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알 수 없는 놈.
차앙!
일검에 검이 잘려나갔다.
사내의 검을 잘라버린 연우강은 나아가던 힘을 거스르지 않고 왼편으로 방향을 바꿨다.
휙!
왼손에 쥐고 있던 백령의 검집이 강하게 허공을 가르고 방금 검이 잘려나갔던 사내의 명치로 박혀 들어갔다.
퍼억!
“ 커억!”
명치를 강타당한 사내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사내가 쓰러지는 순간 연우강은 이미 왼편 사내 앞으로 가 있었다. 연우강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느닷없이 동료가 당하면 대부분은 당황하기 마련인데 앞에 있는 자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다. 아니 달라진 점이 있기는 했다. 사내는 방향만 바꾼 채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연우강이 오자마자 사내는 두 발과 손으로 바닥을 차 날아오르며 검을 찔러넣었다.
“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연우강은 백령을 휘둘러 사내의 검을 쳐냈다.
별로 힘이 들어 있지 않은 듯한 가벼운 동작이었다.
차앙!
“ 헉!”
사내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상대의 검은 그렇게 큰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른팔이 홱 젖혀지며 허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휙!
바로 그때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검집이 왼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내심 욕설을 뱉어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퍼억!
“ 크악!”
보통 몽둥이나 편편한 물체에 타격을 당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넘어지거나, 몸이 날려가야 충격을 덜게 된다. 그런데 사내의 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방에 죽임을 당했다는 의미였다.
“ 내공이 없다고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야.”
연우강은 사내의 머리를 부수고 들어간 백령의 검집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검집 표면에는 피와 살점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 개자식!”
누군가의 입에서 진득한 살기가 담긴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 진을 유지하라!”
진자웅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늦었어, 영감. 죽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이 깨지면 평정심도 함께 무너지게 돼 있는 거야. 거 놈이 죽으면서 진은 이미 깨졌다고 봐야 해.”
연우강의 신형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갔다.
진자웅의 외침 때문인 듯 사내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연우강이 뛰어오자 곧바로 몸을 날렸다. 사내가 몸을 날리자마자 오른편에 있던 사내도 연우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차앙!
먼저 검을 막아낸 무기는 백령이었다.
백령으로 상대의 검을 막아낸 연우강은 왼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아직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집이 허공을 갈랐다.
퍼억!
“ 으악!”
사내의 머리를 부순 검집이 다시 방향을 바꿔 달려오는 사내의 검을 막았다.
차앙!
검집으로 사내의 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백령이 사내의 허리를 쓸어갔다.
“ 컥!”
사내의 손에서 검이 떨어지고, 입가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 죽인다!”
또다시 두 명이 죽임을 당하자 간신히 이어져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패천림 무인들은 개떼들처럼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싸움은 이렇게 하는 거야! 피와 주검이 난무해야 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라고!”
휙!
차앙!
스악!
차앙!
퍼억!
오른손의 검으로 막아내고 왼손의 검집으로 후려치고, 후려친 검집으로 막아내고 백령으로 베어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상대의 무기를 좇고 있다.
낫이 검으로 손괭이가 검집으로 바뀌었을 뿐 연우강은 지금, 마라천력과 무기의 극한의 조화인 난투박투를 펼치고 있었다.
한 번 찍은 상대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기 위해서는 찍을 때 전력을 다해, 상대를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가 난투박투를 펼칠 때 지키는 철칙이었다. 그가 지니간 자리엔 치명상을 당해 일어날 수 없는 자와 시체만 남았다.
“ 저럴 수가!”
진자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지금까지 겪었던 자들과 다르게 도전자가 선공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형편없이 깨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질 않는다.
놈의 검과 검집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패천림 무인들은 머리가 깨져 죽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가 불능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면서도 패천림 무인들은 놈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창! 창창! 창창!
“ 크악”
“ 아악!”
