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89화 (89/232)

제 7장 여백

온 세상이 모래로 채워져 변화가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조금만 자세히 관찰하면 사막 또한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활동적인 장소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높이 사십 장에 달하는 사구들이 하룻밤 만에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모습은 경이롭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은 길을 찾아 사막을 횡단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온다. 전에 보았던 사구가 사라졌다는 건 곧 그 길을 찾게 해주는 이정표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주변 경관이 아니라 하늘의 별자리로 길을 찾는다.

북천지옥부를 떠난 연우강 일행도 다르지 않았다.

북천지옥부 인물인 탈라하가 있고, 지도가 있었지만 그들은 별자리에 의존하여 길을 잡았다.

그리고 십일월 중순 돈황과 북천지옥부의 중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녹아천에 도착했다.

“ 눈이 와요!”

녹주로 들어서던 남궁운화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 정말이네.”

“ 와아!”

피곤함을 잊은 듯 잠룡들과 노인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같은 현상이라고 해도 장소가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눈을 처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쏟아지는 눈발을 쳐다보았다.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첫눈을 향해 소원을 비는 것일까?

그들의 눈빛은 아득해졌다.

“ 세상에서 여백이 가장 많은 곳이 사막이야. 이곳에서 여백의 의미를 깨닫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 여백의 의미라고요?”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던 남궁운화가 연우강을 보았다.

“ 지금 이 시간과 우리가 서 있는 이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여백으로 남는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에 그림을 그려 가는 건 본인 몫이고요.”

“ 삶의 의미를 말하는 건가요?”

“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내일보다는 오늘을 열심히 살라는 겁니다.”

“ 풍족할 때 잘 먹자는 말?”

전에 연우강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사고는 절약을 중요하게 여기고 힘들 때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부유한 집에서 자라 그런 사고방식이 형성된 걸로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잘못 됐다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됐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부유한 집안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 살기에 최악인 조건을 가진 곳이라는 사막이었다.

“ 돈도, 술도, 권력도, 취하지 않을 정도만 가지면 됩니다.”

“ 연 공자가 생각하는 취하지 않을 정도면 어느 정도죠?”

“ 전 그릇이 크니까 좀 많습니다.”

“ 연 공자 그릇이 크다고, 누가 그래요?”

“ 저지 누구겠습니까,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저처럼 호방하고 대범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연우강은 가슴을 쫙 펴고는 녹주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 킥!”

남궁운화는 피식 웃으며 다시 눈발에 시선을 맞췄다.

삶의 의미가 뭔지, 여백이 뭔지 몰라도 세상을 하얗게 색칠하는 눈이 마냥 좋았다.

“ 야영할 준비해라.”

한동안 그렇게 눈에 취해 있는데 이철상의 목소리가 일행의 상념을 깨웠다.

조원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낙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 부산한 움직임과 함께 유목민들의 숙소인 게르 형태의 천막이 세워지고, 녹주 한쪽엔 모닥불이 피워졌다.

탈라하는 잠룡 십 조 조원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뭘 그리 쳐다보는 거지?”

몸을 씻기 위해 호수로 가던 연우강이 탈라하를 보며 물었다.

“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 풀어져 보인다는 말?”

“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라는 거야?”

“ 그렇습니다.”

탈라하가 잠룡 십 조에 이렇듯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 또한 일천 명의 백의광마군을 거느린 지휘관이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관찰한 잠룡 십조는 단체생활을 하는 자들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군장이라고 불리는 다섯 명을 제외하면 서열도 없고, 직위도 없고, 군기도 없는, 오합지졸이라도 해도 무방할 정도다. 아니 저들은 조직이 아닌 우연히 같은 길을 가다가 친해진 동행처럼 보이곤 한다.

연우강을 부르는 호칭도 다르지 않다. 천주, 조장, 광랑 등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부른다. 그랬던 자들이 명령이 내려지면 백팔십 도로 달라진다.

더불어 잠룡들과 무공을 토론하는 걸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 그들의 행동 또한 특이하기 그지없다.

그들끼리는 대부분 친구들처럼 편하게 말을 놓고 있으면서도 연우강을 대할 때는 제각각이다. 반 공대를 하는 자들, 반말을 하는 자들, 정말로 연우강을 지휘관으로 여기는지 의심스러울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잠룡들처럼 연우강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심지어 연우강 할아버지 친구라는 이자승마저도 연우강을 상전처럼 대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흐트러져 있는 듯함녀서도 내면으로는 질서가 잡혀 있는, 아주 이상하고 특이한 조직이었다.

“ 탈라하가 거느린 백의광마군과 저들의 차이 때문에 그러는 거야.”

