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11화 (111/232)

제 2장 영웅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무림이 혼란해질수록 근거 없는 소문이 들끓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무림이 들끓었다.  그것은 천마에 대한 소문이었다.

‘ 이세 천마가 나타났다!’

‘ 그는 고금제일인이다.’

‘ 그는 백발이며 시종을 거느리고 있다.’

‘ 명예를 얻고자 하는 자, 본인의 무공을 시험하고자 하는 자, 천마에게 도전하라!’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무려 천오백 년 동안 전설로만 오르내렸던 사람.

마의 조종이라고까지 불리는 자의 제자가 나타났다고 하였으니 설사 소문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들은 길을 나섰다. 그들 중에는 강한 무공을 지니지 못한 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굳이 이세 천마라는 자와 비무를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무공 증진에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세 천마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이었다.

“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담대만승은 만우량을 보며 물었다.

“ 아직은 확인된 바 없습니다.”

“ 그 소문을 들은 지 보름이 지났네, 뇌천.”

“ 율령궁이 강호 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생쥐박멸작전’에 동원된 상황이라 다른 곳으로는 눈돌릴 새가 없단 말인가?”

“ 호남에서는 약간 고전하고 있는 듯합니다.”

“ 고전?”

“ 하오밀문이 조직적으로 반발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지금까지와는 달라졌다는 건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다른 곳과는 달리 호남에서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 그랬군. 그건 그렇고, 자네 생각은 어떤가?”

“ 그 자가 정말로 이세 천마냐는 물음이십니까?”

“ 그렇네.”

“ 그가 천마 본인이든 이세 천마든 현 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우리 대야벌에서는 천마의 무공을 익힌 자를 강호 공적으로 지목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군.”

“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 하면?”

“ 무림 공적으로 선포하게 되면 대야벌에서 그자를 이세 천마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 역효과가 난단 말이군.”

“ 그렇습니다.”

“ 그래서 아예 모른 척하란 말인가?”

“ 비공식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비공식적이라면?”

“ 마침 잠룡강호행이 마무리 돼 잠룡들이 벌 내로 들어와 있습니다. 아직 기간이 남았는데 딱히 할 일도 없고요.”

“ 잠룡들을 내보내란 말인가?”

“ 아예 잠룡대를 구성해서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 삼합평에서 꽤많은 잠룡들이 죽은 걸로 알고 있네.”

“ 생사림과 전투에서 살아남은 잠룡들은 백이십 명가량입니다.”

“ 그 중 잠룡 십 조를 빼면 육십 명이 조금 넘는 건가?”

“ 오 조와 육 조, 팔 조는 인원 변동은 없습니다. 다만 잠룡 팔 조 조장이었던 나천후가 실종됐습니다.”

“ 실종?”

“ 해남 남십자성으로 향하던 도중에 대열을 이탈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범천조화신기를 얻기 위해 동정호로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한 모양입니다.”

“ 그럼 잠룡 십 조만 돌아오지 않은 건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 그러면 이백 명 가량이구먼. 우선은 잠룡 십 조를 뺀 인원으로 잠룡대를 구성하도록 하게.”

“ 이번에는 얼굴을 한 번 비춰주는 게 어떻습니까?”

“ 상이라도 주란 말인가?”

“ 상을 받을 정도로 큰일을 해냈습니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먼. 준비는 자네가 해주게.”

“ 알겠습니다. 벌주님. 날짜는 사흘 후로 잡겠습니다.”

만우량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삼일 후.

이른 아침부터 대연무장으로 각 세력 소속 무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대연무장은 야장과 승천비고 사이, 즉 사람인 변의 위쪽 부분에 위치해 있다.

동서남북 네 곳에는 패천십관으로 들어가는 곳에 세워진 것처럼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문이 세워져 있다. 그 문을 통과한 무인들은 각 문파의 팻말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서 줄을 맞춰 섰다.

이른 아침부터 꾸역꾸역 몰려든 무인들은 해가 떠오를 즈음하여 대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줄을 맞춰 선 무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단상 앞으로 놓여진 의자였다. 약 삼백 개 남짓 되는 의자가 오와 열이 맞춰진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뿌우! 뿌우! 뿌우!

느닷없이 대연무장 남쪽으로부터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 오!”

“ 아!”

무인들의 입에서 탄성과 감탄사가 교차했다.

나팔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자들은 잠룡강호행을 나갔던 잠룡들이었다.

