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흑천 천주가 돼야지요.
공손정우는 차 향을 음미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 그때 난 무당파 무기명제자였다.”
무당파에 입문하여 십 년 동안 갖은 노력을 다했다. 무당파에서 가르쳐주는 기본 무공의 성취도도 누구보다 빨라, 기명제가가 되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그땐 정말 운이 없었지. 기명제자를 뽑는 비무에서는 몸이 아파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하여 떨어지고, 또 어쩔 때는 검이 부러져 비무를 포기해야 했다.”
정말 징그럽게 운이 없던 시절이었다.
결국 무당파의 기명제자가 되는 걸 포기하고 강호로 나왔다. 마침 잠룡쟁패가 풀릴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 년 동안 강호를 헤매다가 그들을 만났다.
적환규, 육사이, 설야.
적환규는 화산파 출신이고, 육사이는 점창파, 설야는 종남파 출신이었다. 그들 또한 대야벌로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잠룡쟁패를 받지 못한 자들이기도 했었다.
“ 우린 의형제를 맺고 잠룡쟁투에 참여했지.”
잠룡쟁투에 참석하기 전에 잠룡쟁패를 얻게 되면 나이 어린 순으로 가지기로 약속을 했다.
가장 먼저 설야가 잠룡쟁패의 주인이 됐고, 두 번째는 육사이, 그리고 세 번째는 적환규가 잠룡쟁패의 주인이 됐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 더 얻으면 의형제를 맺었떤 네 명은 전부 잠룡쟁패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운은 거기까지였다.
대야벌로 들어갈 날짜가 가까워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잠룡쟁패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대야벌 입구인 천하평 근처에서 그자를 보았다.
대야벌로부터 십 리 안에서는 잠룡쟁투를 금한다는 율법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자에게 잠룡쟁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그를 공격했다. 그자의 무공도 상당했다.
결국 각자가 익히고 있던 최고 무공을 펼치면서, 자신들이 구파일방에 속한 무인들이라는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다. 살인멸구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자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이름과 사는 곳을 물었다.
“ 산동성 일현에 사는 염자생이라고 했지.”
혹시라도 대단한 가문의 자식이라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염자생이란 이름도 생소했고, 산동성 일현에는 주목할 만한 가문도 없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녀석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그자를 묻고 자리를 떴다.
“ 꿈을 이루기 위해선 못할 게 없는 시절이었어.”
만일 그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공손정우는 확신한다. 자신 아니라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 더불어 운도 틔기 시작했고.”
공손정우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잠룡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무궐 수뇌들의 눈에 띄게 됐고, 그때부터 승승장구했다.
두각을 나타내면서 무당파에서의 대우도 달라졌다.
기명제자로도 받아주지 않았던 그들이 무당파 최고 기재라며 추켜세우기 시작했고, 무당 최강 무공을 내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당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인해, 십오 년 전에는 무궐의 최고 자리인 궐주가 될 수 있었따. 궐주가 된 다음부터는 은밀하게 의동생들도 도왔다.
궐주가 되자 다른 사람을 돕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강호 무림에 웬만해서는 해결하기 힘든 사건을 일으키고 동생들에게 해결 방안을 알려주었다
적환규를 비롯한 세 동생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무궐 궐주가 되고, 오 년이 지나고 나서 철혈매화검이란 별호로 불리고 있던 적환규는 구중련의 련주가 됐고, 녹사련을 장악하기 위해 별호마저도 녹림마제로 바꾼 육사이는 녹사련의 련주가, 그리고 설야는 구천검제라는 별호로 낭인림의 림주가 됐다.
“ 이제 남은 건 벌주밖에 없다.”
대야벌 벌주.
미친 듯이 달려왔던 마지막 목적지가 눈앞에 있었다. 의형제를 맺었던 동생들이 각각 한 세력씩을 거느리고 있었던 터라 다른 세력보다 훨씬 유리했다.
“ 그때 그자가 또 나타났지.”
