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76화 (76/232)

제 3장 오늘 하루

‘ 염병할!’

연우강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상체를 뒤로 젖힌 이지약에게는 피해가 없겠지만 문제는 자신이었다. 위쪽에서 쏘아져 오는 놈은 아주 절묘한 순간에 절묘한 곳을 노리고 공격을 해왔다.

놈이 노리는 곳은 다름 아닌 오른편 가슴이다.

생문과 가까운 오른편으로 몸을 피하게 되면 창은 왼편 심장을 찌르게 될 테다.

물론 수화불침에 웬만한 무기는 튕겨낼 정도로 단단한 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충격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충격을 받는 순간에 담대무궁이 공격해 온다면 갈 곳은 사문밖에 없을 테다.

‘ 몸으로 받는다.’

연우강은 전 내공을 끌어올려 날카로운 기운이 밀려오는 곳으로 집중했다. 바로 그 순간, 강기를 잔뜩 머금은 창 끝이 연우강의 오른편 가슴을 강타했다.

까앙!

물 속을 타고 쇳덩이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환밀의 창이 창 끝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변해갔다.

‘ 헉!’

물속에서 입을 벌리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밀천무영대 대주가 되면서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너무 놀란 나머지 환밀은 입을 쩍 벌리고 만 것이다.

벌어진 입 안으로 물이 벌컥벌컥 쏟아져 들어왔다.

더불어 가루로 변한 창을 따라 그의 신형도 연우강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 이미 쏘아진 화살일 뿐.’

환밀은 양손에 전 내력을 집중했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가슴을 향해 사정없이 후려쳤다.

‘ 어림없다!’

상체를 젖히고 있던 이지약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양손을 쭉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떠난 장력은 물살을 가르며 환밀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갔다.

퍼억!

퍽!

먼저 환밀의 양손이 연우강의 가슴에 작렬하고 이어 이지약의 장력이 환밀의 가슴에 작렬했다.

‘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계집.’

환밀은 연우강의 가슴을 틀어쥠과 동시에 사문이 있는 곳으로 집어던졌다.

바로 그 순간 연우강의 발이 있을 곳을 향해 새파란 광채가 쏘아져 왔다. 절묘한 순간에 펼쳐진 담대무궁의 공격이었다.

‘ 빌어먹을!’

다른 무공이라면 그대로 맞아주겠지만, 범천담대세가의 무공인 무적뇌화결에 발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연우강은 환밀의 목을 향해 오른손을 찔러 넣으며 바닥을 찼다 쫙 펴진 그의 손끝이 환밀의 목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몸이 왼편으로 급속히 쏠렸다.

[ 이 소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세요.]

연우강은 환밀의 시체를 오른편으로 홱 뿌리치며 전음을 보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은 빠르게 사문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설사 사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지약을 생문 쪽으로 던진다면 그녀는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만 살자고 그럴 순 없어요, 연 공자.]

이지약은 두 다리로 연우강의 허리를 더욱 세게 조이고 두 팔로는 그의 목을 감쌌다.

[ 함께 죽겠다는 말입니까?]

[ 죽기는 왜 죽어요, 함께 살아야죠.]

[ 그게 마음처럼 됩니까?]

스아악!

바로 그때 또다시 담대무궁이 있는 곳으로부터 푸른 광채가 밀려왔다. 연우강은 ㄷㅁ대무궁을 보았다. 그가 펼친 무적뇌화결의 광채를 인해 한순간에 주변이 밝아졌는데, 녀석의 왼팔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좋습니다. 함께 살아보도록 하죠.]

피식 웃으며 사문으로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아직 사문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허리품에 매달린 뇌섬을 뽑아 벽면에 박아 넣었다.

[ 아직 방법이 있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이 소저.]

[ 아닌 것 같은데요.]

이지약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거의 두께가 일 장에 달하는 거대한 석문이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밀려오고 있었다. 통로가 좁아지면서 물살은 거의 쏘아진 화살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빨라졌다.

마라천력으로 사망혈삭을 잡고 있던 연우강의 얼굴에 힘줄이 돋았다.

