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순간의 여유.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옷이 헤져 팔꿈치와 허벅지 맨살이 드러나 바닥에 쓸려 까졌지만,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바로 아래쪽에 적이 매복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탓이다.
잠룡들과 낭인들은 최대한 몸을 사리며 느릿느릿 기었다.
‘ 이제 이십 장만 더 가면.’
이지약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낭떠러지에 귀를 대고는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웅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려온다.
그녀는 조용히 앞에 가고 있는 잠룡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녀의 전음은 앞으로 뒤로 쉬지 않고 이어져 기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전달됐다. 기어가는 자들의 움직임은 더욱 신중해 지고,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선두가 연우강 일행이 있는 곳에 당도한 듯 나아가는 속독 조금씩 빨라졌다.
그런데 일각 정도가 지나자, 드디어 이지약 차례가 됐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고했습니다. 이 소저. 뒤편으로 가서 납작 엎드리세요."
" 이 지경인데요?"
이지약은 양팔과 무릎을 가리켰다.
" 앉아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연우강은 쓴 웃음을 지었다.
팔꿈치 부분과 무릎을 덮은 옷은 헤져 나갔고, 남은 곳은 피로 범벅이다. 무공이 강한 그녀는 나을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하나둘 무인들이 도착하였고, 그들은 뒤편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멀리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룡 칠조와 낭인들을 따르던 생사림 무인들이었다.
" 거리는 어느 정도지?"
연우강은 활시위를 당기며 물었다.
" 칠십 장이네."
욱일승 역ㄷ시 시위를 당기며 대답했다.
" 그런데 활 쏠 줄 알아?"
연우강은 노인네들을 돌아보았다.
"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으면 감옥을 들어가면 되네."
" 쏠 줄 안다는 말이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다시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 사십 장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쏘도록 해."
" 알았네."
느긋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놈들의 선두가 사십 장 안까지 들어왔다. 연우강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턱! 턱턱! 턱턱턱! 턱턱!
노인들의 손을 떠난 화살은 어둠을 뚫고 날아갔다.
슉! 슉! 슉! 슉슉슉!
" 이, 이건?"
나아가던 강사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 화, 화살이다!"
" 엎드려라."
강사인은 질겁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지금 날아오는 화살은 보통 화살이 아니었다. 내공이 가미된 채 날아오는 것들은 곡선이 아닌 직선으로 날아왔고, 선두에 있던 자들의 몸 안으로 틀어박혔다. 그들 중에는 총관인 강사인도 포함돼 있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생사림 무인들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휘익! 휙! 휙! 휙휙!
그리고 낭떠러지 아래쪽에서 수백 명의 무인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생사림 무인들을 공격했다.
" 아악!"
" 우, 우린....... 커억!'
" 우린 생사...... 으윽!"
여기저기서 생사림 무인이라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어둠은 그들의 목소리마저도 삼켜버렸다. 낭떠러지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은 무작정 무기와 함께 같은 편인 생사림 무인들을 향해 돌진했다.
" 개자식들아! 우린..... 크악!"
결국 죽지 않기 위해 생사림 무인들은 동료들을 향해 무기들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고, 도와 도가 부딪치며 처절한 살육이 자행됐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고, 쏟아진 물이 된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용미곡을 통해 오는 자가 가장 많고, 연우강까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유명계가 가장 많은 준비를 한 곳이고 매복한 무인인 수도 제일 많았다. 더구나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용인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터라 매복하고 있던 자들은 다른 방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후퇴하라!"
" 물러나라!"
결국 견디다 못한 생사림 무인들은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쪽 또한 피할 곳은 없었다.
잠룡 십 조 선두에 있던 수여설과 남궁운화가 달려오는 자들을 향해 살수를 펼치며 전진해 나갔다.
남궁세가의 가주 검법인 창궁대연검법과 빙공 중 최강이라는 불리는 빙하빙백강과 백옥수를 익힌 두 사람 앞에서 생사림 무인들은 추풍낙처럼 쓰러졌다.