“ 어떤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 조직을 구성하는 조직원들의 목적의식에 차이가 있어.”

“ 목적의식이라면......”

“ 백의광마군에 속해 있는 자들은 백의광마군 자체가 목표지만 저들에게 잠룡 십 조는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일 뿐이잖아. 조직에 대한 애착은 약할 수밖에 없어.”

“ 하지만 내면의 힘은 백의광마군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 그것 때문에 그렇구나.”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탈라하의 고민을 알 만했다. 부하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게 되면 개개인의 능력은 향상되지만, 모든 부하들을 참여해야 하는 대규모 작전을 펼칠 때는 오히려 내부 충돌이 잦아진다. 반면에 엄격한 규율로 부하들을 다스리게 되면 대규모 작전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되지만 소소한 작전에서는 약점을 보이게 된다.

그 두가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 아십니까?”

“ 개개인의 능력도 향상시키면서 전체가 참여하는 작전의 효율성도 높이고 싶은 거 아냐?”

“ 그렇습니다.”

“ 그건 조직을 구성한 목적에 따라 달라져야 해.”

“ 구성한 목적이라고요?”

“ 방어를 위한 조직이라면 개개인의 능력보다는 전체적인 작전 수행 능력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공격을 위한 조직이라면 개개인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 그럼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진 조직은 구성하기 힘들단 말입니까?”

“ 모든 조직엔 약점이 있기 마련이야. 탈라하. 나도 전에 흑랑기를 그런 조직으로 만들어보려고 했고, 결국엔 성공했어.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발견됐어.”

“ 어떤 약점이 발견됐다는 겁니까?”

“ 그런 조직은 조직을 이끌어가던 지휘관이 죽으며 바로 외해돼 버리는 약점이 있다는 거야.”

“ 지휘관이 절대적인 장악력을 가지게 되면 그런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말입니까?”

“ 광신도로 이루어진 사이비 종교가 대부분 그렇잖아.”

“ 그렇군요.”

탈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제가 연우강을 신이라고 하였던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흑랑기 대원들에게 연우강은 정천호가 아니라 교주였던 것이다.

“ 가장 좋은 방법은 원나라 명나라가 써먹고 있는 방법이야.”

“ 부대를 잘게 쪼개는 걸 말하는 겁니까?”

“ 맞아, 그 방법이 최고야. 열 명 단위로 쪼개면 총 병력이 천 명이라고 했을 때 백 명만 사이비 광신도로 만들면 되잖아.”

“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자신을 믿으라고, 그보다 안 돌아가?”

“ 중원에 다녀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대야벌?”

“ 그렇습니다.”

“ 북청강 그자들이 동의를 했을 리는 없고...... 우선 대야벌의 의중을 먼저 떠보겠다는 거야?”

“ 대야벌에서 자리를 내준다면 그때 다시 논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 그것도 나쁘지 않군.”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옷을 벗어 놓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의 얼굴에 문득 짓궂은 웃음이 떠올랐다.

“ 별로야.”

그는 혼잣말을 하며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물은 차가웠다.

“ 안 차요?”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연우강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남궁운화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몸을 씻으러 가는 중인 듯, 그녀의 손에는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 둘만 있어도 괜찮겠어요?”

“ 흥!”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북천지옥부로 갈 때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 원래 사막은 물이 태양으로 달궈져 있어 저녁이라고 해도 따뜻합니다. 남궁 소저.”

“ 정말?”

“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습니까?”

“ 아무튼 차면 알아서 하세요.”

남궁운화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연우강을 보다가 위쪽으로 향했다.

‘ 흐흐흐.’

연우강은 음흉하게 웃으며 물로 시선을 준 다음 어뢰를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어뢰에 혈잔수의 기운을 밀어 넣고 천리지청술을 펼치면서 위쪽으로 보냈다.

“ 그걸 뭐 하려고 물어봐요. 손을 담가보면 되는데.”

먼저 호수 위쪽에 도착한 수여설은 다가오는 남궁운화를 향해 타박하듯 말했다.

“ 복수하려고요.”

“ 복수를 한다는 건 무슨 소리죠?”

“ 전에 여기서 언니랑 나랑 알몸을 몽땅 보여줬잖아요.”

“ 그래서 연 공자의 알몸을 보러 갔단 말이에요?”

“ 네.”

“ 아무튼..... 남궁 가주는 재비있는 구석이 있어요.”

“ 안 궁금해요?”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으며 수여설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그녀는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하면 먼저 얼굴에 홍조를 띠고 그 다음엔 숨이 거칠어지는데 지금은 첫 단계였다.

