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87화 (87/232)

제 4장 운과 담력.

휙! 휙! 휙! 휙! 휙!

단순히 쇠뭉치가 돌아가는 소리일 뿐이었다.

하지만 십뢰를 내려다보고 있는 일행의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 명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내기.

그 한 명이 자신이 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만일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그동안 이루었던 문파는 어떻게 되며.

남은 가족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십뢰가 돌아가는 소리는 칼이 목을 향해 날아올 때 들려오는 칼바람 소리보다 더 섬뜩했다.

뚝!

“ 흡!”

“ 헛!”

“ 아!”

내기 당사자들보다는 뒤편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이들이 더 긴장한 듯 십뢰가 멈춰서자 탄성과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십뢰가 가리키는 사람은 연우강 바로 옆 오른편에 있는 십자무적혼 백마흔이었다.

백마흔은 긴장한 얼굴로 십뢰를 보았다.

죽을 확률이 일 할이라면 살아날 확률은 구 할이나 된다. 승부를 걸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자꾸만 몸이 떨려왔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백마흔은 십뢰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십뢰는 아니지만 흑랑기에서는 이런 놀이를 간혹 했다고 들었소, 연 공자.”

왼손에 십뢰를 들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 친하게 지내던 녀석의 죽음을 목겨하게 되면, 비록 세 달에 불과하지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 그 녀석도 참가했소?”

백마흔은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 녀석은 딱 한 번 참여했습니다. 그 후로는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연 공자는?”

“나는 열 번 정도였고, 저 녀석은 밥 먹듯이 참여했습니다.”

연우강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야율사은을 턱으로 가리켰다.

‘ 저 자식?’

야율사은은 움찔했다.

자신 또한 귀랑과 마찬가지로 한 번 참여했고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짓을 밥먹듯 한 사람은 연우강이었다.

‘ 무슨 뜻이냐, 연우강.’

그는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연우강의 눈빛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철컥!

바로 그 순간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움찔하며 백마흔을 보았다.

“ 탈 대협, 술 한잔 더 주시겠소?”

질끈 감았던 눈을 뜬 백마흔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 엄청난 경험이군.”

“ 한순간에 일생이 스쳐 지나가는 경험을 말하는 겁니까?”

“ 아는군.”

“ 아마 이 내기에서 살아남게 되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겁니다. 야망보다는 가족을 더 챙기는 자상한 성주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움찔!

연우강의 입에서 가족이란 말이 흘러나오자 다음 순서인 북청강은 움찔 몸을 떨었다.

‘ 아직은?’

그는 옆에 놓인 술잔을 한 입에 털어 넣은 다음 십뢰를 들어 올렸다.

“ 유언을 미리 하는 게 어떻소?”

“ 무슨 소리요?”

“ 운이 다하여 죽었는데 동생이나 부하들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잖소.”

“ 잔인하군.”

북청강은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놈이다. 조금 전에는 가족을 들먹여 두려움을 안겨주더니 이번엔 유언을 남기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한다. 그것도 빙그레 웃으며.

“ 우린 이런 내기를 생사결이라고 불렀소이다. 북 성주. 생사결은 맨 정신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내기요. 술을 준비한 건 그 때문이었소.”

“ 알았소. 그렇게 하리다. 청후는 듣거라.”

“ 말씀하십시오. 형님.”

“ 설사 내가 죽더라도 막북혈마성과 막북백마성은 천오백 년 만에 탄생하는 천주께 충성을 다하거라.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형님.”

“ 맹세할 수 있느냐?”

“ 맹세하겠습니다. 형님.”

“ 그래.”

고개를 끄덕인 북청강은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일행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북청강을 지켜보았다.

북청강의 손이 불쑥 튀어나온 단추로 향하자 긴장은 극에 달했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밖에 그 어떤 것도 머릿속엔 없었다.

철컥!

순간 북청강은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세상이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을 보았다.

왼편에 있는 백마흔과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고, 오른편에 있는 탁불군과 단극효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다. 하얗게 변했던 세상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천천히 십뢰를 빼냈다.

“ 살았군.”

그는 땀으로 범벅인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 원래 가진 게 많은 놈들은 이런 내기가 더 힘들게 마련이오, 북 성주.”

어떻게 들으면 기분 나쁜 소리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누구도 연우강의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 기분이 어떻소, 북 성주?”

다음 차례인 탁불군이 술을 털어넣으며 물었다.

“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외다. 직접 경험해 보시오, 림주.”

“ 난 내운을 믿소, 북 성주.”

탁불군은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던 말과는 달리 십뢰를 쥔 그의 양손은 극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몰아쉰 다음 단추를 눌렀다.

철컥!

이번 역시 십뢰는 발사되지 않았다.

“ 우, 운은 미, 믿은 사람에게 따르는거요, 탈 대협. 술 한 잔 더 주시오.”

그녀는 물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 짜릿한 모양이구려.”

흑사귀랑 단극효가 십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 난 지금 오줌을 지렸소. 단 막주.”

묘한 기분이었다.

평소 같으면 오줌을 지렸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테다. 그런데 지금은 오줌을 지렸다는 사실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르겠소이다.”

술잔을 비운 단극효는 동생인 단리효를 빤히 쳐다보며 단추를 눌렀다. 이번에도 역시 십뢰는 발사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순서인 야율사은과 가람존자까지도 십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연우강을 포함하여 네 명이었다.

죽을 확률은 이 할 오 리.

당갈, 단리효, 수나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핏발 선 눈으로 탁자에 놓인 십뢰를 노려보았다.

“ 그러다 해 떨어지겠소. 당 궁주.”

“ 빌어먹을!”

당갈은 욕설을 뱉어내며 십뢰를 잡았다.

십뢰를 들어 올린 손은 눈에 뜨일 정도로 극심하게 떨고 있었다. 급하게 술을 비운 당갈은 한 잔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탈라하 앞으로 술잔을 내밀었다.

탈라하는 말없이 주정을 따라주었다.

당갈은 두 번째 잔마저도 단숨에 비우고 세 번째 잔 역시나 한 입에 털어 넣은 후에야 십뢰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단추를 눌렀다.

철컥!

“ 나도 쌌군.”

당갈은 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십뢰로 죽지 않으면 기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살았다는 기쁨보다는 다음 판은 또 어떻게 견딜지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당갈과 다르지 않았다.

구경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두 사람, 연우강과 야율사은의 얼굴에만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 단리효, 너다.”

연우강은 단리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죽일 놈!”

단리효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차라리 비무를 통해 해결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영감님!”

“ 알았네.”

연우강이 부르자마자 이자승은 단리효 뒤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혈루를 번쩍 치켜들었다.

“ 포기를 선언하든지, 아니면 시작해라, 단리효.”

“ 알았다, 개자식아. 하면, 하면 될 거 아냐!”

단리효는 술도 ㅁ지지 않고 십뢰를 입 안으로 쳐 넣었다. 하지만 단추를 누르지 못했다.

“ 십뢰를 빼면 포기한 걸로 간주하겠다. 단리효.”

‘ 개자식!’

단리효는 눈을 질끈 감고 단추를 눌렀다.

철컥!

영겁의 시간이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형님을 몰아내고, 형님을 따르던 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던 일들이 엄청난 속도로 스쳐지나 가는데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었다. 마치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 프! 하하하! 크! 하하하!”

십뢰를 내려놓은 단리효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살아났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는 득의만면한 얼굴로 수나인과 연우강을 보았다.

“ 나는 포기하겠어요. 여러분. 여러분들 중 누가 황천의 처눚가 되든 목숨을 바쳐 따르겠어요.”

수나인은 자리에서일어나더니 의자를 들고 뒤편으로 옮겨갔다. 그녀를 수행해 온 옥녀빙인대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잠시 잠깐에 불과했다.

팔황새가 황천으로 거듭났을 때를 보더라도 궁주인 수나인이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번에 살아남는다고 해도 당장 천주 자리에 오르는 것도 아닌데, 오 할의 확률에 목숨을 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 이제 너만 남았다. 연우강. 죽을 확률은 오할이구나.”

“ 난 태어날 때부터 운을 타고 난 놈이야. 단리효.”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 지금까지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이번엔 운이 다한 것 같구나.”

단리효는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연우강의 죽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직접 복수를 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놈이 죽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터였다.

“ 영감님.”