이런저런 싸움과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곳곳에 찢겨졌던 옷들이 북 찢겨 나가며 순식간에 물살을 타고 멀어졌다. 연우강은 슬쩍 시선을 도렬 봇짐을 보았다.

띠를 강한 놈으로 해서 그런지 봇잠은 아직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가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연우강은 벽면에 박아 넣었던 뇌섬을 뽑았다.

그가 뇌섬을 뽑자마자 조금 전 찢겨나간 옷가지가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물살에 휩쓸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지약을 껴안은 연우강은 전 내공을 끌어올려 몸 주변에 강기막을 쳤다.

[ 뭐가 있을까요?]

이지약은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 물살이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 소저.]

[ 통로가 좁아지고 있다는 뜻인가요?]

[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주머니 안에 있는 야명주 좀 꺼내보세요.]

[ 맞다, 그게 있었지.]

연우강은 얼른 주머니를 뒤져 야명주를 꺼내 주변을 비췄다. 하지만 야명주 조각 두 개로부터 나온 빛은 미약했다. 바로 앞을 보는 건 가능했지만 주변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 없는 게 낫겠어요.]

이지약은 주변을 살피는 걸 포기했다.

[ 나쁘지 않은데요?]

[ 뭐가요?]

[ 이 소저 몸매 말입니다.]

[ 제 몸매라고요?]

이자약은 깜짝 놀라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 풋!]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슴 가리개가 아직 남아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상의는 엉망으로 찢겨진 상태고, 아래쪽 속옷도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 웃는 걸 보니 아직 여유가 있다는 거군요.]

[ 아래쪽 속옷하고 가슴 가리개, 연 공자가 제게 판 거예요.]

[ 그런가요? 어째 눈에 익은 것 같았습니다.]

[ 미안해서 어쩌죠?]

[ 뭐가요?]

[ 또 숨이 차요, 연 공자.]

[ 전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이 소저.]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이지약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다시 입맞춤은 시작되었다.

[ 내공의 유무와 숨을 쉬는 건 별개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 내공은 없어도 살지만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잖아요.]

두 사람은 입을 맞춘 상태에서 혜광심어로 대화를 나눴다.

[ 물살이 느려지고 있어요, 연 공자.]

갑자기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지자 그녀의 얼굴에 불안의 그림자가 어렸다.

[ 이제부터 시작인 모양입니다.]

연우강은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직 특별한 징후가 발견되진 않았다. 그렇게 물을 타고 흘러내려 가던 두 사람이 한 곳에 멈췄다. 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막다른 곳이 나타난 것이었다.

[ 일단 뭐가 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연우강은 입ㅇ르 맞춘 상태 그대로 바닥까지 내려갔다.

[ 있네요.]

연우강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물살이 잦아지기에 혹시 이곳에 시체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짐작대로 아래쪽에 검은 옷을 걸친 시체 몇 구가 뒹굴고 있었다.

[공기 주머니를 빼내야겠어요.]

[ 아직 남아있을까요?]

[ 없으면 우린 정말로 죽습니다. 이 소저.]

[ 연공자는 아직 귀식대법....]

이지약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귀식대법은 기본적으로 호흡을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그 상태에서는 상대방에게 호흡을 나눠줄 수가 없다. 그는 진작부터 귀식대법을 풀고 있었는데 자신은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어차피 담대무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귀식대법을 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미안해요. 제 생각만 하고......]

이지약은 고개를 푹 숙였다.

[ 우선 공기주머니부터 챙기도록 합시다.]

[ 알았어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허리에서 다리를 풀고 시체를 살폈다. 다행히 몇몇 시체들은 공기 주머니를 꽉 문 상태였다. 그것들로부터 조심스럽게 공기 주머니를 떼어내고, 길게 나온 주둥이는 연우강이 마라천력으로 입구를 막으며 뽑아냈다. 열 구의 시체 중 공기 주머니가 멀쩡한 것은 세 개에 불과했다.

[ 이놈은 상당히 빵빵합니다.]

연우강이 약간 통통한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며 활짝 웃었다.

[ 연 공자, 먼저 하세요.]

[ 전 아직 견딜만 합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공기 주머니 주둥이를 이지약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 연 공자........]

