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06화 (106/232)

제 6장 그 이름 천마.

내공을 겨루는 방법은 간단했다.

집채만 한 바위를 사이에 두고 상대방에게 내공을 쏟아 부으면 된다. 단, 바위에서 손을 떼거나 바위가 부서지게 해서는 안 된다.

연우강은 단 위에 올라져 있는 바위를 보았다.

바위의 크기는 높이와 폭이 거의 일 장에 달했는데 바위 한가운데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바위 뒤편으로 패천림 무인들이 이십 명씩 조를 이뤄 다섯 줄로 서 있다. 설사 백 명을 일렬로 세운다고 해도 한 명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의 양은 한정돼 있기 때문일 테다.

“ 바로 시작하면 되나?”

연우강은 바위에 나 있는 장인에 양손을 댔다.

“ 쉬어도 상관없다.”

가삼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자신감인지 만용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만용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내공 대결을 하다가 잘못되면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고 심하면 그 자리에 죽기도 한다.

내공 대결은 결코 만용으로 나설 자리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말인데,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렇게 강해 보이지가 않는다.

“ 천마는 하루 쉬었겠지?”

“ 설마 그것 때문에?”

“ 난 패천십관 따위와 경쟁하러 들어온 게 아냐, 영감. 내가 겨루고 싶은 사람은 천마라고.”

들으면 기분 나빠 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툭툭 뱉어냈다. 이곳에 온 목적은 천년마인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이지 관문 통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 감히!”

가삼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랐다.

“ 적당히 달궈진 것 같으니까 시작하자고.”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 시작하라!”

가삼은 패천림 무인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척! 척척척! 척척!

가삼의 명령이 떨어지자 패천림 무인들은 일제히 앞쪽에 있는 자의 명문혈에 양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내기를 끌어올려 동료의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기를 받아들인 자는 다시 앞에 있는 사내의 몸속으로 밀어넣었고, 내기는 시냇물처럼 맨 앞쪽의 사내에게로 밀려들어갔다. 선두에서 내공을 받아들이던 양용은 움찔 몸을 떨었다.

격체전공이 주는 위험 때문이다.

양용의 내공은 일 갑자에 불과했다. 일 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이 몸 내부로 유입돼 들어온다고 해도 운용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뒤에 있는 열아홉 명이 십 년씩만 전이해 준다고 해도 내공은 삼 갑자가 넘어간다.

만일, 아무런 준비 없이 그 정도 내공을 받아들이게 되면 육체는 폭발하고 말 터였다.

몸이 폭발하는 걸 막기 위해 천마대흡인술을 익혔다. 하지만 천마대흡인술을 익혔다고 해서 내공을 무한정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세 배.

천마대흡인술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의 최대치였다.

일 갑자의 내공을 지닌 무인을 순식간에 삼갑자의 무인으로 만들어주는 엄청난 무공이 천마대흡인술이지만, 천마대흡인술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한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공력이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으면, 흘러가던 내공이 역으로 폭주하여 격체전공을 펼치고 있는 모두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 흐읍!”

양용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천마대흡인술을 펼쳤다. 그러자 가상의 단전이 생겨나며 그곳으로 명문혈을 타고 들어온 내기가 급격하게 유입돼 들어왔다.

가상의 단전이 꽉 채워지자 양용은 양손을 통해 내기를 내밀었다. 바위를 뚫고 나아가던 내기가 반 장 가량 들어가다가 장애물을 만난 듯 우뚝 멈췄다.

‘ 네놈도 시작한 모양이군.’

양용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내공 대결은 독을 바른 송곳을 촘촘하게 꽂아 놓은 탁자 위에서 팔씨름을 하는 것과 같다. 처음엔 가진 힘과 상관없이 팽팽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면 승부가 갈리기 시작하는데, 힘이 먼저 떨어진 쪽이 패하게 된다. 패자는 팔이 젖혀지면서 송곳에 찔리게 되고, 송곳에 발라놓은 독에 중독돼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거나 심하면 죽는다.

