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01화 (101/232)

제 10장 가장 치사한 놈.

“ 와아!”

“ 우와아!”

“ 잠룡 십 조는 전열을 정비하라!”

연우강에 이어 두 번째로 뛰어내린 이철상이 고함을 내질렀다.

“ 흑천우사군은 전면을 맡는다!”

“ 흑천 좌전군은 좌측을 맡는다!”

“ 흑천중앙군은 우측을 맡는다!”

“ 흑천후영군은 후미를 맡는다!”

마장웅, 남궁운화, 장사덕, 신도영의 외침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잠룡 십 조 조원들은 빠르게 대오를 맞췄다.

“ 우......! 하!”

“ 우......! 하!”

오와 열을 맞추자마자 잠룡 십 조 조원들은 우렁찬 내지르며 가운데 낭떠러지 중앙으로 나아갔다.

“ 잠룡 십 조원이 나아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이지약이 이끄는 칠 조와 낭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잠룡 칠 조를 따라 나섰다.

“ 흑천노신군은 나를 따라라!”

곧이어 욱일승이 허공답보를 펼쳐 몸을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수천월과 갈인효 이자승도 허공답보를 펼치며 허공을 날아갔다.

“ 저들은?”

벌판 가운데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유명계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자신을 포함하여 이곳에 있는 무인들 중 허공답보를 펼칠 수 있는 무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적은 네 명이나 허공답보를 펼치며 날아오고 있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놀라게 한 건 허공답보를 펼치며 날아오는 자들이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자들.

북쪽과 남쪽 길로 왔던 자들 중 소삼합평에 도착한 자들은 서른 명 남짓이고 그 정도만 살아올 거락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가운데 길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신경을 가장 많이 쓴 곳이고, 궁수 포함 이백오십 명 정도를 매복으로 배치했고, 강사인이 이끌던 자들도 삼백 명 가량이다. 그런데 살아남은 놈들의 수가 거의 이백여 명에 달했다. 가운데 길로 오면서 전혀 희생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 차앗!”

“ 타앗!”

“ 이야합!”

욱일승 일행이 다가오자 유명계를 호위하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갔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 욱일승이나 이자승 일행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 허허허!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군.”

욱일승은 낮게 웃으며 허공에 점을 찍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검끝이 찍힌 자리에 팔찌 크기의 검은새 고리가 생겨났다. 순식간에 여섯 개로 늘어난 고리들은 전방에서 몸을 날려 오는 생사림 무인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리고 무인들 앞에 도달하자마자 위쪽과 아래쪽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길게 늘어나더니 무인들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 크악!”

“ 아악!”

여섯 명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마환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명계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검은 고리 형태로 날아가다가 적 앞에 서면 검처럼 길게 늘어나 상대의 무기는 물론이고 몸까지 깨끗하게 잘라버리는 가공할 수법.

사십 년 전 저 검법은 십육마환정검이라 불렸고, 십육마환무정검으로 펼치는 검은색 고리를 일컬어 마환검이라고 하였다.

십육마환비 무정천하!

열여섯 개의 마환이 날면 무정천하가 만들어진다.

신주제일검 욱일승을 항상 따라다녔던 말이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 정말 그란 말인가?”

유명계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주제일검 욱일승뿐만이 아니었다. 일부는 얼음 조각으로 녹아내리고, 일부는 검은 독물로 녹아내린다.

북해어옹 수천월과 묘강독존 갈인효, 지옥에 갇히면서 잊혀졌던 자들이 모습이 드러낸 것이다.

사십 년 만에.

“ 이렇게 끝나는군.”

그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북쪽 길 남쪽 길 서쪽 길 세 곳은 전부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만일 지금 상태가 전부라면 이번 작전은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전부가 아니다.

벌판을 가로질러 이편으로 오고 있는 저들은 삼합평으로 들어선 자들 중 가장 인원이 많고, 내지르는 기합으로 보건대 사기도 높다.

저들이 없었다면.....

“ 죽일 놈!”