이지약은 혜광심어를 보내다 말고 반강제적으로 밀고 들어온 공기 주머니 주둥이를 입에 물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오자 비로소 답답했던 속이 풀렸다. 그녀는 두 번에 걸쳐 숨을 쉰 다음 연우강을 보았다.

[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계속 하세요.]

연우강은 공기 주머니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공기의 양이 줄어들자 공기 주머니 또한 얄팍해지고 있었다. 다시 두 번을 더 숨을 쉰 이지약은 공기 주머니 주둥이를 가리키며 가져가라는 시늉을 했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지약의 입 앞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녀는 재빨리 공기 주머니 주둥이를 뽑아 연우강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연우강은 얼른 입을 벌려 그걸 물고는 공기를 흡입했다.

공기를 전부 흡입한 연우강과 이지약은 서로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슈아악!

바로 그때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안기세요, 이 소저.]

공기 주머니 두 개를 챙긴 연우강은 이지약을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르릉!

이지약이 두 다리로 연우강의 허리를 감는 순간 왼편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며 물이 엄청난 속도로 빨려 나갔다.

[ 방향이 바뀌어서 시체가 모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사문이라고 하더니 별로.......]

[ 꽉 잡으세요.]

느닷없이 연우강의 신형이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연우강이 몸을 날리자마자 이지약 또한 뒤편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서 장력이 쏘아져 나가자 연우강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쿠웅!

조금 전 두 사람이 지나온 자리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뭐죠?]

촤르르!

그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쇠사슬 감기는 소리가 들려오며 물의 유속이 빨라졌다.

[ 확인해 보죠.]

연우강은 물을 역류하여 방금 지나쳐왔던 곳으로 갔다. 검은 물체 하나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지약은 야명주를 위쪽으로 들어 올려 검은 물체를 비췄다.

‘ 맙소사.’

그녀는 신음을 내뱉었다.

폭이 일 장 정도 되는 거대한 석문이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바닥에 날카로운 칼날 수십 개가 박혀 있었다.

[ 수중에서 작동하는 작두네요.]

[ 작두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 흐르는 유속까지 수시로 변화시키는 보 역할까지 하는 기관입니다.]

[ 그렇군요.]

이지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문이란 말이 비로소 실감났다.

재보지 않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한 시진 이상 지났을 것이다. 설사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고 해도 그 정도 시간을 물 속에서 보내게 되면 질식해 죽었을 터인데, 자신들은 사투까지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관에 의해 작동되는 거대한 작두는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연우강의 말처럼 작두가 떨어질 때는 유속이 느려지고 위로 올라가면서 다시 유속이 빨라지는, 물의 흐름 자체가 행동을 제약하는 기관이 되고 있다.

누가 설계했는지 대단한 기관이 아닐 수 없었다.

[ 이제 어떤 놈인지 알았으니까 가보죠.]

연우강은 내기를 끌어올려 자신과 이지약의 몸을 보호하면서 물의 흐름을 탔다. 한 몸이 된 두 사람은 빠르게 나아갔다.

촤르르!

또다시 쇠사슬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바짝 긴장한 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지나갑니다.]

연우강이 소리치자, 이지약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뒤편을 향해 장력을 쏘아댔다. 연우강이 나아가는 속도에 이지약의 장력이 더해지자 둘의 신형은 물속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나아갔다.

위쪽에서는 계속해서 아래쪽에 수십 개의 칼날이 박힌 보가 떨어져 내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좌우 측 벽에서 물 속에서 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살 형태의 수전이 튀어나왔지만 두 사람을 어떻게 하진 못했다.

콰콰쾅!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데 이번엔 전면에서 뭔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물이 흘러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 공기 주머니 줘요?]

허리를 감고 있는 이지약의 다리가 느슨해지는 듯하자 연우강은 그녀의 몸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잖아요. 지금은 아끼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목에 팔을 걸치고는 입맞춤을 했다. 몇 번 하다 보니 이젠 그와의 입맞춤이 부끄럽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맞춤을 음미하는 여유마저 생겼다.

[ 그러다 습관 됩니다. 이 소저.]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며 연우강은 빠르게 물 속을 헤엄쳐 나갔다. 계속해서 보가 떨어져 내렸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탓인지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위에서 떨어지는 보보다는 점점 커지는 물소리가 더 불안했다. 마치 폭포가 있는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거였다.