내공 대결 또한 다르지 않다.

패한 쪽은 죽거나 폐인이 될 것이다.

‘ 문제는 일 대 일이 아니ㅏ라 우린 다섯 명이라는 거다, 놈!’

양용이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오 대 일의 대결. 아니 정확하게는 백 대 일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이 패할 리가 없을 터였다.

우우웅!

다섯 곳에서 동시에 내공을 집중하자 바위에서 바람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위는 급격한 떨림을 보이는 듯하더니 급기야 들썩이기 시작했다.

‘ 괜찮네.’

연우강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손바닥을 대고 있는 바위는 단순한 바위가 아니었다. 다섯 곳에서 밀려오는 내공을 한 곳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바위였던 것이다.

한 곳에서 밀려오는 내공은 약 삼 갑자.

그것들을 전부 합치면 무려 십오 갑자나 된다.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니었다.

연우강은 단전을 활짝 개방했다.

단전이 열리자마자 흑풍이 뛰쳐나와 온몸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흑풍은 온몸 구석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잠력을 깨워 힘을 키웠고, 양손을 향해 밀려갔다.

쿠우웅!

마치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둔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 억!”

양용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내기를 막고 있던 장벽이 갑자기 강해지며 천천히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패천림 무인들이 쏟아내는 공력은 십오 갑자에 달한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십오 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밀어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하지만.......’

양용은 두 손을 대고 있는 바위를 쏘아보았다.

내공은 근육의 힘과 비슷한 성질을 띤다. 처음엔 괴력을 발휘하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약해지다가 어느 순간 탈진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될 터였다. 양용은 뒤로 젖혀졌던 상체를 똑바로 세우며 내공을 밀어 넣고 있었다.

어느덧 반각이 흘렀다.

양측이 뿜어내는 내기로 인해 대기는 폭풍처럼 요동치고 바위의 들썩거림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 빌어먹을!’

가삼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일 각.

내공지관에서 도전자가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벌써 반 각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밀려야 할 상황인데, 오히려 패천림 무인들의 상체가 뒤로 젖혀지고 있다.

[ 내공을 올려라!]

가삼은 패천림 무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음을 들은 패천림 무인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미 십 년의 내공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선두에 있는 동료가 받아들이는 공력은 삼 갑자에 달하고 여기서 더 올리게 되면 자칫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십 년의 내공을 쏟아내는 상태라 비교적 여유가 있는 뒤편의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가삼을 보았다.

[ 놈은 아직 이화접목의 수법을 펼치지 않았다.]

가삼은 다시 전음을 보냈다.

가삼을 돌아보았던 패천림 무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들이 쏟아내고 있는 내기는 천 년 공력이다. 물론 천 년 공력이 전부 놈에게 밀려가는 건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팔백 년에서 구백 년 공력은 될 것이다. 그런데 그걸 받아내고 있단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제 반 각 남았다.]

또다시 가삼의 전음이 들려오자 패천림 무인들은 쏟아내던 내공의 양을 늘렸다. 이럴 경우에 대비하여 연습도 많이 했다. 한 번에 많은 공력을 쏟아내게 되면 선두에 있는 자의 몸에 무리가 가고 자칫 잘못하면 몸이 폭발하고 만다. 조심스럽게 해야만 했다.

느닷없이 엄청난 공력이 들어오자 양용의 옷이 바람을 잔뜩 머금은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지고 얼굴은 시뻘게졌다. 동료들로부터 전해져 온 내공은 무려 오 갑자에 달했다.

양용은 이를 악물고 내공을 쏟아냈다.

구우웅!

또다시 대기가 출렁거리며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연우강의 상체가 천천히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선 채로 바위와 함께 떠올랐다.

‘ 이제 알겠군.’

