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폭우에 대처하는 법.
마주영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섬서마가가 섬서성에 똬리를 틀고 살아온 지 이백 년이다. 백오십 년 동안은 돈을 모았고, 나머지 오십 년은 힘을 길렀다.
무공 기서를 구하고 저명한 무인을 초빙하여 사부로 모시는 등 무림세가로 거듭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하지만 무림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무림세가로 거듭나는 건 고사하고 섬서성에서조차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대야벌에서 잠룡쟁패가 왔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아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들을 대야벌로 보내기 위해 수만 냥을 썼고, 결국엔 무사히 대야벌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랬던 아들이 지휘관이 돼 집으로 돌아왔다.
비록 부하는 열명에 불과하지만, 그 열 명은 보통 무인들이 아니다. 섬서마가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는 그런 가문의 자식들이다. 더구나 장웅이 속한 잠룡 십 조의 위명은 무림에 진동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 하하하! 한잔하시게, 연 공자.”
마주영은 활짝 웃으며 연우강의 잔에 술을 따랐다.
“ 고맙습니다. 아버님!”
연우강은 공손하게 잔을 받았다.
“ 지, 지금 아버님이라고 하셨는가?”
마주영의 입이 귀에 걸렸다.
금릉 연씨 세가의 큰아들인 연우강이 자신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탓이다.
금릉 연씨 세가가 초토화됐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상인들 중 금릉 연씨 세가가 망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릉 연씨 세가의 가주인 연금석이 보이지 않을 뿐 상단은 과거와 다름없이 영업을 하는 중이고 연씨 상단은 여전히 상계 최강이었다.
그런 집안의 아들과 안면을 튼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거늘, 하물며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됐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이를 초월해 친구가 되는 사람도 있는데 직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하하하! 맞습니다. 연 공자. 좋은 친구가 많을수록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법이지요.”
마주영은 맞장구를 쳤다.
“ 그런데 저 녀석과 제가 친구가 되는 걸 막는 장애가 하나 있습니다.”
“ 무슨 장애가 있단 말이신가? 혹시 저 녀석이 연 공자를 무시하는 겁니까?”
“ 그건 아닙니다. 아버님.”
“ 그럼?”
“ 일당 장웅이 저 녀석 실력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 시, 실력?”
마주영은 아들인 마장웅을 쏘아보았다.
실력을 한 번 보겠냐는 연우강의 말을, 아들인 마장웅이 무공 좀 익혔다고 거들먹거린다는 뜻으로 곡해한 탓이었다.
“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의중을 눈치 챈 마장웅은 손사래를 쳤다.
“ 일단 한번 보시지요.”
연우강은 마장웅에게 눈짓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 뭘 하라는 겁니까?]
마장웅은 불안한 얼굴로 연우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게 가장 큰 효도야, 인마.]
[ 아버진 지금 오해하고 있습니다. 조장님.]
마장웅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 그건 금세 풀리니까 걱정 말고 실력 발휘나 해.]
“ 끄응!”
마장웅은 내심 신음을 뱉어내고는 마당 가운데에 섰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워 검날을 응시했다. 날카로운 검날 속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내기를 끌어올렸다.
웅!
문득 검명이 들려오는 듯하자 마장웅은 쓰게 웃었다.
아직은 검명을 들을 정도로 강하지 않을뿐더러, 가진 검 또한 명검도 아니었다.
검명이 들려오는 건 착각이 분명할 터였다.
마장웅은 끌어올린 내기를 검에 실으며 천천히 보법을 밟아나갔다. 그가 밟아나가는 보법은 일천독행신이었다.
스스스! 스윽! 사악!
오론손과 왼손이 번갈아 움직이자 그의 검에서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검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기운이 점차 강해지면서 어느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휘두르는 검 끝에 투명한 광채가 맺혀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 오! 검강!”
마장웅을 지켜보던 일행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껏 검기 정도를 펼쳤던 마장웅이 마침내 검강을 펼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마장웅을 보던 잠룡들은 입가에 기쁨의 미소가 맺혔다. 마장웅이 검강을 펼쳤다는 것은 자신들 또한 머잖아 검강에 입문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이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세상에...”
아들을 바라보는 마주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무림세가의 꿈을 꾸었고 마주영 또한 무공을 익혔던 터라 검기와 검강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검강은 검을 든 무인의 꿈이다.
검강보단 한 단계 위인 이기어검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 경지는 천재들의 영역이지 일반 무인들이 꿈꾸는 영역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인들은 최종 목표를 검강으로 잡고 그것을 펼쳐야 비로소 일류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아들의 검에서 검강이 발현된 것이다.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기쁘신 모양이군요.”
“ 평생소원이 검강을 보는 거였소. 그런데 그 검강을 아들 녀석의 검에서 보았는데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 사실 저도 장웅의 자질이 저렇듯 뛰어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른 잠룡들보다 훨씬 빠르게 검강을 성취한 것 같습니다.”
“ 고맙소이다. 연 공자.”
“ 그런데.....”
연우강은 슬쩍 말끝을 흐렸다.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하시게.”
“ 돈은 우정의 발목을 잡는다라는 말이 문득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 장웅이와 돈 거래를 하신 겐가?”
“ 못 들으셨습니까?”
“ 아직 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지 않는가.”
“ 그랬군요. 사실 대야벌에서 잠룡들에게 주는 생필품은 그 질이 형편없습니다. 속옷은 통풍이 잘 되지 않아 사타구니에 피부병이 생기기 일쑤고, 옷들 또한 전 기수들이 입었던 걸 주는 경우가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룡들의 그런 어려움을 해소해 주고자 생필품을 따로 대주었습니다.”
“ 그럼 그걸 장웅이가 사서 썼다는 말이신가?”
“ 그렇습니다. 생필품 값과 암살대전에 대비한 호위무사 비용을 합치면 전부 팔십오만 냥입니다. 아버님.”
연우강은 아버님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 친한 친구일수록 금전관계가 깔끔해야지. 당장 외상값을 갚도록 하겠네.”
마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하하! 화통하십니다.”
연우강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활짝 웃었다.
‘ 도둑놈!’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자승은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친구 어쩌고 하면서 마장웅에게 무공을 펼쳐보라고 할 때부터 수상쩍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외상값을 편하게 받아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 자자! 그만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 더 하시지요, 아버님. 이번엔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연우강은 마주영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 그, 그렇게 합시다.”
마주영은 무공에 집중하고 있는 아들을 흘끔 쳐다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 제게 아주 좋은 부적 있는데 하나 사지 않으시겠습니까?”
자리에 앉은 연우강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 어떤 부적인데 그러시는가?”
“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는 부적입니다. 제가 그 험하다는 북로정군에서 오 년을 버티고 결국엔 정오품 정천호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부적 때문이었습니다.”
“ 가격은 얼마나 되는가?”
“ 십오만 냥입니다.”
“ 좀 비싼 것 같은데......”
“ 제가 군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지니고 계시면서 저의 안전을 기원했던 부적입니다.”
“ 금목 그분이 지녔던 부적이란 말이신가?”
“ 그렇습니다. 아버님.”
“ 사겠네.”
‘ 킥!’
연우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던 남궁운화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 왜 그래요?]
[ 전에 저도 연 공자에게 부적을 샀거든요.]
[ 저도 샀는데요?]
[ 언니는 얼마에 샀는데요?]
[ 천오백 냥 주고 샀을 걸요?]
[ 저는 처음엔 산 건 천 냥 줬고, 두 번째 산 건 이천 냥 줬어요.]
[ 두 개나 샀어요?]
[ 군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행운의 부적이라고 해서 하나를 더 샀어요.]
[ 군에 있을 때요?]
[ 네.]
[ 나도 그랬는데.]
[ 언니도?]
[ 정천호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부적 때문이라면서,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올 거라고 하던데요?]
[ 그걸 믿었어요?]
[ 남궁 가주도 믿고 샀잖아요?]
