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98화 (98/232)

제 7장 그를 노리면 반드시 죽는다

“ 우...하!”

“ 우.....하!”

살기를 가득 머금은 함성은 섬광처럼 어둠을 뚫는다.

어둠을 헤치고 절벽에 와 닿은 함성은 곧 방향을 틀어 동쪽을 향해 내달렸다. 그 함성이 채 멀어지기도 전에 다른 함성이 뒤를 쫓았다.

“ 우...하!”

“ 우.....!”

쿵! 쿵!

함성에 이어 바닥을 다지는 강한 발자국 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 발자국 소리 또한 절벽을 타고 멀어지면 한순간에 계곡 안쪽은 정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 우.....하!”

“ 우....하!”

정적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오고 그것들은 일제히 어둠과 절벽을 타고 동쪽으로 날아갔다.

“ 으음!”

어둠을 노려보던 유명계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용미곡이 끝나는 지점, 즉 대삼합평 초입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전부터 들려오는 기합 소리는 절벽 벽을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공격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 존재를 알린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짓이다. 어떤 다른 의도가 개입돼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명계가 신음을 내뱉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하지만!”

유명계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새카만 광채를 흘리고 있는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등까지 완벽하게 감싼 그것을 유명계는 생사수갑이라고 이름 붙였다. 손가락을 잃은 후 쇠로 제작한 수갑이다.

하지만 수갑에 만들어진 손가락은 따로 움직일 수가 없다. 잘려나간 부위가 한 마디, 아니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각각의 손가락이 따로 움직이겠지만 불행히도 손가락 끝 부분에서 잘려나가 쇠로 만든 손가락은 무기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 이젠 의원이 아니라 무인이 됐다. 연우강.”

손가락을 잃으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침을 놓을 수도 진맥을 할 수도 없게 됐다. 하지만 그 덕에 얻은 것도 있었다. 생사수갑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고, 팔 성까지 익히고 있던 생사절맥수도 완성을 보았다.

더불어 대야벌을 나갈 때 가지고 나갔던 천마삼경 중 혈잔수와 흑마수도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기 전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것이다.

“ 네놈의 맥을 끊어주겠다. 연우강. 아니 네놈들은 이곳에 전부 죽게 될 것이다.”

휙! 휙! 휙!

바로 그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오며 세 사람이 유명계 앞으로 날아 내렸다.

그들은 과거 생사림 총관인 신수 강사인과, 생환대 대주 마수 장립 그리고 무사대 대주 생사침 유기령으로 그들 세 사람은 벌내쟁투에서 살아남아 의림으로 찾아온 자들이었다.

“ 놈들이 진입해 오고 있습니다. 림주님.”

유명계를 쳐다보는 강사인의 얼굴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시진 전에 전격적으로 작전이 변경된 탓이었다. 원래는 좌우 측 절벽 위에 삼백 명씩, 중앙엔 사백 명이 매복하기로 했고, 남은 일천 명은 삼백여 명씩 나눠 대삼합평에 매복하기로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좌우 측의 매복은 철수시키고 중앙만 남겨둔 것이었다. 작전이 변경된 상황을 매복하고 있는 부하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다.

“ 새로운 작전을 하달하겠다.”

유명계는 바닥에 뭔가를 그렸다. 그것은 대삼합평부터 소삼합평까지 이어지는 지도였다.

“ 우리가 놈들을 없앨 장소는 여기, 여기, 여기다.”

유명계는 북쪽과 중간 그리고 남쪽으로 나 있는 장곡의 지점을 손끝으로 짚었다.

“ 그곳으로 끌어들이라는 말이군요.”

강사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매복하고 있는 무인들을 약한 무인들로 바꾸고 지금에 와서야 변경된 작전에 대해 알려준 이유는 정보가 새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매복하고 있는 부하들은 작전이 변경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할 것이다. 하지만 적이 거세게 밀고 들어오면 결국엔 후퇴할 수밖에 없을 테다. 후퇴하는 부하들에게 소삼합평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면, 적 또한 낭떠러지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절벽 위로 오고 있는 자들은 더 쉽게 유인할 수 있다.

놈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장곡 북쪽과 남쪽으로 몸을 날려갈 테고, 그럼 대삼합평에 은신해 있던 생사림 무인들은 그들의 뒤를 쫓는다.

결국 잠룡들은 장곡 중간에 매복해 있는 생사림 무인들과 뒤에서 쫓는 무인들에 의해 포위를 당하게된다.

더구나 장곡 낭떠러지 위에 나 있는 길은 폭이 다섯 자에 불과하고, 뚝 끊긴 곳도 있다. 물론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라 어렵지 않게 건너겠지만, 그런 곳마다 매복이 기다리고 있다면?

“ 굳이 유인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 알겠습니다. 림주님.”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굳이 유인할 생각을 하지 않아도 놈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 시작해라!”

