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생쥐도 궁지에 몰리면
휘이익!
덜컹! 덜컹!
요란스럽게 덜컹거리는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겨울 바람이 화톳불로 훈훈하게 데워진 실내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린다.
왕철우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쓱쓱 문지르며 창가로 걸어갔다.
해거름 녘ㅂ터 불어대기 시작한 바람은 점점 거세지더니 지금은 미친 듯이 소리마저 질러댄다.
“ 눈이 오려나.....”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동쪽 하늘로부터 먹구름이 잔뜩 밀려오고 있었다.
“ 이런 날에는 전서구도 날기 힘들겠네.”
창문을 닫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춰 선 곳에 안쪽으로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열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왕칠우는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진 널따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커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이 바쁘게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손가락 두께의 대롱들은 사천 각 지역에서 전서구나 전령들을 통해 올라온 첩지들이었다.
왕칠우는 첩지를 정리하고 있는 이들 곁으로 다가갔다.
“ 소식 없는가?”
“ 없습니다. 지부장님.”
맨 오른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대답했다.
코에 홍반이 있어 얼굴이 붉으죽죽해 보이는 그는 하오밀문 사천지부 부지부장 중의 한 명으로, 술이라면 거절하지 않는다고 하여 두주불사로 불리는 마장이었다.
왕칠우를 보는 마장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사천에는 중경과 성도에 두 개의 지부가 있다. 천하제일가인 범천담대세가를 비롯하여 그들과 연줄을 맺고 싶어 하는 강호 무인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곳이라 일감이 많아 두 개의 지부를 두었던 것이다.
이곳 성도 지부와 중경지부는 전서구를 통해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중경지부로부터 소식이 오지 않았다.
“ 대야벌 상황은 어떤가?”
“ 어떤 움직임도 없습니다.”
왕칠우의 물음에 왼편 끝에 있는 일수불퇴 추길이 대답했다.
“ 확실한가?”
왕칠우는 확인하듯 물었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지양해야 할 일이지만 왕칠우는 첩지에 적힌 내용보다 때로는 육감을 더 믿는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정확하게는 중경지부와 연락이 끊길 때부터 육감이 위험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에 들락거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위험 신호 때문이었다.
“ 그렇습니다.”
추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움직임도 없는데....”
저벅! 저벅! 저벅!
문득 위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왕칠우를 보았다. 그들은 내공도 일천하고,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운 적도 없지만 하오밀문에서 수십 년 동안 잔뼈가 굵은 자들이다. 평범한 발자국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왕칠우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계단을 보았다.
상당히 무거우면서도 절제돼 있는 듯한 발자국 소리는 일반 양민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무인이 자신의 출현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내는 발자국 소리였던 것이다. 왕칠우는 얼른 시선을 돌려 발이 가장 빠른 부지부장인 오리무중 적수를 보았다. 왕칠우의 시선을 받은 적수는 잰걸음으로 왼편 구석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그곳에는 위급한 경우에 사용하는 비밀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비밀통로 앞에 멈춰 선 적수는 작은 구멍에 손가락을 끼웠다. 그러고는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저벅! 저벅!
끼이익!
발자국 소리에 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래쪽으로 향하는 작은 토굴이 나타났다. 적수는 재빨리 그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는 통로 문을 닫았다. 위에서 나는 문소리와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라 적수가 들어가는 소리는 전혀 들러오지 않았다.
적수가 안전하게 통로로 들어가자 일행은 태연한 얼굴로 계단을 주시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두 사람이 일행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 있는 사람은 꽤나 커다란 보자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왕칠우의 시선이 사내가 들고 있는 보자기로 향했다.
“ 억!”
부지불식간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자기에서 검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피였다.
“ 누, 누구요?”
왕칠우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한밤중에 찾아온 두 명의 삿갓인.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보자기. 결코 좋은 의도로 찾아온 자들일 리가 없을 터였다.
