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심검어.
널따란 석실 내부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 긴장감의 진원지는 십 장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두 사람이었다. 오른편에 서 있는 사람은 학창의를 걸친 한사였고, 왼편 인물은 연우강이었다.
석실 내부를 가득 채운 긴장감과는 달리 서로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따. 더불어 검조차 뽑지 않은 채였다.
“ 놀랍구나. 벌써 자연을 담았더냐?”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한사는 비로소 연우강의 무공 정도를 알아차렸다. 자연을 담았느냐는 말은 자연지도를 터득했느냐는 물음이었다.
“ 자연은 진작 담았소, 영감.”
“ 그럼 무극이더냐?”
“ 하늘이오.”
“ 하, 하늘이라고?”
“ 천마를 넘어서겠다고 한 건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었소. 영감.”
“ 난 믿을 수 없네.”
한사의 말투가 바뀌었다. 설사 하늘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무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라면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 물어보기에 대답한 것뿐이오, 영감.”
“ 그럼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군.”
한사는 양팔을 편하게 늘어뜨리고 연우강을 직시했다.
“ 관문은 영감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소.”
“ 그렇게 될 거네. 젊은이. 자네가 날 이기면 원하는 걸 들어줄 거네.”
“ 배려해 줘서 고맙소. 영감.”
연우강 역시 한사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편하게 늘어뜨린 그는 차분한 눈으로 한사를 응시했다.
“ 으음!”
한사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내기를 끌어올리지도 않은 상태다.
그런데 녀석은 주변 대기와 동화되고 있었다. 일명 자연지도라고 불리는 경지였다.
‘ 급하면 패한다. 상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논 한가운데, 산 정상에, 바다 가운데, 홀로 서 있다는 느낌으로 서 있어야 한다.’
한사는 내심 중얼거리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점차 한사의 신형도 주변 대기와 동화돼 가며 기척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사의 몸이 완전하게 자연과 동화돼 가는 순간 연우강의 신형이 또 다른 변화를 보였다. 주변 대기가 그의 호흡을 따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발견한 한사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자연과 하나 됨을 넘어 자연과 공명하는 경지, 즉, 무극지도인 것이다.
또르르!
벼롤 힘들이지도 않고, 심적으로 충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든다.
한사는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면 연우강의 모습이 작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눈을 감자 연우강은 사라지고 널따란 평원이 나타났다. 눈앞에 나타난 평원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다.
과연 검으로 저 평원을 벨 수 있을까?
‘ 벨 수 있다. 벨 수 있다! 벨 수 있다! 벤다!’
한사는 널따란 평원을 바라보며 강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마음속에서 인 외침일 뿐 입 밖으로 흘러나오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원이 일거에 잘려나갔다.
갑자기 차가운 물방울이 정수리로 떨어진 것처럼 연우강의 신형이 움찔했다. 연우강이 보고 있는 대상 또한 한사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널따란 바다였다. 방금 움찔 했던 것은 그 바다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 그를 덮쳐 왔던 탓이다. 그게 바로 한사의 공격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난 연우강은 천천히 백령을 잡아갔다.
백령을 잡아가는 동작은 그가 아침 운동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지독하게 느렸다. 늘어뜨린 오른손과 백령이 있는 곳까지 거리는 한 자 가량이다. 한참 전에 손을 들어 올린 것 같은데 그의 오른손은 아직 오른편 허리춤에도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별것 아닌 듯한 그의 움직임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한사가 부르르 떨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분명 마음속의 검을 휘둘러 벌판을 잘라냈다. 그런데 잘려나간 부분을 시작으로 벌판이 천천히 일어나는 듯하더니 거대한 산악으로 변하고 있다.
먼저 형태가 만들어지고, 산자락 부분에 초목이 생겨났다. 그 위쪽으로는 키 높이 정도 되는 작은 나무가 자라나고, 위로 갈수록 점차 울창해지면서도 나무도 커진다.
움축 들어간 계곡이 생겨나고, 시냇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거대한 바위가 곳곳에 생겨나고, 안개가 잔잔하게 깔린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고 나뭇잎이 떨어진다. 그리고 산 정상에는 일 장 높이 되는 소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쪽 반장 가량은 어른 허리둘레 정도 되는 두께고, 위쪽에서 뻗어나간 가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니 잔가지뿐만이 아니었다.
