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78화 (78/232)

제 5장 사부 노릇

“ 놀랐는가?”

“ 그걸 태연하게 말하는 장인어른이 더 놀랍습니다.”

“ 하하하! 자넨 아직 대야벌을 완전하게 알려면 멀었구먼. 대야벌을 세운 주체가 영세오천인데 그들의 후예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습니다.”

“ 갑작스러운 게 아니네. 나중에 세워진 황궐과 무궐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력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영세오천과 관련이 있을 거네. 다만 영세오천의 후예였다는 사실이 잊혀졌을 뿐이네.”

“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막장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사실 이건 원래 비밀로 해야 하는데......”

“ 연화를 생각하십시오, 어르신.”

“ 엉? 프! 하하하! 자네, 연 공자와 함께 다니더니 말빨이 많이 늘었네그려.”

두보관은 크게 웃었다.

이리저리 주워들은 말에 의하면 철장마도 막장은 과묵하고 딱 부러진 성격에 무공밖에 모르는 무공광이었다.

그런 그가 툭 던지는 농담을 듣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진다.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비 입장에서는 무공밖에 모르는 무공광보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여유를 가진 그런 사람이 더 좋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는데 아는 건 엄청나게 많습니다. 녀석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그동안 뭘 배웠는가?”

“ 저를 가리켜 돈은 쥐꼬리만큼 벌어오고, 밤일은 부실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고, 먹는 것만 돼지새끼처럼 처먹는 잡놈이라 하였습니다.”

“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 그런데 정말 밤일이 없는 건가?”

“ 글쎄 그게.....”

“ 전에 먹던 약은 뭔가?”

문득 막장이 매일 달여먹던 약이 떠올라 물었다.

“ 우강이 녀석이 지어준 약입니다.”

“ 어떤 약이냐고 물었네.”

“ 그건......”

“ 정력젠가?”

두보관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가 막장에게 원하는 건 패천림의 림주가 아니라 훌륭한 남편이다. 부부생활이라는 게 밤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부실한 부부생활은 부부관계가 깨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웃고 넘길 사항은 절대 아니었다.

“ 정력제는 아니고 머릿속에서 무공 구결을 몰아내고 여체를 채우는 약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니까 자넨 여자보다 무공을 더 좋아한다는 말인가?”

“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오늘부터는 아침저녁으로 복용하도록 하게.”

“ 자, 장인어른.”

막장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 난 내딸이 행복하길 바라네. 손자도 안아보고 싶고.”

“ 아, 알겠습니다. 복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막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런데 어디까지 했는가?”

“ 비밀이란 말까지 하셨습니다.”

“ 맞다. 거기까지 했지. 아무튼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림주가 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니까 그렇게 알게.”

“ 반드시 림주가 되라는 말로 새겨듣겠습니다.”

“ 지천의 일백마를 아는가?”

“ 지금 강호 무림은 일백마가 묻혔다는 마총 장보도 때문에 난리가 아닙니다. 장인어른.”

“ 그렇겠지. 지천의 최강 무인들이었으니까.”

“ 그런데 패천림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 그게 이상하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 그 이유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오네. 우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세.”

“ 경청하겠습니다. 장인어른.”

“ 전쟁이 장기화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 충천했던 사기는 떨어지고 마지못해 전쟁을 치르게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맞네. 전쟁을 시작했던 명분이 약해지면서 왜 싸워야 하는지 회의가 들기 시작하네.”

“ 지천이 그랬단 말입니까?”

“ 지천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을 거네. 보통 그런 상황이 오면 각 조직의 수뇌들은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게 되는데, 지천에서는 천등십관이라는 파격을 준비했네.”

“ 하늘에 오르는 관문이란 말입니까?”

“ 그렇다네. 그 당시 최고의 장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천수귀장 혁미월을 초빙하여 관문을 만들고 그 관문을 전부 통과한 자에게는 천주 자리를 주겠다고 공언을 했다네.”

“ 대단하군요.”

“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네. 하여튼 제일관문인 초식지관부터 시작하여 십관인 만상지관까지 설치하고 그 곳을 지천의 십장로에게 맡겼네.”

“ 통과가 쉽지 않겠군요.”

“ 그렇다고 해도 천주 자리는 강력한 유혹이었다네. 수많은 무인이 천등십관에 도전장을 내밀게 되네. 하지만 제일관을 통과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았다네.”

“ 그러면 관문을 설치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 그래서 생긴 규칙이 삼관등천이네.”