“ 절혼권 왕칠우. 나이 오십. 부이노가 아들 둘, 딸 한 명이 있음. 직책은 하오밀문 사천지부 성도 지부장. 맞나?”
왕칠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의 목소리에 지독한 살기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 누, 누구냐고 물었.....”
번쩍!
왕칠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파란 광채가 사내의 허리춤에서 튀어나와 왕칠우의 오른팔로 향했다.
스악!
툭!
“ 커억!”
왕칠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왕칠우는 경악한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검을 뽑는 것도 보지 못했다. 다만 실내를 가득 채운 새파란 광채를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오른팔이 어깨부터 잘려나가 버린 것이었다.
“ 지부장님!”
뒤편에 있던 두주불사 마장이 다급히 지혈을 했다.
하지만 왕칠우는 마장이 지혈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 다짜고짜 살수부터 펼치고 보는 양으로 보건대 팔 하나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 질문은 내가 한다, 왕칠우.”
역시 예상대로 사내의 목소리엔 섬뜩할 정도로 진득한 살기가 실려 있었다.
“ 건방진놈. 여기가 어디라고!”
왕칠우 뒤편에 있던 부지부장 한 명이 삿갓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마음이 올곧지 못하다고 하여 표리부동이란 별호를 가지고 있는 유정이었다.
“ 하룻강아지 같은 놈!”
사내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새파란 광채가 허공을 갈랐다.
“ 커억!”
삿갓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던 유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툭!
츄악!
곧 머리가 떨어져 나가며 목으로부터 피가 솟구쳐 올랐다.
“ 단천섬류검법?”
왕칠우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초식을 펼칠 때 나타나는 푸른 광채가 채 사라지기 전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는 가공할 쾌검인 단천섬류검법. 그 검법의 주인은 마악추 천잔성. 철장마도 막장과 더불어 율령궁 천살원 삼대 집행사자라고 불리는 무정마겅 백리자성의 독문검법이었다. 방금 전 펼친 무공은 단천섬류검법의 일 초인 벽월섬이었다.
왕칠우는 멍한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대야벌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조금 전에도 확인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거였다. 그동안 육감이 보내왔던 위험 신호의 정체.
그것은 바로 저들이었던 것이다.
백리자성은 천살원 삼대 집행사자 중 한 명일 뿐 아니라 대야벌 백대고수 서열 삼십구 위에 올라 있는 초강자다. 그리고 보자기를 들고 있는 꼽추 사내 또한 천살원 삼대 고수 중 한 명인 마악추 천잔성일 테다.
이곳에 있는 전부가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자들이었다.
“ 맞네. 왕 대협. 우린 대야벌에서 나왔네.”
계단 쪽에서 나직한 목소리에 이어 삿갓을 쓰고 피풍의를 걸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백리자성 옆으로 서더니 삿갓을 벗었다.
“ 쇄혼권?”
왕칠우는 절망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삿갓을 벗어 던진 얼굴은 천살원 원주 쇄혼권 이청문이었다. 원주인 이청문마저 나섰다는 것은 대대적인 박ㅁ려 작전이 진행 중이라는 의미였다.
“ 나뿐만이 아니오. 왕 대협. 지금 이 순간 사천에 있는 하오밀문 문도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있을 거요.”
“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들을 해친단 말이오?”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왕칠우는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자신들의 그릇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오, 왕 대협.”
“ 우리가 주제넘었단 말이오?”
“ 그렇소.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았더라면 하오밀문의 이름은 계속 유지됐을 거란 말이오.”
“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라는 건 무슨 소리요?”
“ 바람난 계집, 바람난 남편, 집나간 아이, 잃어버린 물건 등을 찾아주는 행태를 말하는 거요. 그 이상은 하오밀문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소.”
“ 그러니까 우리가 정보를 수집하는 게 죄란 말이오?”
“ 그건 아니오.”
“ 그럼?”
“ 대야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죄를 진 거요.”
“ 우린 십 년 전에도, 오십 년 전에도 백 년 전에도 대야벌의 정보를 수집해 왔소이다.”