어른 허리 두께의 나무 둥치 아래쪽에는 가지보다 더 많은 뿌리가 뻗어 있었는데, 그 뿌리는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산 곳곳에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 전부가 그 뿌리로부터 자라난 것이었다.
어떤 뿌리는 산 위의 나무처럼 소나무를 키워냈고, 어떤 것은 상수리나무를, 어떤 것은 측백나무를, 어떤 것은 잡초를 키워냈다.
그것은, 바로 세월이었다.
천 년의 장구한 세월!
‘ 벤다! 베에 낸다! 벤다!’
한사는 내심 소리쳤다.
하지만 산은 물론이고 정상에 서 있는 고송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씩 변해갔다. 푸르렀던 나무에 단풍이 들더니 잎이 떨어지고 앙상히 변한다. 그리고 찬바람이 불며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 베...엔다!”
한사는 검 손잡이를 잡고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외침 뿐이었다. 그는 검을 뽑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천년 고송 옆에 뭔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말이었다.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 말은 점점 불어나더니 나주엥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리고 그 말들이 이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수천 마리의 말은 나뭇가지를 밟고, 바위를 건너뛰고, 계곡을 건너며 달려 내려오고 있다.
‘ 파천군마도!’
한사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산을 가득 채우며 달려 내려오는 순백의 말들. 그것들의 움직임은 다름 아닌 우주일만검결이었던 것이다.
그때 연우강은 백령을 뽑아 느리게 휘두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엔 백령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백령의 검 끝이 느릿하게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기운이 허공에 남았다.
그것들은 바로 한사가 보는 말이었다.
연우강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한사와의 대결을 통해 생각지도 않은 기연을 얻었다. 원래 우주일만검결을 익힐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대결에서 우주일만검결의 정수를 터득해 낸 것이다.
‘ 내가 이겼소, 한사!’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커억!”
그리고 앞에서 나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얼른 백령을 멈췄다.
씻은 듯, 두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사라지고 석실 내부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연우강은 전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한사의 입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위쪽 관람석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제천강이었다.
“ 마, 말도 안 돼!”
그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소리쳤다.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대형,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옆에 있던 가삼이 맞장구를 쳤다.
그의 얼굴엔 궁금증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을 뿐 비무를 한 징후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한사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어떻게 심검어를....”
하지만 제천강은 가삼의 말을 듣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가 경악한 이유는 한사가 패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결, 무기를 부딪치지도 않고 강력한 내공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는 내상을 당하여 피를 토했다. 중간에 멈췄기에 망정이지 계속 됐더라면 한사는 가루로 흩어졌을 것이다.
수천 년 무림사 중 그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 자는 천마가 유일했고, 심검어 또는 심어라고 불린다. 더불어 심검어라는 경지를 알고 있는 무인도 별로 없다.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자들은 검을 맞대는 것보다는 초식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실력을 겨뤄보곤 하는데 그러한 방식을 논검 비무라고 한다.
그 논검비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가 심검어인데, 논검과 다른 점은 말로 초식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공격 방법이 환영처럼 머릿속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무인은 심검의 경지에 이른 자들밖에 없고, 그것도 심검의 초입이 아니라 완벽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제천강이 놀란 이유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사가 심검어로 비무를 펼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 내가 이긴 것 같소, 영감.”
“ 요구 조건을 말하게.”
한사는 순순히 시인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아니 하늘을 보았다고 했을 때부터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다만 하늘을 보았다는 말이 정말인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 얼마 전에 이곳으로 네 명이 들어왔을 거요.”
연우강은 슬쩍 떠보았다.
“ 경천사마가 들어왔네.”
“ 그들은 내 부하요.”
“ 그들을 데리러 온 건가?”
“ 그렇소.”
“ 하지만 그들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네.”
“ 주화입마에 들었단 말이오?”
“ 그렇네.”
“ 데려다 주시오.”
“ 패천대 앞에서 기다리게. 그럼 데려다 주겠네.”
“ 어디로 가면 되오.”
“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 그럼.”
연우강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몸을 돌렸다.
“ 고맙네.”
“ 뭐가 말이오?”
연우강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나이를 먹게 되면 젊었을 때보다 삶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진다네.”
“ 나도 좋은 경험이었소. 영감.”
“ 뭔가를 얻었는가?”
