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하늘 천 자 중앙을 형성하는 사람 인 변의 왼쪽 획 아래쪽에 패천림은 위치해 있다. 맨 끝에 있는 만독림을 제외하면 밑에서 두 번째다.
동쪽으로는 잠룡들의 훈련장과 원나라 때 황제로부터 이름을 받은 원호가 있고, 서쪽으로는 야장인들의 공동 묘지가 있으며 북쪽에는 만마림이 있다.
연우강이 서 있는 곳은 패천림 서문 근처였다.
성벽처럼 세워진 삼 장 높이의 담벼락이 좌우로 이어져 있는데,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 다른 문파와는 달리 패천림에는 경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우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앞으로 갔다.
서문 앞에는 삼 층 건물 높이로 지어진 거대한 고루가 있고 고루 안에는 패천십관에 도전하는 도전자들이 치는 패천신고가 있다. 하지만 연우강은 패천신고를 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잠시 패천신고를 올려다보던 그는 천리지청술을 펼치며 다시 오십여 장을 걸었다.
그가 멈춰선 곳은 바로 옆, 담 앞이었다.
연우강은 가볍게 몸을 날려 삼 장 높이의 담을 넘었다.
안쪽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곳이 무림 문파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경비는 허술했다. 아니 아예 없었다. 연우강은 산책을 나온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고 있는 곳은 서문 바로 앞에 우뚝 솟아 있는 패천대였다.
어른 허리둘레의 나무 기둥을 좌우 측에 세우고 지붕을 얹은 패천대는 높이만 해도 오 장에 달했다.
패천대 너머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 있었다.
그곳을 흘끔 쳐다본 연우강은 패천대를 지나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생각보다 깊었다. 어둠을 뚫고 이십여 장 가량 내려가자 비로소 끝이 나왔다. 연우강은 미리 준비해 온 야명주를 꺼내 앞을 가로막은 벽을 비췄다.
패천십관.
바위 벽을 직사각형 형태로 떠내고 그 안에 네 글자를 새긴 듯 패천십관이란 글자의 표면은 원래 벽면보다 한참 깊었다. 원래 있던 글자를 지우고 새로 써넣은 흔적을 금세 알 수 있었다.
“ 이젠 필요 없을 테니까.”
연우강은 패 자에 손바닥을 대고 혈잔수를 끌어올렸다. 그의 오른손에서 가공할 열기가 쏟아져 나와 주변을 후끈 달궜다. 그리고 푸스스! 소리와 함께 패천십관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던 석문이 가루로 변했다.
연우강은 뻥 뚫린 구멍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가로 세로 폭이 삼장 가량 되는 널따란 공간이었다. 연우강은 야명주를 들어 안쪽을 살폈다.
패천십관에 도전하는 도전자가 심신을 추스르는 장소인 듯, 돌로 만들어진 침상과 탁자 그리고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전면에는 조금 전 보았던 것과 비슷한 석문이 있고, 그곳 표면에는 초식지관이란 네 글자가 적혀 있다.
“ 진짜 천등십관이 맞는 모양이네.”
연우강은 벽면에 새겨진 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 가루로 만들어버린 패천십관이라는 글과는 달리 이곳에 적혀 있는 서체는 전서체고, 느낌도 다르다.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글이 분명했다.
연우강은 이번에도 초식지관이라 쓰여진 글에 손바닥을 대고 혈잔수를 끌어올렸다.
붉게 변한 듯하던 석문이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그는 돌가루를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초식지관의 넓이는 좌우 폭이 이십 장, 전면까지는 십 장 가량이고 바닥은 전부 바위였다. 그리고 벽면을 따라 조금 전 부쉈던 석문처럼 생긴 문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왼편으로 걸음을 옮기며 석문의 수를 세어 나갔다.
가운데 있는 강기지관으로 나가는 석문을 제외하면 정확하게 백 개의 석문이 있었다. 광장 가운데로 간 연우강은 자루에 넣어 두었던 백령을 꺼내, 검집째 바닥에 박아 넣어 세웠다.
그러고는 그 옆으로 드러누웠다.
천장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야명주들이 박혀 있었다.