왕칠우는 버럭 소리쳤다.
“ 혹시 생쥐를 아시오?”
“ 무슨 소리요?”
“ 사람들 대부분은 부엌으로 들락거리는 생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소. 녀석을 잡는 게 귀찮기도 하지만, 요리하다가 떨어지거나 버린 음식을 주워 먹어 오히려 부엌을 청소해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음식을 주워 먹던 생쥐가 새끼를 치게 되면 그 때부터 달라지오.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이게 된다는 거요.”
“ 우리 하오밀문이 생쥐란 말이군.”
“ 생쥐는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도망치는 영리한 짐승이오, 왕 대협. 그리고 범천담대세가를 멸망시킬 만한 힘도 없고.”
“ 그럼 그 일 때문에.......”
“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걸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놔야 할 거요.”
이청문은 왕칠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 우린 털어놓을 게 아무것도 없다. 이청문! 우린 결백하다.”
왕칠우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이청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 지금부터 질문을 하겠다. 왕칠우.”
이청문이 자리를 뜨자 백리자성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 우린 할 말 없다. 백리자성!”
“ 저걸 보면 할 말이 생각날 거다. 왕칠우.”
백리자성은 천잔성을 향해 눈짓을 했다. 천잔성은 들고 있던 보자기를 왕칠우 앞으로 휙 던졌다. 끝을 여미지 않은 듯, 날아가던 보자기가 풀어헤쳐지면서 내용물들이 쏟아졌다.
“ 허억!”
왕칠우를 비롯한 하오밀문 문도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놀랍게도 보자기 안에서 나온 것들은 사람의 머리였다.
“ 수인아!”
바닥으로 떨어진 머리를 살피던 왕칠우의 입에서 절규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 여보! 성아, 유아!”
그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머리 네 개를 끌어안았다. 그 머리는 다름 아닌 집에 있어야 할 부인과 자식들이었다.
“ 이제 말할 준비가 됐을 걸로 보고 질문을 하겠다! 왕칠우, 넌 지난 구월 달에 약 한 달간 이곳을 비웠다. 그때 어딜 갔었는지 말해라.”
백리자성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 큭큭큭! 킬킬킬!”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왕칠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었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구룡객잔에서 잠룡 십조를 접대했던 그 사건.
“ 웃는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왕칠우. 지금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린 하오밀문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생쥐들을 전부 없애기 전까지는 결코 대야벌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설세 네가 이 자리에서 실토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말해주게 돼 있다.”
“ 쿡! 정말 범천담대세가를 향해 포탄을 퍼부은 자가 누군지 알고 싶나?”
“ 반드시 알아낼 거다. 왕칠우.”
“ 핑계대지 마라, 백리자성. 너희들이 강호로 나온 건 범천담대세가를 공격한 범인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자랑을 하기 위해서야.”
“ 잘 아는구나.”
“ 그럼 아주 잘 알지. 너희들 같은 놈들은 강호에도 많거든. 시장통에 보면 건들거리면서 돈을 걷고 다니는 놈들이 있는데, 그놈들도 처음엔 너희들처럼 그래, 약간의 힘을 보여주는데, 그런 놈들을 일컬어 건달이라고 하지.”
왕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리자성을 향해 섰다.
어차피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인데 굳이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 크크크, 재미있는 말이구나.”
백리자성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검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 난 처음부터 범인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설사 범인을 찾아 잡아 죽인다고 해서 멸망한 범천담대세가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미친 짓이거든. 난 다만 새끼를 너무 많이 친 쥐새끼들을 없애고 싶을 뿐이야.”
“ 우리가 쥐새끼면 넌 개새끼야. 담대만승과 우담보의 똥구멍을 핥아주면서 흥분하는 개새끼 말이야.”
촹칠우는 하나밖에 없는 왼손을 뻗어내며 몸을 날렸다. 그가 몸을 날리자 뒤에 있던 자들도 일제히 각자의 무공을 펼치며 두 사람을 향해 쏘아져 갔다.