“ 심뢰라고 이름을 짓기로 했소이다.”
좋은 경험이라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어뢰, 지뢰, 풍뢰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비무를 하면서 문득 심검을 마라천력으로 조정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주일만검결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일만 마리에 달하는 말을 한 마리씩 조절하는 방법, 그것이 바로 심뢰의 토대였다. 이제 실마리를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마라천력으로 심검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한사는 전 관문으로 향하는 연우강의 등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사 또한 이번 대결로 인해 큰 것을 얻었다.
‘ 고맙네.’
그는 멀어지는 연우강의 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연우강이 석실을 나가자 천장의 관람석에 있던 제석강 일행이 아래로 내려왔다.
“ 정말로 심검어인가?”
한사 앞으로 걸어가는 제천강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사가 자신보다 더 강한 무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기어검술 정도가 그의 한계라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심검을 넘어선 경지를 목격한 것이다.
“ 그런 모양입니다.”
한사는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제천강의 얼굴에서 질시의 감정을 읽어낸 탓이었다.
“ 그런 모양?”
“ 그런 대결이 될 줄은 몰랐다는 뜻입니다.”
“ 대결 중에 심결을 얻었다는 말인가?”
“ 그런 것 같습니다.”
한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대결 중에 심검을 얻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질 뿐만 아니라 명예욕도 더 강해진다. 특히 원래부터 공명심이 강했던 제천강이 아닌가. 진작에 심검을 터득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는 모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 그랬단 말이지?”
제천강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넘실댔다.
‘ 이런!’
한사는 내심 쓰게 웃었다.
제천강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게 아니라 그를 더 굴욕적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무를 하다가 심검을 얻었다는 건 도전자가 비무 상대에게 깨달음을 줄 정도로 강한 자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패천림을 무너뜨린 그 친구를 띄워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 암절!”
제천강은 패천칠관을 맡고 있는 암절 검산일을 불렀다. 연우강은 건너뛰었지만 패천팔관은 육감지관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이기어검술의 위력으로 날아오는 암기를 막아내는 관문이다. 따라서 암절 검산일을 비롯하여 패천팔관은 극한의 은신술을 익히고 있는 자들이 맡아왔다.
그들의 수장이 검산일이었다.
“ 말씀하십시오, 대형.”
검산일은 제천강 앞으로 다가서며 고개를 숙였다.
삼 장여를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기의 파동조차 일지 않았다. 그가 펼친 무공은 패천삼경인 무영천마비였다.
“ 무영비를 전부 동원해서 놈을 쫓게.”
“ 쫓아가서는 어떻게 합니까?”
“ 놈이 속한 단체부터 시작해 샅샅이 알아내게.”
“ 알겠습니다. 대형.”
고개를 꾸벅 숙인 검산일은 허공으로 몸을 숨기며 모습을 감췄다.
“ 역사 자넨 옥으로 가서 그놈들을 꺼내오게.”
이번엔 금강역사 장육철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 알겠습니다. 대형.”
장육철은 꾸벅 고개를 숙이곤 몸을 날려갔다.
그로부터 일다경 후 정신을 잃은 기운상 일행은 패천대 앞에서 연우강에게 인도됐다.
“ 우린 오늘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거다. 놈!”
마라천력으로 기운상 일행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연우강을 노려보는 제천강의 몸에서 살기가 요동쳤다.
“ 살만큼 살았다고 몸을 함부로 굴리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이야, 영감. 아직 팔팔한 부하들을 생각해서라도 오늘 일은 잊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패천림은 천마를 보기도 전에 이렇게 되는 수도 있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목을 스윽 그었다.
“ 아무튼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심심하면 나중에 한번 더 올게.”
패천림 서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편에는 정신을 잃은 상태인 기운상 일행이 허공에 뜬 채로 따르고 있었다.
“ 반드시.....”
제천강은 불끈 주먹을 틀어쥐었다.
“ 난 누군가 뒤따르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 영감. 시체를 모으는 게 취미라면 상관없지만, 가급적이면 따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백여 장 밖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욱!
제천강의 발이 발목까지 땅을 뚫고 들어갔다.
그런 그들을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야장 인들의 무덤이 있는 서쪽 산 정상이었다. 패천림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천마 제석강과 무불 백강이었다.
“ 놀랍지 않은가?”
