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앵속쟁이
빠빠라빠! 빠빠빠!
이곳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녹주라 기상나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는지도 몰랐다. 기상나팔 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들자마자 연우강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흘러내리며 싸늘한 기운이 거미처럼 타고 올라온다. 곳곳에서 타고 오르는 추위를 몰아내기 위해 몸을 으스스 떨었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덕 앞으로 갔다. 간밤에 피워놓고 간 듯,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석탄을 던져 넣고 불을 피우고 궤짝 안에서 약탕기와 약을 꺼냈다.
욕실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가 약탕기에 호수 물을 받아 약을 넣은 다음 화덕 한편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희뿌연 새벽빛이 밤을 몰아내고 있었다.
모래 냄새를 가득 머금은 싸늘한 바람이 온기를 찾아 옷깃을 파고들었다.
팔과 가슴을 쓱쓱 문지른 연우강은 문 앞에 있는 작은 공간에서 천천히 몸 풀기를 시작했다. 몇 걸음 움직이며 손을 뻗어내자 체온이 서서히 올라갔다. 이윽고 내뻗는 그의 손으로부터 매서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 밤새도록 그곳에 있었던 겁니까?”
왼편에 위치한 처소를 향해 몸을 돌렸던 연우강은 왼손을 뻗어내며 입을 열었다.
수여설과 남궁운화가 머무는 처소 옆 난간처럼 만들어져 있는 공간에 수여설이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지겹지 않으세요?”
수여설은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습관인데 지겨울 리가 없죠.”
“ 그런 것도 습관이 되나 보죠?”
“ 이건 비밀인데요.”
“ 비밀?”
“ 이걸 하지 않으면 화장실을 못 갑니다.”
“ 화장실을 못 간다는 건.....”
“ 변비가 생겨 하루 종일 더부룩한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 풋!”
수여설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느릿하게 나아가는 손에서 하늘의 힘이 감지된다.
이미 그의 경지는 무극지경을 넘어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저 동작을 하지 않으면 화장실을 가지 못한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대답을 듣게 된 것이다.
“ 화해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죠?”
“ 어머니가 계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 친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많이 있습니다. 어렸을 땐 우진이 녀석이 부럽기도 했고요.”
“ 우진이라면 동생?”
“ 그 녀석은 많이 맞고 자랐거든요.”
“ 때려주지 않아서 섭섭했다는 말인가요?”
“ 저는 그랬습니다.”
“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나 보죠?”
“ 네.”
“ 지금은 어떠세요?”
“ 장가가라는 성화에 미치겠습니다. 어떤 여자라도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데려오랍니다.”
“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요?”
“ 아직은 장가갈 생각 없다고 했습니다.”
“ 왜요?”
“ 바로 이놈의 습관 때문입니다.”
“ 몸 풀기 때문이라고요?”
“ 인ㄴ시만 되면 정확하게 나팔소리가 들려오거든요. 그럼 자동으로 눈이 떠지고 몸을 일으키게 되죠. 그런 다음 나와서 이렇게 몸 풀기를 해야 하고요.”
“ 기상나팔 소리라고요?”
“ 부하 녀석들이 부르는 소리죠.”
수여설은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문득 전날 물속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야율사은은 연우강에게 부하들을 그만 놓아주라고 하였고 연우강은 그게 쉽지 않다고 대답했다. 연우강이 말한 기상나팔 소리는 바로 부하들에 대한 죄책감일 테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연공자가 더 잘 알잖아요.”
“ 곤란할 때는 그냥 지켜보는 게 낫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결과가 나오면 축복해 주고 나쁜 결과가 나오면 위로해 주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좋습니다.”
“ 그럴까요?”
“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언니, 여기서 뭐해요?”
앞쪽에서 상큼한 목소리와 함께 남궁운화가 나타났다.
“ 어디 다녀오는 거예요?”
수여설은 남궁운화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며 물었다.
“ 헤! 저기요.”
남궁운화는 머리를 긁적이며 연우강의 동작을 가리켰다.
“ 두 시전 전에 나갔잖아요.”
“ 저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은 남들 한 번 할 때 수십 번을 더해야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죠?”
남궁운화는 코를 킁킁 댔다.
“ 약탕기를 올려놓았습니다. 남궁소저.”
“ 으이구! 그놈의 강박공황증.”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흘겨보다가 몸을 날렸다.
“ 달여주려고요?”
“ 짜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 부탁합니다.”
“ 이제 좀 끊어봐요. 앵속도 아닌데..”
