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79화 (79/232)

제 6장 이자 포함.

삼 일이 지났다.

노인들은 사부로서 목을 힘을 주고자 시간을 잊고 일천파류혼에 몰두했고, 그들이 무공 창안에 열을 올리는 동안 연우강은 계속 산에 올랐다.

“ 잠룡들을 기다리는 거예요?”

뭔가를 찾는 것처럼 산 아래쪽으로 시선으로 주곤 하는 연우강을 보며 남궁운화가 물었다.

“ 저기까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연우강은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 직선 거리로는 칠백 장가량 될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그래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우강이 가리킨 곳에는 고루거각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은 커다란 건물들로 들어찬 마을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마을과 다른 어떤 특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개짖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언뜻 보기엔 버려진 마을처럼 보이는 그곳에 연우강이 왜 관심을 갖는지 궁금했다.

“ 여기가 좋겠습니다.”

연우강은 바닥을 발로 툭툭 찼다.

“ 제게 백옥수 좀 가르쳐주면 안 돼요?”

“ 백옥수요?”

연우강은 뜨악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을 가르쳐주어도 그녀는 시큰둥 했다. 그랬던 그녀가 느닷없이 백옥수를 가르쳐달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니에요. 됐어요. 차라리 여설 언니에게 빙하빙백강을 가르쳐달라고 해야겠어요.”

남궁운화는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 답답해 짜증날 때마다 제 가슴에 한 방씩 먹여버리려고요?”

“ 잘 아시네요.”

“ 뭐가 그리 짜증이 납니까?”

“ 연 공자는 비밀이 너무 많아요.”

“ 그러니까 여기 올라온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아서 짜증이 났다는 말인가요?”

“ 그래요.”

“ 알고 나면 잔뜩 겁을 먹을 것 같아서 말을 안 한 겁니다. 남궁 소저.”

“ 제가 겁을 먹을 거란 말인가요?”

“ 그럴 걸요?”

“ 설마, 일단 겁나는 말인지 아닌지 들어보고요.”

“ 저기가 바로 천하제일가로 알려진 곳입니다.”

“ 범천담대세가?”

“ 네.”

“ 저곳을 없애기 위해 자승 할아버지께 철포와 포탄을 구해놓아라고 한 거예요? 소제독에게는 추가로 포탄 이천 발을 더 달라고 했고요?”

“ 그렇습니다.”

“ 그랬군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안 놀래요?”

“ 그, 그동안 여, 연 공자를 여, 옆에서 지, 지켜보았는데 그, 그 정도는 노, 놀랄 일도, 아, 아니잖아요.”

“ 그런데 말은 왜 더듬죠?”

“ 제, 제가 어, 언제 더, 더듬었다고 그, 그러세요.”

“ 지금도 더듬고 있잖아요.”

“ 아, 아니라니까요. 자, 자꾸만 노, 놀릴 거예요?”

이제는 이까지 덜덜 떨었다.

“ 이렇게 겁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복면을 쓸 생각을 한 겁니까.”

연우강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

“ 복면이라고요?”

“ 전에 황산에서 복면을 쓰고 제 앞에 나타났잖아요.”

“ 그 복면을 쓴 사람이 저라는 걸 알았어요?”

겁에 질렸던 것도 잠시 남궁운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그땐 몰랐는데, 염소 수염 영감으로부터 들었습니다.”

“ 미, 미안해요. 그땐 너무 급해서 그만.....”

남궁운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좀 앉을까요?”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바위에 기대앉았다. 남궁운화도 바로 옆에 와 앉았다.

“ 이제 좀 진정이 돼요?”

“ 네.”

연우강의 물음에 남궁운화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 무공엔 관심이 없어요?”

“ 익히고야 싶죠.”

“ 그런데요?”

“ 전 저를 잘 알아요. 머리는 나쁘고 무공엔 별로 자질이 없어요. 창궁대영신공을 이 정도까지 익혀낸 건 제 자질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창노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었어요. 만일 그 무공을 혼자 익혔더라면 아직도 입문 단계에 있을 거예요.”

“ 그래서 다른 무공을 익힐 여유가 없다는 거예요?”

“ 사실 지금 익히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 그랬군요. 난 남궁 소저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 말을 할 때는 이 말을 해도 좋은지를 수십 번도 더 생각하고, 해도 욕을 먹지 않겠다 싶으면 그때서야 말을 하곤 해요.”