“ 커억!”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패천림 무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내린다. 패천림 무인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메아리처럼 한동안 석실 내부에 머물다가 사라진다. 마치 검에 당한 자들의 혼이 사라지는 것처럼.
“ 물러나라!”
결국 진자웅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패천림 무인들은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으드득!
진자웅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다경도 지나지 않았는데 절반 가량이 놈에게 당하고 만 것이다.
“ 네, 네놈은?”
진자웅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죽이면 안 되는 거였어?”
연우강은 검집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딴청을 부렸다.
“ 도전자에게는 방어만 허락돼 있다. 놈!”
“ 나도 그걸 지적하고 싶었어. 영감, 난 지금껏 쉰 두 번의 공격을 받았을 뿐이라고.”
“ 계속하잔 말이냐?”
“ 난 패천림에서 봐줬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영감.”
“ 넌 초식지관을 통과했다.”
“ 규칙을 어길 셈이야?”
“ 규칙이라고?”
진자웅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관문의 담당자인 자신이 멈추라고 소리를 쳤다는 건 곧 초식지관을 통과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놈은 패천십관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며 계속하잔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 백 번의 공격을 받아낸 도전자만이 다음 관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규칙 아니었어? 여섯 곳 이상의 부상을 당하면 안 된다고 한 사람은 영감이잖아. 벌써 잊은 거야?”
진자웅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았다.
그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눈빛으로 살인을 할 경지에 올랐다면 연우강은 진작 죽임을 당했을 정도로 그의 눈빛이 강렬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해약을 복용하고 연우강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치솟는 노화를 꾹꾹 내리눌렀다.
“ 그럼 저 쓰레기들은 놔두고 우리 둘이 한판 하는 건 어때? 해약을 복용한 채로 말이야.”
연우강은 백령으로 진자웅을 가리키며 도발했다.
“ 내공을 지닌 채로 비무를 하잔 말이냐?”
“ 물론이야, 영감. 마흔여덟 번의 공격을 영감이 직접 하는 거야. 그게 싫으면 저기 쓰레기들과 함께 얌전하게 처박혀 있으면 돼.”
“ 오냐 놈! 그렇게 하마.”
진자웅은 품속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연우강에게 던지고 하나는 자신이 복용했다. 그것은 군자산의 해약이었다.
“ 시원시원해서 좋네. 죽일 때도 시원스럽게 보내줄게.”
연우강은 진자웅으로부터 받은 알약을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몸 곳곳으로 흩어졌던 내기가 단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우강의 눈에서 신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즈음 진자웅의 몸에서도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와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살기를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살해할 수 있다는 의형살인강이었다.
내공이 돌아오자마자 진자웅이 곧바로 의형살인강을 펼친 이유는 연우강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영감.”
파앗!
연우강은 백령을 쭉 내밀며 진자웅을 향해 폭사돼 갔다.
쩌억!
얼음은 깨질 때도 소리가 난다. 백령에서 냉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강타하자 석실 벽에 새하얀 서리가 끼었다. 그러한 와중에 백색 광채 중 한 줄기는 진자웅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갔다.
“ 헉!”
진자웅은 헛바람을 삼키며 급하게 몸을 날렸다.
쩌엉!
그가 떠난 자리를 강타한 새하얀 기운은 바닥을 타고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음기의 결정체라고 부르는 백령으로 백옥수를 펼친 결과였다.
“ 차앗!”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진자웅은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아래로 내리꽂히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끝에서 폭풍과 같은 기운이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진자웅이 익힌 무공은 패천십경 중 제 칠경인 수라삼절이고 그가 연우강을 향해 펼치고 있는 초식은 수라삼절 중 일절인 수라폭풍이었다.
“ 날 무시하는 거야, 아니면 약한 무공부터 펼치는 게 습관이야.”
연우강은 눈앞으로 밀려오는 검기의 폭풍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슴 앞으로 끌어들였다가 쭉 내민 백령에서 광포한 기운이 쏘아져 나갔다.
“ 허억!”
