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10화 (110/232)

제 1장 아주 가끔 소고기 볶음을 먹고 싶습니다.

절을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리던 연우강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었다. 색이 바래버리고 올이 풀린 양탄자가 시야에 잡혔다.

연우강은 풀린 올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것은 끊김 없이 돌돌 풀려진 채였다.

어쩌면 무상 사건도 저 올처럼 조금씩 풀려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네가 무상을 죽였느냐?’라는 질문은 주진무가 사건의 핵심이 접근했다는 반증이었다.

연우강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날 때까지도 주진무는 등을 보인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 무상은,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전하.”

나직했지만 연우강의 목소리는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 네가 살해한 게 아니란 말이냐?”

주진무는 연우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연우강을 보는 주진무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전 연우강이 안으로 들어올 때 거대한 산악이 덮쳐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연우강을 보니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곧 본인의 내기는 물론이고 주변의 기운마저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는 걸 의미한다.

놀라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 대부분 살인은 상당한 이익을 얻거나, 복수를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전 무상을 살해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무상은 친한 친구였습니다.”

“ 그 당시 북로정군은 대승을 거뒀고, 북로정군의 지휘관이었던 양성일은 그 공을 인정받아 북경으로 영전해 왔다.”

“ 제가 그 공을 노리고 무상을 살해했다는 말입니까?”

“ 아니란 말이냐?”

“ 흑랑기에 대해 조사를 하신 것 같은데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 뭘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 흑랑기의 구성원은 대부분 죄수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 알고 있다.”

“ 정천호였던 저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백을상과 무상도 전부 죄수였습니다.”

“ 무상은 죄인이 아니었다.”

“ 물론 무상은 죄인으로 군에 간 것이 아닙니다.”

“ 군에서 죄를 지었단 말이냐?”

“ 흑랑기는 철저하게 죄인들로만 구성돼 있습니다.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더불어 전부 죄수들로만 구성돼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전과를 올렸다고 해도 흑랑기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사면에 불과합니다.”

“ 사면이라고?”

“ 그렇습니다. 전하.”

주진무는 남철진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흑랑기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이 사면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다.

남철진은 아차 했다. 그 또한 주진무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남철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 하, 하지만 모든 일에는 항상 예외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전하. 연우강은 천목장군 양성일과 친분이 두터웠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진무사가 한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진무의 시선이 다시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 전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잡니다.”

“ 하지만 업둥이지, 상속자도 아니고.”

“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는 저를 위해 약간의 푼돈은 얼마든지 쓰실 분입니다.”

“ 돈으로 관직을 살 수 있는데 번거롭게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단 말이냐?”

“ 쉬운 길을 두고 험한 길을 가는 건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대명 제국의 왕야이시고, 황제 폐하의 친동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너는 내 앞에서 돈으로 관직을 산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구나.”

“ 전 현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 현실이 아니라 금릉 연씨 세가가 가진 힘을 자랑한 거겠지. 관직 정도는 우습게 살 수 있는 그런 집안이라고 말이다.”

“ 굳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전하. 그러한 영향력 때문에 대야벌에서 금릉 연씨 세가를 삼키려고 했던 것이니까요.”

“ 맹랑한 놈!”

싸늘한 목소리가 주변 대기마저도 에워싼 듯 실내에 서늘한 기운이 떠다녔다. 주진무 또한 연우강처럼 내기를 이용해 주변 대기까지 조절하는 경지에 이른 초극 고수였던 것이다.

‘ 저건?’

남철진은 경악했다.

그동안 주진무를 만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진무가 무공을 익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여주는 경지는 다 뭐란 말인가?

문득 등에 얼음 벌레가 생겨나 아래쪽으로 기어 내려갔다.

‘ 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놈!’

남철진은 곁눈질로 연우강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주진무의 무공 경지를 짐작하고 있었던 연우강은 남철진처럼 놀라지 않았다.

“ 용건 끝나셨으면 그만 돌아가고 싶습니다.”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 난 무상의 죽음에 대해 계속 조사를 할 생각이다. 연우강.”

“이미 지나간 과거고, 무상은 보위천위장군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전하.”