“ 저와 있을 땐 말 잘하잖아요.”

“ 연 공자는 제가 머리 나쁘다는 걸 잘 알잖아요.”

“ 전 몰랐습니다.”

“ 에이, 거짓말 말아요. 연 공자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그걸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 남궁 소저가 바보라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 피이! 그때 잠룡쟁패를 제게 준 건 바보 같은 계집이 불쌍해서 준 거였잖아요.”

“ 그랬나?”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남궁운화를 보았다.

“ 그게 아니었다면 저를 비롯한 창궁대 대원들을 몽땅 없앨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용서해 줬을 리가 없잖아요.”

“ 바보 같은 계집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남궁 소저의 몸매 때문이었습니다.”

“ 몸매라고요?”

남궁운화는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그때 복면을 쓰고 몸에 딱 붙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잖아요.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는 거 아닙니까.”

“ 정말?”

“ 그렇다니까요. 우리 백수계에서는 아름다운 여자를 해치는 놈을 가장 경멸합니다.”

“ 풋!”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너무 예뻐서 해치지 않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 이제 기분이 풀렸으면 그만 갈까요?”

“ 그래요.”

남궁운화는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절벽 위를 떠나 구룡객잔으로 향했다.

“ 그런데 제가 야행복 입은 모습이 괜찮았나요?”

남궁운화는 떠보듯 물었다.

“ 아주 멋졌습니다.”

“ 킥! 그런 옷을 좋아하나 봐요.”

“ 조, 좋아해요?”

연우강은 뜨악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옷을 입은 걸 좋아한다고 한다고 해도 전 상관없으니까요.”

‘ 허걱!’

연우강은 내심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남궁운화가 다시 그 옷을 입을 것 같아 불안했다.

“ 얼른 가요. 어쩌면 여설 언니가 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손을 잡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 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경공을 펼쳐 산을 내려왔다. 산에서 구룡객잔이 있는 곳까지는 십리 길이었다. 부지런히 내달린 두 사람은 구룡객잔이 보이자 속도를 늦췄다.

“ 와 있을까요?”

남궁운화는 구룡객잔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글쎄요, 그건.....”

“ 걱정돼요?”

“ 제가 걱정하는 걸로 보여요?”

“ 일천독행신이나 일천파류혼은 상천의 최고 무공이잖아요. 만일 제게 그런 행운이 왔다면 고민을 많이 할 것 같아요.”

“ 어떤 고민?”

“ 잠룡 십 조를 떠나 심산유곡에 은거하며 무공을 익히는 거죠. 그걸 전부 익혀 초절정 고수가 돼 강호로 나오면 한순간에 이름을 날릴 수 있잖아요.”

“ 지금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을 익히고 있잖아요.”

“ 말이 그렇다는 거죠. 연 공자가 여기 있는데 제가 어딜 가겠... 어머!”

“ 험! 아마 다른 친구들도 그럴 겁니다. 남궁 소저.”

“ 다른 잠룡들도 연 공자를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 원래 가진 게 많고 무공이 강하고, 인간성이 좋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남궁 소저.”

“ 호호호! 자화자찬 병이 더 심해진 것 같아요. 연 공자.”

“ 이건 내기해도 좋습니다.”

“ 호호호! 좋아요. 보자.......어?”

객잔으로 다가가던 남궁운화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객잔 안에서 수여설을 비롯한 잠룡들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린 이유는 잠룡들이 연우강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 맨 먼저 수여설이 나타났다는 것 때문이었다.

“ 좋은 곳에 다녀오나 봐요?”

두 사람을 발견한 수여설은 활짝 웃었다.

“ 건강해 보입니다. 수 소저.”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우윳빛이었던 그녀의 얼굴이 가을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건강해 보여 훨씬 보기 좋았다.

“ 그런데.....”

연우강은 수여설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 일단은 연 공자가 원하는 대로 된 것 같아요.”

“ 일단이라면?”

“ 각 군의 대원들이 허물없이 친해지기를 바란 거 아니었나요?”

“ 눈치챘어요?”

“ 연 공자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우리도 어린 시절엔 대부분 신동소리를 들었다고요.”

“ 전부 올 거라고 보십니까?”

“ 아마 그럴 거예요.”

수여설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언니, 난 지금껏 천재 소리를 들은 적 단 한 번도 없다고요.”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 남궁운화가 쀼루퉁한 얼굴로 수여설을 쏘아보았다.