진자웅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마치 수천 마리의 말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물론 보통 말이라면 수천이 아니라 수만 마리가 덮쳐온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터였다. 문제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수천 마리의 말들이 전부 강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수천 마리의 말 앞에서 수라폭풍은 한낱 미풍에 불과했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검법의 명칭이 떠올랐다.
최초로 대야벌 벌주를 패배시켰던 무공.
강기로 이루어진 일만 마리의 말이 우주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달려온다고 하여 우주일만검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 우, 우주일만검결!’
진자웅은 눈을 감아버렸다.
퍽! 퍽퍽퍽! 퍽퍽! 퍽퍽!
섬뜩한 소리가 몸 곳곳에서 들려왔다.
한때 그런 맹세를 한 적이 있었다. 설사 비무를 하다가 적의 검에 찔려 죽는다고 해도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죽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비명 지르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크아....악!”
콰앙!
마치 바윗덩어리가 떨어질 때나 나올 법한 소리가 진자웅이 떨어진 곳에서 흘러나왔다 당하는 순간 얼음덩어리로 변해 버린 탓이었다.
바닥으로 내려선 연우강은 패천림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들 역시 검으로 펼친 백옥수의 기운에 당해 거의 동사 상태였다.
연우강과 시선이 마주친 패천림 무인들은 이곳에 있으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출구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출구에 도착하자 비로소 군자산의 기운이 풀리며 내공이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패천림 무인들은 벌떡 일어나 몸을 날렸다.
얼어붙었던 몸이 녹으며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린 그들은 패천림 최심처에 내려섰다.
그곳은 패천림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패천십노인 무무 제천강의 거처였다.
“ 무슨 일이냐?”
차를 마시고 있던 제천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안으로 들어온 자는 제일 장로전의 집사인 오절마검 사인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행색은 처참했다. 몇몇 손가락은 떨어져 나가 버렸고, 옷은 피에 젖은 채였는데 지금도 끊임없이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당했습니다. 대장로님.”
사인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퍼억!
아직 완전하게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무릎을 꿇자, 얼음이 깨지는 것처럼 무릎이 부러졌다.
“ 크아악!”
사인정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 설마!”
제천강은 자리를 박차고 사인정 앞으로 몸으로 날렸다.
“ 빙공?”
제천강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놀랍게도 떨어져 나간 사인정의 다리는 꽁꽁 언, 그야말로 얼음덩어리였다.
“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라, 사인정.”
제천강은 사인정의 맥문을 잡고 진기를 불어넣으며 소리쳤다. 사실 빙공에 당한 자에게 진기를 불어넣는 것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강이 들고 있던 검이 백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제천강으로서는 그것까지 생각할 경황이 없었다. 아니 사인정은 이미 회생 불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죽기 전에 도전자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 놈이 지닌 무공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사인정은 조금 전 초식지관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 처, 천노가 당했단 말이냐. 그것도 단 일 초만에?”
제천강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그쳤다.
수라삼절은 패천림의 십대 무공 중 서열 칠 위에 올라 있는 무공이고 진자웅은 그 무공을 십 성까지 익혔다.
검탄 강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진자웅이 단 일 초 만에 당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것도 얼음으로 부서졌다니.
“ 제일 장로께서는 수라삼절의 일절인 수라폭풍을 펼쳤고, 놈은 전력을 다했습니다.”
“ 진자웅이 방심했다는 말이냐?”
“ 방심했다기보다는 수라폭풍으로 놈의 초식을 막는다는 건 역부족이었습니다.”
“ 어떤 무공이더냐?”
“ 마치 강기로 이루어진 말 수천 마리가 달려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 말 수천 마리가 달려드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 그, 그렇습니다.”
사인정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기를 주입하고 있던 제천강은 사인정을 보았다.
“ 너무 급하게 내기를 끌어올렸습니다.”
“ 그렇다. 사인정. 빙공에 당했을 때는 최대한 천천히 몸을 녹여야 한다. 그런데 넌 그걸 어겼다.”
