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동기
전당강 끝자락 항주만을 바라보고 있는 황만에 삼엄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일단의 무리가 들어오면서부터다. 그들이 처음 황만으로 들어왔을 때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원래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큰 어촌에는 일감을 찾아오는 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그런 사람으로 여겼다.
그랬던 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나, 바닷가 쪽에 있는 각 객잔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황만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 갔다. 그들의 행동은 여타 일감을 구하러 오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낮에는 선창에 나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니고 밤에는 객잔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위화감 때문이었다. 시선을 마주치기만 해도 주눅이 들고, 말이라도 걸어오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사람들은 그들을 피했다. 그러다가 은밀한 소문이 돌면서 시끄러운 소리로 들끓던 항구가 조용해졌다.
황만에 들어와 있는 자들이 금의위라는 소문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자들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금의위가 머물고 있다고 알려진 객잔엔 손님이 뚝 끊겼다. 맹수가 나타나면 숲이 조용해지는 것처럼 황만도 그렇게 변한 것이다.
항주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객잔 이층.
남색 무복을 걸친 사내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끔 눈에서 차가운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는 이자는 금의위 북진무사 천리포영 남철진이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첩지가 들려 있었다.
남철진은 시선을 깔았다.
< 해남 백가의 장자 백을상. 흑랑기에 마물고 있을 땐 귀랑이라 불렸음. 황만에서 어부로 살아가고 있음.>
남철진이 금의위를 대동하고 이곳까지 온 이유였다.
와락!
그는 쥐고 있던 첩지를 구겼다. 흑랑기에서 살아남은 일곱 명. 주무상을 빼고 나면 여섯 명이다.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걸린 시간이 일년이다. 하북 사마 세가의 장자 적랑 사마윤, 유림 마가의 장자 사랑 마장승, 북장 군가의 장자 전랑 군무옥, 해남 백가의 장자 귀랑 백을상, 괴랑 류사은, 그리고 유랑 주무상, 광랑 연우강.
천이백 명 중 그들 일곱 명이 살아왔고, 북로정군을 떠난 자는 주무상을 제외한 여섯 명이다. 주무상은 전사한 걸로 보고된 것이다.
만일 주무상이 다른 자들처럼 일반 가문의 장자였다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무상은 한때 북경에서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거악단구 주진무의 외아들이자 황족이 아닌가. 주무상이 살해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마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희열을 맛봤다. 이건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금의위 영반 자리가 걸린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무상 살해사건은 파고들수록 암초에 부딪쳤다. 주무상이 흑랑기에 근무했다는 기록조차 나오지 않았다.
“ 하지만 난 해냈다.”
남철진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남철진은 세상에 완전범죄라는 건 없다고 확신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어딘가에 흔적이 남게 되고 언젠가 그 흔적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뜻밖에도 흑랑기의 기록을 찾아낸 곳은 금의위 고문서실이었다. 흑랑기에 대해 적혀 있던 책자가 잘못하여 고문서실로 들어간 것이다. 그 기록 또한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름만 말하면 알 만한 가문의 자식들이 아니었더라면 끝까지 밝혀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북 사마 세가, 유림 마가, 북장 군가, 해남 백가는 나름 대단한 가문들이었고, 그런 가문의 자식들은 관리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조사를 시작하자 흑랑기에 대한 것들이 하나둘 밝혀졌다.
가장 먼저 신병을 확보한 자는 하북 사마 세가의 장자 사마윤이었다. 하지만 사마윤으로부터 알아낸 것은 많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 당시 흑랑기 일천이백 명은 명령에 의해 적진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들어갔고,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말만 들었다.
물론 주무상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다시 소환할 수도 있으니까 북경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과 함께 풀어주었다. 하북 사마 세가의 장자를 별다른 이유 없이 오래 잡아둘 수는 없었다.
“ 하지만 이놈은 다르지.”
남철진은 다시 첩지를 폈다.
해남 백가의 장자 백을상.
겉으로 드러난 명칭은 해남 백가지만 그들의 실제 신분은 팔황새의 한 곳인 해남 남십자성이다. 그곳의 장자라면 설사 고문을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직접 이곳으로 나온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 오셨습니다.”
아래층에서 관정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철진은 고개를 돌렸다. 관복을 걸친 자가 이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 절강성 안찰사 정상원이외다.”
