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03화 (103/232)

제 3장 잘 주겠지, 뭐.

돈과 권력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였던 옛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말들을 두 형제는 척척 뱉어냈다.

두 형제 간에 오간 뼈있는 말들로 신래는 어색한 침묵에 짓눌렸다. 일행은 누군가가 입을 열어주길 바라며 말없이 자신들의 찻잔만 응시했다. 이번에도 역시 대화의 물꼬를 튼 사람은 벌주 담대만승이었다.

“ 그 일은 잠룡궁 궁주와 상의해서 처리하도록 하게. 두 번 째 안건은 팔황새에 대한 건이라고 했는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 어느 선까지 알고 있는가?”

“ 이곳에 있는 이들만 알고 있습니다. 군마련 련주와 무궐 궐주는 반대하는 입장이고, 야궐 궐주와 율령궁, 잠룡궁, 조양궁 궁주는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 반대하는 이유가 뭔가?”

담대만승은 담대천호와 공손정우를 보았다.

“ 팔황새는 일천 년 전부터 우리 대야벌의 적이었습니다. 벌주님. 게다가 최근엔 잠룡들을 보내 정벌을 시도하기도 했고요. 그런 자들을 대야벌로 끌어들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 감정의 앙금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담대천호의 목소리에 조금 날이 섰다.

“ 그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보는가?”

담대만승은 다시 물었다.

“ 그렇습니다. 벌주님.”

“ 불순한 의도는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가?”

“ 대야벌에 반기를 드는 걸 말합니다.”

“ 설사 반기를 든다고 해도 그들이 노리는 건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련주 생각은 어떤가?”

담대만승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자리를 가리켰다.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벌주님.”

“ 이 자리는 대야벌을 구성하고 있는 삼궐칠련십림의 모든 무인의 꿈인 걸로 알고 있는 데, 아닌가?”

담대만승은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 그건...”

담대천호는 할 말이 없었다.

형님 말은 설사 반기를 든다고 해도 팔황새 무인들이 노릴 수 있는 건 대야벌 벌주 자리밖에 없다는 의미다. 더불어 자신은 물론이고 공손정우나 혁련무극, 우담보, 범일승 혁세군 등 대야벌에 속한 모든 무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벌주 자리는 대야벌 모든 무인들의 꿈이네, 련주. 삼궐칠련십림에 속해 있는 오만의 대야벌 무인들이 모두 인정하는 절차와 방법만 제대로 지킨다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고, 그 제도가 오늘날의 대야벌을 만들었네.”

“ 그렇다고 해도 팔황새는 위험한 자들입니다. 벌주님.”

담대천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그도 담대만승의 말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껏 대야벌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을 막지 않았고, 나가는 자들 또한 잡지 않았다. 아니 외부에서 들어온 자들로 인해 지상 최고의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팔황새는 지금껏 들어왔던 세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단일세력이 아니라 여덜 개의 문파를 하나로 합친 조직이고, 보유 무인들의 수도 자그마치 사만에 달한다. 그런 자들이 대야벌로 들어오게 도면 대야벌의 세력 구도가 바뀌게 된다. 대야벌의 세력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거대 세력이 들어오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일천 년 동안 대야벌의 골칫거리였던 팔황새를 병합한 공을 형님이 차지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고 해야 옳았다. 차기 벌주 자리를 노리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팔황새의 대야벌 가입을 찬성할 수가 없었다.

“ 나도 군마련 련주의 말에 동의하오. 다른 세력이라면 몰라도 팔황새는 반대요.”

공손정우가 담대천호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미 담대천호와 공손정우가 반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담대만승은 놀라지 않았다.

“ 우리 대야벌은 외부 세력을 받아들이면서 성자했다는 걸 잊은게요?”

담대만승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 물론 잊지 않았소이다. 벌주. 하지만 담대 련주가 말한 것처럼 지난 일천 년 동안 팔황샌ㄴ 우리 대야벌의 적이었소. 그런 자들에게 대야벌의 앞마당을 내주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외다.”

공손정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그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는 거요?”

담대만승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벌주!”

공손정우는 불쾌한 얼굴로 담대만승을 쏘아보았다.

“ 내가 할 소리요, 공손 궐주. 적어도 대야벌의 벌주를 꿈꾸는 분이라면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 되오.”

“ 벌주!”