“ 그럼 끝나고 뵙겠습니다.”

세 사람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인 후 각자가 맡은 곳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 우.....하!”

“ 우.......하!”

쿠웅! 쿠웅!

“ 어서 오너라, 연우강!”

특이한 기합이 절벽을 타고 들려오자 유명계는 차갑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 너무 늦다, 연우강!”

하정일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벌써 한 식경 전에 담대무궁과 윤허로부터 먼저 간다는 전음을 받았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속도를 내야 할 것만 같았다.

“ 가고 싶으면 먼저 가, 인마.”

“ 개자식.”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정일은 욕설을 내뱉었다.

[ 침착해라 정일. 지금 연우강은 제대로 하고 있다.]

[ 저놈이 맞다는 겁니까?]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오자 하정일이 물었다.

[ 그렇다. 정일. 우린 적의 시선을 이곳에 묶어두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작전은 담대무궁이 대장이긴 하지만 각 조 조장들의 역량을 시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굳이 모난 돌이 될 이유가 없다.]

[ 표적이 되는 자가 먼저 당한단 말입니까?]

[ 그렇다.]

[ 우리 목표는 승리만이 아니다. 승리도 거머쥐면서 살아남는 자가 승자가 된다.]

[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 적이 대삼합평에 있다면 원래 작전대로 하면 되고, 소삼합평에 있다면 먼저 그곳으로 가서 담대무궁이나 윤허와 마찬가지로 가운데 길로 오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 네?]

하정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운데 길로 오는 자들을 기다린다는 것은 잠룡 칠 조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운데 길을 제외하면 남은 길은 북쪽과 만쪽 길밖에 없는데 하는 말을 보면 그 길도 아닌 듯하다.

그가 의이한 얼굴을 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 장곡을 단지곡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아느냐?]

[ 중간을 자르면 손바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아닙니까?]

머리로는 전날 담대무궁이 그린 그림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삼합평과 소삼합평 사이를 남북으로 자르면 손바닥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된다. 그래서 단지곡이란 이름을 붙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진 않다. 하지만 단지곡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손가락 하나가 없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 세 갈래 길이 아니란 말입니까?]

[ 전부 네 개의 길이 있다. 그래서 다섯 손가락 중에서 하나가 없다고 하여 단지곡이라고 불렸던 거다.]

[ 어디에 길이 있습니까?]

[ 손등을 하늘을 향해 폈을 때 약지에 해당하는 부분에 길이 있다.]

[ 중앙에 있는 길과 남쪽에 있는 길 사이에 다른 길이 있단 말입니까?]

[ 만일 대삼합평에 적의 본진이 없다면 우린 그곳을 통해 소삼합평으로 가야 한다.]

[ 가운데 길 중간엔 매복이 있을 거라고 보시는군요?]

[ 무론 낭떠러지라 매복을 두는 게 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들어갈 이유가 없겠지.]

[ 알겠습니다. 조원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하정일은 각 조원들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다. 전음의 전달은 바로 옆 사람에게 말하면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돼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구 조 조원들은 하정일을 보며 일제히 주먹을 가슴에 댔다. 알아들었단 의미였다.

하정일은 고개를 돌려 바로 옆의 사내를 보았다.

혼무영 나웅.

지금 직책은 부조장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상관이다.

삼백 년 전 만상문을 세웠던 무치벌주 나추옹 조사의 직계이면서 현 만상지존인 그는 지금껏 잠룡들에 섞여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하정일은 나웅의 무공이 담대무공보다 더 높다고 확신하고 있다. 아니 만상문의 지존인 그가 잠룡인 담대무궁보다 무공이 낮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 준비해라, 정일.]

나웅은 전면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절벽 중간 부분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절벽 중간 중간에 매복하고 있던 적이었다.

[ 존명!]

하정일은 무기를 뽑아들며 전면으로 나섰다.

“ 준비하라!”

“ 크아악!”

“ 아악!”

“ 으아악!”

하정일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전면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공격을 가했던 십여 명이 잠룡 십 조 조원들의 무기에 당해 내지른 비명이었다.

“ 진형을 유지하라! 좌군은 준비하라!”

“  우.....하!”

“ 우......하!”

잠료 십 조 조원들은 함성을 지르고 발을 구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 공겨하라!”

“ 와아!”

“ 우와아!”

바로 그때 전면에서 공격 명령과 함께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려 오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 잠룡 십 조는 중보로 이동한다!”

“ 우! 하! 우! 하! 우! 하!”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잠룡 십 조 조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잠룡 십 조는 울퉁불퉁한 돌길을 지나 평탄한 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잠룡 십 조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전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들은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왔다.

“ 좌!”

이철상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십 조 조원들은 일렬로 늘어서며 오른 무릎을 꿇고 앉았다.

“ 타앗!”

“ 차앗!”

“ 이야압!”