“ 쥐새끼들!”
번쩍!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푸른 광채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일 초인 벽월섬, 이 초인 벽양섬 그리고 삼초인 벽천섬이 차례로 펼쳐졌다.
철컥!
삼 초를 펼치고 백리자성의 검은 검집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 크윽!”
“ 으윽!”
“ 커억!”
나직한 비명과 함께 왕칠우를 비롯한 여덟 명이 동시에 쓰러졌다.
“ 사실 쥐새끼들에게는 검도 아까워.”
왕칠우 앞으로 다가간 백리자성은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왕칠우는 아직 완전하게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 처, 천벌을 바, 받을 거.....”
파삭!
내기를 잔뜩 머금은 발에 왕칠우의 머리가 박살났다.
“ 쥐새끼들은 밟아 터뜨려 죽여야 하는 거야.”
그는 발을 천천히 좌우로 비볐다.
“ 이젠 너도 미쳐가는구나, 백리자성.”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천잔성은 히죽 웃으며 몸을 돌렸다.
“ 난 대야벌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왜냐면, 대야벌은 내 삶이거든.”
백리자성은 마치 발바닥에 개똥이 묻은 것처럼 이리저리 비벼 피와 살점을 털어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지나 일층으로 올라온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나갔다. 마당도 안쪽과 다르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머리가 잘려나간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 알아낸 거라도 있는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청문이 백리자성을 보며 물었다. 물론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말이 아니었다.
방금 백리자성이 왕칠우에게 했던 말처럼 율령궁 전부가 강호로 나온 이유는 범천담대세가를 공격한 흉수를 찾기 위함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밀천에 가입하거나 하는 잘못된 선택으로 대야벌에 대항하게 되면 하오밀문처럼 초토화될 거라는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다.
하오밀문은 희생양으로 선택된 자들일 뿐이다.
“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원주님.”
“ 그랬군. 천안원 원주를 만나기로 한 곳이 청성산 입구였던가?”
“ 그렇습니다.”
“ 가세.”
세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몸을 날렸다.
성도를 떠난 세 사람이 성도 북쪽에 위치한 청성산 입구에 도착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유선을 마나기로 한 곳은 청성산 입구 마을에 천안원의 안가였다.
안가는 도교 사원과 비슷한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안가 앞에 당도한 이청문 일행은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곧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갔다.
“ 율령!”
담 아래쪽으로 내려서자마자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싸늘한 살기가 포위하듯 덮쳐왔다.
“ 진천하!”
이청문은 나직이 대답했다. 그러자 살기가 사라지며 나무 사이에서 검을 든 자가 걸어 나왔다.
“ 어서 오십시오. 원주님.”
“ 원주는?”
“ 조금 전에 기침하셨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사내는 음양뇌 유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 어서 오시오, 이 원주.”
차를 마시고 있던 유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일행을 맞았다. 세 사람이 앉자, 유선을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 어떻게 됐소?”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르고 난 그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 하오밀문 성도지부는 사라졌소이다. 유 원주.”
“ 수고 하셨소, 이 원주.”
“ 다른 곳은 어떻소?”
이청문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보고서가 올라와 봐야 알겠지만 사천에 서식하는 생쥐는 완벽하게 박멸된 것 같소이다.”
“ 다음은 어디요?”
“ 감숙성을 정리한 다음 섬서, 호북, 호남, 강서, 안휘, 하남, 산서, 하북, 상동, 강소, 절강 순으로 진행할까 하오.”
유선의 말에 이청문은 한편에 걸린 지도를 보았다. 섬서성은 사천성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고, 호북은 동쪽 그리고 호남은 남동쪽에 인접해 있다.
즉 진행 방향은 북쪽에서 남으로 훑고 내려오는 형태였다. 그런 다음 다시 호남의 동쪽에 위치한 강서성에 들렸다가 북으로 올라가면서 안휘성, 하남성, 산서성을 처리하고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면 하북성이다.