공손정우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 내 말 마저 들으시오. 공손 궐주. 우린 흔히 대야벌을 곧 무림이라고 말을 하오. 하지만 그 말이 진정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소. 그 말의 뜻은 대야벌은 들어오고 나가는 게 자유롭다는 말이오. 그가 악인이라도 상관없고, 황실 관리라도 상관하지 않소. 심지어는우리 대야벌의 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요. 대야벌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대야벌 무인이 되는 거고, 벌주 자리의 꿈을 꿀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되요. 단, 벌주 자리를 노리는 건 대야벌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거요.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 목을 친다고 해서 벌주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요. 그리고 우리가 팔황새를 거절하는 순간 대야벌은 무림 자체가 아니라 밀천과 같은 무림 문파로 전락하게 되오. 공손 궐주는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요?”

공손정우는 말없이 담대만승을 보았다.

그가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산 앞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강한 무공, 좋은 집안, 든든한 배경, 담대만승은 완벽한 조건을 구비한 자였고, 그를 벌주로 만든 원동력이 바로 그런 외적인 요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그를 질시하는 마음이 한사코 진실을 가리고 있었던 거였다.

담대만승은 그 자체가 거악이었다.

공손정우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앉았다.

“ 두 분의 우려를 모르는 바 아니오. 나 또한 그들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소이다. 하지만 여긴 일반 무림 문파가 아니고, 대야벌이오. 바로 무림이란 말이오.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소.”

“ 조건없이 받아들인단 말이오?”

“ 그건 아니오, 공손 궐주.”

담대만승은 만우량을 보았다.

담대만승의 시선을 받은 만우량은 준비한 자료를 각 수뇌들에게 한 장씩 건넸다.

공손정우는 종이를 펼쳤다.

그곳에는 팔황새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적혀 있었다.

“ 자료에 나와 있는 것처럼 팔황새는 총 사만의 무인을 보유하고 있소. 그들 중 소위 일류라고 부를 수 있는 무인은 삼천이고, 이류는 일만 정도고, 나머진 삼류라고 보면 되오. 즉 팔황새의 정예는 총 삼천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외다. 만일 우리가 대야벌로 들어오는 팔황새 무인의 수를 일만으로 제한한다면 일류 무인 중 천오백 정도가 들어올 수 있고 나머지는 이류나 삼류로 채우게 될 거요.”

“ 그 정도라면 찬성입니다.”

“ 나도 찬성이오.”

공손정우와 담대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주가 양보하고 나오는데 더 이상의 반대는 무의미했다.

“ 좋소. 그럼 팔황새를 받아들이는 걸로 결정하도록 하겠소.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소이다.”

공손정우가 제동을 걸었다.

“ 어떤 사항이 남았소?”

“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자칭 팔황천의 천주라고 하는 북천대제 야율사은은 연우강과 흑랑기 동기고 그가 대야벌로 들어올 생각을 한 이유가 연우강 때문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소이다.”

“ 연우강이 야율사은과 친구라는 게 문제가 된단 말인가?”

담대만승은 공손정우를 보며 물었다.

“ 큰 문제의 시작은 항상 사소한 일이라고 알고 있소, 벌주.”

“ 물론 그렇소. 공손 궐주.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이 커지기 위해서는 그 사건을 저지른 자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가 돼야 하오. 연우강이 그런 자라고 생각하시오?”

“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말이오?”

“ 그렇소이다. 설사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연우강은 금룡 연씨 세가의 업둥이고, 야장의 똥지게고, 앵속쟁이일 뿐이오.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보오.”

“ 그럼 단철ㄷ문과 무쌍검문, 그리고 대야벌 소속 무인들로 보이는 그들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참이오?”

“ 그건 지금 조사 중이오. 공손 궐주.”

“ 특이한 사항이라도 발견했습니까?”

공손정우는 내심 움찔했다.

회혼마인 서른 구를 누담생에게 딸려 보낸 후 야궐 무인들이 출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그런데 누담생에게 철수 명령을 전달하러 갔던 자는 모래 속에 묻혀 있는 수백 명의 시체만 발견했다고 연락을 해왔다. 급하게 사람을 보내 회혼마인의 시체를 치우긴 했지만 그곳 상황을 직접 확인하지 못해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담대만승의 입에서 아직 조사 중이라는 말이 나오자 공연히 조바심이 났다.

“ 시체의 일부가 발견됐는데 강시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왔소이다.”

“ 강시라고요?”

“ 아직은 조사가 끝나지 않아 정확한 답변을 할 수는 없소. 다만 회혼마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오.”

