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잠은 잤는데
하늘 아래 땅이라는 천산산맥, 신선들만 산다는 곤륜산맥 그리고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 지저의 세계라는 불의 땅 투르판 분지,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 고원 등.
신강은 한서와 한랭, 불모와 척박, 비참함과 절망이 대기처럼 부유하는 곳이다. 신강의 척박함을 일컬어 어떤 이는 삶이 삶을 잉태하는 곳이 아닌, 죽음이 삶을 잉태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신강은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두 발 달린 짐승이 가지 못할 곳이 없다는 옛말처럼 신강에도 사람이 살아왔다.
그들은 척박한 자연과 싸우며 도시를 건설하고 왕국을 건설하면서 신강의 터주대감이 됐다.
그런 그들에게 서역으로 오가는 중원의 대상들은 중요한 생계 수단의 하나였다. 대상들이 오가는 길을 따라 도시가 생겨나고, 때로는 왕국으로 번성한 도시도 있었다. 북천 또한 그렇게 생겨난 도시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신강 사람들은 북천이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지 알지 못했다. 어떤 자는 곤륜산 신선들이 사는 도시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사막 어딘가에 신인들이 살아가는 도시라고도 했다.
북천은 실체가 없는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강 사람들은 지난 천여 년 동안 전설로 내려온 북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사당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북천에 말하라!
그대가 정당하다면 억울함은 반드시 풀릴 것이다.
중원의 관제묘처럼 곳곳에 세워져 있는 사당의 문에는 마귀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쪽에는 어김없이 그 글이 씌어있다. 그 글이 바로 북천이 전설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문에 마귀상이 새겨져 있다고 하여 지옥부라고 불리는 사당에 억울한 사정이 적힌 종이와 함께 일정 금액을 놓으면 복수는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북천과 지옥부를 합쳐 북천지옥부라고 부르게 됐고, 그들은 신강의 하늘이 됐다.
망망대해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던 모래가 뚝 끊어지고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인 듯 푸른 녹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군 요새처럼 외곽에 삼 장 높이의 성벽을 쌓은 녹주는 거대한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넓다.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에서 시작한 일 장 폭의 길이 나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는 길은 도시 안쪽으로 곧게 이어져 있는데, 길 좌우측으로는 물이 흐르는 인공 수로가 있고 그 수로 뒤편으로는 지붕 낮은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남북 길이 백 장, 동서 오백 장 가량 돼 보이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 호수를 북쪽의 하늘에 있는 샘이라는 이름의 북천정으로 부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나 강물이 흘러들어 형성된 호수가 아니라 바닥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는 샘이기 때문이다.
그 호수 중앙에는 각 변의 폭이 이십 장이나 되는 거대한 오 층 건물이 우뚝 선 채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은 특이했다.
일층은 가장자리와 안쪽 곳곳에 아름드리 기둥을 세워 사방이 확 트인 정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기둥 위에는 나무판을 대어 편편하게 한다음 건물을 올렸다.
오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충수를 더해갈수록 지붕이 작아지는 탑 형태를 띠고 있는데 맨 위층, 즉 일층과 마찬가지로 사방이 확 트이게 만들어진 오층은 좌우 폭이 십 장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건물의 일층과 이층 사이 외벽엔 팔황북천각이라는 글이 음각돼 있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모래 바다 한가운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거대한 녹주 위에 세워진 고대 도시. 이곳이 바로 신강의 하늘이라는 북천지옥부였다.
언제부터인가 오층 전망대에는 황금색 장포를 걸친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호수 동편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눈은 아득하게 젖어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간절히 보고 싶어할 때 나타나는 그리움이었다.
“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 아주 나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위축되게 하는,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내포돼 있었다.
절대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형의 기운을 뿜어내는 이 자는 신강의 하늘이라고 불리는 북천지옥부 부주 북천대제 야율사은이었다.
“ 백용퇴를 지나 로프노르에 머물고 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야율사은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던 듯, 뒤편 기둥 옆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북천대제의 친위대인 백의광마군의 군주.
북천대제를 제외한 북천지옥부 최강의 고수.
무결군자 등.