진득한 살기가 담긴 함성이 생사림 무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수십 개의 병기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십조 조원들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 우......하!”

“ 우......하!”

잠룡 십 조 조원들은 일제히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들의 왼손에 차고 있는 방패의 창날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창! 창창창! 창창!

방패로 적의 무기를 막아낸 잠룡 십 조 조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방패를 밀어 쳤다.

“ 하...!”

“ 하...!”

그리고 광포한 함성과 함께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둘렀다.

스악!

삭!

“ 으악!”

“ 아악!”

“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십 개의 머리가 동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십 조 조원들의 움직임은 끝이 아니었다. 무기를 휘두르고 난 여력을 이용하여 시체로 변한 자들의 몸통을 방금 죽인 자들 뒤에서 달려오는 적 앞으로 밀어 쳤다.

“ 헉!”

“ 억!”

“ 우....!”

“ 우.....!”

갑자기 동료의 시체가 달려들자 당혹스러운 신음을 뱉어내며 생사림 무인들이 그 자라에 멈췄다.

바로 그 순간 십 조 조원들은 검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내밀었던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왼팔을 안쪽으로 꺾었다. 그러자 팔꿈치 쪽으로 나 있는 창날이 삐죽 튀어나오며 싸늘한 예기를 뿌렸다. 이미 몸의 회전력을 받은 창날은 가공할 무기로 돌변해 있었다.

푸욱!

푹!

푸욱!

“ 크아악!”

“ 아악!”

“ 악!”

관자놀이 또는 목에 창날이 틀어박힌 생사림 무인들은 머리를 또는 목을 감싸 쥐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이번에도 역시 잠룡 십 조 조원들의 행동은 다르지 않았다. 관자놀이 또는 목에 찔려 죽은 자들을 차올려 인간 방패로 사용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 일 선 전진! 이 선 확살!”

“ 일 선 전진! 이 선 확살!”

이철상의 외침에 복창하며 이 선에 있던 잠룡들은 쓰러진 자들 중 머리가 아직 붙어 있는 자들의 심장을 향해 무기를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 우.....하!”

“ 우.....하!”

쿠웅! 쿠웅! 쿠웅!

“ 크악!”

“ 아악!”

“ 엄청나군.”

잠룡 십 조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웅은 경악했다. 잠룡 십 조. 그동안 그들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하지만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며 애써 폄하했다. 그 생각은 이곳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출정준비를 하면서 잠룡 십 조 조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볼일을 보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는 방패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보며 내심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다른 잠룡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잠룡 십 조 조원들을 쳐다보며 키들키들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잠룡 십조 조원들은 누구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방패에 달려 있는 창날이 제대로 서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 심지어 어떤 자는 방패에 먼지가 앉았다며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닦기도 했다. 그렇게 비웃음을 당하던 자들이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건.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 일 선 전진! 이 선 확살!”

“ 우...! 하! 우.......! 하!”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대야벌에서 출발할 때 연우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 살귀를 만들어주겠다고 장담했다. 그 당시에는 살귀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저들이 적을 없애는 모습을 보자 비로소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잠룡 십 조 조원들은 적에 대해서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 선에 있던 자들이 치고 나가면 이 선에 있던 자들은 죽은 자와 산 자를 가리지 않고 쓰러진 자들의 심장이나 목을 향해 무기를 찔러 넣고 있다. 확살, 즉 확인사살인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상당한 자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자들. 저들은 이미 살귀였다.

더구나 잠룡 십 조가 펼치고 있는 진식은 무인들이 사용하는 진식과는 다르다. 아니 오히려 병사들이 사용하는 방진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 연우강.”

나웅은 숨을 토하듯 말을 뱉었다.

신유 할아버지가 잠룡들 중 가장 경계해야 할 자가 연우강이라고 하였던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저 진을 만들어낸 자가 바로 연우강이었던 것이다.

그는 주변에 있는 구 조 조원들을 보았다.

‘ 이런?’

나웅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잠룡 십 조의 활약을 지켜보는 조원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 있었다. 적이 아니라 아군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질려버렸다는 것은 사기 저하가 아니라 동경이다.

잠룡 십 조에 대한 부러움 말이다.

그 부러움이 지속되다 보면 연우강이 십지십룡으로 뽑히는 것은 물론이고 최고 자리인 범천룡에 오를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정일!]

나웅은 급하게 하정일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 조원들을 오른편으로 유도하라.]

[ 우리도 시작하는 겁니까?]

[ 지금 상태가 계속되면 우린 조원들을 전부 잃게 된다.]

[ 잃게 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 연우강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말이다.]

[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하정일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던 터라 나웅이 한 말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 잠룡 구 조는 돌격하라! 돌격하라!”

하정일은 고함을 내질렀다.

“ 와아!”

“ 우와아!”