연우강은 십뢰를 입 앞으로 가져가며 욱일승을 불렀다.

“ 마, 말하거라.”

“ 내가 죽으면, 내 시체는 금의위로 가져다 주십시오.”

‘ 맙소사, 이놈?’

이자승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잔뜩 긴장한 가운데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십뢰가 연우강의 손에서 나왔고, 그의 특수한 능력인 마라천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십뢰가 들어간 위치를 알고 마라천력으로 십뢰가 멈춰 설 위치를 조정하게 되면 녀석에게는 전혀 위험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앞쪽에서 먼저 끝나버리면 뒤에 남은 자들은 두 번째 판이 첫판이 된다. 그 상태에서는 긴장감이 떨어지면서 생사결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극한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십뢰를 뒷부분에 위치하도록 조정하면 될 터였다.

머리 좋은 놈이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테고, 일부러 마지막 위치에 십뢰를 넣어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혈사귀랑 단리효가 밧어났으니까 남은 사람은 수나인이다. 제 차례에 십뢰를 넣어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십뢰가 들어 있는 자리는 아홉 번째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수나인이 포기하고 만 것이다.

결국 십뢰는 연우강의 몫이었다.

더구나 녀석은 곧 금의위에서 시작한 조사를 멈추게 해달라는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 포기해라!”

이자승은 연우강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 그만둘 수 없습니다. 영감님.”

“ 설사 황천의 천주가 된다고 해도 네가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모르느냐?”

이자승은 버럭 소리쳤다.

연우강이 내기에서 이긴다고 해도 팔황새 수뇌들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설사 지킨다고 해도 진정으로 연우강을 천주로 모실 리가 없다. 그런 조직은 금세 무너지기 마련이다.

잘해야 본전.

연우강의 입장이 그랬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내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 제가 뭘 얻게 될지는 아직은 모릅니다. 영감님. 하지만 한 가지. 절 말리는 순간 저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건 확실합니다.”

“ 네가 뭘 잃는단 말이냐?”

“ 제 자신입니다. 영감님.”

“ 도대체.”

이자승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녀석에게는 강한 무공이 있고, 마르지 않는 돈이 있고, 천재적인 머리가 있다. 도대체 뭐가 녀석을 막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탈라하, 한 잔 더 줘.”

“ 알았습니다. 연 공자.”

연우강이 잔을 내밀자 탈라하는 얼른 주정을 따랐다.

“ 그렇게 긴장한 얼굴로 쳐다볼 필요 없어. 이제 한 판을 돌았을 뿐이ㅗ, 설사 내가 죽는다고 해도 당신들의 내기는 계속 될 거니까.”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십뢰를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연우강은 일행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물 때마다 수뇌들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철컥!

“ 허억!”

가장 먼저 연우강 뒤편에 있던 이자승 일행이 털썩 주저앉았다.

“ 하아!”

“ 으음!”

곧이어 수뇌들의 입에서 안타까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탄성들이 흘러나왔다. 죽을 확률 오 할에서 하늘은 연우강의 손을 드러준 것이었다.

“ 다시 현실로 돌아올 때야.”

연우강은 십뢰를 내려놓고는 술잔을 옆으로 내밀었다. 탈라하는 급하게 술을 채웠다. 술이 든 가죽부대를 들고 있는 탈라하의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연우강은 주정을 천천히 마셨다.

그러고는 다시 일행을 보며 입을 열었다.

“ 수나인 궁주가 포기했으니까......”

연우강은 탁자 위에 세워두었던 십뢰를 들어올렸다.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뒤편에 있던 수나인은 연우강을 보았다.

‘ 맙소사 저건?’

수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우강이 앉아 있는 의자 아래쪽으로 누런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단리효와 당갈의 의자 밑을 보았다. 그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의자 아래쪽에는 누런 물이 홍건하게 고여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신들이 오줌을 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한 세 사람이다.

‘ 하긴 나도 저 입장이라면 그랬을 테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연우강을 보았다.

“ 두 개를 넣는단 말이오?”

이제는 목소리마저 떨려나왔다. 북청강의 얼굴은 창백한 정도가 아니라푸른 힘줄이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 연속해서 넣을 건지, 분리해서 넣을 건지 그걸 결정해야 해.”

연우강은 뭉치를 분리해 냈다.

“ 연속해서 넣게 되면....”

“ 한 놈이 죽으면 다음 놈도 반드시 죽는다는 뜻이야. 북 궁주. 따로 넣어도 마찬가지야. 첫 번째 죽을 놈은 모르지만 두 번째 죽을 놈은 알 수 있다는 거지, 처음보다 더 짜릿하겠지.”

“ 난 연속이다, 연우강.”

듣고 있던 야율사은이 나직이 말했다.

“ 내 생각도 그래.”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미 들어가 있는 십뢰 옆에 새로운 십뢰를 끼워 넣었다.

“열 개의 구멍 중에 두 개가 들어갔으니까 죽을 확률은 산술적으로 따지면 이 할이 돼. 하지만 앞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게 되니까 실제 확률은 그 이상이 되지. 자! 친구들, 다시 꿈속으로 들어갈 시간이야.”

몸을 일으켜 세운 연우강은 십뢰를 앞으로 내민 채 뭉치에 손바닥을 대고 사정없이 내리그었다.

촤르르!

십뢰의 뭉치가 빠르게 돌아갔다.

꿈속으로 들어갈 시간이라는 연우강의 말.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행의 눈빛이 공포로 질려갔다. 뭉치가 멈춰 서자 연우강은 바닥에 내려놓고 힘껏 돌렸다.

휙휙휙휙휙!

이번엔 십뢰의 본체가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도는 속도가 느려지기 사직하자, 탁자 위에 있던 각 수뇌들의 손은 탁자를 사정없이 틀어쥐었다.

“ 헉!”

“ 으으!”

“ 헙!”

비명처럼 각 수뇌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북청강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십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손가락 두께의 구멍이 자신의 목을 뚫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 술!”

“ 준비돼 있습니다. 북 궁주.”

탈라하의 목소리가 마치 저 먼 곳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북청강은 술잔을 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술잔은 입에 닿기도 전에 절반 이상이 쏟아졌다. 무섭게 떨고 있는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는 청해천종림의 림주 탁불군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한 명이 죽으면 다음 사람도 반드시 죽는다!’

첫 번째 판과는 상황이 또 달랐다.

그때는 십뢰가 자신 앞에 왔을 때만 공포에 절었지만 지금은 북청강이 십뢰를 드는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온몸을 적신다.

공포는 전염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북처앙이 십뢰를 집어든 순간 모두는 짙은 공포에 휩싸여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한 눈길로 북청강을 보았다.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마신 북청강은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북청강은 눈을 감았다.

운과 담력을 시험하는 내기라고 했을 때 속으로 얼마나 기고만장했던가? 운은 몰라도 담력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 한 번만 더 하는 거다. 한 번만.’

북청강은 숨을 멈췄다.

또다시 주변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십뢰 위쪽에 있는 단추가 산악처럼 커지고 온몸을 짓누른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 산악 위로 집게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철컥!

뭉치 때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 산 거냐, 죽은 거냐.’

북청강은 내심 부르짖었다. 분명 쇳소리는 들었다.

그런데 십뢰가 발사됐는지 발사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주변은 하얗고 어떤 감각도 느낄 수가 없다.

[ 형님!]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오자 북청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비로소 주변 광겨이눈에 들어왔다.

“ 아직 살아 있군.”

그는 십뢰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분명 살아남았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이건 정말로 못할 짓이었다.

탁불군은 술이 들어 있는 가죽부대 주둥이를 입에 처박고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상당 분량을 마시고 난 탁불군은 술 부대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그리러고는 십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 난 청해천종림 림주 탁불군이다! 청해천종림은 팔황새 최강 문파고 천주는 반드시 우리 천종림에서 나와야 한다! 청해천종림이 림주는 천주가 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 림주의 자격이 있다!”

탁불군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 난 청해천종림의 림주 해룡왕 탁불군이다! 해룡왕 탁불군이다! 해룡왕 탁불군이다!”

탁불군은 양손은 십뢰 바로 앞에 있었다. 이제 틀어쥐기만 하면 되는데, 꽉 쥐어진 그의 주먹은 펴지지 않았다.

“ 난 해룡왕 탁불군이다!”