여러 별호로 불리고 있는 이 사람은 북천대제 야율사은의 오른팔이자 총관 역할까지 도맡아 하는 백검사신 탈라하였다.
“ 누란에 있다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대제.”
“ 그에 대해 내린 평가를 말해 보라.”
“ 그게.......”
백검사진 탈라하는 말끝을 흐렸다.
연우강이란 이름이 중원에 회자되기 시작하면서 북천대제의 지시를 받고 조사를 시작했다.
연우강 주변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상당히 중요한 사건들이었지만 묘하게도 그가 직접 관련된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다. 현재 이곳으로 오고 있는 잠룡 십 조만 해도 그렇다. 여러 번의 전투를 거쳤고, 그때마다 그들은 승리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조사 대상은 잠룡 십 조 대원들이 아니라 연우강 개인이다.
잠룡 십 조가 전투를 치를 때 연우강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겉으로 드러난 정황만 보면 그는 잠룡 십조를 이끄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땅히 보고할 거리가 없었다.
“ 상황은 있는 데 결과가 없단 말이냐?”
야율사은은 엷게 미소지었다.
“ 그렇습니다. 대제. 그자는 대야벌 다른 잠룡보다 오히려 부족했습니다.”
“ 쯧!”
야율사은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 제가 잘못 판단한 겁니까?”
탈라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그가 처음 북로정군에 왔을 때 별명은 예쁜이였다.”
“ 예쁜이라면?”
일반적으로 예쁜이란 별명은 여자들을 부르는 별명이 아닌가.
“ 예쁜이는 밤 시중을 드는 사내를 일컫는 말이었다.”
“ 서, 설마?”
“ 설마가 아니다. 탈라하. 그는 이놈 저놈에게 겁탈을 당해도 반항할 꿈도 꾸지 못했던 부잣집 도련님에 불과했다.”
“ 맙소사!”
믿어지지가 않았다. 연우강이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그것까지 파악 못한 건 아니다. 연우강이 대야벌 벌주로부터 묵사를 얻어냈을 때와 잠룡 십 조를 모집할 때 보여주었던 광경은 중원 무림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랬던 그가 사내들의 정액받이를 했다는 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 원래 군이라는 게 그렇다. 밖에서 아무리 날고 기는 자라고 해도 군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하룻강아지로 변하고 만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연우강이 군을 떠나기 전에 정천호였다는 사실을 떠올린 탈라하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나는 그에게 충고를 해 주었다. 그렇게 당하고 살면 놈들에게 맞아 죽든지, 화류병에 걸려 죽든지, 죽게 될 거라고, 개죽음을 당하기 싫으면 놈들을 먼저 죽여야 한다고 했다.”
“ 그렇게 했습니까?”
“ 그 말을 해준 다음 날, 열다섯 명이 목에 박도가 꽂힌 채 죽었고, 그로부터 삼 년 후 그는 흑랑기의 대장인 정천호가 됐다.”
“ 성격이 돌변한 겁니까?”
“ 돌변한 정도가 아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미쳤다. 역대 흑랑기 중 그보다 잔인한 흑랑기는 없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그런 그를 광랑이라 불렀고, 적들은 개독새라 불렀다.”
“ 엄청난 자군요.”
“ 엄청나다는 말로는 그를 설명하지 못한다. 탈라하. 우리 흑랑기 일천이백 명은 그가 검은 것을 희다고 하면 흰 걸로 믿었다. 아니 믿었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가 저건 흰색이야 하면 그건 무조건 흰색이 됐다.”
“ 신이었단 말입니까?”
탈라하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야율사은의 우리라는 말 때문이다. 그 말에는 흑랑기 대원들뿐만 아니라 북천대제 야율사은도 포함돼 있다. 그 또한 연우강을 신으로 여겼다는 말인 것이다.
“ 맞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우리 흑랑기에게 있어 그는 신이었다. 아마 황제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해도 우리 흑랑기는 기꺼이 북경으로 진격해 갔을 것이다.”
“ 하지만 그는 무공이.....”
“ 새외귀막의 혈도부대 일천을 없앤 사람이 그다. 탈라하!”
“ 정말입니까?”
