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84화 (84/232)

제1장 허공섭물

호수 물이 순식간에 녹아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빙하빙백강을 펼치던 수여설이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내기를 끊은 탓이었다.

“ 대단한 녀석인가보죠?”

연우강은 머리에 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 북천대제 야율사은을 몰라요?”

“ 압니다.”

“ 그런데.....”

“ 대야벌에도 스무 개의 무림 단체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 소저.”

“ 그러니까 연 공자 말은 북천지옥부의 부주 자리가 별것 아니라는 건가요?”

“ 녀석과 헤어진 지 오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팔황새에서 북천지옥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돕니까?”

“ 북천이란 말은 황천의 적자를 의미하는 거예요. 즉 북천지옥부는 대야벌의 천상천과 비슷한 위치에 있어요.”

“ 실제 영향력은 어떻습니까?”

“ 그건.....”

“ 상징적인 영향력 외엔 별로 내세울 게 없다는 말이군요.”

“ 삼십 년 전에 있었던 일차 팔황정벌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곳이 북천지옥부였어요.”

“ 대야벌에서 북천지옥부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 사람들조차도 북천지옥부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삼십 년 전 팔황정벌 때도 다르지 않았을 테다, 그런데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이 북천지옥부라고 하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북천지옥부는 무인을 보내 각 세력을 지원했거든요.”

“ 자신들이 황천의 적자임을 증명하려고 그랬던 건가요?”

“ 그 이유까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지원으로 인해 북천지옥부는 팔황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파로 거듭나긴 했어요.”

“ 그랬군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오자 수여설과 남궁운화는 얼른 몸을 돌렸다. 그녀들이 몸을 돌리고 있는 사이 연우강은 옷을 입었다. 얇은 옷 위로 사망북의를 걸치고는 잠룡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 그런데 그 녀석이 왜 대단하다는 거죠?”

수여설이 사은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원래 변황은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키고 있는 중원과는 달리 강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풍습이 있어요.”

“ 강한 자식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말입니까?”

“ 그래요. 제가 차기 궁주 후보에서 밀려난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 그럼 북천지옥부는 어떻게 된 겁니까?”

“ 원래 북천지옥부를 장악하고 있던 자는 야율사은이 아니라 그의 형인 야율대극이었어요.”

“ 형을 밀어내고 대권을 잡았다는 건가요?”

“ 밀어낸 게 아니라 야율대극은 스스로 몰락했다고 보는 게 옳아요.”

“ 스스로 몰락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 변방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전에 연 공자가 말한 낙타를 죽이지 않는다거나 녹주는 절대 파괴하지 않는ㄷ는 것처럼 반드시 지켜야 할 철칙이 있어요. 특히 팔황새가 불문율처럼 지키는 철칙이 있는데 그건 바로 중원의 주인과는 절대 전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 중원의 주인이면 황실을 말하는 겁니까?”

“ 네.”

“ 황실과 전쟁을 하게 되면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멸망과 직결된다는 생각때문이군요.”

“ 변방의 많은 왕국들이 중원의 주인들과 전쟁을 하다가 멸망했으니까요.”

“ 그러면 야율대극은 명 나라 군과 전쟁을 치른 겁니까?”

“ 연 공자가 있던 북로정군과 전쟁을 치른 장본인이 바로 그였어요.”

“ 새외귀막의 혈도부대?”

“ 맞아요. 그 당시 야율대극은 새외귀막의 막주였던 혈사귀랑 단리효와 협정을 맺은 상태였어요.”

“ 그렇다고 해도 북로정군을 공격했다는 건.....”

“ 그 이유를 알려면 그 당시 북천지옥부와 새외귀막의 상황을 알아야 해요.”

“ 시간은 많으니까.”

일행이 앉아 있는 곳으로 온 연우강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앉자 장사덕이 육포와 건포를 가져와 연우강과 수여설 그리고 남궁운화에게 내밀었다.

“ 북천지옥부는 야율대극과 야율사은이 차기 부조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어요. 십 년 전만 해도 야율사은이 조금 앞서 있었다고 하네요. 새외귀막도 북천지옥부와 상황이 다르지 않았는데 흑사귀랑 단극효와 혈사귀랑 단리효가 차기막주 자리를 놓고 싸우고 있었고요.”

“ 서로 밀리는 자들끼리 손을 잡았단 말이군요.”

“ 그렇죠. 야율대극과 단리효가 손을 잡으면서 둘은 야율사은과 단리효를 제치고 권력을 거머쥐게 된 거죠. 어디나 그렇듯 새롭게 권력을 쥔 자들은 기존에 있던 자들을 숙청하잖아요. 결국 야율사은과 단극효는 모습을 감춰버리고 말았어요.”

“ 그랬던 야유사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혈도부대가 몰살당한 다음이었군요?”

“ 혈도부대가 북로정군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북천지옥부와 새외귀막을 발칵 뒤집어 놓았어요. 새외귀막은 단리효를 반대했던 자들이 천외흑막이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새외귀막에서 탈퇴해 버렸고, 북천지옥부에서는 야유대극이 몰락하게 되죠. 그런 일들이 정신없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사라졌던 야율사은이 돌아온 거예요.”