“ 하지만 살아난다고 해도 병신이 됐을 겁니다.”
“ 어쩌면.....”
제천강은 주입하던 내기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돌봐주거라.”
뒤에 서 있는 의원을 향해 나직이 말하고는 처소를 나섰다.
‘ 수천 마리의 말이 달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무공과 극한의 빙공을 동시에 펼친다는 건데.....’
제천강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길 얼마쯤, 문득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한편.
초식지관을 나온 연우강은 한쪽 구석에 난 통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초식지관과 강기지관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천장에 야명주가 박혀 있는 통로를 따라 반 각 정도 걸어가자 비로소 강기지관이라고 쓰인 석문이 나타났다. 연우강은 초식지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석문에 손바닥을 대고 혈잔수를 끌어올렸다.
푸스스!
석문이 가루로 흩어지고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연우강은 강렬한 빛에 적응이 되자 안으로 들어갔다. 강기지관 안에는 무인들이 대기중이었다.
“ 응?”
“ 어?”
“ 벌써?”
연우강의 등장을 예측하지 못한 듯 가부좌를 하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시선을 들었다.
곧 패천림 무인들의 얼굴에 살기가 깔렸다. 가루로 변한 석문 때문이었다. 내기를 끌어올린 상태로 석문을 밀게 되면 굳이 가루로 만들지 않아도 문은 열린다. 시비를 걸기 위해 일부러 그런다고 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싸울 때 흥을 돋우려고 일부러 가루로 만든 거야. 화를 내고 욕을 해도 상관없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 오 장 건너 편에 섰다.
“ 진식인 모양이지?”
패천림 무인들은 다섯 명씩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다. 일정한 형식을 이루며 앉아 있는 모양새가 이곳 또한 진식을 구축하고 있는 듯했다.
“ 여긴 강기지관이다. 우리는 강기를 펼쳤을 때와 같은 효과를 내는 무기 일백 개를 암기처럼 던져낼 것이다. 넌 그것들을 전부 잘라내야 한다. 실패는 다섯 개까지만 허용된다.”
왼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기 어린 얼굴로 연우강을 노려보고 있는 자는 지노 대창익이었다. 대창익은 아직 초식지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예상보다 빠른 연우강의 행보에 약간 놀랐을 뿐이었다.
“ 여섯 개를 잘라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 사지가 하나씩 잘려나가면서 널 이곳으로 보낸 배후를 불게 될 것이다.”
“ 원래 그렇게 큰소리치는 걸 좋아해?”
“ 무슨 소리냐?”
“ 천노 그 영감도 그러더라고. 쥐뿔도 없는 놈이 내 앞에서 검기를 날리더란 말이지.”
“ 검기를 날렸다고?”
대창익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초식지관은 내기를 끌어올리지 않고 공격과 방어를 하는 관문이다. 그런 곳에서 내기를 끌어올렸다는 말은 곧 규칙을 무시하고 놈을 공격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 그래서 난 강기를 쏟아 부어줬어.”
“ 그래서 어, 어떻게 됐느냐?”
“ 질문은 상대방의 목에 검끝을 찔러 놓고 하는 거라고 했잖아. 시작하자고.”
연우강은 검집에 꽂아두었던 백령을 뽑아들었다.
“ 오냐 놈! 준비하라!”
대창익은 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부좌를 하고 있던 무인들이 벌떡 일어났다. 자리에서일어난 무인들이 연우강을 쏘아보며 내기를 끌어올렸다.
구구구!
다섯 명씩 짝을 이루고 있던 무인들의 몸에서 투명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곧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 검은 기운은 거미줄처럼 다섯 무인들의 몸을 둘러싸더니 반구 형태로 변해갔다. 전부 스무 개로 이루어진 그것은 흑양증폭마진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진식이었다. 반구 안에 들어 있는 다섯 명은 같은 내공심법을 익힌 자들로 서로 간에 자유롭게 공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어극회탄이라는 암기술을 극성으로 익힌 상태였다.