푸른 광채가 번쩍일 때마다 서너 명씩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새하얀 광채가 주변을 휩쓸 때마다 얼음덩어리로 변한 시체들이 낭떠러지 아라로 추락했다.
" 속도를 내자고요."
" 그래요."
두 사람은 도망쳐오는 자들을 없애 낭떠러지로 떨어뜨리며 전진해 나갔다.
" 뒤에 적이 있다!"
“ 적이 있다!”
무자비하게 밀고 들어오는 잠룡 십 조 조원들에게 막힌 생사림 무인들은 다시 앞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강한 내기를 머금은 화살은 맨 앞으로 나온 자들을 사정없이 짓이겼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밧줄을 매고 올라온 동료들에 의해 죽어나갔다.
“ 영감들은 가서 밧줄 챙겨와!”
연우강은 활시위를 당기며 욱일승 일행에게 소리쳤다.
“ 밧줄이 있어야 하는 상황인가?”
“ 전부 챙겨 와야 해.”
“ 알았네.”
욱일승 일행은 활과 화살을 뒤편에 있는 잠룡 칠조 조원들에게 넘기고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 밧줄을 왜 챙겨 오라는 거죠?”
이지약은 활과 화살을 들고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 소삼합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적이 버글버글 할 텐데 그곳으로 갈 수는 없잖습니까?”
연우강은 연거푸 시위를 놓으며 말했다.
“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거예요?”
“ 기습을 할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겠죠.”
“ 그런 길을 알아요?”
“ 무인이 좋은 점이 뭔지 아세요?”
“ 뭔데요?”
이지약은 당겼던 시위를 놓으며 물었다.
“ 일반 병사에 비해 활용 폭이 엄청나게 넓다는 겁니다.”
“ 길은 찾으면 나온다는 거군요.”
“ 그렇습니다.”
“ 크악!”
이번엔 위쪽과 아래쪽에서 동시에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절벽을 타고 이동했던 욱일승 일행이 공격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위에서 아래에서 쉴 새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 식경 정도가 지났을 때 잠룡 십 조가 먼저 도착하고 잠시 후 욱일승 일행이 밧줄을 가지고 왔다.
“ 전부 몇 개지?”
연우강은 낭떠러지로 늘어뜨려 놓은 밧줄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길이는 오 장 가량이고, 수량은 백오십 개 정도네.”
욱일승이 대답했다.
“ 교랑과 잡랑은 정찰하고 와.”
“ 알겠습니다. 광랑.”
이철상과 장사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소삼합평 쪽으로 내달렸다.
“ 나머진 밧줄을 열 개씩 묶어.”
연우강의 말에 일행은 일제히 달려들어 밧줄을 묶었다.
“ 밧줄은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 거죠?”
이지약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일단 가죠.”
연우강은 잠룡 십 조 조원들을 향해 밧줄을 들고 오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소삼합평으로 향했다.
일 다경 정도를 걸었을 때 정찰을 나갔던 이철상과 장사덕이 돌아왔다.
“ 어때?”
“ 소삼합평은 대삼합평과 비슷합니다. 낮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소삼합평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적이 쫙 깔려 있습니다.”
장사덕의 대답을 듣고 난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았다.
“ 들키지 않고 소삼합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광랑.”
“ 아!”
이철상의 말에 이지약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강이 밧줄을 가져오라고 한 건 적의 눈을 피해 소삼합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 장소는?”
“ 입구에서 백 장 떨어진 곳으로 잡고, 내려갈 곳은 왼쪽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나웅 그놈들이 오른쪽 어딘가에 있단 말이지?”
“ 그렇습니다, 광랑.”
“ 욱 영감, 먼저 가서 밧줄을 설치해.”
“ 알았네.”