유명계는 대열을 이탈하여 멀리 보이는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저 자식 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유명계를 발견한 이자승이 욱일승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저 놈은 연 공자의 몫이다. 놔둬라.]

[ 우강이 몫이라고?]

[ 저놈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낸 사람이 연 공자니까 이번엔 목도 잘라야겠지.]

[ 우강이가 저 녀석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랐어?]

[ 그랬다고 하더라, 아무튼 이놈들이나 없애고 보자.]

욱일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휘둘렀다.

[ 그런데 너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거냐?]

[ 애들을 상대로 전력은 무슨, 오 할 정도다.]

욱일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전엔 그 정도가 전력을 다한 거였잖아.]

[ 사십 년 전이다, 자식아.]

[ 아무튼 더럽게 강해진 건 맞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적진을 헤집고 다녔다.

한편.

욱일승 일행이 일부러 손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유명계는 광포한 기운을 흘리며 연우강을 향해 폭사돼 가고 있었다.

“ 연우강!”

번쩍 들어 올린 그의 양손에 끼워져 있는 생사수갑이 진득한 살기를 뿌려댔다.

“ 그냥 없애버리지......”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 괜찮겠어요?”

수여설이 그를 보며 물었다.

연우강은 용미곡에서부터의 본인의 진짜 무공을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다. 이번에도 그렇게 싸울 모양인데 공연히 걱정스러웠다.

“ 제가 위험하게 보이면 그때 한 번만 도와주면 됩니다.”

연우강은 손괭이와 낫을 쥐고 있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달려오는 유명계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분관을 지고 갈 때처럼 특이한 보법을 펼치며 달려가는 그의 무공은 칠보귀둔필사였다.

“ 죽여주마, 개자식!”

유명계는 고함을 지르며 연우강을 향해 생사절맥수를 펼쳤다. 그의 손에 끼고 있는 생사수갑이 새카맣게 변하며 투명한 강기가 감쌌다.

“ 발가락이 없는 놈의 가장 큰 약점이 뭔지 알아?”

유명계와 반 장 거리를 남겨둔 지점에 당도한 연우강은 급하게 왼편으로 이동했다.

스악!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수갑이 간발의 차로 연우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순간 동작이 형편없이 늦어진다는 거야, 인마.”

연우강의 말대로였다.

공격을 실패한 유명계는 바로 멈추지 못하고 일 장 가량을 더 나아가서야 연우강이 피한 쪽으로 몸을 돌릴 수 있었다. 없어진 발가락 때문이었다. 발가락이 없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무쇠를 신발을 만들어 신었지만 무쇠가 발가락을 대신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 어흥!”

분노가 머리 끝까지 뻗친 유명계는 짐승처럼 고함을 지르며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연우강은 반 장 거리를 남겨둔 지점에서 몸을 피했고, 유명계는 연우강이 있던 지점에서 일 장 가량을 더 나아간 다음 몸을 돌려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 죽인다, 연우강!”

유명계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밀천으로 돌아가는 건 포기했다.

아니 대야벌에서 쫓겨날 때 이미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천여 명이나 남아 있던 부하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천여 명의 부하들은 물론이고 나천후가 보내준 밀천 무인 천 명마저도 잃고 말았다. 설사 살아 돌아간다고 해도 밀천에서 받아줄 리도 없거니와 갈 곳도 없었다.

“ 난 죽어도 네놈과 함께 죽을 것이다. 연우강!”

경공으로는 연우강을 잡지 못한다고 판단한 유명계는 장력을 뿌리는 것처럼 양손을 뿌렸다. 그의 손에서 가공할 열기를 간직한 장력이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억!”

연우강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몸을 굴렀다. 유명계의 양손에서 펼쳐진 무공은 다름 아닌 혈잔수였다.

“ 이제 어디로 도망칠 거냐, 놈!”

유명계는 연우강을 따라붙으며 계속 혈잔수를 펼쳤다. 그가 혈잔수를 펼칠 때마다 생사수갑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그거 내가 화장실에 던져놓은 비급으로 익힌 혈잔수구나.”

연우강은 계속 몸을 굴리며 이죽거렸다.