[ 저야 나이도 어렸고, 최악의 상황이었잖아요.]
[ 그 당시에 잠룡은 누구나 불안에 떨고 있던 상황이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고픈 심정이었다고요.]
[ 그래도 언니까지 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요.]
[ 어쨌든 지금은 잘 됐잖아요. 남궁 가주는 창궁대연신공을 완성해 가는 중이고, 잃었던 가주 자리도 되찾았잖아요. 나도 빙하빙백강을 완성했고.]
[ 헤! 그러네요.]
남궁운화는 헤벌쭉 웃었다.
굳이 부적 덕분이 아니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렸고, 무공도 일취월장했다.
연우강에게서 산 부적이 가짜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 그런데.....”
수여설은 마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들 안으로 들어가고 아무도 없는데 마장웅은 아직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을 펼치고 있었다.
“ 왜 저러고 있죠?”
수여설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남궁운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성장통을 겪고 있으니까 그대로 두십시오.”
대답은 자리에 앉은 연우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성장통이 뭐죠?”
남궁운화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검기의 경지에서 검강의 경지로 올라설 때 겪는 무아지경을 성장통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마장웅은 단전이 커지고 있을 겁니다.”
“ 전 왜 그런 단계를 겪지 못한 거죠?”
남궁운화는 제 단전을 내려다보았다.
“ 방법의 차이 때문입니다.”
“ 방법의 차이 때문이라고요?”
“ 단전을 확장시키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 아뇨.”
남궁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 만상을 제대로 보지 않았군요.”
“ 만상에 나와 있어요?”
“ 네.”
“ 연 공자는 심심할 때 몇 번 뒤적거린 게 다잖아요.”
“ 넘긴 쪽에 마침 단전에 대한 게 적혀 있더군요.”
“ 말해 보세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무공에 대한 말이 나오자 잠룡들과 노인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연우강을 보았다.
“ 단전을 키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약이나 내공 전이를 통하는 거고, 두 번째는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변화시키는 겁니다. 전자가 외부의 힘으로 강제성을 띠는 확장 방법이라면 후자는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집니다.”
“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죠?”
“ 본인의 내공으로 만든다는 것에는 큰 차이는 없지만 활용도 면에서는 후자가 더 낫습니다.”
“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만든다고 해도 더 강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인가요?”
“ 그렇습니다. 같은 일 갑자라면 위력은 똑같습니다.”
“ 그럼 별 차이가 없는 거 아닌가요?”
“ 무공을 펼치는 시간이 두 배나 길어지는데 차이가 없다고 하면 안 되죠.”
“ 두 배나 길어져요?”
“ 예를 들어 저는 선천지기로 일 갑자의 내공을 쌓았고, 남궁 소저는 영약으로 일 갑자를 쌓았다고 가정해 보자고요. 우린 지금 천라지망 안에 갇힌 상탭니다. 일검 일검에 전력을 다해야 하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요?”
“ 네.”
“ 그 상황에서 남궁 소저는 한 시진 만에 내공이 바닥나 무너진다면 저는 남궁 소저의 두 배인 두 시진을 버틸 수 있습니다.”
“ 아!”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 또 있나요?”
“ 운기행공을 통해 몸을 회복하는 시간도 절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 그게 그 말이었군요.”
“ 기억나요?”
“ 네, 만상에 보면 선천지기로 단전을 채운 무인은 운기행공이 필요없다고 돼 있었거든요.”
“ 완전하게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영약이나 내공 전이를 통해 내공을 얻은 무인보다는 운기행공 하는 횟수가 현격하게 적습니다.”
“ 그렇군요. 그럼 지금 마 군장 상태는 어떻게 설명되죠?”
남궁운화는 눈으로 일천독행신을 펼치고 있는 마장웅을 가리켰다.
“ 신공과 일반 무공의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 그러니까 신공은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내공심법을 말하는 거군요.”
“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을 일컬어 신공이라 부릅니다.”
“ 신공으로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어느 정도죠?”
“ 그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장통을 겪는 순간에 선천지기를 얼마나 많이 내공으로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 신공의 순위가 결정됩니다. 어떤 친구는 강기에 오른 순간 일 장 길이의 강기를 생성해 내고, 어떤 무인은 한 자 길이에서 멈추기도 하죠.”
“ 그럼 일천독행신이 어느 정도 무공인지 알려면 마 군장의 성장통이 끝나봐야 알겠군요.”
“ 그렇습니다. 이젠 식사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연우강은 탁자 위에 즐비하게 놓인 음식을 가리켰다.
“ 연 공자는요?”
하지만 아직 의문이 풀리지않은 듯 남궁운화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 저는 왜 끌어들이는 겁니까?”
“ 전 지금껏 연 공자가 운기행공을 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렇죠.”
“ 운기행공을 어떻게 아무 곳에서나 합니까. 자기 전에 하고 잡니다.”
“ 거짓말하지 마라, 녀석아. 나도 네가 운기행공 하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비교적 연우강과 많은 시간을 보냈던 이자승이 툭 쏘아붙였다. 사실 그도 연우강이 익힌 무공이 궁금했다.
흑천의 천주라고 했으니 녀석이 익힌 무공은 흑천의 무공일 것이다. 하지만 흑천의 무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다. 연우강이 잠깐 언급하기는 했는데 그건 흑천의 무공에 대한 게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익혔다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죽어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익혔는지 알고 싶었다.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운기행공을 열심히 한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죠.”
연우강은 그만 하자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
“ 전 한 번 궁금증이 생기면 아무것도 못해요, 연 공자.”
이번엔 수여설이 막 음식을 집으려는 연우강의 손을 멈춰 세웠다.
“ 와! 정말 돌아버리겠네.”
연우강은 수여설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궁금증이 도졌는지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 나갔다 올까요?”
수여설은 밖을 가리켰다.
나가서 한바탕 무공을 난사하고 나면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 흑천 무공의 기본은 주화입마에 들었을 때 미친 듯이 날뛰는 그 진기네.”
뜻밖에도 대답은 욱일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행은 일제히 욱일승을 보았다.
“ 무슨 소리냐?”
이자승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익혔고, 나이 구십이 넘었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팔십 년 이상 무공과 접하고 살았다. 하지만 주화입마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진기를 이용하여 무공을 익힌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 주화입마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는 흑천의 진신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뜻이다.”
“ 그럼 너희들이 무공을 회복한 게 흑천 무공 때문이란 말이냐?”
“ 그곳에서 흑천의 천주이자 일대 묵사가 남긴 무론을 얻었다.”
“ 설명해 봐라.”
이자승의 시선이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 다 들었으면서 뭘 설명합니까?”
“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익혔다는 그 무공이 주화입마에 든 상태에서 익혀야 하는 거였냐?”
“ 주화입마 상태에서 ㅍㄱ주하는 내기는 본래의 내공과는 다른 기운입니다. 마기네 뭐네 하는 자들도 있지만 실제 폭주하는 그 기운은 순수한 선천지기입니다. 선천지기가 변해 그렇게 된 거죠. 하지만 그놈은 통제가 불가능하고, 최악의 경우엔 무인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흑천에서는 그 기운을 흑풍이라 부릅니다. 그 흑풍을 내공으로 만들어내는 무공이 흑풍마라천력이고요.”
“ 그 흑풍을 내공으로 만들려면 주화입마를 여러 번 겪어야 하겠구나.”
이자승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 최소한 열 번 이상 겪어야 단전이 형성됩니다.”
“ 내기를 쌓으려면?”
“ 나머진 보통 무공을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 무공을 익히는 사람은 단전이 막 만들어지면 하루 종일 운기행공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윽과 이자승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녀석은 무공을 익히기 위해 무공을 막 입문한 자들이 쉬지 않고 운기행공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주화입마에 든 것이다. 녀석의 말처럼 죽음을 등 뒤에 둔 게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과정이다.
“ 왜?”