“ 삼관등천은 어떤 규칙입니까?”

“ 삼관을 통과한 무인에게 십관에 도전할 자격을 주는 규칙을 말하네.”

“ 삼관밖에 통과하지 못한 자가 십관을 통과하는 건 더 어려운 일 아닙니까?”

“ 물론 십관을 맡은 자가 원래대로 장로라면 그렇겠지만, 장로 대신 바로 전에 통과한 자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가?”

“ 아!”

막장은 탄성을 내뱉었다.

전에 관문을 통과한 자를 마지막 관문에 두었다는 건 곧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 바로 그거네. 천등십관은 관문 통과뿐만 아니라 동료들과의 경쟁까지 이끌어내는 아주 효과적인 관문으로 발전했다네. 처음 얼마간은 말이네.”

“ 처음 얼마간이라면?”

“ 묘하게 시간이 지나면서 지천 수뇌들은 천등십관에 도전하는 걸 꺼리는 현상이 발생한 거네.”

“ 왜죠?”

“ 관문이 너무 강해서 발생한 현상이네.”

“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통과해도 본전이고 통과하지 못하면 명예에 치명타가 되는 천등십관에 도전을 하지 않게 됐다는 거군요.”

“ 어차피 십관을 전부 통과하지 못할 텐데 도전을 감행하고 바보가 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 그럼 천등십관은 폐쇄됐습니까?”

“ 아니네. 계속 유지됐네. 다만 하위 무인들의 신분 상승의 장으로 전락했을 뿐이네.”

“ 그러면 십관을 전부 통과한 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겁니까?”

“ 십관을 전부 통과한 자에게는 범천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일대 범천이자 마지막 범천이 바로 천마 제석강이었네. 그때 그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고.”

“ 아!”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를 왜 그렇게 위대한 무인이라 부르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됐다. 영세오천의 한 곳은 지천의 고수들마저 포기했던 관문을 전부 통과한 그는 엄청난 무인일 수밖에 없었다.

“ 아무튼 천마로 인해 지천은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네.”

“ 천마 제석강이 지천 수뇌 출신이 아니었다는 것 때문이었군요.”

“ 그렇다네. 천마난 천등십관에 도전하기 전까지는 거의 야인에 가까웠다네. 그런 자를 천주로 모시게 생겼으니 다른 가문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지.”

“ 그들과는 달리 하급 무인들은 천마를 떠받들었겠지요.”

“ 맞네. 천등십관 중 오관을 통과한 자들로 이루어진 일백 명의 마인들이 천마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는데 그들이 바로 천마의 친위대로 불리는 일백마였다네.”

“ 천마 같은 막강한 무인이 지천의 천주가 됐다면?”

“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남았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냐는 물음인가?”

“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무림사에서 인정하는 최강 무인이 천마고 그를 따르는 일백마 또한 최강 아닙니까?”

“ 천마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지천의 수뇌 가문들 때문이네. 그들은 천마와 일백마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지천 속의 또 다른 세력으로 간주했네. 결국 천마는 지천의 천주이면서도 영세오천의 전부와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네. 그가 지금까지 중원 무림의 전설이 된 이유가 바로 그 전쟁 때문이었다네. 그 전쟁을 통해 제석강은 범천이라는 칭호 대신 천마라는 별호를 얻었고, 죽어서는 고금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네. 하지만 그도 인강이었을 뿐 신은 되지 못했네. 삼십여 년의 전쟁으로 천마의 세력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차에 지금은 파천육기로 불리고 있는 여섯 무기의 주인이 나타나면서 천마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네. 파천육기의 주인들 중 특히 마제 가립하는 젊은 천마 같았다고 하네.”

“ 천마가 마총을 만들고 일백마를 전부 데리고 들어간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 그런 셈이네. 그는 전쟁을 통해 얻은 심득은 물론이고 일백마에게 전수했던 많은 무공이 자신의 적에게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네. 결국 천등십관을 만들었고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천수귀장 혁미월에게 부탁하여 무덤을 만들게되는데 그 무덤이 바로 마총이네.”

“ 그렇게 된 거였군요.”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패천림은 어떻게 된 겁니까?”

“ 영세오천이 무성으로 통합되면서 지천을 비롯한 각 세력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는데, 패천림은 천등십관을 관장했던 장로들이 만든 문파네. 그들은 천등십관의 이름을 패천십관으로 바꾸고, 만상지관인 십관은 림주에게 맡겼네.”

“ 천등십관의 이름을 패천십관으로 바꾸었다고요?”