남궁운화는 바가지 긁는 부인처럼 투덜거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 남궁 가주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해져요.”
수여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어머니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개척해야 할 터였다.
나이 서른이 아닌가.
“ 저도 몸 풀기 하러 가야겠어요.”
수여설은 활짝 웃으며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언니 괜찮아졌어요?”
안에 있던 남궁운화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 많이 힘들어했나 보죠?”
“ 혼자 많이 울었어요.”
“ 좀 달래주지 그랬어요.”
“ 그럴 땐 펑펑 울고 나면 속이 많이 풀리거든요. 누가 옆에 있으면 더 힘들어요.”
“ 그걸 어떻게 알죠?”
“ 다 아는 수가 있어요. 그보다 약 다 됐어요.”
“ 고맙습니다. 남궁소저. 다른 녀석들은 어떻습니까?”
연우강은 남궁운화가 내미는 약사발을 받아들며 물었다.
“ 나오는 거 보고 왔어요.”
“ 섭섭하지 않아요?”
“ 뭐가요?”
“ 창노 영감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거.”
“ 할아버지께서 직접 말할 기회를 주려고 일부러 그런 걸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 그래도 미리 알면 더 기쁘잖아요.”
“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만일 연 공자가 미리 말했더라면 전 훨씬 게을러졌을 거예요. 처쩌면 창궁대연검법도 지금만큼 익히지 못했을지도 모르고요.”
“ 착한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하는데...”
연우강은 안쓰러운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엔 커다란 눈만 남은 듯하다. 견디기 힘든 여정일 터인데도 버티고 있는 그녀를 보면 측은하기까지 했다.
“ 화장도 좀 하고 그러세요. 얼굴이 그게 뭡니까?”
“ 제 얼굴이 어때서요?”
“ 동경도 안 보세요?”
“ 동경을 자주 보면 얼굴이 달라지나요?”
“ 그래도 가끔가다 한 번씩은 봐 줘야 합니다.”
“ 그보다 언제 돌아가요?”
제 얼굴 이야기가 나오자 남궁운화는 화제를 돌렸다.
“ 이곳에 있는 게 싫어요?”
“ 전 좋은데 언니가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요. 힘들 때는 잠시 피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 그럼 며칠 있다가 출발하죠, 뭐.”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착한 것도 천성이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자신은 동경 볼 시간조차 없이 정신없이 살면서도 옆 사람까지 챙기는 성격은 타고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약사발을 물에 헹궈 안에 집어넣은 연우강은 남궁운화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른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 뒤 점심 무렵 팔황북천각으로 들어섰다. 탈라하의 안내에 따라 간 곳은 팔황북천각 오층이었다.
“ 어서 와라.”
야율사은은 활작 웃는 얼굴로 연우강을 맞았다.
“ 좋은 소식 없어?”
연우강은 야율사은 건너편에 앉으며 물었다.
“ 중원소식?”
“ 응!”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마총 장보도 사건은 수그러들었고 지금은 밀천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
“ 어떤 소문?”
“ 첫째는 과거 대야벌 벌주와 비무해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우주만옹 혁세걸이 밀천 천주였다는 소문이고, 둘째는 대야벌 잠룡이었던 무무대야 나천후가 현 천주라는 소문, 셋째는 나천후가 우주만옹의 무공인 우주일만검결을 완벽하게 익혔다는 소문이고, 넷째는 밀천의 개파대전에 대한 건이다.”
“ 전부 밀천에 대한 것이네.”
“ 조직적으로 알린 것 같은 냄새가 난다.”
“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보다 개파대전 날짜는 언제야?”
“ 날짜는 아직 나오지 않고, 개파대전을 개최한다는 소문만 돌고 있다.”
“ 조금씩 바람이 불기 시작하네. 그건 그렇고 넌 어때?”
“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인마.”
야율사은은 웃으며 대답했다.
“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 단합이 잘 될 것 같냐는 질문이야?”
“ 응!”
“ 글쎄...”
야율사은은 말끝을 흐렸다.
“ 흥분이 가시면, 허탈함과 현실만 남는다는 뜻이야?”
“ 침략을 당했던 세월보다는 편안하게 살았던 세월이 더 길잖아.”
“ 굳이 팔황천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이구나.”
“ 그것도 있고, 북천지옥부가 또다시 팔황천의 수뇌로 나서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어.”
“ 사상누각이 될 수도 있다는 말?”
“ 그렇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 어떻게 할 거냐?”