“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전 절대 궁금하지 않다고요. 앞으로도 죽어도 물어보지 않을 거예요. 궁금해할 이유가 없잖아요. 연 공자가 제 남편도 아니고, 잠을 잔 사이도 아니고, 제게 속옷을 팔아먹은 인연밖에 없는데, 궁금해하면 제가 미친 년이잖아요. 그러니까.....”

“ 뒷모습만 살짝 봤어요. 앞은 못 봤어요. 언니. 그러니까 진정하세요.”

수여설의 숨결이 거칠어지자 남궁운화는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 정말이에요?”

“ 네, 언니.”

“ 난 또.”

머쓱해진 수여설은 물가로 걸어가서는 슬쩍 발을 담가보았다.

“ 어때요?”

“ 정말 따뜻해요.”

“ 정말 따뜻하다고요?”

남궁운화는 놀란 얼굴로 물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담가 보았다. 수여설의 말처럼 물에 따스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 호호호! 언니 준비해요.”

남궁운화는 활짝 웃으며 옷을 벗어 던졌다.

“ 어쩌려고 그래요?”

“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 뭘 해보고 싶었는데요?”

“ 홀라당 벗고 물로 뛰어드는 거요.”

“ 그걸 왜 해보고 싶은데요?”

수여설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무한한 자유를 느껴보고 싶을 때는 홀라당 벗고 사막을 뛰어보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사막으로 뛰어갈 수는 없고 대신 물로 뛰어들어보려고요.”

“ 누가 그랬다는 거죠?”

“ 연 공자지 누구겠어요.”

“ 연 공자는 그렇게 해봤대요?”

“ 그렇대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하루나 이틀 정도 사막을 걸어보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듯한 기분이 든대요.”

“ 정말 그럴까요?”

“ 확인해보면 알잖아요. 얼른 옷 벗어요, 언니.”

“ 알았어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훌훌 벗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 때문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벗은 두 사람은 물가에 나란히 섰다.

“ 셋까지 세면 뛰어들어 가는 거예요.”

“ 그래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 하나, 둘, 셋.”

남궁운화와 수여설은 셋까지 센 다음 그대로 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호숫가에서 물까지 떨어지는 시간은 아주 짧은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순간에 수여설은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니 알 수 없는 기운이 밀물처럼 들어와 온몸을 적신다. 그리고 온 몸을 촉촉하게 적신 알 수 없는 기운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엇인가를 휩쓸어갔다.

바로 옷 안쪽에 꽁꽁 숨겨져 있던 허식, 허례, 경쟁, 격식, 예절, 조급함 등 해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이었다.

그것도 다름아닌 무한한 해방감이었다.

“ 호호호!”

아래쪽에 사내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도 잊고 수여설은 크게 웃으며 양팔과 다리를 활짝 벌렸다.

풍덩!

철벅!

‘ 헉!’

‘ 학!’

물속으로 떨어졌던 두 여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뒷골이 땡길 정도로 엄청난 한기가 온몸을 장악하며 한순간에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여설과 남궁운화는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온 물을 꿀꺽꿀꺽 삼키며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 죽여버릴 거야.’

‘ 죽여버릴........’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바닥을 차고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머리를 드러낸 둘은 말과는 달리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새하얀 눈송이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리저리 휩쓸리고, 재주를 넘고, 빙글빙글 휘돌았다. 그 모습이 꼭 춤을 추는 듯하다. 두 여인은 눈이 추는 춤에 푹 취하고 말았다.

“ 아!”

“ 와아!”

탄성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눈은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있었다.

시간이 지워지고 공간이 지워지고, 이윽고 삶이 지워지고 있었다. 둘 다 하얗게 변한 세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간과 공간과 삶이 지워진 하얀 세상.

그것은 바로 삶의 여백이었다.

“ 나쁘지 않아요, 언니.”

남궁운화는 수여설을 보며 활짝 웃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상쾌하다.

짐처럼 늘 어깨에 올려져 있던 가주라는 책임감도,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결심도 눈과 함께 지워져버린다.

이곳을 나서는 순간 그것들은 다시 온몸을 짓누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 저도 그래요. 남궁 가주. 아무래도 용서해 줘야 할 것 같아요.”

수여설 또한 활짝 웃는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 호호호! 물 반죽을 그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네요.”

“ 물 반죽?”

“ 물과 내기를 반죽한 거요.”

“ 그것도 가능해요?”

“ 연 공자는 가능해요.”

“ 마라천력으로?”

“ 네, 마라천력으로 물과 내기를 반죽해 물속에서는 천하무적인 무공을 창안해냈어요.”

“ 전에 땅에서 보여주었던 격산타우와 비슷한 무공인가 보네요?”

“ 그럴 거예요. 우선 씻어요.”