“ 춥네.”
야명주의 수를 세어보던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조금 전 지나쳐 왔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나뭇더미를 한아름 가지고 안으로 돌아왔다.
마라천력을 동원하여 가져온 나뭇더미들 속에는 패천대라고 씌어진 현판도 들어 있었다. 패천십관 앞에 우뚝 서 있던 패천대의 지붕과 현판ㅇ르 뜯어 온 것이었다.
나뭇더미를 내려놓은 그는 백령을 뽑아 적당한 크기로 쪼갰다.
“ 명검은 명검이네.”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살짝 힘을 가했을 뿐인데, 통나무가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더불어 잘려나간 단면은 매끄럽기 그지없다.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난 그는 백령을 다시 검집에 꽂아놓고 불을 피웠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서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 역시 사람은 따뜻한 곳에서 자야 해.”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불 옆으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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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추워라!”
관웅은 양손을 엇갈려 팔을 쓰다듬으며 총총 서문을 향해 걸었다. 그를 비롯한 하급 무인의 임무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주변을 살피고 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관웅이 맡은 곳은 서문을 비롯한 패천대였다.
“ 오늘은 더 춥네.”
여양산맥을 넘어온 겨울바람은 뼈가 시릴 정도로 매서웠다. 관웅은 내기를 끌어올려 찬바람을 막으며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문 근처의 패천대였다. 우뚝 솟은 기둥을 확인한 그는 서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이곳은 이상......”
문득 패천대의 모습이 여느 날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웅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패천대를 올려다보던 그는 눈을 비볐다.
양쪽에 두 개의 기둥이 우뚝 솟아있고, 두 기둥의 꼭대기에는 지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붕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멍한 얼굴로 패천대를 쳐다보다가 몸을 날렸다. 혹시 바람 때문에 지붕이 날아갔나 싶어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지붕이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패천십관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보았다.
“ 저건......”
관웅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내려가는 입구에 지붕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이는 나무판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관웅은 급하게 그곳으로 걸어갔다.
두어 개의 나무판이 떨어져 있었는데, 계단 아래로 향해 있었다.
그는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패천대와 서문을 확인한 다음 패천십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확인해야 하기에 어차피 둘러봐야 할 곳이었다.
“ 거지 같은 놈이 림주로 오더니 별 거지 같은 일이 일어나네.”
사실 패천림 무인들은 철장마도 막장을 림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패천림이 삼궐칠련십림 중 십림에 속해 있고, 문도 수는 천 명에 불과하지만 다른 문파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문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부귀공명을 멀리 하고 오로지 무만을 추구하는 패천림의 이상을 더욱 크게 보고 다른 문파를 하찮게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율령궁 산하 천살원의 집행 사자가 림주로 온 것이다. 물론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문주가 됐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천살원의 집행사자가 문주가 됐다는 것은 곧 패천림의 힘이 천살원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아니,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패천십관에 도전하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패천림 무인들은 새롭게 림주가 된 철장마독 막장을 싫어할 뿐 아니라, 림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닌다.
하급 무인인 관웅 또한 그런 부류의 하나였다.
“ 아무튼 그놈이 들어온 뒤로 되는 일이 없어.”
어쩌면 패천대의 지붕이 부서진 것도 막장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관웅은 생각했다.
“ 헉!”
패천십관 입구 앞에 발을 디딘 관웅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석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다급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 어, 없어!”
관웅은 석문을 찾으려 좌우를 살폈다.
하지만 바닥에 가루만 잔뜩 쌓여 있을 뿐 패천십관이란 글이 씌어 있던 석문은 보이지 않았다.
“ 설마 이것들이....”
관웅은 바닥에 잔뜩 쌓인 가루를 발로 비벼보았다.
자신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그곳을 쳐다보던 관웅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날까지 멀쩡했던 석문이 가루로 변했다는 건 가공할 고수가 패천십관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그의 시선이 광장을 지나 초식지관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불길을 토해내고 있는 모닥불이었다. 모닥불 옆에는 패천대 지붕을 뜯어와 잘게 쪼갠 듯한 나무판이 수북하니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누워 있었다.