탈라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실 혈도부대 전멸 사건은 북천지옥부 수뇌부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대사건이었다. 그 당시 북천지옥부의 권력은 전대 부주의 큰아들인 야율대극이 쥐고 있었다. 야유대극은 새외귀막의 막주 혈사귀랑 단리효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단리효의 몰락은 야율대극의 몰락을 가져왔다.
명 제국과의 전쟁에 혈도부재를 참여시킨 것은 새외귀막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사건이 됐고, 그 기회를 틈타 단리효의 형인 흑사귀랑 단극효가 천외흑막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새외귀막에서 탈퇴해버린 것이었다. 그 흑사귀랑 단극효를 지원해준 사람이 현 부주인 야율사은이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야율사은은 형님인 야율대극을 밀어내고 북천지옥부의 부주가 됐다.
그 모든 일이 시작이 혈도부대의 몰락에서 비롯됐는데, 그들을 없앤 사람이 연우강이라니.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는 천재다. 하지만 천재적인 머리보다 더 무서운 건 소름끼치도록 가공할 적응력이다. 그는 지옥에 들어간다고 해도 며칠만 있으면 악귀들과 친구가 돼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다.”
“ 그런 자가 어떻게.....?”
“ 부하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는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냐?”
“ 그렇습니다. 대제.”
탈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신으로 혈도부대를 없앨 정도로 엄청난 무공을 소유한 자라면 몸을 빼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즉 마음만 먹었더라면 부하들을 구할 시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 나 때문이었다.”
“ 대제 때문이었단 말입니까?”
“ 난 첫 번째 승부를 걸었다. 형님에게 내가 흑랑기에 있다는 소문을 흘렸고, 형님은 단리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 결과가 바로 혈도부대였다. 원래 혈도부대를 없애러 가야 할 사람은 나였어.”
야율사은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난 저들을 없애야 한다, 광랑.’
‘ 저들이 누군데?’
‘ 내 앞길을 가로막는 산이다.’
‘ 살아남을 자신은?’
‘ 오 할이다.’
‘ 그럼 내가 간다, 괴랑!’
‘ 광랑, 네가 가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면 오할이지만 네가 가면 살아날 가능성은 사할 밖에 되지 않는다.’
‘ 그래서 내가 간다는 거다 괴랑.’
‘ 왜?’
‘ 나보다 강한 네가 이곳에 있으면 흑랑기 대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게 다냐?’
‘ 그리고 난 네게 진 빚을 갚고 싶다.’
‘ 빚이라고?’
‘ 초년병 시절에 너 때문에 난 살아남았다.’
‘ 저놈들은 일천 명이다. 광랑. 넌 일천 대 일의 전투를 치러야 한다.’
‘ 흑랑기에게는 지금 현재만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내일이란 말은 없다. 괴랑.’
‘ 정말 가겠단 말이냐?’
‘ 한 명이라도 좋다. 괴랑. 살릴 수 있다면 살려라!’
‘ 이건 내일이다.’
‘ 어떻게 하면 놈들을 유인할 수 있는 거냐?’
‘ ......야율사극이라고 외치면 된다.’
‘ 본명?’
‘ 응.’
‘ 설사 살아남는다고 해도 앞으론 볼 수 없겠구나.’
‘ 그럴 거다. 이걸 가지고 가라.’
‘ 뭐냐 이건?’
‘ 십뢰라는 무기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때 사용하면 된다.’
‘ 자살할 때 사용하라고?’
‘ 또다시 엉덩이를 대줄 상황이 오면 넌 자살할 거잖아. 입 안에 처넣고 방아쇠만 당겨라. 그럼 고통 없이 한 방에 갈 수 있다.’
‘ 나쁘지 않은 물건이네. 아무튼 죽기 전에 빚을 갚을 기회를 줘서 고맙다. 사은.’
“ 그럼 대제 대신 그가 혈도부대를 유인해 갔다는 말입니까?”
“ 그는 그런 사람이다. 무공을 익히지 못했을 때나 익혔을 때나 다르지 않았다. 가장 많은 위험한 임무는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나는 그가 혈도부대를 유인해 가면서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뭐라고 했습니까?”