“ 하지만 죽었지.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참이다. 금릉 연씨 세가를 몰락시켜야 한다면 몰라시킬 테고, 네가 피신시킨 네 어미와 아비를 없애야 한다면 없앨 거다. 아니 대명 제국을 뒤집어엎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밝힐 참이다.”

“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지금껏 태연하기만 하던 연우강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더불어 그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주진무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밀어내고 실내를 가득 채웠다. 이번엔 주진무가 뿌린 싸늘함이 아니라 진득한 살기가 실내에 요동쳤다.

“ 무엄하다, 놈. 그분은 대명 제국 왕야이시다! 어딜 감히 눈을 부릅뜨느냐?”

주진무와 연우강을 지켜보던 천해장군 철리목이,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실내를 가득 채우자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연우강은 철리목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주진무를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대답해 주십시오. 전하. 지금 저를 협박하신 게 맞습니까?”

“ 이놈이 그래도?”

철리목은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검손잡이가 잡혀들자 사정없이 뽑았다.

차르르!

하지만 그의 검이 뽑히는 속도보다 연우강의 손목에서 풀려나온 사망묵환이 더 빨랐다. 얇은 사망묵환의 날은 순식간에 철리목을 감아 돌았다.

“ 헉!”

철리목은 질겁했다.

손을 뻗기도 전에 섬뜩한 살기를 뿌려대는 연검이 목을 감고 있었다. 워낙 빨라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연우강이 당기기만 하면 곧바로 목이 잘려나갈 판이었다.

창! 창창!

질겁한 사람은 철리목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세 사람 또한 검을 뽑아들고 연우강을 향해 살기를 쏟아냈다.

“ 잘 들어, 영감. 당신에게 왕야가 당신 목숨보다 소중한 것처럼 내 가족은 내게 목숨보다 더 소중해. 남의 가족 일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영감 목을 감고 있는 검의 재질은 만년오금철이야. 어쭙잖은 내공으로 막아보겠다는 생각이라면 포기해!”

“ 내 목을 자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봤느냐?”

이내 본래의 얼굴을 찾은 철리목이 차분하게 응대했다. 하지만 차분한 건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연우강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서는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난 전쟁터에서 수만 명을 죽였고, 중원에 들어와서도 대야벌과 싸우면서 수천 명을 죽였어. 그 수천 명 속에 한 놈이 더 추가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영감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왕야가 아니라 나라는 걸 명심해. 그리고 숨도 쉬지 마, 숨만 쉬어도 당겨버릴 테니까, 이렇게.”

연우강은 오른손을 슬쩍 끌어당겼다.

지잉!

사망묵환에서 나직한 울림이 흘러나오는 듯하더니 철리목의 목을 감싸고 있던 옷깃이 떨어져 내렸다.

움찔!

철리목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연우강이 정말로 오른손을 당겨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와락 겁이 났다. 철리목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 그래, 그렇게 해야 해. 영감. 모처럼 세상에 나왔는데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잖아.”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다시 주진무를 보았다.

“ 황족을 향해 무기를 뽑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느냐?”

연우강이 검을 뽑아 철리목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진무의 얼굴은 태연했다.

“ 우리 흑랑기에는 내일이란 말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집안에 강도가 들고 그 강도가 부모님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저는 강도의 신분에 상관없이 일단 죽여놓고 봅니다.”

“ 내가 강도란 말이냐?”

“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금의위에서 무상 사건을 들쑤시고 다닌다면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 일은 들쑤셔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 그 말을 한 사람이 이자승이더냐?”

“ 그분은 무상의 죽음은 본질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상 사건을 들쑤시고 다니는 자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권력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주무상 사건으로 인해 피 바람이 몰아칠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 피바람은 금릉 연씨 세가에까지 불어올 거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 내가 무상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이유가 권력 때문이란 말이냐?”

“ 그래서 전 그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정작 무서워할 사람은 권력을 얻기 위해 무상의 죽음을 파헤치는 그들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분은 제게 또 물었습니다.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 누구냐고요.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 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연우강!”

파악!

내공을 실은 듯 주진무의 목소리가 미치는 곳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한쪽 구석에 장식처럼 세워진 도자기가 산산이 부서지며 나는 소리였다.