“ 감히!”
초식지관을 향해 몸을 날려가던 관웅은 입구에서 우뚝 멈췄다. 입구에 수북하니 쌓여 있는 돌가루를 보는 순간, 들어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었다. 일 장 높이의 석문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고수. 그런 자를 향해 덤비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 기다려라, 놈!’
관웅은 연우강을 노려보다가 밖으로 몸을 날렸다.
패천대를 벗어난 관웅은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제일 장로전으로 내달렸다. 제일 장로전의 대문은 아직 굳게 닫힌 채였다.
쾅쾅쾅! 쾅쾅쾅!
“ 장로님!”
관웅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며 제일 장로를 찾았다.
쾅쾅쾅! 쾅쾅쾅!
끼이익!
“ 아침부터 웬 호들갑이냐?”
급하게 대문이 열리고 노인이 엄한 얼굴로 관웅을 쏘아보았다. 그는 제일 장로전 집사인 오절마검 사인정이었다.
“ 패, 패, 패천대 지붕이 사라졌습니다. 그, 그리고 패, 패천십관으로 드, 들어가는 석문이...”
“ 갈!”
관웅이 더듬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자 사인정은 고함을 내질렀다.
“ 크윽!”
관웅은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선 관웅은 호흡을 골랐다.
“ 다시 말해보거라.”
“ 그러니까.....”
관웅은 조금 전 보았던 상황을 하나도 빼지 않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 그러니까 패천대 지붕이 홀라당 날아갔고, 패천십관으로 들어가는 석문은 물론이고 초식지관의 석문까지 가루로 변했으며, 초식지관 안에는 검은 옷을 걸친 자가 잠을 자고 있단 말이냐? 패천대 지붕으로 모닥불을 피우면서?”
“ 예!”
관웅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이노옴!”
사인정은 관웅이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관웅은 패천림 소속이긴 하지만 정식 문도라고 할 수는 없다. 일천 명 이상의 문도를 둘 수 없다는 문규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웅 같은 자들을 키우는 이유는 느닷없이 결원이 생겼을 때 보충하기 위함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불의의 사고라는 게 있고, 의도하지 않은 결원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때를 대비하여 제자 형태로 기르고 있는 자들이 백여 명 있는데, 그들은 주로 패천림 내의 살림살이를 맡아 하고 있다.
관웅은 그런 자들 중 한 명으로 최고 고참이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이른 아침부터 헛소리를 해대고 있으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정말입니다. 장로님. 방금 제 눈으로 확인하고 왔습니다.”
관웅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 그래도 저놈이!”
“ 제가 아무리 무식한 놈이라고 해도 패천대가 패천림의 상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 정말이란 말이냐?”
사인정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관웅의 말처럼 패천십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패천대는 패천림의 존재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득 관웅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가보자.”
사인정은 급하게 문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제일 장로전을 나선 사인정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사인정의 신형은 화살처럼 쏘아져 잠시 후 패천대 앞에 당도했다.
“ 맙소사!”
사인정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양쪽 귀가 날카롭게 솟구쳐 올라가 있던 지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패천신고를 울려라! 그럼 그대는 도전자가 될 수 있다.
- 만상지관을 통과하라! 그럼 그대는 패천림 림주가 될 것이다.
- 명심하라! 실패하는 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임을!
- 도전하라! 그리고 패천대 앞에 서라!
패천십관에 도전하는 건 너무 간단하다.
단지 서문 밖에 있는 패천신고만 울리면 된다.
사인정 또한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 패천신고를 울렸고, 패천대 앞에서 맹세를 하고 패천십관에 도전했다.
하지만 이관을 넘지 못하고 참혹하게 무너졌다.
그때 관문을 담당하던 자는 그렇게 말했다.
‘ 오른팔과 단전을 내놓고 나가든지, 아니면 패천림의 문도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실패한 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곳이었다.
당연히 패천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패천림 문도로서 관문을 담당하면서 패천십관에 도전하는 도전자들을 막아내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다 문득 패천십관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패천십관의 관문을 담당하고 있는 무인들은 전부가 패천십관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실패한 자들.