“ 등천대룡이다!”

잠룡들의 선두에 서 있는 담대무궁을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 유명계에게 왼팔을 잃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구먼.”

권력을 쥔 자들이 지어낸 소문은 설사 거짓이라고 해도 진실로 변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 모인 무인들 중 일부는 담대무궁이 팔을 잃은 장소가 동정호 지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금세 묻혀버리고 삼합평에서 유명계와 싸우다 팔을 잃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거짓 소문은 금세 대야벌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제 범천조화신기를 얻기 위해 싸우다가 팔을 잃었다는 진실은 거짓이 됐다. 헛소문에 진실이 먹혀버리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진실을 알고 있던 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명계에게 팔을 잃었다는 소문이 거짓이라고, 잘못된 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만일 악의적인 소문이었다면 열변을 토해서라도 진실을 밝혔을 테지만, 소문은 담대무궁에게 해가 가는 소문도 아니었고, 소문의 당사자가 현 벌주의 아들이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자식 일에 왈가왈부하여 공연히 눈 밖에 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담대무궁의 팔을 잘라낸 사람은 유명계로 굳어졌다.

“ 등천대룡이 유명계의 목을 잘라내지 않았더라면 잠룡들은 전멸당했을 거라고 하더구먼.”

“ 등천대룡은 동귀어진 수법으로 유명계의 목을 잘라냈다네.”

소문은 소문을 낳고, 옮겨갈 때마다 부풀려지고 과장된다는 말이 맞았다. 어느새 담대무궁은 대야벌 부인들 사이에 영웅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 쿡!”

담대무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기분 좋은 모양이군.”

약간은 비아냥대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담대무궁은 고개를 돌렸다. 비릿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자는 윤허였다.

“ 내가 소문을 낸 것도 아닌데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 아버지가 낸 소문이라도?‘

“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당연한 거네. 하지만 능력도 없고, 궁상맞은 녀석이라면 설사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해도 함부로 키워주지 못한다네. 아버지가 아무리 키워주려고 해도 주변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거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키워줄 만하니까 키워주는 거네.”

“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면 기분 좋은가?”

“ 자네와 내가 다른 점이 뭔지 아는가?”

담대무궁은 되물었다.

“ 자네 아버지는 대야벌이라는 거대 단체의 벌주고 내 아버진 이름 없는 촌부라는 사실이 다를 거네.”

“ 아니네, 윤허. 우리 둘의 다른 점은, 나는 내가 가진 외적인 잇점. 즉 아버지의 권력이라든가, 내 무공 그리고 나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자들의 의도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이용하지만, 자네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네. 물론 나처럼 하면 낯이 뜨거울 수도 있네. 하지만 세상일에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한순간의 부끄러움은 극복될 수 있다네.”

“ 자네를 영웅으로 만들려는 자들 또한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건가?”

“ 그렇다네. 윤허! 저들이 영웅을 만들어내는 건 영웅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들을 위해서라네. 난 영웅이 돼서 좋고, 저들은 영웅을 만들어냄으로써 이익을 얻어서 좋고, 서로가 좋은데 굳이 잘못됐다고 해서 판을 깰 필요가 없지 않은가.”  었다.

담대무궁은 단상 뒤편 천막에 있는 자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아야겠구먼.”

“ 원래 있는 집안 자식들은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철판이 깔려 있다네. 일단 앉지.”

담대무궁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잠룡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단상으로 대야벌 수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먼저 단상 앞으로 나온 자는 잠룡궁의 궁주 천기만리통 혁세군이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러분!”

크게 말을 뱉었다고 하지만 혁세군의 목소리는 뒤쪽에 있는 무인들에게 들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 보게, 윤형. 우리 뒤에 있는 무인들 중 혁 궁주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자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담대무궁은 옆에 앉은 윤허를 보며 전음으로 물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 앞쪽에 서 있는 자들만 혁 궁주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네.]

[ 뒤쪽에 서 있는 자들은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앞에 있는 자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자들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 이 년 전 우리는 잠룡을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이번 기수는 역대 어느 잠룡들보다 많은 일들을 겪었으며 큰일을 해냈습니다. 해서 본인은 잠룡궁의 궁주로서 벌주님께 청을 드렸습니다. 유명계를 비롯하여 이천의 밀천 무인을 전멸시킨 잠룡들에게 상을 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벌주님께서도 기꺼이 허락하시어 이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혁세군은 이 자리를 마련한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 그렇다네.]