남철진 앞으로 다가간 사내는 포권을 취했다.
“ 반갑습니다. 정 대인. 난 진무사 남철진이오. 앉으시오.”
남철진이 자리를 권하자 정상원은 건너편으로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남철진은 찻잔을 그 앞에 놓아주고는 차를 따랐다. 차는 객잔에서 흔히 나오는, 이것저것 섞어서 끓인 싸구려 엽차였다.
“ 중요한 범인이 어부로 위장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무사.”
정상원은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 그래서 협조를 구하기 위해 정 대신을 모셨소이다.”
“ 어떤 방법으로 협조를 해드리면 됩니까?”
“ 지금 항주만에 나가 있는 모든 어선을 이곳으로 유도해 주었으면 합니다.”
“ 크고 작은 배를 합치면 수백 척이 넘습니다.”
“ 그래도 해야 하네, 상원.”
바로 그때 계단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던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곳에는 작은 체구지만 다부진 중년인이 서 있었다.
“ 전하!”
“ 전하!”
두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놀랍게도 계단으로 올라온 사람은 남경왕 주진무였다.
[ 관정수!]
남철진은 고개를 숙인 채 관정수를 향해 엄하게 전음을 보냈다. 남경왕의 출현을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는 질책이었다.
[ 사장군과 함께 오셔서 전음을 보낼 여력이 없었습니다.]
‘ 사장군이라고?
남철진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사장군은 한때 황실 최고의 무인으로 불렸던 자들로 천해장군 철리목, 광해장군 율사전, 창해장군 왕추, 풍해장군 강철익을 일컫는 말이다. 남경왕 주진무를 주군으로 모시며 따랐던 자들인데 남경왕이 남경으로 좌천돼 가면서 모습을 감췄다. 그랬던 자들이 남경왕의 등장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일어나게.”
“ 황공하옵니다. 전하.”
“ 황공하옵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앉지.”
주진무는 남철진을 빤히 쳐다보며 자리를 권했다.
“ 아직 정확하지가 않아서 미처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앉자마자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남경왕 주진무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남 백가의 장자 백을상 때문일 터였다.
“ 난 사소한 거라도 무상과 관련이 된 일이라면 보고하라고 했다. 진무사.”
장보가 잘못 됐을 수도 있고, 이곳에 백을상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등 하는 변명을 할 자리가 아니었다. 이럴 땐 그저 한 마디면 족하다.
“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 백을상이란 놈이 배를 타고 있다고 했느냐?”
“ 그렇습니다. 전하.”
“ 안찰사!”
주진무는 정상원을 보았다.
“ 하명하십시오, 전하.”
“ 절강성 산하 수군을 동원해서 항주만에 나가 있는 어선들을 모두 황만으로 끌어들이도록 하시오. 반항하는 놈들은 공격해도 좋네.”
“ 알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조아린 정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남철진은 씁쓸한 얼굴로 밖으로 나가는 정상원을 보았다. 조금 전 자신이 말할 때 정상원은 수백 척의 어선이 있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랬던 그가 남경왕의 한마디에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곧바로 행동에 나서고 있다. 정삼품 안찰사를 한마디 말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건 바로 권력의 힘일 테다.
“ 어디까지 진행됐느냐?”
“ 그러니까....”
남철진은 그동안 알아낸 것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추측성 발언은 결코 하지 않았다.
“ 백을상이란 놈을 잡아들이면 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는 말이냐?”
“ 그건 아닙니다. 전하.”
“ 허면?”
“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자는 연우강입니다. 하지만 사마윤이 그랬던 것처럼 그자는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고 현 가주입니다. 완전한 증거가 아니면 그자를 엮을 방법이 없습니다.”
“ 자칫 잘못하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단 말이냐?”
“ 그렇습니다. 전하. 기존에 금릉 연씨 세가를 지원하던 자들과는 별도로 연우강 그자는 동창의 유설연과 상당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백을상 그자는 연우강을 엮기 위한 미끼에 불과합니다.”
“ 널 믿겠다. 남철진. 그라고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열심히 하도록 해라.”
“ 황공하옵니다. 전하.”
고개를 숙인 남철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물렸다. 이제 서서히 기지개를 펴는 남경왕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미래를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눈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 난 네놈을 발판으로 비상하게 될거다. 연우강. 아울러 우리 금의위도.’
