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08화 (108/232)

제 8장 유품

항주는 예로부터 색향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서호의 아름다움과 비단이다.

특히 서호는 주변 곳곳에 산재한 절경으로 인해 고관대작들의 별장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수도인 북경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관대작들의 별장이 많은 이유는 편한 교통에 있다. 항주 남족을 가로질러 흐르는 전당강은 항주만으로 이어지고, 항주만으로 나가 북진하게 되면 수도 북경에 이르게 된다. 즉 배만 타면 항주에서 북경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항주에서 생산된 비단도 선박을 통해 운반되곤 한다.

백설을 나선 연우강 일행도 고관대작들이 이동하는 방법과 경로를 그대로 따랐다. 마차에 탄 채로 배에 오르고, 그 배는 곧바로 전당강을 따라 내려가 항주만으로 빠지고, 다시 바람을 타고 동쪽으로 항해를 하여 섬들이 모여 있는 주산군도에 들어섰다.

연우강과 경천사마 일행을 안내하는 사람은 백설의 총관인 전장사였다.

“ 은밀막부의 무인은 어느 정도지?”

연우강은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가주님을 호위하는 호위대는 오십 명이고, 은자대, 암자대 인사대는 각각 백오십 명씩입니다.”

“ 장수 자네가 맡고 있는 조직은?”

“ 인사댑니다.”

“ 백설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

“ 그렇습니다. 태상가주님.”

“ 태상가주란 호칭은 좀 그렇군.”

“ 그럼?”

“ 내 공식적인 호칭은 잠룡 십조 조장이야.”

“ 조장님으로 부르란 말입니까?”

“ 그게 좋을 것 같아.”

“ 그럴 수 없습니다. 태상가주님.”

“ 싫다고?”

“ 싫은 게 아니라 그렇게 부를 순 없다는 말입니다.”

“ 왜?”

“ 태상가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게 다야?”

“ 그렇습니다.”

“ 혹시 금강석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건 선물로 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 그, 그건 아닙니다. 전 다만.....”

“ 조장이란 호칭은 얕잡아 부르는 것 같다는 거야?”

“ 그렇습니다. 태상가주님.”

“ 그럼 태상이라고 불러. 그 정돈 할 수 있겠지?”

“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상.”

“ 가족은 어디 있지?”

“ 동영에 있습니다.”

“ 원래 동영인?”

“ 그렇습니다.”

“ 타국에 와서 고생이 많네. 얼마나 가야 하지?”

“ 한 시진 정도만 더 가면 됩니다.”

“ 알았으니까, 들어가서 쉬어.”

“ 아닙니다. 태상.”

“ 얼마 안 있으면 쉬고 싶어도 쉴 시간이 없을 테니까 지금은 푹 쉬어 둬.”

“ 알겠습니다. 태상. 그럼.”

전장사는 고개를 숙이고는 선실로 들어갔다.

“ 영감.”

“ 말씀하십시오. 천주님.”

“ 내가 코가 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제가 보기에는 몽요님이나 천주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 그러니까 문제지. 난 아직 장가가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 여자들이 좋다고 할 때도 한땝니다. 천주님. 나이 들면 남는 건 돈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아니 부인이죠.”

“ 그래봐야 식구잖아.”

“ 식구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 연인에서 시작해서 부부가 되고 그 다음엔 식구가 된다는 뜻이야.”

“ 클!”

“ 참! 혼인은 했어?”

“ 혼인을 했다면 천주님께 의탁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 그동안 혼인도 못하고 뭐 한 거야?”

“ 그 빌어먹을 흑천 무공 때문이지요.”

“ 그러니까 흑천 무공을 연구하느라 혼인할 새도 없었다는 말?”

“ 흑천 무공이 아니라 주화입마죠.”

“ 넷 다 그런거야?”

연우강은 방세남 일행을 돌아보았다.

“ 그렇습니다.”

방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 쯧! 미련하기는 곰보다 더하네.”

“ 나이를 먹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 젊은 시절 쌓았던 경험은 지혜로 포장하고 고집은 신념으로 변한다고?”

“ 잘 아시네요. 제가 살아왔던 삶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동안 삶은 허공에 떠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을 못하고 자꾸만 합리화시키다 보니 고집이 나오는 거고 그 고집은 어느새 신념으로 자리하게 되죠.”

“ 그래서 항상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거라고.”

“ 그래도 장가는 가십시오.”

“ 장가를 가면 꿈을 포기해야 하는데?”

“ 원래 세상이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겁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겁니다. 하늘이 허락하지도 않고요.”