이자승은 잔뜩 화난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앵속, 주화입마, 그리고 십뢰.
설사 막장 인생이라고 해도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녀석이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우강은 이자승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잠룡들을 보며 딴소리를 했다. “ 꿈에서라도 주화입마에 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주화입마의 후유증은 내공이 높을수록 더 심하다. 만일 너희들 중 누군가가 주화입마에 든다면 난 이걸로 목을 칠 것이다.”
차르르!
연우강의 손목에서 사망묵환이 풀려나와 허공에 우뚝 섰다.
“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광랑.”
잠룡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까?”
바로 그때 문 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냐, 다 끝났어. 길이는?”
연우강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 반 장 가량입니다. 광랑.”
“ 기연을 얻었구나.”
“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장웅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검강.
검 끝에서 투명한 강기를 생성해내는 경지를 말한다. 검강에 막 들어선 자는 손바닥 길이의 작은 검강을 형성하게 된다.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그 경지는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넘어 반 장에 달하는 검강을 펼치게 된 것이다.
“ 자만하지 않으면 곧 그 경지도 넘어설 수 있을 거다. 배고플 텐데 밥 먹자.”
“ 명심하겠습니다. 광랑.”
마장웅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아버지 마주영 옆으로 가 앉았다.
“ 축하합니다. 군장.”
“ 축하하네, 마 군장.”
잠룡들은 자신이 검강을 얻은 것처럼 마장웅을 축하해 주었다. 마장웅의 등장으로 인해 무거웠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바뀌었다.
일행은 웃으며 식사를 마치고 섬서마가에서 마련해준 숙소로 자리를 옮겨 이차를 시작했다.
이차는 술이었다.
술을 마시기 전에 그렇게 먹어댔음에도 불구하고 잠룡들은 미친 듯이 술을 퍼부었다. 허일구가 찾아온 건 술자리가 끝나고 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 어쩐 일이야?”
자신의 방으로 자리를 옮긴 연우강은 허일구를 향해 물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듯 허일구의 얼굴은 추레하게 그지없었다.
“ 싸우기로 결정했네.”
허일구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싸움을 시작하면 둘 중 한 곳은 뿌리까지 뽑히게 돼. 그래도 상관없어?”
“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린 뿌리까지 뽑히고 있네.”
“ 그 정도로 심해?”
“ 사천과 감숙성은 몰살당했네. 지부장은 물론이고 소지부를 맡고 있던 자들의 가족까지 전부 죽었네. 우린 물러설 곳이 없네.”
“ 각 지부의 지부장들과도 의논이 된 거야?”
‘ 대부분의 지부장들도 전쟁을 하자는 쪽이네.“
“ 하자는 쪽 정도로는 전쟁을 시작할 수 없어. 전에도 말했지만 전쟁을 하려면 이걸 걸어야 해.”
연우강은 제 머리를 툭 쳤다.
“ 지부장들과 부지부장들은 내가 설득하겠네. 자네가 작전을 짜주게.”
“ 일단 각 지부장과 소지부의 지부장들을 만나야 해.”
“ 어디가 좋겠는가?”
“ 악양.”
“ 동정호가 있는 그 악양을 말하는 건가?”
“ 맞아.”
“ 그럼 섬서성과 호북은?”
“ 포기해.”
“ 포기하라고?”
허일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오밀문 문도들은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포기하라니.
“ 응!”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섬서성과 호북에 있는 하오밀문 문도가 몇 명인지 아는가?”
허일구는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 갑자기 폭우가 쏟아질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지 알아?”
“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런가?”
“ 우선 대답부터 해봐.”
“ 마을이라면 처마 밑으로 피할 테고, 숲이라면 커다란 나무 밑으로 들어가겠지.”
“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 비를 맞고 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 이번 비는 그냥 비가 아니고 폭우야, 영감.”
“ 섬서성과 호북을 내주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하오밀문 문도들이 율령궁과 전쟁을 치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말인가?”
“ 맞아, 하오밀문 문도들은 그때부터는 정말로 이번 전쟁에 목숨을 걸게 되지. 더불어 율령궁 무인들에게도 조금씩 문제가 발생하게 돼.”
“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인가?”
“ 그놈들이 생쥐박멸 작전을 시작한 지 이제 두 달 됐어. 늘 그렇듯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의욕이 넘치지. 하지만 일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끝나곤 하면 점차 의욕을 잃게 돼. 더구나 그들은 지상 최강의 단체라는 대야벌 무인들이잖아. 반면에 하오밀문은 무림 문파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하찮은 곳이고. 그런 문파를 박멸한다고 해도 칭찬해줄 사람도 없고, 율령궁 문도들 또한 하오밀문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랑하지도 못해. 율령궁 무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번 생쥐 박멸 작전은 잘하면 본전이고,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 그런 아주 더러운 임무라고 할 수 있어.”
“ 그렇게 따지면 호남보다는 강서나 안휘가 더 낫겠군.”
연우강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태연한 것 같아 공연히 심사가 뒤틀렸다.
“ 완전하게 의욕을 잃으면 큰일 나.”
“ 큰일 난다고?”
“ 병사들의 군기가 빠지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지?”
“ 각 원의 원주들이 부하들을 다그칠 것이란 말인가?”
“ 맞아. 그래서 원주 놈들이 다그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게을러야 한다는 거야. 일을 전혀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하지 않아도 누군가 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상태 말이야.”
“ 천안원 원주 유선은 바보가 아니네. 그는 금세 알아차릴 거네.”
“ 그거 알아?”
“ 뭘 말인가?”
“ 사람은 자기 자신의 단점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야. 설사 누군가가 조목조목 지적해줘도 쉽게 받아들이지않잖아.”
“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 그것도 좋은 예가 될 수 있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 조직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야. 조직에 문제가 생기면 내부를 살피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원인을 찾게 돼.”
“ 조직원들의 정신상태가 나태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치리지 못할 거란 말인가?”
“그래서 호남이 좋은 거야. 거기엔 밀천이라는 좋은 변수가 있으니까.”
“ 활동이 위축되는 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는 말이군.”
“ 그렇지 유선 그자는 조직이 느슨해지는 이유를 밀천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밀천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쓰게 돼. 그때부터 율령궁의 눈과 귀는 분산되고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할 거야.”
“ 그때 시작한단 말인가?”
“ 응!”
“ 인원은 어느 정도 필요한가?”
“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최소 거리를 백 리로 잡아서 인력을 배치해 놔.”
“ 그것만 하면 되는가?”
“ 지금 당장은 그것만 해 놓으면 될 것 같아.”
“ 알았네.”
허일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려고?”
“ 지금 이 시간에도 하오밀문 문도가 죽어가고 있네.”
“ 이번 싸움은 급한 놈이 패하게 돼 있다는 걸 명심해.”
“ 걱정 말게. 절대 경거망동은 하지 않을 테니까.”
“ 그건 그렇고 마총 장보도는 누구 손으로 들어갔지?”
“ 냉정하군.”
밖으로 나가려던 허일구는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율령궁이 대야벌 소속이란 사실을 잊으면 큰일 나, 영감. 영감의 상대는 율령궁이 아니라 대야벌이라고.”
“ 무궐의 손에 들어갔네.”
허일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황궐에서 얻었다는 소문은 내고 있는 거지?”
“ 물론이네.”
“ 알았어. 수고해.”
“ 그럼 악양에서 보세.”
허일구는 밖으로 나갔다.
연우강은 찻잔을 들고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하는 허일구의 축 처진 어깨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 잘 될 거야. 힘내.]
연우강은 멀어지는 허일구를 보며 전음을 보냈다.
[ 클! 내가 너보다 훨씬 어른이야, 자식아.]
허일구는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한동안 허일구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창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겨울바람이 들이닥쳤다.
“ 안 추워?”
그는 오른편 처마 밑으로 시선을 주며 나직이 물었다.