혈잔수 염자생이란 이름을 우연히 듣고는 깜짝 놀랐다. 과거 대야벌로 들어올 수 있는 행운을 안겨 주었던 자였고, 죽여 입막음을 했던 자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은밀하게 그를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ㅇ며자생은 대야벌로 들어올 때 땅에 묻었던 그자였다.
이번엔 더 쉬웠다.
몇 번의 사건을 일으켜 놈을 강호 공적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놈에 대한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 빌어먹을!”
공손정우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혈잔수 염자생에 대한 사건이 또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이번에 돌고 있는 소문은 과거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그 사건을 헤집고 다니는 자는 다름아닌 사초 연우강이었다. 만일 연우강이 다른 잠룡들처럼 평범한 자였다면 그냥 넘어가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놈은 후군도독부 이인자인 도독동지 양성일과 친분이 두텁다.
‘ 궐주나 림주는 약간의 흠이 있어도 무방하지만 대야벌 벌주가 되기 위해서는 조그만 흠도 없어야 합니다. 궐주.’
한 시진 전에 만났던 담대천호로부터 들은 말이다.
차기 벌주가 되고 싶으면 그 흠을 제거하여 깨끗한 상태로 만들어 두라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공손정우는 흠칫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지풍을 날려 꺼두었던 촛불을 켰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 모셔라!”
공손정우의 목소리에 이어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공손정우의 의형제들이자 구중련, 녹사련, 낭인림의 수뇌인 철혈매화검 적환규, 녹림마제 육사이, 구천검제 설야였다. 세 사람을 따라 들어온 시비가 차를 준비해주고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공손정우는 밖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 긴한 이야기를 할 참이다.”
“ 주변을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궐주님.”
잠시 후 암중에 공손정우를 호위하고 있던 자들이 떠나는 기척이 감지됐다.
“ 별고 없으셨습니까?”
호위들이 전부 떠나자 철혈매화검 적환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 지금까지는 없었는데 오늘 생겼네, 적 아우.”
공손정우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받았다.
“ 중요한 내용인가 보군요.”
“ 조금 전 담대천호가 다녀갔네.”
“ 그 자가 왜?”
“ 내게 차기 벌주자리를 제안하더군.”
“ 네?”
적환규를 비롯한 세 명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 일단 내 이야기를 듣게.”
공손정우는 담대천호와 나눴던 대화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 그러니까 그자는 차차기 벌주를 원한단 말입니까?”
“ 그렇게 말했네.”
“ 그를 믿습니까?”
적환규의 얼굴이 대끔 굳었다.
담대천호의 제안이 물론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덥석 삼켜도 좋은 그런 제안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 난 사람보다 상황을 믿네. 적 아우.”
“ 상황이라면?”
“ 범천담대세가가 멸문했다는 말은 자네들도 들었을 거네. 그 일로 인해 담대만승은 자기 집안도 못 지키는 나약한 벌주가 됐네. 임기는 채우겠지만, 차기 벌주로 나온다고 해도 그가 벌주가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네. 그리고 담대천호는 그를 지지하던 문파 중 만마림을 잃었고, 철장마도 막장이 림주로 등극한 패천림도 잃은 상태라고 봐야 하네.”
“ 하지만 담대천호는 담대만승의 친동생입니다. 형님.”
“ 더불어 무성의 성주이면서 대야벌 벌주가 되고 싶어하는 야망을 품고 있는 자이기도 하네.”
“ 형님을 벌주로 밀지 않으면 그도 벌주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 우리가 지지해주지 않으면 그는 절대 벌주가 될 수 없네. 적 아우.”
“ 그건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 물론 벌주 자리 때문에 그와 손을 잡겠다는 건 아니네.”
“ 황궐 때문이란 말입니까?”
“ 전에 유설연과 남철진이 찾아왔을 때 공야일우 일행이 어떻게 했는지 자네들도 잘 알지 않는가. 그런 상황인데 소제독 유설연에게 범천조화신기가 들어갔네. 아마 지금 상태로 오 년 만 지난다면 대야벌은 공야일우의 손에 들어가고 말거네.”
“ 굳이 벌주 자리가 아니더라도 공야일우 일행을 쳐야한다는 말입니까?”
“ 내가 사람보다 상황을 믿는다고 한 것은 상황은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네.”