제석강은 멀어지는 연우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모. 릅. 니. 다.”
“ 목소리로 보건대 저 녀석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네. 백강. 그런데 무공은 벌써 심검을 넘어섰단 말이네. 그런 무인은 우리가 살았던 시대에서 없었네.”
“ 죽. 일. 까. 요?”
“ 죽일 이유는 없고, 흥미로운 녀석이라는 거네. 일단 녀석을 따라가 보세. 녀석을 따라가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구먼.”
제석강은 오른발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과 백강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하는 것처럼 한 번에 오십여 장을 나아갔다. 엄청난 신위를 발휘하는 그 무공은 천마군림보였다.
“ 저들은?”
일이 공교롭게 되려고 그랬는지도 몰랐다.
따르지 말라는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공에 은신한 채 몸을 날리던 암절 검산일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엄청난 경공을 펼치며 몸을 날려 가는 제석강과 백강을 발견한 탓이었다.
“ 계속 따라라!”
검산일은 몸을 돌려 패천림으로 향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설사 같은 방향이라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에 오십여 장을 날아가는 자라면 혼자만 알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제천강 일행은 처소로 향하고 있었다.
[ 접니다. 대형.]
검산일은 제천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 웬일인가?]
[ 수상한 자가 있어서 돌아왔습니다.]
[ 수상한 자?]
[ 오십 장을 한 번에 날아가는 자가 놈을 쫓아가는 걸 목격했습니다.]
[ 머리색이 어떻던가?]
제천강의 머릿속으로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 백발이었습니다.]
[정말인가?]
제천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그렇습니다. 대형.]
[ 알았네. 놈을 좀더 철저하게 따르도록 하게.]
[ 아는 잡니까?]
[ 나중에 말해주겠네.]
[ 알겠습니다. 대형.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검산일은 다시 왔던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 천오백 년 만에 깨어났어도 당신은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싫든 좋든 타인과 관계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 타인들 중에는 공명을 좇는 자들이 있고 당신이 천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명성을 얻기 위해 달려들게 될 겁니다.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처음엔 피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이 잦아지면 당신은 분노하게 될 테고 결국엔 손을 쓰게 되겠지요. 난 그런 상황을 원합니다. 당신이 지금의 무림에 악감정을 품게 될 그런 상황 말입니다. 난 당신을 최대한 이용할 겁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무림 황제로 만들고 말 겁니다. 그리고 난 당신을 대신하여 무림을 다스릴 겁니다. 천마 제석강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제천강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조금 전 연우강이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주먹을 틀어쥐었지만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랐다. 조금 전에는 굴욕감에 어찌하지 못하여 틀어쥔 주먹이었지만, 지금 틀어쥔 주먹 안에는 야망이란 단어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제천강은 힘차게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날 밤.
이세 천마의 등장을 알리는 소문이 중원 전역으로 내달렸다.
********
연우강이 천마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나온 이유는 경천사마 일행의 상태 때문이었다. 패천림 무인들의 무공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네 명을 사로잡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경천사마 넷은 상천의 최고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일천독행신까지 익히고 있다. 패천림 무인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도망칠 여력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네 명이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주화입마에까지 들었다. 연우강이 주목한 것은 주화입마였다.
주화입마는 단순한 상황에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태에 있던 무인이 주화입마를 당하는 경우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넘어 무리하게 무공을 펼쳤을 때인데 그런 경우 또한 아주 희박하다.
결국 기운상 일행은 본인들 스스로 주화입마에 들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흑천의 무공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시작해 볼까?”
연우강은 가장 먼저 기운상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기운상의 신형이 둥실 떠올라 연우강 앞에 등을 보이며 앉았다. 연우강은 그의 명문혈에 양손을 밀착하고 내기를 끌어올렸다.
‘ 나와라 이놈아!’
연우강은 단전에서 솟구친 흑룡을 기운상의 몸 안으로 인도했다. 기운상의 내기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흑룡은 기운상의 내부를 휘젓고 다니며 각 혈도에 엉켜 있는 내기를 전부 잡아먹었다. 흑룡이 내기를 잡아먹을 때마다 기운상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엉켜 있던 내기를 전부 잡아먹은 흑룡은 이번에는 기운상의 단전으로 향했다. 들어간 흑룡은 그동안 머금었던 내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 신마!]
연우강은 혜광심어로 기운상을 불렀다.