“ 개독새 연우강이라고 했습니다. 전하. 개독새 연우강은 지금도 밤이면 전쟁터를 헤매고, 아침이면 기상나팔 소리에 맞춰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연우강이 천이백 명의 부하를 사지에 밀어 넣고도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건 재앙덩어리가 될 지도 모르는 업둥이를 기꺼이 받아주었던 그분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자살하고 말겠다며 십뢰를 품고 다니면서도 자살하지 못한 것도 그분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개독새 연우강에게 그분들은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연우강은 목을 걸고 막을 거라고 했습니다. 백이 됐든, 천이 됐든, 만이 됐든, 혈도부대 일천 명을 혼자 없앴던 그때처럼 전부 죽일거라고 했습니다. 금의위를 없애야 한다면 그들을 전부 죽일 테고, 동창을 없애야 한다면 그들도 전부 죽일 거라고 했습니다. 구림세가를 없애야 햔다면 그렇게 할 거라고 하였고, 북경을 지워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할 거라고 했습니다. 누가 됐든 개미새끼 한 마리 남지 않도록 완전하게 지워버릴 거라고 했습니다. 개독새 연우강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주진무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자신의 면전에서 금의위, 동창, 구림세가를 아니 황족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고 지워버리겠다고 공언하는 자는 처음이었다.

아니 황야인 자신 앞에서 반역을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 거나 다름없다.

만일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놈은 전혀 광오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주진무는 연우강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 제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눈에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 무상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권력다툼에 그를 끌어들이지 말아주십시오.”

연우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이미 화살은 쏘아졌다. 연우강. 네가 말을 하든 말든 난 무상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녀석의 말이 맞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무상의 죽음이 아니라 황실의 권력이다. 무상의 죽음에 대한 건이 아니었더라면 남경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간신히 남경을 떠나왔는데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더구나 지금은 승기를 잡은 상황이 아닌가.

“ 그럼! 다시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차르르!

연우강은 철리목의 목을 감고 있던 사망묵환을 거둬들였다.

털썩!

사망묵환에서 풀려나자 철리목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황족 앞에서, 아니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는 왕야 앞에서 저렇게 행동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미친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철리목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때 연우강은 주진무를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 무슨 의미냐?”

“ 무상의 아버지께 올리는 절입니다. 마지막 절이 될 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절을 마친 연우강은 다시 주진무를 보았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 이곳을 나가는 순간부터 제 주변을 조사하고 다니는 자들은 신분여하를 불문하고 전부 죽일 것입니다. 전하.”

“ 금의위가 바빠지겠구나.”

“ 바쁘게 뛰어봐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버릴 작정이니까요.”

연우강은 바로 앞에 있는 탁자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가공할 열기가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천마삼장의 하나인 혈잔수였다.

풀썩!

상당히 큰 탁자임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재로 변해 흩어졌다.

“ 전하, 저놈을 당장 체포하게 해주십시오!”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었던 듯 남철진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고개를 숙인 남철진의 얼굴은 굴욕감으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때 정천호였따고 하지만 연우강은 양민이고 주진무는 황족이다.

같은 눈높이로 대화를 한다는 것조차도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연우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황족을 모욕했을 뿐 아니라, 대놓고 하진 않았지만 협박까지 일삼고 있다.

그런 놈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 나도 백 번 그렇게 하고 싶다. 진무사.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숙이며 재차 소리쳤다.

“ 머리는 장식으로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굴리라고 있는 거다, 남철진.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아라!”

귓전으로 연우강의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남철진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어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 죽일 놈이 감히!”

“ 그래서 넌 금의위 영반 재목이 아니라는 거야, 인마. 금의위 영반이란 사소한 것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넌 그게 없어. 넌 그 자리가 가장 어울리는 놈이야.”

“ 개자식!”

남철진은 벌떡 일어났다.

“ 진무사!”

엄한 목소리가 주진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전하!”

남철진은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자중해라!”

