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96화 (96/232)

제 5장 저 새끼!

[ 언니, 제가 해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잖아요. 이번엔 언니가 좀 나서봐요.]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수여설은 앞서가는 연우강을 흘끔거리며 남궁운화에게 전음을 보냈다. 객잔에서 이틀을 더 머물고, 담대무궁을 필두로 잠룡들은 객잔을 나섰다. 잠룡 십 조 또한 그들을 쫓아 맨 후미에 처져 따르는 중이다.

사실 지금 잠룡 십 조 조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연우강이다. 느닷없이 돌기 시작한 앵속쟁이라는 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고, 아침에 일어나면 연례행사처럼 연웅강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 아래에 진 그늘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모습을 본 남궁운화가 급기야 앵속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와 입맞춤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어떻게 해보라고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언니는 연 공자가 앵속에 중독된 채로 폐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 그걸 바랄 리가 없잖아요.]

[ 그럼 왜 못 한다는 거예요?]

[ 그러니까 저보고 연 공자와 입맞춤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 연 공자는 환자잖아요. 언니. 환자를 치료하는데 부끄러운 게 어디 있어요. 일단 살려놓고 봐야 하잖아요. 오늘 아침엔 먹은 걸 토하기까지 했단 말이에요.]

남궁운화가 이성을 잃을 것처럼 수여설을 다그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음식을 먹게 해보려고 일부러 그를 끌어다 놓고 반 협박을 해가면서 음식을 먹게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담대무궁 일행이 보고 있는 데서 음식을 전부 토하고 말았다.

눈이 확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수여설을 끌어들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앵속에 중독된 사람의 치료제 입맞춤이라고 누가 그래요?]

[ 약은 장복해야 효과를 본다는 말도 몰라요?]

수여설은 멍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일단 연 공자가 앵속에 관심을 끊도록 하는 게 치료의 첫걸음이라고 했어요.]

[ 첫걸음이라는 건 무슨 말이죠?]

[ 남녀 관계가 그렇잖아요. 어느 정도 친해지면 손을 잡고 그 다음엔 입맞춤을 하고 그리고 나서는.......]

[ 그리고 나선?]

[ 잘 알면서 뭘 물어요.]

[ 그와 잔다는 거예요?]

[ 앵속 중독을 치료하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잖아요.]

[ 앵속 중독을 치료한다는 건 핑계 같은데요?]

수여설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 피, 핑계는 무슨 핑계요. 전 다만 연 공자가 걱정돼서.....]

[ 그럼 섭섭해요. 남궁 가주. 그래도 우린 서로에 대한 비밀이 전혀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전면을 보며 무심히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짓굳은 미소가 물려 있었다. 지금 말은 남궁운화를 떠보기 위한 거였다.

[ 그,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수여설의 말이 심각해지는 듯하자 남궁운화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수여설은 다시 말을 이었다.

[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급한 성격 때문에 친구를 한 명도 사귀지 못했어요. 항상 외톨이였죠. 만일 대야벌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골방에 틀어박혀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이렇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겠죠.]

떠보기 위해 한 말이지만 수여설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여설이 유일하게 편하게 말을 하는 사람은 남궁운화, 몽요, 이지약이다. 그리고 그들 세 명 중 가장 친하게 지낸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운화였다. 물론 몽요가 떠난 다음 거의 모든 생활을 남궁운화와 함께하여 그런 것도 있지만, 남궁운화도 어린 시절에 외톨이로 자라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다가 목욕을 함께 하고 등을 밀어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밀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수여설은 곁눈질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저는 그냥 연 공자가 앵속을 끊을 수만 있으면......]

[ 같이 자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 연 공자는 저의 은인이고 남궁세가의 은인이잖아요.]

[ 단지 은인이라는 것 때문에, 자겠다는 거예요?]

[ 그, 그것도 있고.... 전 연 공자가 좋아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 호호호! 남궁 가주는 속이기가 너무 쉬워요.]

수여설은 목까지 뒤로 넘기며 크게 웃어젖혔다.

[ 이, 일부러 그런 거라고요?]

남궁운화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여설을 보았다.

[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 언니!]

남궁운화는 손톱을 바짝 세우며 수여설을 흘겼다.

[ 남궁 가주가 연 공자를 좋아하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그건 그렇고 입맞춤으로 앵속 중독을 치료한다는 그 해괴한 방법은 누가 가르쳐준 거죠?]

[ 자승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 정말요?]