“ 죽기 전에 빚을 갚을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하더구나.”
“ 그럼 그때 혈도부대를 유인해 갔던 이유가 바로 그 충고에 대한 보답이었단 말입니까?”
“ 맞다. 탈라하. 그 일로 인해 난 북천지옥부 부주가 됐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 후회하십니까?”
“ 아니다.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에겐 내일이란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나도 그 순간엔 최선을 다했다.”
“ 그럼 그가 오는 시기에 맞춰 각 문파의 수장들을 초대한 이유는 뭡니까?”
“ 나는 물론이고 각 문파의 수뇌들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밀천이 등장했고, 대야벌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대로 가면 우리 팔황새는 멸망하고 만다. 나는 내 목을 걸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승부를 걸어볼 참이다.”
“ 그 승부에 그도 있어야 합니까?”
“ 그가 아니라 그에게 맡겨 두었던 물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날 도와준다면 난 오 년 안에 중원 무림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오 년이란 말입니까?”
“ 그렇다. 탈라하. 그것도 길게 잡은 거다.”
“ 만일 그가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글쎄 그건 그때 다시 생각해야겠지. 단리효에게는 알렸느냐?”
“ 은밀하게 흘렸습니다. 대제.”
“ 결과는?”
“ 일천의 사풍무영대가 새외귀막을 나서는 걸 확인했습니다.”
“ 사풍무영대가 몰살할 시기에 맞춰 마중을 나가라.”
“ 사풍무영대마저 상대가 안 될 거라고 보십니까?”
탈라하의 눈에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혈도부대가 중원 무인을 상대하기 위한 조직이라면 사풍무영대는 새외귀막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래 귀신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사막만큼은 최강을 자랑한다.
“ 방금 한 이야기는 절대 비밀임을 명심해라. 녀석의 과거는 물론이고 혈도부대에 대한 것까지.”
“ 저는 비밀을 지킨다고 하지만 단리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탈라하, 너 같으면 한 녀석에게 일천 명에 달하는 혈도부대가 몰살당했다고 떠벌리고 다니겠느냐? 그 말을 떠벌리는 순간, 녀석은 팔황새를 떠나야 한다.”
“ 아무 말 못한단 말입니까?”
“ 그는 죽어도 그 말을 못 한다. 탈라하. 아마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널 죽여 살인멸구를 하려고 들 것이다.”
“ 명심하겠습니다. 대제.”
탈라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래.”
“ 커억!”
‘ 보고 싶다, 연우강.’
야율사은의 눈빛이 다시 아득히 멀어졌다.
*********
천 년.
서 있는 이곳이 한때는 서역을 지배했던 누란의 땅이라는 사실이 언뜻 믿어지지가 않는 듯 수여설은 생경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은 온통 모래밖에 없고 도시가 있었다는 흔적은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낮은 흙담이 전부다.
어쩌면 흙담도 이곳을 오가는 대상들이 만들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따지면 누란 왕국이 존재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 우리 북해빙궁의 역사도 천오백 년이나 되는데....”
수여설은 상념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 천오백 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봐야 합니다. 수소저.”
“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기분이 어때요?”
수여설은 배시시 웃으며 연우강을 보았다.
“ 무슨 기분?”
“ 군 생활할 때 이곳을 제집처럼 헤집고 다녔을 거잖아요.”
“ 끔찍한 소리 하시네요.”
“ 군 생활이 끔찍한 경험이에요?”
“ 군으로 막 들어온 신병은,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상대라고 보면 됩니다. 까라면 까야.... 아니 그건 말이 좀 심하네. 아무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못 하면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곳이 군댑니다.”
“ 연 공자도 그랬다고요?”
“ 저라고 해서 다를 게 없잖습니까?”
“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
“ 밖에서 놀았던 경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곳이 군댑니다. 제가 부모님께 했던 반항은 애교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 상상이 안 가요.”
“ 저도 처음엔 군대가 그런 곳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습니다.”
“ 어느 정돈데요?”
“ 굳이 어느 정도라고 말하긴 그렇고, 인간과 짐승의 중간에 있는 자들이 전쟁터에 있는 군인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경험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 무인들보다 더하다는 뜻인가요?”