********
“ 몽 처자, 그 녀석 잘 좀 돌봐줘요.”
이숙경은 몽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걱정마세요. 아주머니. 제가 잘 보살피도록 할게요.”
몽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자식의 나이와는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강호 무림에 연우강보다 더한 강자는 없다고 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숙경이 얼굴엔 걱정이 가득하다.
“ 너도 너무 나대지 말고, 꼭 필요할 때만 ... 무슨 말인지 알지?”
이숙경은 연우강을 보았다.
“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리고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사오라고 하세요.”
“ 오냐, 녀석아.”
“ 내 집은 언제 지어줄 거냐?”
이번에는 연금석이 물었다.
“ 불편하세요?”
“ 불편할 건 없다만, 좀이 쑤셔서 그런다.”
“ 그동안 바쁘게 사셨으니까 이번 기회에 좀 쉬세요.”
“ 그렇지 않아도 낚시에 취미를 붙였다. 그리고 이거 받아라.”
연금석은 천으로 둘둘 만 것을 내밀었다.
“ 뭡니까?”
“ 낚시에 취미를 붙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 그래서요.”
“ 이 섬 근처에는 횟감보다는 물개가 더 많더구나.”
“ 물개요?”
“ 네 어미가 매 끼니마다 소고기 볶음을 해주는데도 얼굴은 점점 부실해지는 것 같더구나.”
연금석은 연우강이 아니라 몽요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 왜 절....”
몽요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 이틀을 머물렀다. 그런데 그 이틀 동안 연우강 부모님이 머무는 집에서 식사를 할 때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나체로 살았던 것이다.
“ 몽 처자는 얼굴이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아서 그렇다네.”
“ 서, 설마요.”
“ 내가 보기엔 그래.”
“ 아버지!”
“ 알았다, 녀석아.”
“ 이건 진짜 어렵게 얻은 거다. 무공도 모르는 내가 물개와 반나절 동안이나 사투를 벌였다.”
“ 그럼 아버지 드시지 왜 절 주시는데요?”
“ 물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가 먹고 싶지. 이놈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갈등이 많았다. 하지만 자식이 먼저 죽는 걸 지켜보는 아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가지고 나왔다. 그러니까 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게 생각해도 된다.”
“ 공짜라고요?”
“ 네가 집을 지어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몽 처자.”
연금석은 몽요를 불렀다.
“ 네!”
이제는 귓불까지 새빨개진 몽요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 녀석이 매일 아침 약을 먹는 걸 알고 있는가?”
“ 알고 있어요.”
“ 도시에 들어서면 곧바로 의원에 들러서 새 약을 짓도록 하게. 그때 이걸 의원에게 주면 되네, 그리고..”
연금석은 들고 있던 것을 몽요의 손에 쥐어주었다.
“ 말씀하세요.”
“ 몽처자에게 준 그건 가짜가 횡행하는 귀한 물건이네. 약 안에 집어넣는지를 반드시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걸 명심하게.”
“ 가짜를 집어넣을 수도 있다는 말이세요?”
“ 주로 소의 그것을 내놓고는 그거라고 하는 경우가 많네. 소를 교미시키는 광경을 봤는지 모르지만 소는 그야말로 촌각이네. 그걸 집어넣으면 큰일이니까 감시를 게을리 하면 큰일 나네. 아는 집이라면 상관없지만 처음 가는 집은 절대 조심해야 하네.”
“ 알았어요. 반드시 지켜볼게요.”
“ 아무튼 두 개가 들었으니까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하게.”
“ 아버지!”
연우강은 황당한 얼굴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고 하지만 처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 험! 됐다. 그만 가거라.”
어색한 듯 연금석은 헛기침을 하고는 손을 저었다.
“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몽요는 연금석과 이숙경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배에 올랐다.
“ 다음에 뵙겠습니다.”
연우강도 따라 배에 올랐다.
“ 다녀오십시오, 천주님.”
“ 다녀오십시오.”
뒤에 있던 경천사마 일행이 앞으로 나오며 연우강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패천림 무인들에게 얼굴이 알려진 그들을 데려갈 수 없어 염자생을 데려가기로 한 것이었다.
“ 부탁할게!”
연우강은 손을 흔들었다.
연우강 일행을 태운 배가 천천히 동굴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밖은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동굴을 나선 배는 빠르게 전단강을 향해 나아갔다.