“ 그건 좀더 생각해 보자고.”

연우강은 바다로 눈을 돌렸다.

옷깃을 여며야 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기상나팔 소리만 들리지 않으면....”

연우강은 걸음을 옮겨 선수로 나갔다.

바로 옆에서 크고 작은 섬들이 지나쳐 가고 있었다. 무인도인 듯, 섬은 온통 새카만 어두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더 가자 다른 섬에 비해 약간 커보이는 섬이 나타났다. 그리고 선실로 들어갔던 전장사가 갑판으로 나왔다.

“ 저기야?”

연우강은 턱짓으로 섬을 가리켰다.

“ 그렇습니다. 태상. 우린 저곳을 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무인도인 모양이네?”

“ 어촌이 형성되기에는 섬이 너무 작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배는 커다란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사이로 들어갔다. 물살이 거칠어진 듯 배가 심하게 요동쳤다. 계곡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바위들을 지나쳐 가자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배는 그 동굴을 향해 거침없이 들어갔다.

동굴 안으로 이십 장 가량 들어가자 작은 불빛이 일행을 반겼다.

“ 다 왔습니다. 태상.”

먼저 전장사가 몸을 날리고 뒤이어 연우강과 경천사마가 배에서 내렸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전장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벽에 횃불이 걸린 경사진 동굴 길을 따라 일 각 정도를 걸어가자 출구가 나왔다.

출구 앞은 울창한 나무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나무들을 벗어나자 비로소 시야가 확 트였다.

“ 멋진 곳이네.”

연우강은 낮게 탄성을 질렀다.

삼 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절벽은 상당히 높아 이십여 장에 달하고, 그 절벽 아래쪽으로 통나무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동서로 백여 장, 남북으로도 백여 장 가량의 정방형 형태의 공간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소리가 잔잔하게 깔려 있었다.

연우강은 북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북쪽 절벽을 두 부분으로 나누며 새하얀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높이는 이십 여 자이나 됐지만 떨어지는 물줄기는 그리 세지 않았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는 이유가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 이곳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언제 다 지은거야?”

연우강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 여긴 백설을 인수하면서 세운 거점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 꽤 됐다는 말이네?”

“ 십 년 됐습니다.”

“ 어쩐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더라니.”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장사를 따라 나섰다.

전장사가 간 곳은 맨 안쪽 폭포가 있는 곳이었다.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는 십여 장 크기의 작은 호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흘러나온 물은 마을 중앙을 관통하여 남족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더 이상은 못 먹습니다. 어머니.”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가 폭포 오른쪽에 위치한 통나무집에서 흘러나왔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우진이었던 것이다.

“ 나도 더 이상은 불가능하오, 부인.”

“ 음식을 버릴 순 없잖아요. 잔말 말고 먹어요.”

이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연우강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아침부터 한 시진 간격으로 먹었습니다. 어머니. 벌써 여덟끼란 말입니다. 그리고 저 졸립니다.”

또다시 우진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 형이 오는 날인데 잠이 와! 잠이 오냐고!”

“ 여긴 섬입니다. 어머니. 그리고 형님은 호남에 있단 말입니다. 호남은 여기서 수천 리나 떨어져 있고요.”

“ 잔소리 그만하고 먹어, 녀석아. 당신도 먹고, 아버님과 염노도 드세요. 그리고 너희들도.”

“ 차라리 다른 사람을 가져다줍시다. 어머니. 여기엔 삼백 명이나 살고 있습니다.”

“ 다 식어빠진 음식을 남에게 주자는 거야? 너 제정신이냐?”

“ 미치겠네, 정말.”

“ 그거 제가 다 먹겠습니다. 어머니.”

연우강은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 아이고,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이 이렇게 반가워보기는 처음입니다.”

연우강이 들어서자마자 연우진은 반색하며 소리쳤다.

“ 무슨 소리야? 우강이 넌 이쪽으로 와. 어르신들도 오세요.”

이숙경은 연우진을 밀치고 연우강의 손을 잡아끌고 주방 쪽으로 향했다.

“ 왔느냐?”

“ 왔구나.”

“ 오셨습니까?”

“ 왔어요?”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일행은 일제히 웃으며 연우강을 맞았다.

“ 삼촌.”

가장 반갑게 연우강을 맞아준 사람은 연우진의 딸 연화였다. 연화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연우강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 아이고, 우리 공주님. 이제 숙녀가 다 됐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연화를 안아 올렸다.

“ 삼촌이 온다며 할머니가 어제부터 소고기 볶음을 만들었어요.”

“ 어제부터?”