막장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패천십관을 다시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이름만 바꾸었다는 건 이곳 대야벌의 터가 곧 지천이었다는 말이었다.

“ 맞네. 천상천이 있는 진호부터 천좌산 천우산은 과거 지천의 총단이었다네.”

“ 맙소사! 그럼 마총은?”

문득 전에 연우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검지곡에 있는 석상들이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호신상이라고 했었다. 어쩌면 그 녀석이 한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무슨 말인가?”

“ 아, 아닙니다. 장인어른. 잠깐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인어른을 따르던 자가 오백 명이라는 건 어떻게 된 겁니까?”

막장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연우강의 가설이 사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녀석은 검지곡의 석상에서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마총이 만들어진 것과 석상이 만들어진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 하지만 그곳에 있던 뭔가를 부수고 다시 세웠다면? 천마가 영세오천 무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마총을 세웠다면?’

또다시 공연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 에이, 그럴 리가 없을 거야.’

막장은 고개를 저어 떠오르는 상념을 털었다.

지금은 천오백 년 전에 일어났던 일보다는 현실에 더 집중해야 할 때였다.

“ 내가 패천림 무인 오백 명의 지지를 받았다는 건 곧 제오관까지 통과한 다음에 전대 림주에게 도전해 이겼다는 말이 되는 거네.”

두보관의 말이 들려오자 막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패천십관 도전자에게 패한 관문의 무인들만 따른단 말입니까?”

“ 그들 나름대로 강해지기 위한 방법이었네. 패천십관의 도전자에게 패한 관문의 무인들은 다음엔 패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될 테고, 그 노력은 곧 개인은 물론이고 패천림을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네.”

“ 그럼 일관부터 삼관에 소속된 자들은 항상 부하가 되는 셈 아닙니까?”

“ 새로운 림주가 탄생하면 담당하던 관문을 바꾼다네.”

“ 장인어른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 자네가 몇 관문까지 통과할 수 있는지 그걸 말해달라는 건가?”

“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 자넨 내가 패천십관에 도전했을 때보다 더 강하네.”

“ 패천일관은 초식지관이라고 해서 초식을 시험하는 관문이네. 일백 명의 무인들이 쉬지 않고 백 초를 펼치는데 그걸 전부 막아내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옷이 찢어지는 경우와 부상을 당하는 경우를 합쳐서 다섯 번까지만 허용되는 관문이네.”

“ 옷이 찢긴 자리가 여섯 곳만 돼도 떨어진다는 말입니까?”

“ 그렇다네.”

“ 패천이관은 어떤 걸 시험하는 관문입니까?”

“ 강기지관으로 강기를 시험하는 관문이네. 강기가 아니면 자를 수 없는 물건을 쉬지 않고 일백 번을 잘라내야 하네. 패천삼관은 내공지관이네. 일백 명의 무인과 내공을 겨룬다고 보면 되네.”

“ 으음!”

막장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백 명의 무인과 내공 대결.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쉽지 않은 관문임에는 분명할 터였다.

“ 패천오관은 금강지관으로 불리는 관문인데, 일백 명이 펼치는 장력을 맨 몸으로 받아내야 하네.”

“ 맞는 건 자신 있습니다.”

어두웠던 얼굴도 잠시, 막장은 활짝 웃었다.

“ 맞는 거에 자신 있는 건 나와 같구먼.”

“ 그럼 육관은 어떤 관문입니까?”

“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네. 육관은 만독지관. 칠관은 어검지관, 팔관은 육감지관 구관은 범천지관이라고 부르네.”

“ 쉬운 관문이 하나도 없네요.”

“ 불안한가?”

“ 불안하진 않습니다. 제가 실패해도 그 일을 해줄 녀석이 있으니까요.”

막장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연 공자에게 시킬 참인가?”

“ 패천림을 완전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다면 녀석은 하지 말라고 해도 패천십관에 도전할 겁니다.”

“ 연 공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뭔가?”

지금 강호 전역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일에 연우강이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물론 막장이 옆에 있어 그러한 사실들을 알게 됐지만, 그 목적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왜 연우강이 그런 일을 꾸미는 지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잘 먹고 잘사는 게 녀석의 목적입니다.”

“ 한마디로 대야벌 같은 단체에서 오라 가라 하는 게 귀찮단 말인가?”

“ 대야벌 같은 단체가 아니라 깜도 안 되는 것들이 거치적거리는 게 싫은 겁니다.”

