 밀천은 다른 세력들과 함께 무성을 결성하는 걸로 전쟁을 끝맺게 된다.

하지만 다른 세력과는 달리 가문들의 연합체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마저도 달랐던 밀천은 변방의 황천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문제점으로 인해 황천이 먼저 대야벌을 떠났고, 밀천 또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야벌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마련했던 거점이 바로 동정호 지하였다. 동정호 지하에 거점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가문이 바로 수밀 혁씨였다. 수밀가는 동정호 지하에 거점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대야벌을 노렸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밀천의 존재감만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간 밀천마저도 대야벌에 동화되고 말 거라는 위기감에, 밀천의 선조들은 그동안 구축해 두었던 동정호 지하로 거점을 옮겼다. 그 후부터는 대야벌을 도모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밀천의 최고 가문인 은밀가와 수밀가의 전쟁이었다.

더불어 수밀가도 두 가문이 대립하고 있었다.

은밀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혁씨 세가와 은밀가를 배제하고 나머지 세력으로만 밀천을 유지하는 게 낫다는 나씨 세가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은미락와 전쟁이나 수밀가 내부의 대립이 해소된 건 칠백 년 전, 당나라와 백제와의 전쟁에서였다.

당 황제는 백제의 수호가문이었던 은밀가를 없애기 위해 무인들로 구성된 무림군을 창설하였는데, 그 무림군에 수밀가가 포함된 것이었다.

그 전쟁으로 혁씨 세가와 은밀가가 동귀어진하였고 수밀가의 이인자였던 나씨 가문은 수밀가의 수장가문이 됐다.

“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때로는 황실에 동조하고, 때로는 척을 지면서 밀천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이제는 은밀막부로 변해버린 은밀가와 풍밀가를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나적리는 벽면을 쳐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벽면에는 여러 가지 도형이 뒤섞인 그림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그것도 동정호 지하에 건설한 도시의 지도였다.

“ 처음엔 누구도 저렇게 큰 지하 도시가 건설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우린 조금씩 밀천의 거점을 넓혀갔고, 수천 명을 수용하고도 남는 엄청난 공간을 만들어냈다. 우리 밀천의 위대한 승리였다.”  “ 앞으로도 우린 승리만 얻게 될 것입니다. 조부님.”

나적리를 보고 있던 나천후가 말을 받았다.

“ 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번 일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 명심하고 있습니다. 조부님.”

“ 놈들은 지금 어디쯤 있느냐?”

“ 동창 무리와 금의위 무리는 이곳에 있습니다.”

벽면으로 다가간 나천후는 벽면 지도상에서 군산과 원형 광장 사이의 중간 지점을 가리켰다.

“ 그럼 그놈들은 최후의 관문마저도 빠져나왔다고 보면 되겠구나.”

“ 하지만 여길 끊어버리면 그들 중 열에 아홉은 수장되게 될 겁니다.”

나천후는 군산에서 조금 가까운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 아니다. 그들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 더구나 소제독 그놈은 범천조화신기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앞으로도 이용 가치가 아주 높은 놈이니라.”

“ 그들은 손대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두었습니다.”

“ 잘했구나. 그런데 연우강 그 놈은 어떻게 됐느냐?”

나적리의 물음에 나천후는 말없이 그림을 응시했다.

“ 설마 그들이 당했단 말이냐?”

“ 빙공에 당한 모양입니다.”

“ 빙공이라고 했느냐?”

“ 그렇습니다. 조부님. 밀천삼환은 얼음 속에 갇힌 채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 연우강 그놈이 빙공을 익혔다고 보는 거냐?”

“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놈과 함께 있는 누군가가 익혔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 끄응! 결국 놈 때문에 큰 손실을 입고 말았구나. 좋다, 죽은 자는 어쩔 수 없는 거고, 연우강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여깁니다.”

나천후는 지하 거점이 시작되는 곳의 검게 칠해진 부분을 가리켰다.

“혼자더냐?”

“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온 자들 전부가 그곳에 몰려 있습니다.”