그들이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은 패천십관에 도전한 도전자를 막아내는 길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패천십관은 어느새 실패한 자들의 자존심으로 변했다. 혹여 한 명이라도 관문을 통과하는 자가 나오면 그 관문을 맡았던 자들은 광적으로 무공에 매달렸다. 지난 세월 동안 십관인 만상지관을 통과한 무인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자존시이 무참하게 깨진 것이었다.
“ 죽일 놈!”
사인정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휙! 휙휙!
막 안으로 몸을 날리려고 하는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열 명의 노인이 패천대 주변으로 날아 내렸다.
그들은 천지이노, 비쌍비노, 금강이노, 쌍절이노, 무쌍이노로 불리는 자들로 패천십관의 각 관문을 맡고 있는 장로들이자 패천림의 실질적인 수뇌들이었다.
“ 어서 오십시오.”
사인정은 노인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바닥으로 내려선 장로들 또한 멍한 얼굴로 지붕이 사라진 패천대를 응시했다.
“ 설마 했거늘.....”
흰색 학창의를 걸친 노인이 패천대를 보며 중얼거렸다. 장작처럼 바짝 마른 이자는 지노 대창익과 함께 천지이노라고 불리는 천노 진자웅이었다.
“ 끄응! 얼른 죽어야지. 오래 사니까 별 걸 다 보게 되는구먼.”
임산부처럼 불뚝 튀어나온 배에, 입을 열 때마다 늘어진 턱살이 출렁이는 이 사람은 비쌍비노의 한 명인 일비 전추성이었다.
“ 어떤 놈인지 구경이나 하자고.”
전추성 옆에 서 있던 이비 가삼이 계단으로 향하며 말했다. 별것 아닌 듯한 투로 말은 하고 있지만 그의 옷은 바람을 머금은 듯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쿠웅! 쿠웅!
전추성과 비슷한 체구의 가삼이 걸어가자 깊은 발자국이 생겨나며 지면이 부르르 떨었다. 바위며 흙이며 할 것 없이 깊은 자국을 남기는 가삼의 걸음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비단 가삼뿐만이 아니었다.
금강이노라고 불리는 금강역사 장육철과 철마금강 노대관, 쌍절이노라 불리는 검절 전장운, 암절 검산일, 무쌍이노라고 불리면서 십장로의 대형 역할을 하고 있는 무겅 한사와 무무 제천강 또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푹푹 파였다. 계단을 내려선 열 명은 수북하게 쌓인 돌가루를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안으로 향했다.
초식지관으로 들어가는 석문이 있던 자리에도 역시 돌가루가 수북하니 쌓여 있었다. 그 돌가루를 지그시 눌러 밟으며 열 명은 초식지관 안으로 들어갔다.
“ 으음!”
안으로 들어섰던 일행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검은 옷을 걸친 사내가 등을 보이고 앉아서 나무를 던져 넣고 있었다.
그런데 사내가 던져 넣고 있는 나무판은 패천대 지붕 아래 쪽에 걸려 있던 현판이었다.
“ 감히!”
십장로 중 가장 급한 성격을 가진 지노 대창익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손가락이 검게 물들어갔다. 대창익의 성명절기의 하나인 지옥마환지였다.
“ 멈추게, 지노!”
왼편 끝에 있던 제천강이 손을 들어 대창익을 말렸다.
“ 대형, 저놈은?”
대창익은 여전히 손가락에 내공을 모은 채 소리쳤다.
“ 말 듣는 게 좋아, 뚱보 영감. 난 도전하러 왔지 살인하러 온 게 아니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깜짝 놀랐다.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앳된 탓이었다.
“ 지금 도전이라고 했는가?”
놀랐던 것도 잠시, 제천강은 본래의 표정을 회복하며 물었다.
“ 도전할 게 아니면, 이 추운 곳에서 밤새도록 기다릴 이유가 없지 않겠소.”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노인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 응!”
제천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보통 비아냥댈 때는 입 주변이나 눈 주위에 주름이 져야 한다. 그런데 녀석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전혀 변화가 없다. 진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인피면구를 쓴 상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인피면구를 쓴 건가?”