[ 폭포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 소저.]

[ 우리가 있는 이곳은 동정호 지하라고요, 연 공자.]

[ 폭포가 아니라고요?]

[ 폭포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 그럼 저 물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연우강은 전면을 가리켰다.

엄청난 기세로 나아가는 물이 갑자기 아래쪽으로 푹 꺽여 떨어지고 있었던 거였다.

‘ 억!’

이지약은 너무 놀라 혀를 쑥 내밀었다. 입맞춤으로 호흡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놀랐을 때 나오는 습관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 약간의 느낌이 오려고 합니다. 이 소저.]

‘ 헉!’

뭔가가 혀를 슬쩍 깨물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혀를 입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너무 부끄러워 얼른 입을 떼고는 연우강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 이곳이 사문의 끝이었던 모양입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죠?]

[ 조금 전에 들렸던 소리는 벽이 터져 나가는 소리였습니다. 여기 아니면 그런 소리가 날 곳이 없잖아요. 아무튼 혹시 동굴 같은 거 있나 잘 살피세요.]

그렇게 말하고 연우강은 아래로 쏟아지는 물에 몸을 맡겼다.

[ 피이! 지금껏 동굴을 지나왔으면서 또 동굴은 무슨.]

[ 저 아래쪽으로 떨어지면 정말로 빠져나올 방법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소저. 여긴 누군가 만든 게 아니라 천연 동굴이란 말입니다.]

[ 정말.. 있어요, 연공자.]

만일 손에 야명주를 쥐고 있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로 동굴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연우강은 이지약의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신형을 뒤로 튕겼다. 등이 벽면에 닿자 그는 양발을 놀려서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턱!

양손을 위로 뻗고 있던 이지약의 손에 동굴의 가장자리가 잡혔다. 그녀는 양손에 힘을 주어 자신과 연우강의 몸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털썩!

“ 후와!”

동굴 안으로 들어선 이지약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잔뜩 갈증 난 사람이 물을 마시듯 쉬지 않고 공기를 폐속으로 밀어 넣었다.

느닷없이 신선한 공기가 들어차자 온몸이 나른해졌다. ㄱ녀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봇짐을 벗어 한편으로 던져버린 연우강은 큰 대자로 뻗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무슨 생각 하세요?”

“ 그냥 아래로 내려갈 걸 후회하는 중입니다.”

“ 왜 후회를 한다는 거죠?”

“ 아직 이 소저의 입술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거든요.”

“ 저 아래로 내려가면 알 수 있는 기회가 올 것 같아요?”

“ 그동안에는 입맞춤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거든요.”

“ 전혀?”

“ 네.”

“ 정말?”

“ 제가 아무리 수컷이라지만 그 급박한 순간에 엉큼한 생각을 할 정도는 아닙니다. 이 소저.”

“ 아직 물이 빠져나가지 않았어요, 연 공자.”

이지약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연우강 위로 올라갔다.

“ 무, 무슨....”

깜짝 놀란 연우강이 이지약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은 코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 이 동굴에 물이 가득 들어차 있고, 전 지금 숨이 목까지 차 올라 있어요. 가슴이 답답하여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고, 볼은 한껏 부풀어 있어요. 연 공자가 호흡을 나눠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이지약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우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연우강은 혼란스러웠다.

그녀와 숱한 입맞춤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녀도 급했지만 자신 또한 입맞춤을 통해 숨을 들이키곤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 지금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 연 공자.]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귓전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잇새를 뚫고 혀가 쑥 밀고 들어왔다. 연우강은 이지약을 힘껏 껴안았다. 그러고는 격렬하게 입맞춤을 했다.