그는 주먹을 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힘줄이 불끈 돋아나오고, 양팔이 무섭게 떨렸지만 주먹을 펴지 못했다.

“ 난 해룡왕......”

“ 신중하게 생가하시오. 탁 림주. 포기하면 이 자리에 탄생할 천주에게 모든 걸 넘기게 되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포기해도 좋소.”

“ 내가 이 자리에서 죽어도 청해천종림은 천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거요. 연 공자. 난 새로운 천주를 모시고 따르겠소.”

탁불군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 나도 포기하겠소.”

탁불군에 이에 단극효 또한 내기 포기를 선언했다. 그가 포기하자 십뢰는 야율사은 앞으로 넘어갔다.

“ 난 포기할 수 없소. 여러분. 나는 운을 시험해 보겠소.”

야율사은은 술 한잔을 마시고는 십뢰를 입으로 가져갔다. 또다시 공포와 두려움을 점철된 긴장감이 몰아쳤다. 일행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야율사은을 보았다.

야율사은은 지그시 손가락을 눌렀다.

철컥!

역시 운이 좋은 듯,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야유사은은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잡아 옆으로 내밀었다. 탈라하는 얼른 술잔을 채웠다.

술잔이 흔들리고, 술이 흐르는 가죽부대마저 흔들리니 술이 제대로 따라질 리가 없었다. 흘리는 술이 반, 술잔으로 들어가는 술이 반이었지만 탈라하는 계속 술을 따랐다.

결국 한 잔을 채운 탈라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 난 포기하겠소.”

바로 그때 가람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두 명이 포기한 상태라 가람존자의 선언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해룡왕 탁불군과 흑사귀랑 단극효는 희미하게 웃으며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존자는 십뢰를 당갈에게 건네주고는 의자를 들고 뒤로 물러났다.

“ 나도 포기요.”

당갈 역시 바로 포기 선언을 하며 십뢰를 단리효에게 넘겼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단리효에게로 쏠렸다.

단리효는 멍한 눈으로 십뢰를 쳐다보았다. 묘하게도 기분이 차분해지는 듯했다.

그는 시선을 들어 단극효를 보았다.

쌍둥이지만 단극효는 꼽추로 태어났고 자신은 정상적인 몸으로 태어났다.

사람들은 동생인 자신이 새외귀막의 막주가 된 것을 두고 정상적인 몸을 타고난 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무공을 익히는 자질이나 부하를 다스리는 능력까지 자신이 우월하다고 확신하였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 내가 형님보다 낫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소.”

단리효는 담담하게 말하고는 십뢰를 들어올렸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단리효는 믿었다. 이번 기회는 형님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자신 있게 십뢰를 들어올린 이유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십뢰가 발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전부터 들기 시작했다. 아니 뭉치 안에 들어가 있는 십뢰가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물론 첫판을 돌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두 번째 판이 돌고, 야율사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십뢰를 집어 들자 문득 이심이 들었다.

단리효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하지만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연우강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나도 이번까지는 한다!’

단리효는 내심 소리치며 십뢰와 술잔을 동시에 집어 들었다. 하지만 결심과 행동은 달라다.

그의 양손은 극심하게 떨려 십뢰는 물론이고 술잔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결국 단리효는 양손으로 술잔을 잡아 비우고 난 후 십뢰를 집어 입으로 가져감과 동시에 단추를 눌러버렸다.

철컥!

“ 커억!”

단리효의 눈동자가 허옇게 변했다.

그는 입 안에 들어가 있는 십뢰를 빼낼 생각도 못했다.

[ 막주님!]

그 역시 북청강과 마찬가지로 뒤에 있던 부하의 전음으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자 기쁨이 샘솟듯 솟구쳐 올랐다.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너다, 연우강.”

“ 넌 아직 날 몰라. 단리효. 내가 군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알게 되면 절대 그런 말을 못해.”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십뢰를 집어들었다.

“ 단추를 누르기 직전엔 몸이 붕 뜨고 세상이 하얗게 변하지. 우린 그걸 ‘백색 앵속’ 또는 ‘지족한 절정’ 이라고 불렀다. 오입질을 해서 얻는 쾌감보다 더 엄청난 쾌감을 얻게 된다고 해서 말이다.”

주정을 들이키던 연우강은 십뢰를 집어들고 그대로 눌렀다.

철컥!

“ 개자식!”

단리효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 난 운을 타고난 놈이야, 단리효.”

연우강은 탈라하가 따라놓은 술잔을 다시 비우고는 뭉치를 빼냈다. 하나 남은 십뢰를 들어올린 그는 두 개의 십뢰가 끼워져 있는 바로 다음 구멍에 밀어 넣었다.

“ 이제 마지막 판이다. 이 판이 돌면 무조건 승부가 가려진다. 이번엔 세 개를 나란히 넣을 거다. 그럼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 두 명도 함께 죽게 된다. 그들은 죽음을 택하든지 아니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연우강은 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쓸었다.

또다시 섬뜩한 소리와 함께 뭉치가 빠르게 돌았다. 빠르게 돌아가던 뭉치가 멈추자 연우강은 십뢰를 중앙에 놓았다.

“ 다시 꿈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연우강은 서늘하게 웃으며 십뢰 본체를 돌렸다.

빠르게 돌다가 점점 속도를 늦춘 십뢰 본체가 가리킨 방향은 야율사은 앞이었다.

야율산은 옆에 있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 탈라하!”

“ 하명하십시오. 대제.”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내가 죽으면 북천지옥부의 전권을 저 녀석에게 넘겨라.”

“ 대제께서는 반드시 승리하실 겁니다.”

“ 나도 그렇게 믿느다, 탈라하.”

야율사은은 싱긋 웃으며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단추를 눌렀다.

철컥!

“ 허억!”

십뢰가 발사되지 않자, 단리효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 앞으로 다가온 십뢰를 보았다.

‘ 네 명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 단리효. 그런데 야율사은은 이미 살아남았으니까 너부터 죽는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아닌 내면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청이었지만 단리효는 알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 죽는다, 단리효! 이제 영면의 시간으로 갈 시간이다.’

“ 안 돼. 난 할 수 없어!”

단리효는 고함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 나, 난 할 수 없다고.”

뒤로 물러난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그럼 나군.”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강은 단리효 자리에 있던 십뢰를 가지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따라 두었던 술잔을 비우고 다시 탈라하의 앞으로 내밀었다.

탈라하는 술 부대를 기울였다.

하지만 술은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 어, 얼른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연 공자.”

술 부대를 내려놓은 탈라하는 이층으로 몸을 몸을 날려갔다.

“ 아직 아홉 개가 남았고, 아홉 개 중 여섯 개는 빈 공간이다. 단리효. 야율사은이 성공했다고 나머지 세 사람이 전부 죽는 게 아니라는 거야.”

연우강은 단리효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 맙소사.”

단리효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들 또한 단리효처럼 네 명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십뢰의 구멍이 열 개라는 사실은 잊고 있었던 거였다.

“ 그게 바로 생사결이 주는 재미라는 거야. 나도 잊고, 주변도 잊고, 오직 이놈과 죽음만 남는다는 거지.”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단리효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가짜다.’

단리효는 내심 소리쳤다. 녀석의 눈에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니 아무리 담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지금 상황에서 태연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십뢰가 가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아냐, 좀더, 좀더 지켜봐야......”

철컥!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치 때ㄹ는 소리가 들려왔다.

“ 뭘 지켜봐야 한다는 거지?”

십뢰를 꺼내 앞으로 내려놓은 연우강이 물었다.

“ 네, 네놈이 어떻게 되는지 그걸 지켜봐야 한다는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단리효는 내심 가짜라고 확신했다.

“ 그건.....”

“ 나도 그만하겠소.”

십뢰가 가짜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북청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러났다.

“ 우리 둘만 남았군.”

‘ 바로 이거다!’

단리효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갈 묘안이 떠오른 것이었다.

연우강이나 야율사은 둘 중 한 사람이 남았을 때 십뢰가 가짜라는 사실을 밝히게 되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각 문파 수뇌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연우강은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죾 될 것이고, 야율사은의 북천지옥부는 황천의 적자가 아니라 변황 무림을 몰락시키기 위해 중원인과 짠 배신자가 된다.

야율사은의 몰락은 단극효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천외흑막 무인들은 새외귀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다.

“ 다시 돌리겠다. 야율사은.”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니다. 연우강, 계속 가자.