[ 나네, 지노.]
막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하는데 귓전으로 제천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 초식지관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형]
대창익은 전음으로 물었다.
[ 천노가 당했네.]
[ 천노가 당해요?]
대창익은 깜짝 놀랐다.
천노 진자웅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였다. 그런 그가 눈앞에 있는 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 말 그대로네. 지노. 천노는 얼음 조각으로 부서졌네.]
[ 얼음 조각으로 부서졌다는 건, 설마 백옥수란 말입니까?]
[ 수천 마리의 말이 달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네. 지노.]
[ 수천 마리의 말이라면 혹시.......]
대창익은 말끝을 흐렸다.
[ 그걸 확인하기 위해 직접 왔네, 지노.]
[ 그럼?]
[ 전력을 다해야 하네. 아니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네.]
[ 알았습니다. 대형.]
대창익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는 각 반구를 구축하고 있는 조장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의 전음이 끝나자 반구를 이루고 있는 검은색 막이 더욱 농밀해지면서 기운도 광포하게 변했다. 이십 개의 소진에서 발생한 기운으로 인해 석실 내부는 폭풍이 이는 바다처럼 변했다. 완전하게 발진한 소진은 연우강 주변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소진이 이동하면서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다.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 위에서 아래로 부는 바람,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수십 군데에서 동시에 연우강을 향해 불어 닥쳤다.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과거 대야벌 지옥에서 겪었던 풍동이 떠올랐다.
풍동에서는 방향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수백 결의 바람이 불어왔었다.
“ 바람에 암기를 실어 보내겠다는 뜻인가?”
연우강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좋은 방법이다. 내공을 가진 무인이 진식을 구축하고, 외부로 뽑아낸 내공은 바람으로 변한다. 즉 바람이 곧 무인들의 내공이란 의미다. 그 상태에서 암기를 날리게 되면 암기는 던지는 자의 힘과 바람의 힘을 한꺼번에 내포하게 된다. 이곳이 강기지관이란 의미는 암기가 내포한 힘이 강기를 펼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일 테다.
스아악!
공격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바람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며 날카로운 예기가 감지됐다. 연우강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거무튀튀한 물체가 바람을 타고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 내 앞에서 바람 자랑을 하면 큰일 나는데.”
연우강은 백령을 세워 천천히 내밀었다.
검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을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팔을 쭉 펴자 바람이 어깨 좌우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감지됐다. 그는 싱긋 웃으며 수직으로 세웠던 백령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백령의 검집을 휘둘렀다.
까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암기가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쐐액! 쐐액!
이번엔 앞과 뒤에서 암기가 날아왔다.
앞쪽에서 날아오는 암기가 약간 빨랐다. 시간상으로는 일초 가량 되는 듯하다. 연우강은 먼저 앞에서 날아오는 암기를 쳐냄과 동시에 뒤편에 있는 암기도 후려쳐 부러뜨렸다. 암기를 쳐내고 자세를 잡기도 전에 또다시 진득한 살기가 밀려왔다. 전후좌우 네 곳이었다.
네 방향이라고 해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날아오기 때문에 쳐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 다음은 여덟 개겠네?”
“ 저놈!”
대창익의 눈이 휭둥그레졌다.
바람에 섞여 날아가는 풍살도의 길이는 세 치 가량이지만 과거 밀천에서 사용했던 초살도를 바탕으로 만들어 바람을 타면 더욱 빨라진다.
더불어 풍살도를 만든 쇠는 만년한철이다.
그런데 놈은 그 풍살도를 검도 아닌 검집으로 부러뜨리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하지만.....”
대창익은 점점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진식으로 시선을 주었다. 풍살도 네 개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할 뿐이고, 진짜는 지금부터다. 전보다 더 빠르고 잔인하게 놈을 향해 쏘아져 갈 것이다.