“ 약은 놈.”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비로소 혈도부대가 나타났던 이유를 알 듯했다.

혈도부대를 전쟁터로 끌어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류사은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그를 만나서 어떻게 할 거죠?”

옆에 있던 남궁운화가 물었다.

자신들의 임무는 북천지옥부를 궤멸시키거나 부주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문득 연우강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묻고, 함께 술을 마시고, 군대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할 겁니다.”

“ 임무는 어떻게 하고요?”

“ 무슨 임무?”

대수롭잖게 말을 받으며 연우강은 육포를 잘게 찢었다.

“ 대야벌 벌주가 내린 임무 말이에요.”

“ 대야벌을 떠날 때 여행이 목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 그럼 대야벌로 들어갈 땐 빈손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 남궁 소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게 없어요?”

“ 왜 없어요? 엄청나게 얻었죠. 잃어버렸던 가주 자리를 되찾았고, 상천의 무공도 얻었고..”

“ 그리고 자랑스런 흑천의 무인도 됐죠.”

“ 킥!”

자랑스런 흑천이란 말에 남궁운화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 그 웃음은, 흑천을 우습게 본다는 뜻?”

“ 핏! 자기가 우습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남궁운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 왜 그렇다고 생각하죠?”

“ 나중에 전부 쫓아낸다고 했잖아요.”

“ 그럼 우습게 생각하는 게 되는 겁니까?”

“ 우습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연 공자에게 흑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에, 제 말이 틀려요?”

“ 그건 맞는 말이네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게 찢어 두었던 육포를 입으로 가져갔다.

“ 그게 다예요?”

황당하다는 듯 남궁운화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 그럼 더 있어야 합니까?”

“ 친구는 북천지옥부 부주잖아요.”

“ 그러니까 남궁 소저 말은 친구가 북천지옥부 부주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느냐 그 말이군요?”

“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성공해 이쓰면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질투가 나기도 하잖아요.”

“ 와우!”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왜 그래요?”

“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요? 이제 어른이 다 됐네요.”

“ 연 공자!”

남궁운화는 빽 소리쳤다.

딴에는 야율사은이란 사람을 만났을 때 연우강이 위축될까봐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어른이 됐다며 놀림만 당하고 만 것이다. 그 말은 곧, 지금까지는 어린애로 보았다는 말이었다.

공연히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 혹시 그거 아세요?”

“ 어린애에게 하는 충고라면 안 들을 거예요.”

남궁운화는 톡 쏘아붙였다.

“ 어린애에기 하는 충고가 아니라 단순한 질문입니다.”

“ 좋아요, 말해보세요.”

“ 전에 구림세가에서 영감님이 처음 나타났을 때 기억해요?”

연우강은 이자승을 턱을 가리켰다.

“ 난 또 왜 끌어들여, 녀석아!”

연우강이 자신을 지목하자 공연히 불안하여 이자승은 버럭 소리쳤다. 연우강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다는 건 그동안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영감님을 욕하자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남궁운화를 보았다.

“ 논에 다녀온 사람처럼 하고 있었잖아요.”

“ 제대로 보았네요. 맞아요, 남궁 소저. 영감님은 논 메다가 나온 농부 차림을 하고 있었죠. 그럼 진짜 농부와 영감님의 차이는 뭘까요?”

“ 차이가 있어요?”

“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 어떤 차이가 있다는 거죠?”

“ 저 영감님은 수백 년 동안 농사를 지어도 농부의 마음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 무슨 소리야, 자식아.”

역시나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자 이자승은 대뜸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그럼 영감님이 대답해 보십시오. 흉년이 들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연우강은 이자승을 보며 물었다.

“ 내년엔 더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 바로 그겁니다. 영감님. 농부들은 흉년이 들면 당장 가족 걱정을 합니다. 내년이 아닐 올해를 어떻게 넘길지 그걸 걱정한다는 거죠.”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 그걸 왜 영감님이 묻습니까, 남궁소저가 물어야지요.”

“ 나도 궁금해서 그런다, 이놈아.”

“ 뭐 별다른 게 있는 건 아닙니다. 자연지도니 뭐니 하는 걸 얻는다고 백날 농사를 지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겁니다. 한쪽에 먹을 걸 잔뜩 쌓아두고 무소유의 삶을 말하는 자나, 가져 본 적도, 가진 것도 없으면서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파하는 건 가식이라는 겁니다. 정말 무소유의 삶을 살고 싶다면 모든 걸 버려야 하고, 버리는 삶을 살고 싶다면 일단은 얻어야 합니다. 인간이 뭔갈ㄹ 얻을 수 있는 순간은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뿐입니다.”

“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단 말이냐?”

이자승은 찔끔한 얼굴을 했다.

연우강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논에 나가 모를 심고, 밭에 야챌르 심는 건 농사를 통해 자연지도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우강의 말처럼 농사를 통해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제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고, 흑랑기에 소속된 녀석들이 전부 막장 인생들이라서 알게 된 것뿐입니다. 본인이 가진 능력 이상을 뽑아내는 경우는 죽음이 등 뒤에 있을 때뿐이더군요.”