“ 사문에 위치해 있다는 말이구나.” 나적리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 그들 중에 있는 구룡금창 공야일우나 칠기대장군 남옥 등은 아직 이용가치가 남았습니다. 조부님.”

“ 우리가 범천조화신기에 대한 소문을 흘린 목적은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을 하나의 세력으로 묶어 담대만승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즉 그들 네 명 중 한 명에게 범천조화신기가 들어가기만 하면 목적 달성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범천조화신기는 소제독 유설연에게 들어갔다. 이젠 유설연이 황궐을 비롯한 네 세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 유설연이 공야일우를 거두지 못할 걸로 보십니까?”

“ 그걸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공야일우 일행을 없애는 게 나은 방법일 수도 있다는 거다.”

나적리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이번 범천조화신기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는 대야벌의 반벌주파를 하나로 결집시켜 하나의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파천군마도의 주인인 우주만옹 혁세걸이 밀천의 무인이란 사실을 강호상에 널리 알려 밀천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두 가지 목적을 전부 달성하긴 했지만 범천조화신기가 번벌주파가 아닌 소제독 유설연에게 들어가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유설연에게 들어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을 테지만,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연우강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나적리가 얼굴을 찌푸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발굴작업도 포기하는 겁니까?”

나적리는 검게 칠해진 부분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 건 불과 이 년 전이다.

우연히 오래된 고서를 뒤지다가, 나씨 이전에 수밀가를 통치하던 혁씨 가문의 족보인 ‘혁씨 계보’를 발견하게 됐는데 그 양피지 책자에서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됐다.

우주일만검결의 최초 창시자이면서 중원 최고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천수귀장 혁미월에 대한 내용이었다.

혁미월은 무림사를 통틀어 그녀보다 훌륭한 자인은 없다고 할 정도로 토목과 기관에 정통했던 장인이었다. 춘추전국 시대에 많은 왕들의 무덤을 건설하였을 뿐 아니라 동정호 지하에 밀천의 거점을 만든 사람도 그녀였다. 그것뿐이라면 그녀의 무덤을 찾기 위해 발굴작업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했던 마지막 작업은 놀랍게도 천마를 비롯한 일백마의 무덤이라는 마총의 건설이었다.

마총 건설을 마친 그녀는 천마 일당의 살인멸구를 피해 동정호 지하로 몸을 숨기게 됐는데, 그곳의 위치가 바로 검게 칠해진 부분이었다.

무덤 발굴작업을 시작한 건 일 년 전 생사림의 림주 마수귀의 유명계가 배신을 하면서였다.

벌내쟁투로 인해 대야벌에서 쫓겨난 그는 밀천으로 돌아오지 않고 몸을 숨겨버린 것이었다.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그를 찾는 한편 발굴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제 칠 할 정도가 끝난 상태다.

그랬던 곳을 없애려고 하니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 유명계가 연락을 해왔다.”

“ 정말입니까?”

“ 그동안 몸을 치료하느라 연락을 못했다고 하더구나.”

“ 심한 부상이라도 당했단 말입니까?”

“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잃었단다.”

“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어요?”

나천후는 황당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보았다.

싸움을 하면서 팔이나 다리가 잘리는 경우는 보았지만 손가락과 발가락만 잃은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유명계는 지금 손가락과 발가락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고 하더구나.”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유명계를 거느릴 자신이 없는게냐?”

“ 아닙니다. 조부님, 받아들이십시오.”

“ 그렇게 하마.”

“ 그런데 어쩌다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었단말입니까?”

“ 그건 나중에 직접 물어보도록 하거라.”

“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단 말이군요?”

“ 그렇다. ”

“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형편없는 자에게 당한 모양이군요?”

“ 그럴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사문을 열도록 해라.”

“ 사문을 연다고 해도 전부 없애지는 못할 겁니다. 조부님.”

“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놈들이 다 죽으면 우주만옹 혁세걸이 우리 밀천 무인이란 소문내줄 자가 없지 않느냐. 다만 연우강 그놈만큼은 처리해야 한다. 죽이지 못하면 사문으로라도 밀어 넣어서 말이다.”