욱일승은 노인들과 함께 이철상이 보아둔 장소로 먼저 갔다. 연우강이 욱일승 일행을 먼저 보낸 것은 밧줄을 걸기 위한 기둥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바위를 깎을 정도의 무공을 지닌 사람들은 욱일승 일행밖에 없었다.
“ 적이 얼마나 남았을 거라고 보십니까?”
연우강은 걸음을 옮기며 이자승에게 물었다.
“ 글쎄다, 정확한 수는 나도 모르겠구나.”
“ 낭떠러지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은 이백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감님 뒤를 따르던 자들은 삼백이었고요.”
“ 이곳에서만 오백 명이 죽었다고 보면 되겠구나.”
“ 용미곡에서 죽은 자들은 이백 명 정도 됩니다.”
“ 그럼 전부 구백이다.”
“ 북쪽과 남쪽 길에서 백오십여 명씩 죽었다고 보면, 남은 놈들은 천여 명 정도라고 보면 되겠군요.”
연우강은 이지약을 돌아보았다.
“ 우린 백오십 명 가량 돼요.”
“ 우리는 총 이백삼십 명이네요. 저 아래쪽으로 도망친 나웅 일행이 칠십 명이고, 북쪽과 남쪽으로 간 녀석들은 절반 정도가 살아올 테니까....... 아직은 할 만하네요.”
어느새 일행은 욱일승 일행이 줄을 늘어뜨려 놓은 곳에 도착했다. 낭떠러지 가장자리에는 요철 형태의 작은 기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그곳에 줄의 한쪽 끝이 묶여 있었다.
“ 영감들은 맨 나중에 내려오면서 줄을 걷어와.”
연우강은 맨 끝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수여설과 남궁운화를 비롯한 잠룡 십 조 조원들이 내려갈 준비를 하며 줄 앞에 늘어섰다.
“ 먼저 내려갈게.”
연우강은 줄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내려간 열다섯 명은 곧 낭떠러지 바닥에 발이 닿았다.
“ 이 정도면 영약 같은 게 있어야 하는 조건 아냐?”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은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있었다. 물론 위쪽과는 달리 바람도 불지 않았다.
“ 연 공자가 한 번 찾아보세요.”
남궁운화는 웃으며 연우강 곁으로 다가갔다.
“ 그런 걸 왜 제가 합니까? 저 녀석들이 해야죠.”
“ 흐흐흐! 영약이 나오면 코딱지만큼만 떼어드리겠습니다. 광랑.”
장사덕은 낄낄대며 쪼그려 앉아 바닥을 살폈다. 하지만 바닥엔 이끼만 잔뜩 끼어 있을 뿐이었다
“ 아무것도 없어?”
“ 나중에 시간이 충분할 때 꼼꼼히 살펴야겠습니다. 지금은 이끼밖에 안 보입니다.”
“ 이끼?”
연우강은 허리를 숙여 이끼를 한 웅큼 뜯었다. 그러고는 잠시 냄새를 맡아보다가 입으로 밀어 넣었.
일행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따. 연우강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 여, 영약입니까?”
장사덕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 청아한 향기가 나고 열이 후끈하게 올라와.”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영약 맞네요.”
장사덕은 급하게 이끼를 뜯어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이끼를 뜯어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문득 이끼를 씹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청아한 향은 고사하고 풀 냄새와 흙냄새와 거름 냄새가 뒤섞인 오묘한 냄새만 났다.
“ 어때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이끼를 입 안에 넣었는지 그녀의 볼은 터질 것 같았다.
“ 모, 모르겠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 입맛이 달라서 그런가?”
연우강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노닥거리고 있는 사이 위에서는 계속 무인들이 내려왔고, 곧이어 밧줄이 떨어져 내리고 욱일승 일행이 내려왔다.
“ 뭘 먹는 거냐?”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는 남궁운화를 보며 이자승이 물었다.
“ 여, 영약이라고 해서.....”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가리켰다.
“ 영약?”