연우강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지관은 단순히 내공을 겨루는 관문이 아니었다. 아니 무인 일백 명이 쏟아내는 내공을 받아낸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상대방의 내공을 사방으로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 하지만 난 연우강가이다.’

연우강은 밀어냈던 내기를 천천히 줄여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패천림 무인들이 쏟아낸 내기가 밀려왔다.

‘ 쿡!’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다섯 곳에서 동시에 밀려오는 압력에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아니 몸이 금강불괴지신이 아니었다면 진작 폭발하고 말았을 것이다.

‘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찬 공은 바늘만 살짝 가져다 대도 바로 터져 버린다.’

연우강은 꾹꾹 참으며 쏟아져 들어오는 내기를 받아들였다. 얼마나 많은 받아들였는지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만년오금철로 만들어진 사망묵의가 다 부풀어 오를 정도였다. 더 이상은 받아들일 여유가 없게 되자, 불괴수호신공을 운용했다. 불괴수호신공은 상대방의 내공을 흐트러뜨리는 무공이지만 이화접목처럼 방향을 바꿀 수도 있는 무공이었다.

‘ 오른쪽에 있는 네놈부터다.’

오른손은 그대로 유지하고 왼손을 활짝 개방하며 흑풍을 조정했다. 그러자 새로운 힘의 유입에 미친 듯이 날뛰고 있던 흑풍이 열린 혈도를 타고 광포하게 쏘아져 나갔다.

“ 커억!”

바위에 손을 대고 있던 대광은 피화살을 뿜었다.

느닷없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기운이 밀고 들어와 몸 내부를 강타해버린 것이었다.

선두에 있는 대광이 무너지자 내기가 역류하기 시작하였고, 역류한 내기는 폭풍처럼 패천림 무인의 몸을 휩쓸었다.

“ 커억!”

“ 크윽!”

“ 허억!”

패천림 무인들은 피를 토하며 풀썩풀썩 쓰러졌다.

“ 크아악!”

대광이 무너지자마자 이번엔 양용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입은 물론이고 코와 귀에서까지 피를 쏟아내고 있는 그는 대광보다 더 심했다.

“ 멈춰라!”

질겁한 가삼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머지 무인들은 급하게 내기를 거둬들였다.

쿠웅!

반 장 가량 떠올랐던 바위가 떨어지며 둔탁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가삼에게 그 소리는 패천림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

가삼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가도 돼?”

연우강은 가삼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토, 통과다.”

“ 고마워.”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오른편 구석으로 향했다.

곧 그의 신형이 패천오관인 금강지관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모습을 감췄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놈!”

가삼은 연우강이 사라진 통로를 쏘아보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일백 명의 무인이 쳐내는 장력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금강지관에서는 놈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 철수하라!”

가삼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금강지관의 결과를 보기 위해 패천오관으로 향했다. 패천십관의 각 관문 천장 한쪽 구석에는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비무를 볼 수 있도록 작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일관에서 죽임을 당한 진자웅과 패천오관을 맡고 있는 금강역사 장육철을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이 와 있었다.

먼저 와 있던 일행은 말없이 가삼을 맞았다.

“ 면목 없습니다.”

가삼은 고개를 숙인 채 한편 의자로 가 앉았다.

“ 저놈이 강해서 그런 걸 자네가 면목 없을 이유는 없지 않는가. 일단 지켜보도록 하세.”

제천강은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그때 연우강은 금강역사 장육철로부터 금강지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 그러니까 가만히 서서 매 백 대를 맞으면 끝난다는 거야?”

“ 그렇다. 포기하겠다고 소리치면 바로 공격을 멈출 것이다.”

“ 영감이 직접 하는 건 어때?”

“ 무슨 소리냐?”

“ 시간을 절약하자는 말이지 뭐겠어.”

“ 그러니까 내가 장력을 발출하되 횟수를 줄이자는 말이냐?”

“ 열 대 정도로 했으면 좋겠는데, 영감 생각은?”

푹!