잠룡 십 조의 활약을 지금껏 지켜보았던 잠룡 구 조 조원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 구 조는 우측을 맡는다!”

하정일은 전방으로 몸을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 칠 조는 중앙을 맡는다!”

하정일에 이어 이지약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나웅처럼 십 조 조원들이 너무도 뛰어나서가 아니라 십 조 조원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세 개 조가 선두로 나서자 뒤편에 있던 낭인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치켜든 채 나아가는 잠룡들을 따라갈 뿐이었다. 그들이 따라가는 중에도 선두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명이 꼬리를 물고, 피와 몸에서 잘려나간 부위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크악!”

철컥!

비명과 검이 검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전면을 막아선 자를 향해 검탄강기를 뿌려대던 이지약이 연우강을 향해 물었다.

“ 제 무기는 이겁니다.”

연우강은 손괭이와 낫을 들어보이며 히죽 웃었다.

“ 방금 묵사를 사용했잖아요.”

“ 그건 적과 거리가 너무 멀어 이놈으로 처리가 불가능할 때 간혹 한번 하용하는 겁니다.”

창!

연우강은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손괭이로 막아내며 불쑥 앞으로 다가섰다.

“ 이야합!”

바로 생사람 무인 뒤편에 있던 자가 고함을 내지르며 연우강을 검으로 찔러왔다. 연우강은 거리를 재보았다. 뒤편에 있는 무인과의 거리는 일 장 가량이었다.

거리를 확인한 연우강은 검을 막고 있던 손괭이를 왼편으로 사정없이 젖히며 오른손의 낫을 휘둘렀다. 횡으로 나아가던 낫이 목을 파고든 순간 손목이 휙 꺾이고 사내의 목을 통과해 나왔다.

이지약은 전면을 경계하며 연우강을 지켜보았다.

연우강을 향해 무기를 찔러가는 사내를 처리할 수는 있지만 연우강이 어떻게 하는지 보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사내의 목을 잘라낸 연우강은 쥐고 있던 낫을 놔버리고, 엉덩이 쪽으로 오른손을 돌렸다.

딸칵!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묵사가 튀어나오고, 튀어나온 묵사를 역수로 쥔 그는 자세를 낮추면서 횡으로 그었다.

슈캉!

“ 크악!”

“ 이렇게 사용하는 겁니다.”

연우강은 사내의 몸에서 솟구친 피를 피하면서 묵사를 검집에 집어넣고 다시 낫을 잡았다.

“ 절묘하네요.”

이지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낫을 허리춤으로 꽂아 넣는 동작부터 검을 뽑는 동작 그리고 뒤편에 있는 사내의 허리를 가르고 다시 묵사를 검집에 넣고 낫을 뽑아드는 모든 과정에 마라천력을 이용하고 있다. 본인의 실력을 숨기기 위해 저렇게 하는 것일 테지만 그 또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 지금쯤 시작할 때가 됐는데....”

연우강은 좌우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 뭘 시작한다는 말이죠?”

“ 어두운 밤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무기는 화살입니다. 이 소저.”

[ 교랑, 화살에 대한 준비를 해.]

“ 알았습니다. 광랑.]

연우강의 전음을 받은 이철상은 각 군장들에게 빠르게 전음을 보냈다. 그의 전음을 받은 잠룡 십 조 조원들이 적과 싸우면서 드러나지 않게 절벽으로 이동했다. 잠룡들이 움직이자 두작군 일행도 이리저리 흩어지며 잠룡들 사이로 들어갔다.

연우강이 전음을 보내는 사이에 이지약 또한 조원들에게 전음을 보내 화살에 대한 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 쏴라!”

슉! 슉슉! 슉슉슉! 슉슉!

바로 그때 살기 가득한 외침과 함께 머리 위쪽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화살이다! 벽으로 붙어라!”

가장 먼저 고함을 내지른 사람은 연우강이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시체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절벽으로 내달렸다.

“ 화살이 쏟아진다. 벽으로 붙어라!”

뒤이어 이지약이 커다란 강기막을 펼치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에 이어 독고철응과 이자승 그리고 강기막을 펼칠 수 있는 무인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계곡 중간에는 거대한 강기막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 사백 명에 가까운 무인들을 전부 방어해준다는 건 역부족이었다.

“ 크악!”

“ 아악!”

“ 으악!”

“ 절벽으로 붙어라!”

지금까지 일어났던 상황과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잠룡들 진영에서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이 떼거리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잠룡들 진영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 저놈들?”

허공에 머물고 있던 이자승은 놀란 얼굴로 잠룡 십 조를 보았다. 대부분이 절벽에 바짝 붙어 있고, 절벽 근처로 가지 못한 녀석들은 두 명이 한 조가 돼 적의 시체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슉슉슉! 슉슉슉! 슉슉슉!