제천강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이런! 나이를 먹으면 노안 때문에 잘 보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노인 양반은 눈이 좋은 모양이외다.”
알아차리게 하려고 일부러 싸구려 인피면구를 착용했는데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연우강은 인피면구를 쓴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 신분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제천강의 말투가 대뜸 반말로 바뀌었다.
패천대의 지붕을 뜯어 불을 피우고, 관문의 석문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인피면구로 얼굴을 가린 자, 패천십관에 도전하기 위해 왔다고 했지만 좋은 의도로 들어온 자는 결코 아니었다.
“ 내 손으로 인피면구를 벗는 일은 없을 거요, 영감.”
“ 림주 자리엔 욕심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 천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삼류 문파가 뭐가 대단하다고 욕시을 내겠소. 이따위 문파는 거저 줘도 싫소.”
“ 천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수렁이라고?”
“ 천마 제석강이라는 수렁 말이오, 영감. 그러고 보니 영감도 제씨구려.”
“ 넌 누구냐?”
제천강의 몸 주변으로 차가운 기운이 넘실댔다.
“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상대의 목에 검 끝을 약간 찔러 넣은 상태라야 하는 거요.”
“ 오냐, 네놈의 목에 검을 찔러 넣은 다음에 질문을 하겠다.”
듣고 있던 지노 대창익이 노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들며 몸을 날렸다. 제천강은 대창익을 말리려다 그만두었다. 패천림이 지천의 후예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천마의 후예라는 사실은 극비사항이다. 그런데 사내는 천마 제석강의 수렁이라고 했을 뿐 아니라 패천림을 삼류문파라고 하였다. 설사 넘겨짚은 말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인피면구로 얼굴을 숨겼다는 것은 알만한 신분이란 의미가 된다. 놈이 누구인지, 배후가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죽여선 안 되네.]
제천강은 대창익에게 전음을 보냈다.
[ 그 정도는 나도.....]
전음을 보내려던 대창익은 헛바람을 삼키며 검을 휘둘렀다. 검은 옷 사내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는데 느닷없이 가공할 열기가 가슴팍으로 쏘아져 들어온 것이었다.
퍼억!
검을 휘두른 속도가 한 박자 늦은 듯, 대창익의 가슴에서 둔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 커억!”
대창익이 비명과 함께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십여 걸음을 물러난 대창익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푸스스!
옷이 가루로 흩어지며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 혀, 혈잔수?”
대창익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소리도 없이 다가와 가슴팍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무공, 물론 무림엔 극양의 무공이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은 내공을 끌어올린 상태고, 웬만한 극양무공으로는 옷자락을 태우지도 못한다. 그런데 방금 붉은 광채는 옷자락을 태우고, 가슴에 장인 자국을 선명하게 남겼다. 그러한 무공은 천마삼경의 하나인 혈잔수밖에 없었따.
“ 누, 누구냐?”
대창익은 연우강을 보며 소리쳤다.
“ 나도 알고 싶은 게 많아, 영감. 하지만 패천십관을 깨트리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야.”
말은 대창익에게 하고 있지만 연우강의 시선은 제천강에게 향해 있었다.
“ 관문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묻겠다는 말이냐?”
“ 바로 그거야, 영감.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질문은 상대방의 목에 검을 약간 찔러 넣은 상태에서 해야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거야.”
“ 넌 그럴 기회가 없을 거다. 놈!”
듣고 있던 대창익이 버럭 소리치며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우우웅!
대창익의 검에서 검명이 흘러나오더니 거무튀튀한 광채가 검을 감쌌다.
“ 멈추게, 지노!”
다시 연우강을 향해 달려 나가려는 대창익ㅇ르 제천강이 막았다.
“ 대형!”
“ 저 자의 말이 맞네.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제압해야 하네, 그것도 패천십관을 통해.”
“ 저 자의 도전을 받아주겠단 말입니까?”
“ 여긴 패천림이네, 지노.”
제천강은 연우강을 보았다.
“ 나도 환영하는 바요, 영감. 패자도 승자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마음껏 싸워봅시다. 그리고 패자는 승자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 거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게 좋겠구나. 준비하게, 천노!”