장육철의 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장육철은 지독한 모욕에 부들부들 떨었다. ‘열 대 정도’라는 말은 곧 자신의 장력을 매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다.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 죽이는 게 아니고 때리는 거니까 ‘대’가 맞잖아.”

연우강은 장육철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난 패천림의 장로인 금강역사 장육철이다, 놈!”

“ 일 관을 맡았던 진자웅도 장로였지, 아마?”

“ 개자식!”

“ 나는 이 빌어먹을 시간을 줄이고 싶을 뿐이야. 영감. 그리고 정히 자존심이 상하면 마지막 일 초는 나도 공격할 수 있게 해주면 되잖아.”

“ 정녕!”

급기야 장육철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살기가 일면 내기가 저절로 일어나는 경지에 오른 듯 그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 마음을 가라앉히게.]

막 출수를 하려는 데 창노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왔다. 몸을 날리려던 장육철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 놈이 하자는 대로 하게.]

다시 제천강의 전음이 들려오자 장육철은 화를 삭이고 연우강을 보았다.

“ 좋다. 놈! 대신 마지막 일 초는 허락하겠다.”

“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야.”

연우강은 양손을 편하게 늘어뜨리며 불괴수호신공을 끌어올렸다.

‘ 그렇군.’

불괴수호신공을 끌어올리던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패천십관의 각 관문은 전혀 다른 듯하면서 서로간의 연관성이 있었다. 내공지관과 금강지관은 이화접목 수법을 완벽하게 익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험임과 동시에 무공을 익히는 관문.

그곳이 바로 패천십관이었던 것이다.

“ 묻고 싶은 게 많다. 놈!”

장육철은 심호흡을 하며 단전을 활짝 개방했다.

그의 몸에서 붉은 운무가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장육철이 익힌 무공은 패천십경 중 제육경인 적무천마장이었다.

“ 시작해!”

연우강은 아예 뒷짐을 지며 소리쳤다.

“ 오냐! 타앗!”

장육철의 입에서 짐승의 광포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른 그는 오른손을 가슴 안쪽으로 감아 들였다가 밖으로 쭉 뻗어냈다.

휙!

밖으로 내민 그의 손바닥에서 붉은색 장인이 튀어나와 연우강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연우강은 불괴수호신공의 기운을 가슴으로 모으며 앞으로 약간 내밀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앞으로 내밀었떤 연우강의 가슴이 자연스럽게 뒤로 빠졌다. 연우강은 몸 내부로 들어온 장육철의 장력을 발 쪽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나직이 수를 세어갔다.

“ 한 대!”

“ 차앗!”

한 대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번째 장력이 연우강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갔다. 이번엔 장육철의 손에서 쏘아져 나간 장인은 두 배로 커져 있었다.

퍼억!

소리가 커지면서 충격의 강도도 더 강해진 듯 연우강의 상체가 약간 휘청였다.

“ 두 대!”

“ 놈!”

퍼억!

장육철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전 장에 전 내공을 실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장인은 더욱 커져 이제는 연우강 얼굴만 해졌다.

“ 세 대!”

하지만 연우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를 세어나갔다.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따. 그런 연우강의 행태에 장육철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는 미친 듯이 연우강을 향해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휘둘렀다.

“ 일곱 대!”

일곱 대란 외침이 들려오자 장육철은 우뚝 멈췄따. 그러고는 연우강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 영감의 자존심이 회복되려면 아직 먼 것 같은데?”

“ 진짜는 지금부터다, 놈!”

휙!

장육철은 오른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껏 공격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동안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장인이 커졌는데, 연우강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가는 장인의 크기는 손바닥 절반 크기였다. 지금 그가 펼치는 무공은 적무천마장의 일 초 적천이었다.

처음으로 연우강의 눈동자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손바닥 절반 크기의 장인은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장강이었다. 더불어 고도로 압축돼 있다.

퍽!

사망묵의, 흑철마신, 그리고 불괴수호신공.