“ 회, 회혼마인이란 말이오?”

공손정우는 경악한 척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 회혼마인을 아시오?”

담대만승은 공손정우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천마삼강의 하나라고 알고 있소. 그런데 회혼마인의 위력은 어느 정도요?”

식은땀이 흐르는 듯 등줄기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공손정우는 태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 회혼마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최소한 강기를 펼치는 무인 두 명은 있어야 하고, 상대가 불사의 신체를 지닌 회혼마인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리고 반드시 목을 잘라야 하고.”

“ 엄처난 병기군요.”

“ 그렇소. 궐주. 회혼마인은 지금껏 만들어진 병기들 중 최강이오.”

“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어느 선까지 조사가 진행됐는지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소. 다만....”

“ 다만?”

공손정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 나는 다만 대야벌에서 제강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 대야벌의 어떤 세력이 제강했을 거라고 본다는 말이오?”

“ 대야벌에서 간혹 천마의 무공이 발견되는 이유를 아시오?”

담대만승은 되물었다.

“ 천마를 배출한 곳이 지천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대아벌에 속한 모든 무인은 천마의 무공이 간혹 발견되는 이유를, 천마를 배출했던 지천이 대야벌을 세운 한 축이라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그러데 담대만승의 말은 그게 다가 아닌 듯했다.

“ 물론 그이유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천상천이 자리한 이곳은 과거 지천의 총단이 있던 자리라서 그렇소이다.”

“ 그, 그럼 여기가 지천의 옛터란 말이오?”

공손정우는 깜짝 놀랐다.

“ 그렇소. 궐주. 여긴 지천의 옛터고 천상천의 건물 또한 여러 번 보수를 거쳐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이 됐지만, 지천의 천주 집무실이었소.”

“ 맙소사.....”

공손정우는 멍한 얼굴로 담대만승을 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천마회혼대법이 적힌 비급을 얻은 이유를 알 듯했다. 이곳이 바로 지천의 옛터였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문제라는 거요. 만일 회혼마인을 제강해낸 자가 천년마인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그들을 깨운다면 우린 이승에서 지옥을 보는 목격자가 될 거요.”

“ 도대체 천년마인은 뭐요?”

“ 천년마인은 정확하게 말하면 강시가 아니오.”

“ 그럼?”

“ 제석강 본인을 비롯한 일백마를 일컫는 말이오.”

“ .....!”

공손정우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아니 비단 공손정우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담대만승을 보았다.

천마 제석강, 그리고 일백마.

그들은 천오백 년 전 무인들이다. 그런 그들이 천년마인이란 이름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 정말입니까?”

친동생인 담대천호도 처음 듣는 말인 듯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천마 제석강이 천년마인으로 다시 태어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 사건 때문이었네, 련주.”

“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겁니까?”

담대천호는 쫓기듯 물었다.

“ 우연하게 귀혼마제 무두립이란 자의 유해를 발굴한 사건이었네. 단전에 내단을 형성한 무인들의 유해는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는 것은 군마련주도 알고 있을 거네.”

“ 하지만약간의 충격을 주게 되면 곧바로 가루로 변하고 맙니다.”

“ 그런데 귀혼마제의 시신은 그렇질 않았네. 강시술을 극성으로 익히 그의 시신은 오백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생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더군. 고대 강시술을 바타으로 풍천마인을 제강해낸 경험이 있던 천마는 모두립이 남긴 귀보라는 책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책자에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두립의 상태를 불사인이라고 기록돼 있었다고 하네. 하지만 불사인은 몸만 살았을 뿐 혼이 없는 시체와 같은 상태였네. 수년 동안 귀보를 연구한 천마는 무덤으로 만들어놓은 마초에서 첫 번째 불사인을 제강해 내게 되는데 그 강시가 바로 반인반시라는 회혼마인이네. 그러고는 최종적으로 제강해낼 불사인을 천년마인이라고 이름 짓게 되었네.”

“ 만들어 냈습니까?”

담대천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 그는 천년마인을 제강해내겠다는 말을 남기고 일백마와 함께 마총으로 들어갔다네.”

“ 나오지 못했군요.”

“ 그가 나왔더라면 무림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쓰였겠지, 파천육기나 영세오천의 전설도 생겨나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그가 성공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도 없지만, 실패했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없었다네.”

“ 오직 천마의 뜻이란 말입니까?”

“ 그는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네.”

“ 범천담대세가의 가주에게만 허락된 비밀입니까?”