“ 일단은 기회가 왔을 때 공야일우 일행을 없애자는 말입니까?”
“ 맞네.”
“ 자칫 잘못하면 담대만승의 적만 없애주고 우린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대형.”
듣고 있던 육사이가 말했다.
“ 물론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거절하면 담대천호가 공야일우를 찾아갈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우리가 당하게 되네.”
“ 그렇군요. 어차피 담대천호는 차기가 아니라 차차기 벌주 자리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육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할 텐가?”
대충 의견이 모아진 듯하니 결론 낼 일만 남았다.
“ 과거에서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대형. 우린 하납니다.”
적환규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 고맙네.”
공손정우는 흡족하게 웃었다.
“ 염자생 그놈 이야기가 은밀하게 돌고 있는 거 대형은 들었습니까?”
적환규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안 그래도 그 일을 말할 참이었네.”
“ 어떤 놈이 그 사건을 헤집고 다니는 겁니까?”
“ 사초 연우강 그놈이 혈잔수 염자생에 대한 사건을 캐고 다니는 모양이네.”
“ 그놈의 염자생은 끝까지 말썽이군요.”
적환규는 얼굴을 찌푸렸다.
“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한 우리 실순데 누굴 탓하겠는가.”
“ 염자생과 연우강 그자는 어떤 관계입니까?”
“ 연우강이 군에 있을 때 사막에서 염자생을 구한 모양이네.”
“ 그럼 연우강 그놈도 염자생 사건에 대해 알겠군요.”
“ 그러니까 그 당시 사건을 헤집고 다니겠지.”
“ 놈을 없애는 건 쉽지 않습니다. 사월림에서도 놈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다가 실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구천검세 설야가 일행을 보며 말했다.
“ 운이 좋은 놈이니까. 하지만 우린 사월림과 같은 하류 문파완 다르네.”
“ 검혈녹천군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적환규를 비롯한 세 사람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각자의 별호에서 한 자씩 따 만든 검혈녹천군은 풍천마인, 천년마인과 더불어 천마삼강이라 불리는 회혼마인이다.
우연한 기회에 천마의 무공인 천마회혼대법의 비급을 손에 넣게 됐는데, 그곳에 회혼마인을 제강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때부터 회혼마인을 제강하기 시작하였고, 이제 백여 구가 완성됐다.
반인반시 상태인 회혼마인은 먹고 마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한 달을 견디는 건 기본이고, 생전의 무공을 고스란히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체는 최소한 검강 정도가 돼야 간신히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다.
그야말로 불사의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아직 확인하진 못한 상태였다.
“ 일단 서른 구만 보내서 시험해 볼 참이네.”
“ 조심하셔야 합니다. 대형.”
“ 그건 걱정말게. 그건 그렇고, 막장은 만나봤는가?”
공손정우는 빙그레 웃으며 설야를 보았다.
패천림의 새로운 림주로 등장한 막장.
강호 무림에서는 마총 장보도와 밀천의 등장이 화젯거리라면 대야벌에서는 철장마도 막장의 성공담이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대야벌 백대고수 서열 백 위고, 율령궁 천살원의 삼대 집행사자의 한 명이었던 그는 젊은 나이에 백대고수에 오르긴 했지만 그다지 주목받는 자가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느닷없이 패천십관에 도전을 하였고, 관문을 통과하여 백독수가 죽어 공석이 된 패천림의 림주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경악했던 대야벌 무인들은 막장 곁에 서 있는 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름 아닌 전전대 림주였던 두보관이 자리해 있었던 것이었다.
두보관의 가르침이 있었다면 막장이 패천림의 림주가 된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폐관 수련 중이랍니다.”
“ 만나지 못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대형. 저뿐만 아니라 많은 자들이 막장을 만나기 위해 손을 쓰는 모양인데, 아직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 아무튼 계속 접촉을 시도해 보게.”
“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대형.”
“ 이야기도 대충 끝났으니까 이젠 술이나 한잔하세.”
“ 그럴까요?”
네 사람은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무궐 연회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미래를 위해!”
“ 위하여!”