“ 제가 언제 영약이라고 그랬단 말입니까?”
“ 방금 그랬잖아요?”
“ 전 청아한 향이 나고 몸에서 열이 난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걸 영약이라고 한 사람은 잡랑 저놈이고요.”
“ 그, 그럼 아니라는 말?”
“ 최소한 오십 년은 이곳에서 썩었을 테니까 영약이 됐을지도 모르죠. 다 내려왔으면 가자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소삼합평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 오십 면을 썩었다고?”
이끼를 뜯어 입 안에 넣었던 일행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쿡!”
“ 큭큭큭!”
나중에 내려왔던 잠룡들은 낮게 키들거리며 연우강을 따라나섰다.
“ 이, 이게 썩은 이끼라고?”
남궁운화는 울 듯한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 난, 안 먹었어요.”
수여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 안에서는 풀 냄새와 거름 냄새가 뒤섞인 오묘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 그런데 이건 뭐죠?”
남궁운화와 수여설을 번갈아 쳐다보던 이지약은 수여설의 입가에 남은 이끼를 떼어내며 물었다.
“ 내, 냄새를 맡아보느라고 코에 댔는데, 무, 묻은 것 같아요.”
“ 침도 섞여 있는 것 같은데요?”
“ 서, 설마요. 내, 내가 뭐가 아쉬워서 여, 영약을 찾겠어요.”
수여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언니도 먹었잖아요. 주머니에도 넣었고.”
“ 무, 무슨 소리에요.”
수여설은 정색한 얼굴로 소리쳤다.
“ 확인해 봐요?”
남궁운화는 수여설 곁으로 다가가서는 그녀의 주머니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 나, 남궁가주!]
수여설은 당황한 얼굴로 남궁운화의 손을 잡았다
“ 세상에, 그 새 꽁꽁 얼려 놨어.”
“ 얼려 놨다고요?”
이지약은 황당한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수여설이 이끼를 영약이라고 먹고, 싱싱하게 보관하기 위해 얼려 놓았다니, 전에 알던 그녀가 맞나 싶었다.
간혹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여 웃음을 주긴 했지만 수여설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연우강의 한 마디에 썩은 이끼를 먹고, 주머니 안에 숨겨 놓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조는 조그마한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 남궁 가주는 꽉꽉 채웠으면서 뭘 그래요!”
“ 전 안 넣었어요. 언니. 보세요.”
남궁운화는 주머니를 가리켰다.
“ 주머니가 아니고 여기에 넣었잖아요.”
수여설은 남궁운화의 앞섶을 들추더니 그곳에서 이끼를 꺼내 내밀었다.
“ 그, 그게 언제 들어갔지?”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었다.
다른 잠룡들의 눈도 있고 해서 급하게 가슴 속으로 쑤셔 넣었는데 그걸 수여설에게 들켰던 모양이었다.
“ 킥!”
두 사람을 쳐다보던 이지약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옹다옹하는 모습이 친자매를 보는 것 같았다.
“ 서둘러라!”
그때 앞서가던 이자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만 가요.”
“ 영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궁운화는 남은 이낄르 버리면서도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세 사람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일해을 따라잡았다.
“ 맛있더냐?”
이자승은 웃으며 물었다.
“ 거름을 먹는 것 같았다고요. 할아버지. 그런데 연 공자는 그걸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아세요? 그걸 지켜보는데 제 입 안에 침이 고였다고요.”
남궁운화는 안개 속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 그래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느냐.”
“ 마음이 편해져요?”
“ 우린 조금 있으면 또 전투를 치러야 한다. 그 전투가 끝났을 때 몇 명이 살아남을지 그것도 알 수 없고.”
“ 전투?”
“ 전투라고요?”