“ 그것도 그렇게 얻은 것이냐?”

이자승의 시선은 연우강의 사망묵의 곳곳에 꽂힌 암기들을 훑고 있었다.

“ 죽음을 등 뒤에 두고 익힌 게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익힌 겁니다.”

“ 너무 이기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느냐?”

“ 가족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렇다. 만일 네가 군에서 죽었다면 널 군에 보낸 할아버지나 부모님은 평생을 회한 속에서 살았을 거다.”

“ 전에도 말했지만 전쟁터는 인간과 짐승의 경계에 선 자들만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 사막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세계입니다. 그 속에서면 가족은 물론이고 제 자신도, 내일도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모래와 지금 현재만 있습니다.”

“ ......!”

이자승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할 말을 잃었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과연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인생 경험이 가장 풍부한 사람은 다름아닌 연우강이었던 것이다.

“ 그래서 꿈도 없이 그렇게 세월만 보내는 거더냐?”

“ 저는 지금 제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류사은 그 녀석은 부주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하들을 감시해야 하고, 혹시 대야벌에서 침공해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죠. 겉보기엔 그 녀석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제가 훨씬 편하답니다. 그래서 녀석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겁니다. 남궁소저.”

시작은 이자승을 보며 했지만 마무리는 남궁운화를 보며 했다.

“ 류사은 그분의 삶이 전혀 부럽지 않으니까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 그렇습니다. 남궁소저. 부러우면 제가 지는 겁니다.”

“ 아무튼 연 공자가 말하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상황도 그럴싸하게 변하곤 해요.”

“ 저는 세상을 대하는 건 관조적인데 사는 건 세속적이고, 그놈은 세상을 대하는 건 세속적인데 사는 건 관조적이라서 그렇습니다.”

“ 아무튼 너무 어려워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 지금처럼 그냥 편하게 살면 됩니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육포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녹아천에 여장을 풀고 지내기를 삼 일. 연우강의 말처럼 손님이 찾아왔다. 하얀 옷을 걸치고 낙타를 타고 온 자들의 수뇌는 야율사은의 오른팔인 백검사신 탈라하였다.

“ 북천지옥부의 백의광마군 군주 백검사신 탈라하외다. 대제의 명령을 받고 모시러 왔소이다.”

탈라하는 중원 무인들의 인사인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 난 연우강이오. 어떻게 불러줬으면 좋겠소?”

연우강은 탈라하 뒤편에 서 있는 자들에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녹아천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잠룡 십 조를 보고 놀랄 법도 한데 전혀 동요 없이 조용히 서 있다. 굳이 무기를 뽑지 않아도 백의광마군이라고 하는 자들의 실력이 대충 짐작이 갔다.

“ 무슨 말씀인지....”

“ 류사은, 아니 야유사은은 내 친구요. 나는 댁이 대제라고 부르는 그를, 녀석 또는 인마라고 부를 테고 심할 때 개자식이란 말도 툭툭 뱉어낼 거요. 만일 그 자리에 댁이 있으면..”

“ 내가 기분 나빠 할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 기분 나쁜 건 당연한 거니까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고 그것보다는 내가 불편해질까봐 그렇소.”

“ 불편하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 사은 그 자식에게는 말을 툭툭 놓다가도 댁을 보면 말을 올려야 하는 불편함을 말하는 거요. 참고로 이곳에 있는 노인네들 중에 내가 공대하는 사람은 여기 볼썽사납게 생긴 영감님뿐이오. 젊은 시절에 황궐 궐주를 역임한 적이 있고, 지금은 구림세가의 태상가주라는 직책을 맡고 있소.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친구요.”

“ 태, 태황야!”

탈라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연우강이 이끄는 잠룡 십 조에 구림세가 전대 가주가 합류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사막까지 따라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참고로 난 정오품이오.”

“ 쉽게 말하며 말을 놓고 싶다는 겁니까?”

“ 말을 놓고 싶다는 게 아니고 불편함을 최소화하자는 거요. 그리고 한 사람만 해도 되는 걸 굳이 두 사람이 함께하는 건 낭비라고 하오.”

“ 나, 낭비라고요?”

탈라하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비아냥대는 거라면 화라도 낼 텐데 그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기까지 하다.

“ 정오품!”

“ 편할 대로 하십시오.”

결국 탈라하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그럼 인사는 대충 끝났으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가면서 천천히 소개를 해주도록 할게, 앞장 서.”

“ 바,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야율사은 외에 누군가로부터 반말을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 탈라하는 말을 더듬었다.

“ 우린 사흘이나 기다렸어, 탈라하.”

“ 사, 사흘이라고요?”

이번엔 너무 놀라 말을 더듬고 말았다.

사풍무영대가 이곳에서 연우강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우강 일행이 이곳에 도착한 날짜도 사흘 전이다. 그런데 연우강은 사흘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 말은, 맞닥뜨리자마자 사풍무영대를 전멸시켰다는 의미가 아닌가.

연우강을 비롯한 잠룡 십조에 대한 활약상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설마 사풍무영대를 그렇듯 쉽게 궤멸시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말.