“ 그렇네. 가주가 아니면 천마의 비밀은 접할 수 없네.”

“ 형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까.

담대천호는 벌주 대신 형님이라고 불렀다.

“ 난 실패했다는 쪽이네.”

“ 성공했다면 천오백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거란 말입니까?”

“ 그렇네.”

“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담대천호는 비로소 찻잔을 들어 올렸다.

문득 마총으로 들어가가는 걸 거부하고 떠났다는 희수연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가 마총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천년마인 제강에 실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도대체 그런 사실을 벌주는 어떻게 아신 거요?”

한 마디 말도 없이 두 형제의 말을 듣고 있던 공손정우가 물었다. 박학다식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림사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는 처음 듣는 비사였다.

“ 무성이 왜 세워졌는지 아시오?”

담대만승은 공손정우를 보며 물었다.

“ 수백 년 동안 전쟁을 치렀던 영세오천이 휴전을 하면서 세운 단체로 알고 있소.”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이오, 궐주.”

“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오?”

“ 천마를 상대하기 위해 힘을 합쳐 만든 단체가 무성이었소.”

“ 지천의 천주가 천마라고 알고 있는데, 아니오?”

“ 그 당시 지천은 천마를 천주로 인정하는 자들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의 두 패로 나뉘어진 상태였소.”

“ 그럼 범천담대세가는?”

문득 범천담대세가가 지천의 후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범천담대세가는 천마가 천주로 등극하기 전에 지천의 천주를 배출했던 가문이었소.”

“ 역시......”

공손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천담대세가가 담대만승 같은 엄청난 무인을 배출해낸 이면에는 영세오천의 한 곳인 지천이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인은 없다고 하였던 말이 담대만승으로 또 한 번 증명이 된 셈이었다.

“ 이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구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일행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담대만승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 역시 변했어.’

만우량은 내심 중얼거렸다.

회혼마인과 천년마인을 들먹이면서 전설로 불리는 천마 제석강을 끌어들이고 범천담대세가로 마무리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천년마인이나 지천의 역사가 아니라 범천담대세가는 천마와 싸웠던 가문, 즉 천마와 동격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야궐 궐주 혁련무극이나 무궐 궐주 공손정우의 표정을 보면 벌주의 의도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 하지만......’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뇌천.”

담대만승의 채근으로 만우량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만우량은 입을 열었다.

“ 아! 네. 이번 안건은 황궐을 비롯하 네 문파와 만마림과 사월림의 처리에 대한 건입니다.”

“ 뇌천 자네 생각은 어떤가?”

“ 그들은 좀 더 두고 보는 게 나을 듯합니다.”

“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는가?”

“ 밀천이 개파대전을 미루고 있는 이유가 아무래도 그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 우리가 그들을 제거하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벌주님.”

“ 너무 늦으면 공야일우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게 될지도 모르네, 뇌천.”

“ 그동안에 만마림과 사월림을 구할 방도를 찾아봐야겠습니다.”

“ 구할 방도?”

담대만승은 의아한 얼굴로 만우량을 보았다.

이미 만마림과 사월림은 포기하였고,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칠 때 소모품으로 이용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다. 그런데 구할 방도라니.

“ 동창과 금의위의 권력다툼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 북경에 변고라도 생긴 건가?”

“ 남경왕 주진무가 북경으로 입성하여 세력판도가 다시 짜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 하면?”

“ 그동안 수세에 몰려 있던 금의위가 주진무 쪽으로 붙으면서 급격하게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 주진무가 북경으로 간 이유를 알아냈는가?”

“ 아들인 주무상 사건 때문이라고 합니다.”

“ 주무상 사건?”

“ 극비로 취급되는 사항이라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주무상의 죽음 때문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 주무상의 죽음이라면 연우강도 관계가 있겠군.”

“ 그렇습니다. 벌주님.”

“ 그럼 연우강이 앵속쟁이였다는 사실도 좋은 정보가 되겠구먼.”

“ 그와 더불어 팔황새 건을 가지고 접촉을 해보면 뭔가 방법이 나올 듯합니다.”

“ 팔황새를 끌어들인 공을 금위에에게 넘겨줘도 상관없으니까 잘 구슬려 보게.”

“ 알겠습니다. 벌주님.”

“ 그리고 밀천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 생쥐 박멸 작전을 펼치면서 평소 대야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을 전부 제거하는 중입니다. 설사 개파대전을 한다고 해도 밀천으로 들어갈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 생쥐 박멸 작전은 잘 돼가고 있는가?”