“ 화, 화장실에 비급을 던져 놓은 놈이 너였다고?”

유명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 이승걸 영감님의 복수를 해야겠는데 방법이 없더라고, 그때 마침 내 손에 천마삼경이 들어온 거야!”

“ 그, 그럼 내게 천마삼경이 있다는 소문을 낸 놈도?”

“ 의외로 잘 먹히던데?”

“ 개자식!”

유명계는 연우강을 향해 달려가며 전력을 다한 혈잔수를 펼쳤다.

“ 애초에 이 약사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없었잖아. 인마.”

연우강은 쉬지 않고 몸을 굴리며 이죽댔다.

마치 그의 모습을 보면 무인이면 치욕스럽게 여긴다는 나려타곤 수법으로 간신히 유명계의 공격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 도와줘요?]

수여설은 연우강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저놈이 혈잔수를 펼치기 시작했으니까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왜죠?]

[ 저놈이 익힌 혈잔수는 완벽하지 않거든요.]

[ 몇 장을 찢어내고 줬다는 말이에요?]

[ 그렇습니다. 잠시 후면 저놈이 차고 있는 수갑이 물처럼 녹아내릴 겁니다.]

[ 수갑이 녹아내린다는 건 무슨 소리죠?]

[ 저 지금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수 소저.]

[ 싸우는 게 아니라 장난치는 거잖아요. 궁금증이 커지면 제가 유명계를 없애버릴 지도 몰라요.]

[ 혈잔수가 극양기공이라는 사실은 알죠?]

[ 물론 잘 알고 있죠.]

[ 그 혈잔수를 방패에 대고 펼치며 방패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유명계가 끼고 있는 수갑이 방패란 말인가요?]

[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죠. 혈잔수를 완벽하게 익혀낸 상태라면 수갑을 끼고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불완전한 혈잔수는 수갑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 조금씩 달궈진단 말이죠?]

[ 그렇습니다.]

[ 손이 뜨거워지면 금세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 손보다 머릿속이 더 뜨거운데 무슨 수로 알아차립니까?]

[ 손보다 머릿속이 더 뜨겁다고요?]

“ 크아아!”

굳이 대답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연우강을 잡지 못하자, 유명계는 미친 듯이 괴성을 내지르며 혈잔수를 난사했다. 혈잔수의 열기 때문인지 연우강이 뒹굴고 있는 주변 곳곳에서 불꽃이 오르기 시작했다.

[ 굳이 그럴 필요 있어요?]

유명계를 쳐다보던 수여설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 또 뭐가 궁금합니까?]

[ 실력을 굳이 숨길 필요가 있냐고요.]

[ 굳이 숨기는 게 아니라, 자랑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게 그 말이잖아요.]

[ 다릅니다.]

[ 어떻게 다르다는 거죠?]

[ 제가 자랑을 하게 되면 엄청난 무공을 지녔다는 소문이 나게 되지만, 자랑을 하지 않으면 믿는 놈과 믿지 않는 놈으로 갈리게 됩니다.]

[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 제게 우호적인 사람이거나 제 무공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제가 강자라는 사실을 믿겠지만, 저를 폄하하고 싶어하는 자들이나, 제 무공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자는 절대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자는 수 소저나 나천후가 될 테고, 후자는 저기 있는 담대무궁이나 대야벌에 있는 자가 되겠죠.]

[ 그러니까 정확하게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죠?]

[ 그런 상황을 일컬어 ‘믿거나 말거나’라고 합니다.]

[ 옆에 욱 할아버지들이 계시니까 상대방은 더 혼란스럽겠네요?]

[ 맞습니다.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욱영감 일행이 옆에 있기 때문에 제 실력은 더욱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엄청난 실력자라고 하는 자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앵속쟁이 아닙니까, 어이쿠! 저 자식 화가 굉장히 난 모양입니다.]

‘ 훗!’

수여설은 피식 웃었다.

공격하는 유명계의 무공도 엄청났지만 피하는 연우강은 더 놀라웠다. 그는 간발의 차로 유명계의 공격을 피하며 화를 돋우고 있었다.