혁세군을 흘끔 쳐다보던 담대무궁은 다시 전음을 보냈다.

[ 꽤나 위험한 사상이군.]

[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네. 그게 바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니까.]

“ 그 중에서도 등천대룡 담대무궁의 활약은 큰상을 내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 당시 잠룡은 삼백오십 명에 불과했고, 적은 이천이었습니다. 하지만 등천대룡 담대무궁은 삼백오십 명의 잠룡들을 지휘하여 이천의 적을 전멸시켰습니다. 이는 전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공으로 우리 잠룡궁에서는 그에게 최고 평점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군.]

혁세군의 연설을 듣고 있던 윤허가 비아냥댔다.

[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당당하게 상을 받겠다는 말인가?]

담대무궁을 치장하기 위한 혁세군의 연설은 계속 이어졌지만 윤허는 듣지 않았다. 문득 담대무궁을 향해 무차별하게 주먹을 휘두르던 연우강이 떠올랐다. 아마도 녀석은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전후 관계를 밝히는 것 대신 주먹을 휘두른 것이었다.

[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는 건데,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 등천대룡 담대무궁은 앞으로 나와라!”

그때 담대무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빨리 터득할수록 편하게 살 수 있다네, 윤허.]

담대무궁은 윤허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단상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 혁세군이 서 있던 자리에는 벌주이자 그의 아버지인 담대만승이 서 있었다.

담대무궁은 단상으로 올라가 섰다.

“ 먼저 나는.....”

담대만승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혁세군과 달리 내공이 잔뜩 실린 그의 목소리는 대연무장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 잠룡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전에 제군들에게 슬픈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제군들도 삼합평에서 있었던 밀천과의 전투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우린 그곳에서 대야벌을 배신하고 밀천으로 들어간 마수귀의 유명계와 그가 이끄는 밀천 무인 이천 명을 없애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그 전투로 많은 잠룡들을 잃었다. 나는 먼저 무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잠룡들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담대만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문 쪽에서 흘러나온 나팔소리가 대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의자에 앉아 있던 잠룡들이 일제히 일어나 묵념을 했다. 잠룡들이 고개를 숙이고 뒤이어 무인들과 단상에 자리해 있던 수뇌들이 고개를 숙이자 대연무장에는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묵념은 반 각 가량 이어졌다.

나팔소리가 끝나자 담대만승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많은 잠룡들을 잃었지만 우린 대승을 거뒀다. 아군은 삼백오십 명에 불과한 반면에 밀천 무인의 수는 이천 명이었다. 그런 엄청난 수의 적을 전멸시킨 잠룡들을 나는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적장인 마수귀의 유명계의 목을 자른 등천대룡 담대무궁에게 상을 내리기로 하였다.”

담대만승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만우량이 비단으로 싼 물건을 건넸다. 척 보기에도 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담대만승은 천을 풀어냈다.

‘ 저건?’

담대만승을 지켜보던 공손정우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풀린 천 사이로 드러난 검의 검집에는 뇌전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담대만승이 부상이라며 담대무궁에게 주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그의 애병인 무적뇌화검이었던 것이다.

“ 나는 잠룡들이 처음 대야벌로 들어오던 날, 최고의 성적을 거둔 잠룡에게 이 검을 상으로 내릴 결심을 했다. 담대무궁이 내 아들이라서 이 검을 내리는 게 아님을 알아줬으면 한다. 받아라, 담대무궁.”

담대만승은 무적뇌화검을 내밀었다.

“ 감사합니다. 벌주님. 대야벌의 발전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검을 받아든 담대무궁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흥!’

공손정우는 내심 조소를 흘렸다.

말로는 잠룡들이 처음 대야벌로 발을 들여놓은 날 무적뇌화검을 상으로 내릴 생각을 하였다고 하지만, 과연 최고 성적을 거둔 잠룡이 담대무궁이 아니었더라도 저렇게 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무적뇌화검을 내린 것은 그의 아들을 좀더 돋보기에게 하는 장치일 뿐이다. 아니 은연중에 자신의 후계자가 담대무궁이란 사실을 대야벌 무인들에게 공표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담대천호를 보았다.

담대천호 또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요, 벌주.’

공손정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 밀천과의 전쟁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만일 잠룡들이 명령체계가 제대로 서고, 지휘관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면 그런 엄청난 희생이 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해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 기간 동안에라도 잠룡들을 하나의 단체로 묶기로 했다. 단체의 이름은 잠룡대다. 잠룡대의 대주는 등천대룡 담대무궁이 맡을 것이며, 나머지 잠룡들은 그 휘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담대만승의 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 아울러 잠룡대가....”