연우강보다 먼저 일어난 야율사은은 북청강 자리에 있던 십뢰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술을 가지러 갔던 탈라하가 돌아왔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야율사은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 넌 아직도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구나.”

야율사은은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 밤에만 사막으로 돌아간다.”

“ 꿈속에서?”

“ 맞아, 아마 죽기 전엔 이곳을 잊지 못할 거야.”

“ 장가를 가고 자식을 낳으면 잊혀진다. 연우강.”

야율사은은 빙긋 웃으며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 넣고 단추를 눌렀다.

철컥!

‘ 개자식들!’

단리효는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마치 장난하는 것처럼 단추를 누르는 야율사은의 행동에 지독한 배신감이 치밀었다.

‘ 오냐! 지금은 지켜보겠다. 하지만.......’

야율사은의 술잔을 채워준 탈라하는 십뢰를 들고 연우강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연우강 앞에 십뢰를 내려놓고는 술잔에 술을 채웠다.

연우강은 주정을 비우고 십뢰를 집어들었다.

“ 넌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연우강.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널 지휘관으로 선택할 거다.”

“ 최고의 찬사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십뢰를 입으로 가져갔다.

“ 하지만 여긴 군이 아니다. 연우강,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포기해라.”

“ 야율사은, 아니, 류사은.”

연우강은 동작을 멈추고 야율사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 말해라, 연우강.”

“ 한번 정천호는 영원한 정천호다. 류사은.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도, 저승에서도 넌 내 부하일 뿐이다.”

연우강은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넣고 단추를 눌렀다.

철컥!

뭉치 부딪치는 소리만 들려오자 야율사은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꿀꺽! 꿀꺽! 꿀꺽!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야율사은을 보았다.

“ 가져와라, 탈라하.”

“ 아, 알겠습니다.”

연우강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준 탈라하는 십뢰를 가지고 야율사은 앞으로 갔다.

“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냐?”

야율사은은 술잔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 왜 생사결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

“ 응.”

“ 대야벌로 들어가기 전에도 한 번 했다.”

“ 그래서?”

야율사은은 십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 지난 이 년간 미친 듯이 살았다.”

철컥!

“ 그랬구나.”

야율사은은 십뢰를 탈라하에게 건네주었다.

탈라하가 십뢰를 가져오는 사이에 연우강은 술잔을 비웠다.

“ 구멍은 다섯 개 남았고, 그 중 셋은 십뢰가 들어 있다. 연우강.”

“ 그거 기억나?”

“ 뭐?”

“ 나는 너희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사막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 대신 넌 혼자 가겠지. 그럼 우린 너를 쫓아 사막으로 들어갔을 테고.”

“ 정말 그랬을까?”

“ 그거 기억나?”

야율사은은 같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뭐?”

“ 네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부르짖고 다녔던 전장의 철칙.”

“ 응.”

“ 그게 어쨌다는 거지?”

“ 그 날 흑랑기는 네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 어떤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거냐?”

“ 전쟁터에서는 떨어져 있는 동료를 봐서도 안되고, 구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던 전장의 철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쓰러진 동료를 보호하다가 죽고, 포위당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다가 죽어갔다. 하지만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녀석은 있어도, 죽음을 억울해하거나 우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녀석들은 전부 활짝 웃었따. 널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하더라.”

“ 그랬구나.”

연우강은 호수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동안 녀석들이 왜 몰살을 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가르친 대로 했다면 몇 십 명은 아니 백여 명 정도는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런데 무공을 익혔던 녀석들만 살아왔을 뿐 다른 녀석들은 한 명도 살아오지 못했다.

“ 이제 그만 그들을 놔줘도 된다. 연우강.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멋지게 살다가 갔다.”

“ 글쎄.... 그게 쉽지 않아.”

연우강은 입 안으로 십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주저없이 단추를 눌렀다.

“ 이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연우강은 입 안에 밀어 넣었던 십뢰를 빼 앞으로 놓으며 말했다.

“ 운이 너무 좋은 거 아냐?”

“ 내 인생은 그게 탈이다. 살기 위해서 뛰어들었던 카레즈에서는 천오백 년 천하제일인이자 흑천의 천주이면서 무성의 일대 묵사였던 마제 가립하의 유물이 나오고, 열심히 똥을 푸던 화장실 바닥에서는 여의선천신단이라는 희대의 영약이 나오고 홧김에 때려부쉈던 검지곡 석상 속에서는 파천육기가 몽땅 나왔으니까.”

“ 쿡! 기연이 떼거리로 몰려왔구나.”

“ 그런 셈이야.”

“ 일대 묵사이자 마제 가립하의 제자라면 흑천의 천주가 맞는 거네?”

“ 그럼 거짓말인지 알았냐?”

“ 응.”

“ 난 중요한 일을 놓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은.”

“ 그랬지. 그럼 오늘은 황천의 천주가 탄생하는 날일 뿐 아니라 흑천과 황천이 하나로 통합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구나.”

“ 그런 셈이다.”

“ 탈라하 뭐 하고 있어?”

탈라하가 멍하니 서 있자 야율사은이 채근했다.

“ 하나 빼고 나머진 전부 십룁니다. 대제.”

“ 그래서?”

“ 이제 그만하십시오. 대제께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 그럼 황천의 천주 자리를 저 녀석에게 넘겨주라는 거냐?”

“ 어쩔 수 없습니다. 대제. 대모님과 영애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만 멈추십시오.”

“ 가족 때문에 변황을 버리라는 말이냐?”

“ 여기서 돌아가시면 정말로 변황을 버리는 겁니다. 대제. 그걸 왜 모르십니까?”

탈라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탈 대협 말이 맞소. 야율 부주.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연 공자를 천주로 모시고 따르는 건 쉽지가 않소.”

“ 북 성주는 맹세를 했소이다.”

“ 물론 맹세를 했으니까 따르긴 할 거요. 하지만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긴 힘드오.”

“ 그럼 꼭두각시 천주가 될 수도 있단 말이오?”

“ 그렇소. 야율 부주. 하지만 부주가 있으면 달라지오. 연 공자를 중심으로 뭉치긴 힘들겠지만 야율 부주를 중심으로는 뭉칠 수 있을 거요.”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 그렇소. 연 공자가 들으면 섭섭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구심점은 부주밖에 없소이다.”

“ 고맙소. 여러분. 그럼 여러분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야율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 크크크! 프프프!”

느닷없이 옆에서 나직한 웃음이 들려오자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단리효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고 있었다.

“ 무슨 짓이오. 단 막주.”

북청강이 불쾌한 얼굴로 소리쳤다.

“ 우린 전부 속았소. 북 성주. 우린 저들 둘에게 속았단 말이오.”

“ 무슨 소리요?”

“ 우린 목수믕ㄹ 건 내기를 했소. 그런데 결과는 어떻소?”

“ 연 공자와 야율 부주가 속임수를 썼단 말이오?”

“ 십뢰, 십뢰를 보시오. 여러분. 저 십뢰는 연우강 저놈을 천주로 만들고 야율사은 저놈을 부천주로 만들었지만 처음과 달라진 게 없소이다. 십뢰는 단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단 말이오. 이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단리효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 단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다고?”

일행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단리효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런데 십뢰는 처음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 그렇소. 북 성주. 저놈들은 가짜 십뢰로 우릴 농락한 거란 말이외다.”

단리효는 연우강과 야율사은을 번갈아 가리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제 5 장 멋진 남자가 되는 법

십뢰가 단 한 번도 발사되지 않았다는 단리효의 외침으로 팔황북천각 일층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청강 일행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내기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속임수로 천주 자리를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점철됐던 팔황북천간 일층에 이번엔 자욱한 살기가 퍼져나갔다.

“ 청후야, 내 혈도를 풀어라!”

북청강은 동생인 북청후를 보며 말했다.

“ 안 되오. 북성주.”

북청후를 제지한 사람은 남십자성 성주 백마흔이었다.

“ 무슨 소리요?”

“ 이번 일은 점혈을 한 상태에서 끝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마오. 오늘 이 자린 천주를 뽑기 위한 자리고, 그 일은 마무리 돼야 하오.”

“ 내 생각도 백 성주와 같소. 북 성주. 지그 이 상태로 해결을 보도록 합시다.”