“ 마중 나올 걸 알고 있었습니까?”

“ 사은 그놈은 성공했다고 해도 친구를 버릴 놈이 아니니까.”

“ 끄응! 모시겠습니다.”

역시 대제를 ‘놈’이라고 부르는 말은 듣기가 거북했다. 탈라하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얼른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백의광마군의 안내로 연우강과 잠룡 십 조 일행은 녹아천을 나섰다. 녹아천에서 북천지옥부까지는 열흘 거리였다. 녹아주는 두 곳이 있었고, 그때마다 연우강은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가 특히 강조했던 사항은 노인들을 비롯한 잠룡들의 차림새였다.

“ 이 녹주가 마지막 녹줍니다.”

“ 여기서 북천지옥부까지는 얼마나 되지?”

“ 저기 보이는 사구만 넘으면 바로 북천지옥부입니다.”

“ 그럼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가도록 하자고.”

“ 반 시진도 남지 않았습니다. 연 공자.”

“ 팔황새 주인들은 와 있어?”

“ 지금쯤 도착해 있을 겁니다.”

“ 알았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잠룡들을 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꾸준히 몸 관리를 하도록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꾀죄죄한 모습들이었다.

“ 잠룡들은 먼저 씻어라! 씻고 난 다음 검사를 할 거야. 수염이 남아 있거나, 손톱이나 발톱 밑에 때가 끼어 있거나, 머리가 지저분하거나, 몸이나 입에서 냄새가 나는 놈은 북천지옥부가 아니라 돈황으로 가게 될 테니까 알아서들 해.”

“ 알겠습니다. 천주님.”

잠룡들은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고는 녹주를 향해 달려갔다.

“ 영감들도 마찬가지야. 지저분한 수염과 머리를 정리하고, 손톱 밑이나 발톱 밑에 있는 때를 전부 제거해.”

“ 무슨 짓이냐?”

일행 중 가장 지저분한 꼴을 하고 있던 두작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남의 집을 방문하는 자리잖아.”

“ 그러니까 손님으로 가는 거니까 깨끗하게 하고 가야 한다는 거냐?”

“ 선물도 반드시 준비해서 가야 해.”

“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

“ 구림세가에서 겪었잖아. 거지발싸개처럼 하고 가면 정말 거지로 생각하고 차 한 잔도 내주지 않아, 영감.”

“ 또 내 집이다, 또 내 집이야.”

옆에 있던 이자승이 연우강을 보며 인상을 긁었다.

“ 저 녀석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형님. 여러 곳을 가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몇 가문을 방문해보긴 했는데 구림세가처럼 문턱이 높은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두작군이 맞장구를 쳤다.

“ 그건 내가 없었으니까 그렇지. 내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이자승은 변명하듯 소리쳤다.

“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요, 절친한 친구를 찾아가는데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거냐?”

두작군의 시선이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 친구 녀석이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

“ 그러니까 네 친구 때문에 깨끗하게 하고 가야 한다고?”

“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냐?”

“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옷은 이걸 입고 갈 거냐?”

두작군은 제 옷을 툭 치며 물었다.

몸은 씻어서 어떻게 해본다고 하지만 옷은 따로 준비한 게 없어 별로 표시가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 교랑, 넌 가서 낙타 끌고 와.”

“ 알겠습니다. 천주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철상이 고개를 숙이고는 맨 뒤편으로 몸을 날려갔다. 잠시 후 궤짝을 네 개씩 싣고 있는 낙타 두 마리를 끌고 왔다.

“ 노인네들 건 어느 거야?”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며 물었다.

“ 이겁니다. 천주님.”

이철상은 뒤편에 있는 낙타를 가리켰다.

“ 저 낙타 등에 메인 궤짝에 보면 영감들 옷 있어, 이름표를 적어 놓았으니까 찾아서 입어.”

그렇게 말하고는 연우강은 몸을 돌려 녹주로 향했다.

“ 옷이라고? 가만, 혹시 그때 치수를 쟀던 게....”

두작군은 문득 주천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객잔에 머물 때 이철상이 와서는 몸의 치수를 재 가지고 갔다. 그때 옷이라도 하나 맞춰주려고 그러느냐고 농담을 건넸다. 그때 이철상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후로 옷에 대한 말이 없어 잊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야 그 옷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 두 영감은 아예 껍질을 벗기고 옷을 입는 게 낫겠다.”

연우강은 사망마비 하나를 뽑아 두작군에게 던졌다.

“ 정말 껍질을 벗겨내라는 거냐?”

“ 손톱 깎으라고 주는 거잖아.”

“ 네 무기로 손톱을 깎으라고?”

“ 발톱도 깎고, 수염도 정리 좀 해.”

“ 네 무기로?”

두작군은 사망마비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무인들은 대개 자신의 무기를 신성시하며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즉 손발톱을 깎으라며 제 무기를 선뜻 내주는 무인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녀석은......

“ 손발톱을 깎고 수염과 머리를 정리하는 게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건설적인 일 같은데, 아냐?”

“ 그렇다고 해도 무기로 손톱을 깎는다는 게...”