연우강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아직은 특별한 계획은 없어.”
“ 중원 무림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아무 계획이 없다는 건 총천주로서 자격 미달이다. 자식아.”
“ 원래 총천주는 내가 아니라 너였다, 우강.”
“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거야?”
“ 지금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 결론은?”
“ 아직 없다니까.”
“ 그럼 아무 생각 없는 거네, 뭐.”
야율사은은 곤혹스런 얼굴을 했다.
“ 혼인하고 자식을 낳더니 다 잊어먹었구나.”
“ 무슨 소리야?”
“ 군에서 배웠던 것들을 말하는 거다.”
“ 군?”
“ 작전을 세우기 위해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뭐였지?”
“ 적의 동태 파악이 가장 먼저지.”
“ 구체적으로 팔황천의 적은?”
“ 드러난 적은 대야벌이고, 드러나지 않은 적은 내부에 숨어 있는 적이겠지.”
“ 밀천은?”
“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 좋다, 그 다음엔?”
“ 아군의 상태를 파악하는 게 두 번째로 알고 있다.”
“ 파악하는 방법은?”
“ 장점과 약점을 파악해 장점은 극대화시키고, 약점은 보완한다.”
“ 아군의 장점은?”
“ 별개의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는 대야벌보다 결속력이 훨씬 강하다.”
“ 약점은?”
“ 북해에서 해남까지 분산돼 있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는 대처능력이 떨어진다.”
“ 기동력이 약하는 말?”
“ 전부 모이는 데만 해도 한 달 이상은 족히 걸리니까 약한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라고 봐야지.”
“그런 약점을 없애고 장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하잖아.”
“ 팔황천 무인을 전부 합치면 사만 가량 된다. 그들을 수용할 시설도 없을뿐더러, 설사 있다고 해도 명나라 황실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다.”
“ 그 두가지가 해결되면 갈 수는 있는 거냐?”
“ 전부가 다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절반 정도는 갈 수 있다. 그런데 방법은 있어?”
야율사은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잔뜩 어렸다. 군에 있을 때도 그랬다. 연우강은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늘 대안을 만들어냈고,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이번에도 문득 그가 최고의 패를 꺼내 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만일 네가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했을 때 기꺼이 따를 자들은 몇 명인 되지?”
“ 천외천, 서천, 천종림 세 곳이다.”
“ 그럼 너까지 합치면 네 곳이 되는구나.”
“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냐?”
“ 이번 일까지만 내가 해결할게. 일단 전부 집합시켜.”
연우강은 찻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일층엔, 이제는 팔황천으로 변한 각 문파의 천주들이 모였다.
“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려고 불렀어.”
일행 앞에 놓인 찻잔에 차가 채워지자 연우강은 입을 열었다.
“ 떠날 겁니까?”
그래도 태상총천주 대우를 하려는 듯 북청강은 공대를 했다.
“ 그동안 잘 쉬었으니까 돌아가야지.”
“ 술이라도 한잔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태상총천주.”
“ 하하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술을 마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지금은 술보다는 팔황천이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의논을 하고 싶은데.”
“ 나아갈 방향이라면 뭘 말하는 겁니까?”
연우강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마흔이 물었다.
“ 그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어.”
“ 말씀하십시오. 태상총천주.”
“ 탁 천주 생각엔 우리 팔황천이 대야벌과 전쟁을 치른다면 승률은 어느 정도 될 거라고 보지?”
“ 현재 우리 전력으로 대야벌을 상대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 그 이유는?”
“ 대야벌 무인들은 한 곳에 모여 있는 반면 우리는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대야벌은 명령체계가 단일화 돼 있지 않기 때문에 대야벌의 존망이 걸린 일이 아니면 전 무인을 동원하지 못하잖아.”
“ 설사 그렇다고 해도 두 문파 내지는 세 문파가 힘을 합치면 팔황천을 각개격파 하는 건 가능합니다. 삼십 년 전에 낙일마검 장만보 또한 그런 방법으로 팔황정벌을 감행하였고, 우린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 그럼 우리 팔황천이 대야벌처럼 한 곳에 모여 있다면 어떻게 될까?”
“ 최소한 패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 좋아. 일단 우리 전력에 대한 분석은 거기까지 하고, 이번엔 강호 정세를 살펴보자고.”
연우강의 시선은 대혈마 북청강에게로 향했다.
“ 밀천의 등장은 우리에게 호잽니다.” “ 어떤 면에서 그렇단 말이지?”