누운 갈 지 자 형태로 중원을 휘젓고 다니겠다는 복안인 것이다.
“ 기간은 얼마나 걸릴 걸로 보시오?”
“ 일 년 정도로 잡고 있소이다.”
“ 한 달에 한곳씩 정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 그렇소. 이 원주. 정신없이 움직여야 하오.”
“ 우리가 쉴 수 있는 안가는 전부 몇 개나 되오?”
“ 휴식 때문이오?”
“ 그렇소. 유원주. 쉬지 않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휴식은 필수요. 그렇다고 잔뜩 긴장한 채로 쉴 수는 없지 않소.”
이청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밀문이 아무리 하찮은 문파라고 해도 쉬지 않고 작전을 펼치게 되면 지칠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별것 아닌 공격에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휴식을 취할 때 최대한 쉬어줘야 할 터였다.
“ 그럼 열흘에 한 번씩 쉴 수 있도록 해주시오.”
“ 알았소. 열흘 거리마다 한 곳씩 안가를 설치하도록 하겠소.”
“ 그럼 우린 좀 쉬겠소.”
“ 안내해 드리게.”
유선은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 알겠습니다. 원주님.”
고개를 꾸벅 숙인 장한은 이청문 일행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이청문 일행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유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 생쥐 박멸 작전이라..... 아주 잘 지었어.”
그는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를 보며 중얼거렸다.
‘ 생쥐 박멸 작전’은 이번 작전명으로 직접 지은 명칭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유선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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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겨울은 을씨년스럽다.
오가는 상인들로 넘쳐나던 거리는 텅 비고, 매일 밤 화려한 불빛으로 돈황을 밝히던 야시장도 불이 꺼진다.
돈황을 거쳐 서역으로 떠나거나, 중원으로 들어오는 상단은 시월을 기점으로 줄어들다가, 십일원이 되면 뚝 끊긴다. 겨울의 사막이 인간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을씨년스러움을 뚫고 기이한 소성이 모래바람에 숨어 돈황으로 찾아온다. 마치 누군가가 울부짖는 듯한 그 소리는 돈황 남쪽에 위치한 명사산에서 흘러나온 소리다. 사막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울부짖음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그 소리는 돈황의 밤을 더욱 적요하게 한다.
모래가 뒤섞인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연우강 일행은 명사산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돈황으로 들어섰다.
“ 새롭네요.”
남궁운화는 생경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텅 빈 거리와 주변으로 늘어서 있는 가옥들에서는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늑함이 전해져온다.
“ 어떻게 새롭다는 거죠?”
수여설은 남궁운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과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얼굴은 그대로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급증을 지운 차분한 얼굴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삼 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에 남궁운화는 몸도 마음도 한 단게 더 성장해 있었다.
“ 말로 표현하긴 힘들어요.”
“ 아마 여유일 거예요.”
“ 여유라고요?”
“ 삶의 여유 말이에요.”
“ 그런가요?”
남궁운화는 어색하게 웃었다.
삶의 여유라는 말과 자신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 점점 틀이 잡혀가는 것 같아 보기 좋아요.”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일행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교랑!”
앞서가던 연우강이 이철상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광랑.”
“ 먼저 객잔을 알아 봐.”
“ 어디로 잡을까요?”
“ 천불루로 가봐.”
천불루는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머물렀던 곳으로 돈황에서 규모가 큰 객잔이었다.
“ 알겠습니다. 광랑.”
이철상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길을 따라 몸을 날렸다.
“ 나도 잠시 다녀올 때가 있으니까 먼저 들어들 가 있어. 두 영감은 궤짝 주고.”
두작군 앞으로 걸어간 연우강은 두작군이 메고 있던 궤짝을 받아 등에 걸머졌다.
“ 어딜 간다는 거냐?”
“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래.”
“ 만날 사람?”
“ 여긴 중원이야, 두 영감.”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갔다.