담대만승은 우담보를 보며 물었다.

“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저도 강호로 나갈 참입니다.”

“ 아무튼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라는 걸 명심하고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라네.”

담대만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회의를 주관해서 그런지 어지럼증이 일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 쉬십시오, 벌주님.”

“ 쉬십시오.”

일행은 일제히 일어나 담대만승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담대만승이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담대천호 일행도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천상천 건물을 나선 사람은 담대천호와 공손정우였다.

“ 이러다 우린 헛물만 켜고 마는 게 아닌 가 싶소이다. 련주.”

공손정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내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을 나는 믿소이다. 궐주. 그리고 대야벌에는 새로운 세력이 들어오고 있소. 현 벌주와 감정의 골이 깊은 자들이 말이오.”

“ 팔황새를 끌어들이기라도 할 셈이오?”

“ 못할 것도 없지요.”

“ 팔황새를 끌어들인다는 건 곧 천상천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말이 되는데....”

“ 하하하! 사적인 자리에선 형님일지 몰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난 군마련의 련주이자 무성의 성주외다. 조카 녀석에게 차기 벌주 자리를 넘겨 줄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궐주.”

“ 그럼 나도 팔황새와 접촉을 시도해 봐야겠소이다. 그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합시다.”

“ 그럽시다. 궐주. 살펴 가시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각자의 처소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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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하루 전 잠룡 십 조가 섬서성을 떠나 호북으로 향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들의 선두엔 연우강이 있다고 하였다. 그랬던 녀석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육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똥지게가 그리워진 게냐?”

놀랐던 것도 잠시 무원은 웃으며 물었다.

“ 그런 모양입니다.”

연우강은 무원과 창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 잘 있느냐?”

이번엔 창노가 질문을 던졌다.

“ 아주 잘 있소. 이자승 영감님 말이 곧 검후가 될 거라고 했소.”

“ 네 생각은 어떠냐?”

“ 내 생각?”

“ 풍천영수, 만년지극화령실, 여의선천신단을 몽땅 처먹은 네 생각은 어떠냐는 질문이다.”

그동안 속은 게 억울한 듯 이죽댔다.

“ 난 그런 것 달라고 한 적 없소. 영감.”

“ 거절도 하지 않았지.”

“ 난 공짜는 절대 거절하지 않소. 그보다 더 한 걸 줬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부 받아먹었을 거요.”

“ 도둑놈!”

“ 내 약에 그걸 집어넣은 사람은 영감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요?”

“ 됐어. 이놈아,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하나밖에 없는 손녀딸인데 그런 걸 묻고 싶소?”

연우강은 창노를 빤히 쳐다보았다.

“ 그럼 뭘 물어?”

“ 아픈데는 없는지,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으니까 전보다 여성스러워졌는지, 동료들과는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 그런 걸 물어야 하는 거 아뇨?”

“ 잘 지낸다며?”

“ 쯧! 저런 인간의 이름을 찾아주겠다고 밤잠을 설치는 남궁 소저만 불쌍하지.”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녀딸이 예쁘게 잘 자라고 있는지 그것보다는 지금 어느 경지에 올랐는지 그게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창노는 천생 무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 밤잠을 설쳐가며 무공을 익힌단 말이냐?”

“ 취미가 요리라고 합니다.”

“ 요리가 취미라고?”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려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창노는 반색하며 물었다.

“ 나중에 만나면 이야기해줄 테니까 좋아하는 음식 있으면 미리 말해 주시오.”

“ 나야 아무 거나 잘 먹지.”

“ 아무 거나 다 잘 먹는다고 하면 남궁 소저 성격상 요릿집을 차리려고 할 테니까 하나만 정해 놓으쇼.”

“ 뱀탕을 제일 좋아하는 데 그것도 가능할까?”

“ 뱀탕?”

연우강은 어이없는 얼굴로 창노를 보았다.

“ 남만에 있을 때 뱀으로만 끼니를 때웠거든.”

“ 그럼 좋아한다는 말을 할 게 아니라 물린다고 해야 하는 거 아뇨?”

“ 남만을 떠나올 땐 다시는 뱀을 쳐다보지 않을 거라고 맹세를 했는데....”

“ 지금은 먹고 싶단 말이오?”

“ 그렇구나.”

“ 그럼 둘 중 하나네.”

“ 뭐가 둘 중 하나란 말이냐?”