‘ 으음!’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았다. 기운상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 이제 일어나야지.]
‘ 천주님?’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꽉 찬 안개를 몰아냈다. 기운상 은 맑아지는 머릿속을 주시하며 눈을 떴다.
[ 운기행공 해봐.]
‘ 알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단전을 주시했다. 들끓는 용암처럼 불안했지만 내기는 단전에 쌓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기를 끌어올리며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내기는 느릿하게 각 혈도를 따라 이동했다.
기운상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아주 강한 뭔가가 내기가 요동치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연우강의 내기일 터였다. 그는 운기행공에 박차를 가했다. 일주천을 이루고 나자 내기가 조금 안정이 됐다.
[ 지금부터는 혼자 해도 되겠지?]
혜광심어와 함께 내기를 붙잡고 있던 뭔가가 빠져나갔다. 기운상은 운기행공에 몰두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주천을 할 때마다 내기는 점차 안정돼 갔고, 어느 순간 그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기운상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철혈전마 방세남을 끌어당겼다.
경천사마 네 명이 깨어난 것은 이틀 후였다.
“ 천주님을 뵙습니다.”
기운상 일행은 깨어나자마자 연우강에게 고개를 숙였다.
“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거야?”
몸 상태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홍조가 도는 얼굴은 물론이고 몸 주변에 흐르는 기운이 전보다 훨씬 투명해지고 맑다. 과거보다 더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기운상은 진저리를 쳤다.
패천림 무인들과 싸우면서 마총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 자를 보았다. 그자는 소능ㄹ 쓰지도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짝달싹할 수 없었다. 결국 진원지기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강했던 거야?”
“ 진원지기를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하지 못했습니다.”
“ 성공한 모양이네.”
연우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경천사마 네 명이 움짝달싹도 못한 자라면 천마 제석강이 분명할 듯했다. 결국 천년마인 제강에 성공한 걸로 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강호 무림에 욕심을 둔다면 막을 자가 있을는지.
“ 강호를 먹든 황실을 먹든 나를 막지만 않으면 상관없겠지.”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자를 아십니까?”
기운상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강호 무림에 그렇듯 강한 자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산 너머 산이 있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고 하는 말을 실감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 천마 제석강일 거야.”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운상 일행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천마 제석강, 마의 조종이라고 불리는 사람이고 지금은 전설이 된 무인이다. 그리고 천오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천마라니!
“ 정말 천마란 말입니까?”
철혈전마 방세남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 천년마인이라고 알아?”
“ 천마삼강 중 마지막에 만든 강시인데 미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천마가 영생을 얻기 위해 창안한 강시가 바로 천년마인이야.”
“ 그럼 정말로....”
“ 확신은 못 해. 하지만 가능성은 구할 이상이야. 그만 가자고.”
“ 아, 알겠습니다.”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 따르는 놈들을 따돌려야 해.”
“ 누가 따른단 말입니까?”
“ 패천십관을 박살내고 자존심을 짓이겨놨어.”
“ 얼굴을 가린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 당분간 내 정체를 알면 안 되니까.”
“ 그럼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겠군요.”
“ 그럴 거야.”
“ 아예 없애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넷째인 야수인마 지철이 주변을 둘러보며 흉흉한 살기를 쏟아냈다.
“ 그 녀석들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 또 일을 벌이신 겁니까?”
기운상이 웃으며 물었다.
“ 일단 따라와.”
연우강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 상당히 크게 벌이신 모양이군요.”
네 사람은 서둘러 연우강을 따랐다.
객잔을 나선 연우강은 남쪽으로 무섭게 질주했다. 연우강을 비롯한 경천사마 네 명이 사라지자 객잔 주변이 부산해졌다. 주변에 은신해 있던 패천림 무인들은 급하게 연우강 일행을 따라 달렸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 연우강 일행을 따른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따르기 시작한 지 오 일이 지나자 그들의 시야에서 연우강과 경천사마의 흔적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패천림 무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우강 일행의 흔적을 더듬었다.
패천림 무인들이 추격을 포기한 것은 흔적을 놓친 날부터 보름이 지난 후였다. 어떻게 안휘성까지 오긴 했지만 더 이상은 추격이 불가능했다.
“ 돌아간다!”