세 가지로 몸을 보호했지만 상당한 충격이 왔다. 연우강은 신음을 삼키며 한 걸음 물러났다.

“ 여덟 대!”

쿠웅!

여덟 대란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육철의 왼발이 지면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쭉 내밀어졌다.

스스스!

마치 연우강의 가슴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떤 소리도 없이 장육철의 장인은 연우강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갔다. 이 초식 혈무였다.

쿵쿵쿵!

연우강은 뒤편으로 빠르게 물렀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자국이 찍힌 자리가 가루로 변했다. 더불어 울컥 비릿한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연우강은 비릿한 기운을 꿀꺽 삼켰다.

“ 마지막이다, 놈!”

장육철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오른발을 힘껏 찍었다.

콰앙!

그의 오른발에 찍힌 바닥이 얼음처럼 쩍쩍 갈라졌다. 강한 진각을 통해 대지의 기운이 들어와 본래의 내공과 합쳐졌다. 갑자기 증폭된 내공은 밖으로 뛰쳐나가기 위해 왼손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갔다.

장육철은 옆구리에 대고 있던 왼손을 쭉 내밀었다.

번쩍!

붉은 광채가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소리도 없고 광채만 남는 그 초식은 적무천마장의 마지막 초식인 적섬이었다.

쿵쿵쿵쿵쿵!

연우강은 빠르게 물러났다. 그의 발이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돌가루가 뿌옇게 솟구쳐 올랐다.

장육철은 이번에는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본래의 내공에 진각으로 끌어올린 대지의 기운까지 더해졌으니, 이번에 발출한 적섬은 사 갑자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그 정도면 대장로인 제천강도 받아내지 못할 터였다.

“ 아홉 대!”

뿌연 흙먼지 속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새하얀 광채가 눈앞으로 밀려들어 왔다. 장육철은 질겁했다. 설사 적섬에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몸 내부를 추스르려면 일정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호흡을 고르지도 않고 곧바로 공격을 해 온 것이다.

“ 이건?”

방어를 하려던 장육철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눈앞으로 다가온 검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니 검이 아니라 수백 마리의 말이 달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할 곳도 없고 막을 방법도 없었다.

장육철은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던 장육철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기세가 우뚝 멈춘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하얀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검 끝이 목울대 끝에 닿아 있었다.

“ 방금 펼쳤던 건 무슨 무공이지?”

“ 그건......”

“ 난 지금 영감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어.”

“ 적무천마장이다.”

“ 패천림의 최고 무공은 패왕수라천경으로 알고 있는데.”

“ 패왕수라천경은 패천십경 중 열 번째 무공이다.”

“ 그러니까 장로들이 익힌 무공이 패왕수라천경보다 높다는 말이야?”

“ 그렇다.”

“ 나쁜 새끼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백령을 거둬들이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한사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제천강은 통로로 모습을 감추는 연우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완전하진 않지만 우주일만검결이 맞는 것 같습니다.”

“ 그럼 밀천으로 봐야 하는 건가?”

“ 정황은 그렇습니다.”

“ 확신은 못한다는 거군.”

“ 전에 대형이 말했던 것처럼 밀천은 우릴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 그렇지.”

제천강은 굳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금강역사 장육철은 패천림 서열 육 위에 올라 있는 초 강자다. 그런 그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단 일 초 만에 굴복시켜버린 자. 그런 무공을 가진 자가 강호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아무래도 자네가 직접 나서야겠네.”

제천강은 한사를 보았다.

“ 관문을 건너뛰게 할 참입니까?”

“ 혈잔수는 천마 조사께서 만독지관을 통과하기 위해 만든 무공이었네.”

“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할 거란 말씀이군요.”

“ 놈에게는 피해를 주지 못하지만 패천림 무인들은 무기력증에 시달리게 될 거네.”

“ 그렇군요.”