수여설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조금만 관찰하면 이지약이 연우강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자승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렸을 테고, 할 수만 있다면 손녀딸과 연우강을 맺어주고 싶어할 것이다. 더구나 남궁운화는 어른의 말이라면 쉽게 믿어버리는 순진한 아이가 아닌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남궁운화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그렇다니까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확하게 뭐라고 했는데요?]

[ 앵속을 잊게 해줄 수만 있다면 치료도 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사랑도 방법 중의 하나라고요.]

[ 그런가?]

수여설은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사실 그녀도 앵속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다만 중독되면 고치기 힘들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것에 관심을 쏟게 하여 앵속 중독을 치료하는 방법은, 약간 해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 할아버지께 물어볼까?’

그녀는 시선을 돌려 수천월을 보았다.

“ 멈춰라!”

그때 전면에서 담대무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 여기가 어디지?”

연우강은 장사덕에게 물었다.

“ 저 계곡을 지나면 보계입니다.”

“ 저기가 계곡이야?”

연우강은 전면을 보았다. 계곡이라고 하기보다는 절벽 사이에 난 길이라고 해야 할 듯했다.

“ 용산의 꼬리라고 하여 용미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 용미곡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위하가 있고 위하 아래쪽으로는 진령산맥이 있습니다.”

“ 그 걸로는 저 녀석이 이곳에서 멈춘 이유가 설명되지 않잖아.”

“ 보계만 지나면 서안까지는 탄탄대로라고 보면 됩니다.”

“ 그러니가 저곳이 전략적 요충지란 말이네?”

“ 고대 삼국시대 때 이곳 주변이 최대 격전지였다고 합니다.”

“ 지도는?”

“ 준비해두었습니다.”

장사덕은 가슴을 탁 쳤다.

연우강은 장소를 이동할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게 지도다. 그래서 그곳이 어디가 됐든 객잔에 머물게 되면 가장 먼저 앞으로 가야 할 곳의 지도를 챙기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천수에 도착하자마자 지도를 먼저 챙겼고, 섬서성 각 지역의 지도는 품속에 들어 있었다.

“ 각 조장들은 이쪽으로 모여라!”

또다시 담대무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지역부터 살펴 봐.”

연우강은 그렇게 말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다른 조장들은 이미 담대무궁 주변에 모여 있었다.

“ 우리 앞에 적이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연우강이 옆으로 오자 담대무궁은 일행을 보며 말했다.

난주에서 미적댈 때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라 놀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누가, 어느 정도 병력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한 얼굴이었다.

“ 밀천인가?”

윤허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렇네. 윤 형. 밀천의 무인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네.”

“ 수괴가 누군지 알 수 있나?”

“ 전에 생사림 림주였던 유명계가 섬서성에서 목격됐다고 하네.”

“ 그럼 그란 말인가?”

윤허를 비롯한 조장들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마수귀의 유명계.

비록 대야벌을 떠났지만 그는 대야벌 백대고수 서열 십오 위에 올라 있던 강력한 고수였던 것이다. 더불어 그가 이끄는 생사림 무인들 또한 벌내쟁투에서 살아남은 강자들이 아닌가. 너무 강한 자들과 싸우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섰다.

“ 작전은 어떻게 돼죠?”

듣고 있던 이지약이 물었다.

“ 이곳은 용미곡과 장곡, 두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소.”

“ 장곡이라면 손바닥 형태란 말인가요?”

“ 그것뿐만이 아니라 단지곡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소. 이 소저. 이곳 지형은 이렇게 생겼소.”

담대무궁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구불구불 이어진 선을 먼저 그리고 끝에는 둥근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원에서 다시 앞에 그린 것보다는 덜 구부러진 선을 그리더니 맨 끝에 작은 원을 그렸다.

“ 여기서 여기까지를 장곡이라고 하오.”

담대무궁은 큰 원에서 작은 원 사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따.

“ 알았어요.”

손바닥 계곡이란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지만 차차 말해줄 거라고 여기고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적의 본진이 있을 만한 곳이 두 곳이오.”

담대무궁은 큰 원과 작은 원을 차례로 짚었다.

“ 거기도 이름이 있나요?”

“ 과거엔 큰 원은 대삼합평이라고 불렸고, 작은 원은 소삼합평이라고 불렸소.”

“ 과거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죠?”

“ 오십 년 전 지도에만 그렇게 표시돼 있고, 지금 지도엔 이름이 없소.”

“ 좋아요, 계속 하세요.”

“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장소는 이 지점이오.”

담대무궁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대삼합평 근처였다.

“ 만일 계곡 입구를 틀어막고 절벽 위쪽에 매복을 두게 되면 우린 꼼짝없이 당하게 되겠군요.”

“ 그렇소. 이 소저.”