“ 만일 제가 군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라면, 수 소저에게 범천담대세가의 생존자를 찾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을 겁니다.”
“ 그랬군요. 그런데 북천지옥부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연우강에게 군 생활은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사실 자신을 비롯한 잠룡들은 연우강을 쫓아왔을 뿐 북천지옥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서객잔에 들렀을 때부터 시작하여 틈틈이 북천지옥부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가다보면 마중 나오는 자가 있을 겁니다.”
“ 마중을 와요?”
수여설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우린 북천지옥부를 치러 가는 정벌군입니다. 적이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가만있진 않을 거 아닙니까?”
“ 우릴 공격할 거란 말인가요?”
“ 참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북해빙궁은 어느 정돕니까?”
“ 어느 정도라는 건?”
“ 잠룡 오 조가 북해빙궁으로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다라밀영 이라파가 빙궁으로 간 건가요?”
“ 그렇습니다.”
“ 이라파는 빙궁을 공격하지 못해요, 연 공자.”
“ 같은 팔황새라는 겁니까?”
“ 그가 빙궁을 공격하게 되면 어머닌 포달랍궁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 그들을 막아낼 정도는 충분히 된다는 뜻이군요.”
“ 잠룡들이 어떻게 해볼 정도가 아니에요.”
“ 궁주가 없어도 그렇습니까?”
“ 어머니가 북해빙궁에 없단 말이에요?”
“ 지금 팔황새 각 문파 수뇌들이 북천지옥부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수 소저.”
“ 제 어머니도?”
“ 옥녀빙인대를 이끌고 북해빙궁을 나섰다고 합니다.”
“ 그럼 북천지옥부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겠네요.”
수여설은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보네요.”
“ 이젠 괜찮아요.”
“ 괜찮다는 건 포기?”
“ 손뼉을 치기 위해선 반드시 손바닥 두 개가 필요하잖아요.”
“ 수 소저는 손뼉칠 준비가 됐는데, 어머닌 아직 준비가 안 됐단 말인가요?”
“ 제가 떠나기 전엔 그랬으니까요.”
“ 그래도 시집가긴 전엔 화해하세요.”
“ 호호호! 걱정되나 봐요?”
“ 나이 서른이면 어른입니다. 수 소저.”
“ 어? 제 나이를 어떻게 알았죠?”
“ 백수의 최대 관심사는 여자의 나이를 알아내는 겁니다.”
“ 재력이 아니고요?”
수여설이 빙그레 웃었다.
문득 이지약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연우강이 구분했다면서 들려주었던 백수론은 개백수, 백수, 황금백수로 구분하는데 그 중 최고 백수가 황금백수라고 하였다.
“ 그건 개백수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지요. 황금백수는 돈 걱정을 하지 않는 백수를 말하니까, 굳이 재력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 그럼 어떤 거에 신경을 쓰죠?”
“ 첫째는 미모, 둘째는 나이, 셋째는 뒤탈입니다.”
“ 첫째와 둘째는 알겠는데 셋째 뒤탈은 뭘 말하는 거죠?”
“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면 안 되지 않습니까.”
“ 호호호! 하하하!”
수여설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크게 웃었다.
“ 에라, 이 나쁜 녀석아!”
듣고 있던 이자승이 연우강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빽 소리쳤다.
“ 내가 나쁘다고?”
“ 여자와 잠을 잤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자식아.”
“ 여자가 책임지는 걸 싫어하면?”
“ 여자는 싫어하는 남자와 잠을 자지 않아.”
“ 정말 그래요?”
연우강은 수여설을 돌아보며 물었다.
“ 글쎄요, 아직 잠을 자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하지만 잠을 자야 한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잘 것 같아요.”
“ 나이를 서른이나 먹었으면서 아직 남자 경험도 없이 뭐한 겁니까?”
“ 좋아하는 남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 언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사내와 잠자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나누고 있는 수여설을 보며 남궁운화는 질겁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 뭐가요?]
수여설은 남궁운화를 보았다.
[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태연하게 해도 되는 거예요?]
[ 연 공자가 우릴 여자 취급이나 해 줘요?]