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패천림은 창건 이후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일천 오백 년을 내려오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자들이 패천십관에 도전했지만 패천육관인 만독지관에 이른 자는 손가락으로 꼽고 패천칠관을 넘어선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따. 그런데 놈으로 인해 패천십관이 무용지물로 변하고 있다.

문제는 무용지물로 변한 패천십관이 아니라 패천십관을 자존심으로 여기고 있는 패천림 무인들이다. 패천십관이 무너진다는 것은 패천림 무인들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과 같고 어쩌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패배의식에 젖은 무인들로 들어찬 문파는 유지될 수 없는 건 당여한 일이다.

대형이 걱정하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 죽여도 상관없네. 아니 반드시 죽여야 하네.”

“ .... 알겠습니다. 대형.”

제천강을 가만히 쳐다보던 한사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난 그분을 만나러 가봐야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제천강은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 통로로 들어섰다.

아주 오래된 세월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제천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 일 장, 높이 일 장의 통로.

이 통로는 지천의 수뇌들이 천등십관의 도전을 꺼리게 되면서 만들어졌다. 천등십관에 도전을 해봐야 남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지천 수뇌들은 천등십관 위쪽에 통로를 만들라고 지시를 내렸다.

천등십관을 맡고 있던 장로들은 이 통로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통로에 탁자와 의자가 놓이고 지천 수뇌들이 차를 마시며 아래쪽을 관람하기 시작하면서 통로의 의미를 알게 됐다.

통로는 곧 위상의 격하를 의미했다.

지천 수뇌들이 도전할 때만 해도 지천 최고 기관이었던 천든십관이 이제는 하류 무인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지천 수뇌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하류 무인들은 아래쪽에서 목숨을 담보로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수뇌들의 눈요기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장로들은 은밀한 반란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천마 제천강이었다.

하지만 처남 제천강도 피해자에 불과했다.

최고 지위인 범천에 올랐지만 그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지천 수뇌들과 전쟁을 하게 된다. 그가 지천 수뇌들과 전쟁을 치를 때 천마 곁에 있던 자들이 바로 천등십관을 맡았던 장로들이었다.

만일 지천 수뇌들이 천마를 인정했더라면 지천은 나머지 영세오천을 누르고 중원의 패자가 됐을 것이다.

너무 뛰어나서 하늘의 시기를 받은 사람.

그가 바로 천마 제석강이었다.

“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분이 비장의 수를 숨겨두고 있었던 사실을.”

심지어 천마 제석강을 따랐던 장로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랬던 비장의 수가 자신의 대에 현세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천년마인이었다.

어느새 제천강은 통로를 나와 새로운 장소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 앞에는 십여 장 깊이의 협곡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제천강은 미련없이 그곳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서자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망설임 없이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상당히 깊었다. 어둠을 뚫고 오백 장 가량 걸어 들어가자 비로소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그는 그 빛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빛이 손에 잡힐 듯 밝아지고, 동굴의 출구가 보였다.

출구 앞으로 다가간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접니다. 어르신.”

안쪽에 대고 나직이 소리쳤다.

“ 들어오너라.”

묵직한 저음이 안쪽에서 들려왔다.

제천강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두 번도 아닌데 매번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초적인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고돈다. 마치 하늘 끝에 닿아 있는 높은 산에서 들려오는 천명 같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제천강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파앗!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강렬한 광채가 눈을 찔러왔다. 제천강은 얼른 눈을 감았다. 속으로 다섯까지 센 다음 천천히 눈을 뜨자 비로소 빛에 적응이 됐다.

제천강은 주변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소리도 그렇지만 이곳도 볼 때마다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곳은 직경 백 장 가량인 지하 세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천자으이 높이는 삼십 장 정도인데 그 중앙에는 수백 개의 야명주가 박혀 태양처럼 빛을 뿌려대고 있다. 그리고 공동 동쪽 끝에는 석조로 된 오층 건물이 서 있는데, 마치 절벽을 뚫고 나온 듯한 모습이다. 오층 건물의 좌우측으로는 사층, 삼층, 이층, 일층의 건물이 자리해 있고, 건물 앞에는 건물과 마찬가지로 돌로 만들어진 정원수가 서 있다. 정원 앞에는 직경 오장 가량의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주변에는 초지가 조성돼 있다.