“ 갑자기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음식이 먹고 싶다는 건 죽을 때가 다 됐거나, 아니면 배에 기름기가 잔뜩 끼었다는 증거잖소.”

“ 클클클! 그런 모양이다. 녀석아. 네 녀석이 워낙 잘하고 있어서 우린 할 일이 없지 않느냐. 배에 기름기가 낄 수밖에 없지. 그보다 어쩐 일이냐?”

창노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 내일부터는 야장의 모든 역량을 패천림과 만기팔유에 집중하도록 해주십시오.”

연우강은 키들거리며 웃고 있는 무원을 보며 말했다.

“ 패천림과 만기팔유를 감시하라고?”

무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 감시한다고 될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 그래서 하는 말이다.”

“ 굳이 따라다니면서 감시할 필요는 없고, 가능하다면 삼백 년 전 나추옹의 과거는 물론이고 만기팔유의 과거까지 샅샅이 파헤쳐 주십시오.”

“ 무슨 일이냐?”

“ 패천림은 천오백 년 전 지천의 천등십관을 담당했던 장로들이 세운 문파랍니다.”

“ 그래서?”

“ 패천십관의 원래 이름이 천등십관이었습니다.”

“ 원래 이름이 천등십관이었다는 건 무슨 소리냐?”

“ 이곳 대야벌 터의 원래 주인은 지천이었다는 뜻입니다.”

“ 정말이냐?”

무원은 깜짝 놀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창노 또한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원래 천마는 지천의 적통이 아니었고, 천등십관을 통해 발굴된 무인이었답니다. 영감님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 근본도 없는 자가 천주에 오르는 걸 기득권 층에서는 반대했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지천의 기득권 층은 천마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천은 기존의 기득권 층을 따르는 자와 천마를 따르는 자들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연우강은 막장으로부터 들었던 지천의 비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패천림을 세운 장로들이 천마를 따랐을 거란 말이냐?”

“ 그 당시 장로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답은 간단하게 나옵니다.”

“ 장로들의 입장이 어쨌단 말이냐?”

“ 천주를 배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천등십관은 초창기에는 최고 권력 기관이었을 겁니다. 천등십관을 담당하는 장로들 또한 권력을 쥐고 흔들었을 테고요. 하지만 관문이 너무 어려워 지천 수뇌부들은 도전을 꺼리게 되면서 위상에 변화가 온 겁니다.”

“ 어떤 변화 말이냐?”

“ 그 말은 곧 천등십관을 담당하는 직책이 한직으로 변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이 가는 자리가 됐다는 말이구나.”

“ 그러던 차에 제석강이라는 엄청난 고수가 출현했습니다. 하지만 제석강은 관문에 도전하기 전에는 그렇게 강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천등십관을 통과하면서 절세 고수로 거듭나게 된 거죠. 그럼 제석강을 바라보는 장로들의 시선이 어떻겠습니까?”

“ 제석강을 제자로 생각하고 그를 통해 재기를 노렸을 거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그들은 천마 제석강을 제자로 여기고 그의 성공을 기원했는데, 뜻밖에도 기득권 층이었던 지천 수뇌들이 제석강을 천주로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천등십관을 담당한 장로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다린 겁니다.”

“ 뭘 기다렸다는 것이냐?”

“ 천마의 재림이죠.”

“ 천마를 기다리다가 패천림을 세웠다는 말이구나.”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강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아니 자신 또한 그렇게 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연우강을 통해 모험을 한 것이다.

“ 문제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영감님.”

“ 누굴?”

“ 천마지 누구겠습니까?”

“ 천마사 불사신이냐?”

“ 불사신은 아니지만 불사신으로 만들어주는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 어떤 방법?”

“ 천년마인 말입니다.”

“ 천년마인이라면 천마삼강 중 하나를 말하는 거냐?”

“ 천년마인에 대해서도 알아봐 주십시오.”

“ 너....... 농담이 아니구나.”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던 무원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연우강의 얼굴은 상당히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 전에 지옥으로 떨어졌을 때 풍천마인을 만났고, 사막에서 돌아올 때는 회혼마인과 맞닥뜨렸습니다. 영감님. 그런데 회혼마인은 반인반시였습니다.”

“ 정말이냐?”

“ 그렇습니다.”

“ 누가 보낸 거냐?”

“ 회혼마인을 이끌고 온 자가 만경소 누담생이었습니다.”

“ 공손정우가 보냈단 말이구나.”