“ 해결책은 있나요?”

“ 우리는 삼 대로 나눌 참이오. 일 대는 용미곡을 따라 이동하고, 이 대와 삼 대는 용미곡 양측 절벽 위쪽으로 이동해 매복해 있는 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앤 다음 대삼합평으로 진격할 거요.”

“ 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겠군요.”

“ 그렇소. 난 이번 작전을 위해 낭인 삼백 명을 샀소이다.”

“ 치밀하군요.”

“ 치밀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곳이 무림이오. 이 소저.”

“ 그렇군요. 그럼 조는 어떻게 나눌 거죠?”

“ 일 조와 사 조는 일 대, 이 조와 삼 조는 이 대, 칠 조와 구 조, 십 조와 삼백 명의 낭인은 삼 대가 될 것이오.”

“ 삼 대가 계곡을 따라 가야겠군요.”

“ 그렇소.”

“ 적의 본진이 소삼합평에 있어도 같은 작전을 펼칠 거예요?”

“ 여긴 그렇게 할 수가 없소이다.”

“ 왜죠?”

“ 대삼합평에 소삼합평으로 가는 이 길은 용미곡처럼 계곡길이 아니라 낭떠러지 위에 나 있는 길이기 때문이오.”

“ 낭떠러지 길이라고요?”

“ 그렇소. 좌우 측이 낭떠러지로 돼 있소.”

“ 낭떠러지 길의 폭은 어느 정도죠?”

“ 이 장 정도라고 들었소.”

“ 그럼 소삼합평으로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잖아요.”

이지약은 얼굴을 찌푸렸다. 길의 폭이 이 장 밖에 되지 않는다면 입구만 틀어막고 있으면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곳에서 작전을 펼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 물론 이 그림 상으로 보면 그렇소.”

“ 다른 길이 있다는 말이군요.”

조금 전 담대무궁이 과거엔 삼합평이라고 불렸다고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삼합평이란 말은 세 가지가 합쳐지는 걸 의미하는 말이 아닌가.

이지약의 예상대로였다. 다.”

“ 여기와 여기에 이렇게 길이 있소.”

담대무궁은 대삼합평과 소삼합평 사이에 위쪽과 아래쪽에 타원을 그렸다.

“ 지도에서 길이 사라진 이유가 뭐죠?”

“ 중간에 끊어진 곳이 생기는 바람에 양민들은 다닐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소. 그래서 사라진 거요.”

“ 계속 하세요.”

“ 만일 적의 본진이 대삼합평이 아니고 소삼합평이라면 절벽 위로 진입했던 대는 이 숨겨진 길을 따라 소삼합평으로 갈 거요.”

“ 우린 시간을 끌어야겠군요.”

“ 소삼합평에 있는 적이나 삼 대는 같은 조건이오. 삼 대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겠지만 그들 또한 나올 수도 없는 입장 아니오.”

“ 낭떠러지에 매복을 둘 수도 있잖아요.”

듣고 있던 연우강이 끼어들었다.

“ 낭떠러지의 경사가 수직으로 알고 있다. 연우강.”

“ 매복이 없을 거라고?”

“ 매복을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는 뜻이다.”

“ 좋아, 계속해.”

“ 계속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 결정이 남았다.”

“ 무슨 결정?”

“ 임무를 맡을 건지 그걸 결정하라는 거다.”

“ 하 소협과 이 소저의 의견을 들어보고.”

연우강은 구 조 조장인 천리추혼객 하정일과 이지약을 턱으로 가리켰다.

“ 어떻게 하겠소? 바꿔달라면 바꿔 주겠소.”

담대무은 이지약과 하정일을 번갈아 보았다.

“ 이번 작전은 상화간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오. 전면은 우리 구 조가 맡는다고 해도 좌우 측은 칠 조와 십 조가 맡아야 하는데, 솔직히 난 십 조에게 측면을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소.”

“ 십 조와 함께는 작전을 못하겠다는 말이오?”

“ 그렇소. 담대 소협.”

하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소저는 어떻소?”

“ 난 상관없어요.”

“ 이번 작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제외시킬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네, 하 소협.”

“ 그래도 안 되오. 담대 소협.”

“ 끄응!”

담대무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동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작전을 짰다. 그 결과 최선의 계책으로 선택된 방법이 연우강과 이지약ㅇ르 선봉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사실 잠룡 십조를 이번 작전에 넣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생사림의 유명계가 이끄는 무인의 수가 이천여 명에 가깝다는 정보가 왔다. 앵속쟁이가 조장이라고 해서 뺄 상황이 아니었다.