“ 추워 죽는 줄 알았네.”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인영이 뚝 떨어지며 창문에 매달렸다. 그는 허일구의 형님인 허일삼이었다.
“ 넌?”
연우강의 시선이 이번에는 왼편으로 향했다.
“ 난 껍질이 두껍잖아.”
곰처럼 커다란 덩치가 허일삼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일삼은 깜짝 놀랐다
반 시진 정도 처마 밑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반대편에 있는 자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연우강과 허일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고, 누군가가 이곳까지 침입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오 장 떨어진 곳에 숨어 있는 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허일삼은 빙그레 웃고 있는 덩치 사내를 보았다.
평복을 걸치고 있는 그는 막장이었다.
“ 오랜만이오, 너도.”
막장은 허일삼과 연우강을 번갈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 오랜만이네.”
헝리삼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 허 영감은 내려가서 이철상하고 장사덕을 데려와.”
연우강은 차를 준비하며 말했다.
“ 둘만 있으면 되는가?”
하오밀문에 관련된 일이라는 걸 허일삼은 바로 알아차렸다.
“ 지금 당장은 그래, 올 때 술도 좀 가져오고.”
“ 알았네.”
허일삼은 방을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 앉아라.”
연우강은 가운데 의자를 가리켰다.
“ 넌 여전히 바쁘구나.”
막장은 연우강이 가리킨 의자로 가 앉았다.
“ 바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왔냐?”
“ 네가 가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 손바닥 안?”
“ 네가 섬서성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거든. 섬서성으로 갔다면 외상값 받을 일밖에 없잖아.”
막장은 헤벌쭉 웃으며 연우강이 건네준 찻잔을 들었다.
“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났냐?”
“ 그것보다 어떻게 된거냐?”
“ 뭐가?”
“ 담대무궁이 유명계의 목을 자르는 곳에 너도 있었다면서?”
“ 유명계와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담대무궁 그놈이 날아와서는 목을 뎅겅 잘라버리던데?”
“ 정말?”
“ 응! 그러고 나서는 ‘ 내가 유명계의 목을 자랐다. 적장을 잘랐다!’ 라면서 미친 듯이 발광하더라고.”
“ 그러니까 잡기는 네가 잡았는데 목은 그놈이 잘랐다는 거야?”
“ 꼭 잡았다고 할 수만은 없어.”
“ 왜?” “ 난 유명계 앞에서 뒹굴고 있었거든.”
“ 나려타곤 수법으로?”
“ 약을 잔뜩 올려줄 참이었거든.”
“ 미친놈!”
막장은 피식 웃었다.
“ 왜?”
“ 담대무궁은 이번 일로 범천룡으로 확정됐다고 하더라, 이 바보야.”
막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 범천룡?”
“ 잠룡들 중 가장 훌륭한 평가를 받은 열 명을 십지십룡이라고 칭한다는 건 알고 있지?”
“ 그 십지십룡 중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자에게 내리는 칭호가 범천룡이다.”
“ 범천룡이 되면 특전 같은 거라도 있어?”
“ 잠룡대의 대주 자리를 준다고 하더라.”
“ 잠룡대는 또 뭐야?”
“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다만 벌주의 명령만 받는 천상천 직속기관이 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 전엔 잠룡대라는 조직이 없었던 거야?”
“ 전엔 십지십룡에 선출되면 본인이 원하는 곳을 골라서 들어갈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 그러면 잠룡대는 이번에만 생겼다는 말이네?”
“ 그런 셈이지.”
“ 지 새끼를 위해 조직을 만들었구먼.”
“ 그래서 권력이 좋다는 거 아니냐?”
“ 자식. 림주가 되더니 시야가 많이 넓어졌네. 그건 그렇고, 잠룡대라면 잠룡들로 구성하겠다는 거야?”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문득 막장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엔 뭔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은 안정된 여유가 느껴진다. 패천림의 림주가 되면서 저절로 얻어진 것일 터였다.
“ 그렇게 되지 않을까?”
“ 원래 삼 년의 교육 기간이 끝나면 잠룡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거 아니었냐?”
“ 그건 십지십룡에 선출된 녀석들과 대야벌에서 나가는 녀석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나머진 잠룡궁에서 정해주는 조직으로 들어가야 해.”
“ 지금까지 잠룡으로 왔던 녀석들 중 스스로 나간 놈들이 있어?”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인마. 잠룡쟁투를 거치고, 암살대전에서 살아남은 놈들인데 대야벌을 나간다고? 너처럼 정신 나간 놈이 안면 나갈 놈은 한 명도 없을 거다.”
“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룡쟁투를 거치고 대야벌로 들어갔다는 것은 대야벌에 인생을 걸었다는 의미다. 그런 자들이 대야벌을 떠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다. 결국 모든 잠룡들은 잠룡대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 그건 그렇고 여긴 웬일이냐?”
“ 심심해서 왔다.”
“ 심심해?”
“ 나가지도 못하고 지하에 처박혀 있는데 심심할 수밖에 없잖아. 날마다 영양가 없는 놈들만 찾아오고.”
“ 찾아오는 놈들이 많아?”
“ 말도 마라, 패천림 문턱이 닳을 정도다.”
“ 선물도 많이 들어오지?”
연우강은 음흉한 얼굴로 씩 웃었다.
“ 갖가지 영약부터 시작해서 돈까지. 정신이 없을 정도다. 오죽했으면 내가 폐관한다고 핑계를 대고 숨었겠냐?”
“ 사람들이 출세하기 위해 용을 쓰는 이유를 이제 알겠냐?”
“ 그런 모양이다.”
막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은 일 년 전과 비교하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물론 무공이 훨씬 강해지긴 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신분이 천살원 집행사자에서 패천림 림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껏 알은체도 하지 않았던 자들이 선물을 보내고, 한번 만나달라고 한다.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절반밖에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런데 완전하게 장악했더라면....”
막장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 절반밖에 장악하지 못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연우강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을 뱉었다.
제 2 장 영웅은 만들어질 뿐이다.
“ 몰라?”
“ 뭘?”
“ 패천림의 유래 말이야.”
“ 그런 걸 알아서 뭐하게?”
“ 그럼 패천림이 지천의 후예라는 것도 몰랐겠네?”
“ 대야벌을 구성하고 있는 문파 대부분이 영세오천의 후예 아냐?”
“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영세오천의 후예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진 않잖아.”
“ 패천림은 다르다고?”
“ 그들은 지천의 전통을 여태껏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더라.”
“ 지천의 전통은 또 뭔데?”
“ 험!”
바로 그때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철상과 장사덕을 데리러 갔던 허일삼이 올라오면서 낸 소리였다. 긴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들어가도 되는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헛기침을 한 것이었다.
“ 들어와.”
문이 열리고 술병을 든 허일삼 일행이 안으로 들어왔다.
“ 패천림의 림주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림주님.”
“ 축하합니다. 림주님.”
이철상과 장사덕은 막장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 이거 쑥스럽구만, 아무튼 앉게.”
막장은 느긋이 자리를 권했다.
“ 술 더 할 사람?”
연우강은 장사덕이 내려놓은 술병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 아이고, 전 됐습니다. 조장님.”
“ 저도 됐습니다.”
장사덕과 이철상은 극구 사양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얼마나 술을 마셔댔는지 아직 속이 울렁거렸던 것이다.
“ 영감은?”
“ 나는 한 잔 주게.”
허일삼은 술잔을 내밀었다. 동생 걱정에 속이 바싹바싹 탔던 것이다.
“ 염소수염 영감에게도 말했지만, 이번 전쟁은 급한 쪽이 먼저 당하니까 진정해.”
허일삼의 잔에 술을 채운 연우강은 막장과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 알고 있네.”
허일삼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 아까 어디까지 했지?”
연우강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전통까지 했다.”
술잔을 비운 막장이 대답했다.
“ 맞아. 패천림은 지천의 전통을 아직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했지. 그 전통이라는 게 뭐지?”