다시 호숫가로 다가가 두 사람은 준비해온 조두를 풀어 물에 이긴 다음 몸을 씻었다. 그런 뒤 삼매진화로 머리를 말리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잠룡들을 비롯한 노인들은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

“ 어서 오너라.”

수여설과 남궁운화가 다가가자 수천월이 웃으며 맞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사이에 장사덕은 접시에 고기 야채 볶음을 건네주었다.

“ 무슨 고기죠?”

“ 오늘은 양고깁니다. 낙타 고기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맛있습니다.”

“ 그래요? 어디.”

수여설은 젓가락으로 고기와 야채를 함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 약간 특이한 맛이 나긴 했지만 맛은 아주 좋았다.

“ 이제 잡랑은 요리사 해도 될 것 같아요.”

“ 흐흐! 그렇지 않아도 조장님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치면 그때부터는 객잔을 해볼 참입니다.”

“ 객잔 열 돈은 있고?”

연우강은 음식을 먹다 말고 물었다.

“ 속옷을 이 년째 입고 있는 데 돈이 어딨습니까?”

“ 이 년?”

“ 들어갈 때 사 입은 거니까 이 년이 되려면 아직 보름 남았습니다.”

“ 그럼 그 뒤로 한 번도 안 갈아입은 거냐?”

“ 속옷을 입지 않으면 허전해서요.”

장사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있는 자들이 슬슬 물러났다.

“ 왜 그래?”

장사덕은 멀리 멀어지는 잠룡들을 멀뚱히 보았다.

“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낙일사검 마장웅이 질린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 마랑 네가 처먹고 있는 그 요리는 이 손으로 만든 거다.”

장사덕은 물러나는 마장웅 앞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 우욱!”

“ 억!”

“ 헉!”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음식이 담긴 접시로 눈을 내렸다.

“ 너 봤냐?”

마장웅이 사후린을 보며 물었다.

“ 못 봤는데, 넌?”

“ 나도 못 봤어.”

고개를 저은 마장웅은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 우리도 못 봤어.”

“ 한 번도?”

“ 식사 끝내고 설거지 할 때 씻는 건 봤지만 그 전에 씻는 건 단 한번도 못봤어.”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장사덕에게로 향했다.

조금 전 장사덕이 고기를 자르던 광경이 떠올랐다.

빙공으로 꽁꽁 얼려온 고기를 꺼내 잘게 자른 다음 양념을 했는데 고기 안쪽까지 양념이 들어가야 한다며, 장사덕은 일다경 이상을 주물럭거렸던 것이다.

“ 음식하기 전에 손은 씻었나?”

잠룡들의 말을 듣고 있던 연우강은 접시를 놓으며 장사덕에게 물었다.

“ 우리 어머니 말씀이 음식은 손맛이라고 했습니다. 광랑.”

이번에는 수여설과 남궁운화를 비롯한 아직 음식이 남은 자들이 일제히 접시를 내려놓았다.

“ 그러니까 안 씼었다는 말이지?”

“ 음식은 손맛이라고...”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장사덕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를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는 자들은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이철상 일행이었다. 그들이 접시에 남은 국물까지 전부 핥아먹은 이유는 설거지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출발하기 전에 화장실 가는 것 같던데, 처리는 뭘로 했지?”

연우강은 다시 물었다.

“ 저야 늘 이 손을......”

“ 개 자식!”

장사덕이 왼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자들의 손에서 암경이 뻗어나갔다.

“ 크아악!”

대여섯 개의 장력에 격중당한 장사덕의 신형이 데굴데굴 굴러 처박혔다.

“ 야! 자식들아! 우리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이놈 저놈 사용한 젓가락보다는 손이 훨씬 깨끗하다고 했단 말이야.”

“ 차라리 죽어 이자식아!”

이철상을 비롯한 잠룡들의 손에서 또다시 장력이 쏘아져 나갔다.

퍼억!

“ 아악! 이 새끼들아! 지금껏 하루에 한 끼는 내가 했는데 먹고 아픈 놈 있었어? 한 놈이라도 아픈 놈 있었냐고? 지금껏 맛있게 잘 처먹고 이제와서.....”

퍼억!

“ 아아악! 그리고 자식들아 난 한 달에 한 번은 속옷을 빨아 입고, 그때 목욕까지 한단 말이야.”

콰앙!

“ 커억!”

급기야 기절한 듯 더 이상 장사덕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 저 잠깐 다녀올게요.”

“ 저도요.”

수여설과 남궁운화가 먼저 일어나 호숫가로 가고, 뒤이어 잠룡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호숫가는 토악질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 나쁜 새끼, 손맛 좋아하네.”