“ 황공하옵니다.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진무의 시선이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문득 사람을 여러번 놀라게 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의 무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라 있다. 소위 황실에서 무공 좀 한다는 무인들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무공을 알아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연우강이 들어올 때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 말은 곧 연우강의 무공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는 의미다. 서른도 되지 않는 녀석이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어지는 행동엔 비교가 무색했다. 황족을 대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협박까지 해댔다. 물론 본인의 무공을 믿고 그런 행동을 하는 거라면 놀랄 이유가 없다. 무공보다 더 강한 권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무공을 믿고 그런 게 아니었다.

주진무가 놀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 너는 내가 너를 체포하지 못한다고 한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구나.”

“ 그렇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제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지금 당장은 체포할 수 없습니다.”

“ 이유를 묻는다면?”

“ 지금 전 황실에서 부리는 사냥개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 황실에서는 네게 사냥을 하라고 한 적이 없다.”

“ 시키지 않았는데 알아서 해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멈추게 되면 황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테고, 지금보다 훨씬 강해진 대야벌을 상대해야 하겠지요.”

‘ 맙소사!’

남철진은 내심 신음을 뱉어냈다.

주진무가 체포할 수 없다는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다. 현재 대야벌과 싸우고 있는 유일한 자.

겉보기에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우강은 지금껏 그를 공격했던 대야벌의 모든 세력을 초토화시켰다. 금의위에서도 대야벌의 대항마 중 하나로 연우강을 점찍었는데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였다.

“ 네 스스로 사냥개라고 했으니까 하는 말이다만, 혹시 토사구팽이란 말을 아느냐?”

“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넌 그렇게 될 것이다. 그건 내가 약속하겠다.”

“ 그럼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둬야겠군요.”

“ 대명 제국 안에서는 황실의 눈을 피해 도망칠 곳은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 아닙니다. 전하. 황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이 단 한 곳 있습니다.”

“ 그건 네 생각일 뿐이다. 연우강, 대명 제국은.....”

“ 대야벌입니다. 전하. 대야벌에 틀어박혀 있으면 제아무리 황실이라고 해도 절 해칠 수 없습니다.”

“ 대야벌의 힘이 널 구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더더욱 바보 같은 생각이다.”

“ 단순히 틀어박혀 있는 게 아닙니다. 천상천에서 거들먹거리며 대야벌의 대소사를 관장하게 될 겁니다.”

“ 벌주가 되겠단 말이냐?”

“ 방금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전하.”

“ 가능할 거라고 보느냐?”

“ 열심히 노력을 해야겠지요. 아마 제가 벌주가 되면 대야벌은 중원 상계와 새외를 합친 명실상부한 최고의 세력으로 거듭나게 될 겁니다. 그럼 황실에도 많은 변화가 올 겁니다. 가장 먼저 황제 폐하께서는 북경의 관리들보다 대야벌 벌주의 말을 더 신뢰하게 될 겁니다. 물론 전폭적인 신뢰가 아니라 신뢰하는 척하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야벌 벌주가 누군가의 머리를 잘라달라고 부탁을 하면 일언지하에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 그럼 난 선택을 해야겠구나. 담대만승에게 네 의도를 알릴 건지 아니면 두고 볼 건지를 말이다.”

“ 저 같은 두고 보는 쪽으로 택하겠습니다.”

“그건 나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구나.”

“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연우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만 나가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 난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연우강.”

주진무는 차갑게 소리쳤다.

주진무의 매서운 모곳릴에 사장군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출입문을 막아섰다.

“ 귀랑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 정녕!”

주진무의 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 사막 폭풍 작전에서 죽은 자는 무상뿐만이 아닙니다. 전하. 천이백 명이나 되는 흑랑기가 몰살을 당했습니다. 비록 죄수였고 흑랑기 아니면 갈 곳이 없는 녀석들이었지만, 무상에게 전하가 있었던 것처럼 그놈들에게도 아비와 어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기억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무상 곁에 그들이 있었다는 것도 생각해 주십시오. 가자 귀랑.”

연우강은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었다. 연우강이 다가오자 문을 막고 있던 네 명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나 지금 기분 더러워, 영감들. 날 막으면 내일부터는 남경왕 전하가 아니라 저승으로 가서 무상의 호위를 서야 할 거야.”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면 새파랗게 벼린 칼날과 같은 살기가 연우강 주변에서 일렁였다.