“ 무공은 어때?”
연우강은 염자생을 보며 물었다.
“ 구 성 가량은 익혔습니다. 장주님.”
“ 전과 비교하면?”
“ 두 배 이상 강해졌습니다.”
“ 그럼 이제 혈잔마수라는 별호를 다시 써도 되겠네?”
“ 써도 상관은 없지만, 그냥 귀노로 살겠습니다.”
“ 그건 귀노 편할대로 해. 그건 그렇고 다시 밀천을 찾아가라면 찾아갈 수 있겠어?”
“ 그곳에 가실 참입니까?”
“ 유라 그 애가 훔쳐간 돈이 얼마지?”
“ 장주님 방에 있던 패물까지 합치면 오십만 냥 가까이 됩니다.”
“ 그럼 오십 만냥으로 하면 되겠고. 일 년 이자를 오 할로 쳤을 땐 총 얼마나 되지?”
“ 삼 년으로 잡으면 백육십팔만칠천오백 냥입니다.”
“ 그걸 포기하라는 거야?”
“ 그렇다고 해도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 놈은 돈을 줄 수밖에 없어. 주지 않으면 구유잔백칠천도가 어떤 무공인지 알게 될 테니까.”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선실로 향했다.
선실 안에서는 몽요가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 가지고 나가려고 했는데.”
몽요는 쟁반을 받쳐 든 채 연우강을 보았다.
“ 바람이 찹니다. 몽요.”
“ 그럼 여기서 마셔요.”
몽요는 선실 중앙에 있는 탁자 위에 찻잔을 놓았다.
“ 밀천으로 가실 셈이세요?”
“ 하오밀문과 우리를 합친다고 해도 율령궁을 이길 수 없습니다.”
“ 만일 밀천이 거절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죠?”
“ 그놈은 거절할 수 없습니다.”
“ 왜요?”
“ 율령궁을 없애고 싶어 하는 심정은 저보다 더하니까요.”
“ 밀천의 천주를 알아요?”
“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 네.”
“ 무무대야 나천후가 밀ㅊ펀의 천줍니다.”
“ 그랬군요.”
몽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천후는 다른 잠룡들에 비해 크게 드러난 자가 아니었다. 사문도 알려지지 않는 등 비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강한 무공을 지녔었는데 그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 무공은 어느 정도죠?”
문득 밀천 천주의 무공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 우주일만검결을 익혔습니다.”
“ 그걸 찾아냈단 보네요?”
“ 알아요?”
“ 밀천에 대한 기록은 우리 은밀막부에도 있으니까요.”
“ 익히고 싶어요?”
“ 우주일만검결의 구결을 알고 있다는 거예요?”
“ 우연히 천수장해라는 비급을 얻었거든요.”
“ 천수장해라면 혁미월 조사가 남긴 비급을 말하는 건가요?”
몽요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녀가 익히고 있는 만화은신사용이 바로 혁미월이 남긴 무공이었던 것이다.
“ 원본은 내게 없지만, 우주일만검결은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연우강은 제 머리를 툭툭 쳤다.
“ 그거 비싸겠죠?”
“ 전에 줬던 비급들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 얼마 받을 건데요?”
“ 백만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일단 오십만을 먼저 드릴게요.”
몽요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 그건..”
연우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몽요에게 받은 이백만 냥을 어머니께 드렸다. 그런데 그 주머니가 다시 몽요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었다.
“ 싫다는 데 자꾸만 주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았어요. 어른이 주는 건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그렇잖아요.”
몽요는 생글생글 웃으며 주머니 안에서 전표를 꺼내 오십 장을 세어 연우강에게 내밀었다.
“ 일단 넣어두세요. 그리고 앞으로 계산은 전부 몽요가 하고요. 그리고 이것도......”
연우강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책서와 금인을 꺼내 내밀었다.
“ 이건?”
몽요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자신이 알기로는 이런 물건을 가질 수 있는 사라은 황제의 형제인 왕야밖에 없다. 문득 삼 일 전 밤에 연우강을 따라 나갔을 때가 떠올랏다. 멀리 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연우강의 어머니는 연우강에게 뭔가를 내밀면서, 그것만 있으면 어려움이 해결될 거라고 하였다.
“ 누가 준 건데 가지고 있기가 뭐해서 그래요.”
“ 아, 알았어요.”