“ 질문이 있습니다. 벌주님!”

나직한 목소리가 담대만승의 연설을 막았다.

잠룡들은 물론이고 단상에 있던 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쏠렸다. 벌주의 말을 중간에 끊는 것은 무례와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장 중의 한 명인 이지약이었다.

얼굴로 와서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이지약은 태연한 얼굴로 담대만승을 보았다.

“ 질문이 있다고 했느냐?”

담대만승은 이지약을 지그시 보았다.

“ 그렇습니다. 벌주님.”

“ 말하라.”

“ 잠룡대로 들어가는 건 강제 사항입니까?”

“ 교육이 끝날 때까지만이다.”

“ 그럼 잠룡 십 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잠룡 십 조 조장인 연우강은 조원들 가문을 돌면서 밀린 외상값을 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연우강은 외상값을 받는 걸 잠룡강호행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그대로 둘 참이다.”

“ 하하하!”

“ 클클클!”

“ 쿡쿡쿡!”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지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의도적으로 연우강의 흠집을 내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말이 맞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담대무궁을 영웅으로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 내가 알기로는 삼년 동안의 성적을 바탕으로 평가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로 보면 평가는 끝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남았다. 잠룡대는 그 일을 좀더 편하게 하기 위한 임시 단체에 불과하다.”

“ 등천대룡 담대무궁을 범천룡으로 내정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 그렇다. 소명공주.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십지십룡을 비롯한 범천룡은 올해 말이나 돼야 발표될 것이다. 대답이 됐느냐?”

“ 알겠습니다. 벌주님.”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 말고도 질문할 게 많았다. 잠룡 일 조는 오십 명 중 생존자가 일곱 명밖에 되지 않고, 유명계의 목 또한 어부지를 통해 취했는데 그가 왜 최고 평점을 받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연우강이 원하지 않았고, 설사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결정을 번복할 자들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 좋다. 그럼 임무를 내리겠다. 지금 강호에는 이세 천마라는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으로 혼란스럽다. 그자를 생포하여 강호의 혼란을 종식하는 게 그대들에게 주는 마지막 임무다. 최종 평가는 그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부터 질문을 받겠다.”

하지만 잠룡들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담대무궁에게 최고 평점을 준 수뇌부의 결정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평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도 아니었다.

잠룡대 창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전에 통고를 받았기 때문에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비가 아들에게 상을 주는 낯 뜨거운 광경에 축하를 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공연히 씁쓸하여 잠룡들은 발로 애꿎은 땅바닥만 툭툭 찼다.

“ 조직 구성은 어떻게 합니까?”

결국 보다 못한 담대무궁이 질문을 했다.

“ 좋은 질문이다. 대주. 조직 구성은 대주 직권에 맡기기로 했다.”

“ 잠룡대의 소속은 어떻게 됩니까?”

“ 일단 천상천 소속으로 해 두었다. 더불어 각 궐과 림에서 약간의 지원이 있을 예정이다.”

천상천 소속이란 말이 떨어지자 땅바닥을 후벼 파고 있던 일부 잠룡들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천상천은 대야벌 최고 권력 기관이다. 그 기관에 속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담대무궁의 들러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 한마디 하거라.”

담대만승은 흐뭇한 얼굴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또한 아들을 위한 배려였다.

담대무궁은 조금 전 아버지가 서 있던 자리로 올라갔다.

‘ 흐흡!’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거의 사만에 달하는 무인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런 저런 사건을 많이 겪고, 밀천의 등장으로 인해 대야벌을 우습게보는 자들이 있지만, 대야벌이 무림이란 사실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었다.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 범천담대세가의 후계자고, 대야벌의 후계자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겪어야 할 일인데 이 정도로 긴장하면 안 된다. 담대무궁. 이제 시작일 뿐이다.’

담대무궁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저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은 여러 개가 있다. 보통 ‘저’와 ‘나’ 그리고 본인이 많이 쓰이는데 ‘저’는 자신을 낮추어 말할 때, ‘나’ 는 상대방과 대등한 상황일 때, ‘본인’ 은 자신이 상대보다 약간 우위에 있다고 여길 때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담대무궁은 ‘저’라는 호칭을 선택했다.