“ 네! 제 몸에서 고기 냄새 나죠?”

“ 어디 보자! 안 나는데?”

연우강은 코를 킁킁대고는 활짝 웃었다.

“ 정말?”

“ 그렇다니까, 전혀 안 나!”

“ 이상한데 난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연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연신 냄새를 맡았다.

“ 배가 불룩한 걸 보니까 오늘도 많이 먹은 모양이네?”

“ 한 시진마다 한 번씩 먹었어요. 이제 소고기 볶음이라면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라고요, 삼촌.”

“ 인석아, 어제는 할머니가 해준 소고기 볶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했잖아.”

이숙경은 한편에 재워두었던 소고기를 꺼내 볶으며 소리쳤다.

“ 처음 먹었을 땐 맛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 화야, 삼촌 밥 먹게 이쪽으로 와.”

연우진이 연화를 불렀다.

“ 조금만 더 있다가 갈 거야.”

“ 그럼 또 고기 먹어야 하는데?”

“ 아, 알았어. 갈게.”

연우강의 품에서 내려간 연화는 쪼르르 연우진에게 달려갔다.

“ 어때요?”

연우강은 식탁 앞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 난 아주 좋다. 그런데...... 넌 힘든가 보구나.”

이숙경은 연우강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건강해 보이긴 하지만 볼이 홀쭉 들어가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다.

“ 힘든 게 아니고 잠깐 밥을 굶어야 할 일이 있었어요.”

“ 밥을 굶어?”

“ 환자처럼 보여야 했거든요.”

“ 앵속쟁이?”

“ 그걸 어머니가 어떻게 아세요?”

연우강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정말로 앵속을 복용한 적이 있는 거냐?”

“ 그럴 리가 없잖아요.”

“ 내 눈을 보고 말해 보거라.”

이숙경은 연우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숙경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우강의 상대는 다름 아닌 지상 최강의 단체인 대야벌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하하하! 역시 어머니를 속이는 건.....”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정말로 복용했단 말이냐?”

이숙경은 곧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얼굴이다.

그녀의 얼굴이 해쓱해진 건 연우강이 앵속을 복용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앵속은 삶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자들이 아니면 복용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녀석이 앵속을 복용했다는 것은 그런 상황까지 몰렸다는 의미가 된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 또 왜 그러세요. 군에서는 앵속을 진통제로 사용하곤 하는데, 호기심에 몇 번 하다가 말았어요.”

“ 정말이냐?”

“ 젊은 혈기에 그런 겁니다. 어머니.”

“ 지, 지금은 끊은 거냐?”

“ 제 성격상 앵속을 끊지 못했다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어머니도 알잖아요.”

“ 그건 그렇지.”

이숙경은 비로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저 배고파요, 어머니.”

“ 아, 알았다. 다 됐다.”

이숙경이 볶아진 소고기를 접시에 담는 사이에 몽요는 상을 차렸다. 갖가지 반찬을 올리고 쌀밥이 연우강과 경천사마 일행 앞에 놓여졌다.

“ 장사는?”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 그는 인사대 대장이잖아요.”

연우강을 보는 몽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 부하들하고 함께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 당연히 그래야죠. 그들은 걱정말고 식사나 하세요.”

“ 알겠습니다. 드십시다.”

연우강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 잘 먹겠습니다.”

그가 식사를 시작하자 기운상은 이숙경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 험! 술 한잔하겠소?”

연운상이 술병을 들고 기운상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좋지요.”

기운상은 빙그레 웃었다.

이 가족은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한다.

집을 나갔던 자식이 일 년 만에 돌아오면 보통 집안은 난리가 난다. 하물며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테다. 그런데 이들은 연우강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침에 일 나갔던 자식이 돌아온 것처럼 맞는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더 편하고 행복해 보인다.

“ 저 녀석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지요.”

“ 허허허! 고생은 무슨 고생입니까. 제가 오히려 천주님께 폐를 끼치고 있는데요.”

“ 천주님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연운상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어떻게 사문을 따지다 보니까 저희 천주님이 되셨습니다.”

“ 사문이라면 문파의 족보 같은 겁니까?”

“ 그렇습니다. 저희 문파는 천오백 년 전에 발원했는데 그 동안 천주님이 부재중이었습니다.”

“ 우강이 저 녀석이 부재중이었던 천주의 진전을 이었단 말이군요.”

“ 그렇습니다. 천주라는 거창한 직함이 있기는 하지만 문파가 워낙 보잘 것 없어, 문도라고는 우리 네 명밖에 남지 않았지 뭡니까. 그런데 느닷없이 천주님이 나타난 겁니다.”