그들에 신경 쓸 틈도 없이 두 번째 화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또다시 수십 명이 쓰러지고 이자승과 독고철응 이지약 등은 허공답보를 펼쳐 절벽 위로 몸을 날렸다.

“ 돌격하라!”

“ 쳐라!”

그들이 절벽 위로 올라서는 순간 생사림 진영에서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자는 강사인이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생사림 무인들은 무서운 속도로 잠룡들을 향해 돌진했다.

“ 잠룡 십 조는 진형을 구축하라!”

“ 우.....! 하!”

“ 우....! 하!”

늘 그렇듯 잠룡 십 조 조원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전열을 정비했다.

하지만 이번의 대응은 달랐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뒤로 물러나면서 몸을 날려 오는 적을 상대했다.

한편 절벽 위로 날아오른 세 사람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화살을 쏘고 있던 자들이 전부 도망치고 없었던 거였다.

“ 할아버지, 아래쪽이 더 급해요!”

아래쪽 상황이 다급하게 변한 듯하자 이지약은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 알았다.”

이자승과 독고철응은 곧바로 아래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이자승의 손에서 황금색 용들이 튀어나와 전장을 휩쓸고, 이자약의 검에서는 우주일만검결이 펼쳐졌다.

“ 크악!”

“ 아악!”

절벽 위로 날아올라 갔던 이자승 일행이 아래로 내려꽂히며 살수를 펼치자 수십 명이 일거에 육편이 돼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 일 선 전진! 이 선 확살!”

바로 그때 뒤편에서 이철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자승은 고개를 돌려 잠룡 십 조를 보았다.

“ 무서운 놈들!”

이자승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앞에서는 적이 밀려오고, 위에서는 화살이 쏟아지는 상황에 당황할 만도 하건만 녀석들은 조금도 위축됨이 없다. 녀석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밀려오는 적을 도륙하고 있었다.

“ 그런데.......”

이자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룡 십 조의 인원수가 부족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잘못 봤겠지.”

이내 고개를 저은 그는 황룡파천신공을 펼치며 적진을 유린하고 다녔다.

[ 너무 나대지 마십시오, 영감님.]

대여섯 명의 적을 없애고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데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자승은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찾았다. 연우강은 잠룡 십 조 맨 앞에서 적을 밀어붙이며 싸우고 있었다.

[ 무슨 소리냐?]

이자승은 다가오는 적을 향해 오른손을 홱 뿌리며 물었다.

“ 크아악!”

[ 이곳에서 영감님이 할 일은 손녀딸을 보호하는 겁니다.]

[ 잠룡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란 말이냐?]

[ 이 싸움은 영감님 싸움이 아니라 잠룡들 싸움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영감님이 살려준 잠룡들은 나중에 제 손으로 죽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 독한 놈.]

이자승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진짜 독한 놈을 보지 못했군요.]

[ 너보다 독한 놈은 아직 못봤다. 이놈아.]

[ 지금부터 보게 될 겁니다. 영감님.]

[ 무슨 소리.......]

“ 간.....다! 가.....라!”

이자승의 말을 자르며 낭랑한 목소리가 수많은 무인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을 뚫고 퍼져 나갔다. 그리고 검은 동체가 적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 새카만 이리가 사막을 달린다!”

차앙!

슈악!

“ 크악!”

새파란 낫이 허공을 가르고 곧이어 날카롭게 날이 선 손괭이가 둥실 떠오르는 머리를 찍었다.

퍼억!

낫에 잘려나간 머리가 산산이 부서져 허연 뇌수가 뿌려졌다.

“ 부순다! 부숴라!”

퍼억!

츄악!

이번엔 손괭이가 먼저였다.

왼손의 손괭이가 생사림 무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연우강은 손괭이를 뽑아냄과 동시에 낫으로 사내의 목을 찍었다. 목이 절반 정도 잘려나가고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연우강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 우리를 막는 적군은 부순다!”

연우강은 그 피를 고스란히 맞으며 적을 향해 내달렸다.

스악! 퍽!

까앙! 퍼억!

“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긴다!”

푸욱! 스악!

스악! 퍼억!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 크악!”

“ 아악!”

“ 으악!”

이자승은 넋을 잃었다. 연우강은 혼자고 손에 들려 있는 무기는 작은 손괭이와 낫이 전부다 그런데 그 두가지가 그 어떤 무기보다 강했다. 손괭이로 상대방의 무기를 막고, 낫으로 자르고 다시 손괭이로 찍고.

손괭이로 먼저 공격하면 낫으로 확인사살을 하고, 낫으로 먼저 공격을 하면 손괭이로 다시 확인사살을 한다.

더불어 그의 양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그 빠름 앞에서는 검으로 펼치는 검술이나 도로 펼치는 도법이, 창으로 펼치는 창술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빠름 하나로 상대방의 초식을 제압하고 있었다.