몽요는 금책과 금인을 받아 꺼냈던 전표와 함께 주머니 안에 넣었다.
둥둥둥! 둥둥둥! 둥둥둥! 둥둥둥!
“ 그쪽에 있는 선박은 이쪽으로 대라!”
북소리와 함께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 도망치면 발포할 것이다.”
“ 무슨 일.....”
똑똑똑!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와!”
연우강의 말에 전장사가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 무슨 일이냐?”
“ 명나라 수군입니다.”
“ 명나라 수군이 왜 우리를 막는거지?”
“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 기름칠은 꾸준히 했어?”
“네! 섭섭하지 않게 해주고 있습니다.”
“ 그럼 문제 없잖아.”
“ 일단 배를 명나라 전함에 대겠습니다.”
전장사는 고개를 숙이고 선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연우강 일행을 태운 배가 천천히 명나라 전함으로 다가갔다. 연우강은 선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난 서호의 백설 총관 전상삽니다! 이 배는 화선입니다.”
명나라 수군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전장사는 전함을 향해 소리쳤다.
“ 전 대협이구려. 일단 배를 대도록 하게.”
아는 자가 있었던 듯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장 백호소 아니십니까? 밤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배가 측면이 맞닿자 전장사는 웃으며 명나라 전함으로 건너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다시 연우강 일행이 타고 있는 배로 건너왔다.
선실로 들어선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 아무래도 따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 무슨 일이 있는 거야?”
“ 그도 정확한 내막은 모르고 항주만에 있는 모든 배를 포획하여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았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 따라오라는데 방법이 없잖아.”
“ 알겠습니다.”
전장사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연우강 일행이 탄 화선은 명나라 전함을 따라 황만으로 들어갔다.
“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연우강은 복잡한 얼굴로 몽요를 보았다.
“ 왜 그러세요?”
“ 아까 그 돈주머니 이곳에 숨겨 두세요.”
“ 돈이 너무 많으면 의심을 받을까 봐요?”
“ 꼬투리 잡힐 만한 건 없는 게 낫습니다.”
“ 알았어요.”
몽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실 내부를 살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한편 구석에 있는 화분에서 멈췄다. 만개한 국화 화분이었다.
화분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국화를 뿌리째 뽑아들더니 주머니를 넣고 다시 원래대로 해 놓았다.
“ 됐죠?”
“ 그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 배 안에 있는 자들은 한 명도 열외 없이 전부 내려라!”
내리라는 외침이 들려오자 연우강과 몽요는 선실을 나왔다. 아래층에서 노를 젓고 있던 인사대 무인들도 전부 나와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도망치는 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
또다시 싸늘한 외침이 들려오고, 연우강 일행은 배에서 내렸다. 선착장 주변에는 삼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 우강, 단순한 사건이 아닌 것 같아요.]
주변을 둘러보던 몽요가 전음을 보냈다.
[ 그렇다고 백설이라고 밝혔는데 사고를 칠 수도 없잖아요.]
[ 그렇긴 한데......]
[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하죠.]
연우강은 느긋하게 지시를 따랐다.
일행이 명나라 수군을 따라 간 곳은 수군이 머물고 있는 성 지하에 마련된 감옥 안이었다.
쇠창살로 막힌 감옥은 회랑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수감돼 있었다. 연우강 일행이 들어간 곳에서 이십여 명의 어부들이 불안한 얼굴을 한 채 앉아 있었다.
“ 이거 졸지에 죄인이 됐네.”
연우강은 씁쓸하게 웃으며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와 몽요가 자리를 잡자 인사대 무인들이 호위하듯 주변으로 늘어섰다.
“ 남 천호좀 불러주시오, 난 백설의 총관이오.”
그 순간에도 전장사는 그동안 기름칠을 했던 자들을 불러 달라고 병사들에게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알은 체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네들 할 일만 했다.
그러한 와중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 장사 그만하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
“ 끄응! 알겠습니다.”
결국 전장사는 포기하고 연우강 근처로 왔다.
“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아?”
“ 그렇습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백호소도 모른다면 심각한 사건인 것 같기는 한데......”
연우강은 말끝을 흐렸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진 곳은 다른 감옥이 아니라 지금 있는 감옥 안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갤르 돌렸다. 왼편에서부터 오른편으로 훑어가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우뚝 멈췄다.