“ 아무래도 윤 형 자네와 바꿔야겠네.”

담대무궁은 윤허에게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 그렇게 하지.”

윤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내 의견은 안 물어보는 거냐?”

연우강은 담대무궁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하 소협이 싫다고 하는 사람은 앵속쟁이인 너다. 연우강. 넌 의견을 개진할 처지가 아니다.”

“ 그건 아니지. 내가 저놈을 싫어할 경우도 생각해 봐야지.”

연우강은 다시 하정일을 턱으로 가리켰다.

“ 지금 놈이라고 했느냐?”

하정일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손잡이를 잡았다.

“ 기분 나빠?”

연우강은 하정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 이번 작전만 아니었다면 네놈의 목을 잘랐을 거다. 연우강.”

하정일은 연우강을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 두 영감. 이 새끼가 날 죽이겠다는데?”

연우강은 뒤편에 있는 두작군을 향해 소리쳤다.

“ 어떤 후레자식이 우리 밥줄을 없앤다고 했단 말인가?”

휙!

두작군은 잔뜩 살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며 몸을 날려왔다.

“ 너냐?”

몸을 날려 오는 도중에 이미 검을 뽑은 듯, 두작군은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하정일을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하정일은 움찔 한 걸음 물러났다.

“ 너냐고 물었다. 놈.”

두작군의 검 끝에서 투명한 광채가 하정일이 물러난 거리만큼 솟아 나왔다.

“ 헉!”

하정일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자신 또한 검강을 펼치는 경지에 올라 있다. 하지만 검강의 길이는 마음대로 조정할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눈앞의 영감은 아무렇지도 않게 검강을 발출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너무도 쉽게 길이까지 조정한 것이다.

전에 저들에 대한 소문이 대야벌에 돈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소문은 검강보다 한 단계 높은 검탄강기를 구사하는 고수들이라고 했었다. 그때는 피식 웃고 말았는데 지금보니 그 소문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무인이 아닌 것처럼 솜옷을 걸친 눈앞의 노인은 자신보다 더 강자였던 것이다.

“ 주둥일 함부로 놀리지 마라, 놈. 한 번만 더 우리 밥줄을 모욕하면 네놈의 목을 치는 건 물론이고 천무비고와 승천비고에 불을 싸질러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 허억!’

하정일은 목까지 치밀어 올랐던 비명을 급하게 삼켰다. 설마 노인의 입에서 승천비고와 천무비고에 대한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을 앞에 있는 노인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정일, 침착해라.]

바로 그때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하정일은 급하게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 얼굴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시선의 주인을 보았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 빌어먹을....’

하정일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검을 뽑아서 노인에게 덤벼라, 정일.]

또다시 전음이 들려오자 하정일은 뒤쪽으로 훌쩍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았다.

차앙!

“ 노인장은 날 모욕했소!”

하정일은 검으로 두작군을 겨냥하며 소리쳤다.

“ 그래서 해보겠단 말이냐?”

두작군은 피식 웃었다.

“ 난 천리추혼객 하정일이오. 이름도 없는 노인에게 모욕 받을 그런 사람이 아니외다.”

“ 그래? 그럼 한 번 놀아보자꾸나.”

두작군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 노선배. 지금은 우리까리 싸울 때가 아니외다.”

두작군의 검에서 다시 검강이 솟구치자, 담대무궁이 말리고 나섰다.

문득 대야벌에서 받았던 첩지 중 하나의 내용이 떠올랐다. 만우량 군사로부터 직접 온 그 첩지에는 연우강 곁에 있는 자들이 지옥에 수감됐던 무인들일지도 모르니 예의주시하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보자 정말로 그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지금껏 잠룡 십조가 승승장구하였던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이번에도 힘 좀 써주시오. 노인장.’

담대무궁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들이 지옥에 수감됐던 전대 고수들이라면 이번 작전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작전이 끝나갈 무렵에 죽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당장은 반드시 있어야 할 자들이었다.

‘ 어쩌면 저들을 없앨 고수를 따로 보냈는지도 모르겠군.’

“ 싸울 때가 아닌 건 네 사정이지. 난 내게 매달 오십 냥씩 주는 밥줄을 잃고 싶지 않구나.”

두작군은 여전히 검으로 하정일을 겨냥하며 말했다.

“ 장난은 그 정도면 됐어. 영감. 그리고 궤짝 줘.”

“ 클클클! 저 녀석 잔뜩 겁먹은 것 좀 봐라. 저런 걸 조장이라고 모시는 놈들이 불쌍하구나.”

두작군은 하정일을 향해 낄낄대더니 궤짝을 벗어 연우강에게 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 하 소협, 그만 검은 집어넣도록 하게.”