[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은.......]
[ 연 공자 말처럼 난 서른이에요.]
[ 서른이면 가능하다는 말이에요?]
[ 얼굴이 두꺼워지고 뻔뻔해진다는 뜻이에요, 남궁 가주.]
[ 헹! 아무튼 전 그런 이야기는 못 할 것 같아요.]
[ 못 하는 게 훨씬 좋은 거예요. 남궁 가주.]
수여설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연우강과 이자승을 보았다.
“ 거봐라 녀석아.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잠을 자고, 잠을 자는 순간 미래를 꿈꾸는 존재야.”
모처럼 어른 노릇을 했다는 생각이었을까. 이자승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영강님. 솔직하게 대답해 줘야 합니다.”
“ 뭐든지 물어라. 기꺼이 충고해주마.”
“ 아니다, 영감님보다 욱 영감에게 묻는 게 더 낫겠네.”
연우강은 욱일승을 보았다.
“ 기꺼이 대답하겠네. 연 공자.”
욱일승이 빙그레 웃었다.
“ 저 양반과 기루에 들락거린 횟수 혹시 기억하쇼?”
“ 당연히 기억하고 있네. 저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 기루였네. 부인이 셋씩이나 있으면서도 얼마나 기루를 좋아했던지....”
“ 부인이 셋이나 됐다고?”
“ 그렇다네. 본가에 둘이 있었고, 황궐에 한 명이 있었네.”
“ 그러면서도 기루에 갔다는 말이오?”
“ 저 친구가 그 당시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전국에 있는 모든 기루를 섭렵하지 않은 녀석은 사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었네.”
“ 할말 있습니까?”
연우강은 다시 이자승을 보았다.
“ 기, 기루에 가는 건 술을 마시기 위해서야, 녀석아.”
“ 욱 영감!”
“ 술은 마신 다음 기녀를 끼고 방으로 들어갔네.”
“ 할머니가 세 분이나 된다는 영감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 함께 방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잠은 안 잤어, 자식아!”
이자승은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 그 여자들을 전부 책임졌으면 영감님의 자식은 우리 잠룡 십 조 대원들보다 훨씬 많았을 겁니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 안 잤다니까!”
“ 당연히 안 잤겠죠.”
“ 맞아, 녀석아 함께 방에 들어가긴 했지만 난 절대로...”
“ 밤새 그 짓 하느라 잠이나 제대로 잤겠습니까?”
연우강은 툭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큭큭큭!”
“ 낄낄낄!”
“ 하하하!”
“ 풋!”
주변에 있던 이들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 이익!”
이자승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 안 잤다니까.”
“ 저라도 그 상황에선 잠을 못 잘 겁니다. 영감님. 자, 떠날 준비해.”
연우강은 이자승에게 맞장구를 쳐준 다음 잠룡들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햇빛이 뜨거운 낮에는 그늘 아래에서 쉬고 밤에 움직이기로 했다.
연우강의 명령이 떨어지자 잠룡 십 조 조원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낙타를 끌고 왔다.
“ 몸은 어때요?”
낙타에 오른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온몸이 쑤시고 결려요.”
남궁운화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 낙타를 타는 게 더 힘들었다. 처음엔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엉덩이와 허벅지 그리고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특히 엉덩이와 허벅지는 손을 대지도 못할 정도였다.
“ 파도를 타는 것처럼 낙타의 움직임을 타야 합니다.”
“ 그게 쉽지가 않아요.”
“ 천천히 가다보면 금세 적응하게 될 겁니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앞서 나갔다.
“ 이 정도면 상단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연우강을 따라 앞으로 나간 남궁운화가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여 마리에 달하는 낙타가 길게 늘어선 채 모래를 밟고 이동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낙타를 타고 한 시진 정도를 이동했을 때 비로소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남궁운화는 넋을 잃었다.
삼십여 장 높이로 우뚝우뚝 솟은 사구들은 달빛을 받아 현란한 광채를 뿌래댄다. 슬쩍 바람이 불어오면 사구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면 빛도 함께 흘렀다.
이곳이 사막이란 사실을 잊을 정도로 아름답고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경이로운 눈으로 자연이 만들어낸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 멋지지?”