“ 호호호! 연 공자가 우릴 시험했다는 말이에요.”

“ 시험을 해요?”

남궁운화는 뜨악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 후군에게만 일천독행신을 전수해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 살수들을 가장 많이 잡은 군이 후군이잖아요.”

“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일천독행신을 가르쳐 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죠.”

“ 그럼 후군에가만 일천독행신을 가르쳐준 이유가 따로 있단 말인가요?”

“ 연 공자는 잠룡 십 조 조원 모두가 일천독행신을 익히길 바란 거예요. 무공을 익히면서 서로간의 유대가 돈독해지기를 원했고요.”

“ 정말 그래요?”

“ 창노 영감이 창궁대 대원들에게 천뢰제왕신공을 전수해 준 것과 비슷합니다. 남궁 소저.”

“ 그러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남궁운화는 산에서 물었던 말을 다시 꺼냈다.

“ 보시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 보시라고요?”

“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절 만나서 행운을 얻은 셈이고, 그 행운으로 인해 성공한다면 먼 훗날 만났을 때 욕을 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어쩌면 고맙다고 술을 사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 떠나도 상관없다고요?”

“ 그럼 쫓아가서 이렇게 해요?”

연우강은 제 목을 스윽 그어 보였다.

“ 그럴 순 없겠지만 그래도......”

“ 보시를 싲가한 김에 좀더 해야겠습니다. 들어갑시다.”

연우강은 객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오랜만입니다. 광랑!”

“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수여설을 따라온 조원들이 연우강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인사는 사부들게 먼저 하는 거야. 강가에 있을 테니까 가봐.”

“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잠룡들은 다시 인사를 하고 강가로 몸을 날려갔다.

남궁운화와 수여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온 연우강은 주인에게 먹과 붓을 얻어 이층 제 방으로 들어갔다.

“ 지금부터 수 소저는 제가 부르는 걸 받아 적으십시오.”

“ 뭘 받아적으라는 거죠?”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수여설은 먹물에 붓을 푹 찍어 받아 쓸 준비를 했다. 수여설이 준비가 끝나자 연우강은 나직이 구술을 시작했다.

수여설은 바삐 글을 적어 내려갔다.

한참을 적어 내려가던 수여설의 눈이 점점 커졌다.

“ 이건......”

급기야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놀랍게도 연우강이 구술해 준 무공은 빙공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익히고 있는 빙백빙하강에 버금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러한 와중에 연우강의 입에서는 계속 무공 구결이 흘러나왔다. 수여설은 숨쉴 틈도 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몇 장의 종이를 빼곡하게 채우자 비로소 연우강의 구술은 끝났다.

“ 무, 무슨 무공이죠?”

수여설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연우강이 구술해 준 빙공은 부작용이 전혀 없는 완벽한 무공이었다.

“ 백옥수예요. 언니.”

대답은 남궁운화의 입에서 나왔다.

“ 배, 백옥수라고요?”

수여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빙하빙백강과 더불어 빙공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무공이 백옥수다. 아니 백옥수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북해빙궁 무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백옥수는 빙공의 최고봉일지는 몰라도 끝을 볼 수 없는 무공이었다. 반면에 빙하빙백강은 부작용을 동반한 불완전한 무공이지만, 무기를 다루는 자들이 심검이라고 부르는 경지인, 빙허에 오를 수 있는 무공이었다.

쉽게 말하는 빙허는 무의 끝을 볼 수 있는 무공이지만 불완전하였고, 백옥수는 무의 끝을 볼 수 없는 대신에 부작용이 없는 무공이었다.

빙하빙백강을 창안한 빙하여제는 빙하빙백강에 백옥수를 합친다면 빙공으로 무의 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면서 누가 됐든 백옥수를 가져오는 사람은, 그가 여자라면 부궁주로 삼을 테고, 사내라면 남편으로 삼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백옥수는 북해빙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렇게 천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백옥수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 아까 산에서 남궁 소저가 백옥수를 가르쳐달라고 하더군요.”

“ 그건 장난이었잖아요.”

“ 아무튼 백옥수는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까진 완벽하게 익혀두도록 하세요. 사막으로 들어가면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무공이 빙공이 될 테니까요.”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깐만요!”

수여설은 벌떡 일어나서 목에서 뭔가를 풀어 내렸다. 그것은 아래쪽에 밤톨만한 구슬이 달려 있는 목걸이였다.

“ 이거 받으세요.”