검을 뽑은 채 두작군을 노려보고 있는 하정일을 보며 담대무궁이 나직이 말했다.

“ 좋소. 담대소협. 작전을 위해 참겠소.”

하정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집어넣었다.

“ 자, 그럼 윤 형과 하 형을 바꾸는 걸로 하고 정리하도록 합시다.”

“ 아직 내 의견은 말하지 않았다, 담대무궁.”

“ 의견이라고?”

“ 저 자식과 이 소저 그리고 윤 형에게도 물어봤으니까, 내게도 물어봐야 공평하잖아.”

“ 하고 싶은 말이 뭐냐?”

“ 나도 윤 형은 싫어.”

“ 시, 싫다고?”

담대무궁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나마 제 녀석과 친분이 있는 거 같아서 윤허를 붙여 주었다. 그런데 싫다니.....

“ 응!”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누구와 하고 싶은 거냐?”

“ 저 새끼가 아니면 안 해.”

연우강은 한 편에 서 있는 하정일을 턱으로 가리켰다.

“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담대무궁은 버럭 소리쳤다.

“ 난 저 새끼가 아주 마음에 들어.”

“ 유명계가 데려온 무인의 수가 자그마치 이천 명에 육박한다. 자칫 잘못하면 우린 이곳에서 몰살당한다. 연우강!”

“ 이천 명?”

“ 그렇다.”

“ 그럼 우린 빠질게.”

연우강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 이건 빠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연우강. 대야벌 벌주님의 명령이다.”

“ 난 명령서를 받은 적 없는데?”

“ 정말 빠지겠단 말이냐?”

“ 우리까지 합친다고 해도 기껏 오백 명 정돈데, 그 인원으로 이천 명을 상대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 차라리 남쪽이나 북쪽으로 우회해 대야벌로 돌아가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라고.”

“ 우린 대야벌 잠룡이다. 대대야벌 무인이 밀천 무인이 두려워 피한단 말이냐?”

“ 심십육계 주위상도 병법의 한 가지로 알고 있는데, 아냐?”

“ 만일 이곳에서 도망치면 우린 전부 대야벌에서 퇴출당함은 물론이고 앞으로 무림에서 활동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 응!”

연우강은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개자식.’

담대무궁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야망이 있는 놈 같으면 어떻게 해 볼 터인데, 놈은 처음부터 대야벌 무인이 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놈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 잠룡 십 조 조원들은 놈과 생각이 다를 거네. 그들을 이용해 보게.]

내심 고민하고 있는데 사유성의 전음이 들려왔다.

담대무궁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사유성의 말처럼 놈은 대야벌에 관심이 없을이지 모르지만 잠룡 십 조 조원들은 다를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 난 잠룡 십조 조원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다. 연우강.”

담대무궁은 후미로 걸음을 옮겼다.

“ 물론 물어봐야지.”

연우강은 담대무궁을 따라 뒤편으로 향했다.

“ 이미 말을 들었을 테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이번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면 큰 상을 주기로 벌주께서 약속을 했네.”

“ 무슨 보상을 해주기로 했단 말입니까?”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예의바른 청년으로 돌변하는 장사덕이 정중한 어투로 물었다.

“ 백대고수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함은 물론이고, 설사 백대고수에 들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단주급 이상의 직위를 주기로 했네.”

“ 나쁘지는 않는 조건이군요. 하지만 우린 명령서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담대 소협. 그 말은 곧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과 통하지요.”

“ 나 담대무궁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네.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거네.”

“ 그렇다고 해도 조장이 있는데 우리끼리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장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 빌어먹을 자식들.’

담대무궁은 속으로 욕설을 흘리면서 연우강을 돌아보았다.

“ 네 이름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

“ 방금 그랬잖아. 네 이름을 건다고.”

“ 난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연우강.”

“ 그럼 네 목을 걸어. 우리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면 네 목을 잘라서 주는 걸로 말이야.”

“ ......!”

담대무궁은 연우강을 쏘아보기만 할 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백대고수에 도전할 자격을 준다거나 단주 급 이상의 직위를 보장하겠다는 말은 명령서에 없다.

하지만 유명계를 비롯한 이천의 적을 없애고 나면 그 정도 보상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한 말인데 녀석은 목을 들고 나온 것이다. 마땅히 해줄 말이 없었다.

“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실질적인 보상은 어때?”

“ 실질적인 보상?”

담대무궁은 미간이 찌푸러졌다.

“이곳까지 오면서 낭인을 구했잖아. 그자들에게 일인당 오십 냥씩 준 것 같은데....”