두 명이 달려들어도, 네 명이 달려들어도, 그의 옷깃을 건드리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단지 한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상대의 무기를 피하고, 피하지 못할 경우엔 손괭이나 낫으로 막아내며 공격을 한다. 연우강이 펼치는 저 조악한 기술이 전장의 꽃이라는 난투박투라는 사실을 이자승이 알 리가 없었다.

“ 달린다! 달려라! 미친 이리가 적진을 달린다!”

차앙! 까앙!

푸욱! 스악!

“ 아악! 내 팔! 크악.....!”

팔이 먼저 잘려 비명을 내려던 자가 이번엔 죽어가며 마지막 비명을 내질렀다.

“ 죽인다! 죽여라! 한 놈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라!”

푸욱! 파악!

잘려나간 머리가 떠오르기도 전에 손괭이가 사내의 심장을 파고든다. 숙여진 머리 위로 검이 지나가고 왼손의 손괭이가 사내의 명치로 파고든다. 벌떡 상체를 세우며 낫을 휘두르자 사내의 머리가 철버덕 떨어져 내린다.

“ 마셔라! 마셔라! 적군의 피로 갈증을 식혀라!”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이번 외침은 뒤편에 있던 잠룡 십 조 전원이 내질렀다. 잠룡 십 조의 외침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적군의 머릿속마저 채워버렸다.

잠룡 십조 조원들은 앞으로 나아가며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 죽여! 죽여!”

“ 에이, 씨부랄!”

“ 죽여! 죽여!”

“ 에이! 씨부랄!”

“ 공격하라!”

“ 공격하라!”

잠룡 십 조 조원들이 다시 밀고 나가자 용기를 얻은 칠 조와 구 조 잠룡들은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생사림 무인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도 끈질겼다. 생사림 무인들은 죽임을 당하면서도 쉬지 않고 공격을 가해왔다.

그리고 대삼합평이 가까워지자 그곳까지는 내줄 수 없다는 듯 위쪽에서 화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 번 당해본 경험이 있다고 해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잠룡 십 조 조원들은 시체를 들어 올려 방패로 사용하면서 절벽으로 이동하고, 차마 시체를 들지 못한 다른 조원들은 화살을 허용했다.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오른편 절벽을 타고 전진했던 윤허 일행이었다.

그들은 이미 대삼합평 근처에 당도해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일각 전이다. 한 식경 먼저 출발했지만 은밀하게 이동하느라 속도를 내지 못해 일 각 전에야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사유성 일행은 대삼합평을 둘러본다면 은밀하게 떠났고, 윤허를 비롯한 일행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윤허는 전황을 살피기 위해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고 어두워 어느 쪽이 유리한 상황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만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모습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 놈들의 본진은 소삼합평이오, 윤 형.]

정찰을 나갔던 사유성이 돌아온 듯 전음이 들려왔다.

[ 아무도 없단 말이오?]

[ 그렇소. 지금 대삼합평은 텅 비었소.]

‘ 텅 비었다라.......’

윤허는 대삼합평으로 시선을 주었다.

[ 접니다, 형님.]

이번엔 거철산의 전음이 들려왔다.

[ 어떠냐?]

[ 그 자 말대로 대삼합평은 텅 비었습니다.]

[ 알았다.]

슬쩍 고개를 끄덕인 윤허는 이번엔 사유성을 보았다.

[ 윤형,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 서둘러야 저들을 구할 수 있소이다. ]

사유성은 계곡 출구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잠룡 십조를 가리켰다.

[ 먼저 가시오. 곧 뒤따라 가겠소.]

[ 좋소. 그럼 먼저 가겠소. 남쪽으로 가다 보면 대삼합평 끝자락에 낭떠러지 길이 있소, 그 길을 따라 오면 되오.]

고개를 끄덕인 사유성은 조원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자신이 먼저 가면 윤허도 뒤따라올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취한 행동이었다.

‘ 빌어먹을!’

윤허는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사유성을 지원하는 문파는 무궐과 군마련으로 알고 있다. 벌주의 친동생이 련주로 있는 군마련과 벌주를 완전하게 지원하지도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는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무궐의 지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사유성을 첩자라고 단정 짓는 것도 무리가 있다.

아니 대야벌은 물론이고 무궐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을 연우강이 알고 있다는 게 더 이상하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연우강의 말이 사실이라면......

“ 철산!”

결국 윤허는 거철산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밀고 밀리는 접전을 지켜보고 있던 거철산은 고개를 돌려 윤허를 보았다.

“ 그가 사유성이 가는 길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 광랑이 그랬습니까?”

“ 네 의견을 듣고 싶다.”

“ 전 광랑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 그가 준 정보가 사실이라고 보느냐?”

“ 그렇습니다.”

“ 연우강과 나는 세 번 만났을 뿐이고, 공개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전음으로 이야기 했다.”

“ 형님께만 말했단 말입니까?”

“ 그렇다.”