“ 아예 손톱 깎을 일이 다시는 없도록 손가락을 잘라줄까?”

“ 됐다. 자식아.”

두작군은 손을 휘젓더니 호수를 향해 달려나갔다.

깔끔하게 하지 않으면 돈황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위협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인들과 잠룡 십 조 대원들은 정성을 다해 몸을 씻었다. 그들이 몸을 다 씻고 나자 이번엔 수여설과 남궁운화가 약간 위쪽으로 자리를 옮겨 몸을 씻었다.

그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굳이 연우강의 말이 아니더라도 수여설은 정성을 다해 씻을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어머니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받으세요, 수 소저.”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몸을 씻고 있는데 연우강이 오더니 뭔가를 휙 던졌다.

“ 이건 뭐죠?”

그것을 받아든 수여설이 물었다.

“ 장미향을 섞은 조둡니다. 그리고 여기 옷 있으니까 갈아입도록 하세요.”

연우강은 작은 궤짝과 함께 보자기 두 개를 내려놓고 아래쪽으로 갔다.

“ 고마워요.”

수여설은 멀어지는 연우강의 등에 대고 말했다.

사실 수여설은 어머니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조장을 맡았으면 그나마 좀 나을 텐데, 자신은 조원에 불과하다. 어머닌 당신 딸이 아무 직책도 맡지 못했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여길 게 분명하다.

어쩌면 지저분한 몰골로 가면 얼굴조차 보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 제가 머리 감겨 줄게요.”

멍하게 있는 수여설의 손에서 조두를 빼앗아간 남궁운화는 조두를 물과 섞어 거품을 내서는 수여설의 머리에 대고 사정없이 비볐다.

“ 우와! 이 구정물 좀 봐. 씻지 않고 북천지옥부로 들어갔으면 큰일 날뻔했어요. 언니.”

“ 그, 그렇게 많이 나와요?”

“ 사막이 온통 먼지 천지잖아요. 씻고 난 다음엔 내기로, 몸을 감싸고 가야 할 것 같아요.”

“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 사실 전 워낙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잘 몰라요. 하지만 연 공자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아요.”

“ 어떤 말?”

“ 옷을 깨끗하게 입고 가는 게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는 거라고 했잖아요.”

“ 나 때문이 아니고 어머니 때문에 옷을 깔끔하게 입고 가라는 거야?”

“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만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헤! 원래 눈치 보는 건 제가 전문인데 이번엔 언니가 눈치를 보게 생겼네요.”

“ 눈치를 보며 자랐어요?”

“ 어쩔 수 없잖아요. 엄마도 아버지도 없고, 모든 권력을 가솔들이 쥐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조 사람 기분도 살펴야 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가장 편한 장소는 주방이 되더라고요.”

“ 그랬군요.”

수여설은 측은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남궁운화가 살아온 삶에 비하면 자신은 천국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공연히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 다 됐어요, 언니.”

“ 이번엔 제가 머리 감겨 줄게요.”

수여설은 남궁운화가 가지고 있던 조두 병을 받아 가루를 손바닥 가득 부은 다음 물과 섞어 그녀의 머리에 문질렀다.

“ 그러다 머리 다 빠지겠어요, 언니.”

“ 구정물이 줄줄 흘러요, 남궁 가주.”

“ 에이, 설마 언니 같을까.”

티격태격하면서 몸을 씻은 두 사람은 물 밖으로 나왔다. 몸을 닦고 연우강이 가져다 놓은 보자기를 펼쳤던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보자기 안에는 속옷부터 시작하여 겉옷까지 준비돼 있었다. 다름아닌 그녀들을 놀라게 한 건 옷의 재질이었다. 연녹색과 붉은색 겉옷은 최고급 비단이었던 것이다.

“ 주천에서 엉큼하게 몸 치수를 물어보더니 옷을 지어주려고 그랬나봐요.”

“ 그런 모양이네요, 입어 봐요.”

치수만 불러주었을 뿐인데도 옷은 직접 가서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

“ 언니 정말 예쁘네요.”

“ 남궁 가주는 더 예쁜데요, 뭘.”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연녹색 옷을 걸친 수여설이나 붉은 색 옷을 걸친 남궁운화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감탄사를 흘리던 두 사람은 발치에 있는 상자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 설마 화장 도구는 아니겠죠?”

남궁운화는 빙그레 웃으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그 설마가 맞네요, 뭐.”

“ 아무래도 연 공자는 전생에 여자였나 봐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옷을 쌌던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그 위로 앉았다.

“ 여자 마음을 너무 잘 안다는 거예요?”

수여설은 남궁운화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경대 안에서 화장품과 입술 그리는 붓을 꺼내 남궁운화 얼굴에 화장을 해나갔다.

“ 화장은 우리도 생각지 못한 거잖아요.”

“ 그렇긴 해요.”

화장을 끝낸 두 사람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 오!” “ 와아!”

“ 휘잇!”

수여설과 남궁운화의 모습에 잠룡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수여설과 남궁운화가 미녀라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수여설이 백합이라면 남궁운화는 만개한 장미를 연상케 하였다.

“ 여러분들도 멋지네요.”