“ 환밀에게 지시를 내려두겠습니다. 조부님.”

“ 그렇게 해라.”

나적리의 시선이 다시 벽면으로 향했다.

**********

좁은 통로가 길게 이어지다가 갑자기 확 트인 공간이 나오면 보통은 안도하게 된다.

물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중 동굴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넓은 공간이 나오면 이젠 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 저도 모르게 기쁨의 표정을 짓곤 한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길게 이어지던 통로가 끝나고 갑자기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났지만 무인들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조금 전 기관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에 이어 나타난 장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천장을 비롯한 벽 곳곳에 박혀 주변을 밝히고 있는 희미한 야명주 빛은 물 속 전경을 더욱 음산하게 만들어놓았다.

[여기가 어딜까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장포를 꽉 틀어쥔 채다.

새롭게 나타난 공간은 천장이 있고 사면이 벽으로 둘러쳐진 거대한 수조를 연상케 했다.

[아직은 어디라고 단정짓기 힘든 상황입니다.]

연우강의 시선이 물고기처럼 유영하고 있는 자들에게로 향했다. 만일 이곳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면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은 이곳에 들어오지 말아야 하는데, 무인들을 공격하고 있는 자들만 해도 이백여 명에 달한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우린 얼마 버티지 못해요, 연공자.]

이지약은 걱정스러웠다.

무인이라고 하지만 귀식대법으로 숨을 참는 건 반 시진 정도다. 이제 일다경만 지나면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텐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두 사람 곁으로 독고철웅이 다가왔다.

[ 어떻소?]

연우강은 그를 보며 물었다.

[ 위쪽은 삼십 장 폭인데 반해 아래쪽은 오 장에 불과하다네. 깊이는 십 장 정도고, 위쪽이 넓고 아래쪽이 좁은 사발 형태네.]

[ 일단 준비부터 합시다.]

연우강은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무슨 준비를 한단 말인가?]

[저놈들을 보면 가슴에 공기 주머니를 하나씩 차고 있소. 일단은 그걸 확보해야 하오.]

‘ 공기 주머니라고?’

독고철웅은 시선을 집중하여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을 보았다.

‘ 정말이군.’

그는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돌아보았다.

지금껏 물을 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지, 물속에 있는 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숨을 참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연우강은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거였다.

세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이편을 향해 헤엄쳐 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 물 속이라면 나도 자신 있지.’

독고철웅은 싱긋 웃으며 천마환환신공을 끌어올렸다. 곧 신형이 물색과 동화되면서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 내가 잡을 테니까 독고 영감은 시체나 끌어오시오.]

연우강은 독고철웅에게 혜광심어를 보내며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든 물이 손잡이가 없는 검 형태를 갖추더니 곧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소리도 없고 흔적도 없고, 기운도 거의 없었다.

무서운 속도로 물속을 가로지른 어뢰는 곧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의 단전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의 단전으로부터 포탄이 터질 때 파편이 튀는 것처럼 피와 살점이 튀었다.

‘ 엄청나군.’

어뢰를 쫓아 몸을 날리고 있던 독고철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일 자신이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의 입장이라고 해도 방금 그 공격은 막아내기 힘들 듯했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며 물 속으로 가라앉는 자들을 잡아채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끌고 왔다.

연우강은 그들 중 한 명의 가슴에서 공기 주머니를 떼어 내고 입에 물고 있는 것을 빼냈다. 길쭉한 물체를 통해 공기가 빠져나와 위쪽으로 솟아 올라갔다. 하지만 공기 방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안쪽에 남아 있는 공기의 양이 많지 않다는 의미였다.

[ 별로 쓸모가 없겠는데요.]

이지약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기껏해야 두어 번 호흡이면 공기는 전부 소진될 듯했다. 다시 귀식대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몸 상태를 완벽하게 정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두 번의 호흡으로는 몸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 쓸모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건 무슨 소리죠?]