네 사람은 술잔을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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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전혀 상관없는 곳인 이곳이 푸른바다라는 의미의 청해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소금기를 함유한 호수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청해에 있는 많은 호수들이 바닷물처럼 염분을 함유하고 있었다.
먼 옛날 바다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긴 하지만 바다와는 워낙 거리가 먼 곳이고, 지대 또한 다른 지역보다 천여 장 이상 높은 곳에 위치하여 숨쉬기조차 곤란한 이곳이 바다였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전설이 말하는 것처럼 바다였다는 흔적은 청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청해호도 그런 흔적들 중 하나였다.
동서로 이백오십 리에 달하여 중원 삼대 호수 중의 하나로 꼽히는 거대한 호수는 놀랍게도 소금기를 함유한 염호였던 것이다. 더불어 청해호의 특산물 중 하나가 바로 바다에서만 난다는 소금이었다.
그 청해호 주변에 똬리를 틀고 잇는 무림 문파가 팔황새의 한 곳인 청해천종림인데 그들의 주 수입원이 바로 청해호에서 나는 소금이었던 것이다.
짠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일단의 무리가, 청해호 서남쪽에 우뚝 솟은 일월산으로 들어섰다. 일월산 남쪽 기슭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한 그들의 옷과 머리에는 뿌연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산길을 타고 바쁘게 달려가는 이들은 사천의 내궁산을 떠나온 잠룡 십조였다. 일월산 정상에 오르자 하늘과 물이 맞닿아 있는 수평선이 일행을 맞았다.
“ 이곳부터는 청해천종림 구역입니다. 광랑.”
지도를 살피던 장사덕이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 길은?”
“ 청해호를 우회하면 대통산 남쪽 산자락을 타고 가야 하고, 청해호 좌측으로 가게 되면 청해 남산 북쪽 기슭을 타고 직진해야 합니다.”
“ 둘 중 편한 길은 어디지?”
“ 동쪽으로 가면 식당과 음식점이 꽤 있다고 합니다.”
“ 배고파?”
“ 배부른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광랑,”
“ 그럼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해.”
“ 알겠습니다. 광랑.”
장사덕은 헤벌쭉 웃으며 선두로 나섰다.
곧 잠룡 십조 일행은 숲을 헤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냐?”
연우강을 따르던 이자승이 물었다.
배고프다는 장사덕의 말에 곧바로 객잔이 있는 곳으로 길을 잡은 것 때문이었다.
“ 음식을 먹는 장소를 객잔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 그럼?”
“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 어떤 방법이 있는데?”
이자승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사실 그는 지금 연우강에게 짜증이 나 있었다.
오는 도중에 남궁운화로부터 동정호 지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대충 들었다.
이자승이 궁금해하는 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손녀딸의 근황이다. 헤어지기 전에 연우강을 따라갔다는 말을 듣고, 그 이후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말을 꺼내보았는데, 들려온 대답은 잘 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사실 이자승은 이지약이 남편도 없이 응천부의 공주로 늙어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이연과 말다툼도 많이 했다. 결국 그의 뜻과는 달리 이지약은 응천부로 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지약을 포기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그곳에서 빼내오고 싶었고, 그 일을 해줄 녀석으로 내심 연우강을 점찍었다.
응천부를 떠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일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정호 지하에서 이지약과 연우강이 함께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으로 두 살이에 남녀 사이라면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당사자가 그 부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괜스레 손녀딸이 불쌍해져 더 짜증이 났다.
“ 시야가 고정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생각이 편향되는 겁니다. 영감님. 나이를 먹을수록 여러 가지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을 석고로 채운 외골수 노인네라고, 따돌림당하기 일쑵니다. 아마 영감닒의 아드님도 그런 모습을 조금씩 보일 겁니다.”
이자승의 그런 마음을 알리 없는 연우강은 특유의 약올리기 화법으로 이자승의 성질을 돋웠다.
“ 이놈아! 객잔 안에서 밥을 먹는 거하고 생각이 편향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자승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버럭 화를 내는 것도 늙었다는 증겁니다. 영감니.”
“ 너 이 자식!”