“ 설사 광랑이 중요한 정보를 말했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 그럼 내게 말한 건 나 때문이 아니라 철산 너 때문일 수도 있겠구나.”

“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형님.”

“ 그렇지.”

윤허는 거철산을 빤히 쳐다보았다.

문득 녀석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엔 지금처럼 논리적이지도 않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견을 내놓은 적도 없다. 그랬던 녀석이 지금은 타인을 압도할 정도로 당당해졌다.

느닷없이 무공이 강해짐녀 우쭐해져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녀석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물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녀석은 잠룡 십 조에 머물렀던 몇 개월 동안 엄청나게 성장해 돌아온 것이었다.

“ 형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거철산은 담담한 얼굴로 윤허의 시선을 받으며 물었다.

“ 연우강의 말을 따르게 되면, 우리 목숨을 구하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린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될 거다. 그런 낙인이 찍힌 자는 무림에서 활동할 수 없다.”

“ 한번 세운 작전은 설사 죽는다고 해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 난 그렇게 배웠다. 철산.”

“ 그럼 남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 이해해줘서 고맙다.”

“ 그래서 제가 형님을 떠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거철산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몸을 돌렸다.

“ 원래 계획대로 남쪽으로 간다!”

곧이어 윤허의 외침이 있고, 잠룡 이 조 조원들은 남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룡 이 조 조원들이 남쪽으로 사라지자 그들이 있는 곳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으로부터 불화살 하나가 하늘을 뚫고 날아올랐다. 그 화살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강사인이었다.

“ 후퇴하라! 밀천 무인들은 후퇴하라!”

불화살을 확인한 강사인은 주변을 살피며 고함을 내질렀다.

“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 밀천 무인들은 소삼합평까지 후퇴하라!”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밀천 무인들은 몸을 돌려 대삼합평을 향해 내달렸다.

[ 납니다. 총관!]

[ 나요, 총관.]

후퇴하는 부하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좌우 측에서 장립과 유기령의 전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걸음을 멈춘 강사인은 절뱍 위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커다란 소나무 아래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 화살을 쏜 유기령일 터였다.

[ 남은 놈들이 있는지 확인하게.]

먼저 유기령에게 전음을 보낸 강사인은 다시 북쪽 절벽 위로 시선을 주고는 장립에게도 전음을 보내며 몸을 날렸다.

“ 잠룡 구조는 적을 쫓아라. 단숨에 치고 나가라!”

“ 침착하세요, 하 공자.”

이지약은 고함을 내질렀다.

“ 조금 전 적장의 말을 듣지 못한 거요?”

하정일은 쏘아보며 맞받아쳤다.

“ 우리를 대삼합평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 놈들을 보시오. 이 소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소. 대삼합평으로 우릴 유인하는 자들의 행동이 아니란 말이오.”

하정일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가운데 길과 남쪽 길 사이에 숨어 있다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지휘관은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이 소저. 놈들을 쫓아라.”

하정일은 돌격명령을 내렸다.

“ 와아!”

“ 우와아!”

잠룡 구조를 비롯한 낭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전방으로 질주해 나갔다.

“ 할아버지!”

이지약은 곤혹스런 얼굴로 이자승을 불렀다. 수백 명이 동시에 달려 나가면서 계곡을 따라왔던 삼 대 진영은 엉망으로 흐트러져버렸다.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어쩔 수 없다. 묘아야. 설사 대삼합평에 매복이 있다고 해도 좁은 이곳보다는 넓은 저곳이 낫다.”

“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는 것보다는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다 죽는 게 낫다는 뜻인가요?”

“ 상황이 그렇게 됐다. 계곡이 넓었더라면 문제가 아닐 테지만 뒤쪽에 있는 자들은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화살을 맞지 않았느냐. 앞에서 싸우는 자들보다 더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그랬군요. 그런데.....”

이지약은 누구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이자승은 전음으로 물었다.

[ 네.]

[ 그 녀석만 없는 게 아니라 잠룡 십 조 녀석들이 한 명도 없다.]

[ 정말요?]

[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보니까 한 명도 없더라.]

[ 어떻게 사라진 거죠?]

[ 낸들 알겠냐. 아무튼 그놈은 도망치는데도 귀신이야.]

[ 다치진 않았겠죠?]

[ 넌 녀석아, 나보다 그 녀석이 더 걱정되는 게냐?]

[ 할아버지야 걱정할 게 있어야 걱정하죠. 하지만 그는 앵속쟁이잖아요.]

이지약은 배시시 웃었다.

[ 에라, 이 불효자식아. 그나저나 어떻게 할래?]

[ 계속 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 널 위해 그런 거냐, 아니면 잠룡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냐?]

[ 저야 대야벌을 떠날 사람이지만 잠룡들은 아니잖아요. 그들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지요.]

[ 그럼 계속 가자꾸나.]