대창익이 이렇듯 자신감을 갖는 이유는 흑양증폭마진을 전력으로 펼친 적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관문인 검탄지관이 이곳과 비슷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력을 다하고 있다.
놈이 풍살도를 쳐내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목적으로 공격을 하기 때문이다.
‘ 넌 반드시 이곳에서 쓰러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패천림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놈!’
대창익이 지켜보는 사이에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각각의 시간차를 두고 여덟 개의 풍살도가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하지만 연우강의 동작이 전보다 더 빨라졌다는 걸 제외하면 움직임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검집을 휘두를 때마다 풍살도는 절반으로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차앗!”
“ 타앗!”
동시에 열여서 곳의 반구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반구에서 튀어나온 풍살도가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이미 풍살도가 날아가는 속도는 화살이 나아가는 속도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 타앗!”
연우강의 입에서도 짤막한 함성이 터져 나오고 백령의 검집이 빗살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흰색 선을 연우강의 몸 주변에 남겨두었다. 그 선에 닿은 풍살도들은 두 조각으로 분리돼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이야압!”
“ 차앗!”
“ 타아앗!”
석실 내부가 터져 나갈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어 가공할 기운이 각 소진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쿠쿠쿵! 쾅쾅쾅! 쿠쿠쿠!
소진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석실 벽을 강타하면서 둔탁한 소성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천장에서 떨어진 돌가루가 폭풍처럼 불어 닥치는 바람에 휩쓸려 주변은 뿌옇게 변했다.
쐐액! 쐐액! 쐐액! 쐐액!
바람 소리, 풍살도 소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가루까지 석실 내부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의 극치였다.
“ 이제 시작이야, 영감.”
연우강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백령을 세워 들었다.
서른두 개의 풍살도. 그가 지금껏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검의 단면은 양쪽이 길쭉한 마름모꼴 형태를 띠고 있다. 중심에서 자르게 되면 두 변이 긴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게 되는데 그 이등변 삼각형의 끝이 바로 검날이 된다. 빠르게 날아오는 물체에 검날을 들이대면 둘로 나뉜 물체는 검면을 타고 좌우로 갈라지면서 뒤편으로 흐르게 된다. 물론 날아오는 물체가 검날에 잘리더라도 속도가 느려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르긴 하지만 백령은 파천육기의 하나인 신검.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풍살도와 쇠를 쉽게 잘라내는 백령, 그리고 약간의 마라천력이면 두 조각으로 잘려 날아가는 암기의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 그렇게 되면 강기처럼 쏘아져 오는 암기를 막아야 할 자들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되지.’
연우강의 시선이 순식간에 전방을 훑었다.
전방으로 날아오는 풍살도는 여덟 개였다. 전방에 여덟 개가 있다면 좌측과 우측 그리고 뒤에도 각각 여덟 개씩 있을 것이다. 풍살도의 위치를 확인한 그의 신형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미 그의 손에 들린 백령은 수평으로 세워진 채였다.
가장 먼저 다가온 풍살도를 향해 손을 쭉 내밀었다.
슈캉!
바람을 타고 날아온 암기는 세워진 백령에 잘려나가며 연우강의 몸을 스치듯 지나쳐 뒤편으로 날아갔다.
슈캉! 슈캉! 슈캉! 슈캉!
연우강의 신형이 전면으로 나아갔다가 좌측으로 돌고, 뒤로 갔다가 다시 우측으로 돌았다. 그의 움직임은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빗살만큼이나 빨랐다. 그가 백령을 앞으로 내밀 때마다 풍살도는 두 조각으로 잘려나가 바람을 타고 뒤편으로 날아갔다.
“ 컥!”
“ 커억!”
“ 크윽!”
“ 으윽!”
“ 저, 저, 저....”