결국 암절 검산일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굳이 연우강을 추격하지 못한다고 해도 백령이 있으니 찾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검산일의 명령에 무영비 일행은 방향을 대야벌로 바꿨다.
패천림 무인들이 대야벌로 철수하는 그 시각, 연우강과 경천사마는 절강성 항주의 명물인 서호 변을 걷고 있었다.
“ 이곳을 떠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화야불이란 이름으로 이곳을 활보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 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다.
서호 주변은 떠날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풍악소리와 술에 취해 비틀대는 한량들의 노랫소리, 그리고 티격태격 싸우는 듯한 소리가 절며하게 조화를 이룬다.
“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서호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 기운상이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이제 그 생활은 못하겠지?”
“ 저기에 있는 물은 같은 물처럼 보이지만 어제의 물과는 다르니까요.”
“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내가 다르다는 말?”
“ 그런 것이 삶 아니겠습니까?”
“ 그래도 꿈을 포기하는 건 안 되겠지?”
“ 물론입니다. 천주님. 환경이 변하고 처지가 변한다고 해도 꿈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연우강의 꿈이 황금백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기운상은 절대라는 대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 절대?”
“ 물론입니다. 천주님. 꿈을 포기하는 사람은 죽은 거나 진배없습니다.”
“ 정말?”
“ 제가 이 나이 되도록 살면서 배운 거라고는 절대로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 백살이 넘은 사람의 말이니까 맞겠네.”
“ 천주님의 꿈은 뭡니까?”
“ 나?”
“ 네.”
기운상은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에 현무림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무공을 지닌 그는 과연 어떤 꿈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 내 꿈은 여기에 있어.”
연우강은 호수 주변을 가리켰다.
“ 저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군요. 사실 저도 한때는 이런 멋진 곳에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살고 싶었습니다.”
“ 내 꿈은 그런 게 아냐.”
“ 아니라고요?”
“ 이곳에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술집을 섭렵하면서 살고 싶다는 거야.”
“ 수, 술집을 섭렵해요?”
“ 대야벌로 가기 전엔 그렇게 살았어. 서호 주변에 있는 기녀 중 화야불이를 모르면 기녀가 아니었어. 오랜만에 기루나 한번 가볼까. 저기가 좋겠다.”
연우강은 환하게 불이 켜진 오 층 건물을 가리켰다.
각 처마 밑으로 오색등이 달려 있는 건물은 척 보기에도 화려해 보였다.
“ 처, 천주님.”
기운상은 당황한 얼굴로 연우강을 따랐다.
“ 주의사항을 알려줄 테니까 그대로 해. 첫째, 촌스럽게 기웃거리지 말 것. 둘째 기녀 얼굴을 보며 놀라지 말 것. 셋째, 기녀들에게 찝쩍대지 말 것. 넷째, 음식을 보고 침 흘리지 말 것. 다섯째, 음식은 조금씩만 덜어 먹을 것. 여섯 째,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 것. 일곱 째, 긴장하지 말 것.”
“ 저도 젊었을 때는 한가락 했습니다. 천주님. 저 녀석들은 몰라도 저는 걱정하지 않아도됩니다.”
본래의 신색을 회복한 기운상이 세 동생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 술은 화주가 제일 좋고 비싼 술을 처먹는 놈들의 머릿속을 파보고 싶다고 한 사람은 형님입니다.”
방세남이 톡 쏘아붙였다.
“ 내가 언제?”
“ 술만 먹으면 그 소리를 했습니다.”
“ 네가 노망이 난 모양이구나. 하지도 않은 말을 막 지어내는 걸 보니까.”
“ 노망은 형님이 났겠지요.”
“ 난 아직 말짱하다 녀석아. 그나저나 이름도 좋네.”
기운상은 대문 위에 걸린 현판을 보며 활짝 웃었다.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백설이란 글이 씌어 있었다.
“ 그런데 왜 백이지?”
기운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흰 눈이라는 의미로 쓸 때 보통 백설이라고 쓰는 데 이곳에는 특이하게 백설이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 백제 설의 준말이라서 그래.”
연우강은 대문 구석에 늘어뜨린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 백제 설?”
기운상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데 대문이 열렸다.
“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문을 열어주었던 사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천실로 안내하게.”
연우강은 품속에서 보석을 꺼내 내밀었다.
“ 모시겠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몸을 돌렸다.
[ 형님!]