장사덕을 두들겨 패던 이철상 일행이 손을 탈탈 털며 돌아왔다.

“ 어떻게 해놨어?”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며 물었다.

“ 꽂아놨습니다.”

“ 잘했던. 근데 그 말은 맞아?”

“ 뭐가 맞다는 말입니까?”

“ 젓가락보다는 손이 더 깨끗하다는 말.”

“ 조장님!”

“ 물론 깨끗하게 씻은 손과, 객잔에 있는 젓가락을 비교했을 때 하는 말이야. 적어도 내 손 때문에 내가 병 걸릴 일은 없잖아. 그래서 저 아래 천축국 사람들은 전부 손으로 먹는대.”

“ 그렇다고 해도 저놈은 다릅니다. 조장님. 큰일뿐만이 아닙니다. 작은 일을 보고도 손을 씻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손으로 고기를 주물럭거리기.... 우욱!”

이철상을 비롯한 주변에 있던 자들이 입을 틀어막고 다시 호수로 향해 내달렸다.

“ 넌 괜찮은거냐?”

음식을 토하고 온 이자승이 연우강을 향해 물었다.

“ 지금 생각중입니다. 영감님.”

“ 생각 중이라는 건 무슨 소리냐?”

“ 명색이 중원 최고 부잣집이라는 금릉 연씨 세가 아들이고, 수중엔 수백만 냥의 돈이 있는 부자면 이런 경우엔 토해줘야 체면이 서는데.....”

“ 속이 깔끔하다는 말이냐?”

“ 손가락이라도 집어넣을까요?”

“ 됐다. 녀석아.”

이자승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 탈라하.”

연우강은 건너편에 앉아 있는 탈라하를 보았다.

“ 말씀하십시오.”

“ 참으면 병이 된다는 거 알지?”

“ 괜찮습니다.”

“ 똥 묻은 손을 씻지도 않고 고기를 양념했는데, 탈라하.”

“ 우욱! 젠장!”

탈라하 또한 입을 틀어막고 호수로 내달렸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룡들 중에는 하오밀문 출신들만 남아 있었고, 욱일승 일행은 전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욱영감.”

“ 난 상관없으니까 걱정 말게.”

“ 그게 아니고 짐 속에 속옷 남은 거 있는 지 그걸 알고 싶어서 그래.”

“ 아직 남아 있을 거다.”

“ 저 녀석들 전부 줘.”

연우가은 한편에 앉아 있는 하오밀문 제자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 알겠네.”

“ 돈황에 도착하면 좀더 사주고.”

“ 조장님!”

그때 모래밭에서 장사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 저랑 동업하는 게 어떻습니까?”

“ 무슨 동업?”

“ 객잔 동업이지 무슨 동업이겠습니까? 돈은 조장님이 대고 전 튼튼한 몸을 대겠습니다.”

“ 손은 씻을 거냐?”

“ 물론입니다. 조장님. 하루에 세 번씩 꼬박꼬박 씻겠습니다.”

“ 그건 생각 좀 해 보자.”

“ 그럼 저 나가도 됩니까?”

“ 그건 널 꽂아 넣은 사람에게 물어야지, 인마.”

“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조장님.”

“ 그동안 요리하느라 수고했는데 오늘은 푹 쉬어.”

“ 엄청 춥습니다.”

“ 그동안 익힌 무공도 정리 좀 하고.”

“ 입이 얼고 있습니다.”

“ 입이 얼었단다, 교랑.”

연우강은 호수에서 돌아오고 있는 이철상을 보며 말했다.

“ 얼굴까지 묻고 오겠습니다. 조장님.”

“ 동상 걸리지 않게 잘해.”

“ 걱정 마십시오.”

이철상은 사악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 춥지 않습니다. 조장님! 몸에서 열이 펄펄 납니다!”

“ 식사 더 할 사람은 더 하고, 잘 사람은 자도록 해.”

연우강은 호숫가에서 돌아온 잠룡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숙소로 향했다.

“ 주무십시오, 조장님!”

“ 주무십시오.”

잠룡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연우강의 처소는 가장 안쪽으로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바람이 적게 드는 곳이었다.

연우강과 게르를 함께 사용하는 사람은 이자승을 비롯한 욱일승 일행이었다. 연우강이 게르 안으로 들어가자 곧이어 이자승과 욱일승이 따라들어 왔다.

연우강은 궤짝에서 야명주를 꺼내 궤짝 위로 올려놓았다.

“ 차 한 잔 할 텐가?”

게르 밖에 있던 수천월이 연우강을 향해 물었다.

“ 영감들이 마시고 싶으면 찻잔 하나만 더 가져오고 나 때문이라면 마시지 않아도 상관없소.”