대창익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곳 강기지관은 패천림 무인들이 공격을 하고 도전자인 놈이 풍살도를 막아내는 곳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드러난 광경은 도전자인 놈이 공격을 하고 패천림 무인등리 방어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놈을 향해 쏘아져 나간 풍살도는 두 조각으로 잘린 다음 지금껏 날아왔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패천림 무인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검은색 운무가 반구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방어막이 아니라 흑양증폭마진을 구축할 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공격에 노출된 패천림 무인들은 속절없이 당하는 수밖에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절반 이상의 소진이 와해됐고, 패천림 무인들은 어찌된 일인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멍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 와중에도 두 조각으로 잘려나간 풍살도가 뒤편으로 쏘아져가고 있다.
“ 커억!”
“ 크윽!”
“ 으윽!”
“ 멈춰라!”
급기야 대창익은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거세게 물어치던 강풍이 뚝 그치고 석실 내부에 정적이 찾아왔다.
“ 이제 예순세 개를 받아냈을 뿐인데.”
연우강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패천림 무인들을 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삼관으로 가라!”
대창익은 오른편 구석을 가리켰다.
“ 그렇게 하지 뭐. 몸조리 잘해.”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창익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문고리가 달려 있는 석문이 있었다. 연우강은 석문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푸스스!
또다시 석문이 가루로 흩어져 내리고 폭 일 장 높이에 달하는 동굴이 나타났다.
연우강은 동굴로 들어갔다.
그가 동굴 안으로 모습을 감추자, 초식지관과 연결된 통로를 통해 제천강이 들어왔다. 안쪽 상황을 확인한 제천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 으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현장은 더욱 참혹했다.
풍살도에 당한 무인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고, 살아 있는 자들도 팔다리가 잘려나간 자들이 대부분이다.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보다 더욱 황당한 일은 저렇듯 많은 무인들이 희생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 대형!”
대창익은 굳은 얼굴로 제천강을 불렀다.
“ 일단 부상자들을 치료하게.”
“ 알겠습니다. 대형.”
대창익은 고개를 숙이고는 문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패천림 무인들은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부축하여 강기지관을 나갔다.
‘ 도대체 누구냐, 네놈은?’
제천강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 좀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는 시선을 들어 연우강이 사라진 동굴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제천강은 패천삼관인 검탄지관에서도 연우강이 사용하는 무공을 확인할 수 없었다. 검탄지관에서도 연우강은 강기지관에서 보여주었던 것 이상은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제천강은 밖으로 나왔다.
다음 관문인 패천사관은 내공을 시험하는 내공지관이기 때문이다. 설사 삼관까지 크게 무리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공지관을 앞두고는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하루 동안의 운기행공으로 몸을 추슬렀고, 석년의 천마 조사도 그렇게 하였다. 연우강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와 처소로 향했다.
처소에는 각 관문을 담당하는 장로들이 들어와 있었다. 제천강을 보는 장로들의 얼굴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패천림에는 지난 천오백 년 동안 패천삼관 이상을 거쳤던 무인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 중에는 만상지관에 도전하여 림주가 된 자도 있고, 실패한 자도 있었다. 그 많은 무인들이 패천십관을 지나쳐 갔지만 이번처럼 각 관문이 철저하게 파괴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놈이 강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동안 관문을 놈처럼 대했떤 무인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네.”
장로들의 내심을 짐작한 제천강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동안 패천십관에 들어왔던 많은 무인들은 방어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했다. 즉 초식지관에서는 패천림 무인들의 공격을 방어하기만 했고, 패천림 무인들 또한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온 자는 공격을 통해 패천림 무인들을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언뜻 보기엔 규칙을 어긴 것 같지만, 초식지관을 통과할 때 공격해서 안된다는 규칙이 없기 때문에 엄밀하게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도전자가 잘못한 게 아니라 패천십관의 약점이 이번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었다.
“ 놈의 무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패천사관인 내공지관을 맡고 있는 이비 가삼이 물었다.
“ 무공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어느 정도라고 판단을 내리는 건 쉽지 않네.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있네.”
“ 상천의 보물인 백령을 지녔고, 천마삼경 상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말입니까?”
“ 그렇네.”