“ 죽인다, 연우강!”

유명계는 미친 듯이 혈잔수를 난사했다.

수여설은 유명계의 양손을 보았다.

연우강의 말처럼 그가 끼고 있는 수갑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정도면 손이 상당히 뜨거울 텐데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수여설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앙에 있는 적을 없앤 잠룡 십 조와 칠 조는 나웅 일행과 싸우던 자들을 전부 없애고 북쪽의 담대무궁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잠룡 십 조와 칠 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나웅 일행은 윤허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싸움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 대승이네.”

그녀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물렸다.

낭인까지 합치면 아군 또한 팔백 명 정도 됐지만 적은 이천여 명이었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이렇듯 완벽한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던 건 전부 연우강 덕분이다.

‘이제 유명계만 없애면.....!’

“ 크아악!”

급기야 수갑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듯, 유명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유명계!”

바로 그때 우렁찬 외침과 함께 검은 인영 한 명이 검과 하나가 돼 유명계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저자는?”

수여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푸른 뇌전 기운을 흘려대는 검을 쳐들고 몸을 날리는 자, 그는 북쪽 통로에서 싸우고 있던 담대무궁이었다.

“ 으아악!”

담대무궁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유명계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 적장을 잡았다. 유명계의 머리를 잘랐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유명계의 머리를 검으로 찔러 잡아챈 담대무궁은 검을 번쩍 들어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담대무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항하고 있던 생사림 무인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우리가 이겼다!”

“ 승리했다!”

“ 우리 조장이 적장의 목을 잘랐다!”

북쪽 끝에 있던 잠룡들은 열광적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싸우던 자들은 일순 멍한 얼굴로 담대무궁을 보았다.

모두들 싸움은 곧 끝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전격적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유명계의 머리를 취한 사람이 담대무궁이라니,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세에 몰린 상태였고, 잠룡 칠 조와 십 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전멸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처럼 유명계의 머리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수고했네, 담대 형.”

“ 수고했네.”

멍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각 조 조장들은 담대무궁 곁으로 몸을 날려가며 치하의 말을 했다.

“ 무슨 소린가?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놈 머리를 어떻게 취할 수 있었겠는가?”

담대무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 허!”

수여설은 어이없는 얼굴로 담대무궁과 조장들을 보았다. 저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잠룡 칠 조와 십 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룡 십 조나 칠 조 조장인 연우강과 이지약에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칭찬해주기 바쁘다.

“ 재미있는 녀석들이죠.”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듯 연우강은 수여설 곁으로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 지금 웃음이 나와요?”

“ 그럼 울까요?”

“ 으이그!”

수여설은 도끼눈을 뜨고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그가 원한대로 된 것 같으니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놈이 죽어 가는 유명계의 머리를 주워들고, 모든 공을 혼자 세운 것처럼 하자 기분이 상했다.

“ 각 조는 집합하라!”

집합하라고 외치는 담대무궁의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중앙으로 걸어오고 있던 조원들이 조 별로 늘어섰다.

‘ 젠장!’

늘어선 조원들을 쳐다보던 담대무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일 조 조원은 호위 세 명과 자신을 포함한다고 해도 열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윤허가 이끄는 이 조 인원을 세워 보았다. 이 조는 더 참혹했다. 살아남은 자는 여섯 명이고 그 중 호위가 둘이다. 결국 윤허까지 포함하면 잠룡은 여섯 명이란 소리가 된다.

그리고 삼 조는 호위 두 명을 포함하여 다섯 명, 사유성의 사 조는 호위 다섯 명을 포함하여 스무 명, 이지약의 칠 조는 호위 열 명을 포함하여 사십 명, 구 조는 호위 열 명을 포함하여 스무명이었다. 조장인 하정일은 죽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담대무궁의 시선이 맨 마지막에 서 있는 잠룡 십 조 조원들에게로 향했다.

‘ 개자식!’

담대무궁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잠룡 십 조는 사망자 단 한 명도 없이 용미곡을 출발할 때 인원 그대로였다.

“ 잠룡 십 조는 희생자가 한 명도 없군.”