[ 공기 주머니 안에 공기가 거의 없다는 건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곧 철수할 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렇군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옷깃을 꽉 틀어쥐었다.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어찌 됐든 챙겨놓도록 하지요.]

연우강은 다른 자들의 몸에서 공기 주머니를 풀어 몸에 걸치고는 마라천력을 이용하여 물을 마개처럼 만든 다음 코끼리 코처럼 길쭉하게 생긴 부분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이지약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연우강이 사용하는 힘이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힘으로 움직이고, 적을 공격하고 지금은 숨 쉬는 기구에서 공기가 새어나기지 않도록 입구까지 틀어막고 있다.

[ 제가 동시에 날리고 회수할 수 있는 무기가 정확하게 백육십한 개입니다. 이 소저.]

[ 원래 암기를 다뤘어요?]

[ 그렇습니다. ]

[ 특이하네요.]

이지약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무공을 처음 익히는 자들은 암기보다는 검이나, 도, 창을 선택한다. 설사 뛰어난 무공이라고 해도 암기술은 왠지 비겁한 무공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 제가 특이한 게 어디 한두 가집니까. 일단  저놈들을 없애야겠습니다.]

연우강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담대무궁을 비롯한 등천사노 세 명이 검은 옷을 걸친 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범천담대세가의 위용은 그들의 무공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귀식대법을 펼치는 상황에서도 담대무궁 일행은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을 없애고 있었다.

[ 담대무궁은 없애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 담대무궁만 그렇다는 겁니다.]

[ 그럼 등천사노 일행은?]

[ 원래 계획대로 없애야지요.]

[원래 계획대로라고요?]

[ 보이는 족족.....]

[ 없애는 게 원래 계획이란 말이군요.]

[ 그렇습니다.]

연우강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여섯 개의 어뢰를 만들어냈다. 그 역시 귀식대법을 펼치고 마라천력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형편이라 어뢰를 펼치는 데 많은 힘을 사용할 형편은 아니었다. 어뢰를 만들 때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평소 힘의 삼할 정도였다.

연우강이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을 먼저 발견한 자는 노중산이었다.

검은 옷을 걸친 자의 몸에 오른손을 박아넣은 노중산은 두 동생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추명검노 목운서와 멸악사노 유웅설은 노중산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연우강을 발견한 그들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잔석의 복수를 할 기회가 비로소 찾아온 것이었다.

[ 제가 놈을 없애겠습니다. 형님.]

둘째 추명검노 목운서가 연우강을 향해 헤엄쳐 나아갔다.

[ 삼제, 너도 가거라.]

노중산은 셋째인 멸악사노 유웅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알았습니다. 형님.]

유웅설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편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듯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하나둘 물러나고 있었다.

[ 마노도 따라가게!]

목운ㅅ와 유웅설을 지켜보던 담대무궁이 낮게 소리쳤다.

[ 전 이곳에 남겠습니다. 삼공자.]

적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해도 담대무궁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였다.

[ 오제가 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놈을 경시하는 순간 당하게 되네, 마노.]

[ 알겠습니다.]

노중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 발을 빠르게 놀렸다.

전 내공을 끌어올린 그의 신형이 빠르게 연우강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세 사람을 지켜보던 담대무궁은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을 훑었다. 이백여 명에 달했더 자들이 절반 정도가 죽고 백여 명 정도만 남아 있었다.

[ 나네, 윤형.]

담대무궁은 멀리 있는 윤허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 왜 그러나?]

[ 지금부터 놈들을 죽여선 안 되네.]

[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줄 자들이란 말인가?]

[ 그렇네. 윤형. 놈들을 없애면 우린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네.]

[ 그렇게 하지. ]

[ 다른 자들에게도 그렇게 전해주게.]

[ 알았네.]

전음을 마친 윤허는 공야일우를 비롯한 무인들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그의 전음을 받은 무인들은 일제히 살수를 멈추고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무인들의 행동이 달라지자 담대무궁은 등천사노 일행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노중산 일행은 어느덧 놈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 마노!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와!]