“ 그래서요?”

“ 나이도 젊고, 인간성도 나쁘지 않고, 집안도 좋고, 가장 중요한 건 돈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더군요. 그 정도면 노후는 걱정 없겠다 싶어 거머리가 되기로 했습니다.”

“ 무덤 자리 걱정도 덜고요.”

“ 잘 아시는군요.”

“ 허허허! 잘 하셨습니다. 한잔하십시오.”

연운상은 크게 웃으며 기운상 일행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 저도 한잔 따르겠습니다.”

기운상은 술병을 건네받아 연운상의 잔을 채웠다.

“ 그러고 보니 두 분의 이름이 같습니다.”

보고 있던 방세남이 둘의 이름을 들먹였다.

“ 정말 그렇군요. 아무래도 우린 인연이 있나 봅니다. 기 대협! 자! 한잔하시지요.”

연운상은 잔을 높이 쳐들었다.

“ 허허허!”

“ 하하하!”

다섯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비웠다.

“ 몽 처자, 잠깐 나 좀 봐요.”

흐뭇한 얼굴로 노인들을 지켜보던 이숙경은 밖으로 나가며 몽요를 불렀다. 몽요는 의아한 얼굴로 이숙경을 따라나섰.

“ 왜 그러세요?”

밖으로 나간 몽요는 이숙경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 이거 받아요.”

이숙경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몽요에게 내밀었다.

“ 이건......”

“ 녀석에게 빚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 그럼 이게 돈이란 말이에요?”

“ 이백만 냥밖에 되지 않아요. 빚 갚는데 보태도록 해요.”

“ 이러지 마세요. 아주머니. 저도 갚을 능력 있어요.”

몽요는 주머니를 다시 내밀었다.

“ 몽 처자가 무슨 수로 사백만 냥을 갚는다고 그래요. 그리고 그 녀석은 금전관계에 있어서는 계산이 철저한 녀석이에요. 늦으면 늦을수록 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하루라도 빨리 갚는 게 나아요.”

“ 그렇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돼요, 아주머니.”

“ 어차피 이 돈은 그 녀석이 나 쓰라고 준 돈이니까 받아도 돼요.”

“ 연 공자가 준 돈이라고요?”

“ 늙으면 돈이 있어야 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주더라고. 아무튼 그 돈은 이제 몽 처자 거니까 빚을 갚든 가문을 위해 쓰든 알아서 해요. 그 녀석이 이곳에 온 것은 몽 처자에게 무인을 빌려가기 위해서일 거예요. 무인들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백 만냥을 달라고 하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숙경은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 아, 아주.....”

하지만 이숙경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 그냥 몸으로 때우면 되는데.”

몽요는 머리를 긁적이며 호수가로 걸음을 옮겼다.

이백만 냥이라는 거금을 받고 나자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 뒤늦게 복이 터졌나봐요, 어머니!”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 은밀막부의 재정 상태로 사백만 냥을 갚는다는 건 무리다. 미나모토 가문이 중원으로 도망치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전부 가지고 가버렸기에 은밀막부는 빈털터리나 다름없다.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서려면 최소한 오 년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연우강의 어머니가 이백 만 냥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 여기서 뭐 해요?”

그때 뒤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몽요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 선물을 받았거든요.”

“ 어머니가 선물을 줬어요?”

“ 이거요.”

몽요는 들고 있던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 그건 어머니 돈 주머니 같은데요?”

“ 돈을 주셨거든요.”

“ 어머니께 잘 보인 모양이네.”

연우강은 몽요 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빚 갚으라고 주시던데요?”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은 어쩔 수 없었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하든지, 아니면 다음 날 말해도 되는 상황임에도 몽요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 빚?”

“ 일단 이백 만 냥을 갚고, 나머지 이백 만 냥은 무인들을 빌려주는 대가로 감하라고 하시네요.”

“ 그러니까 그것만 받으면 몽요는 외상값이 없어지는 거네요?”

“ 이백만 냥이 남아요.”

“ 무인들을 비려주는 값으로 감한다면서요.”

“ 차감할 수 없으니까 그렇죠.”

“ 왜 차감할 수 없다는 거죠?”

“ 인사대가 싸워야 할 상대는 율령궁도 있지만 결국엔 미나모토 가문과도 싸워야 하잖아요. 인사대는 연 공자를 돕고 연 공자는 우릴 돕는 게 되니까 서로 빚지는 게 없잖아요.”

“ 이백만 냥의 빚을 글대로 남겨두겠다는 말?”

“ 앞으로 천천히 갚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갚게 되지 않을까요?”