“ 귀노의 목에 검을 꽂고, 잠룡쟁패를 탈취해 간 놈이 공손정우 그놈이란 뜻이지요.”

“ 공손정우 그놈은 제 무덤을 파고 말았구나.”

“ 귀노는 네 명이라고 했습니다. 영감님.”

“ 무궐의 궐주 공손정우, 구중련의 련주 적환규, 녹사련의 련주 육사이, 낭인림의 림주 설야는 젊은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 다 성공했네요.”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랬다.

그런데 녀석들은 전부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 호위호식하면서 살고 있다. 문득 당한 놈만 병신이라고 하였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 성공하기 위해 비열한 짓을 했는데 당연히 성공해야겠지.”

열심히 노력하는 자, 정당한 자, 선한 자가 성공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기 위해 벌주가 됐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세상은 혼자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얼굴과 이름을 잃고 이 모양으로 살고 있다. 그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뭔가를 토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 그놈들은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습니다. 영감님.”

“ 하지만 말년이지.”

“ 누군가 그러길, 말년이 비루한 놈은 젊어서 아무리 멋들어지게 살았다고 해도 인생 자체가 비참이라고 하더군요.”

“ 그래서 말년을 비참하게 해주겠다고?”

“ 엉망으로 만들어줄 참입니다.”

“ 클클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구나. 하지만 그놈들 말년보다는 네 부하 녀석들 걱정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 그 녀석들은 왜요?”

“ 앵속쟁이 조장을 모신 죄로 장밋빛 미래가 물 건너가고 말았더구나.”

“ 조장의 능력이 뛰어난데 뭐가 걱정입니까?”

“ 금릉 연씨 세가에서 키워주기라도 할 참이냐?”

“ 대야벌에는 총 천사백삼십 개의 화장실이 있습니다. 영감님.”

“ 그들에게 똥지게를 주겠다고?”

“ 화장실 하나 푸는데 서른 냥이고, 일 년에 한 번씩 푼다고 가정하면 연 매출은 사만이천구백 냥이 됩니다. 오십 명이 일 년에 사만삼천 냥 가량을 벌어들이게 되면 거의 기업 수준입니다. 영감님.”

“ 생각은 좋다만 그들이 똥지게를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 전 그냥 조장으로서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 궁금한 거라도 있느냐?”

“ 결과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 무슨 결과 말이냐?”

“ 사월림에 청부했던 건 말입니다.”

“ 지독한 놈!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무원은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었따. 잠룡강호행을 하면서도 각 가문을 돌며 외상값을 받고 있다. 아마도 녀석은 제가 가진 돈이 얼마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 놈이 또 돈타령이다. 아무튼 돈에 대해서는 지독한 놈이었다.

“ 우리 집은 부자지간에도 돈을 주고받을 땐 거래를 합니다. 절대 공짜는 없습니다. 그리고 돈과 내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 아직 육 개월이나 남았다.”

“ 정리하는 게 낫겠습니다. 영감님.”

“ 정리라면?”

“ 대야벌이 너무 조용합니다.”

“ 대야벌을 시끄럽게 만들겠다는 말이냐?”

“ 양도욱 그놈이 보증금으로 맡겼던 문서를 전부 팔아넘기십시오.”

“ 허면?”

“ 배가 고프면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무조건 먹게 됩니다.”

“ 빈털터리가 된 양도욱이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 황궐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이곳이 정신없이 바빠야 우리도 편하게 일을 할 거 아닙니까?”

“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사이에 넌 율령궁을 토벌하겠다는 거냐?”

“ 그래야지요.”

“ 무서운.....”

무원은 혀를 내둘렀다.

운이 좋은 건지 머리가 좋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청부를 할 때만 해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부가 이번엔 사월림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 사월림은 황궐과 견원지간이 아닌가? 사월림에 파산 직전이란 소문이 돌게 되면 담대천호나 공손정우는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황궐과 전쟁을 종용할 것이다. 사월림 림주 양도욱 입장에서는 선태그이 여지가 없다.

“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영감님. 그리고 이거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책자를 꺼내 두 사람 앞에 놓았다.

“ 뭐냐?”

“ 천수귀장 혁미월이 남긴 천수장해란 비급입니다.”

“ 천수장해?”

비급이란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양피지 책자로 시선을 주었다.

“ 우주일만검결의 완벽한 구결이 들어 있습니다.”

“ 우, 우주일만검결이라고?”

두 사람은 경악했다.

최초로 대야벌 벌주를 패배시켰던 인물.