그는 다시 전음을 보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삼공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중산은 연우강을 없애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객잔에서는 유설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지금은 아니다. 설사 놈과 함께 있는 이지약을 없앤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 둘째, 너는 중앙을 맡아라.]

[ 알았습니다. 형님.]

[ 셋째 너는 오른쪽을 맡아라.]

[ 알았습니다. 형님.]

목운서와 유응설에게 전음을 보낸 노중산은 좌측으로 빠르게 헤엄쳐갔다. 귀식대법이 한계에 달해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 그 날 기억해?]

문득 낯익은 듯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왔다.

노중산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안락이라는 객잔 말이야.]

[ 안락이라고? ]

노중산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락루라는 객잔은 기억에 없었다.

[ 낙하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는데, 그 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지약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 서, 설마?’

문득 노중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곳에서 담대무궁이 오줌을 지렸을 걸.]

‘ 넌?’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린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물이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노중산은 물을 꿀꺽 삼켰다.

순간 바로 앞에서 싸늘한 기운이 목을 향해 밀려오는 것이 감지됐다. 노중산은 급하게 오른손을 쳐내며 머리를 오른편으로 틀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평지가 아닌 물속.

그가 손을 쳐내는 것보다 싸늘한 기운이 더 빨랐다.

씀벅하며 목에서 따가운 느낌이 왔다. 노중산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마치 먹물을 떨어뜨린 듯 물이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 빌어먹을!’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라는 사실을 알아챈 노중산은 전 내공을 집중하여 연우강을 향해 내밀었다.

마침 중앙에서 나아가고 있던 둘째 또한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목운서의 검이 물 속을 가르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 연우강 네놈을 반드시.....]

전음을 보내던 노중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항문 쪽에서 뭔가가 천천히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 오늘 죽는 건 너야, 노중산.]

‘ 난 몰라도 둘째의 공격은.....’

노중산은 온 힘을 짜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목운서가 공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목운서는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 공격해, 공격하라고.’

노중산은 손을 저었다. 하지만 마음뿐 늘어뜨리고 있는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벌써 당했단 말이냐?’

노중산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둘째 목운서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녀석은 목이 꺾인 채 숨을 거둔 것이다.

‘ 빌어먹을!’

노중산은 욕설을 뱉어내며 고개를 푹 꺾었다. 그의 고개가 꺾이는 순간 셋째인 유응설도 단전이 폭발하며 주검으로 변하고 있었다.

[ 마노!]

담대무궁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노중산은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 개 자식!’

담대무궁은 연우강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쿠르릉! 크릉!

바로 그 순간 물 속을 타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정신을 차린 그는 다급히 좌우를 살폈다.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빠르게 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 밖에서 보자 놈!]

담대무궁은 차갑게 소리친 후 벽을 향해 빠르게 헤엄쳐 갔다. 다른 이들 또한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일제히 벽면으로 헤엄쳐 가고 있었다.

[ 우리도 가야겠습니다. 이 소저.]

연우강은 오른손으로 이지약의 허리를 감고 벽면으로 이동했다.

[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연 공자.]

[ 견디기 힘들어요?]

[ 네.]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 쩝! 실수했군.’

연우강은 내심 쓰게 웃었다.

내공이 약한 독고철응보다 이지약이 벌써 한계에 도달한 것은 다름아닌 공기주머니 때문이다. 뭔가 기댈 게 있으면 마음을 놓게 되고, 마음이 풀어지면 피로는 금방 오게 된다.

지금 이지약의 상태가 그랬다.

그녀는 공기주머니가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힘을 낭비한 모양이었다.

‘ 귀식대법을 풀면 걷잡을 수 없을 텐데.’

잔뜩 참았던 숨을 내쉬기 시작하면 호흡 곤란이 완전하게 해소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마치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한 방울의 물을 주면 더 힘들어지는 것처럼 숨을 참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한계에 도달한 그녀에게 공기주머니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우강은 가지고 있던 공기주머니 주둥이를 이지약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공기주머니 입구를 입으로 가져간 다음 귀식대법을 풀었다. 그 다음 입구를 마고 있던 물을 꿀꺽 마시고는 목까지 받친 숨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공기를 힘껏 흡입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는 공기 주머니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 없어요?]