“ 무슨 말이죠?”
연우강과 두작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남궁운화가 수여설을 보며 물었다.
“ 현실로 돌아왔다는 뜻이에요.”
“ 전쟁터로 들어왔다는 말인가요?”
“ 그래요, 남궁 가주.”
“ 그럼 연 공ㅈ는 전쟁을 도와줄 누군가를 만나러 간 거군요?”
“ 아마도.......”
수여설은 조금 전 연우강이 달려간 길로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여설의 말대로였다. 쉬지 않고 대로를 내달린 연우강은 돈황 중심부에 위치한 유곽 지대로 들어섰다. 객잔을 비롯한 야시장들 대부분이 문을 닫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곽은 여전히 화려한 불빛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유곽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서 잠시 서성이고 있는데 귓전으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하오밀문 문주 허일구였다.
[ 길을 따라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꺽어지는 길이 있네.]
연우강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십여 장 가량 걸어가 오른쪽으로 나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 지하로 나 있는 계단이 있을 거네.]
연우강은 허일구의 지시에 따라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전음을 받고 나서야 연우강은 허일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연우강은 궤짝을 내려놓고 그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허일구를 만날 때마다 조심하곤 하지만 다른 날과 달리 유난스러워서 하는 말이었다.
“ 얼굴도 이상하고.”
연우강은 허일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자위는 거무튀튀하고 볼은 홀쭉 들어가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공공수 허일구 하면 바로 떠올랐던 특징인 염소수염도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초상을 치르고 난 사람 같은 행색이었다.
“ 왕칠우가 죽었네.”
“ 왕칠우면, 전에 구룡객잔에서 만났던 그 사람?”
“ 그렇네. 왕칠우뿐만 아니라 사천지부에 소속 문도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전부 죽임을 당했네.”
“ 무슨 소리야?”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하오밀문은 그야말로 무림 최하위 문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누군가가 공격한단ㄴ 것 자체도 말이 안 되는데, 그들의 가족까지 해쳤다니.
“ 율령궁이 강호로 나왔네.”
“ 율령궁이 강호로 나왔다는 건 무슨 소리야?”
“ 천법원, 천안원, 천살원 전원이 강호로 풀렸다는 뜻이네.”
“ 가족까지 없앤 걸 보면 우연히 시비가 붙어서 하오밀문 문도를 없앤 건 아니란 말이군.”
“ 생쥐박멸 작전이라고 하더군.”
“ 생쥐 박멸 작전?”
“ 놈들은 우리 하오밀문의 씨를 말릴 작정을 하고 나섰네.”
“ 하오밀문의 씨를 말리는 작전이라......”
뭔가 생각할 게 있는 듯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골목길, 지하통로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이곳으로 왔지만 허일구가 머물고 있는 곳은 큰 길 가에 있는 삼 층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다.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큰 길 가에는 유곽의 창녀들이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 이유가 뭘까?”
그들을 내려다보던 연우강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 대야벌에서 하오밀문을 없애려고 나선 이유를 말하는 건가?”
“ 응!”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네.”
“ 범천담대세가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 그건 말도 안 되네. 범천담대세가를 공격하는 건 화약을 쥐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상황이네. 미친놈이 아니면 그 일을 할 리도 없을뿐더러, 설사 우리가 했다고 떠들고 다녀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네.”
“ 맞아. 그런 일은 나처럼 미친놈만 할 수 있는 거지. 그럼 왜 하오밀문을 공격하는 걸까. 가족까지 없애는 건 원한에 사무친 자들이 아니면 하지 않는 짓이잖아.”
“ 그래서 답답하다는 거 아닌가.”
“ 그럼 이건 어때?”
“ 뭘 말인가?”
“ 하오밀문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 생쥐 박멸 작전을 시작했다는 가설 말이야.”
“ 주범은 따로 있고, 우린 공범이란 말인가?”
“ 바로 그거야.”