“ 이자가 많아집니다.”

“ 열심히 갚을게요.”

“ 주세요.”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 괜찮아요?”

“ 뭐가요?”

“ 결국 이건 연 공자 돈이잖아요.”

“ 정확하게는 제가 어머니께 드린 돈이죠.”

“ 그게 그거 아닌가요?”

“ 아닙니다. 이건 제 돈이 아니고 어머니 돈입니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쓰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죠.”

“ 정말?”

“ 훨씬 어울려요.”

“ 뭐가요?”

느닷없이 어울린다는 말에 몽요는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머리를 기르니까 훨씬 낫다고요.”

“ 풋!”

몽요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그로부터 어울린다는 말을 들으니까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

“ 정말 그래요?”

“ 전 거짓말 안 한다고 했잖아요.”

“ 그건 뭐죠?”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이 궁금해 물었다.

“ 쫓겨났습니다.”

“ 쫓겨나요?”

“ 쉬고 싶다니까 나가서 자라던데요.”

“ 어머니께서?”

“ 네.”

“ 가요.”

몽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거처는 호수 건너편이었다.

“ 차 드려요?”

몽요는 유등에 불을 켜며 물었다.

“ 차보다는 술 어때요?”

연우강은 가져온 술병을 들어 올리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곰과 호랑이 털로 이어 붙인 바닥재가 깔려 있고,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화로가 있다. 그리고 안쪽에는 침상이 놓여 있는데, 침상 위에는 호수가 바로 보이는 창문이 나 있었다.

“ 잔 준비할게요.”

몽요는 주방으로 들어가 술잔 두 개를 꺼내왔다. 곧 두 사람은 술잔을 앞에 두고 마주 보며 앉았다.

“ 은밀막부는 어때요?”

“ 어느 정도 정리가 돼 가고 있어요.”

“ 피해가 많았나 보죠?”

전에 나천후에게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놈은 몽요는 물론이고 아버지 어머니를 사로잡은 것처럼 말을 했었다. 물론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말로 인해 은밀막부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 공교롭게 되려고 그랬는지, 제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미나모토 가문에서 반란을 일으켰어요.”

“ 밀천이 등장한 것 때문이군요.”

“ 그런 것 같아요. 그 바람에 가문을 정비할 여유 없이 전쟁에 휘말리고 말았어요. 하지만 앞으로 사오 년만 지나면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을 거예요.”

“ 그럼 그때까지 나머지 돈을 받기 힘들 것 같네요. 이자가 상당한데.”

“ 이백만 냥에 대한 이자 말이에요?”

몽요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조금 전 연우강 어머니가 했던 말 그대로다. 금전거래에 있어서는 가족도 없다더니 지금 분위기도 생각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더 멋지게 보인다.

‘ 이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 내가 미친 년이지.’

몽요는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 이백만 냥이면 이 할만 잡아도 일 년에 사십 만 냥이라는 엄청난 이자가 붙습니다.”

“ 빚에서 벗어나려면 하루라도 빨리 갚아야 하겠네요.”

몽요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 그래주면 전 좋죠. 빚이라는 건 사람을 치졸하게 만들거든요. 좋았던 관계도 금세 나빠지게 되고.”

“ 알았어요. 지금부터 갚아나갈게요.”

몽요는 벌떡 일어나 연우강을 밀어젖혔다. 연우강은 벌러덩 넘어갔다.

“ 몽요!”

“ 우연히 백설의 장부를 본 적이 있어요. 장부에서 화야불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발견했는데 그는 특급 기녀를 데리고 나갈 때마다 이백 냥을 지불했더라고요. 저는 그녀들과 비교하면 형편없으니까 하룻밤에 열 냥으로 할게요.”

그녀는 연우강의 위에 올라타서는 사망묵의를 벗겨나갔다. 연우강의 눈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 한두 푼도 아니고 이백 만냥입니다. 몽요.”

“ 이백 만 냥을 갚으려면 이십 만 번을 함께 자야 하고, 해로 따지면 오백 년이 약간 넘어가네요. 거기에 이자를 합치면 천 년이 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갚아 나갈게요.”

어느새 연우강의 옷을 벗겨낸 그녀는 찢듯이 자기 옷을 벗어 던졌다.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유등 아래 드러난 몸매는 곧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폭발적이었다. 가슴은 풍만하면서도 전혀 처지지 않고 무공으로 단련된 복부는 탄탄하기 그지없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답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뜨거운 기운이 아래쪽에 고였다.