최대한 자신을 낮추겠다는 의도는 첫 마디에서부터 드러났다.

“ 사실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조금 전 받은 무적뇌화검을 들어 올렸다.

“ 이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삼합평에서 숨진 잠룡들과 저 자리에 앉아 있는 저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감히 이 검을 받아든 이유는 벌주님께서 주신 이 검은 상이 아니라 질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좀더 열심히 하라는, 대야벌의 발전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라는 준엄한 명령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제가 벌주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이 검을 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밑에서부터 시작하는 다른 무인들과 달리 전 많은 것을 받았고, 탄탄대로를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전, 단 한 번도 그 길을 편하게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그 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 검에 부끄럽지 않은, 저보다 앞서 대야벌에 들어온 많은 선배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그런 무인이 되겠습니다.”

담대무궁은 무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짝! 짝! 짝! 짝!

수가 얼마 되지 않는 듯 처음 박수소리는 작았다. 그런데 마치 전염병이 번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더니 대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 등천대룡!”

누군가 손을 들어 올리며 담대무궁의 별호를 불렀다.

“ 등천대룡!”

등천대룡이란 외침도 박수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퍼져 나갔다.

바로 그때 담대무궁은 왼손을 번쩍 쳐들었다.

팔 상박이 잘려나가 들어 올린다고 해봐야 팔은 머리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다. 마치 어깨에 난 죽순처럼 약간 위로 솟았을 뿐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펄럭! 펄럭!

텅 빈 소맷자락이 세찬 바람에 휘날렸다.

“ 등천대룡!”

“ 등천대룡!”

“ 등천대룡!”

엄청난 광경이었다. 갑자기 무인들은 등천대룡이란 별호를 열광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맥없이 펄럭이는 빈 소매, 그것은 단순한 소매가 아니었다. 자신의 팔을 기꺼이 희생하여 결국엔 승리를 쟁취한 자가 들어 올린 승리의 깃발이었다.

“ 등천대룡!”

“ 등천대룡!”

무인들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쉬지 않고 등천대룡을 외쳤다.

‘ 봤느냐? 윤허. 세상은 이런 거다. 이게 바로 가진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오만을 중의적 겸손으로 포장하고, 거기에 약간의 연출이 더해지면 추종자들은 저절로 생겨난다. 약간의 겸손만 있으면 뭐든 가능하단 말이다. 이게 바로 가진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담대무궁은 손을 흔들고 있는 무인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영웅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거다. 윤허. 그것도 가진 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말이다.’

*********

“ 호호호! 웬이이냐, 날 다 보자고 하고, 혹시 나랑 자고 싶은 거야?”

유설연은 생글거리며 연우강을 보았다.

이번 만남은 연우강이 먼저 연락을 해와서 이루어졌다. 지금 있는 곳은 호남과 강서성의 겅계지점이었다.

“ 난 가슴과 엉덩이가 큰 게 좋아.”

“ 네가 데려온 몽요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가슴이 있는데?”

유설연은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 갑자기 궁금해지네, 벗어 봐.”

연우강은 유설연의 가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의 가슴은 약간 불룩했다.

“ 처녀 가슴보다 더 귀한 걸 함부로 보겠다는 거야?”

“ 귀해?”

“ 그럼 귀하지. 사내새끼들 중에 나같은 가슴을 가지고 있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 그게 없는 게 정상이잖아.”

“ 원래 독특한 게 비싸고 좋은 거야, 우강.”

“ 예를 들면?”

“ 분재를 봐. 일상적으로 자란 놈은 분재로 쳐주지도 않잖아. 하지만 특이하게 자란 녀석은 수백 냥을 호가하기도 하지.”

“ 그래서 너도 그렇다는 거야?”

“ 호호호! 물론이지. 이 세상에서 나처럼 멋진 가슴을 가진 사내는 없거든. 성연 그 아이가 맹렬하게 추격해 오는 중이긴 한데 아직은 깜도 안 돼.”

“ 맹렬하게?”

“ 좋은 걸 먹는지 상당히 커졌어.”

“ 커지면 좋아?”

“ 지금은 그래. 그보다 너 사고 쳤더라?”

“ 술 한잔할래?”

연우강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 말은 고맙지만 술은 피부에 독이야. 난 그냥 차나 마실래.”

유설연은 눈썹을 들썩하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 그렇게 하든지. 그런데 무슨 사고를 쳤다는 거지?”

“ 남경왕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 같던데, 아냐?”