제천강은 천노 진자웅에게 지시를 내렸다.
“ 규칙은 어떻게 합니까?”
진자웅은 제천강을 보며 물었다.
그가 맡고 있는 초식지관은 내공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오직 초식만을 시험하는 관문이다. 일백 명의 무인이 도전자를 향해 쉬지 않고 일백 번의 공격을 펼치게 되는데,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 오로지 초식만 펼친다. 도전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일백 명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고 옷자락이 찢어지거나 부상을 당한 곳이 다섯 곳 이상 나오지 않았을 때만 관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초식지관의 규칙이었다.
“ 방금도 말했지만 여긴 패천림이네.”
“ 알겠습니다. 대형.”
진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오백 년 동안 유지돼 왔던 관문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었다.
“ 자신이 있다는 말이구려.”
연우강은 바닥에 꽂아 두었던 백령을 뽑아들었다.
“ 천오백 년을 지켜온 율법이다. 전 관문을 통과한다면 기꺼이 네 질문에 대답하겠다.”
제천강은 연우강의 검으로 시선을 주었다.
검집은 학의 깃털처럼 새하얗다. 얼마 전에 발견됐다고 하였던 묵사가 떠올랐다. 하늘을 깨트릴 수 있는 신공이나 역사를 바꿀 정도의 신물은 절대 하나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문득 저 검이 파천육기의 하나인 백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오?”
“ 그 검을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느냐?”
제천강은 슬쩍 떠보았다.
딸깍!
연우강은 엄지손가락으로 검격을 살짝 쳐 검면이 보이도록 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 어쩌면......’
제천강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살짝 드러난 검면도 검집처럼 새하얗다. 어쩌면 정말 백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밤이 길면 꿈도 길다고 했소, 영감.”
“ 행운을 빌겠다.”
제천강은 연우강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영감.”
“ 말하거라.”
계단으로 향하던 제석강은 걸음을 멈췄다.
“ 만일 천마 제석강이 이 자리에 서 있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 십관까지 돌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하는 거냐?”
“ 그렇소.”
“ 설사 그분이 살아온다고 해도 최소한 십 일은 걸리는 곳이 패천십관이다.”
제천강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사실 십 일이라는 것도 거짓말이다. 최초로 범천이 됐던 천마 조사는 천등십관에서 무공을 완성한 다음 다시 도전을 감행했었다.
그는 일관, 이관, 삼관을 하루만에 통과하고 하루를 쉬었고, 사관부터는 이틀에 한 번 꼴로 관문을 통과하여 보름이 걸렸다고 하였다.
“ 하루에 한 관문씩 통과해야 한단 말이구려?”
“ 그건 불가능하다.”
“ 이 안에 통과하겠소, 영감.”
연우강은 왼손을 활짝 펴 들어 올렸다.
푸욱!
제천강의 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 행운을 빌겠다.”
제천강은 젖은 모래에 글을 쓰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제천강에 이어 다른 장로들마저 나가자 초식지관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구르릉!
느닷없이 지면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전면에 위치한 백 개의 석문이 일제히 열렸다. 그리고 석문 안쪽에서 검을 든 무인들이 걸어나왔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석문은 다시 원래대로 닫혔다.
딸깍! 딸깍!
백 명의 무인들이 자리를 잡자마자 위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오며 하얀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 뭐지?”
연우강은 중앙에 서 있는 자를 보았다.
다른 무인에 비해 유달리 키가 작아 보이는 그는 천노 진자웅이었다.
“ 초식지관은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일백 명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 부상은 다섯 개까지만 허용되고, 옷이 찢겨나가는 것도 부상으로 간주한다.”
“ 이건 군자산인 모양이지?”
연우강은 손바닥을 펴 위에서 꽃가루처럼 떨어지는 가루를 받았다. 군자산은 단전에 쌓인 내공을 몸 곳곳으로 흐트려놓고 내공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산공독의 일종이다. 독임에도 불구하고 군자산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이 붙은 이유는 생명을 해할 목적으로 만든 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 안에서는 내공은 필요 없다.”