[ 그렇게 해요. 그보다 구 조 조장이 알아차리지 못했나 모르겠네요.]

[ 나도 녀석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알았다.]

[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란 말인가요?]

[ 이젠 알았차린다고 해도 늦었다는 말이다.]

[ 그런가요?]

[ 그래, 일단 가자.]

[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이지약은 오른편 끝에 있는 하정일 일행을 흘끔 쳐다보았다. 조원들과 낭인들은 빠르게 내달리고 하정일과 나웅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그의 목숨을 노리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 저예요, 이 소저.]

앞으로 달려가는데 수여설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지약은 나아가는 속도를 늦추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연 공자 말이 절벽 아래쪽에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있대요.]

이지약은 고개를 저었다.

수여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전음은 물론이고 혜광심어도 보낼 수 없기에, 좀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신호를 보낸 거였다.

[ 낭떠러지에 잔교 비슷한 것을 설치해 놓았을 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낮은 자세로 소리 없이 움직이면 바람소리 때문에 기척을 들키지 않을 거라고도 했고요.]

그제야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렸다.

그녀는 몸을 날려가며 슬쩍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정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정일과 나웅은 여전히 후미에 남아 계곡을 빠져나가는 무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정일!”

나웅은 하정일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문주님.”

“ 연우강 놈을 살피고 와라.”

“ 저 속에 없단 말입니까?”

하정일의 시선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내달리는 무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 조금 전에 화살을 맞고 절벽 왼편 끝에서 쓰러진느 걸 봤다.”

“ 부상을 당했단 말입니까?”

“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알겠습니다. 문주님. 놈을 처리하고 바로 쫓아가겠습니다.”

“ 놈이 부상당한 상태가 아니라면 바로 와라.”

“ 놈은 제 상태가 아닙니다. 문주님.”

하정일은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가 이렇듯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는 조금 전 보았던 연우강의 무공 때문이다. 연우강은 화살을 막을 것으로 주변에 널린 시체를 이용했다. 그 다급한 와중에 시체를 들어 올릴 정도면 강기를 펼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파천육기의 하나인 묵사가 있으면서도 제대로 사용조차 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특이하게 생긴 손괭이와 낫으로 적을 상대했다.

“ 서둘러라!”

하정일을 가만히 쳐다보던 나웅은 무인들 맨 후미를 쫓아 몸을 날렸다.

“ 놈에게 묵사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습니다.”

하정일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왼편 절벽으로 향했다.

“ 와아!”

“ 우와!”

벌써 대삼합평으로 들어간 듯 잠룡과 낭인들이 내지르는 외침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었다.

“ 어디 보자.”

절벽 근처에 당도한 하정일은 바닥을 꼼꼼하게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좌우측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은 장립과 유기령이었다.

[ 저 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유대주?]

장립은 건너편 유기령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대열을 이탈해 도망치는 놈인 것 같은데 그냥 갑시다.]

절벽 가장자리에 매미처럼 붙어 뭔가를 살피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는 하정일의 모습이 유길여에게는 도망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 그럽시다. 갑시다.]

고개를 끄덕인 장립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 저기 있군.”

하정일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검은 궤짝에 등을 기대고 앉은 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는 쭉 펴고, 삿갓을 쓴 머리는 푹 숙이고 있는데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하정일은 귀에 내공을 집중했다.

‘ 죽었네.’

그는 빙긋 웃으며 연우강의 허리를 살폈다.

문득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엉덩이 쪽에 누워 있는 검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연우강이 대야벌을 떠날 때 벌주로부터 얻어낸 묵사였다.

휙!

하정일은 반 장 가량 되는 구덩이 안으로 몸을 날렸다.

“ 죽을 장소는 잘 택했구나, 연우강.”

그는 피식 웃으며 묵사를 집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정일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차가운 눈동자가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주, 죽지 않았단.....”

“ 나는.....”

번쩍!

연우강의 허리춤에서 새파란 광채가 터져 나와 하정일의 미간으로 향했다.

“ 커억!”

하정일의 동체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하정일의 시체를 들어 올려 시체들 사이로 내던졌다. 하정일의 신형이 날아가면서 빠져나온 뇌섬은 그의 허리춤으로 모습을 갑췄다.

“ 너만 있으면 된다고 했잖아.”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궤짝을 들쳐맸다.

“ 뭐 하십니까?”

그때 뒤에서 장사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몸을 돌렸다.

“ 잠시 재미 좀 봤다. 그런데 아프냐?”

연우강은 장사덕의 어깨를 살펴보았다. 장사덕의 왼쪽 어깨에는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저립니다.”

“ 날 만난 넌 행운아다, 잡랑.”

“ 무슨 말입니까?”

“ 내게 통증에 이거인 진통제가 있거든.”

연우강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 진통제라고요?”

“ 앵속보다 더 좋은 진통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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