철혈전마 방세남이 기운상을 불렀다.
[ 왜?]
[ 느꼈습니까?]
[ 용담호혈이라고?]
[ 엄청난 자들이 은신해 있습니다.]
방세남은 간담이 서늘했다. 정원 곳곳에 숨어 있는 자들은 주화입마에 들기 전이었다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 조금 전에 천주님께서 긴장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저들 때문인 모양이네.]
[ 천주님은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 그런 모양이네.]
기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사층이었다.
“ 여깁니다. 손님. 음식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사내는 천실이라고 써진 방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 음식은 자네가 알아서 준비해주게. 그리고 이곳 주인을 만나고 싶네.”
“ 알겠습니다. 손님.”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가 나가자 시녀가 들어와 일행의 탁자에 놓여 있던 잔에 차를 채워주었다
“ 이 정도로 꾸미려면 얼마나 듭니까?”
기운상은 방을 둘러보며 흔잣말처럼 물었다.
언뜻 보기엔 단출하여 그다지 화려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안목이 있는 자라면 이곳에 있는 모든 물건에서 세월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골동품. 그것도 명품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들이 방안에 널려 있었다.
“ 주인에게 직접 물어봐.”
똑똑똑!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게.”
연우강은 찻잔의 차를 음미하며 낮게 소리쳤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복장을 한 중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넌 나가 있거라.”
루주가 안으로 들어오자 연우강은 차를 따르던 시녀를 물렸다.
“ 알겠습니다. 손님.”
시녀는 찻주전자를 옆에 두고 방에서 나갔다.
시녀가 나가자 연우강은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중년 여인을 보았다.
“ 오랜만이네, 난설.”
“ 맙소사!”
난설이라고 불렸던 중년 여인은 깜짝 놀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돌아오자 주변은 삼엄하게 변했다.
“ 태상가주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은밀막부 중원 총괄인 육난설입니다.”
육난설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연우강에게 큰 절을 올렸다.
“ 태상가주는 또 뭐야?”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 가주님께서 중원을 떠나기 전 이곳에 들렀다 가셨습니다.”
“ 그때 날 태상가주라고 한 거야?”
“ 그분께서 그러신 게 아닙니다.”
“ 그럼?”
“ 태상가주님 조부께서....”
“ 할아버지도 오셨어?”
“ 여기서 술도 드시고 가셨습니다.”
“ 그러니까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는 ‘우리 우강이가 몽요의 남편이니까 알아서 모셔라’라고 했단 말이지?”
“ 태상가주님의 어머니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끄응! 자식의 장래를 망치려고 작정을 했네. 동영으로 보내길 백 번 잘했지. 그건 그렇고 사람 좀 빌려줘.”
“ 사람이라면?”
육난설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이곳에 숨어 있는 녀석들이 필요해. 아까 우릴 안내했던 총관 그 친구하고.”
“ 병력을 빼는 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태상가주님.”
“ 은밀막부 중원 총괄이라며?”
“ 가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제게 명령권이 있지만, 가주님이 계실 때는 그분의 재가를 받아야 합니다.”
“ 묭요가 여기에 있어?”
연우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한 달 전에 오셨습니다.”
“ 혹시 미나모토 가문이 중원으로 나온 거야?”
밀천이 개파를 준비하고 있다면 미나모토 가문도 중원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육난설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화야불이.
그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고, 실제 이곳에 손님으로 온 적도 많다. 그를 따란 나간 아이들 중 화야불이를 욕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오히려 그가 다시 한 번 찾아 주기를 바란다. 심지어 기억해 달라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물건을 전해주는 아이도 부지기수다. 웬만해서는 사내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기녀들이 그렇듯 좋아하는 사내라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과거에 여자관계가 복잡하긴 했지만 그건 가주인 묭요를 만나기 전 일이라 그를 탓할 수도 없다.
가주는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 지금 어디 있는데?”
“ 주산군도에 머물고 계십니다.”
주산군도는 절강성 동쪽 항주만 외곽에 모여 있는 섬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명칭이었다.
“ 부모님이랑 함께?”
“ 네.”
“ 그냥 주면 안 될까? 미나모토 그놈들과 싸울 무인이 필요해서 그런 거네.”
“ 가주님이 싫으십니까?”
“ 난 자유롭게 살고 싶어, 난설.”