그녀는 목걸이를 연우강에게 내밀었다.

“ 뭐죠?”

“ 천 년 전의 맹약이라 전설이 돼버렸지만, 이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북해태상영이란 목걸이에요. 백옥수를 가져다 준 분에게 드리려고 만든 목걸이죠. 끝에 달려 있는 이건 빙백신구고요.”

“ 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 보물이라고요?”

“ 그래요.”

“ 그런데 받아도 되는 겁니까?”

이지약으로부터 받은 목걸이도 아직 처리를 못 해 사망궤 안에 넣어두고 있는데 수여설로부터도 목걸이를 받게 되자 공연히 찜찜했다.

“ 팔아도 상관없어요.”

“ 그럼 부담 없이 받겠습니다.”

연우강은 빙긋 웃으며 북해태상영이란 이름을 가진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 백옥수 고마워요.”

“ 굳이 가지고 있어봐야 별 도움이 안 되는 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게 낫죠. 아무튼 열심히 하세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객실을 나갔다.

“ 정말 그 목걸이 아무런 의미 없이 준 거예요?”

남궁운화는 수여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그, 그렇죠. 처,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목걸인데.”

“ 그런데 왜 말을 더듬어요?”

“ 내, 내가 언제 더듬었다고 그래요. 그것보다 백옥수 익히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수여설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 난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언니도 알잖아요.”

“ 내가 자세하게 가르쳐줄 테니까 조금씩 익혀요. 연 공자 말처럼 빙공을 익히면 사막에서 아주 편하게 생활할 수 있어요.”

“ 자신 없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운화는 백옥수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가 백옥수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사막에서 편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 아무튼 가르쳐줄 테니까 최선을 다해 익혀 봐요.”

“ 헤!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헤벌쭉 웃었다.

“ 훗!”

남궁운화를 보고 있으면 착한 심성은 타고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천덕꾸러기 신세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불행을 전혀 겪지 않은 사람처럼 해맑다.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일 테다.

“ 왜 그래요?”

“ 가주가 너무 착해서 그래요.”

“ 그거 바보라는 소리죠.”

“ 남궁세가 가주를 향해 바보라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보다 우리 목욕할래요?”

“ 목욕?”

“ 등 밀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래요.”

“ 좋아요. 나도 목욕하고 싶었어요.”

남궁운화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주인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할 게요.”

“ 그보단 이젠 말 놓아도 돼요, 언니.”

“ 무슨 소리에요. 가주는 남궁세가 가주라고요.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반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요. 행여 다른 사람에겐 그런 말 절대 하지 마세요.”

“ 우습게 본다는 거예요?”

“ 가주는 물론이고 남궁세가를 우습게 보게 돼요. 가주는 남궁세가의 얼굴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

“ 너무 복잡해요, 언니.”

“ 호호호! 복잡해도 어쩔 수 없어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하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가요.”

두 사람은 활짝 웃으며 방을 나와 일층으로 향했다.

수여설 일행이 도착한 이후 다른 대원들도 하나둘씩 구룡객잔으로 들어왔다.

두 번째로 들어온 잠룡은 이철상을 비롯한 열 명이 들어왔고, 세 번째에는 장사덕을 비롯한 잠룡들이 그리고 다른 잠룡들도 대부분 제 날짜에 맞춰 왔다.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연우강 곁으로 유성비검 신도영이 다가왔다.

“ 거철산에 대한 이야기야?”

“ 그렇습니다. 급한 사정이 있어서 떠나야 한다며...... 그동안 베풀어준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 알았어. 그럼 후군은 유성랑이 맡도록 해.”

“ 제, 제가요?”

신도영은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전에 이철상에게 했던 말을 또할까?”

“ 아, 아닙니다. 맡겠습니다. 광랑.”

신도영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전에 이철상이 자신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면서 군장이 되는 걸 정중하게 거절했다가 오히려 면박만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차피 하게 될 거 욕을 먹고 하느니 기꺼이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바로 그거야.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가 성공의 고지를 가장 먼저 밟는 거야. 각 군장들에게 연락해서 강가로 오라고 해.”

“ 알겠습니다.”

“ 신도영은 부동자세를 취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 들었죠?”

연우강은 계단 위에 있는 수여설과 남궁운화를 향해 소리치며 밖으로 나왔다.

객잔 밖 노인네들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다며 일천파류혼을 펼치고 있었고, 잠룡들은 영문 모를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을 지나친 연우강은 강변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앉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각 군의 군장들이 다가와 자리했다.