“ 도, 돈을 달란 말이냐?”

담대무궁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그놈들이 받은 금액의 열배면 될 것 같아.”

“ 오백 냥이나 달라는 말이냐?”

“ 우린 전부 칠십 명이야.”

“ 삼만 오천 냥이나?”

“ 지금 가진 돈이 없어도 안 할 거고, 나중에 준다고 해도 우린 안 할 거야.”

“ 그 정도로 많은 현찰을 가지고 다닐 사람은 없다.”

“ 보석도 받아.”

“ 개자식!”

연우강을 노려보던 담대무궁은 조장들과 상의를 하기 위해 앞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담대만승은 전표와 보석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가져와 연우강 앞에 던졌다.

“ 얼마야?”

“ 전표는 삼만 냥이고, 나머진 보석으로 채웠다.”

“ 가짜는 없겠지?”

“ 직접 확인해라.”

“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전문가는 아지만 보석에 대해 약간 조예가 있거든.”

연우강은 주머니 안에서 보석을 꺼내 감정하는 것처럼 하나씩 햇빛에 비춰보았다. 전부 햇빛에 비춰 본 뒤 보석을 주머니 안에 넣어서는 전표와 함께 두작군에게 던졌다.

“ 칠 대 삼이야.”

“ 누가 칠이냐?”

두작군은 전표와 보석을 보며 물었다.

“ 내가 칠이라면 안 간다고 하겠지?”

“ 물론이지.”

“ 그럼 내가 삼 해야지, 뭐.”

“ 그렇다고 해도 네 몫은 만오백 냥이다. 도둑놈아!”

“ 원래 세상이 그런 거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담대무궁을 돌아보았다.

“ 이제 된 거냐?”

“ 아냐,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어.”

연우강은 조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 뭐가 남았단 말이냐?”

“ 저 새끼!”

연우강은 턱으로 하정일을 가리켰다.

담대무궁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과 하정일은 이곳 말고는 대화를 난누 적도 없고 특별한 악연을 맺은 것도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더구나 하정일이 이끄는 구조보다는 윤허의 이 조가 더 강하다.

그런데 녀석은 하정일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 집착이네.’

앵속쟁이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인 과도한 집착의 포기 증상이다.

‘ 미친 놈!’

담대무궁은 피식 웃으며 하정일 곁으로 다가갔다.

“ 아무래도 자네가 해야겠네.”

“ 대신 내가 지휘를 하겠네.”

하정일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 돈을 걷을 때 잠룡 십 조가 반드시 있어야 이번 작전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냥 고집을 세울 수만은 없었다.

“ 그건 세 사람이 상의해서 알아서 정하게.”

또다시 지휘권을 두고 다툼이 일게 될까봐 담대무궁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정리를 해버렸다.

“ 대삼합평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이번엔 윤허가 물었다.

“ 직선 거리는 십 리지만 실제 거리는 백 리 가량 되는 걸로 알고 있네. 그리고 대삼합평까지는 좌우 측에 절벽을 둔 오르막길이고, 대삼합평 다음부터 좌우 측이 낭떠러지면서 내리막길이네.”

“ 특이한 지형을 가진 곳이구먼.”

“ 그런 셈이네.”

“ 자네 생각엔 어디가 더 좋을 것 같은가?”

윤허의 물음에 담대무궁은 소삼합평을 가리켰다.

“ 우린 미끼가 된 셈이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정일이 기분 나쁜 얼굴로 투덜댔다.

“ 우리 앞을 가로막은 자는 이천 명이네. 지금 상황에서 미끼라는 말을 한다는 건 날 무시하는 셈이 되는 거네. 하 소협.”

담대무궁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네, 담대 소협. 난 다만 상황이 그렇다는 것뿐이네.”

하정일은 슬쩍 발을 뺐다.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마지못해 하는 것보다 자발적으로 나서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 따라줘서 고맙네. 하 소협, 넌?”

고개를 끄덕인 담대무궁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난 저 새끼만 있으면 돼.”

연우강은 하정을 향해 턱짓을 했다.

하정일은 연우강을 노려보며 주먹을 지그시 말아쥐었다. 한동안 그렇게 노려보고 있다가 짓씹듯 말했다.

“ 잠룡 십 조가 선봉이다. 연우강.”

“ 그렇게 하지 뭐.”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곡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어디 가는 거냐?”

“ 선봉에 서러면 정찰은 기본이잖아. 둘러보고 올 테니까 앉아 쉬든지 잠을 자든지 알아서 해.”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 언니, 따라가요.”