“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건 상식입니다. 태상총천주.”
“ 두 호랑이가 싸울 거라는 말?”
“ 그렇습니다.”
“ 호랑이가 두 마리만 있으면 분명 그럴 거야. 북 천주. 하지만 호랑이가 세 마리면 상황이 달라져.”
“ 세 마리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 바로 팔황천이라는 거대한 덩치의 호랑이가 이번에 태어나잖아.”
“ 우리란 말입니까?”
“ 맞아, 북 천주. 여덟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라, 팔황천은 대야벌이나 밀천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거대한 단체가 됐어. 대야벌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지.”
“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 한 산에 사는 세 마리 호랑이가 승부를 가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둘이 힘을 합쳐 먼저 한 마리를 없애는 거야. 그런 다음에 편안한 마음으로 왕 자리를 놓고 격돌하는 거지.”
“ 대야벌과 밀천이 힘을 합쳐 우릴 공격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 그들은 무인이기 이전에 같은 중원인이잖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야.”
“ 으음!”
북청강을 비롯한 일행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 하지만 지난 천오백 년 간 숙원이었던 팔황새가 하나로 통일했는데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겠지?”
“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북청강을 비롯한 천주 일행은 일제히 연우강을 보았다.
“ 금룡요하해 타호요산상!”
연우강은 짧게 말했다.
그의 말은 용을 잡으려면 바다로 가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행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은 곧 대야벌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 그걸 대안이라고 내놓은 겁니까?”
북청강이 버럭 소리쳤다.
“ 왜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 우린 팔황새고, 삼십 년 전에는 대야벌과 전쟁까지 치렀소이다. 대야벌이 우리 적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입니까?”
“ 하지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황천은 대야벌을 창설한 세력 중의 한 곳이잖아. 과거의 천주는 마음이 맞지 않아서 떠났지만 지금 천주는 다를 수가 있는 거야. 더구나 지금은 황천의 지존신물인 혈루까지 있잖아. 그것뿐만이 아냐. 그들은 북해빙궁과 동영의 은밀막부 그리고 포달랍궁에 잠룡쟁패를 보냈어.”
“ 그들과 우리가 융화할 수 있을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 융화?”
“ 그렇습니다.”
북청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걸 왜 하는 거지?”
“ 네?”
북청강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대야벌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단체일뿐이잖아. 황천 또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들어가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을까?”
“ 서, 설사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들이 받아줄 거라고 보는 겁니까?”
“ 물론 과거 같았으면 불가능하지.”
“ 하면?”
“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담대만승은 사면초가에 몰렸고.”
“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해도 그는 대야벌의 벌주요.”
“ 그래서 이곳에 앉아 대야벌과 밀천이 손을 잡고 쳐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
“ 우리가 힘을 하나로 합친 이상 그들도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태상총천주.”
“ 그럼 계속 중원 무인들의 사냥감으로 살겠다는 말이야?”
“ 우리가 사냥감이란 말입니까?”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듯 북청강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 우리 솔직해지자고. 북 천주. 삼십 년 전 장만보 벌주가 팔황정벌에 나선 건 그가 벌주에 오른 걸 탐탁지 않게 여겼던 반대파들의 요구에 의해서였어. 반대파들은 장만보 벌주에게 벌주에 어울리는 능력을 요구했고, 그 결과가 바로 팔황정벌이야.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담대만승은 이런저런 일로 인해 궁지에 몰리자 대야벌 정식 무인들도 아닌 잠룡들을 내보내 이차 팔황정벌에 나선 거야. 명령서의 끝에는 뭐라고 적혔는지 알아? 바로 팔황새 수뇌의 머리를 가져오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돼 있어. 북 천주. 대야벌이 보는 팔황새는 출세를 위해, 또는 대야벌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 이상도 이하도 아냐.”
“ 그런데 그런 자들 밑으로 들어가란 말입니까?”
“ 밑으로 들어가는 게 아냐. 대야벌을 세웠던 황천의 후인으로 정정당당하게 자리를 달라고 요구를 하는 거야. 그런 다음 벌주 자리를 놓고 한바탕 붙어보는 거야.”
“ 일단 네 말은 알아들었으니까, 차후 일은 우리가 상의해 하도록 하마.”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듯하자 야율사은이 연우강을 말렸다.
“ 나는 방법만 제시했을 뿐이야. 나머진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겠지.”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우강의 의견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일단 의논을 해보도록 하시오.”
그렇게 말하고 야율사은은 연우강을 따라나섰다.