“ 천등십과을 통해 묻혀 있던 무인을 선발하는 전통을 말하는 거다.”
“ 천등십관이면 혁미월이 만든 관문을 말하는 거야?”
“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이번엔 막장이 깜짝 놀랐다. 혁미월은 천오백 년 이전 사람으로 패천림에서도 잊혀진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 우연히 혁미월이 남긴 책자를 얻었거든.”
“ 진짜?”
“ 응!”
“ 지금 가지고 있냐?”
“ 우선 하던 이야기부터 마무리 짓자, 막장.”
“ 알았다. 지천이 천등십관을 만든 때는 영세오천과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천등십관을 통해 선발된 무인들이 천마를 비롯한 일백마였는데 그들 중 천마는 천등십관의 마지막 관문까지 통과한 무인이야.”
“ 그 천등십관이 지금은 패천심관이란 말이야?”
“ 맞다. 그 천등십관의 이름을 패천십관으로 바꾸었을 뿐, 천오백 년 그대로다.”
“ 그럼 패천림을 세운 자들은 천등십관을 담당했던 자들이였겠네?”
“ 응! 십관을 맡았던 장로들이 세운 문파야.”
“ 인원은?”
“ 인원도 처음부터 천명이었대.”
“ 그럼 천오백 년 동안 천 명을 유지했다는 말?”
“ 응! 그런데 왜 그래?”
연우강의 얼굴이 심각해진 듯하자 막장은 조금 의아했다.
“ 패천림을 잘못 본 것 같아서 그래.”
“ 어떻게 잘못 봤다는 말이냐?”
“ 나는 패천림이 부귀공명보다는 무만 추구하는 집단인 줄 알았거든. 진정한 무인 집단 말이야.”
“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냐?”
“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 패천림이 지천의 후예라는 것 때문에?”
“ 지천의 후예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천오백 년 동안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야.”
“ 그게 어쨌는데?”
막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천 명으로 시작했고, 천오백 년 동안 한 우물만 팠던 자들. 오직 무를 추구하는 무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이상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연우강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 변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는 거냐?”
“ 일단 패천림에 대해서 먼저 들어보자.”
“ 알았다.”
막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패천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는 장장 반시진 동안 이어졌다.
이야기를 듣던 네 사람은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막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재미있네.”
이야기를 듣고 난 연우강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막장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천마 제석강이 천등십관을 통과하는 데 얼마나 걸렸다고 했지?”
“ 일 년 걸렸는데 그는 천등십관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
“ 그러니까 천등십관에 처음 도전할 때는 일류 정도였는데, 십관을 완전하게 통과하고 난 후엔 초극고수가 돼 있었단 말이지?”
“ 그렇다고 하더라.”
“ 그의 소름끼치는 재능에 놀란 지천 수뇌들은 천마와 일백마를 경원하기 시작했고.”
“ 응!”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천등십관은 고수를 뽑는 관문임과 동시에 무인을 키워내는 관문이었다는 말이 되는 거네?”
“ 그런 셈이지.”
“ 그럼 말이야. 만일 막장 네게 천마 제석강 같은 절세의 고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래?”
“ 글쎄, 내게 그런 게 있다면 그 방법을 적극 활용해 세력을 키우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막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 대부분은 그렇겠지?”
“ 대야벌은 강자가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구조를 지닌 조직이니까.”
“ 그럼 다시 물을게. 세력 확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봐야 하지?”
“ 그래서 무를 추구하는 집단이 패천림이라고 했잖아.”
“ 그건 패천림 무인들의 생각이 아니라 외부인들의 평가일 뿐이잖아. 패천림 무인들도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거지.”
“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 못 했다.”
막장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다른 걸 먼저 물어볼게.”
“ 뭔데?”
“ 패천림과 담대만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냐?”
“ 전 림주인 철전패왕 백독수가 군마련 련주 담대천호와 친분이 돈독하다는 걸 빼면 그다지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던데. 아는 거라도 있냐?”
“ 범천담대세가란 이름 때문에 그래.”
“ 범천담대세가?”
“ 천등십관을 통과한 자에게 범천이란 호칭을 부여하고 지천의 천주로 삼는다고 했고, 천등구관의 이름이범천지관이잖아.”
“ 그래서 범천담대세가도 지천의 후예라고?”
“ 그들은 범천이란 이름을 도둑질 한 거야.”
“ 도둑질?”
“ 단순하게 생각해.”
“ 어떻게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거냐?”
“ 범천담대세가를 풀어쓰면 ‘담대세가는 범천이다.’라는 말이잖아.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
“ 담대세가는 지천의 천주라는 의미인 거냐?”
“ 바로 그거야. 막장. 그들은 스스로 지천의 천주라고 칭한 거야.”
“ 그럼 도둑질이라는 건 무슨 말인데?”
“ 범천담대세가는 처남와 척을 진 가문. 즉 천마를 지천의 천주로 인정하지 않았던 가문 중 한 곳이란 뜻이야.”
“ 억측 아냐?”
막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순히 범천을 가문 이름 앞에 넣었다고 해서 천마와 척을 진 가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천마는 일대 범천이자 마지막 범천이었다고 하지 않았어?”
“ 그랬지.”
“ 그 말은 곧 범천이란 칭호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천마 한 사람밖에 없다는 말이 되는 거야. 천마를 존경하는 자들이라면 함부로 쓸 수 있는 칭호는 아니잖아. 정히 쓰고 싶으면 이세 범천으로 해야 옳지. 그게 아니라면 나추옹처럼 다른 이름을 쓰든지.”
“ 여기서 나추옹이 왜 나오는데?”
막장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 그가 남긴 저서의 제목이 만상이잖아.”
“ 마, 만상이라고?”
막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일삼, 이철상, 장사덕 또한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무치벌주 나추옹은 상천의 후예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나추옹마저도 지천, 아니 천마의 후예라고 말을 한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천등십관의 마지막 관문 명칭이 만상지관이라며.”
“ 그렇다고 해도 그까지 천마의 후예로 보는 건 좀 그렇다.”
“ 검지곡의 석상 기억해?”
“ 당연히 기억하지.”
“ 무인들을 그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사람이 나추옹이었잖아.”
“ 검지곡에서 세월을 허비하는 무인들이 안타까워서 그랬다고 하지 않았냐?”
“ 하지만 난 그곳에서 파천육기를 전부 얻었지.”
“ 무치벌주 나추옹도 그곳에 파천육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이냐?”
“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대 벌주였던 대무천자 패는 그곳에 파천육기와 무공을 숨겼고, 나추옹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는 거야.”
“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막장은 답답한 듯 소리쳤다.
“ 검지곡 어딘가에 마총이 있다면 간단하게 풀린다는 거야.”
“ 아!”
연우강의 말을 듣고 있던 이철상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 설명해 봐.”
막장은 이철상을 윽박지르듯 말했다.
“ 그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가장 먼저 천마를 비롯한 일백마가 죽지 않았다는 가정을 해야 합니다.”
“ 산 채 무덤으로 들어갔다는 거냐?”
“ 그래야 조장님의 예측이 맞아떨어집니다.”
“ 천마를 비롯한 일백마는 영세오천과 맞섰던 자들이다. 이철상. 그런 자들이 스스로 무덤으로 걸어들어 갈 이유가 없잖아.”
“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라고 해도 주어진 수명을 벗어날 수는 없잖습니까?”
“ 그러니까 죽기 전에 들어갔단 말?”
“ 일백마는 모르겠지만 천마 제석강은 분명 죽기 직전이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이 창안한 어떤 대법을 통해 가사상태로 들어간 겁니다.”
“ 그러니까 완전하게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지?”
“ 마총으로 들어갈 때는 분명 그랬을 겁니다. 살아 있는 천마와 일백마는 대야벌을 세운 대무천자 패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됐을 테고, 대야벌을 세운 대무천자 패는 천마 일행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을 겁니다. 그러다 결국 마총을 찾아내지 못하자 검지곡에 석상을 세우고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을 남긴 겁니다.”