입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혀를 끌어당겼다가 다시 밀어냈다. 그렇게 도망치는 혀를 쫓아 그녀의 입 안을 헤집고 다녔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연우강은 손 끝에 걸리는 가슴 가리개 끈을 풀어냈고, 이지약은 연우강 위쪽에 말을 타는 자세로 앉아 그의 옷을 벗겨냈다. 가슴 가리개가 흘러내려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지만 그녀는 연우강의 옷을 벗겨내느라 관심도 없었다. 거의 찢겨나간 남색 장포를 벗겨내고 안쪽의 사망묵의까지 벗겨내자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연우강이 이지약의 가슴을 그러쥐는 순간 그녀는 그의 탄탄한 가슴을 쓸었다. 가슴을 쓰다듬던 손이 아래로 향하자 그녀의 손 또한 허리춤으로 향했고,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하의를 벗겨내렸다.

이지약이 가지고 있던 야명주가 희미한 광채를 발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태초의 상태로 돌아갔다.

연우강은 눈이 부셔 자꾸 눈을 깜박였다.

이지약의 몸은 명장이 빚은 조각품 같았다.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만지면 툭 터져 버릴 것 같은 가슴과 가는 허리 그리고 만월처럼 부푼 엉덩이 선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래쪽으로 피가 쏠리며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지약은 연우강의 몸을 가만히 살폈다.

탄탄한 가슴과 왕 자가 선명한 복부, 그리고 그 아래. 그는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음미하듯 연우강의 가슴을 천천히 쓸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연우강의 모습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가슴을 지난 손이 아랫배의 왕 자를 따라 움직이고 그녀는 상체를 숙여 다시 연우강의 입술을 찾았다.

연우강은 앓는 듯한 신음을 뱉어내며 격렬하게 입맞춤을 했다. 등을 쓸던 손이 앞으로 돌아와 가슴을 쓰다듬고, 어느 순간 다시 등으로 돌아가 척추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지약의 피부는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러웠다.

원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손은 어느새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지약은 연우강의 손이 스칠 때마다 파르르 몸을 떨었다.

떨림의 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어느 순간부터 잇새를 뚫고 자꾸만 뭔가가 비어져 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애써 그 느낌을 눌러 참았다.

그러나 인내는 오래가지 못했다.

연우강이 벌떡 일어나고 입술을 더듬고 있던 그의 입이 목으로 향하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참았다. 하지만 몸 속 어딘가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덩어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고, 그녀는 모든 감각을 집중하여 그 불덩어리를 좇았다.

상체가 뒤로 젖혀지고 그의 숨결이 점차 아래쪽으로 향할수록 불덩어리는 점점 솟구쳐 올랐고, 크기 또한 커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은 어떤 기대로 인해 잔뜩 상기돼 있었다.

문득 그의 숨결이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 격렬한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사정없이 튕겼다.

그리고 화려하게 폭발하는 불꽃을 보며 참았던 신음을 토해냈다.

“ 연 공자!”

그녀는 연우강의 머리를 감싸 쥐며 이름을 불렀다.

한 번 터진 봇물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연우강의 손길이, 입김이 스칠 때마다 달뜬 신음을 뱉어냈다.

긴 꿈을 꾸어 봅니다.

그 꿈에서 전

언제나 바람이었습니다.

날개가 없어도, 훨훨 날아다니는

그런 바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꿈에서 깨면 저는

바람에 소식을 실어 보내고, 내리는 빗물로 목마름을 달래는 호수가 됩니다.

늘 그랬습니다.

꿈에서는 바람이, 깨어서는 호수가 되는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꿈일 겁니다.

꿈이 아니라면 바람이 될 리가 없을 테니까요.

꿈에서는 원하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미친 사랑을 해도

광란에 몸부림 쳐도

기쁨의 신음을 내질러도

누구도 욕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호수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꿈이 좋습니다.

바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꿈이.

둘만의 공간.

둘만의 시간.

그곳에는 예의도 없고, 응천부의 공주라는 신분도, 부하의 정혼자라는 죄책감도,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그리고 내일도 없었다. 수십 장 깊이의 지하 공간은 예의나 신분이나 각자가 처한 사정마저도 날름 삼켜버리고 남자와 여자와 현재의 시간만 남겼다. 신음과 비음과 탄성과 다급함과 열정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길고 격렬했던 항해는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탄성과 함께 끝을 맺었다. 이지약은 연우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연우강은 천천히 그녀의 등을 쓸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느꼈다.

“ 당신은 누구죠?”

이지약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순서가 틀렸습니다. 이 소저.”

“ 무슨 말이죠?”