저 초지를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금 있는 이곳은 최소 지하 사십 장 깊이다.

물론 지하 깊은 곳이라고 해도 물은 있을 수가 있다. 하지만 풀이 자란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서 풀을 키워낸 것이다. 대부분 햇빛이 거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음지식물이라고 하지만 수십 장 지하에서 저런 풀을 키워낸다는 것은 보통 정성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 초지 한가운데 검은 옷을 걸친 사내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 이젠 제법 뿌리를 내린 것 같구나.”

“ 여기서도 잘 자라는 모양입니다. 조사님.”

“ 야명주가 햇빛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사내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제천강을 보았다.

‘ 으음!’

제천강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백발만 아니라면 그는 사십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다.

더구나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다.

다만 그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월의 흔적은 수천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호수처럼 잔잔하고 깊은 눈이다. 그의 눈을 대하면 감히 거역하기 힘든 경외감이 느껴진다. 그가 바로 천오백 년 만에 깨어난 천마 제석강이었다.

“ 어쩐 일이냐?”

제석강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 전에 사조께서 사로잡았던 그들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 흑천의 무공과 상천의 무공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말해줄 게 없다.”

“ 흐, 흑천과 상천의 무공을 사용했단 말입니까?”

“ 흥미로운 녀석들이라서 살려주었다. 그런데 아직 그대로더냐?”

“ 그, 그렇습니다. 사조님.”

제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제 됐느냐?”

“ 천등십관에 도전자가 들어왔습니다.”

“ 실력이 출중한 자인 모양이구나.”

“ 수라삼절을 익힌 진자웅과 적무천마장을 익힌 장육철이 일 초 만에 당했습니다.”

“ 오랜만에 천등십관이 바쁘겠구나.”

‘ 빌어먹을!’

제천강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문득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얼마나 지났느냐?’

‘ 천오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고금제일인인 그와 그의 부하인 일백마가 나서준다면 순식간에 무림은 패천림 손아귀로 들어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황실을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야명주 불빛 아래에서 식물이 자랄 수 있느냐 하는, 아주 하찮은 것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수라삼절이나 적무천마장은 그가 창안하여 지천 장로들에게 건네준 무공이다. 그런데 그 무공이 일 초만에 깨졌다고 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 그자는 혈잔수와 우주일만검결을 펼쳤습니다.”

“ 우주일만검결?”

제석강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 드디어.’

제천강은 제석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떤 말에도 천년거암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 완전하진 않지만 우주일만검결이 분명했습니다. 조사님.”

“ 완성하지 못했던가.....”

제석강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아니다. 그보다 지금 강호는 대야벌 세상이라고 했느냐?”

“ 그렇습니다. 조사님. 조사님께 대항하던 영세오천이 힘을 모아 세운 단체가 대야벌입니다.”

“ 하면 우주일만검결을 펼친다는 그자는?”

“ 정체를 알 수 없는 잡니다. 그리고 지금쯤 범천지관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제천강은 계속해서 제석강을 자극했다.

어떻게든 관심을 갖게 하여 강호로 나오게 만들기 위해서다. 제석강이 강호로 나오게 되면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런저런 사건에 엮이게 되고 결국엔 세상일에 관여하게 될 것이다.

“ 우주일만검결에 범천지관이라...... 그럼 이세 범천이 탄생하는 셈이로구나.”

“ 그자는 범천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 그럼 뭐에 관심이 있단 말이냐?”

“ 패천림의 목에 검 끝을 대고 요구조건을 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제석강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몸을 일으킨 그는 절벽에 붙어 있는 건물로 향했다.

“ 모시겠습니다. 조사님.”