“ 음식을 사다가 밖에서 먹으면 될 걸 왜 객잔만 고집하느냔 말입니다.”
“ 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자식아.”
“ 제 할아버지와 너무 비교돼서 그렇습니다.”
“ 뭐가 비교돼, 이놈아!”
“ 아버지는 아직도 할아버지 눈빛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거든요. 할아버지가 회초리를 들면 자식들 앞이라고 해도 종아리를 걷고 일어서야 하고요.”
“ 그래 좋겠다. 자식아. 훌륭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둬서 좋겠다고!”
“ 영감님은 장자방 재목밖에 안 된다는 걸 인정하셔야 합니다. 자식도 못다스리는 양반이 언감생심 누굴 다스린다고 그러십니까.”
“ 에라, 개자식아!”
“ 원래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입니다.”
“ 훌륭한 부모와 나쁜 부모를 따지는 기준은 자식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달려 있어, 이놈아!”
“ 제가 가정 교육을 잘못 받았다는 겁니까?”
“ 당연히 잘못 받았지. 힘 좀 있다고 어른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녀석이 제대로 된 녀석이냐?”
“ 그래도 전 뒷구멍에서 호박씨 까는 짓은 안 합니다.”
“ 그럼 연이는 호박씨를 까고 있단 말이냐?”
“ 제 뒤통수를 치기 위해, 아니 거지발싸개 같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주 큰 호박씨를 까고 있습니다.”
“ 무슨 소리냐?”
이자승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 남경왕이 천리포영 남철진을 만나고 난 다음 북경으로 들어갔답니다.”
사실 연우강은 그 나름대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곳은 어떻게 해볼 수 있는데 황실만큼은 그의 영역 밖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남경왕이 북경으로 들어간 일이 커다란 호박씨와 관계가 있느냐?”
“ 남철진이 남경왕을 만나기 전에 북로정군에 들러 오래된 사건을 조사하고 갔거든요.”
“ 오래된 사건?”
“ 보국천위장군의 죽음에 대한 사건입니다. 영감님.”
“ 주무상?”
“ 그렇습니다. 제가 구림세가를 떠나고 난 후 아드님은 금의위 영반을 은밀하게 만났습니다. 그 후에 남철진이 북로정군을 찾아갔고요.”
“ 그러니까 연 그 녀석이 흑랑기 몰살 사건을 다시 들쑤시고 있단 말이냐?”
“ 이미 잊혀지고 덮었던 사건을 다시 들쑤시면 누군가 다치게 돼 있습니다.”
“ 네가 다친다는 거냐?”
“ 제가 다칠 수도 있고 구림세가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 그 사건에 우리가 모르는 일이 숨겨져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쟁에 참여한 당사자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묻으면 좋을 텐데, 왜들 그렇게 끄집어내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연우강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 말할 수 없는 일이더냐?”
이자승은 연우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녀석의 어깨가 유달리 쳐져 보였다.
“ 지휘관의 본분 중의 하나가 부하의 명예를 지켜주는 겁니다. 영감님.”
“ 좋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다.”
“ 말씀하십시오.”
“ 만일 말이다. 그 사건이 밝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 적당한 선에서 쉬쉬하면서 끝나게 되면 도독동지 양성일 장군과 저는 죽임을 당하기 쉽습니다.”
“ 쉬쉬하지면서 끝나지 않으면?”
“ 일이 커지면 양성일 장군과 저는 목이 잘릴 테고, 남경왕 주진무는 안정군왕 주인문과 같은 신세가 될 겁니다.”
“ 주인문? 네가 그를 어떻게 아느냐?”
“ 아시는 분입니까?”
“ 황실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왕 직위를 몰수당한 황족으로 알고 있다.”
“ 몰락한 황족이란 말입니까?”
“ 그렇다.”
“ 그럼 몰락한 황족의 삶을 아십니까?”
“ 모른다.”
“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황실은 군왕의 직위를 박탈했으면서도 여전히 황족으로 명예를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돈벌이에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깊은 산중으로 도망쳐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는데, 농사 또한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질 않습니까? 즉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닌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남경왕이 안정군왕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래 니들 잘났다 하면서 말없이 따르겠냐 하는 겁니다. 영감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너는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돌리는 재주를 가졌구나.”