팔황천 천주들은 굳은 얼굴로 뗏목을 타고 건너가는 연우강과 야율사은을 보았다.
“ 탁 천주 생각은 어떻소?”
북청강은 이제는 해천으로 개명한 청해천종림 천주 탁불군에게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대야벌로 들어가는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우리가 지금껏 중원 무인들의 사냥감이었다는 건 사실이외다. 북천주.”
“ 대야벌로 들어가자는 말이오?”
“ 내가 알기론 대야벌은 각 세력 간의 전쟁터요. 벌주를 따라는 벌주파가 있고, 그들을 배척하는 반 벌주파, 이쪽에도 서지않고 저쪽에도 서지 않는 중도파들이 있소. 그곳은 주인이 정해진 땅이 아니오.”
“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우린 변황을, 아니 우리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을 수도 있어요, 탁 천주.”
“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수 천주. 하지만 이것도 아셔야 하오. 이렇게 당하고 살다간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줄 땅도 전부 잃을 수 있다는 것 말이오.”
“ 가람존자의 생각은 어떻소?”
북청강은 이번엔 포달랍궁의 가람존자를 보며 물었다.
“ 탁 천주나 수 천주 두 분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외다. 하지만 우리가 대야벌로 들어가 있으면 그들의 사냥감이 될 일은 없을 거외다.”
“ 우리가 대야벌로 들어가는 건, 그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과 다르지 않소이다. 가람존자.”
만독존자 당갈이 가람존자의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 대야벌에는 황실 세력인 황궐도 있고, 구파일방 세력인 무궐도 있소이다. 그들은 대야벌에 속해 있으면서도 독립된 세력이오.”
“ 그래서 대야벌로 들어가자는 말이오?”
당갈 역시 북청강과 같은 질문을 했다.
“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가람존자의 말에 일행은 일제히 입을 닫았다.
여기서 갑론을박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
“ 그런데 그가 왜......”
백마흔은 호수 건너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팔황천을 대야벌로 이끌 복안이 있다는 것인지, 아니 복안도 없다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 어쩌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백마흔은 천리지청술을 펼치며 일행을 살폈다.
다른 이들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차를 마시는 자들도 있고, 찻잔을 들어 올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본인들의 행동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 만일 우리가 대야벌로 들어가겠다고 하면 방법은 있는거냐?”
그때 야율사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주들은 일제히 귀를 기울였다.
“ 들어가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가야 해.”
“ 무슨 소리야?”
야율사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여기 좀 앉을까?”
연우강은 길 옆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여전히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야율사은은 연우강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너 그거 알아?”
연우강은 나무 사이로 드러난 하늘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뭐?”
“ 앵속이나 권력이나 같다는 사실 말이야.”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 일단 들어봐.”
“ 계속 해라.”
“ 우린 군에 있을 때 앵속을 진통제, 진정제, 복통 불면증 등 다양하게 사용했어. 하지만 앵속이란 놈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너무 효과가 좋고 빠르다 보니까 다른 약을 쓸 생각을 안하게 된다는 거야. 앵속은 만병통치약으로 변하고 말았어.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앵속에 중독돼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 문제는 여기서 멈춰야 하는데 멈출 수가 없다는 데에 있어. 아니 멈출 수 없는 게 아니라 앵속이 주는 짜릿함을 죽어도 잊지 못한다는 데에 있지.”
“ 그래서 그걸 시작했던 거냐?”
문득 군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흑랑기로 들어간 지 일 년인가 지났을 때, 녀석은 앵속에 중독돼 마치 보약을 먹는 것처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앵속을 복용하고 있었다.
녀석이 겁탈을 당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다간 언젠가는 미쳐 죽게 될 거라는 말만 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생사결을 시작했다.
“ 앵속을 끊으려고 생사결을 시작한 게 아니라, 더 강한 자극을 원했을 뿐이야.”
“ 미친놈!”
“ 우린 다 미쳤어, 인마. 황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고, 계집에 미치고, 매일매일 먹이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들개처럼, 우리는 미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매고 돌아다녀.”
“ 권력과 앵속이 비슷하다고 한 말은?”
“ 권력은 앵속보다 더 중독성이 심하단 말이다, 사은. 앵속에 미치면 혼자만 망가지면 되지만 권력에 미치면 주변 사람들이 다 망가져. 권력에 미친 자는 자신은 절대 선이 되고, 자신에 반하는 자들은 절대 악으로 생각해. 자신의 생각은 무조건 옳고, 자신이 하는 행동도 무조건 옳아. 일이 잘못되는 건 잘못된 의사결정을 해서가 아니라, 명령을 받는 자들이 잘못돼서 그렇다고 확신하게 돼. 그야말로 자신은 완벽함 사람이 되는 거야.”