“ 그래요, 할아버지들도 최고예요.”

수여설과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잠룡들이나 노인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입고 있는 진남색 옷도 재질은 전부 비단인 듯, 손을 들어올리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햇빛에 부서져 광채를 사방으로 흘렸다.

노인들과 잠룡들을 쳐다보던 두 여자의 시선이 연우강을 찾았다.

연우강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 고맙단 말은 남궁소저에게 하십시오. 수 소저. 그걸 산 돈은 남궁세가에서 나온 거니까.”

“ 훗!”

수여설은 픽 웃으며 연우강을 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전에 있던 옷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 연 공자는 그 옷 그대로 입을 거예요?”

“ 친구를 위해 익숙한 것 하나 정도는 남겨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낙타에 올랐다.

“ 결국 우리만 속물이 됐구먼.”

두작군은 낮게 투덜대며 낙타에 올랐다.

“ 속물이 싫은거야?”

연우강은 두작군을 돌아보며 물었다.

“ 아니, 아주 좋다. 기분 째진다, 됐냐?”

“ 당연히 그래야지. 영감 둘 두 달치 월급이 몽땅 들어갔는데.”

“ 그, 그럼 이 옷은 내 돈으로 산 거란 말이야?”

“ 영감은 죽어도 그런 옷 사 입지 않을 거잖아.”

“ 그럼 오십 냥 받은 놈이 이런 옷을 어떻게 사 입어?”

“ 그래서 내가 장만해 준 거야. 안 그러면 영감은 수의로밖에 못 입을 것 같아서.”

“ 내 돈으로 산거라며?”

“ 영감 장례식도 영감 돈으로 치를 건데 뭐. 일 년에 두 벌 정도는 장만해 줄 테니까, 대충 입어.”

“ 그럼 네 달 월급을 안 주겠단 말이냐?”

“ 열심히 일을 하면 월급도 올라갈 거야.”

“ 에라, 이 나쁜 녀석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백만 냥이나 있는 놈이....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 두작군은 활짝 웃고 있었다.

“ 그래도 솔직히 기분은 좋지?”

“ 나, 나쁘진 않다.”

두작군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기분이 좋다고 해야 했다. 누구 돈으로 샀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옷을 준비해오는 녀석의 마음 씀씀이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 영감님, 먼지 앉는 것 같은데 강기라도 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혹시 옷이 구겨질까 조심스럽게 낙타에 오른 장사덕이 소리쳤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인석아!”

두작군은 정말로 내기를 끌어오렬 몸 주변에 막을 쳤다.

“ 허허허!”

“ 하하하!”

“ 호호호!”

일행은 크게 웃었다.

‘ 이건 도대체.’

탈하나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관찰한 저들은 강자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정도 무인이라면 절제는 기본인데, 지금 저들이 하는 행동은 마치 느닷없이 떼돈을 번 속물 같다.

어떤 사람들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 가자고.”

연우강은 낙타를 몰아 탈라하 곁으로 다가갔다.

“ 모, 모시겠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탈라하는 낙타를 몰았다.

“ 득달!”

선두로 나선 탈라하는 부군장인 풍검신마 나득달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군장.”

“ 먼저 가서 손님이 도착한다고 알려라.”

“ 알겠습니다. 군장. 이럇!”

고개를 꾸벅 숙인 나득달은 낙타 허리를 강하게 조이며 달려나갔다.

“ 저런 미친 자식.”

“ 먼지 나는 구먼.”

뒤쪽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탈라하는 고개를 돌렸다.

“ 맙소사.”

그는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 일행을 보았다.

모래 바닥이라서 흙바닥보다는 먼지가 적다.

하지만 백여 마리의 낙타가 움직이게 되면 아무리 먼지가 적다고 해도 뿌옇게 피어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잠룡 십 조가 있는 곳에서는 먼지 한 톨 튀어 오르지 않는다.

“ 내기?”

잠룡들 주변에 형성된 기운을 감지한 탈라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모두가 내기를 끌어올려 먼지를 차단하고 있었던 거였다.

“ 무공 익히는 거야.”

“ 무공이라고요?”

그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강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알아?”

연우강은 되물었다.

“그거야....”

탈라하는 말끝을 흐렸다.

강기는 물론이고 검탄강기를 펼치는 수준에 올랐지만 강기가 생성되는 원리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다만 무공을 꾸준히 익히다 보니 어느 순간 강기를 생성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 강기는 내기의 압축이야.”

“ 압축이라고요?”

“ 고도로 압축된 물체는 탄성을 갖게 되잖아. 하지만 강기는 완전한 탄성이 아냐. 탄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점성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길게 들일 수도, 짧게 줄일 수도 있는 거야.”

‘ 맙소사, 이건?’

탈라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기를 끌어올린 것에 대한 그럴싸한 핑계를 대는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연우강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옷에 먼지를 타지 않게 하려고 했던 행동에 대한 핑계가 아니라 무론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강기의 생성 원리.

하지만 왜 자신에게?

‘ 절대 비밀이다, 탈라하.’

문득 절대 비밀을 지키라고 하였던 대제의 말이 떠올랐다.