몽요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지고 곧 서로의 입안으로 스며들어갔다. 두 사람은 거칠게 입맞춤을 했다. 입술이 이지러지고 혀가 얽혔다.

연우강은 거칠게 몽요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색공을 펼치는 것도 아닌데 그녀와 관계를 가지게 되면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다. 풍만한 가슴이 손 안 가득 잡혀들고 입 안에 머물던 몽요의 혀가 더욱 거칠게 요동친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형연할 수 없는 쾌감이 밀려들었다. 연우강은 신음을 뱉어내며 몽요의 가슴을 더욱 거칠게 틀어쥐었다.

급기야 견디지 못한 몽요가 입술을 떼고 가슴속 저 밑바닥으로부터 시작한 신음을 토해냈다.

“ 남궁소저랑 수 소저는 잘 있죠?”

몽요는 연우강의 목으로 입술을 가져가며 물었다.

“ 둘이 많이 친해졌어요.”

“ 잤어요?”

몽요는 그렇게 말하고 연우강의 가슴을 베어물었다.

“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가슴을 더듬던 손을 아래로 내려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몽요의 몸이 잔뜩 경직됐다. 어떤 기대 때문인 듯 입술이 뜨거워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엉덩이에서 머물던 연우강의 손이 은밀한 곳으로 침범해 들어가자 몽요는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 원래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잖아요.”

그녀는 연우강의 몸 곳곳에 불을 지피며 아래로 내려갔다.

“ 뭐가 그렇다는 거죠?”

“ 연 공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수 소저나 남궁 소저가 저처럼 하면 잘 수밖에 없잖아요. 더구나 연 공자는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고.”

“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몽요.”

“ 정말?”

몽요는 고개를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상대방에 대한 실례입니다.”

“ 풋!”

몽요는 활짝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연우강보다 몽요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열기가 아니라 색기를 방불케 하였다. 더불어 욕심은 끝이 없었다. 마치 배가 잔뜩 고픈 어린아이처럼 끊임없이 연우강을 탐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장소를 잊고 시간을 잊었다.

몽요는 이끌고 연우강은 밀었다.

눈만 쳐다보면 상대방이 원하는 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이미 두 사람에게는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서로에게로 향하는 뜨거운 갈구만 있었다. 밤은 두 젊음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깊었다.

몽요는 깊은 탄성과 함께 연우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여운이 다하지 않은 듯 그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 이제 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 냥 남았어요.”

몽요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 이자는 어쩌고요?”

“ 먼저 원금부터 갚고 난 후에 갚을 생각이에요.”

몽요는 배시시 웃었다.

“ 그 웃음의 의미는 뭐죠?”

“ 이제 열 냥밖에 갚지 못했는데도 천당에 다녀온 기분인데, 이백만 냥을 다 갚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상상하니까 웃음이 절로 나와요.”

“ 매일매일 갚고 싶겠네요.”

“ 시간만 허락한다면 전 매일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가능하면 원금을 빨리 갚아야 이자가 줄어들잖아요.”

“ 알았으니까 이제 한숨 자요.”

“ 몸을 닦아줘야 자죠.”

“ 빚을 갚는 건 끝났으니까 이제부터는 멋진 사내의 봉사를 받아아죠.”

몽요는 생긋 눈웃음을 쳤다.

“ 후우! 알았습니다. 물수건이 어딨죠?”

연우강은 주변을 훑으며 물었다.

“ 우리 뒤쪽에 보면 문이 있잖아요. 그 문을 열면 몸을 닦는 천이 있어요. 한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커다란 욕조가 있고, 욕조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요.”

연우강은 욕실의 모습을 그리며 마라천력을 끌어올렸다. 한편에 걸려 있던 수건이 둥실 떠오르더니 욕조 안으로 들어가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나왔다. 그는 마라천력으로 수건을 비틀어 물기를 짜면서 내기를 주입했다. 곧 뜨거운 김이 수건에서 솟아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수건으로 시선을 주자 그것은 빠르게 날아와 몽요의 등으로 떨어졌다.

“ 새로운 무공이네요?”

몽요는 따듯한 수건의 느낌을 음미하며 물었다.

“ 심뢰를 연구 중입니다.”

“ 심뢰라면 심검의 기운을 말하는 거예요?”

“ 마라천력에 심검의 기운을 심는 거죠.”

등을 꼼꼼하게 닦아준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몽요의 몸을 뒤집었다.

“ 식었어요. 우강.”

“ 그래요?”

연우강은 다시 수건을 욕실로 보내 조금전 과정을 되풀이하여 몽요의 몸을 닦았다. 수건이 몸을 스칠 때마다 몽요는 움찔움찔 떨며 나른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 그것도 가능해요?”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물었다.