“ 자네 잔까지 챙겨 오겠네.”

수천월은 찻주전자를 두는 곳으로 가서는 찻잔과 주전자를 들고 왔다. 안으로 들어온 수천월은 찻주전자를 욱일승에게 건네고는 연우강의 궤짝 안에서 찻잎을 꺼내 찻잔에 나눠 담았다.

그가 찻잎을 담는 사이에 욱일승은 삼매진화로 물을 데웠다.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자 그는 찻잔에 물을 따랐다.

향긋한 다향이 게르 안에 퍼져나갔다.

“ 담대만승이 팔황천을 받아들일 거라고 보느냐?”

찻잔을 건네받은 이자승이 입을 열었다.

“ 전 담대만승이 아닙니다. 영감님.”

“ 만일 네가 담대만승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 옥처인과 양도욱에게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맡기겠습니다.”

“ 맡긴다고?”

이자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욱일승을 바라보았다.

“ 만마림과 사월림은 소제독 유설연 때문에 궁지에 몰린 최악의 상황이 아닌가?”

“ 복수를 하기 위해 네 문파를 공격한단 말이냐?”

이자승의 시선이 다시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섭니다. 영감님.”

“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 이미 유설연은 혼세신마 옥처인과 사월 양도욱을 넘겨달라고 담대만승에게 요구했습니다. 담대만승은 시간을 달라고 했고요.”

“ 그래서?”

“ 시간을 달라는 말은 곧 내보내겠다는 뜻이고 옥처인과 양도욱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려고 그랬는지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이 유설연 손아귀로 들어간 겁니다.”

“ 공교롭게 됐다고?”

이자승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범천조화신기를 유설연에게 건네준 사람은 네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이 공교롭게 됐다고 한다.

“ 유설연이 동정호로 왔으니까 공교롭게 된 게 맞습니다. 영감님.”

“ 좋다. 계속해라.”

“ 아무튼 유설연은 동창 무인들 외에 다른 일꾼을 구한 셈이 됐습니다. 무론 녀석에게는 동창 무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동원하여 만마림이나 사월림을 공격한다는 건 능력 있는 자가 취할 방법이 아닙니다.”

“ 황실이 무림을 핍박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가 있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영감님. 옥처인이나 양도욱도 동창이 직접적으로는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놈들은 일단 강호무림에서 숨어서 시간을 보낸 다음, 동창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풀리면 다시 나올 생각을 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느닷없이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이라는 추격자가 등장한 겁니다.”

“ 그러니까 유설연은 공양일우 일행에게 만마림과 사월림의 처리를 맡긴다는 거구나.”

“ 그렇습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꾼을 얻은 셈이죠.”

“ 그럼 옥처인과 양도욱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구나.”

“ 발등의 불 정도가 아닙니다. 영감님. 목에 칼이 닿아 있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범천담대세가까지 멸망을 당한 상황 아닙니까. 만마림이나 사월림을 도와줄 자들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 그래서 그들이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공격한다는 거냐?”

“ 추격자를 없애는 건 도망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네 문파는 대야벌 안에 있고, 설사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벌내쟁투일 뿐이지 않습니까.”

“ 하지만 그들 실력으로는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없애지 못한다. 물론 벌내쟁투를 싲가하면 대야벌 모든 문파가 나서기는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껏 벌내쟁투가 그래왔다.

제거해야 할 문파가 하나일 때는 나머지 문파들이 들고일어나 동시에 공격을 했다. 공격한 문파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경쟁자를 없앨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즉 공격을 해서 얻는 게 더 많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할 문파가 네 곳이나 된다.

완전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공격한 자들의 피해도 엄청날 것이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판단되면 각 문파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 담대만승을 잊으셨습니까?”

“ 담대만승?”

“ 범천담대세가를 공격한 물건은 화폽니다. 화포는 곧 황실을 말하고요. 하지만 담대만승은 지금껏 자기 가문을 없앤 자들의 흔적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듯 완벽하게 일 처릴르 할 수 있는 곳은 동창이나 금의위밖에 없습니다.”

“ 그가 범천담대세가를 공격한 자들로 동창을 지목할 거란 말이냐?”

“ 명 나라와 전쟁을 할게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순 없죠.”

“ 그럼 어떻게 한다는 거냐?”

“ 이럴 때 필요한 게 말보다 행동입니다. 동창과 관련 있는 문파를 초토화시켜 버리면, 동창은 자동적으로 범천담대세가를 없앤 자들이 되는 겁니다. 담대만승 입장에서는 멋지게 복수를 한 셈이 되는 거죠. 하지만 담대만승이 얻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닐 겁니다. 동창의 끄나풀인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없앰과 동시에 동창에 넘겨줘야 할 옥처인과 양도욱도 한꺼번에 처리하게 되는 거죠.”