“ 건방진 놈! 무공 좀 익혔다고....”

조금 전 당했던 굴욕을 보상받으려는 듯 천해장군 철리목이 연우강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러자 그의 검 끝에서 투명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 길을 트게.”

“ 전하!”

천해장군 철리목은 주진무를 보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엔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 한 가지만 대답하고 가거라.”

하지만 주진무는 철리목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그저 연우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 말씀하십시오.”

“ 군에 있을 때도 지금처럼 강했느냐?”

“ 아닙니다. 흑랑기에서 가장 강자는 괴랑 류사은이었고, 그 다음은 유랑 주무상이었습니다. 전 세 번쨉니다.”

“ 그럼 대야벌에 들어가서 기연을 얻었다는 말이구나.”

“ 북경에 억류돼 있는 사마윤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인간이란 반드시 허점을 남기게 된다, 연우강.”

“ 결코 허점을 보이지 마십시오. 전하. 허점이 보이면 전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그 허점을 향해 사망절혼가를 불러댈 겁니다. 그럼!”

연우강은 무심하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으음!”

연우강의 모습이 사라지자 주진무는 의자로 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 저대로 두실 겁니까?”

철리목은 주진무 곁으로 다가오며 소리쳐 물었다.

억울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명령만 내리면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목숨을 걸 생각이었다.

“ 지금까지 녀석과 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 정말로 대야벌 때문에 놈을 손대지 못한다는 겁니까?”

“ 나의 주적이 녀석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없앴을 거네. 하지만 녀석은 나의 주적이 아니네. 오히려 녀석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내게도 도움이 되네.”

“ 하면 왜 그렇게......?”

힘이 없느냐는 물음이었다.

분명 토사구팽시킬 거라는 경고도 했다. 그런데 주진무의 얼굴은 패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남철진, 너는 계속 사건을 조사해라.”

주진무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남철진을 보며 말했다.

“ 연우강을 비롯한 그들을 체포하지 못하면 사건을 풀 수가 없습니다.”

“ 연우강은 네가 금의위 영반 재목이 아니라고 단정을 짓더구나.”

“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 풀어라, 그걸 풀지 못하면 넌 정말로 금의위 영반이 될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주진무는 단호하게 말했다.

“ 알겠습니다. 전하. 반드시 사건을 해결하겠습니다.”

남철진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 그리고 연우강과 함께 왔던 자들은 물론이고 북경에 억류돼 있는 사마윤도 풀어줘라.”

“ 알겠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전하!”

남철진의 발걸음 소리가 아래층으로 멀어지자 철리목은 다시 주진무를 불렀다.

“ 녀석은 처음부터 내가 손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네. 즉 꼭두각시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그런 녀석이 아니라는 말이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더 무서운 것은 녀석에게는 그 어떤 협박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네. 천해. 무공은 나와 비슷하거나 더 강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고,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공명심도 없네. 약자를 도와 좋은 제상을 만들겠다는 정의감도 없고, 국가를 향한 애국심도 없네. 강호 무림이 사라지든, 대명 제국이 멸망하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단 말이네. 그것뿐이라면 괜찮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놈은 삶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거네.”

뭔가 바라는 게 있고, 뭔가를 얻어내려고 해야 싸움이 되는데 놈에게는 그런 게 없다. 즉 싸움을 하긴 하는데 목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목숨을 건다.

녀석은 가장 상대하기 힘든 적의 전형이었다.

“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 그의 가족 말인가?”

“ 그렇습니다. 전하. 연금석 일행을 잡으면 놈을 잡을 수 있습니다.”

“ 그렇지.”

주진무는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이 했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렇지만.....

‘ 다시 남경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주진무는 결단을 내렸다.

“ 주산군도를 샅샅이 뒤지게.”

“ 그곳에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 녀석은 공식적으로 호남에 있는 걸로 돼 있네. 그랬던 녀석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제 부모밖에 없겠지.”

권력의 최정점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운으로만 되는 게 아니었다. 주진무는 연우강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단숨에 꿰뚫어보았다.

“ 찾아내면 어떻게 할까요?”

“ 일단은 감시만 하고 있게.”