“ 이제 실마리만 잡았을 뿐입니다.”

“ 그렇게 무공을 익혀서 뭐 할거죠?”

“ 뭘 하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저절로 떠오릅니다.”

“ 저절로 떠오른다고요?”

“ 마라천력을 적용하면 새로운 무공이 되곤 하거든요.”

“ 부러운 능력이네요.”

“ 사람 죽이는 능력이 자꾸만 좋아진다는 건데 부럽긴 뭐가 부럽습니까?”

“ 좋은 곳에 사용하면 되잖아요.”

“ 이렇게?”

연우강은 몽요의 신형을 뒤집더니 가슴에 입을 맞췄다.

“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몽요는 빙그레 웃으며 허공에 떠 있는 수건을 잡았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 피곤할 텐데 이제 쉬세요.”

몸을 닦고 난 연우강은 몽요를 침상에 눕혔다.

“ 우강은 안 자요?”

“ 절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 어머니?”

“ 어머니는 주무십니다.”

“ 그럼?”

“ 우진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연 공자가 왜 우강을 기다리죠?”

“ 그건 저도 모르죠.”

“ 혹시.... 들었을까요?”

“ 녀석도 공력이 이 갑작 정도는 될 겁니다.”

“ 드, 들었다고요?”

몽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간밤에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됐었다. 그런데.....

“ 그런 걸 즐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왔다.

“ 빨리 끝내고 들어와서 자요.”

“ 그러죠.”

그는 호변을 따라 걸었다.

예상대로 우진은 부모님이 머물고 있는 통나무집 뒤편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 잠이 안 와?”

연우강은 연우진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술 병 두 개가 뒹굴고 있었다.

“ 그분과 혼인하실 겁니까?”

“ 혼인은 왜?”

“ 그분을 놓치면 형님은 평생 후회할 겁니다.”

“ 그렇다고 해도 혼인은 좀더 시간이 필요해. 그것 때문에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냐?”

“ 그 사건에 대해 알아야겠습니다. 형님.”

“ 그 사건이라면.....”

“ 주무상 사건을 말하는 겁니다.”

“ 심각한 지경이냐?”

“ 그렇습니다. 주무상의 아버지인 주진무는 아들의 사인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금의위는 오군도독부로 옮겨갔던 권력을 찾아오기 위해 그 사건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천리포영 남철진이 하북 사마세가를 전격 방문했습니다.”

“ 그래서?”

“ 그곳에서 사마세가의 장자 사마윤을 데려갔습니다.”

“ 죄목이 뭐였는데?”

“ 아직은 참고인 자격이라고 합니다.”

“ 그 일 때문이라고 보는 거냐?”

“ 과거에 비해 위세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하북 사마세가는 황후를 배출했던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의 장자를 단지 참고인으로 부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마윤도 관련이 있습니까?”

“ 그 녀석은... 백호소였고 적랑이라 불렸다.”

“ 좋습니다. 이제 주무상 사건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 꼭 알아야겠냐?”

“ 주무상 사건은 형님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 네가 알고 있는 건 어디까지냐?”

연우강의 얼굴엔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 주무상이 살해당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 아직은 극비로 취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알았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말 안 해주실 겁니까?”

“ 주무상은 내 부하다. 우진. 지휘관은 부하의 명예를 지켜줘야 한다.”

“ 그의 명예를 지켜주다가 형님이 당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 그건 내가 지고 가야 할 업보니까 받아들여야지.”

“ 어떻게 받아들인다는 겁니까?”

“ 죽여야 한다면 죽이고, 지워야 한다면 깨끗이 지울 참이다.”

“ 상대는 황실입니다. 형님. 대야벌 같은 무림 세력이 아니란 말입니다.”

“ 황제도 사람이고 주진무도 사람이고 자금성에 있는 것들도 전부 사람이다. 사람인 이상 목이 잘리면 죽는다.”

“ 저, 전부 죽이겠다는 말입니까?”

“ 금릉 연씨 세가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됐다. 그만 하자. 아무튼 무상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 제가 걱정하는 건 금릉 연씨 세가가 아니라 형님입니다.”

“ 자식, 다 컸네. 그럼 한 가지만 말해주마. 그들은 설사 내가 무상을 살해했다고 해도 날 어쩌지 못한다.”

“ 금의위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형님.”

“ 그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는 거다.”

“ 어떤 상황이란 말입니까?‘

“ 날 없애는 순간 그들은 중요한 사냥을 앞두고 사냥개를 잃게 되거든.”