“ 여기까지 왔으니까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라고 본다. 먼저 질문을 받겠다.”

연우강은 일행을 휘 둘러보았다.

“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엔 어떻게 할 건지 대비책은 생각해 두셨습니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교랑 이철상이었다.

“ 난 다른 사람 말은 곱씹어보다가 옳다고 확신했을 때만 듣는다. 하지만 어머님 말씀은 무조건 따른다.”

“ 어머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 이왕 시작했으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해줘야 한다고 하셨다. 감히 눈을 맞출 수조차도 없게 철저하게 부수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이 말도 하셨다. 도망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 이곳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친단 말입니까?”

“ 너희들은 일천독행신을 배워 과거보다 두 배 강해졌다. 빠르게 도망치는 건 문제가 아니다.”

“ 그렇다고 해도 대야벌의 눈을 속이긴 힘들다.”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이자승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 대야벌은, 아니 담대만승은 이편에 신경 쓸 여럭이 없습니다, 영감님.”

“ 밀천과 마총 장보도 때문이란 말이냐?”

“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금릉 연씨 세가 폭발로 만마림과 사월림을 잃었고, 범천조화신기의 등장으로 인해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의 도움은 기대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아니 그것들은 차치차라고 밀천의 등장은 담대만승에겐 치명타가 됐습니다. 대야벌 소속 세력 중에서 최소한 두 곳은 밀천과 끈이 닿아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만 놓고 보더라도 최소한 여덟에서 열 개의 세력이 담대만승의 통제권 밖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담대만승은 대야벌의 남은 세력을 챙기는 데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영감님.”

“ 치밀한 놈.”

이자승은 혀를 내둘렀다.

마치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이 녀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하필이면 이때 밀천이 등장하고, 또 하필이면 이때 마총 장보도가 나타났다. 우연처럼 일어난 일들이 녀석에게는 필연처럼 다가오고 있다.

운이 트인 녀석이라 그런 건지, 제 녀석이 만들어가고 있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하지만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금세 들통나고 만다.”

“ 아닙니다. 영감님. 그들은 우리를 절대 의심하지 못합니다. 잡랑, 지도 꺼내.”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장사덕을 향해 말했다.

“ 여기 있습니다.”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사덕이 지도를 꺼내 내밀었다.

“ 지금 우린 이곳 구룡에 있고, 우리와 비슷하게 꾸민 자들이 감숙성 난주에 있다.”

연우강은 사천성과 감숙성 난주를 차례로 짚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구룡보다 난주가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 이곳에서 일을 끝내고 나면 우린 직진하여 감숙성 주천으로 가게 될 것이다.”

연우강은 구룡에서 감숙성 주천까지 길게 사선을 그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앞으로 정확히 보름 후 우리로 변장하고 있는 자들도 주천에 도착하게 될 테고 그들은 하서객잔에서 머물게 된다.”

“ 그들과 바꿔치기 한다는 말입니까?”

이번엔 이철상이 물었다.

“ 그렇다. 우린 원래 계획대로 옥문관을 향해 이동하면 된다.”

“ 여기에 있는 객잔 주인과 요리사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 이곳에 있는 객잔 주인이나 요리사, 점소이는 우리 접대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객잔 주인도 가짜란 말입니까?”

놀란 사람은 이철상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군장은 물론이고, 이자승마저도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설마 객잔에서 일하는 자들마저도 가짜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원래 주인은 장사가 되지 않아 이곳을 팔고 떠났다.”

“ 지금까지는 완벽합니다. 광랑.”

“ 좋아, 이젠 이곳에 모인 이유를 말하겠다.”

“ 작전 때문에 모인 게 아니었습니까?”

“ 작전을 굳이 알려준 이유는 이 말을 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우린 오랜 전쟁을 해야 할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빠지고 싶은 사람은 빠지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불렀다. 빠진다고 해서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빠지라고 해라.”

“ 빠질 것 같으면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광랑.”

“ 그렇다고 해도 일단 내말은 전해라.” “ 알겠습니다. 작전은 언제 시작합니까?”

“ 작전은 오늘 저녁에 한다. 먼저 술시에서 해시까지 화포를 옮기고, 자시에 준비를 한다. 공격은 축시다.”

“ 알겠습니다. 광랑.”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각자의 짐을 챙긴 잠룡 십 조 일행은 조용히 구룡객잔을 나섰다.