“ 상천의 무공을 찾는 과정에서 마총을 발견하기를 바랐단 말이냐?”
“ 그렇습니다. 림주님.”
“ 석상 안에 파천육기를 넣어둔 건 왜 그랬지?”
“ 일천독행신의 비밀을 풀어낸 자는 파천육기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영세오천이 다시 힘을 합쳐 천마와 싸우라는 뜻이란 말이냐?”
“ 조장님의 말을 바탕으로 예측한 것뿐입니다.”
“ 그런데 나추옹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으니까, 그건 곧 마총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그런 거로 볼 수 있고?”
“ 그렇죠.”
“ 그 마총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패천림이고?”
이번엔 연우강을 보았다.
“ 지금까지는 전부 예측일 뿐이야.”
“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막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 교랑, 넌 어때?”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이철상을 보았다.
“ 천오백 년 동안 한결같다는 건 인간적인 욕망을 초월한 자들이거나, 대야벌 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로 웅대한 목적을 가진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 대야벌을 우습게 여길 정도의 일이 뭐가 있을까?”
“ 천오백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없습니다.”
이철상은 고개를 저었다.
대야벌보다 더 큰 웅대한 목표라면 황실이 있지만 황실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대야벌을 먼저 장악해야 한다. 대야벌도 어쩌지 못한 자들이 황실을 장악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철상이 없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그럼 그런 패천림이 정상일까?”
“ 절대 정상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 젠장, 천오백 년이나 묵은 똥을 밟은 꼴이네.”
연우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천장을 보았다.
“ 무슨 말이냐?”
듣고 있던 막장이 다시 물었다.
“ 변해야 할 상황인데 변하지 않는 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이야, 막장.”
“ 그러니까 그 다른 의도가 천마의 부활이라고?”
막장은 답답한 얼굴로 소리쳤다.
“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총을 찾아나섰던 기 영감 일행이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야.”
“ 그분들이 마총을 찾으러 간 거였냐?”
“ 전에 우리 집이 폭발할 때 보냈어.”
“ 연락도 없고?”
“ 하오밀문의 시야에도 잡히지 않아.”
“ 정말 패천림이 마총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
막장은 확인하듯 물었다.
기운상 일행의 무공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들 중 기운상은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연락조차 없다는 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 이제부터 그걸 알아봐야지.”
“ 알아본다고?”
“ 시간도 넉넉하고 직접 부딪쳐 보지 뭐.”
“ 패천십관에 도전하겠단 말이냐?”
“ 네 자리를 빼앗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인마.”
연우강은 빈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 그 말이 아니잖아. 자식아!”
막장은 버럭 소리쳤다.
“ 승천비고와 천무비고에 있는 그 늙은 귀신들도 패천림처럼 변하지 않는 부류잖아.”
“ 패천림과 한 집안일 수도 있다는 말이냐?”
“ 그걸 알아보려 간다니까.”
“ 나랑 함께 가자.”
“ 요즘 약 먹어?”
“ 열심히 먹고 있다.”
“ 형수씨의 환영축골공도 배웠고?”
“ 설마 이곳에서 네 흉내를 내고 있으란 말은 아니겠지?”
“ 매일 아침 약을 먹고, 그 다음에 몸 풀기를 하고, 검은 옷을 입고 철립을 쓰고, 궤짝을 메고 다니면 아무도 널 의심하지 않을 거야.”
“ 그럼 너는?”
“ 인피면구를 구해 쓸 거야.”
“ 인피면구를 쓴다고?”
막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우강도 환영축골공을 익혔고, 그의 내공으로 보았을 때 환영축골공으로 얼굴을 바꾼다고 해도 무공을 펼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다.
그런데 인피면구를 쓰겠다니. 녀석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 머리를 약간 쓰면 신분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하니까.”
“ 패천림의 노인네들이 네가 신분을 감춘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 하지만 연우강이라는 사실은 알아선 안 돼.”
“ 야!”
무슨 말인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막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패천림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자가 무무 제천강이던가?”
“ 맞다. 올해 백두 살인데, 무공 정도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자다.”
“ 그 영감의 꼭지가 확 돌아버리게 만들려는 거야.”
“ 꼭지를 돌게 한다고?”
“ 관문을 통과하는 와중에 수십 명을 죽이고, 관문을 전부 깨트렸음에도 불구하고 림주 자리를 거절하고, 얼굴을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한데 정확한 신분은 알 길이 없다면 화가 조금 나겠지?”
“ 패천십관에 도전하려는 진짜 이유가 뭐냐?”
막장은 되물었다.
“ 패천림이 왜 변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그런다니까.”
“ 패천십관을 깨트리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거냐?”
“ 그들이 천마의 후예라면,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어.”
“ 왜?”
“ 천마의 두 번째 부인인 잠마 희수연은 원래 흑천 천주였던 가립하의 정인이었거든.”
“ 그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 천마와 가립하는 한 여자를 두고 싸운 연적이었단 말이야.”
“ 그러니까 그 두 놈이 연적이었다는 게 지금 상황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고, 자식아!”
“ 내 사부가 가립하야.”
막장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만일 그들이 정말로 천마와 관련이 있다면 지난 천오백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침묵할 수 없을 거야. 왜냐면 패천십관, 아니 천등십곤을 깨트린 자는 흑천 천주니까.”
“ 네가 흑천 천주라는 사실을 밝히겠다는 거야?”
“ 인피면구를쓰겠다고 했다는 말 잊었어?”
“ 에이! 네가 알아서 해, 자식아.”
결국 막장은 손을 들고 말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연우강이 원하는 건 알 수가 없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 잘될 테니까, 걱정 마.”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이철상과 장사덕을 보았다.
“ 말씀하십시오, 광랑.”
“ 동정호에서부터 원강과 지수까지 샅샅이 훑어서 지도를 만들어 놔.”
“ 공격지도입니까 아니면 방어지도입니까?”
“ 공격지도가 좋겠어.”
“ 그러면 들어가는 길가 나오는 길이 같아야 하겠군요.”
“ 그런 장소가 최소한 열 곳은 필요해.”
“ 장소 간 거리는 어느 정도로 할까요?”
“ 이백 리 정도 떨어지면 될 것 같고, 같은 장소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우리가 한두 시진은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알아봐.”
“ 지름길이 있는 곳으로 알아보란 말이군요.”
“ 동정호 동쪽에 보면 화선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는데, 알아?”
“ 알고 있습니다.”
“ 그곳에 호화루라고 있을 거야. 그 화선의 주인이 육대라는 녀석인데 그 녀석을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해.”
“ 육대란 자의 도움을 받으란 말입니까?”
“ 도움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 친구들도 이번 작전에 참여하게 될 거야.”
“ 그자가 누굽니까?”
“ 전에 황룡호 주인이었대.”
“ 황룡호라면 장강수로채 채주란 말입니까?”
“ 응.”
“ 알겠습니다.”
“ 열 명을 데리고 가. 허 영감도 따라가고.”
“ 알겠네.”
“ 지금 바로 출발해.”
“ 지도는 언제까지 만들어야 합니까?”
이철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 한 달 보름 후에 호화루에서 봐.”
“ 그때 뵙겠습니다. 광랑.”
“ 나중에 뵙겠습니다.”
“ 호화루에서 보세.”
세 사람은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거냐?”
막장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율령궁의 집행사자를 했기에 누구보다 그곳을 잘 안다. 율령궁은 천상천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실제 전력 면에서는 야궐이나, 무궐, 황궐에 비해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반면에 하오밀문은 무림문파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 세력이다. 그런 자들이 율령궁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연우강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 염소수염 영감이 하겠다고 하잖아.”
“ 넌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오직 허일구 영감과의 인연 때문에 도와준다는 거냐?”