“ 사냥이라면 대야벌을 말하는 겁니까?”

“ 맞다. 우진. 지금 그놈들을 대신해서 대야벌과 싸워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적어도 대야벌과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날 어떻게 하지 못한다. 더불어 그들이 노리는 건 금릉 연씨 세가의 몰락이나, 내 목숨이 아니다.”

“ 권력이란 말입니까?”

“ 바로 그거다, 우진.”

“ 그 후엔 어떻게 합니까?”

“ 일단 여기까지만 정리하자. 차후에 일어날 일은 그때 다시 생각하고, 됐냐?”

“ 알았습니다. 형님.”

연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그만 들어가라.”

“ 쉬십시오, 형님.”

처소를 향해 가는 연우진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연우강은 동생을 지켜보다가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그때 뒤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렸다. 통나무집을 돌아 나오고 있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 어머니도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조금 전 슬쩍 내공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런 기척도 걸려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편으로 다가오는 어머니 얼굴이 잔뜩 굳은 채였다. 우진과 나눴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 귀노!]

연우강은 집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 제 잘못이 아닙니다.ㅏ 장주님. 부인께서 꼭 들어야 한다고 사정을 하는 바람에......]

[ 그렇다고....]

“ 염노를 야단칠 필요 없다. 듣게 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얼굴도 보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연우강 옆으로 다가간 이숙경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

“ 네겐 비장의 수가 있다. 우강아!”

이숙경은 입을 열었다.

“ 무슨 수가 있단 말입니까?”

“ 이거다.”

이숙경은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 이건 뭡니까?”

연우강은 이숙경이 내민 물건으로 시선을 주었다. 둘 다 금으로 돼 있는 듯 황금빛 광채가 반짝였다.

“ 네 신분을 증명하는 책서와 금인이다.”

“ 주씨로 돌아가란 말입니까?”

“ 황제는 물론이고 남경왕은 엄밀하게 따지면 네 친척이다. 윗사람이고, 그런 분들을 향해 무기를 뽑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 어머니는 큰아들을 잃어도 좋습니까?”

“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 전 전쟁터에서도 살아왔습니다. 어머니.”

“ 숨을 쉰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구나. 그게 아니었다면 앵속을 복용하지도 않았을 테지.”

“ 어머니!”

“ 아무튼 그건 네가 가지고 있거라.”

이숙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머니!”

“ 어쩌면 그걸로 우리 전부가 살아날지도 모르니까 함부로 버리지 말거라.”

이숙경은 버리지 못하게 쐐기를 박고 처소로 들어갔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예 확 정리를 해 버리면..... 아서라, 무상 아버진데.”

연우강은 터벅터벅 몽요의 처소로 걸어갔다.

“ 이야기 끝났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몽요가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 네.”

연우강은 옷을 벗고 침상으로 향했다. 연우강이 다가오자 몽요는 이불을 들췄다.

연우강은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 심각한 이야기였어요?”

몽요는 연우강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물었다.

“ 가족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몸이 왜 이리 차죠?”

“ 이불을 걷어차고 자서 그래요. 우강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것도 모르고 큰 대자로 뻗어서 잤을 거예요.”

“ 저 감시하러 나온 건 아니고요?”

“ 제가 우강을 왜 감시해요. 빚 갚는 것도 버거워 죽겠는데, 팔이나 줘요.”

몽요는 눈을 흘기며 연우강의 팔을 펴 벴다.

“ 조금 전에는 매일매일 빚을 갚고 싶다고 했잖아요.”

“ 흥! 사랑을 했으면 최소한 아침까지는 책임을 져야 하는 거라고요.”

“ 그래서 기분 상했어요?”

“ 상했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 이왕 받은 거 열 냥만 더 받았으면 좋겠는데, 줄 수 있어요?”

“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 그럼 다음에 받기로 하고 그냥 자죠.”

“ 아니에요, 우강. 시간 날 때마다 갚는 게 낫겠어요.”

“ 시간 날 때마다?”

“ 부지런히 원금을 갚아야 이자가 줄잖아요.”

“ 저도 몽요 생각과 같습니다. 채권지 입장에서는 이자가 늘어나면 좋지만, 채무자 입장에서는 이자가 늘면 늘수록 주름살도 늘어나니까 좋은 게 아니거든요.”

“ 절 생각해서 그런다는 거예요?”

“ 저는 친절한 연우강이잖아요.”

“ 풋! 친절한 연우강이라는 말은 맞네요.”

몽요는 손을 아래로 쑥 내렸다.

곧이어 그녀의 얼굴에 뇌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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