만독존자 당갈이 백마흔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 좋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북청강은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내기를 무위로 돌리겠단 말인가?”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면 따르겠지만 속임수라면 내기 자체를 인정할 수 없소. 연 공자.”

“ 우린 모두 같은 조건이었소. 나와 사은은 댁들보다 담력이 셌고, 운이 좋았을 뿐이오.”

“ 십뢰는 연 공자 당신 소유였소.”

“ 그 이야기는 시작할 때 했던 걸로 알고 있소. 북 궁주.”

“ 야료를 부리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십뢰가 작ㄷ공하는지 그건 확인하지 못했소.”

“ 그걸 확인하겠단 말이오?”

“ 그렇소. 연 공자.”

“ 누가 확인할 거요?”

“ 허공에 대고 쏴보시오.”

“ 그럴 순 없소. 북 성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본인의 입에 십뢰를 넣고 직접 해야 하오.”

“ 정녕!”

북청강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 너희들은, 금릉 연씨 세가의 상속자고, 흑천의 천주고, 대야벌 야정의 후계자인 나 개독새 연우강을 모욕했다. 북청강.”

“ 모욕은 연우강 네가 했다, 놈.”

듣고 있던 단리효가 버럭 소리쳤다.

“ 내가 속임수를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욕한 게 아니다. 단리효.”

“ 그 시험은 내가 하겠다. 연우강.”

“ 저, 정말 네가 하겠단 말이냐?”

“ 그렇다. 연우강. 내가 하겠다.”

단리효의 얼굴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어렸다. 더듬거렸던 연우강의 어투 때문이었다. 허공에 쏘지도 못하고, 시험을 하겠다고 나서자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는 것은 십뢰가 가짜라는 반증이었다.

“ 십뢰를 넘겨라.”

“ 내가 직접 쏘겠다.”

연우강은 십뢰를 들고 단리효 앞으로 걸어갔다.

“ 좋다. 연우강.”

단리효는 연우강 앞에 가슴을 활짝 펴고 섰다. 그러고는 뒤편에 있는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부하 한 명이 검을 뽑아들고 연우강 뒤편으로 섰다.

“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네 목을 치겠다. 연우강.”

“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연우강은 십뢰의 앞부분을 단리효의 배에 밀착했다.

“ 얼마든지 쏴라. 연우강, 얼마든지.”

단리효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 용기는 가상하다만......”

연우강은 십뢰의 단추를 사정없이 눌렀다.

철컥!

“ 프! 하하하! 크! 하하하!”

단리효는 호쾌하게 웃었다.

역시 가짜가 맞았다. 뭉치가 십뢰를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십뢰는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 죽여라!”

단리효는 연우강 뒤편에서 검을 들고 있는 부하를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단리효의 부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 뭐하고 있느냐?”

“ 아직 구멍은 세 개나 남았소, 단 막주.”

딘리효 부하 뒤편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십 년은 늙어버린 듯 추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이자승이었다. 이자승이 들고 있던 혈루의 끝은 단리효 부하 목에 닿아 있었다.

이자승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천국과 지옥을 몇 번 오갔는지 모른다. 아니 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지가 축축해졌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 아이고, 연 공자가 사람 여럿 잡는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가장 자리 아래쪽에서 나직이 툴툴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수천월이 올라왔다. 그의 품속에는 늘어진 수여설이 안겨 있었다.

“ 기절한 거냐?”

욱일승이 수천월을 보며 물었다.

“ 게거품을 물고 있더라.”

수천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 말에 연우강의 고개가 수천월을 향해 돌아갔다.

“ 수 소저가 왜 기절한 거지?”

“ 왜 기절을 하겠는가, 불같이 급하 성격을 견디다 못해 기절을 한 게지.”

“ 별일이네. 오줌 싼  사람은 난데, 지가 기절을 왜 해.”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단리효를 보았다.

“ 이리 주세요.”

연우강 근처에 있던 수나인은 수천월이 안고 있던 수여설을 덮치듯 빼앗아 안았다.

“ 큭! 기절한 딸을 보니까 갑자기 모성애가 샘솟는 모양입니다. 궁주.”

수나인을 빤히 쳐다보며 비아냥대던 연우강은 다시 단리효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아직도 가짜가 아니라고 할 테냐?”

단리효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 방금 그건 네 개 중 하나야. 그러고 보니 사은 저 자식이 마음먹고 한 번 더 당겼으면 황천 천주가 될 뻔했는데 아쉽게 됐어.”

“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구나, 놈, 눌러라.”

단리효는 가슴을 활짝 펴며 소리쳤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연우강은 단리효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단추를 사정없이 눌렀다.

철컥!

“ 봐, 봐라.....”

푸아악!

단리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파란 광채가 십뢰 끝 부분에서 터져 나왔다.

“ 크아악!”

단리효는 입을 쩍 벌린 채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 믿으라고 했잖아. 새꺄.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연우강은 고개를 숙이는 단리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위로 쳐들었다. 그러고는 쩍 벌어져 있는 그의 입 안으로 십뢰를 쳐넣었다.

“ 으으!”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리효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손사레를 쳤다. 살려달라는 의미일 터였다.

“ 여기는 사막이다, 단리효. 사막에서는 나도 날 제어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친 이리, 광랑이라 불렸다.”

연우강은 차갑게 말을 뱉으며 단추를 눌렀다.

철컥!

푸아아악!

또다시 새파란 광채가 단리효의 뒤통수에서 솟구쳐 나왔다.

북청강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십뢰.

실제로 목격한 십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 또 시험해 보고 싶은 사람.”

연우강은 몸을 돌려 북청강 일행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단리효의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있었다.

“ 인정하오.”

북청강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인정하면?”

연우강은 십뢰를 들어 북청강을 겨누었다.

“ 날 쏠 참이오?”

“ 팔황새는 천주가 나타나면 ‘그래 너 천주다.’ 그럼 끝나는 그런 조직이었어?”

“ 그건 아니오.”

“ 아! 힘없는 천주라서 그런 모양이네. 영감님. 저 혈도 좀 풀어주십시오.”

“ 알았다.”

연우강 곁으로 다가간 이자승은 해혈을 해주었다.

이자승이 해혈을 해주는 순간 다른 이들 또한 자신의 수뇌들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광채가 들어오고 수뇌들의 내공이 돌아오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기운이 수뇌들 몸 주변을 감쌌다.

“ 자! 이제 무공도 회복했으니까, 다시 해 보자고, 내가 천주가 되는 것에 대해 불만인 사람?”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 그럼 한 가지 알려줄게. 경천사마라고 불리는 노인네들 중 대형인 경천사마 기운상은 흑천의 천주 대행이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어.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더군. ‘천주시여, 저를 비롯한 우리 흑천 무인들은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천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라고 말이야. 아주 감격한 얼굴로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데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고,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털썩!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청강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이어 백마흔이 무릎을 꿇고 팔황새 수뇌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각 수뇌들 뒤편에 있던 자들 또한 연우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 인정하는가?”

연우강은 쥐고 있던 단리효의 머리를 놓으며 소리쳤다.

“ 인정합니다. 천주님!”

우렁찬 함성에 호수가 파르르 떨었다.

“ 난 중원인이다!”

연우강은 곧바로 말을 놓았다.

‘ 저놈?’

이자승은 내심 탄성을 내뱉었다.

팔황새 수뇌들은 대부분 제 녀석보다 곱절 이상 나이가 많다. 그런 그들을 향해 말을 놓는데,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수 년 동안 부하로 거느린 자들을 대하는 것 같다.

더불어 연우강의 몸에서 무형의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앞에 앉아 있는 팔황새의 수뇌들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완전히 장악해 들어갔다.

‘ 하지만.......’

이자승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내기에 져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팔황새는 변황의 절대자들이다. 저들이 앞으로도 계속 연우강을 따를 리가 만무하다.

설사 황천을 다시 세운다고 해도 모래성에 불과할 뿐이었다.

‘ 공연하 짓이다, 이놈아.’

“ 황천의 천주십니다.”

이자승의 내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팔황새 무인들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 인정하느냐?”

“ 인정합니다. 천주님.”

“ 난 흑천의 천주이기도 하다!”

“ 인정합니다. 천주님!”

“ 좋다. 그럼 난 지금 이 시간 부로 황천의 천주다! 천주로서 첫 번째 율법을 말하겠다!”

“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천주님!”