탈라하는 고개를 돌려 잠룡들을 보았다.

잠룡들과 노인들 또한 연우강의 말에 집중한 듯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 전 연 공자님의 부하가 아닙......”

“ 우리도 처음이니까 저 녀석 말을 끊지 말게, 탈 대협.”

뒤편에서 두작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탈라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연우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우린 흔히 권강이 검강보다 더 얻기 어렵다는 말을 하곤 해. 왜 그런 말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해?”

“ 모릅니다.”

탈라하는 고개를 저었다.

“ 내기를 압축하는 매개체가 검은 쇠고, 맨손은 살이기 때문이야.”

“ 견디는 정도가 다르단 말입니까?”

“ 맞아, 탈라하. 맨손보다는 검이, 보통 검보다는 신검이나 명검이 압축된 내기를 견디는 히이 훨씬 강해, 그래서 권강보다는 검강 고수가 많은 거야.”

“ 그럼 검탄강기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겁니까?”

“ 강기가 탄성과 점성의 비율이 오 대 오라면, 탄강은 구대 일이라고 보면 돼. 고도로 압축된 강기를 계속 압축하면 점성이 현격하게 줄어들면서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게 돼. 탄성이 높아지면 스스로  힘을 갖기 때문에 나아가는 속도 또한 빨라지고, 그 상태를 일컬어 탄강이라고 불러.”

“ 그, 그럼 이기어검술은?”

탈라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이기어검술?”

연우강은 탈라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 죄,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서 그만.”

탈라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연우강은 대제의 친구고 자신은 마중 나온 사람일 뿐이다. 방금 말해준 것만 해도 천금같은 가르침이었다.

연우강은 어쩔 줄 몰라하는 탈라하를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이기어검술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을 거야. 흔히 대답이 궁해지면 사부들이 하는 말처럼 깨달음이야.”

“ 그렇군요.”

연우강이 다시 말을 시작하자, 깜짝 놀랐던 탈라하가 이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강의 말처럼 깨달음이란 말은 사부로부터 무수히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 문제는 어떤 걸 깨달아야 이기어검술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연우강의 말이 이어지자 탈라하는 저도 모르게 낙타를 그 자리에 세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따르던 자들도 일제히 그 자리에 멈췄다.

그들은 숨죽이며 연우강의 말을 기다렸다.

“ 우선 저길 봐.”

연우강은 멀리 보이는 웅장한 건물을 가리켰다.

어느새 북천지옥부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연우강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은 북천지옥부에 도착했다는 사실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북천지옥부를 보았다.

“ 저기 성벽 위에 사람들이 여럿 있잖아.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아?”

“ 삼백 장 정도 됩니다. 연 공자.”

엉뚱한 질문에 의아해하면서도 탈라하는 이내 대답했다.

“ 그럼 내가 여기서 손을 들거나 소리치면 알은체를 할까?”

연우강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 대제께서 나와 있다면 알은 체를 할 겁니다.”

“ 어쩌면 반가운 마음에 이곳으로 달려올지도 몰라.”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사람이 몸을 날려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북천지옥부의 부주인 야율사은이었다.

“ 내기란 바로 저 녀석 같은 거야, 탈라하.”

“ 네?”

탈라하는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방금 나는 저 녀석이 이곳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녀석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단 말이야. 만일 저 녀석이 고도로 압축되어 탄성을 지닌 내기고, 빛처럼 빠르게 쏘아져 온다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

“ 이, 이기어검술이란 말입니까?”

“ 바로 그거야, 탈라하. 이기어검술을 얻기 위해서는 내기를 자네 분신으로 만들어야 해. 자네가 물건을 잡기 위해 팔을 뻗는 것처럼, 장소를 이동하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내기도 그렇게 사용할 수 있어야 이기어검술을 얻을 수 있어. 깨달음이라고 말한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내기가 나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연우강의 가슴에서 사망마비 하나가 튀어나왔다.

“ 이렇게 되는 거야?”

스악!

눈앞에 있던 사망마비가 한순간에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야! 이 개자식아!”

느닷없이 전면에서 욕서로가 함께 야율사은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 맙소사.”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망마비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백 장 떨어진 곳에서 야율사은의 외침이 들려온 것이었다. 엄청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기어검술은 말 그대로 공간을 건너뛰어 적을 공격하는 무공이었다.

“ 내기가 나의 분신이라는 깨달음에 허공섭물이 더해지면 비로소 이기어검술이 발현되는 거야.”

“ 허, 허공섭물이란 말입니까?”

탈라하는 경악했다.

허공섭물.

허공을 격하여 물건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기술로 그것을 무공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무공이 강해질수록, 더 무겁고 멀리 있는 물체를 끌어당길 수가 있어, 무공의 고하를 가릴 때 흔히 이용되곤 한다. 즉 고수일수록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무거운 물체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허공섭물이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무공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혹시 마라천력이라고 알아?”

연우강은 돌아오는 사망마비를 다시 가슴으로 인도하며 물었다.

“ 염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무인이 사용하는 허공섭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염력에 하늘이 내린 악마의 힘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 이기어검술 때문이란 말입니까?”