“ 앓던 이도 빼고, 종기도 짜는 일석이조구나.”

“ 그렇습니다. 아무리 황실이라고 해도 벌내쟁투까지 간섭할 수는 없으니까요.”

“ 그런 절묘한 수가 있었구나.”

“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된 건 아닙니다.”

“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이냐?”

“ 이 년 동안에 일곱 개 문파가 멸망하게 되면 각 문파의 수뇌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자들은, 자신들 또한 일곱 문파처럼 언젠가는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대야벌을 탈퇴할 구실 찾고 있던 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겠지요.”

“ 대야벌을 떠날 구실을 찾고 있던 자들?”

“ 생사림은 밀천에서 대야벌에 심어둔 세력이었습니다. 영감님.”

“ 정말이냐?”

“ 그들뿐만이 아닐 겁니다. 최소한 몇몇 세력은 대야벌을 탈퇴할 겁니다. 그들을 탈퇴 이유로 수시로 일어나는 벌내쟁투를 들먹일 겁니다. 이번엔 벌주인 담대만승이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 담대만승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팔황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구나.”

“ 제 바람일 뿐입니다.”

연우강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 하지만 네 녀석이 바람은 대부분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지.”

앞으로 진행 상황에 대해 처음 듣는 것도 아니다.

북천지옥부를 떠나기 전에 듣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녀석의 말을 듣게 되면 매번 놀라지만 이번처럼 놀란 적은 없다.

몇 가지 일을 통해 무려 여섯 개 세력이 멸문하게 생겼다. 더불어 그건 최소한으로 잡았을 때 이야기다.

그 싸움에서 죽어갈 무인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만일 이번 일이 연우강 예측대로 벌어진다면 대야벌은 과거 가졌던 힘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될 것이다.

과연 대야벌 역사상, 아니 무림 역사상 한 인물에 의해 그렇게 많은 세력이 몰살을 당한 적이 있던가.

단연코 없었다.

그런데 연우가이 그 일을 해낸 것이다.

“ 이제 반환점에 도착했을 뿐입니다. 영감님.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지금까지 넘었던 산보다 더 높고, 더 가파릅니다.”

“ 하지만 넌 넘어가겠지.”

“ 그럼 더 바랄 게 없고요.”

“ 도대체 네가 원하는 건 뭐냐?”

“ 없습니다.”

“ 목적도 없고, 포부도 없고, 야망도 없으면서 무작정 대야벌과 싸운단 말이냐?”

“ 전 다만 편하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영감님. 그리고 이번 싸움은 제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닙니다.”

“ ......!”

이자승은 할 말이 없었다.

이 년 전 금릉 연씨 세가에 잠룡쟁패를 내릴 때 대야벌 수뇌들은 아주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금릉 연씨 세가에 잠룡쟁패를 내린 건 실수나 잘못된 판단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연우강은 군에 다녀오긴 했지만 부잣집 자식에 불과했고, 그런 녀석이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대야벌 수뇌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여긴 녀석에 의해 대야벌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 그리고 대야벌과 같은 거대 공룡과 싸울 땐 뭔가를 바라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승리에 대한 집착도, 싸움이 끝난 다음도 생각해선 안 됩니다. 그냥, 온몸으로 부딪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둘 중 하나는 끝장나 있을 겁니다. 생사결처럼 말입니다.”

“ 생사결처럼?”

“ 생사결은 운 좋은 놈이 이기거든요.”

“ 그 운이 언제까지 지속될 거라고 보느냐?”

“ 생사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영감님. 생사결을 하는 도중에 운이 다하면 그 놈은 죽습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일행은 출발 준비를 했다.

북천지옥부로 갈 때는 주로 밤에 이동했지만 이제는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져 낮 시간대에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 교랑! 대원들에게 방패를 나눠 줘.”

옷을 챙겨 입은 연우강은 이철상을 향해 소리쳤다.

“ 알겠습니다. 단장님.”

이철상은 대원들을 데리고 가서 낙타 여섯 마리에 실어 두었던 물건을 내려 잠룡들에게 지급했다.

물건을 받아 든 잠룡들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것은 쇠로 돼 있었는데 길이는 한 자 세 치(약 40센티미터), 폭은 다섯 치)15센티미터) 정도였다.

양쪽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보면 육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뾰족하게 만든 위 아래쪽 모서리 부분엔 반 자(15센티미터)에 달하는 창날이 박혀 있었다. 더불어 물건의 배 부분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고리가 달려 있고 그곳에는 가죽끈이 늘어져 있었다.