멀어지는 연우강을 지켜보던 남궁운화가 수여설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 방해만 될 텐데 뭐 하러 따라가요.”

“ 가는 게 우릴 도와주는 거예요, 언니.”

“ 무슨 소리에요?”

수여설은 황당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의아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언니는 궁금증이 심해지면 돌아버리잖아요. 전 언니의 빙하빙백강에 맞아죽기 싫으니까 차라리 연 공자를 따라가는 게 나아요.”

“ 맞네.”

“ 따라가는 게 낫겠습니다. 수 소저.”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북천지옥부에서 연우강이 벌이는 생사결을 보다가 물 속에서 기절했다는 말을 들은 탓이었다.

“ 아,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수여설은 불쑥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는 허공을 밟으며 빠르게 나아갔다.

“ 허공답보?”

“ 엄청나네.”

수여설의 무공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던 다른 잠룡들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특히 각 조 조장들은 경악한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허공답보.

최소한 삼 갑자의 공력을 지녀야만 펼칠 수 있는 신법이 아닌가. 그 신법을 수여설이 자유롭게 펼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척!

잠룡들이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수여설은 연우강 옆으로 내려섰다.

“ 쉬는 게 낫지 않아요?”

연우강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남궁 가주가 오래 살고 싶대요.”

수여설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 오래 살고 싶다는 건 무슨 소리죠?”

“ 전 궁금증이 목에 차면 돌아버리는 성격이잖아요.”

“ 제가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 걱정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 걱정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인생을 잘 살았다는 표시라고 하더군요.”

“ 그럼 지금까지는 인생을 잘 살았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아요.”

“ 지금까지?”

“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 그런가?”

[ 공격 시간은 내일 저녁이다, 연우강. 그 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그때 귓전으로 담대무궁의 전음이 들려왔다.

“ 알았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무슨 소리죠?”

“ 담대무궁 그놈이 수 소저의 무공에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천리전음을 보내 무공 자랑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 뭐라고 했는데요?”

“ 수 소저와 재미나게 놀다가 내일 저녁에나 돌아오랍니다. 그런데 먹을 건 챙겨왔어요?”

“ 그 안에 있지 않나요?”

수여설은 연우강이 지고 있는 궤짝을 가리켰다.

“ 음식을 넣을 일이 없잖습니까?”

“ 두 할아버지가 잔뜩 넣어두는 것 같던데요.”

“ 그랬어요?”

“ 네.”

“ 그럼 그걸로 요기를 하면 되겠네요. 일단 가죠.”

두 사람은 어느새 계곡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 멀리서 볼 때완 다르네요.”

수여설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서 볼 때는 절벽 사이가 좁고 바닥은 편평해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바닥은 경공을 펼치기 힘들 정도로 울퉁불퉁하고, 곳곳에 어른 키보다 더 큰 바위들이 널려 있다. 계곡의 폭 또한 오장이나 됐다.

그녀가 바닥을 살피고 있는 동안 연우강은 좌우 측 절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 저 정도면 이십 장은 되겠죠?”

연우강은 절벽을 가리켰다.

절벽은 직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다. 중간중간에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올라가거나 내려가려면 굳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어두운 밤이라면 오르고 내리는 게 쉽지 않을 듯 했다.

“ 절벽에 매복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 그럴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바닥과 좌우를 살피며 걸어갔다. 계곡은 하염없이 오르막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계곡이 왼편으로 급격하게 꺾였다.

“ 얼마나 왔죠?”

“ 오 리 가량 온 것 같아요.”

“ 이러다가 어두워지겠습니다. 속도를 내도록 하죠.”

“ 그게 낫겠어요.”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는 듯 하자 연우강과 수여설은 경공을 펼쳐 나아갔다.

계곡은 처음 들어왔던 입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아갈수록 절벽은 높아지고, 경사는 더욱 가팔라졌다. 그렇게 십리를 내달리자, 계곡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계곡은 북쪽 길보다 더 길어 십오 리 가량 됐다.

그러고는 다시 방향이 북쪽으로 바뀌었는데 오르막은 여전했지만 절벽의 높이는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 저 같으면 공격의 시작점을 여기로 잡겠습니다.”

연우강은 좌우를 보았다.

절벽의 높이는 십여 장 가량이고, 튀어나온 바위나 나무가 많아 위에서 내려오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 바닥도 평평해요.”

“ 아무래도 이곳은 날이 밝을 때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우강은 좌우를 살피며 걸었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살을 엘 듯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쉴 곳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북으로 향하던 길이 다시 남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와서야 두 사람은 절벽 아래쪽에서 움푹 들어간 곳을 발견했다. 그 정도면 바람을 피하며 바밤을 보낼 수는 있을 듯했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 상당히 깊네요. 물도 흐르고 있고요.”