주진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성 앞 공터에는 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는 시선을 왼편으로 주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대여섯 개의 횃불이 밝혀진 옥문 앞이었다. 그곳에는 연우강이 금의위 위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네가 공을 가로채기 위해 무상을 살해한 게 아니라는 걸 오늘 확인했다. 연우강. 그렇다고 해도 네가 무상을 살해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난 무상의 죽음을 이용해서라도 북경을 장악할 것이다. 반드시.’

주진무는 지그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 풀어줘라!”

남철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주진무는 몸을 돌렸다.

“ 알겠습니다. 진무사.”

금의위 위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 사마윤은 어디에 억류돼 있지?”

연우강은 옥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북문 근처 청와객잔에 머물고 있다.”

잠시 망설이던 남철진은 대답했다.

“ 너도 마찬가지야, 남철진.”

“ 뭐가 마찬가지란 말이냐?”

“ 너도 나처럼 사냥개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이야. 우리 둘이 다른 점은 내 목에는 목줄이 없고, 네 목에는 튼튼한 쇠줄이 걸려 있다는 거지.”

으드득!

남철진은 연우강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한 자 한 자 짓씹듯 뱉었다.

“ 허점을 보이지 마라, 연우강. 티끌만한 허점이 보이면 바로 네놈의 목을 칠 것이다.”

“ 넌 날 이길 수 없다. 남철진. 왠지 아느냐? 넌 출세를 위해 싸우지만 난 싸움을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성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음을 옮기는 순간 감옥 안에 갇혀 있던 자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앞서가는 연우강을 쫓아 성을 나섰다.

성을 나선 일행은 선착장으로 가서 배에 올랐다.

“ 전장사!”

황만을 완전하게 벗어나자 연우강은 전장사를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태상!”

“ 이곳에서 백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어디지?”

“ 전서구를 비치해 두고 있습니다.”

“ 당장 철수 준비를 시켜.”

“ 처, 철수준비란 말입니까?”

전장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야반도주를 해야 하니까 서둘러야 해.”

전장사는 연우강 옆에 있는 몽요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몽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알겠습니다. 태상.”

전장사는 급하게 전서구를 둔 선실로 향했다.

“ 귀노!”

“ 하명하십시오, 장주님.”

“ 귀노는 뱃길을 아는 자들을 데리고 다시 섬으로 가.”

“ 어디로 모실까요?”

염자생은 연우강이 섬으로 가라는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 얼굴을 바꿔서 야장으로 모셔.”

“ 대야벌로 모신단 말입니까?”

“ 동영으로 간다고 해도 돌봐줄 사람이 없잖아.”

“ 그렇다고 해도 대야벌은?”

“ 지금 중원에서 대야벌보다 안전한 곳은 없어, 귀노!”

“ 알겠습니다. 장주님. 그분들을 모시고 나서 전 어디로 가면 됩니까?”

“ 군산으로 갈 거야.”

“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염자생은 조금 전 전장사가 간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 넌 어떻게 할 거냐?”

연우강은 우두커니 서 있는 백상을 보며 물었다.

“ 상대는 대명 제국의 왕야입니다. 광랑.”

“ 싸움을 건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다, 귀랑.”

“ 정말로 벌주가 될 생각입니까?”

백상은 강물로 시선을 떨구며 물었다.

“ 대야벌은 천오백 년에 걸쳐 성장한 문파다. 내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벌주가 될 순 없다. 그건 나도 알고 무상 아버지도 안다.”

“ 그럼 벌주가 되겠다고 했던 건 뭡니까?”

“ 대야벌과 싸우는 방식을 바꾸겠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외부에서 대야벌을 부쉈지만, 앞으로는 대야벌을 부수지 않는 상태에서 싸움을 하겠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황실은 사냥개를 잃게 된다. 그건 무상 아버지도, 황실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 사실대로 밝히는 건 어떻습니까?”

“ 무상 아버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무상 사건의 본질은 권력 암투다. 귀랑, 무상이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면 정말로 피바람이 불거라고 보십니까?”