“ 제일법은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린 황천이 아니라 팔황천이다. 위로는 천주가 있을 것이며 천주 바로 아래에는 여덟 개의 하늘이 있게 될 것이다. 북천지옥부는 북천, 천외흑막과 새외귀막은 천외천, 막북혈마성은 혈마천, 남만독존궁은 독천, 해남 남십자성은 십자천, 북해빙궁은 빙천, 서장 포달랍궁은 서천, 청해천종림은 해천으로 개명한다. 각 천의 수뇌는 천주로 부를 것이며, 팔황천의 천주는 총천주라 부를 것이다. 따르겠느냐?”

“ 따르겠습니다. 총천주님.”

“ 인정하느냐?”

“ 인정합니다. 총천주님.”

“ 제이법을 말하겠다. 팔황천의 차기 총천주는 현 총천주가 지목하는 자가 맡는다. 따르겠느냐?”

“ 따르겠습니다. 총천주님!”

“ 인정하느냐?”

“ 인정합니다. 총천주님!”

팔황새, 아니 이제는 팔황천으로 바뀐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 영감님, 혈루를 주십시오.”

연우강은 이자승에게 손을 내밀었다.

“ 여기 있다.”

이자승은 혈루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팔황새 무인들이 미덥지 않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 저들을 믿는 게냐?]

그는 결국 전음으로 물었다.

[ 제가 바봅니까?]

[ 그럼 지금 뭐 하는 짓이냐?]

[ 멋있는 남자는 아무 노력 없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영감님.]

[ 멋있는 남자라고?]

[ 두고 보십시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탁자 위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팔황혈루파천황 비급이 둥실 떠올라 날아왔다.

“ 북천대제 야율사은은 앞으로 나와라!”

연우강은 한편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야율사은을 불렀다.

“ 명 받잡습니다. 천주님.”

야율사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다가왔다.

“ 지금 이 시간부터 팔황천의 차기 총천주 추대식을 거행하겠다. 현 총천주인 나 연우강은 차기 총천주로 북천대제 야율사은을 지목한다. 받아라, 야율사은.”

연우강은 혈루와 비급을 야율사은 품에 안겼다.

“ 이, 이게 무슨.....”

순간 야율사은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팔황천 무인들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제 막 팔황새를 장악했고, 팔황천으로 개명을 했을 뿐 아니라 율법 두 가지를 공포했다. 그랬던 여눙강이 곧바로 총천주 직위를 야율사은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 이제 팔황천은 네 손에 달렸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중원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이곳에 머물 수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들에게 천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까지다. 각 문파가 정말로 천이라는 이름에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건 이대 총천주인 네 몫이다. 야율사은. 네 어깨에 변황의 모든 것이 달렸단 말이다.”

연우강은 야율사은의 어깨를 툭 치더니 이자승의 어깨를 잡았다.

[ 뭐 하는 짓이냐?]

[ 날 업어주십시오.]

[ 널 업으라고?]

[ 멋진 사내가 되기 위해서는 멋진 마지막 마무리도 필요합니다. 영감님. 절 업고 처소로 가 주십시오.]

[ 알았다, 이놈아.]

이자승은 연우강을 들쳐 업었다.

“ 난 피곤해서 갈 테니까, 의논들 해서 잘해.”

연우강은 아직 멍하게 서 있는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호수로 걸어가야 합니다. 영감님.]

[ 알았다, 녀석아.]

이자승은 연우강을 업은 채 호수로 몸을 날렸다.

[ 느긋하게 천천히 가시면 됩니다. 석양에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지금 해가 지고 있는데 그것도 몰랐냐?]

[ 그럴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천천히 가야 한다는 연우강의 말과는 달리 이자승은 빠르게 걸었다.

“ 순전히 운이란 말이냐?”

팔황북천각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 오자 이자승은 그제야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화간 난 기색이 역력했다.

“ 노력을 하고 난 다음에 운을 기다리는 겁니다. 영감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놈에겐 운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 무슨 노력을 했단 말이냐?”

“ 뭉치 돌아가는 소리로는 십뢰가 끼워진 구멍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절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 그럼?”

“ 어느 정도 힘으로 돌렸을 때 십뢰가 끼워진자리가 어디에 위치하는 지 그걸 알아내야 했습니다. 어차피 뭉치를 끼우고 돌릴 사람은 저였으니까요.”

“ 그래서?”

“ 삼 일 밤낮 동안 손바닥이 닳도록 그 짓만 했습니다. 하나를 넣고 해보고, 두 개를 넣고 해보고, 세 개를 넣고 돌려봤더니, 열 번에 다섯 번 정도는 십뢰가 들어 있는 구멍이 위치한 자리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 오 할에 모든 걸 걸었단 말이냐?”

“ 오 할은 노력으로 해결하고 나머지 오 할에는 제 운을 올려놓는 겁니다.”

“ 운이 아니고 네 목이겠지. 그리고 그 내기는 오 할의 승률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중간에 기권을 해버리면 순서가 달라지게 되니까.”

“ 하지만 십뢰가 맨 열 번째 위치에 도도록 조정을 해두면 설사 기권을 한다고 해도 죽을 염려는 없죠.”

“ 그런 놈이 오줌을 쌌단 말이냐?”

“ 오 할의 확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오줌을 지릴 정도면 다른 놈들은 말할 것도 없죠.”

“ 하지만 기권은 수나인만 했다.”

“ 이용할 자식이 있는 사람은 죽을 확률이 오 할인 상황에서는 절대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나인은 기권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단 말이구나.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하는 거냐?”

“ 모르겠습니다.”

연우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멀리 보이는 사구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어쩌면 삶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그런지도. 그것도 아니면 이곳이 사막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 오 할에 목숨을 걸어서 얻은 총천주 자린데 왜 그냥 넘겨준 거냐?”

이자승은 화제를 돌렸다.

오 년의 전쟁.

아마도 그 전쟁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 그건 영감님이 더 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 녀석들이 널 따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단 말이냐?”

“ 영감님 같으면 도박으로 총천주 자리를 딴놈이 명령을 내리면 군말 않고 따르겠습니까?”

“ 도박을 한 놈은 너다, 녀석아.”

“ 그래서 멋지게 퇴장하고 있잖습니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고 떠나면 달라집니다.”

“ 어떻게 달라진단 말이냐?”

“ 팔황새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기꺼이 양보한 멋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혈루와 팔황혈루파천황을 가져다주고, 총천주 자리까지 양보한 사람. 얼마나 멋집니까?”

“ 태상총천주라는 직책은 그대로 살아 있을 테고.”

“ 그런 걸 일컬어 버려서 얻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북청강 그놈들은 제가 한 말이라면 일단 한 수 접고 들어갈 겁니다.”

“ 클클클!”

이자승은 고개를 저으며 웃고 말았다.

한 수 접어주는 정도가 아닐 테다. 아마도 연우강의 말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도와줄 것이다.

녀석은 이곳에서 엄청난 우군을 얻은 셈이다.

“ 그런데 말이다.”

문득 야율사은과 연우강이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경황이 없는 중이었지만 한마디는 놓치지 않았다.

“ 말씀하십시오.”

“ 혼자 떠났을 거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 그 정도로는 기억할 수 없습니다. 영감님.”

“ 야율사은이 분명히 그랬다. 너 혼자 사막으로 들어갔더라도 전부 따라갔을 거라고.”

“ 너무 난해한 질문입니다. 영감님. 영감님도 봤겠지만 생사결을 벌이게 되면 대화를 한 기억조차 남지 않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 단추를 누를 뿐입니다.”

“ 몽롱한 상태에서 단리효의 약은 잘도 올리더구나. 놈이 십뢰를 가짜라고 믿게 만들면서 말이다.”

이번엔 이자승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막폭풍작전은 흑랑기로부터 시작됐다.

그 작전을 펼치는 데 혼자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녀석이 혼자 가려고 했던 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그 누군가는 바로 주무상일 것이다.

“ 그건 그놈이 지레짐작한 것뿐입니다. 저는 가짜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갔어, 이놈아.”

어느새 다가온 걸까, 각 처소 앞에는 잠룡들과 노인들이 나와 있었다.

“ 이 녀석 목욕시키고 난 다음에 이야기하세.”

“ 또 목숨을 아무렇게나 굴린 거예요?”

불쑥 몸을 날려 이자승 곁으로 날아온 남궁운화가 소리쳐 물었다.