안정군왕 주인문이라면 무영이었던 주선엽의 아버지를 말한다. 그를 아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녀석은 교묘하게 주진무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버린 것이었다.
문득 녀석이 주선엽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과거는 땅속이 됐든 마음속이 됐든 묻어버리는 게 좋다는 게 제 신조라서 그렇습니다.”
“ 그들이 네 과거더냐?”
“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영감님.”
“ 따르지 않을 거다. 그는 오히려 세력을 모아 역으로 치고 나올 것이다.”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마도 북경에 폭풍이 몰아치게 될 겁니다. 그 폭풍 중심에 구림세가가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큰일은 남경왕 주진무뿐만이 아닙니다.”
“ 또 있느냐?”
“ 그렇습니다. 주진무보다 지금 제가 말하는 자가 오히려 더 무섭습니다.”
“ 누굴 말하는 거냐?”
“ 개독새 연우강입니다.”
“ .......”
이자승은 멍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개독새 연우강은 지금도 밤이면 전쟁터를 헤매고, 아침이면 기상나팔 소리에 맞춰 일어납니다. 연우강이 천이백 명의 부하를 사지에 밀어 넣고도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건, 재당덩어리가 될지도 모르는 업둥이를 기꺼이 받아주었떤 그분들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자살하고 말겠다며 십뢰를 품고 다니면서도 자살하지 못한 것도 그분들 때문입니다. 개독새 연우강에게 그분들은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분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연우강은 목숨을 걸고 막을 겁니다. 백이 됐든, 천이 됐든, 만이 됐든, 혈도부대 일천명을 혼자 없애던 그때처럼 전부 죽일 겁니다. 금의위를 없애야 한다면 그들을 전부 죽일 테고, 동창을 없애야 한다면 그들도 전부 죽일 겁니다. 구림세가를 없애야 한다면..... 이번에 범천담대세가를 없앴을 때처럼 그렇게 끝내지 않을 겁니다. 영감님. 범천담대세가에서는 도망치는 자들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개미새끼 한 마리 남지 않도록 완전하게 없애버릴 겁니다. 누구도 그 사건을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연우강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연우강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이자승은 부르르 떨었다.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녀석이다. 아니 녀석이 북경을 초토화시키고자 한다면 과연 그를 막아낼 자가 있을는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런 사람은 없다.
“ 그,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거냐?”
이자승은 쫓기듯 물었다.
“ 아직 십뢰는 세 개나 남았습니다. 영감님.”
“ 하지만 금의위에서 조사를 시작했다면 중간에 멈출 수는 없다. 연우강. 네가 말하지 않은 비밀이 뭔지 모르지만 결국엔 밝혀지게 돼 있다.”
“ 그래서 지금부터 저도 준비를 할 참입니다.”
“ 어떻게 대비를 하겠단 말이냐?”
“ 개독새 연우강이 아닌 흑천의 천주인 묵사 연우강이 될 겁니다.”
“ 흐, 흑천이라고?”
이자승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설마 연우강의 입에서 흑천의 천주라는 말이 흘러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욱일승 일행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연우강을 돌아보았다. 경천사마 일행이 연우강을 향해 천주라고 부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호칭이 바로 흑천 천주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십시오. 영감님.”
연우강은 싱긋 웃어 보였다.
“ 허!”
이자승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녀석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경을 초토화시키고 나서 자결하겠다고 한 녀석이 지금은 해맑게 웃고 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미리부터 얼굴을 찌푸릴 필요는 없습니다. 영감님.”
“ 이놈아. 그렇다고 해도.....”
“ 들어보십시오. 영감님. 영감님은 앞으로 오십 년이나 육십년을 더 살면 관으로 들어갈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부터 영감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곡을 하면 영감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 내가 죽으면 곡을 하긴 할 거냐?”
이자승은 피식 웃었다.
“ 약을 지어준 약사 영감님이 돌아가셨을 때 상주 노릇도 했는데, 곡 정도야 우습지요.”