[ 약간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화만 초래한 것 같아요.]

이지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귀식대법을 풀자마자 숨이 가빠 미칠 것만 같았다.

더 큰일은 지금 상태에서는 귀식대법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연히 귀식대법을 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계속 흡입하세요.]

연우강은 다른 공기주머니 주둥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 미안해요, 실수를 하고 말았네요.]

이지약은 어색한 얼굴로 코끼리 코처럼 생긴 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그녀는 다섯 개의 공기 주머니를 전부 소모했다.

하지만 숨 막힘은 여전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숨을 참았다. 이제는 공기 주머니도 없어 기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가 흘렀을까. 또다시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볼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 이러다가.....’

연우강은 곁눈질로 이지약을 보았다.

그는 지금 다른 자들과 삼 장 정도 거리를 두고 수조 벽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아직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는데, 이지약은 또다시 한계에 도달한 듯했다.

[ 연 공자.]

바로 그때 독고철응의 전음이 들려왔다.

[ 왜 그러시오?]

[ 공주님이 조금 전에 물 마셨네.]

[ 정말이오?]

[ 그렇네.]

[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 자네가 숨을 좀 나눠주게.]

[ 나보다는 영감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니오?]

[ 나보단 자네가 더 낫네.]

[ 손녀딸처럼 생각하면서 뭘 주저하시오.]

[ 아무튼 나보단 자네가 더 낫네. 나중에 밖에서 보세.]

연우강이 계속 미룰 것 같아 독고철웅은 아예 두 사람 곁을 떠나버렸다.

‘ 예쁜 졍자와의 입맞춤을 거절할 정도로 순진한 놈은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해도 이 여잔......’

느닷없이 옷자락을 잡고 있던 이지약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연우강은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입을 맞춰버렸다.

‘ 학!’

이지약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설마 무상이 아닌 다른 남자와 이런 식으로 입맞춤을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우선은 숨부터 고르도록 하십시오. 이 소저.]

연우강은 천천히 그녀의 입 안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이 수밖에 없었다.

이지약은 체념한 듯 연우강의 입술과 숨을 받아들였다. 숨을 받아들이고 나자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안정을 되찾은 건 가빴던 호흡뿐이었다. 심장은 무섭게 뛰어 귓전으로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지약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가빴던 숨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며, 완전하진 않지만 몸이 조금씩 회복돼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 어?’

차마 연우강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왜 그러세요?]

[ 뭔가 물속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연 공자.]

마치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뭔가가 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 이젠 견딜 수 있겠어요? ]

[ 당분간요.]

[ 그럼 잠시만.]

연우강은 입술을 떼고는 이지약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말처럼 물속으로 손바닥 크기의 특이한 물체가 무수히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물 속으로 떨어져 내린 그것들은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그 중 하나를 끌어당겼다.

[ 무기네요.]

연우강은 끌어당긴 물체의 중간 부분을 잡아 살피며 말했다. 그것은 손바닥 크기로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날이 서 있으면서도 낙엽처럼 얇았다.

[ 초살도예요, 연공자.]

[ 초살도가 뭐죠?]

[ 밀천을 구성하고 있는 가문 중의 한 곳인 수밀가의 무기예요. 보통 빠르게 흐르는 물 속이나 바람 속에 실려 보내는 방법으로 상대를 격살하는데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무기라고 알려져 있어요.]

[ 그럼 물살이 빨라지겠네요.]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물살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방향은 조금 전 초살도가 흘러가던 오른쪽이었다.

[ 소용돌이에요, 연 공자.]

[ 소용돌이라고요?]

[ 아까 환노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위쪽은 폭이 삼십 장인데 아래쪽은 오 장에 불과하다고.]

[ 그럼 소용돌이가 생겨나는 겁니까?]