“ 대야벌이 까, 깜도 안 된다고?”

두보관은 황당한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 그러니까 연 공자의 목표가 대야벌을 없애버리는 거란 말인가?”

“ 어느 선까지 원하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지금 상태는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 대야벌을 우습게 보면 큰일나네. 사위. 대야벌은 외부에서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건 공연한 소문이 아니네. 이곳은 스스로 무너지기 전에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이네.”

“ 저도 전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 녀석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장인어른.”

“ 연 공자가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 신은 대야벌을 깨트릴 수 없습니다. 장인어른. 하지만 도망칠 때가 되면 명예나 체면을 생각지 않고 줄행랑을 놓을 수 있는 인간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녀석이 그런 인간입니다.”

“ 아무튼 결과는 지켜보면 알겠지.”

“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막장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끝났어요?”

막 문을 나서는데 두연화가 안으로 들어왔다.

“ 네 끝났습니다. 두 소저.”

“ 식사 하셔야죠.”

“ 먼저 약부터 달여주십시오.”

“ 약이라고요?”

“ 방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어떤 사실을 깨달았는데요?”

“ 패천림의 림주는 임기직이지만 남편은 영구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임기직은 뭐고 영구직은 뭐죠?”

“ 영구직이 훨씬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두 소저.”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았어요. 아버지 조금 있다가 식사하러 오헤요.”

안쪽에 대고 소리친 두연화는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막장은 멀어지는 두연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젠장!”

두연화의 엉덩이에 시선을 꽂고 있던 막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이건 몸은 정상인데 머리가 고자라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작군 처소를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새벽 패천십관에 도전하는 도전자가 나타났을 때만 울리는 패천신고가 우렁찬 함성을 토해냈다.

*******

가로수 하나둘 헐벗은 몸뚱이를 드러내던 가을 어느 날, 가릉강 강변에 위치한 구룡객잔에 삿갓을 쓴 자들이 찾아들었다.

삼십 명 정도 되는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방을 잡고는 사천 음식을 즐기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다름 아닌 금릉을 떠났던 욱일승 일행이었다.

“ 우리가 가장 먼저 온 모양이군.”

배가 차자 비로소 욱일승이 입을 열었다.

“ 난 이곳에 도착한 지 닷새나 됐다, 녀석아.”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망태기를 든 이자승이 안으로 들어왔다.

“ 심심했겠구나.”

욱일승이 웃으며 그를 맞았다.

“ 강태공 노릇도 할 만하더라.”

“ 고기는 좀 잡았냐?”

욱일승은 이자승의 망태기로 시선을 주었다.

“ 오늘은 제법 월척이 걸리더구나. 주인장!”

망태기를 들어 보인 이자승은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곧 객잔의 주인 왕칠우가 다가오자 망태기를 던졌다.

“ 어떻게 요리를 해드릴까요?”

“ 아주 매운 찜으로 해오게.”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어르신.”

“ 여기 있는 친구들 전부 먹을 거니까 넉넉하게 해 와야 하네.”

“ 걱정 마십시오. 손님. 생선은 아주 많습니다.”

“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면 연 공자가 사고를 아주 크게 칠 모양이구나.”

이자승이 앞에 앉자 욱일승은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 금릉 연씨 세가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냐?”

이자승은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나도 오다가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 녀석의 가족은 어떻게 됐냐?”

“ 모른다.”

“ 몰라?”

“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나가서 이야기를 합시다. 형님.”

듣고 있던 두작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 그게 낫겠다. 주인장! 음식은 준비만 해 놔. 잠깐 나갔다 와서 먹을 테니까.”

“ 알겠습니다. 손님. 술과 간단한 안주를 챙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왕칠우는 점소이를 시켜 마른안주와 술 세 통을 챙겨주었다. 술통을 받아든 일행은 가릉강 강변으로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우리가 금릉 연씨 세가에 도착했을 때는 담대민의 머리와 함께 무면천군단 삼백 명의 시체만 남아 있더라.”

술잔이 채워지자 욱일승은 다시 말을 이었다.

“ 담대민이면 담대만승의 둘째 아들 이름 아냐?”

“ 맞다.”

“ 돌아버리겠네.”

이자승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 넌 돌아버리는 정도로 끝날지 모르지만 난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자승.”

“ 허벅지에 멍이 왜 드는데?”

“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매일 꼬집어 봐야 했거든.”

“ 도대체 강호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이자승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쳐 물었다.

“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우린 그곳으로 들어갈 때 사월림의 살수 이백 명과 현의당 무인 오백 명을 유인해 갔다.”