“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이 누군지 먼저 확인하고 나서 잠을 자거든요.”

“ 풋!”

이지약은 픽 웃었다.

“ 마음에 들어요?”

“ 뭐가요?”

“ 우리가 함께 잔 거.”

“ .... 무림에 나오길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 공자는?”

“ 전 이곳을 설계한 사람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 우린 죽을 뻔했어요. 아니 연 공자의 그 특이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예요.”

“ 죽는 게 두려워요?”

“ 지금은 두렵지 않아요.”

“ 다행이네요.”

“ 그래요, 저도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보다 대답 안 해줘요?”

“ 제 과거가 궁금해요?”

“ 당신의 과거가 궁금한 게 아니고 당신이 궁금해서 그래요.”

“ 저에 대해 알려면 과거를 알아야 하잖아요.”

“ 말하기 곤란해요?” “ 곤란할 건 없어요. 다만 알려지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생길 수 있거든요.”

“ 알려지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신분이라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인데, 혹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 그렇게 되는 건가요?”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일단 말해봐요. 과대망상증 환자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해 드릴테니까요.”

“ 과대망상증 환자면 어떡하죠?”

“ 치료를 해야지요.”

“ 어떻게 치료를 하는데요?”

“ 증상을 알아야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도 몰라요?”

“ 친아버지 이름자가 주자 선자 엽자십니다.”

연우강의 어깨를 쓰다듬고 있던 이지약의 손이 우뚝 멈췄다.

“ 놀랐어요?”

연우강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이지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놀라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 놀랄 필요는 없잖아요. 더구나 그 양반들이 제게 도움을 줄 것도 아니고.”

“ 놀라야 할 일이 맞는 것 같은데요?”

“ 그런데 왜 놀라지 않죠?”

“ 연 공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니까 그렇죠. 그리고 지금은 놀란 표정을 짓기엔 우리 모습이 너무 민망하잖아요.”

“ 그런가요?”

“ 제 말이 맞아요. 연 공자. 그럼 연 공자 친부께서 묵사였다는 것도 알고 계셨겠네요?”

“ 철이 들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아세요?”

“ 무영들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 무영들을 죽인 건 복수 때문인가요?”

“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인데 복수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잖아요.”

“ 그럼 무영들을 죽이는 이유가 뭐죠?”

“ 왜 그런 감정들 있잖아요. 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막상 눈앞에서 벌어지면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곤 하는 그런 일 말입니다. 제 경두고 그런 것 같습니다.”

“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의무감이란 말이죠?”

“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 그러면 연 공자가 펼치는 그 특이한 능력은 마라천력인가요?”

“ 제 친아버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이네요?”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이지약을 보았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친아버지는 황실 종친으로도 등재돼 있지 않다. 족보에 등재하지 않는 자는 보통 가문에서 파문시킨 자들밖에 없고, 친아버지 또한 그렇게 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지약이 친아버지가 마라천력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제가 강호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연 공자 부친 때문이에요.”

“ 그러면 그분이 우리 둘을 맺어준 매파가 되는 건가요?”

“ 어? 호호호! 그렇게 됐네요.”

이지약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친부를 찾는 이유를 먼저 물을 터인데 그는 엉뚱한 방향으로 말을 돌려버리는 재주를 지녔다. 더욱 기분 좋은 것은 그 엉뚱함의 결과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쪽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 태어나 처음으로 친아버지께 효도를 하고 싶습니다. 이 소저.”

등에 머물고 있던 연우강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 어떻게 효도를 한다는 말이죠?”

약간은 간지러운 듯한 느낌을 음미하며 이지약은 물었다.

“ 그분이 점지해준 여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고의 효도 아니겠습니까?”

허리를 더듬던 손이 어느새 엉덩이까지 침범하여 천천히 움직였다.

“ 아버진 핑계 같은데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 제가 효도하는 게 싫어요?”

“ 절대 그렇지 않아요. 효도는 자식으로서 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라고 알고 있어요. 효도를 제대로 못하는 자식은 혼을 내줘야 해요.”

“ 저도 혼낼 건가요?”

“ 그건 두고 봐야죠.”