[ 위는 넓고 아래쪽이 좁은 상태에서 물을 빼게 되면 급격한 소용돌이가 밠갱하게 돼요.]

[ 벽 중간에 어떤 장치를 하면 소용돌이는 더욱 빨라지겠군요.]

[ 그럴 것 같아요.]

철컥! 철컥! 철컥!

두 사람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른편 벽면에서 뭔가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반 장에서 일 장 정도 되는 그것들은 흐르는 물살과 반대방향으로 꽂혀 있었는데 그 끝은 창처럼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겼다가는 벽에서 튀어나온 창들에 꼬치 꿰듯 꿰일 것 같았다.

휘이익! 슈우욱!

물 속을 통해 섬뜩한 굉음이 들려오며 물이 돌아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구르르! 구르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바위가 움직이는 소성이 들려오는 듯하더니 수조 안을 밝히고 있던 야명주 불빛이 사라지고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 꽉 잡으세요, 이소저.]

[ 아, 알았어요.]

이지약은 연우강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팔로는 그의 목을 껴안고 두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감았다.

‘ 장난이 아니네.’

연우강은 물을 끌어당겨 막을 치면서 벽으로부터 멀어졌다. 물살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연우강은 모든 감각을 풀어 전면을 살폈다.

벽에서 튀어나온 무기도 조심해야 하고 물살에 섞여 있는 초살 또한 조심해야 했다. 벌써 당한 자가 생긴 듯 흐느적거리며 물살에 휩쓸려 돌아가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물살을 따라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느닷없이 이지약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지약이 숨이 턱에 찼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바로 입술을 맞췄다. 호흡을 나누면서도 연우강은 사방을 살폈다.

[ 혹시 몇 바퀴 돌았는지 기억해요?]

[ 열바퀴 돌았어요.]

‘ 열 바퀴라.....’

연우강은 내심 중얼거리며 감각을 풀어 아래쪽을 살폈다.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의 움직임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물살이 워낙 거칠어 뭔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은 물살에 맡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퍽! 퍽! 퍽퍽!

사방에 친 막으로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초살도에 당한 무인들의 시체인 모양이었다.

슈우욱!

갑자기 들려왔던 물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 물이 빠지는 곳인가 봐요.]

호흡이 안정을 되찾자 이지약은 얼굴을 떼어냈다.

[ 선택하세요.]

[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거죠?]

[ 물이 빠지는 곳에 생문과 사문이 있었잖아요.]

[ 처음 동정호 지하로 들어왔을 때를 말하는 거예요?]

동정호 지하로 처음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 네.]

[ 그때는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들어왔어요, 연 공자.]

[ 하지만 그때는 초대를 받은 입장이었죠.]

[ 지금은 밀천에서 우릴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고요.]

[ 그래서 선택을 하라는 한 겁니다.]

[ 전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 네?]

[ 아니에요, 일단 흐름을 타요. ]

[ 그곳이 생문이라고 생각하세요?]

[ 제가 나천후라면 흐름을 타고 들어온 쪽에 생문을 만들겠어요.]

[ 왜죠?]

[ 그냥 육감이에요, 또 답답해요, 연 공자.]

[ 재미 붙였네요.]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이지약의 입술을 찾았다.

[ 연 공자는 운이 없고요.]

[ 왜 운이 없다는 거죠?]

[ 저처럼 예쁜 여자와 입맞춤을 하는데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어야 하잖아요.]

[ 입맞춤을 즐길 형편이 아니라는 말?]

[ 전 나쁘지 않아요.]

[ 그럼 다른 방법이 있지요.]

[ 어떤.....?]

[ 바로 이겁니다.]

연우강은 이지약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내려 엉덩이를 와락 그러쥐었다.

[ 여, 연공자]

이지약은 깜짝 놀라며 빽 소리쳤다.

[ 불빛입니다. 이 소저.]

[ 불빛이라고요?]

이지약은 깜짝 놀라 입술을 떼고는 고개를 돌렸다.