“ 방패다.”

“ 방패라고요?”

이번엔 잠룡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방패.

병사들에게는 익숙한 말일지 모르지만 무인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다. 과연 무림에 방패를 사용한 무인이 있었던가. 물론 신병록이라는 책에 보면 막아내지 못할 무기가 없다면 방패가 등장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무인들은 방패를 사용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강기의 경지에 오르면 굳이 무쇠로 만든 방패가 아니더라도 강기로 방패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방패를 들었다는 건 무공이 약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비무가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무인들에게 있어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건 비무의 기본이고, 단순한 위협만으로 비무를 승리로 이끌기도 한다.

그런데 방패를 들고 있으면 별것 아닌 자들마저도 우습게 여기기 마련이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게 바로 방패였다.

잠룡들이 황당해 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 창피해?”

“ 방패는 무능력한 자들이 지니는 불필요한 방어구라고 배웠습니다.”

연우강의 물음에 후군의 군장인 유성비검 신도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 배운 거 말고 신랑 네 생각을 말해 봐라.”

“ 지금 당장은 필요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신랑 네가 강기의 경지에 올랐을 때를 말하는 거야?”

“ 그렇습니다. 광랑.”

신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음! 좋다. 간단하게 상황을 설정해보자.”

잠시 생각하는 듯한 연우강은 다시 입을 열었다.

“ 어떤 상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지금 신랑 네가 이 대 일의 비무를 하는 중이라고 가정하는 거야. 비무 상대는 신랑 너보다 약간 실력이 처지는 자들이야. 그럼 첫 번째 질문이다. 이 대 일 비무의 기본이 뭐지?”

“ 먼저 한 명을 처리한 다음 남은 자를 처리하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 신랑 넌 오른편에 있는 자를 먼저 처리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그자를 공격하고 있어. 하지만 상대 또한 너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라서 처리하는 게 쉽지 않아. 어느새 시간은 흘렀고, 너는 상당히 지쳤어. 이제는 반드시 한 명을 없애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으로 변했다고 하자고. 그러다가 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어. 검을 내리긋기만 하면 놈을 없앨 수 있는 그런 기회 말이야. 그런데 남은 한 명의 검이 네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어.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

“ 그건.....”

“ 신랑 네가 취할 방법은 한 명을 없앨 기회를 포기하고 물러나거나, 왼팔을 포기하고 상대를 없애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상황이라면 넌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

연우강은 다시 물었다.

사실 그도 처음엔 잠룡들에게 방패를 만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동정호 지하에서 담대무궁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움직임에 크게 무리를 주지 않는다면 방패를 지니고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었다.

“ 착용하겠습니다. 광랑.”

신도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만이고 오만이다. 내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상대방도 무공을 익히고 있다. 서로 같은 조건에서 싸우게 되면 방어구가 하나라도 더 있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 똥지게가 조장으로 있는 십 조로 들어온 이유가 뭐냐?”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그랬을 거다. 일 년 육 개월 동안 너희들은 지금보다 더 큰 걸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거다. 너희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자만을 버렸고, 내가 최고라는 오만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버린 건 가식이다. 머릿속에는 버린 것보다 더 큰 걸 얻어낼 수 있다는, 나는 다른 잠룡들과 다르다는 확신으로 채워져 있다. 이젠 그것마저 버려라. 너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물질적 무소유가 정신적 소유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까지 완전하게 버리고 나면 너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강이 돼 있을 것이다.”

“ 착용하겠습니다. 광랑!”

잠룡들은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방패를 착용했다.

“ 좋다. 제군들. 너희들은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을 익혔다. 더불어 일천파류흔은 양손으로 펼치는 무공이다. 지금부터 돈황으로 돌아갈 때까지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을 완벽하게 익힌다.”

“ 거, 걸어간단 말입니까?”

장사덕이 해쓱한 얼굴로 소리쳐 물었다.

“ 매일 아침 하는 것처럼 느리게 펼쳐라. 먼저 일천보를 한 시진에 주파한다.”

“ 그건 주파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광랑.”

장사덕의 입에서 볼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 그 다음엔 반시진에 주파하고, 그 다음엔 일 각에 주파하고, 마지막엔 반 각에 주파한다. 진형을 구축하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소리쳤다.

“ 젠장! 흑천전왕군은 선두로 나서라!”

“ 제기랄! 흑천우사군은 우측으로 집합하라!”

“ 아무튼! 흑천좌전군은 좌측으로 집합하라!”

“ 흑천후영군은....”

“ 흑천중앙군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도 잠룡들은 군장들의 명령에 따라 진형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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