생각이 정리된 듯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 어떻게 우릴 공범으로 만든단 말인가?”
“ 그 전에 먼저 정리부터 해보자고. 염소수염 영감도 조직의 대장인까 눈엣가시 같은 놈이란 말을 알 거야.”
“ 없애긴 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내가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자를 말하는 거 아닌가.”
“ 눈에 박힌 가시를 뽑기는 해야 하는데, 가시를 뽑다가 실수라도 하게 되면 눈을 잃게 되지.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일은 여간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
“ 계속해 보게.”
“ 영감 옆에 눈엣가시 같은 놈이 있고, 반드시 없애야 하는 데 방법이 없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겠지.”
“ 바로 그거야 영감. 하오밀문은 눈엣가시를 없애는 방법 중의 하나야.”
“ 무슨 소린가?”
“ 지금껏 하오밀문에서 파악한 대야벌 상황에 대해 먼저 읊어봐.”
“ 밀천의 개파대전이 임박한 상태고,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는 유설연 손에 들어갔고, 만마림과 사월림을 쫓아내야 하고,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네.”
“ 그 모든 걸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하오밀문에게 있어.”
“ 우리 하오밀문이 그렇게 대단한 문파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
허일구는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하지만 대야벌은 지상 최강의 단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하오밀문을 없애 해결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하오밀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조직이다. 그런 조직이기에 대야벌에서는 생쥐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 아냐, 영감. 사람이나 물건의 가치는 항상 상대적이야. 이 사람이 봤을 땐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될 수도 있어.”
“ 우리 하오밀문이 그렇단 말인가?”
“ 대야벌의 입장에서 봤을 땐 그래.”
“ 어떤 면이 그렇단 말인가?”
“ 우선은 조직이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다는 점이야. 그 말은 곧 율령궁 천살원 집행사자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살겁을 자행할 수 있다는 뜻이 돼.”
“ 살겁을 자행한다는 건 무슨 말인가?”
“ 율령궁 놈들의 목표는 하오밀문 문도들뿐이 아니라는 거야.”
“ 그럼?”
“ 밀천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거나 들어가려고 마음먹고 있는 놈들까지 전부 죽는다는 뜻이야.”
“ 개파한 밀천으로 들어갈 여지가 있는 자들을 미리 없애고 다닌다는 말이군.”
“ 그렇지. 죽이고 나서 하오밀문과 관련돼 있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 하지만 하오밀문이 범천담대세가 멸망 사건에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네.”
“ 좋아. 그럼 내 질문에 대답해 봐. 한 명은 심검의 경지에 오른 고수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삼류야. 두 사람이 우연히 객잔에서 만났는데 함께 술을 마시다가 무공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심검의 경지에 오른 고수는 자신의 무공을 시험한답시고 삼류에게 심검을 펼쳐 죽여버린거야. 그때 마침 객잔 문을 열고 일단의 무인들이 들어왔어. 그 무인들은 삼류 무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 삼류가 심검 경지에 이른 고수를 모욕해서 싸움이 일어났을 거라고 한단 말인가?”
“ 맞아. 누가 됐든 심검의 경지에 오른 자가 자신의 무공을 시험하기 위해 삼류를 없앴다고 하진 않아. 삼류가 잘못을 저질러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증거도 마찬가지야. 증거는 나보다 강한 놈이거나, 강하진 않더라도 건들였을 때 후환이 두려운 놈을 없앨 때나 필요한 거야. 나보다 약하더나 죽이고 나서 돈 몇 푼 쥐어주면 끝나는 그런 놈들에겐 증거 같은 건 필요없어. 그리고 사람들이란 묘해서 엄청나게 강한 놈이 상대도 안 되는 놈을 쳐 죽였을 때, 죄의 유무에 대한 판단에서 신중해지기 마련이야. 그러다가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으면 약한 놈이 강한 놈을 모욕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해 버리지. 심검 고수가 삼류 무인을 죽인 것처럼 말이야.”