그런 그들을 보며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 엄청납니다. 광랑. 사막이 저런 모습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철상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중원 오악이 아무리 아름답고 해도 저 모습에 비길까, 이건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신이 빚어낸 걸작이었다.
“ 맞아, 나도 처음엔 그랬어.”
“ 처음엔 그랬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이철상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직접 경험하게 될 거야.”
“ 화무십일홍이란 말입니까?”
“ 그것도 좋은 말이야. 아무튼 가자고.”
연우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길을 재촉했다.
일행이 연우강의 말을 알아차린 것은 정확하게 보름 후였다.
“ 제기랄, 저놈의 달!”
“ 저 빌어먹을 달은 왜 또 떠서는?”
“ 비나 쏟아졌으면 좋겠네.”
어김없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며 일행은 한마디씩 했다. 마음이 편해야 아름답고 황홀한 광경도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일행은 처음 알았다. 하루종일 낙타를 타고, 물은 오전에 두 번 오후에 두 번 도합 네 번을 마신다. 세안은 꿈도 꾸지 못하고 심지어 먹은 것도 오직 육포와 건포로 때우고 있다.
낮에는 잠을 자야 하는데 살인적인 더위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에는 추위 때문에 이가 덜덜 떨린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 아름답지 않아?”
연우강은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 이런 상황에서 달빛이 아름답다면 그 사람은 이간이 아닐 거예요.”
수여설의 말이 일행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했다.
매일 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떠오르는 달보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에 더 지쳤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상상을 초월하는 밤낮의 기온 차에 몸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멍한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 영감님은 어떻습니까?”
연우강은 이자승을 돌아보았다.
사실 욱일승 일행은 걱정하지 않았다. 지옥에서 보낸 세월이 수십 년인 그들에게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바닥이나 밤낮의 기온 차는 견디기 힘들 정도는 아닐 터였다.
문제는 구림세가에서 편안하게 살아온 이자승이었다.
“ 젊은 놈들이 이 정도 가지고 뭐가 힘들다고 그러느냐, 난 아직 까딱없다.”
이자승은 보란 듯이 어깨를 활짝 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이자승은 죽을 맛이었다.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내기가 저절로 움직여 방어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했더라면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내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한계에 달한 듯 점차 몸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 하긴 밤새도록 잠을 안 잔 분인데 이 정도도 못 견디면 말이 안 되겠죠. 더구나 지금은 밤이니까.”
이자승을 보며 히죽 웃은 연우강은 다시 길을 잡았다.
“ 아무튼 저 자식은 물에 빠져 뒈지면 주둥이만 뜰거야.”
“ 그걸 확인해볼 장소에 왔습니다. 영감님.”
“ 무슨 소리냐?”
이자승은 서둘러 앞으로 나갔다.
“ 저 앞에 있는 사구를 돌면 녹주가 나타나기로 돼 있습니다.”
“ 정말이냐?”
“ 지도에 그렇게 돼 있으니까 맞을 겁니다.”
“ 이럇!”
이자승은 낙타의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 물이다! 녹주다!”
뿌연 모래 먼지를 날리며 달려나간 이자승은 희열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 물이래요, 연 공자.”
“ 녹주래요!”
남궁운화와 수여설이 활짝 갠 얼굴로 소리쳤다.
“ 쯧! 저러다 다치지.”
연우강은 혀를 찼다.
“ 무슨 소리죠?”
막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수여설과 남궁운화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가장 많은 허점이 드러나게 되거든요.”
“ 적이 있을 거란 말인가요?”
“ 조금 있으면 결과가 나올 겁니다. 남궁 소저.”
“ 결과가 나온다는 건?”
“ 영감님이 먼저 갔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자승 할아버지는 적의 매복이 있나 없나, 그걸 확인하는 미끼?”
“ 이럴 땐 미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정찰이라고 합니다, 남궁 소저.”
“ 정찰은 매복 여부를 확인하러 가는 걸 말하는 거고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웬 놈들이냐!”
꽥!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낙타의 비명이 들려왔다.
“ 어떻게든 파악하면 되잖습니까.”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낙타를 몰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