검게 그을린 사내 한 명이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연우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산발한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아니 녀석은 얼굴을 바꾼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녀석은 다름 아닌 괴랑 백을상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 안 죽고 살아 있으니까 만나는구나.”
“ 그러게 말이오. 보기 싫은 사람은 더 자주 보게 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오.”
바람이 잔뜩 든 듯한 삭막한 목소리가 백을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어부가 됐더냐?”
“ 그렇게 죽이고도 부족했습니까?”
“ 사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더구나.”
“ 대장님은 마음만 먹으면 피할 정도는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나 혼자였다면 피했겠지.”
“ 큭!”
백을상은 낮게 웃었다.
“ 네 아버지를 만났다.”
“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친 겁니다.”
“ 그랬구나.”
연우강은 감옥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기운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 이봐!”
연우강은 밖에 있는 병사를 불렀다.
“ 무슨 일이냐?”
“ 주둥이 조심해라, 놈! 난 한때 정천호였다.”
느닷없이 연우강의 입에서 추상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흥미로운 얼굴로 연우강과 백을상을 지켜보던 어부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 마, 말씀하십시오.”
병사는 찔끔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가서 책임자를 불러와라.”
“ 아, 알았소.”
병사는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일다경 정도 지났을까,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며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전장사와 친분이 있는 정천호로 남익이란 자였다.
“ 저, 저분입니다.”
남익을 데려온 병사는 연우강을 가리켰다.
“ 전에 정천호를 지냈다고 하였소?”
남익은 연우강을 살피며 물었다.
“ 가서 책임장게 이곳에 흑랑기 대장이었던 광랑과 귀랑이 있다고 전하시오.”
“ 그게 무슨......”
“ 우리를 잡으려고 이 난리를 친 거니까 그렇게 전하면 될 거요.”
“ 아, 알겠소이다.”
남익은 연우강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몸을 날려 밖으로 나갔다.
“ 우리가 아니고 접니다. 대장.”
“ 얼마 전에 적랑이 잡혀갔다는 말을 들었다.”
연우강은 화제를 돌렸다.
“ 왜 그랬습니까?”
이번엔 백을상이 화제를 바꿨다.
“ 녀석이 원했다.”
“ 계속 입을 다물 겁니까?”
“ 녀석은 내 부하다. 귀랑.”
“ 제가 불어버릴지도 모릅니다.”
“ 이미 늦었다.”
“ 믿지 않을 거란 말입니까?”
“ 믿음이라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믿을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걸 부는 순간 피 바림이 몰아칠지도 모른다.”
“ 큭!”
백을상은 피식 웃으며 연우강처럼 벽에 등을 기댔다.
“ 잠은 잘 잡니까?”
백을상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매일매일 보약을 챙겨먹으니까 악몽을 꾸는 일은 거의 없더구나.”
“ 저도 보약을 먹을 걸 그랬습니다.”
“ 매일 먹어야 한다. 하루도 거르지 말고, 정확한 시간에.”
탁탁탁! 탁탁탁! 탁탁탁!
바로 그때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며 강한 기운을 뿌려대는 자들이 감옥 앞을 막아섰다.
“ 다른 감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내보내라.”
그들 중 한 명이 병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알겠습니다.”
삼엄한 가운데 잔뜩 주눅이 든 병사들은 서둘러 감옥 문을 열고 어부들을 내보냈다.
“ 누가 연우강이냐?”
조금 전 명령을 내렸던 자가 감옥 안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도망가지 않을 테니까 긴장하지 말라고. 그보다 여긴 나와 저 친구만 있으면 되니까 나머지는 내보내지.”
연우강은 백을상을 가리켰다.
“ 너희들을 내보내는 건 내가 결정한다, 놈!”
“ 직위가 어떻게 되지?”
연우강은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 북진무사 소속 종사품 정천호다.”
“ 이름은?”
“ 경충이고 별호는 나포사..... 이런 씨팔!”
사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자신도 모르게 묻는 말에 척척 대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실제 상관에게 질문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너보다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을 하면 언젠가는 진무사가 될 거야. 아무튼 이곳에 있는 사람은 죄 없는 양민들이니까 내보내.”
“ 이런 쳐죽일 놈이!”
경충은 철장을 움켜쥐며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 이곳 책임자가 누구야?”
이번엔 경충 옆에 있는 금의위 사내를 보며 물었다.