“ 우리 하오밀문도 그럴 거란 말인가?”
“ 맞아. 율령궁 집행사자들이 하오밀문 문도를 없애고 다니게 되면 처음엔 의아하게 여길 거야. 그러다가 문도들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없앤 사실을 알게 되면 ‘왜’라는 의문을 갖게 돼. 그 왜라는 의문은 결국엔 범천담대세가 멸망 사건과 연결이 되는 거야.”
“ 대야벌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릴 범천담대세가를 친 흉수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군.”
“ 하지만 하오밀문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건 대야벌도 알고 강호 무인들도 알지.”
“ 진짜 흉수는 따로 있고 우린 그들을 도와준 세력이 되는 거고.”
“ 아마 중간에 하오밀문 수뇌 중 누군가가 범천담대세가를 쳤다는 사실을 자백했다고 공포할 거야. 주모자는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였다고 말이야.”
“ 세상에......”
허일구는 제 처지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
“ 그, 그럼 벌내쟁투가 벌어질 거란 말인가?”
그는 쫓기듯 물었다.
“ 벌내쟁투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어. 그 벌내쟁투의 빌미를 제공하는 곳이 하오밀문이 될 테고.”
“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말이군.”
“ 내게 방법이 있는데, 해볼 거야?”
“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 궁지에 몰린 쥐가 주로 써먹는 방법이지 뭐.”
“ 궁지에 몰린 쥐가 써먹는 방법이라면?”
“ 고양이를 물잖아.”
“ 고양이를 문다고?”
허일구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잖아.”
“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 지상 최강의 단체라는 대야벌이 무림 제일 밑바닥에 위치해 있는 하오밀문을 없애려고 율령궁 무인을 내보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잖아.”
“ 그래서 대야벌과 전쟁을 하자고?”
“ 대야벌이 아니라 율령궁이야.”
“ 율령궁 무인들은 만오천 명이네.”
“ 만오천 중 천살원 집행사자는 이천 명이고, 천안원 밀정은 팔천, 천법원 밀정은 오천 명이지.”
“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소릴 하는 건가?”
“ 그렇다고 앉아서 마냥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는 거 아냐?”
“ 으음!”
허일구는 신음을 내뱉었다.
연우강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하오밀문의 문도 대부분은, 점소이, 창기, 기녀, 마부 등 직업을 가지고 있다. 즉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자들이란 소리다. 그런 자들에게 도망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싸울 건지 도망칠 건지 선택은 영감이 해.”
“ 만일 싸우겠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 그건 싸우겠다는 결정이 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봐야지. 굳이 시작하지도 않은 싸움을 준비할 이유가 없잖아.”
“ 그렇군. 다른 할 말은 없는가?”
“ 두 가지 소문이 필요해.”
“ 어떤 소문 말인가?”
“ 팔황새가 팔황천으로 통일됐다는 소문 하나와.”
“ 정말 그들이 통일됐단 말인가?”
“ 북천지옥부 부주 야율사은이 총천주로 등극했어. 그 소문과 더불어 팔황천이 대야벌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소문을 함께 내면 돼.”
“ 대야벌로 들어가겠다는 건 무슨 소린가?”
“ 그들은 황천의 후예잖아.”
“ 그러니까 황천의 후예 자격으로 대야벌로 들어가겠단 말인가?”
“ 응, 그리고 두 번째 소문은 나에 대한 거야.”
“ 자네에 대한 건?”
“ 내가 앵속을 약처럼 달여 먹었던 앵속쟁이였다고 소문을 내 줘.”
“ 앵속쟁이?”
“ 응! 그것만 내 주면 돼.”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궤짝을 둘러맸다.
“ 그 소문을 믿을 거라 보는가?”
“ 보통 앵속쟁이들이 평생 동안 복용하는 양보다 더 많은 앵속을 일 년 반 동안 처먹은 놈에 대한 거니까 믿을 수밖에 없을 거야. 아무튼 대충 소문을 내 줘. 갈게.”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