“ 현의당이라면 만마림?”

“ 흑의사신 천세걸이란 놈이 수장이었다.”

“ 그러니까 그들을 유인해 들어가서 전부 없애고 그 다음에 펑 터졌단 말이지?”

“ 그런 셈이다.”

“ 펑 터트릴 때 쓴 건 화약이고?”

“ 당연히 그렇지.”

“ 이런 미친놈!”

술잔을 단숨에 비운 이자승은 그것도 성이 차지 않는 듯 통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 동창과 금의위를 끌어들인 것 때문에 그런 거냐?”

“ 동창과 금의위 정도가 아니다. 일승. 동창 남경지부를 맡고 있는 녀석은 화화호 유설연이란 놈인데, 동창제독 유 공공의 아들이야.”

“ 유설연?”

“ 그놈은 스스로 소제독이라 칭하며 북경의 고관대작을 제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놈이야. 함부로 대할 놈이 아니라고!”

“ 목소리 좀 낮춰라. 저기 배가 오고 있는 거 안 보여?”

이자승의 목소리가 커지자 욱일승은 강을 가리켰다. 하류로부터 배 한 척이 이편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 그 유설연이란 자가 범천조화신기를 얻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넌 못들었냐?”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자승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 내가 그 녀석에게 줘버렸습니다. 영감님.”

대답은 배에서 들려왔다.

이자승과 욱일승의 말을 듣고 있던 일행은 일제히 가릉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배 선수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동정호를 떠나온 연우강과 남궁운화였다.

배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연우강은 뱃삯을 계산하고는 남궁운화와 함께 몸을 날려 일행 앞으로 내려섰다.

“ 오랜만이네.”

“ 오랜만이네.”

일행은 활짝 웃으며 연우강과 남궁운화를 맞았다.

“ 오랜만이오, 여러분. 그동안 잘 지내셨소.”

“ 덕분에 태어나 최고의 여행을 했네.”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 때문이었다.

노인들은 이곳까지 오면서 두작군으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고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 중원을 전부 둘러보려면 오래 살아야 합니다. 오래 살려면 건강은 필수고요.”

“ 허허허! 물론이네. 연 공자. 죽을 힘을 다해 자네가 전수해준 무공을 익히도록 하겠네.”

노인들은 웃으며 각자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앉자 연우강은 이자승 일행 곁으로 다가갔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아버지.”

먼저 남궁운화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 그래, 여행은 재미있었느냐?”

욱일승은 웃으며 말했다.

“ 아주 좋았어요, 할아버지.”

남궁운화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 한자할 텐가?”

욱일승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 지금은 술보다 약이 급하오. 영감. 하루를 굶었더니 지금 죽을 지경이오.”

“ 약은 내가 준비하마.”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작군이 벌떡 일어나 객잔을 향해 내달렸다. 연우강의 궤짝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그였던 탓이었다.

“ 범천조화신기를 유설연에게 줬다는 건 무슨 소리냐?”

이자승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훌륭한 목수가 될 가능성이 보이더군요.”

“ 훌륭한 목수?”

“ 훌륭한 목수와 좋은 연장의 궁합을 일컬어 금상첨화란 말을 쓰곤 하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그 여우 녀석에게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을 맡긴다는 말이렷다.”

“ 그 일을 잘 처리하면 녀석은 장차 동창제독이 될 겁니다. 영감님.”

“ 그 녀석을 믿느냐?”

이자승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바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이다.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친구고 효용가치가 없는 사람은 곧 적이 되는 자들이 그들인 것이다.

“ 믿지 않습니다.”

“ 그럼?”

“ 녀석은 믿지 않지만 포탄 이천 발은 믿습니다.”

“ 이천 발?”

“ 범천조환신기를 건네주면서 이천 발을 더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 보내준대?”

“ 제가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녀석은 동창제독이 될 거라고요. 놈은 저와 공범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친구보다는 공범들의 의리가 더 끈끈하고 오래갑니다.”

“ 허!”

이자승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살다살다 저런 녀석은 또 처음이다. 녀석과 헤어진 건 불과 사 개월 전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녀석은 동창의 이인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여 놓은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그렇게 놀랄 필요 없습니다. 원래 동업이라는 건 일인자 자리를 노리고 있는 녀석하고 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건 상계의 불문율입니다.”

“ 일인자는 안 된단 말이냐?”

“ 일인자가 뭐가 아쉬워서 동업을 하겠습니까?”