“ 진무사님......”
“ 남철진?”
“ 그, 그렇.....”
사내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어. 원래 많은 부하를 거느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위엄이라는 게 저절로 생기는데, 그 위엄이 산악처럼 덮여들면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하게 돼 있어. 너도 그런 경우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그리고 넌 출세한다고 해도 백호소에 그치겠다. 그보다 더 바라면 비명횡사하기 쉬우니까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는 게 좋아.”
“ 킬킬킬! 저놈의 주둥이는!”
안쪽에서 듣고 있던 백을상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양민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금의위 위사들에게도 반말을 찍찍해대는 그를 보자 문득 흑랑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졌다.
“ 넌 참수를 당할 운명 같은데, 네 팔자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구나.”
감옥 입구에서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감옥 입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 남철진 너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금의위 영반이 되지 못한다는 쪽에 내 전재산을 걸겠다.”
감옥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남철진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연우강의 말투 때문이었다. 진무사에 오르면서 적잖은 사람도 만났고 그들 중에는 대야벌 벌주인 담대만승도 포함돼 있다. 그런데 그들 중 초면에 말을 놓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그 후에도 말을 놓지 못한다. 과거보다 약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금의위는 황실 권력의 꽃이다. 그런 곳의 진무사를 향해 반말을 뱉어낼 만큼 간이 큰 자는 없을 테다. 그런데 놈은 초면에 반말을 했을 뿐 아니라, 금의위 영반이 되지 못할 거라는 악담까지 했다. 뜨거운 기운이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 ...... 넌 네 재산을 걸어볼 기회도 얻지 못할 텐데. 어떡하냐?”
남철진은 연우강의 얼굴을 살피며 속삭였다.
보통 거물급들을 상대할 때는 직설화법보다는 간접화법을 많이 사용하곤 하는데 방금도 그런 경우였다. 재산을 걸어볼 기회도 얻지 못할 거라는 건, 반드시 죽이겠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 넌 너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잘 들어라, 연우강. 난 장사꾼처럼 하찮은 놈들에게 협박 같은 것은 하지 않아, 한 마디만 하면 돼. ‘그놈 머리를 가져와!’라고 말이야.”
남철진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남철진은 이런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상대가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지금처럼 말하면 대부분 꼬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죽음 앞에서는 창고에 가득 쌓아둔 돈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 꼴에 진무사라고 기죽긴 싫어서. 헛소리 그만하고 안내나 해, 자식아.”
연우강은 남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놈!”
귀밑으로 올라가던 입꼬리가 급속하게 아래로 내려오고 남철진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 내게 너처럼 말했던 놈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남철진. 하지만 실행에 옮긴 놈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왜냐면 전부 이렇게 됐기 때문이야.”
연우강은 목을 스윽 긋는 시늉을 했다.
“ 금릉 연씨 세가 재력이 네 목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놈!”
“ 내 목을 지켜주지 못할지는 몰라도 네 목 정도는 아주 쉽게 잘라낼 수 있지.”
“ 해보겠느냐?”
남철진은 으르렁댔다.
“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는 단 한 번도 사양하지 않았다. 남철진.”
연우강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일렁였다.
남철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연우강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던 것이다. 그것은 진무사에 오르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두려움이었다.
“ 자꾸 말 섞으면 너만 초라해지는데 계속할 거야?”
“ 개자식! 열어라!”
남철진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가자, 귀랑.”
“ 어떻게 아셨습니까?”
백을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우강 곁으로 가며 물었다.
“ 뭘?”
“ 이곳 책임자가 진무사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 책임자씩이나 되는 놈이 감옥까지 개 발에 땀나게 달려올 이유가 없잖아.”
“ 그렇군요. 그런데 그렇게 막 해대도 되는 겁니까?”
“ 해댔다는 건 무슨 소리야?”
“ 저 양반은 금의위 진무사 아닙니까. 금의위 진무사는 명실공히 최고 권력자의 한 사람이고요.”
“ 조금 있으면 알게 될거야.”
“ 조금 있으면.....?”
철컹!
그때 문이 열렸다.
연우강과 백을상은 밖으로 나왔다.
“ 놈들을 점혈해라!”
남철진은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 내 몸에 손을 대는 놈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연우강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던 금의위 위사들이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 반항하겠다는 말이냐?”