담대무궁은 연우강을 쏘아보며 말했다.

“ 부하들의 희생은 지휘관의 역량에 달린 거야.”

“ 그래서 이놈에게 우리 작전을 알린 거냐?”

담대무궁은 아직 검에 꽂고 있는 유명계의 머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 그놈에게 작전을 알려?”

“ 놈들이 숨겨진 길에 매복해 있었던 걸 어떻게 설명할 테냐, 연우강.”

“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아니 내가 그놈에게 작전을 발설했다는 거야?”

연우강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북쪽 길과, 남쪽 길은 지난 오십 년간 드러나지 않았던 길이었다. 연우강. 그런데 이놈은 그 길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매복까지 두었다. 그리고 그 전날 네놈은 대삼합평으로 정찰을 나갔고,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 그럼 곤란해, 담대무궁. 우리가 없었으면 그 자리에 서서 승리의 미소를 지을 사람은 유명계였을 거라고, 아마 저기 죽어 있는 유명계 손에는 네놈 머리가 꽂혀 있었을 걸.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할 거지?”

“ 네가 약속을 어기고 유명계를 배신했기 때문이겠지.”

“ 내가 유명계를 배신해?”

“ 배신한 게 아니라면 유명계가 생면부지인 너를 미친놈처럼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

“ 아! 그러니까 유명계가 날 공격한 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냐?”

“ 그게 바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연우강.”

“ 네 말대로라면 난 배신한 게 아니잖아.”

“ 무슨 소리냐?”

“ 유명계 머리가 네 손에 있고, 넌 지금 좋아서 미칠 지경이잖아. 네가 좋아서 죽을 지경이라는 건 우린 승리했다는 뜻이고, 그리고 병법에서는 거짓으로 항복을 하는 계책을 사항계라고 하는 것 같은데, 아냐?”

“ 네놈 때문에 죽어간 잠룡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 정말 웃긴 놈이네.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연우강은 어이없는 얼굴로 담대무궁을 보았다. “ 잠룡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연우강.”

“ 무슨 책임?”

“ 전투 중에 적에게 정보를 팔아먹은 배신자는 즉결처분한다.”

즉결처분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각 조 조원들의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연우강은 배신자로 확신하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 이 사람들이 있는 데 네가 무슨 수로?”

연우강은 주변에 늘어서 있는 욱일승 일행을 가리켰다.

“ 잠깐 나 좀 봐요.”

연우강이 한 술 더 뜨자 보다 못한 수여설이 그의 손을 잡고 뒤로 끌고 갔다.

“ 갑자기 왜 그래요?”

연우강은 수여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곧 폭발할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죽여버리고 싶어요.”

“ 누굴, 날?”

“ 죽 쒀서 개에게 주고도 웃음이 나와요?”

수여설을 분한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런데 잠룡 십 조 조원들이 김빠진 얼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가장 열심히 싸웠고, 가장 많은 적을 없앤 사람들이 잠룡 십 조다. 그런데 그 공이 전부 담대무궁에게 돌아간 것은 물론이고 지금은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있다.

“ 그럼 울어요?”

“ 저 자식은 우릴 배신자로 몰고 있잖아요.”

“ 우린 배신한 적 없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 그건 연 공자 생각이고요, 저들은 어떻게 할 건데요?”

수여설은 옆에 서 있는 잠룡들을 가리켰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잠룡들을 보았다.

그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광동차가의 표풍마권 차남승으로 표랑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 화나?”

“ 돌아버릴 지경입니다. 아니 저 새끼들 전부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 그 정도로 심해?”

“ 그렇습니다.”

“ 난 살아남은 걸로 만족한 줄 알았는데.... 그런데 정말로 화가 나는 거야?”

“ 지금이라도 명령을 내리시면 저 새끼들 전부 묻어버리겠습니다.”

“ 진짜?”

“ 네.”

“ 심각하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 내 짐 누가 가지고 있지?”

“ 여기 있다.”

연우강이 궤짝을 찾자 두작군이 다가와 지고 있던 궤짝을 내려놓았다.