“ 그러니까 네 말은 유설연 그 녀석이 동창의 이인자가 아니었다면 범천조화신기를 절대 주지 않았을 거란 말이냐?”

“ 당연히 그렇죠.”

“ 범천조화신기에 적힌 무공은 욕심나지 않더냐?”

“ 범천조화신공을 말하는 겁니까?”

“ 범천조화신공은 네 문파의 지존들이 힘을 합쳐 만든 최고의 무공이다. 무인이라면 꿈에서라도 얻고 싶어하는 그런 무공이고.”

“ 그게 무슨 대단한 무공이라고 욕심을 냅니까?”

“ 네 무공이 강하다는 말이렷다.”

“ 아직 상대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아마 천마 제석강 이후로 최강일걸요?”

“ 그렇게 금칠을 하고 싶냐?”

“ 사실이 그런 걸 어쩌란 말입니까?”

“ 사, 사실이 그렇다고?”

이자승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자신을 천하제일이라고 말하는 녀석이 전혀 광오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제 몸이 꼭 맞는 옷을 입고 만족스럽게 웃는 그런 모습을 보는 듯하다. 더불어 이런 경우에는 보통 하늘밖에 하늘이 있다거나, 기인이사가 모래알처럼 많은 곳이 무림이라고 말하며 자만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야 하는데 녀석에게는 그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

문제는 그 모습이 대견하게 생각돼야 하는 데 짜증이 확 솟구친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같은 무인으로 느끼는 자격지심일지도 몰랐다.

“ 그럼 녀석아, 네가 익히기 싫으면 일승이 이 친구들에게 줄 수도 있잖아. 적어도 주군이라면 자신보다는 부하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거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넌 장자방보다 더 못한 녀석이야.”

공연히 심통이 나 이자승은 훈계하듯 말했다.

이자승이 장자방을 들먹인 이유는 전에 연우강으로부터 황궐 궐주보다는 장자방이 더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대해 복수도 할 겸 일부러 장자방이란 말을 꺼낸 것이었다.

연우강이 이자승의 그런 내심을 모를 리가 없었다.

“ 전에 황궐의 궐주보다는 장자방이 어울린다고 했던 말이 기분 나빴던 모양이죠?”

연우강은 이자승을 빤히 쳐다보았다.

“ 난 너처럼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다.”

“ 원래 나이를 먹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야가 좁아지고, 시야가 좁아지다 보면 속도 함께 좁아지는 겁니다. 애써 부정하지 마십시오. 영감님.”

“ 저 친구들에게 범천조화신공을 전수해 주라는 게 속좁은 말이라는 거냐?”

“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 이미 욱 영감 일행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영감님.”

“ 요만 한 무공 나부랭이를 하나 던져 주고는 생색은?”

이자승은 엄지손톱을 검지 끝에 갖다 붙이며 툭 쏘았다. 그가 자꾸만 연우강을 나무라는 것은 범천조화신공이 아까워서다. 대야벌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녀석에게는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하고, 욱일승 일행이 범천조화신공을 익힌다면 지금보다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 제 무공이 강하다고 범천조화신공을 버리고 온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 손톱만 한 무공이 아니라 이만 한 무공입니다. 영감님.”

연우강기 과장되게 양팔을 크게 벌렸다.

“ 범천조화신공보다 더 강한 무공을 줬다고?”

“ 그렇다니까요.”

“ 어떤 무공인데?”

“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

“ .........?”

이자승은 당황했다.

전에 녀석과 두작군이 전설에 대해 말하는 걸 듣기는 했다. 하지만 녀석이 그 무공을 얻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무려 천오백 년 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그 무공을 녀석이 발견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런데 녀석의 입에서 그 무공이 흘러나온 것이다.

이자승은 고개를 돌려 욱일승을 보았다.

“ 일천독행신은 또 하나의 단전을 만들어내는 무공이었네.”

“ 또 하나의 단전이라고?”

“ 일천독행신을 펼치게 되면 새로운 힘이 일어나는데 기존의 내공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네. 오히려 기존의 내공에 융합되면서 과거보다 훨씬 강한 내공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무공이네.”

“ 그걸 자네들에게 줬다고?”

“ 우리뿐만 아니라 잠룡들에게도 전수해 줬네.”

“ 정말?”

이자승은 확인하듯 물었다.

“ 지금 보여줄까?”

욱일승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날 시늉을 했다.

“ 맙소사.”