제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천마삼경은 생사림 림주 마수귀의 유명계가 가지고 탈출한 걸로 알고 있습니. 마수귀의 유명계는 밀천으로 들어갔다가 삼합평에서 잠룡들에게 죽임을 당했고요.”
“ 놈이 밀천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대형.”
가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밀천의 후예가 우리 패천림에 도전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가?”
“ 그건......”
가삼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파천육기 중 하나인 백령을 지녔다는 건 최소한 밀천의 적통 후계자이거나 그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자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밀천의 최고위급이 패천림에 도전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놈은 어떤 목적을 지니고 패천십관에 도전한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 놈이 펼쳤던 검법은 어떻습니까, 대형?”
이번에는 대창익이 물었다. 우주일만검결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 그것도 확실하지 않네. 하지만.......”
제천강은 말끝을 흐렸다.
“ 말씀하십시오. 대형.”
“ 어쩌면 적은 우리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네.”
“ 가까운 곳이라면?”
장로들은 긴장한 얼굴로 제천강을 보았다.
“ 겉보기에는 조용한 것처럼 보이짐나 지금 대야벌은 폭풍전야라고 할 수 있네. 담대만승과 만우량은 영구 집권을 위해 율령궁을 강호에 풀었고, 그의 동생인 담대천호와 무궐 궐주 공손정우는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담대만승을 견제하는 중이고, 황궐 궐주 공야일우는 황실을 등에 업고 차기 벌주가 되고자 하네.”
“ 그자들 중에 한 명이 놈을 보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 지금 강호를 이끌어 가는 자들이니까.”
“ 그들 중 누구라고 보십니까?”
“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자는 현재로선 놈밖에 없네.”
“ 그럼 내공지관에서 모든 힘을 뽑아내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 그 수밖에 없네. 우선은 누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지 그걸 밝혀내야 하네.”
“ 혹시 그자들과 관련이 있는 자가 아닐까요?”
구레나룻부터 시작하여 턱까지 빳빳한 수염이 무성하게 나 있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는 수염 때문에 삼국시대의 거기장군 장비를 닮았다고 하여 금강역사라는 별호보다 거기장군으로 더 많이 불리는 장육철이었다. 장육철은 패천오관 금강지관을 맡고 있는 장로였다.
그가 말한 그들이란 몇 개월 전 마총으로 침입한 경천사마를 말한다. 마총 지도를 가지고 들어온 네 명과 패천림 무인들은 혈투를 벌였다.
결국 마총에서 연락이 와 그들을 들여보내긴 했는데, 어쩌면 이번에 들어온 도전가가 그자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참! 그자들은 어떻게 됐는가?”
제천강도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바로 옆에 있는 왜소한 노인을 보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날카로운 광채가 흘러나오는 이 사람은 제천강과 더불어 무쌍이노라 불리며 패천십관 중 제구관인 범천지관을 맡고 있는 무검 한사였다.
“ 주화입마 상태로 내보내졌습니다.”
“ 그분들에게 제압당한 모양이구먼.”
“ 그런 모양입니다.”
“ 그럼 자네가 알아낸 건 없겠군.”
“ 대형이 한 번 들어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네.”
제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대하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무림 돌아가는 상황도 그렇고, 아니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 대장로님.”
바로 그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그러느냐?”
“ 그자가 내공지관으로 들어갔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 정말이냐?”
제천강은 깜짝 놀라 물었다.
“ 그렇습니다. 대장로님.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 먼저 가겠습니다. 대형.”
내공지관을 맡고 있는 이비 가삼이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도대체....”
제천강은 멍한 얼굴로 장로들을 보았다.
내공지관의 도전을 앞둔 자가 휴식조차 취하지 않고 곧바로 도전을 감당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의 지시로 패천십관에 도전했다면 더더욱 몸을 추슬러야 한다. 그런데.....
“ 알 수 없는 놈이군.”
제천강은 눈을 가늘게 모아 허공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