“ 문주께 안부 전해주시오, 왕 대협.”

“ 알겠습니다. 연 공자.”

“ 이곳은 어떻게 할 참이오?”

연우강은 객잔을 둘러보며 물었다.

“ 태워버릴 참입니다.”

“ 우리가 떤고 최소한 보름 이상 지나고 나서 태워야 하오.”

“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 공자.”

“ 그럼 수고하시오, 왕 대협.”

“ 무운을 빕니다. 연 공자.”

왕칠우는 멀어지는 연우강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  자! 지금부터는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을 완전하게 지워라. 조그마한 흔적도 남기면 안 된다!”

“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요리사를 비롯한 점소이 일행은 일제히 소리치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순간 멀리서 배 한 척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연우강과 남궁연화를 태우고 왔던 배였다.

“클클클! 아무튼 연우강 넌 더럽게 무서운 놈이다.”

배 선수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멀리 보이는 산으로 시선을 주며 웃고 있는 이 사람은 하오밀문의 문주 허일구였다.

한편.

산자락에 도착한 잠룡 십 조 일행은 이자승의 안내로 으슥한 동굴을 찾아들어갔다. 겉보기와는 달리 엄청나게 큰 동굴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 큰 상자는 화포고, 작은 상자에는 있는 놈은 포탄이다.”

“ 화포는 두 사람 당 한 기씩 들고 나머진 포탄이 든 상자를 들도록 해.”

연우강은 일행을 향해 나직이 말하고는 포탄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 전 보아두었떤 절벽 위쪽까지는 경공을 펼치며 한 식경 정도 걸리고 약간 빠른 걸음으로 가면 반 시진 정도 걸렸다.  같은데 딱히 꼬집어 누구 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먼저 절벽 위에 발을 디딘 연우강은 대원들이 가져온 화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일렬로 배치한 화포는 각도를 조정하여 사정거리를 달리했다.

맨 왼편부터 열다섯 문의 사정거리는 육백오십 장, 중간에 열다섯 문은 칠백장, 오른편의 스무 문은 칠백오십 장으로 잡았다.

“ 포탄을 쏘는 법은 간단하다. 포탄을 집어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포탄이 발사된다. 반동이 심하니까 내가 잡아 놓은 각도를 잘 기억해라.”

연우강은 잠룡들에게 포 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으로 반 시진 가량 보낸 연우강은 드디어 포탄을 장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랑 이철상이 맡고 있는 전군이 각 포를 향하여 몸을 날려가면서 포탄을 장착했다. 그들이 움직이자 우군과 좌군 중군은 반동에 대비하여 각자가 맡은 포 뒤편으로 늘어섰고, 후군은 삼매진화로 도화선을 태울 준비를 했다.

“ 장착 끝났습니다. 광랑.”

오십 문의 포에 포탄 장착을 끝낸 이철상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 욱 영감 일행은 저 아래쪽에 내려가서 대기하시오.”

연우강은 아래쪽을 가리켰다.

“ 전부 죽여야겠지.”

“ 이편으로는 오는 놈은 무조건 죽이시오.”

“ 알았네. 가세.”

욱일승 일행은 낭떠러지를 우회하여 산 아래를 향해 질주해 갔다.

[ 진영을 구축했네.]

잠시 후 아래쪽에서 욱일승의 천리전음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오르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잠룡 십 조 대원들은 긴장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휙!

“ 붙여라!”

연우강의 손이 힘차게 내려가자 후군 군장인 유성비검 신도영이 우렁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치이익!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열 개의 화포에서 동시에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열 개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후군 무인들은 자리를 옮겨 두 번째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빠르게 이동하며 오십 문의 철포에 불을 붙이고 난 순간, 처음 불을 붙였던 열 문의 화포가 시뻘건 불길을 토해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 좌군은 포의 반동을 막아라!”

“ 우군은 포의 반동을 막아라!”

“ 중군은 포의 반동을 막아라!”

각 군의 군장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튕겨지듯 물러나는 화포 받침대를 잡았다.

우우! 우우! 슈우우!

콰앙! 콰앙! 콰앙!

포탄 날아가는 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오는 순간 두 번째 열 문의 화포가 불을 뿜었다. 그리고 전군 대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빈 화포에 포탄을 장착했다.

“ 이자 포함이다, 담대만승.”

연우강은 불꽃을 남기고 멀어지는 포탄을 쳐다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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