황당함의 연속이다. 자신이 알긱론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은 영세오천의 한 곳인 상천의 최고 무공이다. 그런데 그 무공을 욱일승 일행뿐만 아니라 잠룡들에게도 전수했다고 한다.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자승의 놀람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 야! 이, 자식아. 이 비겁한 자식아!”

객잔으로 갔던 두작군은 귀신을 만난 것처럼 혼비백산하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두작군은 궤짝을 들고 있었는데, 궤짝 위에는 세 자루의 검이 올려져 있었다.

두작군이 세 자루의 검을 발견한 건 자그마한 실수 때문이었다. 실수로 궤짝 위에 올려 두었던 자루를 떨어뜨렸는데 그때 묶어두었던 부분이 풀려 안쪽에 있던 것들이 비어져 나온 거였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세 자루의 검이었다. 붉은색과 푸른색, 그리고 백색으로 돼 있는 그것들은 표면에 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만일 지옥에서 가립하가 남긴 무론을 익히기 위해 욱일승으로부터 전서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검집 표면에는 혈루, 백령, 청로라는 글이 전서체로 씌여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경악하게도 그것들은 파천육기의 세 자리를 차지하는 검이었던 것이다.

“ 웬 호들갑이냐?”

“ 이, 이게 도대체 뭐냐?”

세 자루의 검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두작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봤으면서 뭘 물어.”

연우강은 시큰둥한 얼굴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 그게 뭔데 그러는가?”

욱일승 일행은 궁금한 얼굴로 두작군의 손에 들린 세 자루의 검으로 시선을 주었다.

“ 직접 보시오.”

두작군은 혈루는 욱일승에게 백령은 이자승에게, 그리고 청로는 수천월에게 내밀었다.

“ 혈루?”

“ 백령?”

“ 청로?”

세 사람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비어져 나왔다.

“ 어디 보자.”

세 사람의 외침에 깜짝 놀란 묘강독존 갈인효가 욱일승 손에 있는 검을 빼앗아 갔다.

“ 맙소사. 정말이네.”

갈인효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파천육기 중 세 자루. 아니 묵사도 저 녀석에게 있으니까 전부 네 자루가 된다. 그런 엄청난 보물을 녀석은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녔던 거였다.

“ 이, 이걸 어디서 얻은 거냐?”

이자승은 여전히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 그곳에 다시 가봐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감님.”

“ 검지곡에서 얻었구나?”

두작군은 버럭 소리쳤다.

“ 정말이냐?”

이자승이 다시 물었다.

“ 그놈들이 발정난 개처럼 흥분할 정도로 대단한 물건입니까?”

“ 바, 발정난 개라고?”

이자승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그럼 그 표정은 다 뭡니까?”

“ 파, 파천육기는.......”

“ 자신들의 무공에 자신을 좀 가지십시오. 기껏해야 그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인이 쓰던 검에 불과합니다. 이제 무공에 입문한 젊은 놈들도 아니고 뭐 하는 짓입니까? 아무튼... 이리 주십시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마라천력으로 검을 끌어당겼다. 검을 끌어당긴 그는 옷 안쪽에서 사망마비를 꺼내 푸른색 검 표면에 씌어진 청로라는 글을 깎아버렸다.

“ 이것 보십시오. 신검이니 명검이나 해 봐야 이렇듯 쉽게 깎여버립니다. 신검이나 명검을 만드는 건 그 무인의 무공이지 검 자체는 아닙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강은 궤짝 앞으로 걸어갔다. 외부 뚜껑을 열고 안쪽 뚜껑까지 연 그는 양피지 비급 하나를 꺼내 뚜껑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 받아.”

연우강은 청로와 양피지 비급을 두작군에게 던졌다.

“ 나, 날 주는 거냐?”

두작군은 엉겁결에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

연우강은 두작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 그럼 날 주는 이유가 뭐냐?”

“ 몰라?”

“ 전혀 모르겠다.”

“ 전에 내가 말할 땐 뭐하고 있었어?”

“ 무슨 말을 했다는 거냐?”

“ 지금 영감이 가진 건 쪼그라들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알 두 쪽밖에 없다고 했을 것 같은데, 벌써 잊어먹었어.”

“ 야! 새꺄! 난 나이가 칠십이야, 너하고는.....”

“ 아들하고 손녀딸을 만날 때 선물을 들고 가야 할 거 아냐, 영감탱이야. 그리고, 사부 노릇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환영축골공 같은 거지발싸개 같은 걸 무공이라고 가르쳐놓고는 목에 힘을 주면 그게 사부야!”