이지약은 천천히 연우강의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격렬했던 처음과는 달리 두 번째는 서로의 반응을 즐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때로는 서로의 눈을 보며 웃고, 때로는 장난을 치며 입을 맞추고, 때로는 간지러움을 태우기도 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두 사람이 잠에서 깬 건 갑자기 밀려든 차가운 기운 때문이었다.

“ 저놈의 물은 지치지도 않네요.”

연우강은 어이 없는 얼굴로 동굴 바닥으로 스며들어온 물을 손바닥에 받아 홱 뿌렸다. 마치 홍수가 난 것처럼 물은 빠르게 동굴을 채워나갔다. 두 사람은 벗어두었떤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 일단 이거라도 걸치세요.”

연우강은 사망묵의를 이지약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 연 공자?”

“ 저는 이걸 걸쳐야지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봇짐을 등에 걸머졌다.

“ 호호호! 아무튼 가요.”

알몸에 봇짐 하나만 달랑 걸머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이지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웃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 소저.”

“ 공기가 흐르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외부와 통하는 통로가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야명주를 집어든 그녀는 앞장서 걸었다.

동굴은 약간 위쪽으로 경사진 형태로 이어져 있었다.

“ 단순한 동굴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야명주로 좌우를 비추며 걷던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연 동굴처럼 보이는 곳곳에 인공이 가미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를 걸었을까.

두 사람 앞에 도끼자국처럼 푹 파인 협곡이 나타났다. 건너편까지는 삼 장 가량 되는 그곳엔 중심으로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 누가 만들었는지 점점 궁금해지네요.”

이지약은 경이로운 눈으로 구름다리를 보았다.

“ 일단 시간은 벌었군요.”

연우강은 빙긋 웃으며 구름다리로 발을 들여놓았다. 돌로 만들어진 탓인 듯 다리는 튼튼했다.

“ 호호호!”

연우강을 지켜보던 이지약의 입에서 상쾌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왜 그러죠?”

다리를 건너다 말고 연우강은 이지약을 돌아보았다.

“ 알몸에 봇짐 하나만 달랑 매고 있는 연 공자의 행색이 우스워서 그래요.”

“ 이 소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연우강은 이지약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 또한 사망묵의 앞이 훤히 트인 상태라 가슴이며 아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 흥! 가요.”

그녀는 종종걸음 치며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구름다리를 건너서 십여 장 나아가자 이번엔 두 사람 앞에 환한 불빛이 나타났다.

“ 집이에요, 연 공자.”

“ 그렇군요.”

두 사람은 넋을 잃었다.

동정호 및 수십 장 지하. 이런 곳에서 설마 집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절벽을 파서 만든 듯한 집은 절벽 밖으로 드러난 지붕의 처마 쪽으로 빙 둘러 야명주가 박혀 있었다.

“ 얼른 가봐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손을 잡고 계단을 뛰어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 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안쪽은 일반 가정집과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바닥에 양탄자가 깔려 있고, 양탄자 중앙에는 탁자가, 그리고 벽에는 야명주를 박아 넣은 벽등이 걸려 있다.

오른편에는 침실이, 왼편에는 욕실과 화장실까지 만들어져 있어, 음식만 충분하다면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 전부 바위로 만들었네요.”

양탄자를 쳐다보던 연우강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비단 양탄자뿐만이 아니었다. 안쪽에 있는 가재도구의 재질은 모두가 바위였는데,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실물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 누가 이곳을 만들었을까요?”

이지약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 침실에 뭔가가 있을 겁니다.”

연우강은 오른편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짐작대로 침실엔 이곳을 만든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침상 오른편에 돌로 만들어진 협탁이 있었는데 협탁의 서랍 안에는, 돌을 얇게 다듬어 글을 적어 놓은 석편 이십 장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연우강은 맨 위쪽에 있는 석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석편 위쪽에 씌어진 글을 쳐다보던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눈에 익은 전서체로 씌어져 있었던 거였다.

“ 혹시 천수귀장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연우강은 이지약에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별호에요.”

“ 별호라고요?”

“ 천수귀장 혁미월은 천오백 년 전 중원 최고의 장인이었어요.”

이지약은 놀란 눈으로 연우강의 손에 들린 석편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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