“ 이놈이 어디 있더라?”

뚜껑을 열고 안쪽을 뒤적거리던 연우강은 안쪽 상자에서 길쭉한 물체를 꺼내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 뭐 하는 짓이냐?”

연우강의 손을 쳐다보던 담대무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연우강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정네 객잔에서 경험한 적이 있는 십뢰였다.

“ 이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연우강은 십뢰 뭉치를 꺼내 십뢰가 들어 있는 구멍을 확인하더니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담대무궁을 겨냥했다.

“ 시, 십뢰로 나, 날 쏘겠단 말이냐?”

“ 너도 방금 들었잖아. 냉정하다고 소문난 수 소저가 전부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고, 우리 표랑은 순하기로 소문 난 친군데 너희들을 전부 묻어버린다고 하잖아. 지휘관인 나로선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어.”

“ 조, 조치를 취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

“ 저들의 화를 풀어주는 게 첫 번째 방법이고, 두 번째 방법은 우리 조원들 중 가장 순진한 표랑의 말처럼 너희들을 전부 묻고 가는 거야. 선택은 담대무궁 네가 해.”

“ 우, 우리를 전부 죽이겠다고?”

담대무궁은 옆에 서 있는 조장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대야벌 모든 문파가 나섰어도 어쩌지 못했던 생사림 유명계를 비롯해 이천 명을 묻었는데도 배신자라고 하는데 방법이 없잖아.”

“ 뒷감당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 뒈질 놈이 뒷감당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셋의 여유를 주겠다. 그 안에 선택해라, 하나......”

연우강은 담대무궁 앞으로 걸어가며 수를 셌다.

“ 어떻게 하면 화를 풀어줄 수 있는가?”

보고 있던 윤허가 나섰다.

“ 저 새끼!”

연우강은 십뢰로 담대무궁을 가리켰다.

“ 그를 죽인단 말인가?”

“ 아니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 그럼?”

“ 우선은 검을 내려놓고, 마혈을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해 주면 돼.”

“ 그럼 우리가 산다는 말이군.”

“ 그렇지.”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선택은 담대 형 자네가 하게. 난 이번 일에서 빠지겠네.”

윤허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나웅, 너는 어때?”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나웅을 보며 물었다.

“ 어쩌란 말이오?”

“ 저놈의 마혈을 눌러주면 너희들은 살 수 있다는 거지 뭐겠어.”

“ 정말 배신하지 않았단 말인가?”

“ 이지약 소저의 팔과 무릎을 봐. 그럼 우리가 어떻게 낭떠러지 길을 지나왔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연우강의 말에 나웅을 비롯한 조장들은 이지약을 보았다.

“ 우린 기어왔어요.”

이지약은 양팔을 들어 조장들에게 보여주었다.

“ 둘!”

그때 연우강의 입에서 둘이란 외침이 흘러나왔다.

“ 하지, 단, 마혈이 아니라 내공만 금제하지.”

나웅은 미련없이 담대무궁을 점혈하고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의미였따.

“ 그것도 나쁘지 않지.”

휙!

연우강은 십뢰를 뒤쪽으로 던져버림과 동시에 담대무궁을 향해 쏘아져 갔다.

“ 오냐 개자식아!”

담대무궁은 들고 있던 검을 내리그었다.

유명계의 머리를 꽂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좀더 대응이 빨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명계의 머리를 검에 꽂고 있는 상황이었고, 검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의 검이 연우강 앞에 도달하기도 전에 연우강의 주먹이 턱에 작렬했다.

퍼억!

“ 커억!”

둔탁한 돌로 맞은 듯한 충격에 담대무궁은 머릴르 흔들며 비틀거렸다.

“ 나도 내공은 쓰지 않을 거야, 담대무궁.”

연우강은 오른발을 사정없이 차올렸다. 그의 발이 담대무궁의 팔꿈치에 작렬하고 검이 떨어져 나갔다.

“ 죽여버린다, 연우강!”