세 여자는 깜짝 놀란 얼굴로 전면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떠올랐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니 이렇듯 안개를 헤치고 가는 이유가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다. 그런데 영약이라고 하였던 이끼 때문에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그랬군요.”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맞다. 아래로 내려온 녀서들은 너희들이 지금 전투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을 게다. 물론 그 시간이 아주 짧지만 극심한 긴장에 휩사인 상태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
네 사람이 소삼합평으로 올라가는 절벽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이 위로 올라간 후였다. 일행은 줄은 하나씩 잡고 위로 몸을 날렸다.
꼭대기에 다다르자마자 네 사람은 납작 엎드려 이동했다. 소삼합평이 내려다보이는 폭이 이 장 가량이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몸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풀이 마른 상태라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어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네 사람은 엉금엉금 기어 연우강 곁으로 갔다.
[ 어떠냐?]
이자승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삼합평이라고 불린다고 하더니 넓이는 대삼합평과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보름달처럼 둥근 형태였는데 지금은 백 장 가량 되는 듯했다. 생사림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북쪽과 남쪽 그리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십 장 가량 떨어진 오른편과 벌판 중앙이었다.
[ 입구 어딘가에 숨어서 다른 쪽이 먼저 시작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럼 저 가운데 유명계가 있겠구나.]
이자승은 벌판 한가운데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백여 명 정도가 모여 있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훨씬 강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 욱 영감.]
연우강은 욱일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 말하게.]
[ 싸움이 시작되면 유명계 머리를 먼저 확보해.]
[ 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욱일승은 연우강의 지시사항을 일행에게 전했다.
[ 지루해요, 연 공자.]
[ 누워서 하늘을 보세요.]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연우강은 몸을 뒤집으며 말했다. 그가 드러눕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하늘을 보고 누웠다.
‘ 밖에서 밤을 새고 있으면서도 별은 처음 보네.’
남궁운화는 내심 중얼거렸다.
강렬한 별빛이 빛처럼 지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달빛이 약하면 별빛이 강해진다는 말이 맞는 듯, 하늘 한쪽 구석에 걸린 손톱 달은 희미하기 그지없다.
희미한 손톱 달 속에서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에 돌아가신 부모님이었다.
‘ 엄마!’
투명한 물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때 귓전으로 나직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맹세를 해라. 살아남아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달 속에 나타난 그분들께 맹세를 해라. 그럼 너희들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연우강이었다.
하늘을 보고 누워 있던 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연우강 쪽으로 향했다.
“ 놈들을 죽여라!”
“ 공격하라!”
“ 우와아!”
바로 그 순간, 북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은 담대무궁이 이끌고 왔던 일 조와 삼 조 잠룡들이었다.
“ 공격하라!”
“ 공격하라!”
“ 죽여라!”
그리고 남쪽의 윤허 일행이 있던 곳과 이십여 장 떨어진 오른쪽에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잠룡들이 소삼합평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 연 공자.”
소삼합평을 내려다보던 이지약은 연우강을 불렀다.
“ 말하십시오.”
“ 이거요.”
그녀는 품속에서 양피지로 된 책자를 꺼내 내밀었다.
“ 뭡니까?”
“ 전 다 암기했어요.”
“ 저도 담을 넘으라는 겁니까?”
[ 지금 마총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이번엔 전음으로 물었다.
[ 그곳을 찾으면 이 소저를 앞장세우려고 했는데요.]
[ 자칫 잘못하면 헤어질 수도 있잖아요. 무공은 익히지 않더라도 마총의 기관에 대해서 알아두도록 하세요.]
[ 알았습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수장해를 받아 품속에 갈무리했다.
“ 적이닷!”
“ 적은 대부분 죽었다. 이백 명도 채 되지 않는다 공격하라!”
곧이어 벌판 중앙에서도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부하들을 독려하는 사람은 유명계였다.
“ 우리 목표는 오른쪽 놈들이다. 그놈들을 없애고 곧바로 남쪽 입구를 막고 있는 놈들을 친다!”
“ 알겠습니다.”
“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걸 명심해라!”
연우강은 벌떡 일어나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