“ 허공섭물에도 단계가 있어. 일반적으로 펼치는 허공섭물은 물건을 끌어당기고 미는 정도지만, 최고의 경지에 이른 허공섭물은 내기를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어. 그런 힘 중 하나가 바로 마라천력이야.”

“ 그래서 마라천력을 타고난 자는 무조건 없앤 거군요?”

“ 맞아. 마라천력을 타고난 자는 이기어검술을 익혀낼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말해. 남들은 수십 년 동안 노력해도 얻을 수 있다고 장담조차 못하는, 허공섭물의 최후 단계를 마라천력인은 타고나는 거야. 이기어검술을 얻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노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통탄할 일이지, 그래서 죽이는 거야.”

“ 탈라하는 내 부하야, 자식아.”

잔뜩 불만어린 목소리가 전방에서 들려왔다.

“ 탈라하는 네 마누라가 아니잖아, 인마.”

연우강의 입가에 활짝 미소가 어렸다.

바로 앞에 야율사은이 허공을 밟고 우뚝 서 있었던 거였다.

“ 마누라만 빼고 나머진 전부 공동소유라고?”

“ 그건 네가 한 말이다. 사은.”

연우강은 낙타 등에서 일어나 야율사은 앞으로 다가갔다.

“ 아하하!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더럽게 할 일도 없었던 모양이구나, 반갑다, 자식아!”

“ 오랜만이다, 새꺄!”

두 사람은 굳게 손을 틀어쥐었다.

“ 가자.”

야율사은은 연우강의 손을 잡은 채 북천지옥부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신형은 빠르게 멀어졌다. 하지만 탈라하를 비롯한 잠룡 십 조 일행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조금 전 연우강으로부터 들은 무론을 정리하느라 야율사은이 왔다 가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심지어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이자승이나 욱일승, 수천월, 갈인효도 연우강의 말에서 뭔가를 얻을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다만 두 사람.

남궁운화와 수여설은 멀어지는 연우강과 야율사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남궁운화만 연우강과 야율사은을 보고 있었고, 수여설은 성벽 위로 시선을 준 채였다.

햇빛을 받아 새하얀 광채를 뿌리고 있는 머리카락, 바로 그녀의 어머니인 북빙후 수나인이었다.

“ 언니!”

연우강을 쳐다보고 있던 남궁운화가 수여설을 불렀다.

“ 네? 네.”

퍼뜩 정신을 차린 수여설이 남궁운화를 돌아보았다.

“ 방금 그 말 들었어요?”

“ 무슨 말요?”

“ 저 둘은 마누라만 빼고 나머진 전부 공동소유라고 했던 말 말이에요.”

“ 그렇게 말했어요?”

“ 네, 언니, 북천대제 야율사은도 인정하는 눈치였고요.”

“ 그럼 연 공자는 이곳에서 엄청난 힘을 얻게 되는 셈이네요.”

“ 점점 연 공자가 무서워져요, 언니.”

“ 왜요?”

“ 점점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것 같아서요.”

“ 속물은 절대 높은 곳으로 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몰라요?”

“ 속물?”

“ 그가 그랬잖아요. 자신은 세상을 보는 눈은 관조적이지만 속물적인 삶을 추구한다고요.”

“ 참! 그게 무슨 소리죠?”

“ 간단해요, 관조적인 삶은 세상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말이고, 속물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건 돈과 여자를 밝히면서 살겠다는 말이에요.”

“ 돈과 여자?”

“ 네.”

“ 킥!”

남궁운화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어났다.

“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 제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요, 언니가 더 걱정하면서.”

남궁운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 거짓말은 건강에 해로워요, 남궁 가주. 그보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 무슨 소리에요?”

“ 저들은 전부 연공자 말을 곱씹느라 정신이 없잖아요.”

“ 전 한 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머리를 타고나지 못했어요, 언니. 아무리 쉽게 말해준다고 해도 제 머리론 무리에요. 전 제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기로 했어요.”

남궁운화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수여설은, 남궁운화가 쥐고 있던 낙타 고삐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활기차게 말했다.

“ 그럼 우리라도 먼저 가요.”

“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둘은 낙타를 몰고 앞으로 나왔다.

바로 그때 이철상의 외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일행을 깨웠다.

“ 나머진 들어가서 생각 하도록 해라. 지금 우린 북천지옥부의 손님으로 와 있다. 전군은 백랑과 창랑 전면으로 나서고 좌군은 좌측, 우군은 우측, 후군은 뒤로 선다. 그리고 중군은 후미에 있는 낙타를 맡아라!”

“ 알겠습니다.”

이철상의 외침을 들은 잠룡들은 일제히 낙타를 몰아 수여설과 남궁운화 주변으로 늘어섰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마치 수여설과 남궁운화를 호위하고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 내기를 끌어올려 먼지가 피어오르지 않게 하라, 아니 바닥을 아예 다져버려라!”

“ 알겠습니다.”

잠룡들은 일제히 모래바다으로 내기를 쏟아 부었다.

“ 이건.....”

수여설은 당황한 얼굴로 이철상을 보았다.

“ 광랑의 명령입니다. 백랑.”

이철상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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