제천강은 공손하게 말하며 제석강을 따라 나섰다.

하지만 그는 세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무형의 막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제천강을 보았다.

“ 여긴 과거다. 제천강!”

“ 알겠습니다. 조사님.”

과거라는 말.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란 의미였다. 제천강은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제석강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간 제석강은 내실을 지나 계속해서 걸어 들어갔다. 겉에는 여러 개의 건물이 줄지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십여 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각 건물은 하나의 광장으로 이어져 있다.

광장으로 들어선 제석강은 중앙으로 걸어갔다.

중앙에는 커다란 석관이 있고, 그 석관을 중심으로 일백 개의 석관이 중앙의 석관을 호위하듯 둥글게 늘어서 있다. 제천강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일백 개의 석관 중 유일하게 열려 있는 석관. 그 석관은 희수연이 들어 있어야 할 관이다.

더불어 음양인인 그녀는 이곳에 펼쳐진 역천귀혼유마진의 핵심이었다. 혁미월을 버리고 그녀를 택한 이유가 역천귀혼유마진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주기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양의 기운은 진식을 살아 있게 해주고, 살아 있는 진식은 천년마인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설사 더불어 그녀가 들어온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오 할에 불과했다.

그런데, 희수연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 왜?”

제천강은 텅 비어 있는 석관을 보며 물었다.

분명 죽음 직전에 들어오라고 하였고, 역천귀혼유마진이 성공하면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거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새로운 삶을 거부한 것이다.

아니 새로운 삶이 아니더라도 생전에 사랑했던 사람 곁에 눕는 걸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녀가 들어오지 않는 바람에 역천귀혼유마진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백마는 그들 스스로를 희생하여 진을 완성했다.

결국엔 자신만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일백 명은 의식이 없는 천년마인이 된 것이다.

“ 천오백 년이 지났다고 하네, 친구들. 난....”

제천강은 나직이 흐느꼈다.

천오백 년.

단전에 쌓인 무한한 공력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무공도, 천오백 년이란 세월 앞에서는 티끌에 불과했다. 잡초를 키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백 명 중 한 명만 더 정신을 차렸더라면 이렇듯 지독한 외로움에 떨지는 않을 텐데.

한 명만 더.....

제석강은 천천히 관을 둘러보았다.

하나씩 관을 훑어가던 그는 중앙 관을 중심으로 정 동쪽에 있는 석관을 향해 걸어갔다.

관 앞에 선 그는 오른손을 가볍게 저었다.

관 뚜껑이 열리자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잠을 자는 것처럼 누워 있는 그는 일백마의 수장이자 최측근인 백강이었다.

“ 일어나라, 백강.”

제석강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석관 안에 있던 사내가 번쩍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 내가 누군가?”

제석강은 나직이 물었다.

“ 저. 의. 영. 원. 한. 주. 인. 이. 십. 니. 다.”

백강의 입에서 띄엄띄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세상으로 나가 볼 참인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 명. 령.에. 따. 르. 겠. 습. 니. 다.”

관 밖으로 몸을 날리는 백강의 움직임은 강시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제석강은 안타까운 얼굴로 백강을 보았다.

일백마 중 유일하게 언어 구사 능력을 지니고 있는 백강이다. 하지만 지적 능력은 서너 살 어린아니 수준에 불과하다. 조금만 운이 따라줬다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가세, 백강.”

“ 모. 시. 겠. 습. 니. 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백강은 제석강 앞으로 나섰다.

“ 그거 아는가?”

제석강은 백강을 보며 물었다.

“ 모. 릅. 니. 다.”

“ 첫 번째 부인이었던 혁 매는 자식을 낳지 않은 채로 내 곁을 떠났고, 두 번째 부인이었던 희 매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는 것 말이네. 그런데 직계 후예라는 녀석이 나타났다네.”

“ 죽. 일. 까. 요?”

“ 허허허! 자네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먼.”

제석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건물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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