“ 아느냐?”

“ 일구 할아버지로부터 십뢰에 대한 말을 들었어요.”

“ 팔황천 태상총천주가 됐단다.”

“ 태상총천주는 뭐죠?”

“ 남궁세가의 태상가주와 같은 신분이란다.”

“ 그럼 엄청난 거잖아요.”

“ 그런 셈이지. 그런데 너 등평도수도 펼치는 거냐?”

“ 그러게요?”

남궁운화는 제가 보기에도 신기한 듯 발로 물을 굴려보았다. 물이 사방으로 튀자 그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토해냈다.

“ 몰랐다고?”

“ 네.”

“ 검법은 어느 정도 익혔느냐?”

“ 간혹 청룡의 그림자가 나타나곤 해요.”

“ 청룡의 그림자라면 오 초인 창궁천주를 말하는 거 아니냐?”

“ 에이! 설마요. 창궁천주는 이기어검술이라고요.”

남궁운화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었다.

“ 왜?”

“ 전 일천독행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고, 여설 언니로부터 배운 빙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고요. 그런 제가 무슨 수로 창궁천추를 익혀요.”

“ 그건 일부러 익히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냐?”

“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는 계집이 무슨 수로 두 가지를 동시에 익히겠어요.”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일천독행신에 몰두할 때 넌 창궁대연검법만 익혔단 말이냐?”

“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 허허허! 아주 장하구나.”

“ 지금 저 바보라고 놀리는 거죠?”

“ 아니다, 녀석아. 내가 왜 널 놀리겠느냐?”

“ 아무튼 빨리 가요, 할아버지.”

“ 갑자기 이 녀석이 무거워졌구나.”

“ 잠들었으니까 당연히 무거워질 수밖에 없잖아요.”

“ 잠들었다고?”

“ 삼 일 동안 미친 듯이 십뢰만 돌렸는데 아무리 무인이라도 견디겠어요?”

“ 하하하! 알았다. 넌 얼른 가서 이불이나 깔아 놔라. 난 녀석 목욕시켜서 들어가마.”

“ 알았어요. 할아버지.”

촤악!

남궁운화는 물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그녀의 신형은 순식간에 연우강의 처소로 사라졌다.

“ 누가 저 아이를 가르친 거냐?”

“ 야장에 창노라는 자가 있는데, 그가 무공을 가르친 걸로 알고 있다.”

“ 창궁대연신공은 아무나 가르칠 수 있는 그런 무공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냐?”

이자승은 연우강의 처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나도 그렇게 알고 있기는 한데,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다.”

“ 창궁대연시공을 저렇게 완벽하게 가르치려면 석년의 창궁무제 남궁우문밖에 없다, 자승.”

“ 그럼 창노가 남궁우문이란 말이냐?”

“ 옆에서 본 사람은 넌데 그걸 왜 내게 물어!”

“ 맞습니다. 영감님.”

그때 등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맞다고?”

“ 그렇습니다. 창노는 남궁 영감이고 무원은 낙일마검 장만봅니다.”

“ 맙소사.”

이자승은 연우강을 떨어뜨릴 뻔했다.

삼십 년 전 팔황정벌에 나섰다가 실종됐다고 하였던 그들이 대야벌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작군, 그 친구도 알고 있는가?”

뒤에 있던 욱일승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 대충 언질은 해줬소. 창노 영감이 말을 했다면 알고 있을 테고, 말하지 않았다면 모를 거요.”

“ 전혀 모른다. 이 나쁜 자식아.”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었던 듯 두작군이 씩씩대며 몸을 날려왔다.

“ 늙으면 귀만 밝아진다더니.”

“ 이 나쁜 놈아, 우리가 지옥으로 간 이유.......”

“ 또 나댄다. 또 나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 깨닫지 못한 거야?”

“ 이번 일은 그것과 다르잖아 자식아!”

“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사부라는 사람이 어째 제자보다 못하냐.”

“ 여기서 제자가 왜 나오는데?”

“ 창궁대연신공이 어떤 무공이야?”

“ 그거야 남궁세가의 가주무공이잖아, 자식아.”

“ 특징을 말해보란 말이야, 영감탱이야.”

“ 다른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 창궁대연신공은 절대 익히지 못하고, 창궁대연신공을 쌓은 내공은 다른 사람에게 전수가...”

두작구의 얼굴이 연우강의 처소로 향했다.

창궁대연신공을 통해 쌓은 내공은 반드시 창궁대연신공을 익힌 상대에게만 전해줄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제 몸 속의 내공이 두 배 이상 늘어났는데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다.

결국 남궁운화는 창궁대연신공을 가르쳐주고 내공을 전이해 준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어. 그 힘든 와중에도 그녀는 할아버지를 찾지 않았다고. 대신 남들이 자는 시간에 무공을 익혀. 할아버지가 적어준 비급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보면서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이야. 왠지 알아?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서 할아버지의 본명인 남궁우문이라는 이름을 찾아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무튼 남궁 소저는 복도 지지리도 없어. 하고많은 영감들 중에 하필이면 저런 인간이 걸려서는...”

“ 에라, 개자식아!”

퍼억!

순식간에 몸을 날린 두작군은 연우강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주먹을 박아넣었다.

“ 악!”

연우강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렇다고 기절을 시키면 어떡하냐?”

“ 기절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저 자식은 말입니다. 제 손녀딸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해 준 놈입니다. 아주 치사한 자식이라고요.”

두작군은 길길이 날뛰며 고함을 내질렀다.

“ 그래도 이 녀석 머리를 후려쳐서 기절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 화가 나면 무슨 짓을 못합니까?”

“ 일승이 저 녀석들이나 경천사마 그 양반들은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죽어도 못할 걸?”

“ 정말 그렇습니까?”

두작군은 욱일승을 돌아보며 물었다.

“ 맞네. 두 아우. 오늘부터는 팔황새에 있는 모든 무인들도 연 공자 앞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하네.”

“ 쩝!”

두작군은 제 머리를 긁적였다.

“ 할아버지, 빨리 오세요!”

그때 연우강 처소에서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 왔다.”

욱일승은 빙그레 웃으며 연우강 처소로 몸을 날렸다.

“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욕실로 나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곳으로부터 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삼 일 동안 잠도 못잤고, 지금은 기절한 상태니까 따뜻한 물이 좋을 것 같아서요.”

“ 이 녀석아! 그건 호수 물을 나무로 막아 만든 욕조일 뿐이야. 네가 아무리 데운다고 해도 금세 식어버린다는 것도 몰라?”

이자승은 어이없는 얼굴로 소리쳤다.

나무판자를 세워 욕조처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안쪽과 바깥쪽의 물이 넘나들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물을 데운다고 해도 금세 식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남궁운화는 삼매진화로 물을 데우고 있었다.

“ 그래도 찬물보단 낫잖아요. 옷은 거기에 두고 연 공자나 데리고 오세요.”

“ 네가 목욕시킬 거냐?”

이자승은 웃으며 연우강의 옷을 벗겼다.

그러고는 욕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나갔다.

“ 무슨 소리에요. 저는 연 공자 옷이나 빨래요.”

화들짝 놀란 남궁운화는 얼른 방안으로 들어왔다.

“ 물은 제가 데우겠습니다. 형님.”

조금 전 말을 떠올린 두작군은 욕시롤 들어가 물속에 손을 넣고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이자승 일행의 연우강을 목욕시키고 있을 때 남궁운화는 사망묵의에서 암기를 제거했다.

“ 와! 많기도 하네.”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암기를 보며 남궁운화는 입을 쩍 벌렸다. 놀란 눈으로 암기를 쳐다보던 그녀는 한편 구석에 놓아둔 궤짝을 가져와 뚜겅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반듯하게 각이 잡힌 채 개어진 옷들이 상의와 하의 그리고 속옷 순으로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밥보다 더 열심히 챙겨먹는 약과 약탕기, 쇠로 만들어진 손괭이와 낫이 놓여 있다.

“ 누가 군인 출신 아니랄까 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전에 저 모습을 처음 보고 이상해서 연우강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군에서는 지급된 옷을 저렇듯 각을 세워 정리하지 않으면 얻어터진다고 하였다. 그런 게 어디 있냐며 깔깔댔는데 아직도 그는 그런 식으로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궁운화는 상의와 하의 그리고 속옷을 꺼내 침상에 올려 놓은 후 한쪽 빈 공간에 암기를 집어넣었다.