“ 나는 단지 얼굴을 안다는 것만으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움을 주는 성인군자가 아냐, 막장.”
“ 그럼?”
“ 사람의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면 눈과 귀야. 조직도 마찬가지야. 거대한 조직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눈과 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하는 놈들이 바로 율령궁이야.”
“ 밀정과 무인을 합치면 율령궁은 만오천 명이나 된다. 반면에 잠룡 십 조는 전부 합친다고 해도 팔십 명 남짓이고.”
“ 백수는 남는 게 시간밖에 없는 사림이잖아.”
“ 미친놈!”
“ 맞아, 미친 듯이 없애는 거야. 놈들이 도망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다 죽이게 되겠지.”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 그런데 앵속은 또 뭔 소리냐?”
“ 궤짝 안에 들어 있으니까 맛보고 싶으면 알아서 꺼내먹어.”
“ 정말 앵속을 복용하고 있는 거냐?”
막장은 연우강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 내가 앵속쟁이라면 문제가 될까?”
“ 대부분이 너를 쓰레기 취급할 거다.”
“ 넌?”
“ 난 상관없다.”
“ 그럼 됐잖아.”
“ 끄응! 하여간 너는?” 막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녀석의 말이 마다. 자신은 연우강이란 인간을 사귀었을 뿐, 배경 때문은 아니다. 그와 친구가 되는데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라는 신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앵속쟁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공연한 질문일 뿐이다.
“ 대야벌 상황은 어때?”
“ 어떤 상황?”
“ 전하고 똑같아?”
“ 내가 보기엔 별로 달라진 게 없고 오히려 전보다 더 차분해진 듯한 느낌이다. 내가 모르는 일이 진행 중인 거냐?”
막장은 대야벌을 떠올려보았다. 폐관을 핑계로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곳을 나올 때 은밀하게 야장에 들려 창노와 무원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창노와 무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똑같단 말이지.”
연우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한동안 술잔을 응시하던 연우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 또 비밀이냐?”
“ 막장.”
“ 말해라.”
“ 어린 자식이 있는 집안은 항상 시끄럽다는 거 알아?”
“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자식아.”
“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애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궁금하거든. 그래서 선반 위에 있는 것도 끄집어 내리고, 벽장 안도 확인하면서 쉬지 않고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녀. 쉽게 말하면 항상 시끄럽다는 말이야. 아이 엄마도 그걸 알기 때문에 집안이 시끄러우면 아이를 찾지 않아. 그런데 어느 순간 집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경우가 있어. 왜 그런지 알아?”
“ 왜 그러는데?”
“ 집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꼬맹이가 사고를 쳤다는 뜻이야.”
“ 담대만승이 너보다 나이가 많다. 연우강.”
“ 애들과 어른의 차이점이 바로 그거야. 애들은 사고를 치고 나서 조용해지지만 어른은 사고를 치기 직전에 조용해져.”
“ 대야벌이 사고 치기 직전이란 말이냐?”
“ 결과가 나오면 그때 보자고. 그보다 나올 때 뭐라고 하고 나왔냐?”
“ 나올 때?”
“ 그냥 도망쳐 나온 거야?”
“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다.”
“ 그건 잘했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금 떠나려고?”
“ 한 달 보름밖에 시간이 없어. 개 발에 땀나게 뛰어야 해.”
연우강은 한편에 둔 궤짝으로 가서는 뚜껑을 열어 사망묵의를 걸치고 암기를 착용했다. 그러고는 백령이 들어 있는 자루를 들었다.
“ 이건 네가 쓰고 다녀라. 묵사는 허리에 걸치면 돼.”
연우강은 사망철립을 막장에게 던졌다.
“ 알았다.”
잠룡들에게는 말을 해 놓을 테니까 평소 하던 대로 해. 굳이 내 흉내를 내려고 하지 말고.“
연우강은 방을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각 군장들을 불러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각본을 짜는 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 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에 “ 그럼 호화루에서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연우강의 말을 듣고 남궁운화가 물었다.
“ 그렇습니다. 남궁 소저.”
“ 노 할아버지께 안부 전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연우강은 섬서마가를 나섰다. 짙은 어둠이 깔린 밖은 차가운 바람이 거세가 몰아치고 있었다. 연우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섬광처럼 밤하늘을 관통해 지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 제기랄! 포탄으로 한 방에 끝내버렸으면 좋겠구먼.”
연우강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곧 야조처럼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장마 끝에 태양이 비추듯, 사람이 사는 것도 항상 궂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궂은 일이 있다 보면 좋은 일이 있기 마련이고,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로 인해 울적했던 마음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주기도 한다.
대야벌의 천상천의 상황이 그랬다.
무면천군단의 몰살과 함께 시작된 불행이 범천담대세가의 멸망으로 이어지면서 천상천에서 일하던 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
그랬던 천상천으로 희소식이 날아든 건 며칠 전이었다. 벌주의 막내이자, 이제는 독자가 된 담대무궁이 밀천 무인 이천여 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밀천 무인을 이끌던 유명계의 수급을 취했다는 소식이었다.
오랜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더불어 잔뜩 얼어 있던 천상천에 훈훈한 기운이 조금씩 감돌기 시작히였고, 급기야 금일 아침에는 몇몇 수뇌들이 천주의 호출을 받고 천상천으로 들어오면서 천상천 소속 무인들은 물론이고 일꾼들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담대만승의 호출을 받은 무인은 천상천의 군사인 만우량, 군마련 련주 담대천호, 무궐 궐주 공손정우, 율령궁 궁주 우담보, 조양궁 궁주 범일승, 잠룡궁 궁주 혁세군. 야궐 궐주 혁련무군의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천상천으로 들어서자마자 삼 층 소회의실로 안내됐다.
이어지는 낭보로 인해 천상천의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소회의실에 앉아 있는 일곱 명의 얼굴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면 앞에 놓은 차만 홀짝거렸다.
드르륵!
삼층 서재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열리며 담대만승이 걸어나왔다.
“ 벌주님을 뵙습니다.”
“ 벌주님을 뵙습니다.”
일행은 일제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 오랜만이네.”
인사를 받는 담대만승의 목쇠는 무거웠다.
아직 가문이 멸망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덥수룩이 자란 수염을 깎고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초췌했다.
“ 앉지.”
담대만승은 그의 자리로 가 앉았다.
만우량 일행이 자리에 앉은 사이에 담대만승을 따라 나온 시비가 찻잔에 차를 채웠다.
“ 넌 나가 있거라.”
찻잔을 전부 채우고 나자 담대만승은 시비를 물렸다.
“ 알겠습니다. 벌주님.”
시비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범천담대세가가 멸망한 후 첫 만남이라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한 탓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담대만승이었다.
“ 그동안 개인적인 일로 여러분을 힘들게 한 것 같소. 내 정식으로 사과하리다.”
“아닙니다. 벌주님. 오히려 우리들이.....”
“ 됐네. 뇌천. 방금도 말했지만 그 일은 나 담대만승의 사적인 일이네. 이제 추모 기간도 끝났으니까 다시 일을 해야지.”
“ 송구합니다. 벌주님.”
만우량은 고개를 푹 숙였다.
“ 오늘 회의 안건은 뭔가?”
텅 빈 만우량의 왼팔을 쳐다보며 담대만승이 물었다.
“ 전부 네 가집니다.”
“ 말하게.”
“ 첫 번째 안건은 잠룡강호행에 나가 있는 잠룡들에 대한 평가고, 두 번째는 팔황새에 대한 건, 세 번째는 밀천, 네 번째는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와 만마림 사월림의 처리에 관한 건입니다.”
만우량이 잠룡들에 대한 건을 첫 번째 안건으로 선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식의 멋진 활약을 들으면서 얼굴을 찌푸리는 부모는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담대만승도 아들인 담대무궁의 활약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듯 공개적인 자리에서 언급되면 기분은 더욱 좋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만우량의 의도가 먹힌 듯 했다.