“ 호호호! 전에 우리 집에 오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는 거예요?”
“ 난 여기에 온 적 없어, 난설.”
연우강은 단호하게 말했다.
“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친구 분들과 함께 오셨는데요?”
“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 전 장부를 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태상가주님.”
“ 장부도 작성해?”
“ 전 이곳의 주인이 아니고 관리책임잡니다. 관리책임자는 매출 장부를 정확하게 작성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 얼마나 왔는데?”
“ 장부를 조사해 봤더니 서른 번 정도였습니다.”
“ 서, 서른 번이나 왔다고?”
“ 우리 집에 있는 아이들 중 절반 정도는 태상가주님께서 다시 항주에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 아무튼 여길 오는 게 아니었어.”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시게요?”
“ 무인을 데리고 가려면 직접 만나야 한다며?”
“ 호호호!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당장 마차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날 따르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해.”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상가주님.”
육난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 난설!”
연우강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를 불렀다.
“ 말씀하세요.”
“ 그 장부 말이야.....”
“ 아이들의 외박 장부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 없애면, 안 될까? 난설 직권으로.”
“ 그건 매출 장부라서....”
“ 총관!”
연우강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 부르셨습니까?”
안으로 안내했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이름이......”
“ 전장사입니다.”
“ 우리 전에 통성명을 했나?”
“ 처음 오셨던 날 통성명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랬단 말이지.... 아까 줬던 금강석 줘봐.”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 그건 루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전장사의 말에 연우강은 육난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 금고 속에 넣어두었습니다.”
“ 그거 장사하고 나눠 가져.”
“ 깨끗하게 지우겠습니다. 태상가주님.”
“ 장부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도 지워야 한다는 거 명심해.”
“ 물론입니다. 태상가주님. 태상가주님께서는 저희 집에 오신 적도 없고, 저희 또한 단 한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 장사 자넨?”
“ 저도 오늘 처음 봤습니다. 태상가주님.”
“ 좋아, 가자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천주님.”
지금껏 듣고 있던 기운상이 물었다.
“ 뭐가?”
“ 저들은 천주님을 태상가주로 부르고 있잖습니까?”
“ 잊으라는 명령 한 마디면 된다는 거야?”
“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백 번 명령하는 것보다 한 번의 뇌물이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도 아직 몰랐어?”
“ 뇌물이라고요?”
기운상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일명 인간관계를 윤택하게 해주는 기름칠이라고 불러.”
“ 기름칠은 또 뭡니까?”
“ 오고 가는 정의 다른 말이야.”
“ 오고 가는 정이라고요?”
“ 정이 흐르는 뇌물은 좋은 거라는 뜻이야.”
[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 이왕 주려면 화끈하게 줘야 기억에 남지. 코딱지만큼 주려면 안주는 게 더 나아. 그리고 몽요에게 받을 돈이 사백만 냥이나 있으니까 저 정도는 줘도 돼.”
“ 그걸 받을 참입니까?”
“ 사백만 냥이라는 말을 못 들었어?”
“ 이미 천주님 부모님은 물론이고 조부께서도 몽요 그분을 천주님의 부인으로 인정한 것 같은데, 그래도 받을 참입니까?”
“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놈이 어떤 놈인 줄 알아?‘
“ 어떤 놈인데요?”
“ 총각 때 졌던 빚을 혼인 예물로 가져가는 놈이야.”
“ 몽요님은 여잡니다.”
“ 그래서 더더욱 빚을 정리해야 하는 거야. 빚을 갚지 않고 장가를 가는 사내놈은 비겁한 놈이 되지만, 여자는 빚을 갚지 않고 시집을 가게 되면 팔려 가는 게 되잖아. 자신이 팔려 왔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혼인생활이 제대로 유지될 것 같아?”
“ 맞는 말인 것 같기는 한데......”
기운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우강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는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지금 냉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연우강은 기운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천주님. 빚쟁이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신랑 될 사람이라면 그건 너무한 거고, 아주 치사하기까지 합니다.”
“ 원래 그런 거야. 돈이란 치사할 뿐 아니라 잔인하고 더러워. 그래서 항상 돈 거래는 깨끗하게 해야 하는 거야.”
“ 끄응! 그만 가시죠.”
기운상은 고개를 흔들었다.
결론은 혼인은 혼인이고 돈은 돈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