일을 마친 그녀는 사망묵의를 비롯한 안쪽에 받쳐입었던 옷과 속옷가지와 세재를 챙겨들고 방을 나섰다.

어느새 주변은 깜깜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별을 올려다보았다.

“ 더 강해졌대요, 할아버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할아버지가 주신 내공 전부를 제 걸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빨래를 시작했다.

옷을 물에 담갔다가 건져낸 다음 조두를 뿌려 돌에 대고 비빈 다음 물속에 넣고 빠르게 휘저어주면 빨래는 금세 끝이 난다. 사망묵의 안에 받쳐 입는 옷과 속옷을 빤 남궁운화는 이번엔 사망묵의를 집어들었다.

사망묵의는 거의 갑옷과 비슷하기 때문에 구겨서 빨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예 물속으로 들어가 사망묵의가 펴진 상태 그대로 담가 빠르게 휘저었다.

그렇게 몇 번 휘저은 다음 건져내 물기를 털어내자 빨래는 끝이 났다.

그녀는 사망묵의와 옷가지를 챙겨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목욕이 끝난 듯 연우강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 언니도 그곳에 있지 않았어요?”

남궁운화는 수천월을 보며 물었다.

“ 어머니를 만나고 올 모양이다.”

“ 기절했죠.”

“ 잘 아는구나. 녀석이 와 있다는 걸 몰랐다라면 송장 치를 뻔했다.

“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참! 식사하셔야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남궁운화는 문득 생각나는 듯 물었다.

“ 그래야겠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구나.”

“ 가요, 할아버지. 식사 준비해 두었어요.”

“ 허허허! 그래도 우릴 생각해준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알았다. 가자.”

일행은 흐뭇하게 웃으며 연우강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활짝 웃은 그들과는 달리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수여설이었다.

수여설은 잔뜩 굳은 얼굴로 어머니 수나인을 쏘아보았다.

“ 마지막 부탁이다. 여설아. 네가 나서주면 우리 북해빙궁은 팔황천 최고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우리 북해빙궁의 시대가 열린단 말이다.”

“ 그래서 이곳에서 처음 본 남자에게 시집을 가란 말인가요?”

“ 나도 네 아버지와 혼인할 때 그랬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혼인했다. 하지만 자식을 둘이나 낳고 잘 살았다.”

“ 만족하세요?”

“ 내 삶을 말하는 거냐?”

“ 그래요.”

“ 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나는 여자 팔자는 남편에게 달렸다고 믿었고, 네 아비를 택했다. 물론 네 아비와 혼담이 오가기 전에 사랑했던 사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신분도 보잘것없었고 가난했다.”

“ 가난한 사랑보다는 풍족한 삶을 택했다는 말이군요?”

“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옳았다. 사랑은 열병과 같아서 세월이 가면 희미해질 뿐이다. 결국 남는 건 재산과 지위밖에 없다.”

“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저보다는 수정에게 시키세요. 저보다는 그 아이를 더 좋아하잖아요.”

“ 그 아이는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 따로 있다.”

“ 그 아이도 팔아먹을 생각이군요?”

수여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다.”

“ 모녀지간이라도 합이 들어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머니와 전 합이 들지 않았나봐요.”

“ 마지막 부탁이다, 여설아.”

“ 차기 궁주 자리를 수정에게 넘기라고 할 때도 마지막이라고 하였고, 잠룡쟁패를 줄 때도 마지막이라고 했었지요. 어머닌 항상 마지막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시죠. 쉬세요.”

“ 난 네 어미다.”

“ 어머니는 이제 서른 살밖에 되지 않은 제가 보기에도 아주 젊어요. 야율사은을 그렇게 얻고 싶으면 직접 하세요.”

수여설은 차갑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 잡아!”

수나인은 밖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발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옥녀빙인대 대주이자 수나인의 친동생인 빙정옥녀 나옥심이었다.

“ 날 막을 건가요?”

수여설은 안으로 들어오는 나옥심을 쏘아보았다.

“ 북해빙궁에서는 궁주의 명령이 곧 법이다. 여설. 궁주의 혈족이라고 해도 궁주의 명령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 난 내가 북해빙궁의 수하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모. 내가 북해빙궁에서 살았던 건 부모님이 북행빙궁 출신이라 그랬던 것뿐이에요.”

“ 북해빙궁을 떠나려면 무공도 반납해야 한다는 걸 모르느냐?”

듣고 있던 수여설이 버럭 소리쳤다.

“ 난 무공을 아버지로부터 배웠어요. 어머니.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어머닌 수씨가 아니라 나씨죠. 북해빙궁의 며느리 말이에요.”

“ 건방진 것!”

수나인은 나옥심을 향해 제압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 날 원망하지 말거라.”

나옥심은 나직이 말하고는 수여설의 맥문을 움켜쥐었다.

“ 절 원망하지 마세요. 이모.”

수여설은 차갑게 말하며 내공을 끌어올려 맥문을 통해 쏟아냈다.

쩌엉!

“ 커억!”

느닷없이 가공할 냉기가 몸 안으로 파고들면서 손가락부터 하얗게 변해갔다. 나옥심은 급하게 견정혈을 눌러 내기의 침입을 막았다. 그녀가 어깨의 혈도를 누르는 순간 오른손은 딱딱한 얼음으로 변했다.

건드리기만 해도 깨지는 그런 상태였다.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 함부로 움직이면 산산이 부서질지도 몰라요. 이모.”

“ 어떻게.....”

경악한 사람은 비단 나옥심뿐만이 아니었다.

뒤편에 있던 수나인 또한 기절할 듯한 얼굴로 수여설을 쳐다보았다. 맥문을 움켜쥔 상대를 역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배 이상의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저 정도면 자신과 비슷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빙하빙백강을 익혔나요?”

수여설은 나옥심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이, 익혔다.”

“ 그럼 오른팔은 구할 수 있겠네요. 빙하빙백강을 천천히 운기하면서 냉기를 빨아들이세요. 심한 고통과 동상이 수반하긴 하겠지만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어머니께 부탁하면 더 큰일난다는 걸 명심하세요, 이모.”

“ 다, 다른 무공을 섞었단 말이냐?”

나옥심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 제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으면 어머니께 부탁해도 돼요.”

수여설은 차갑게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 멈춰라, 여설!”

뒤편의 수나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어머니가 계모였으면 정말 좋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에요.”

“ 넌 모른다. 여설. 너희 수씨들이 내게 어떻게 했는지, 그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넌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수여설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수나인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나직한 신음이 들려오자 비로소 나옥심을 보았다.

“ 언니!”

“ 그 아이 말이 맞을 게다. 무리하지 말고 빙하빙백강을 운기하면서 천천히 냉기를 빨아들여라!”

“ 아, 알았어요. 언니.”

나옥심은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 나쁜 년!”

나옥심이 나가자 수나인은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빙하빙백강에 격중당한 찻잔은 순식간에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걸 안다면 넌 결코 그런 소릴 못 해. 난......”

[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거요, 나인?]

귓전으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잔뜩 일그러져 있던 수나인의 얼굴이 한순간에 활짝 핀 장미로 돌변했다.

[ 침실로 오세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건장한 사내가 천장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평복을 걸치고 있는 사내는 바로 막북혈마성의 성주 대혈마 북청강이었다.

“ 일이 생각대로 안 되는 거요?”

북청강은 수나인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 싫답니다.”

“ 수여설은 어린 애가 아니오, 나인.”

“ 그래서 포기하란 말인가요?”

“ 천천히 조금씩 해 나가야 한단 말이오.”

“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그렇죠.”

“ 나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딸과의 관계 회복이오. 그런 뒤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단 말이오. 그건 그렇고, 연우강 그자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소?”

“ 공력은 일 갑자 반 정도고, 칠보귀둔필사와 흑철마신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해요. 그 외 암기술을 포함하여 잡다한 무공을 익히고 있고요.”

“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말이오?”

“ 그놈이 야율사은보다 강하다고 했더라면 야율사은에게 시집가라고 할 이유가 없죠.”

“ 그렇군. 아무튼 그놈도 주시해야 하오.”

“ 알았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 해요. 침실에서만큼은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나인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나도 그렇소. 나인.”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수나인의 침실에 뜨거운 열풍이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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