“ 잠룡들의 교육 기간은 아직 일 년이나 남았지 않았는가?”
담대만승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교육 기간이 아직 남았다고 하지만 이미 실전 경험까지 쌓은 상태라 지금까지 평가를 뒤집을 만한 사건은 별로 없을 걸로 보고 있습니다.”
“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평가 결과는 어떤가?”
담대만승의 시선이 잠룡궁의 궁주 천기만리통 혁세군에게로 향했다.
“ 최고 평점은 잠룡 십조였습니다. 벌주님.”
‘ 저런, 눈치 없는 친구를 봤나!’
만우량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잠룡강호행에서 잠룡 십조가 가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잠룡 십 조의 조장인 연우강에게서 결정적인 흠이 드러났고, 그 흠은 그동안 얻었던 모든 점수를 까먹고도 남는다. 굳이 잠룡 십 조를 언급할 필요 없이 밀처과의 전쟁에서 최고의 공훈을 세우며 유명계의 목을 자른 잠룡 일 조가 최고 평점을 받았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혁세군은 순진하게도 있는 그대로를 말해버린 것이다. 만우량은 슬쩍 담대만승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대로 담대만상승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 그러면 잠룡 십 조의 조장인 연우강이 범천룡이 되는 건가?”
“ 그가 정상이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 정상적인 자가 아니란 말인가?”
연우강이 앵속쟁이라는 사실은 이미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담대만승은 처음 듣는 말인 양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앵속쟁이로 밝혀졌습니다. 벌주님.”
“ 확실한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그가 군에 있을 때부터 앵속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그가 앵속쟁이라고 해도 잠룡 십조는 다른 어떤 조보다 월등히 많은 공을 세웠네.”
“ 바로 그 공이 문젭니다. 벌주님.”
“ 무슨 말인가?‘
“ 지휘관은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해야 하고,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냉철한 판단력입니다. 그 냉철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공격과 후퇴를 명하게 되는데, 앵속쟁이는 그러한 판단력이 결여돼 있습니다. 즉 기분 내키는 대로 진퇴를 명하곤 합니다. 그런 자에게 수천의 목숨을 맡기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고 판단했습니다.”
“ 하지만 그는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네. 열 개 조 중 잠룡들이 가장 많이 살아남은 조이기도 하고. 단순한 소문으로 그를 앵속쟁이로 치부하고 그동안 세웠던 공을 깎아 내리면, 내 아들을 키워주기 위해 연우강을 모함한다는 말이 들려올 수도 있네. 아니 수뇌들은 몰라도 하급 무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네. 지휘관으로서 자격미달이라고 하고 싶으면 정황이 아니라 증거가 있어야 하네.”
“ 증거는 있습니다. 벌주님.”
“ 무슨 증거가 있단 말인가?”
“ 흑랑기 몰살 사건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벌주님. 연우강이 대장으로 있었던 흑랑기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았던 막강한 부대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한 번의 작전으로 인해 몰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 지금 잠룡 십조의 상황도 마찬가지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잠룡 십 조 또한 단 한번의 패배도 없었지만 단기전이 아니고 장기전이 된다면 그들 또한 흑랑기처럼 몰살당하고 말 겁니다.”
“ 연우강이 앵속쟁이만 아니라면 최고 지휘관이란 말이 되는 건가?”
“ 솔직히 그렇습니다.”
“ 좋네. 혁 궁주의 판단에 따르겠네. 잠룡궁의 결정에 누구도 이의를 제가하지 않도록 확실한 논리를 세워야 할 거네, 혁 궁주.”
“ 그렇게 하겠습니다. 궁주님.”
“ 잠룡 십 조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조는 몇 존가?”
“ 잠룡 일 조입니다.”
“ 내 아들이라고 후한 점수를 준 겐가?”
“ 그럴 것 같았으면 잠룡 십조가 최고 평점을 받았다는 보고를 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벌주님.”
“ 공정한 평가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담대무궁은 밀천 무인 이천 명과 전투를 치를 때 지휘관이었으며 과거 대야벌 소속 생사림 림주였던 마수귀의 유명계의 목을 잘랐습니다. 그가 아니면 범천룡 자격이 있는 자는 없습니다.”
“ 그 다음은 몇 존가?”
“ 구룡대군 윤허가 이끌고 있는 잠룡 이조가 세 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 그랬군. 아무튼 모든 잠룡들이 인정할 수 있도록 공정한 평갈ㄹ 내리도록 하게.”
“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벌주님.”
혁세군은 고개를 숙였다.
“ 그리고 잠룡대라는 조직을 만든다는 말이 돌던데 그건 무슨 소린가?”
담대만승의 시선이 만우량에게로 향했다.
“ 우리 대야벌은 생사림의 벌내쟁투와 만마림과 사월림이 황실과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상당히 침체돼 있습니다. 대야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획기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추진하게 된 일입니다. 벌주님.”
“ 잠룡대 창설이 침체된 대야벌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고 보는가?”
“ 분위기를 바꾸는 건 조직이 아니라 새로운 영웅입니다. 벌주님. 밀천 이천 명과 싸워 승리를 거둔 잠룡들은 전부가 영웅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을 전면으로 내세우게 되면 대야벌 소속 무인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 밀천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포석인가?”
“ 그렇습니다. 밀천과 전쟁을 치르게 될 때 그들은 선봉에 서게 될 겁니다.”
“ 지원도 있어야겠구먼.”
“ 천상천에서 지원하고 각 궐과 련 그리고 림에서 조금씩만 지원해 준다면 그들은 대야벌 최고의 활력소가 될 겁니다. 벌주님.”
“ 괜찮은 방법이군.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담대만승은 야궐 궐주 혁련무극과 무궐 궐주 공손정우를 보았다.
“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말과는 다리 대답하는 공손정우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영웅 만들기.
어떤 조직에서 조직원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자신 또한 적환규나 육사이, 설야를 련주와 림주로 만들 때 그렇게 했다.
공을 세우게 한 다음 그 공을 부풀리기만 하면 조직원들은 공을 세운 자를 열광적으로 따른다. 그러다 보면 굳이 영웅이라고 떠벌리지 않아도 저절로 최고의 영웅으로 만들어진다.
더구나 담대무궁은 이번 잠룡강호행에서 왼팔까지 잃은 상태가 아닌가. 범천조화신기를 욕심내다 그렇게 됐지만 사람들은 전투를 하다가 왼팔을 잃었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왼팔을 잃고 유명계의 머리를 취한 그의 모습은, 자기희생과 공훈이라는 영웅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영웅 만들기에 돌입했다는 게 뻔히 보였지만, 어찌됐든 지금 대야벌 상황에서는 필요하기에 반대를 할 수도 없었다.
공손정우는 야궐 궐주 혁련무극을 보았다.
“ 나도 찬성입니다. 우리 야궐은 잠룡대를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야궐 궐주인 혁련무극이 찬성표를 던졌다.
“ 군마련 련주는 어떤가?”
담대만승은 동생이 담대천호를 보았다. 친동생이라고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군마련의 련주로 대우해야 하기 때문에 반공대를 했다.
“ 잠룡대로만 끝난다면 저도 찬성입니다.”
“ 무슨 말인가?”
“ 나중에 잠룡림이나, 잠룡련 같은 큰 조직으로 키우지 않는다면 찬성한다는 뜻입니다. 벌주님. 물론 담대무궁 혼자 힘으로 조직을 키운다면 상관없겠지만, 천상천을 비롯한 각문파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큰다면 대야벌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벌주 자리를 노리고 있는 담대천호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가 벌주의 동생이라고 하지만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키우기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담대천호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 그건 걱정 말게. 담대 련주, 개인적으로 잠룡대를 도와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친동생인 담대천호에게 그런 말을 듣자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담대만승은 담대 련주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 그렇다면 저도 찬성입니다. 벌주님.”
담대천호는 담대만승의 시선을 피하며 나직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