“ 클클클! 그건 연 공자 말이 맞다. 자승. 먼 훗날 일어날 일로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라.”
듣고 있던 욱일승이 웃으며 말했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그보다 흑천의 세력은 어느 정도냐?”
연우강이 천주라는 사실이 의외이긴 하지만 밀천에 이어 등장한 흑천의 전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 우선은 경천사마 네 명이 있고....”
“ 그리고?”
“ 지금은 그들이 전붑니다.”
“ 그들이 전부라고?”
“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 그럼 다른 자들이 또 있단 말이냐?”
“ 여기 욱 영감 일행이 있잖습니까?”
“ 우리도 흑천에 끼워주는 건가?”
욱일승이 헤벌쭉 웃었다.
“ 매달 오십 냥씩 주는 데 있으면 가도 상관없소. 욱 영감.”
“ 흐흐흐! 난 연 공자, 아니 천주께서 주시는 오십 냥을 받고 싶소이다.”
“ 벌써 서른 명으로 늘었네요.”
“ 저들도 끼워줄 거냐?”
이자승은 이번엔 턱으로 잠룡들을 가리켰다.
“ 원하는 사람만.”
“ 전 들어가겠습니다. 천주님.”
“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 저도요.”
귀를 전부 열어 놓고 있었던 듯, 잠룡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심지어는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운화까지도 손을 들어올렸다.
“ 벌써 팔십 명으로 늘어났네요.”
“ 팔십 명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 패천림의 림주인 막장도 있습니다. 영감님.”
“ 철장마도 막장이 패천림의 림주가 됐단 말이냐?”
“ 야장도 있고, 하오밀문도 있으니까 인원수로 따지면 흑천이 가장 많네요?”
“ 끄응!”
이자승은 기가 막혔다.
녀석은 무림세가의 후예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공으로 명성을 얻은 적도 없다. 그랬던 녀석인데 대충 말한 것만 해도 수만 명이 나온다. 물론 그들 중 무림 세력으로 거듭날 정도로 무공을 지닌 자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녀석의 말처럼 인원수로 따지면 최강이었다.
“ 그래서 인맥 관리가 중요한 겁니다. 영감님. 서둘러라!”
“ 알겠습니다. 천주님.”
잠룡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속도를 냈다.
“ 난 천주가 아니라 미친 이리, 광랑이다!”
“ 알겠습니다. 광랑.”
신바람이 나면 피곤함도 잊기 마련이다.
잠룡들은 무섭게 내달려 그날 저녁 무렵에 일월산 북쪽 끝이자 대통산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앞으로 음식 장만은 중군이 맡는다. 잡랑, 너는 대원들을 데리고 객잔으로 가서 음식을 장만해 와라. 명심할 것은 음식을 장만할 때 그냥 와서는 안 된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 정보를 물어오란 말씀이십니까?”
“ 맞아, 잡랑. 객잔과 시장은 정보의 보고잖아. 그런 곳에 들를 때는 항상 귀를 최대한 열어놔야 하는 거야.”
연우강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장사덕에게 던졌다.
“ 다녀오겠습니다. 광랑.”
장사덕은 대원들을 데리고 산에서 보아두었던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 그럼 이제 흑천이 정식으로 나서는 거냐?”
멀어지는 장사덕 일행을 쳐다보던 두작군이 궤짝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 흑천이란 말 자체가 어둠의 하늘이란 뜻이잖아.”
“ 계속 어둠 속에서 활동하겠다는 말?”
“ 두 영감.”
“ 말해라.”
“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
“ 드러나 위험보다 잠재된 위험이 더 무섭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 맞아, 영감. 위협이나 협박은 대놓고 하는 게 아냐. 시도 때도 없이 떠벌리게 되면 식상해지고 말아. 식상함은 곧 익숙함으로 변하고 익숙하다는 건 무섭지 않다는 뜻이 되는 거야.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면 토끼도 이수라로 착각하곤 하는 게 사람이잖아.”
“ 조용히 있다가 한 번씩 일을 치겠다고.”
“ 그래도 알 놈은 다 알거든.”
속삭이는 듯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두작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