남철진은 연우강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 난 내발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남철진. 단, 나는 물론이고 귀랑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조건이다.”
“ 손을 대면 그땐 어떻게 하겠느냐?”
“ 그 답은 조금 전에 했다. 내 몸에 손을 대는 놈은 물론이고 너도, 이 자리에서 죽는다.”
“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금의위는 네놈을 반역자로 만들 수도 있다.”
“ 무슨 수로 반역자로 만든다는 거지?”
“ 넌 팔황새와 접촉했다. 그거 하나만 있어도 너를 비롯한 금릉 연씨 세가를 반역자로 낙인찍을 수 있다.”
상대가 아무리 아니라고 발뺌을 해도 금의위에서 반역자라고 하면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권력의 무서움이다.
“ 하지만 금릉 연씨 세가를 반역자로 만드는 작업은 남철진 네가 아닌 다른 놈이 해야 되겠지. 왜냐면, 네가 여기서 죽어야 금릉 연씨 세가를 반역자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될 테니까. 즉 넌 죽 쒀서 개 주는 입장에 처하게 되는 거지. 그런 상황을 바라면 내 몸에 손을 대도 좋아.”
연우강은 양팔을 벌렸다.
“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남철진은 연우강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갈등 중이었다. 진무사 남철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하들에게 놈을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놈이 정말로 공격을 해 왔을 때 그때는.
“ 그럼 시험해봐도 좋아.”
연우강은 팔을 들어올린 채 남철진 앞으로 다가갔다.
남철진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 빌어먹을!’
남철진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협박과 위협이 효율적으로 먹혀들어가기 위해서는 목숨에 대한 욕심이 기본으로 깔려야 한다. 하지만 죽어도 상관없다고 나오는 부류에게는 그 어떤 위협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놈이 그런 부류였다.
“ 머리 굴리지 말고 네 상관에게 안내해라.”
연우강은 팔을 내렸다.
“ 오냐, 놈 누가 이기는지.....”
[ 남 진무사, 전하께서 기다리시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막 출수를 하려는데 귓전으로 청해장군 철리목의 전음이 들려왔다. 남철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 오늘 일, 반드시 기억하마, 연우강.”
남철진은 몸을 돌렸다.
감옥을 나선 남철진은 연우강을 데리고 본관 건물 이층으로 올라갔다.
“ 용담호혈이 따로 없네.”
남철진을 따르던 연우강은 쓰게 웃었다.
건물 밖은 물론이고 안쪽까지 금의위 위사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중첩되면서 건물 주변에는 그 흔한 밤새 한 마리 없었다.
‘ 누가 왔기에?’
문득 연우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위사들이 구축한 진형은 누군가를 호위하는 형태였다. 수백 명의 금의위 위사를 동원하여 호위를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보통 신분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들어가보면 알겠지.’
“ 데려왔습니다.”
남철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연우강은 문으로 시선을 주었다.
“ 들어오시게!”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가자!”
연우강은 남철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전부 다섯 명이 있었다. 작달막한 체구를 가진 사람은 등을 보이고 있었고, 나머지 네 명은 그 사내를 호위하고 있는 형태였다.
‘ 고수들!’
연우강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안쪽에 있는 다섯 명 전부가 상당한 내공을 지닌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최고 책임자로 보이는 작달막한 체구의 중년인이 가장 강자라는 사실이었다.
‘ 전 제 아버지에 비하면 무공에 발만 담근 상태입니다. 광랑.’
문득 언제가 했던 주무상의 말이 떠올랐다.
‘ 설마...... 아닐거야.’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인사 올리거라! 남경왕 전하시다.”
“ 제길!”
남철진의 입에서 남경왕이란 말이 흘러나오자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 무엄하구나!”
예리한 눈으로 연우강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청해장군 철리목이 버럭 소리쳤다.
“ 너무 그러지 마쇼. 죽을 때까지 만나고 싶지 않았던 분을 만나서 나도 모르게 나온 것뿐이니까.”
연우강은 툴툴거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연우강이 무릎을 꿇자, 백을상 또한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 머리는 찾아뵈라고 수천 번을 더 말을 했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동안 찾아뵙지를 못했습니다. 인사 올립니다. 흑랑기의 대장이자 무상의 상관이었던 연우강입니다.”
연우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네가 무상을 죽였느냐?” < 제 11권 끝>
황금백수 12권 나한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