담대무궁은 하나밖에 없는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비틀거리며 내저은 손에 힘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담대무궁의 오른편으로 돌아간 연우강은 담대무궁의 오른팔을 양손으로 잡더니 무릎을 쳐 올림과 동시에 아래쪽으로 사정없이 내리눌렀다.

뚝!

뼈 부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담대무궁의 팔이 거꾸로 꺾였다.

“ 크아악!”

담대무궁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유명계의 머리를 양보했으면 조용히 처먹으면 되잖아. 개자식아. 그 새끼 옆에는 수 소저도 있었고, 노인네들은 또 얼마나 많았어. 그들은 전부 유명계보다 더 강자라는 걸 왜 몰라, 개자식아.”

퍼억! 퍼억! 퍽! 퍽퍽!

연우강의 손발이 담대무궁의 전신에 작렬했다.

“ 커억! 크윽! 으윽!”

손발이 작렬할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코뼈가 주저앉고 어느새 입은 피로 범벅이었다. 하지만 연우강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힘없이 넘어진 담대무궁 위에 올라타더니 양손을 번갈아 담대무궁의 안면에 박아 넣었다.

“ 크억!”

결국 담대무궁은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말았다.

“ 기절했다고 봐줄 거라고 생각하면 넌 크게 잘못한 거야, 개자식아.”

연우강은 기절한 담대무궁의 얼굴에 계속해서 주먹을 박아 넣었다. 박아 넣었던 주먹을 들어 올릴 때마다 그이 주먹에서 피가 튀어올랐다. 담대무궁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주먹에 묻어난 탓이었다.

[ 할아버지, 저러다 죽이겠어요.]

수여설은 질겁한 얼굴로 이자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담대무궁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고 있는 연우강의 행동이 미친 사람의 광기처럼 보였다.

“ 그만해라!”

이자승은 내기를 실어 엄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연우강의 동작이 멈췄다.

“ 이 새끼..... 맛 갔네? 진작 좀 멈추게 해주지. 뒈진 놈에게 계속 검을 찔러 넣는 꼴이 됐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강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활짝 웃었다.

부르르!

조장들은 물론이고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저도 모르게 팔을 쓸었다. 뾰족하게 깍아 바닥에 꽂아 놓은 대나무 함정 위로 떨어지는 것처럼 섬뜩한 한기가 밀려왔던 것이다. 조금 전 연우강은 분명 기절했다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던 자가 지금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하면서 해맑게 웃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잔인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 뭐 하고 있어. 그만 가자.”

연우강은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 조원들에게 버럭 소리치며 걸음을 옮겼다.

“ 어디로 갑니까?”

“ 섬서성으로 가야지. 가기 전에 적당한 객잔이 나오면 술도 한잔하고,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자고.”

연우강은 활기차게 말하며 앞장섰다.

잠룡 십조는 곧 벌판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마음에 들어?”

“ 속시원합니다, 광랑.”

“ 세상에서 갖ㅇ 치사한 짓이 뭔지 알아?”

“ 뭡니까?”

“ 가로채는 짓이야.”

“ 가로 채는 짓이라고요?”

“ 응! 남의 부인을 가로채는 짓, 남의 남편을 가로채는 짓, 남의 재산을 가로채는 짓, 남의 공을 가로채는 짓 등, 그런데 그것보다 더 치사한 놈이 있어. 그게 뭐라고 생각해?”

“ 모르겠습니다.”

“ 빼앗긴 사람 앞에서 가로챈 걸 자랑하는 거야. 즉 남의 공을 가로챈 놈이 그 공을 빼앗긴 사람 앞에서 지가 잘나 공을 세운 것처럼 자랑질을 하는 거지. 그런 놈들은 그저.....”

“ 자근자근 밟아버려야겠군요?”

“ 맞아, 교랑. 자근자근 밟는 게 아니라 미친 듯이 밟아버려야 해.”

‘ 어떤 게 진짜 네 모습이냐, 연우강.’

“ 윤허는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공을 전혀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무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문득 대야벌을 떠나올 때 녀석이 잠룡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살귀라고 했던가?”

주먹을 불끈 틀어쥔 윤허의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10권 끝>

황금백수 10 권     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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