“ 좀 정중하게 행동할 걸 그랬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진자웅을 보았다.
“ 여긴 패천림이다. 애송이. 우린 속임수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욱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진자웅은 참았다.
마음같아서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놈을 제압하고 싶었다. 하지만 천오백 년 동안 지켜왔던 율법을 화가 난다고 해서 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 후회할 거야, 영감.”
“ 후회는 네놈이 하게 될 거다. 부상으로 죽는 놈도 있으니까 말이다.”
“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언제 시작하지?”
연우강은 천천히 백령을 뽑았다. 야명주 불빛 아래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일각만 기다리면 된다.”
진자웅은 연우강의 검으로 시선을 주었다.
손잡이는 물론이고 검신까지 전부 백색 일색이고 검이 뽑히는 순간 싸늘한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 흥!’
진자웅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사실 초식지관의 가장 큰 단점은 신병이기를 가진 자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 초식을 펼치기 때문에 일반 검을 두부 자르듯 잘라내는 검을 지니고 있거나, 천잠보의처럼 일반 검으로 잘라내지 못하는 옷을 걸친 자가 유리하다. 하지만 패천림에서는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초식지관을 맡고 있는 일백 무인들의 무기를 강화했다. 신검이나 명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두부처럼 숭숭 잘려나가는 검은 한 자루도 없다.
“ 시작하라!”
진자웅의 명령이 떨어지자 초식지관을 담당하는 무인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연우강 주변으로 늘어섰다.
“ 진식인 모양이지?”
연우강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후좌우로 늘어선 자들은 언뜻 보기엔 무질서하게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앞뒤 간격과 자우 거리가 일정한 걸 보면 단순하게 늘어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우강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질서하게 늘어섰던 백 명의 무인들은 일제히 엎드렸다. 엎드린 자세도 특이했다. 두 다리는 넓게 벌리고, 한 손은 땅을 짚고, 검은 앞으로 내민 채 고개는 발짝 치켜들고 있다.
어떤 동물을 형상화한 것 같은데 연우강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금세 풀렸다.
“ 지주만변진이다!”
“ 거미란 말이지?”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엎드려 있는 자들 사이로 선을 그어보았다. 그러자 거미줄 형태가 그려졌다.
“ 넌 거미줄에 걸린 먹이 신세고.”
“ 일 각이 지났다.”
진자웅은 차갑게 말했다. 많은 이들이 내공을 일으키지 못한 상태에서 펼치는 진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이 하는 말일 뿐이다.
진식을 펼치는 자들이나 진식을 방어하는 자가 서로 같은 조건이라면 내공의 유무에 상관없이 진식은 막강한 위력을 자랑한다. 더불어 소위 절진이라고 부르는 진식은 땅의 기운을 흡수하는 묘용을 지니고 있다. 지주만변진에서 두 발과 한 팔을 땅에 대는 동작을 취하는 이유도 땅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서다.
“ 시작해도 돼.”
연우강은 백령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고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렸다.
“ 발진하라!”
턱! 턱턱턱! 턱턱턱!
진자웅의 명령이 떨어지자 엎드려 있던 자들이 빠르게 이동했다. 무인들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광채가 사방에서 번쩍거렸다.
“ 괜찮네.”
연우강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맺혔다.
백 명의 움직임은 무인의 몸놀림에 비하면 형편없다고 할 정도로 늦다. 하지만 육안으로는 상당히 빠르게 느껴진다. 검에서 흘러나온 광채 때문이었다. 천장의 야명주를 교묘하게 배치하여 아래쪽에 있는 자들이 검면을 조정하면 반사된 빛이 도전자가 있는 중앙으로 모이돌고 해 놓은 모양이었다.
“ 하지만.”
연우강은 오른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 기다리는 건 내 취미가 아냐.”
퍼억!
그의 오른발이 지면을 강하게 찍었다.
그리고 연우강의 신형이 전방으로 뛰어나갔다. 가만히 서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자가 느닷없이 달려들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연우강의 앞에 있던 자의 행태가 그랬다.
그는 연우강이 달려오자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엉겁결에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