“ 담대만승이 그렇다고?”
“ 아냐, 그놈은 아직 그런 상황까진 가지 않았어. 지금 그 상태로 가고 있는 중이야. 만일 녀석이 권력이란 마물에 완전하게 중독됐다면 팔황새는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을 거다. 그들의 선두에는 담대만승이 서 있을 테고.”
“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 담대만승은 얼마 전 범천담대세가를 잃었어. 그 속에는 큰아들인 담대천명이 있었고, 가족도 있어. 만일 네가 담대만승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래?”
“ 우선 범인들이 남긴 흔적을 찾겠지.”
“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 의심이 가는 자들을 잡아서 족쳐야지.”
“ 의심이 가는 자들은 누구누구지?”
“ 화탄이 쓰였으니까 황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이 될 테고, 두 번짼 팔황새가 되겠지.”
“ 그들을 아무리 조사해도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 글쎄... 증거도 없이 황실에 관련된 문파나 팔황새를 치진 않을 것 같은데.”
“ 내가 조금 전 권력에 대해 말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사은. 우리 같은 범인은 절대로 못하는 일을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다.”
“ 증거도 없이 공격한다는 말이냐?”
“ 증거는 공격한 다음에 찾아내야지.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만들어내면 되고.”
“ 그가 우리를 칠 명분을 만들어내기 전에 먼저 들어가란 말이냐?”
“ 바로 그거야. 밀천 개파대전에 담대만승도 참석할 거야. 그 전에 서찰을 먼저 보내서 네 생각을 말한 다음 밀천 개파대전에서 정식으로 말을 해.”
“ 서찰을 먼저 보내라고?”
“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서찰이 몇 번 오가면 불편함이 줄어들잖아. 그런 상태에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거절하는 게 쉽지 않지. 더구나 그에게 이익이 된다면 말이야.”
“ 어떤 이익이 된다는 거지?”
“ 천오백 년 동안 대야벌의 골칫거리였던 팔황새를 대야벌로 병합한 최초의 벌주라는 공적이 항상 이름 뒤에 따라다니게 되잖아. 차기 벌주 자리까지도 원하는 담대만승의 입장에서 보면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 될 거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두 사람은 잠룡 십 조가 머물고 있는 숙소 앞에 도착해 있었다.
“ 언제 떠날 거냐?”
야율사은은 멀어지는 연우강의 등에 대고 물었다.
“ 방패만 만들면 바로 떠날 거야.”
“ 방패?”
“ 쇠는 있겠지?”
“ 응! 있기는 한데, 굳이 방패가 필요해?”
“ 녀석들에게 양손을 쓰는 무공을 전수해 줬거든. 무기와 방패 겸용으로 쓸 수 있는 걸 만들어 주려고.”
“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런데 지금도 매일매일 약을 먹는다고 들었다.”
“ 앵속은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걱정 마.”
“ 그럼?”
“ 그걸 복용하지 않으면 앵속 생각이 간절해지거든.”
“ 아직도 끊지 못한 거냐?”
“ 권력에 대한 탐욕은 죽기 전에는 절대 끊을 수 없는 거야. 앵속도 마찬가지고.”
연우강은 휘적휘적 숲길을 따라 걸어갔다. 야율사은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바라보았다.
“ 절대 먹지 마라!”
숲속으로 사라지는 연우강을 향해 소리쳤다.
“ 아직은 십뢰 한 발이 남았으니까 그런 일은 없을거야.”
“ 자식.”
야율사은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십뢰가 한 발 남았다는 말은 다시 앵속을 찾게 되면 자결하고 말겠다는 뜻이다. 녀석의 말처럼 다시는 앵속에 의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 앵속이라는 게 무슨 소리냐?”
연우강이 거쳐 간 곳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걱정스러운 투가 묻어 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이자승이었다. 야율사은은 빙그레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연우강이 처한 사정은 과거와 많이 달랐다.
그때 녀석 주변엔 흑랑기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의 할아버지 친구라는 이자승이 있고, 신분은 부하인데 하는 행동은 윗사람인 욱일승 일행이 있다.
그리고 은연중에 녀석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궁운화와 수여설, 그들이 있으면 녀석이 앵속의 유혹에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녀석보다 내가 더 걱정이네.”