“ 그, 그럼?”

“ 먼저 그걸 익혀. 그 다음에 검법을 약간 손질하고, 광풍파랑십삼절이라는 이름도 바꿔. 영감의 별호가 신풍노개니까 신풍파랑십삼절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검은 제자에게 물려주고, 손녀딸에게는 검법을 가르쳐 줘.”

“ 전 괜찮아요. 연 공자. 저는 이 검이면 돼요.”

남궁운화는 허리춤에 있는 창궁검을 가리켰다.

두작군을 사부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남궁운화였던 것이다.

“ 그건 사부가 결정할 문젭니다. 남궁 소저.”

“ 할아버지, 전 검 필요 없어요. 나중에 가족 분들 만날 때 선물로 주세요.”

“ 제기랄!”

두작군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인다.

“ 고, 고맙다.”

급기야 두작군은 눈물을 흘리며 연우강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 내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나중에 아들과 손녀딸을 만나면 그들 앞에서, 부모 없이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큰절을 올려.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해.”

“ 그, 그렇게 하겠네.”

‘ 대단한 녀석.’

이자승은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놀랍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녀석이 말한 광풍파랑십삼절은 청로로 펼치는 무공일 테다. 녀석은 그 무공과 청로를 아무런 조건 없이 두작군에게 주었다. 그것도 가족에게 돌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말라면서. 더불어 제자인 남궁운화에게도 사부 노릇을 제대로 하라고 훈계까지 하고 있다. 어른처럼 구는 녀석이 보기 싫어야 하는데, 오히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감격하게 된다. 상대방을 감격시키는 화술도 놀랍지만 천고의 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주는 대범함은 더 놀랍다. 아무튼 여러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녀석이었다.

“ 나는 뭐 없냐?”

분위기가 숙연해지는 듯하자 이자승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 이 두 개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 욕심내지 마십시오. 영감님.”

“ 누가 주인이란 말이냐?”

“ 그건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됩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마라천력으로 자루를 끌어당겨 혈루와 백로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 저 친구들도 제자가 있는 걸로 아는데, 저들 체면은 어떻게 할 거냐?”

조금 전 연우강이 사부 노릇 제대로 하라고 한 말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 그래서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을 가르쳐준 겁니다. 영감님.”

“ 그건 잠룡들도 전부 배웠다고 하지 않았느냐?”

서로 같은 무공을 배웠으니 사부라고 해도 특별히 나을 게 없다는 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제자보다 더 못한 사부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 그래서 똑똑한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선 사부도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

“ 숨어 있는 초식을 찾아내는 노력을 하면 잘난 제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수가 있습니다.”

“ 숨어 있는 초식이라면,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에 또 다른 초식이 숨어 있단 말인가?”

듣고 있던 욱일승이 깜짝 놀라 물었다.

“ 나는 검지곡 석상들이 공격을 막아내면서 일천파류혼을 익혔소. 욱 영감.”

“ 그, 그럼?”

욱일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바로 그거요, 욱 영감. 석상들이 취하고 있던 그 자세가 바로 일천파류혼을 깨트리는 숨겨진 무공 초식이오. 나는 그 무공의 이름을 일천파세혼이라고 지었소.”

“ 일천파세혼을 익혀 잠룡들이 익힌 일천파류혼을 깨트리란 말인가?”

“ 상천의 최고 무공을 깨트려버린 사부를 무시할 제자는 없을 것 같은데, 아뇨?”

“ 클클클! 그거 아주 좋은 방법이네. 그럼 그 초식은 어떻게 되는가?”

수천월이 웃으며 물었다.

“ 그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오. 수 영감. 두 사람이 짝을 이뤄 한 사람은 일천파류혼을 펼치고 한 사람은 그 무공을 방어하면서 만들어내야 하오.”

“ 그래서 노력이라고 한 건가?”

“ 그렇소. 나 또한 석상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오.”

“ 알았네. 일천파세혼은 우리가 창안해 보도록 하겠네.”

두작군으로 인해 숙연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노인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한 명은 일천파류혼을 펼치고 다른 한 명은 그걸 방어하면서 새로운 무공 창안에 열을 올렸다.

“ 갑시다. 남궁 소저.”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데리고 객잔으로 향했다.

“ 주인장, 여기 먹을 것 좀 가져오게.”

객잔 안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 생선찜인데 괜찮겠습니까?”

“ 소면으로 줘!”

“ 소면으로 주세요!”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동시에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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