우주만옹 혁세걸이 익힌 무공의 이름이 바로 우주일만검결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구결이 바로 눈앞에 있는 책자에 들어 있다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 원래 우주일만검결의 창안자는 우주만옹이 아니라 그의 먼 선조인 천수귀장 혁미월이었습니다.”

“ 맙소사.”

검법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창노가 먼저 비급을 잡았다.

“ 심심하면 그거나 익혀보십시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디 가는 거냐?”

비급을 들고 있던 창노가 물었다.

“ 알아보러 가야지.”

“ 알아봐?”

“ 풀 속에 숨은 뱀을 나오게 하려면 몽둥이로 풀을 치고 다녀야 하잖소.”

“ 그 풀이 뭔데?”

“ 패천십관이지 뭐겠소.”

“ 무공을 드러내겠다는 거냐?”

“ 그래서 이걸 준비해 온 거요.”

가지고 있던 자루를 들어보였다.

“ 그게 뭔데?”

“ 백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검이오.”

“ 배, 백령이면 파천육기의 그 백령을 말하는 거냐?”

“ 그렇소.”

“ 그걸로 어쩌려고?”

녀석에게 파천육기가 전부 있다고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참이었다.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때마다 놀라다 보면 제 명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 안 놀라니까 재미가 없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 그걸로 어떻게 할 건지 말하지 않았잖아, 인마.”

마당으로 나가는 연우강을 보며 창노는 버럭 소리쳤다.

“ 오다가 우주일만검결을 흉내 낼 정도는 익혔소.”

“ 그래서?”

“ 이 백영은 밀천이 천주인 나천후에게 선물로 줄 거요.”

“ 선물로 준다고?”

“ 백무탈혼유마검법이 들어 있는 비급도 함께 줄 수도 있소.”

“ 왜?”

창노는 답답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대문을 나선 듯 연우강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무슨 소립니까?”

담답해지면 늘 그렇듯 창노는 대답을 요구하는 얼굴로 무원을 보았다.

“ 녀석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되네.”

“ 액면 그대로 해석이 안 되니까 묻는 거 아닙니까?”

창노는 또다시 버럭 소리쳤다.

“ 백령은 어떤 검인가?”

“ 파천육기의 하나이고, 청로와 더불어 상천 최고의 보물이죠.”

“ 구분은 어떻게 하는가?”

“ 검집은 물론이고 검신까지 백색으로 알고 있습니다.”

“ 맞네. 백령은 아주 특이한 검이네. 누군가 백령을 들고 무공을 펼친다면 그 광경을 목격한 자들은 하나같이 무공을 펼치는 사람보다는 백령을 주목하게 되네, 무공을 펼치는 사람은 나중에 생각하게 된다는 거지.”

“ 그래서요?”

“ 만일 우강이 녀석이 백령으로 우주일만검결을 펼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 패천림 무인들이 연우강을 밀천 무인으로 생각할 거란 말입니까?”

“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동정호 지하에 나타났던 우주일만검결로 인해 중원의 모든 무인은 그 무공이 밀천 무공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 우주일만검결을 펼치면서 패천림 무인을 지독하게 모욕을 준다는 거군요.”

“ 그렇지.”

“ 그럼 그 후엔 어떻게 되는 거죠?”

“ 뭐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 조금 전에 형님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백령으로 무공을 펼치면 무인보다는 무기가 더 부각될 거라고요.”

“ 백령이 우강이 녀석 손에 있는 이상 밀천의 짓이라고 믿지 않을 거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 자넨 벌써 귀가 먹은 건가?”

“ 귀가 먹어요?”

“ 백령을 나천후에게 줘버리겠다고 한 말을 듣지 못했냐는 말이네.”

“ 농담이 아니라고요?”

“ 그놈이 언제 농담하는 거 봤는가?”

“ 정말 준다고?”

창노는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 제 사부의 신물인 묵사도 줘버린 놈인데, 백령 정도는 우습지 않겠는가.”

“ 그걸로 약하다 싶으면 백무탈혼유마검법이 적힌 비급도 주고요?”

“ 백 번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 그런데 어떻게 주죠?”

“ 뭘 어떻게 준다는 건가?”

“ 그 녀석 말이 선물이나 뇌물은 줄 때도 잘 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잘 주겠지. 뭐.”

무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백령을 넘겨주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고, 어떤 목적을 가진 선물은 상대방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아무튼 잘 줄 거네.”

무원이 할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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