야율사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편,
이자승은 잔뜩 굳은 얼굴로 연우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연우강과 야율사은의 대화를 듣게 된 건 우연이었다.
처음엔 단순하게 강호 정세를 논하는 걸로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 앵속에 대한 말이 들려온 것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경에 있게 되면 앵속으로 삶을 망친 사람을 자주 접하게 된다.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은 삶을 비관하여,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는 자들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앵속을 복용하곤 하는데, 결국엔 파멸로 끝이 난다.
앵속의 무서움은 앵속을 복용했을 때 나타나는 환각이 아니라 그 중독성에 있다. 한 번 중독되면 영원히 끊을 수 없다고 하여 마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연우강이 그 마약을 복용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약을 먹는 것처럼 꾸준하게.
“ 옛날이야깁니다. 영감님.”
“ 아직 십 년도 지나지 않았다.”
“ 팔 년이면 적은 세월이 아닙니다.”
“ 완전하게 끊었단 말이냐?”
“ 앵속은 많이 복용하게 되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오줌을 갈기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생사결은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싸게 됩니다. 생사결이 주는 느낌에 비하면 앵속이 주는 환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감님.”
“ 완전하게 끊은 걸로 믿겠다.”
“ 제 할아버지께는 비밀입니다.”
“ 알았다, 녀석아.”
이자승은 비로소 얼굴을 풀었다.
“ 그보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뭐냐?”
이자승은 연우강을 바짝 따라붙으며 물었다.
“ 담대만승이 움직일 거라는 말입니다.”
“ 그 첫 번째 표적이 팔황천이 될 거란 말이냐?”
“ 아닙니다. 그는 당분간 팔황천을 그대로 둘 겁니다.”
“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 대야벌이 지금처럼 지상 최강의 단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팔황천 때문이란 말이냐?”
“ 날 강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친구는 적이라고 했습니다. 영감님. 전적으로 팔황천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팔황천이 존재함으로 해서 대야벌이 더 강해진 건 맞을 겁니다.”
“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팔황천이 아니면 그가 어디로 움직인다는 거냐?”
“ 대야벌에 커다란 종기가 자라고 있잖습니까?”
“ 큰 종기라면..... 설마 황궐?”
이자승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 종기는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대야벌을 잡아먹게 된다는 걸 담대만승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 황궐이 황실과 연결돼 있다는 걸 담대만승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자충수가 돼 그의 목을 조일 수도 있다. ”
“ 아닙니다. 영감님. 담대만승에게는 벌내쟁투라는 멋진 명분이 있습니다.”
“ 황궐과 손을 잡고 잇는 문파는 세 곳이나 된다. 그들을 전부 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 전 같으면 그랬을 테지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은 범천조화신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됐고, 범천조화신기의 주인 또한 동창의 이인자인 유설연입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은 담대만승뿐만이 아닙니다. 무궐의 궐주인 검천제 공손정우나 그의 일행도 구룡금창 고양일우가 앞서나가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총 장보다가 황궐로 들어갔다는 소문과 함께 금의위의 남철진도 다른 한 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 그땐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하지만 그 정도 일로 벌내쟁투를 벌이게 되면 담대만승은 정말 궁지에 몰리게 된다.”
“ 그래서 팔황천이 필요한 겁니다.”
“ 맙소사!”
이자승은 입이 쩍 벌어졌다.
조금 전 연우강이 야율사은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팔황천을 대야벌로 병합한 최초의 벌주,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가 없어진 사건을 무마하고도 남을 엄청난 일이 될 것이다.
“ 하지만 사은 그 녀석이 서찰을 보내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죠.”
“ 방금 보낼 수밖에 없도록 해놓지 않았느냐?”
“ 그건 팔황천 천주들 마음이잖아요. 전 절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 도둑놈.”
이자승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별개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결국에 가서는 절묘하게 이어진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광경을 보는 듯하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건지 아니면 운이 따르는 건지 이제는 판단조차 서지 않는다.
“ 하지만 지금부터가 더 문제다.”
“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 우선은 북천지옥부에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피해도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 그건 사실대로 말해야지요.”
“ 북천지옥부의 부주가 네 친구라고 할 거냐?”
“ 그건 속일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친구를 잘 둔 덕분에 아주 대접을 잘 받고 왔다고 할 겁니다. 대접을 받으면서 대야벌로 들어올 의향이 없냐고 넌지시 떠봤다고도 하고요.”