연우강의 말처럼 오 장 떨어진 곳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 뭘까요?]

[ 아마 이 수조를 나가는 출구일 겁니다.]

[ 출구에는 불이 밝혀져 있다는 뜻인가요?]

[ 그랬으면 좋겠는데.....]

연우강은 말끝을 흐리며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 아니라는 말인가요?]

[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연우강은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하지만 희미한 그림자만 보일 뿐 불빛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연우강이 본 불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담대무궁의 손에 들린 야명주였다. 담대무궁은 수조에 이상이 생기자마자 곧바로 검은 옷을 걸친 자를 한 명 생포해서 그 자를 협박하여 생문을 찾아 들어온 상황이었다.

생문과 사문은 앞은 얇고 뒤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벽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자리해 있었는데 오른편이 생문이었다. 검은 옷을 걸친 사내가 가진 아미자를 빼앗아 그것으로 사내의 팔을 벽면에 대고 못을 박는 것처럼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사내의 마혈을 제압해 두었다.

혹시 일이 잘못됐을 경우 빠져나가는 길을 가르쳐줄 놈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한 다음 담대무궁은 벽면에 검을 박아 넣고 그곳에 몸을 지탱했다. 물이 빠녀가가면서 엄청난 압력이 밀려왔지만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귀식대법이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서 있는 이유는 등천사노 때문이었다.

‘ 죽인다, 놈! 네놈만큼은 반드시.’

담대무궁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 오는구나, 놈!’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자 담대무궁은 쥐고 있던 야명주를 품속으로 집어넣고 전 내공을 왼손에 집중했다.

굳이 놈의 숨통을 끊어놓을 이유가 없다. 바로 옆에 있는 사문에 밀어넣기만 하면 끝날 터였다.

[ 야명주가 사라졌어요, 연 공자.]

이지약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 전력으로 달려갈 테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연우강은 나직이 말하고는 조금 전 야명주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차앗!’

담대무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연우강을 향해 왼손을 쭉 내밀었다. 이제 육성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범천담대세가의 무적뇌화결은 엄청났다.

그의 손끝에서 새파란 뇌전 기운이 튀어나오더니 주변 물을 증발시키며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연우강 품에 안겨 있는 이지약의 등이었다.

‘ 빌어먹을!’

연우강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녀석은 다름아닌 담대무궁이었다.

녀석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을 막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녀석의 공격을 막아낸 다음에 오는 반발력이다. 잘못하면 그 반발력으로 사문으로 빨려들고 말 터였다.

‘ 밀고 간다!’

결심을 굳히고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그이 손끝이 향하는 곳에 둥근 방패 형태로 수막이 나타나고 이지약의 등으로 향하던 무적뇌화결의 푸른 기운을 막아섰다.

쿠웅!

두 기운이 부딪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연우강은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그의 신형은 뒤로 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담대무궁의 두 번째 공격이 밀려왔다. 이번에도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적뇌화결이었다. 연우강은 기다렸다는 듯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밀어냈다.

그의 전면으로 커다란 수막이 생겨나고 그것이 곧바로 무적뇌화결을 향해 쏘아져갔다. 두 기운이 채 부딪치기도 전에 연우강은 다시 어뢰를 만들어냈다.

쿠쿠쿵!

물살이 좌우로 퍼져나가는 광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 차앗!’

바로 그 순간 연우강 품에 안겨 있던 이지약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담대무궁을 향해 양손을 뻗어냈다. 그녀의 두 다리는 여전히 연우강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였다.

연우강 또한 그녀에 이어 어뢰를 쏘아 보냈다.

바로 그 순간.

통로 천장으로부터 검은 물체 하나가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내렸다. 천장의 벽을 타고 몸을 날린 탓에 사내의 움직임은 물 속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지금껏 다른 수마들이 들었던 아미자 대신 창을 쥐고 있는 이자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우강만큼은 반드시 사문으로 밀어넣으라는 명령을 받은 환밀이었다.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가는 환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 넌 죽는다, 놈!’

환밀은 내심 중얼거리며 창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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