수여설은 놀란 얼굴로 절벽 아래쪽을 가리켰다. 연우강은 수여설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절벽은 안쪽으로 들어가며 비스듬히 경사져 있었는데 그 아래쪽으로는 시커먼 어둠이 깔려 있었다.

“ 동굴인 것 같습니다.”

“ 그럼 바람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네요.”

“ 그럴 것 같습니다.”

연우강은 궤짝을 내려 안에서 야명주를 꺼냈다.

두 사람은 거의 앉은 자세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와!”

안으로 들어간 수여설은 탄성을 흘렸다.

짐승이 사는 단순한 동굴이 아니었다. 야명주 불빛으로 끝까지 닿지 않는 아주 넓은, 광장을 방불케 하는 동굴이었다. 연우강과 수여설은 야명주로 길을 밝히며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거의 사오백 장 걸었을까, 갑자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 나왔다.

“ 이곳에 다른 입구가 있나 보네요.”

수여설이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그런 것 같습니다.”

연우강은 야명주를 앞으로 비춰보았다. 그러자 울창한 수풀이 시야에 잡혀 들었다. 연우강은 수풀을 좌우로 헤치고 고개를 내밀었다.

“ 재미있는 곳이네요.”

연우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 왜요?”

수여설은 연우강 고개 옆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계곡 길과 다른 널따란 평원이 한눈 가득 들어왔다. 커다란 바위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평원은 가운데로 갈수록 낮아지는 분지 형태였다.

“ 대삼합평입니다.”

“ 화산이 폭발해서 만들어진 지형이군요.”

이제야 절벽 옆에 생성된 특이한 동굴의 비밀을 알겠다는 듯 수여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 화산이 폭발하면 저런 지형이 만들어지는 겁니까?”

“ 저기 대삼합평이 분화구라면 이해가 쉬워요. 저곳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거예요. 그러다가 지진이 나는 바람에 용미곡은 양측에 절벽이 있는 계곡으로 변하고 장곡은 낭떠러진 길로 변했을 거예요.”

“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모양입니다.”

“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책이라도 봐야 시간이 가잖아요.”

“ 그렇군요. 아무튼 수 소저는 잠을 잘 장소를 찾아보세요.”

연우강은 야명주 하나를 수여설에게 건넸다.

“ 어떤 장소를 찾아야죠?”

“ 바람이 들지 않으면서 바닥이 흙으로 돼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 알았어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을 살피며 동굴 벽을 따라 이동했다.

수여설이 잠자리를 찾고 있는 사이 연우강은 낫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가 풀을 베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몇 번 풀을 베어 적당히 쌓아놓고는 이번엔 마른 장작을 주워 날랐다.

제법 장작이 쌓이자 그는 나갈 때 사용했던 통로를 다시 원래대로 해놓은 다음 마라천력으로 풀과 나무를 뭉쳐서는 야명주 불빛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연우강은 수여설이 멈춰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고른 장소는 동굴 벽이 방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 바닥은?”

“ 흙이에요. 그런데 저 풀은 다 뭐죠?”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을 주워온 건 알겠는데 풀을 어디에 쓸는지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 이부자립니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발을 들어 바닥을 굴렀다.

쿠웅! 쿠웅! 쿠웅!

“ 여자 알몸을 구경하는 수법이네요.”

흙이 들썩거리자 과거 기억을 떠올린 수여설은 피식 웃었다.

“ 지뢰라는 무공입니다.”

자리를 이동하며 발을 구른 그는 이번엔 마라천력으로 흙더미를 들어 올려 한편으로 치웠다. 그러자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 저 안에 풀을 집어넣고 자근자근 밟아주면 아주 멋진 이인용 관이 만들어질 겁니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구덩이 안에 베어온 풀의 절반을 집어넣고 골고루 폈다.

“ 이인용 관이라고요?”

수여설은 슬쩍 얼굴을 찡그렸다.

“ 부상을 당한 녀석들은 특별히 신경 써서 잠자리를 만들어줍니다. 가능하면 바람이 들지 않게 구덩이도 깊이 파고, 풀도 많이 집어넣죠. 그런 다음엔 앵속을 먹이고 재웁니다. 녀석이 아침까지 살아있으면 앵속과 음식 그리고 물을 바로 옆에 두고 떠나고, 숨을 쉬지 않으면 구덩이를 팠던 흙으로 다시 덮습니다.”

“ 그래서 관이라고.....”

그녀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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