“ 무공은 계속 숨길거냐?”
“ 저는 무공을 숨긴 적 없습니다. 영감님.”
“ 숨긴 적이 없다고?”
“ 네.”
“ 그럼 아는 사람도 없어?”
“ 아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밀천의 천주인 나천후, 소제독 유설연, 잠룡 십 조를 떠났던 거철산, 막장, 무원 영감님과 창노, 염소수염 허일구,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사은 녀석하고 탈라하와 그의 부하들, 그리고 우리 식구들까지, 대충 따져도 백 명이 넘습니다.”
“ 거기서 우리 식구들을 빼면?”
“ 거철산 이놈은 제가 잠룡쟁패를 줘서 잠룡이 된 놈이니까,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할 겁니다.”
“ 일천독행신은 보통 무공이 아니다.”
“ 그것 때문에 윤허에게 들킬 거란 말입니까?”
“ 윤허 그 녀석과 거철산은 의형제를 맺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 설사 말을 한다고 해도 윤허는 당분간 비밀을 지켜줄 겁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 나천후와 유설연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 나천후나 유설연과 같은 경우라고?”
“ 정보는 혼자만 알고 있을 때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는 겁니다, 영감님.”
“ 네 무공이 정보란 말이냐?”
“ 아주 고급 정봅니다.”
“ 그들이 왜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보느냐?”
“ 아직은 제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 네가 필요하다고?”
“ 간단하게 말하면 이용가치가 많다는 겁니다.”
“ 어떤 면에서 그렇단 말이냐?”
“ 저를 비롯한 잠룡 십 조가 지금껏 싸웠던 자들은 대야벌 무인들이었습니다. 영감님. 나천후 입장에서는 대야벌의 화근덩어리인 저를 굳이 제거할 이유가 없고, 유설연 또한 나천후와 같은 입장입니다. 세 명 중 그나마 문제성이 다분한 자가 윤허인데, 경쟁자인 저를 자기보다 더한 강자라고 보고할 정도로 바보는 아닐 거 아닙니까?”
“ 그러니까 알려질 염려는 없다는 말이냐?”
“ 제가 자기네들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크지만 않으면 당분간은 문제없을 겁니다.”
“ 넌 이미 강호 무림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거목이 됐다는 걸 모르느냐?”
“ 그게 무슨 소립니까?”
“ 팔황천 천주를 친구로 두고, 패천림 림주로 있는 막장과는 막역한 상이다. 더구나 야장의 차기 장주이기도 하고, 넌 이미 주목받는 사람이 됐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내 생각은 그렇다.”
“ 그럼 또 방법이 있죠.”
“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냐?”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겁니다.”
“ 옛날이라면?”
“ 팔 년 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영감님.”
“ 팔 년 전이라면 앵속을 말하는 거냐?”
“ 소문만 그렇게 날 겁니다. ‘연우강이 앵속에 취해 있을 땐 절대 건들지 마라, 녀석이 앵속에 취해 있을 때는 괴력을 발휘한다.’ 라는 소문이 강호에 파다하게 퍼질 겁니다.”
“ 그걸 믿을 거라고 보느냐?”
“ 보통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똑똑한 자들은 정확한 근거가 없으면 잘 믿지를 않죠. 그래서 조사를 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연우강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앵속을 탕약처럼 달여 먹고 하루 종일 앵속에 취해 살았던 과거가 나올 겁니다. 증거가 나오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죠. 더구나 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을 먹습니다. 제가 매일 복용하는 약을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부터 앵속쟁이 연우강에 대한 평가는 최하가 됩니다. 강한 무공을 쳘쳐도 앵속의 기운이 떨어지면 끝이라며 무시하죠.”
“ 아직 네 과거가 남아 있단 말이냐?”
이자승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손녀딸인 이지약은 몇 년 전부터 연우강에 대해 조사를 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연우강에 대한 정보는 거의가 삭제되고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한 곳엔 남아 있을 겁니다.”
“ 그 한 곳이 의약전이란 말이냐?”
“ 저는 물론이고 양성일 장군도 의약전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그 사실이 밝혀지면 세상은 너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게 될 거야.”
“ 쿡!”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숙소로 향했다.
“ 그 웃음의 의미는 뭐냐?”
어느새 두 사람은 잠료 십 조가 머물고 있는 숙소 앞에 도착해 있었다.
“ 영감님은 역시 장자방이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 나쁜 자식, 하여간 말을 해도...”
이자승은 연우강의 등을 보며 인상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