“ 무상 아버지가 남경을 떠나지 않았다면 난 어쩌면 그를 찾아가 사실대로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무상의 죽음에 대한 의문점이 발견되자마자 북경으로 들어갔다. 무상사건을 발판 삼아 잃었던 권력을 되찾으려는 거지. 그리고 금의위를 수족처럼 부리게 됐으니까 어느 정도 성과도 이뤘다고 봐야 하고,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거야. 만일 그런 상황에서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봐.”

“ 기다리는 건 파멸이군요.”

“ 맞아. 어느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를 기다리는 건 영광이 아니라 파멸이야. 그럼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묻을 거란 말입니까?”

“ 그렇다. 귀랑. 그는 그 사건을 영원히 묻어 버리려고 할 거다. 그 사건을 완전하게 묻으려면 사막 폭풍작전에서 살아왔던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와 접촉했던 사람들, 즉 가족도 전부 묻어야 한다. 더 지랄 맞은 것은 그 진실을 황제가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온다는 거야.”

“ 황제는 황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사건을 묻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 무상에게 보국천위장군이라는 시호를 내린 사람이 황제이니까.”

“ 결국 진실은 화를 더 키울 거란 말이군요.”

“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에서 피는 잔인함이 아니라 가족을 말하는 거야. 가족조차 벨 수 있는 게 권력인데 나와 상관없는 자를 베는 건 일도 아니지.”

“ 그렇군요.”

백을상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 이거 받아라.”

눈앞으로 하얀 전표가 불쑥 다가왔다.

“ 뭡니까?”

전표라는 걸 왜 모를까. 하지만 전표를 주는 의도가 궁금했다.

“ 먼저 객잔에 들러 목욕을 하고 머리를 잘라, 그리고 최고급 옷으로 사입어. 그런 다음에 북경으로 가서 사마윤을 데리고 악양으로 와.”

“ 함께 하잔 말입니까?”

백을상은 시선을 내려 연우강을 보았다.

“ 죽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이걸로 해결해 줄 테니까.”

연우강은 오른손 손목의 사망묵환을 가리켰다.

“ 무상도 그걸로 벤 겁니까?”

“ 단 죽여달라고 말하기 전에 진기를 역류시켜야 하고 스서로 눈도 뽑아야 해.”

“ 큭!”

백을상은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진실.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자살이었던 것이다.

“ 알겠습니다. 광랑.”

백을상은 전표를 받아들더니 갑판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 더 강해졌네.”

제비처럼 물을 박차고 멀어지는 백을상을 지켜보며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 그걸 사용하면 쉽게 해결되지 않나요?”

여태 연우강과 백을상을 지켜보고 있던 몽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우강이 맡긴 금책과 금인을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곳은 옥 안에서였다. 연우강이 끌려나가고 나서 금책과 금인에 대해 생각하다가 전에 금릉 연씨 세가에서 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선망암부주공선엽영가.

선망자모유씨은설영가.

행 우강 복위.

본관을 적지도 않고 씌여 있던 위패. 그 위패 덕분에 연우강의 본래 성이 주씨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오갔던 몇마디 대화들.

그때 연우강에게 혹시 황족이 아니냐고 물었었고, 연우강은 그럴 리가 있느냐며 웃었다. 그리고 지금은 ‘안정군왕 주인문.’이란 직책이 새겨진 금채과 금인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은 곧 그가 황족이라는 의미가 된다.

“ 그거라면 금책과 금인을 말하는 거예요?”

“ 네.”

몽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소중한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 뭘 잃게 된다는 거죠?”

“ 제가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들.”

“ 우강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거라면, 부모님과 가족들밖에....”

몽요는 말끝을 흐렸다.

그랬다.

금책과 금인을 이용해서 본래의 성을 되찾는 순간 그는 부모님과 가족을 잃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를 알고 있는 모두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연우강은 금릉 연씨 세가의 업둥이지만 주우강은 황족이 된다. 지금껏 불려왔던 우강 대신 저하란 호칭을 사용해야 하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아니 심하면 무릎을 꿇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공대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자식이라고 부를 것인가?

주씨로 바뀌는 순간 그들과 연우강은 남남이 되고 말 것이다.

“ 아주 가끔이 될지도 모르지만 전 어머니가 아들에게 해주시는 소고기 볶음을 먹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연우강은 먼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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