“ 그분은 무상의 아버지잖아. 그런 분을 향해 어떻게 선전 포고를 하냐?”

“ 허점을 보이면 죽이겠다고 했다면서. 그런 걸 보통 선전 포고라고 하잖아.”

“ 그건 선전포고가 아니라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인마.”

“ 간을 떼어놓고 다니는 거야?”

유설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경왕 주진무를 협박했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녀석, 어떻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양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날 협박해도 되고, 나는 협박하면 안 된다는 건 누가 만들어 낸 법이냐?”

“ 그거야 권력이 만들어 낸 법이지.”

“ 그럼 이번에 권력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는 걸 알았겠네?”

“ 그게 뭔데?”

“ 바라는 게 없으면서, 눈에 뵈는 것도 없는 놈.”

“ 호호호! 한 마디로 미친놈이라는 거지?”

“ 맞아. 설연. 미친놈을 상대로 협박을 해 봐야, 돌아오는 건 콧방귀밖에 없지.”

“ 그래서 협박을 했다는 거야?”

“ 협박도 할만하니까 하지 무턱대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냐?”

그 자리에는 주진무와 사장군 그리고 남철진이 있었다. 사장군은 주진무의 오랜 심복이니 발설했을 리가 없을 테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남철진밖에 없는데, 그 또한 차기 금의위 영반을 노리고 있는 자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발설할 자가 없었다.

“ 네가 남경왕을 협박했다는 사실?”

“ 응!”

“ 원래 정보를 다루는 자들은, 조직을 위해 정보를 흘리는 경우도 있고, 경고를 보내기 위해 흘리는 경우도 있어.”

“ 이번엔 어떤 경우지?”

“ 후자야.”

“ 후자라면 동창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 일부러 흘렸다는 말?”

“ 그런 셈이지.”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경고?”

“ 내가 찍은 놈을 돕거나 관계를 맺은 놈들은 나중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라고는 경고.”

“ 그러니까 권력을 잡았을 때 가만있지 않겠다는 뜻?”

“ 적을 고립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흔히 쓰이는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야.”

“ 그 경고가 먹혀?”

“ 원래 정계라는 곳이 내일 어찌될지 알 수 없는 곳이거든. 완벽하다고 확신하는 것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오늘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내일 내쳐질 수도 있으니까.”

“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가급적이면 경고를 따른다는 말이구나.”

“ 그런 셈이지. 더구나 이번처럼 발설한 사람이 보통 신분이 아닐 때는 더더욱.”

“ 남경왕이 직접 그 말을 했단 말이네?”

“ 보통 이런 경우엔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투로 말을 하게 돼.”

“ 그런데.....”

연우강은 유설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듣고도 왜 나왔느냐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 요즘 들어 심경의 변화가 조금씩 생기고 있어.”

“ 심경의 변화?”

“ 물건 달린 사내들이 믿음직스러워 보이기 시작했어.”

“ 내가 아니라 내 물건이 믿음직스럽다는 거야?”

“ 난 세상을 남자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어.”

“ 북경의 개작두라고 불렸다고 하지 않았냐?”

“ 사람은 변하는 거야.”

“ 그래서 앞으로는 네 입으로 북경의 개작두라고 할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이야?”

“ 그렇지.”

“ 그거 아주 건설적인 사고방식이다. 싸움은 무기로만 하면 돼. 굳이 입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체포 명령서를 받아내라.”

“ 체포 명령서?”

비로소 연우강이 이곳으로 부른 본론을 꺼내는구나 싶어 유설연은 긴장했다.

“ 친구 녀석에게 자리가 있으니까 걱정 말라며 큰소리를 쳐 두었거든.”

“ 무슨 소리야?”

“ 대야벌로 들어오라고 했는데 거긴 사람이 꽉 찼잖아. 녀석이 와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

“ 팔황새에 관한 거야?”

“ 지금은 팔황천이 됐어.”

“ 팔황천의 천주가 친구야?”

“ 군 동기야.”

“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유설연은 놀라 순간 얼굴이 굳었다. 연우강이 팔황천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주인 야율사은과 친구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만일 연우강의 말이 사실이라면 팔황천은 대단히 큰 변수가 아닐 수 없었다.

“ 어떻게 되기는. 남경왕이 아니라 날 선택한 너는 아주 훌륭한 선택을 한 거라고 볼 수 있지.”

“ 그러니까 그들이 들어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아니 그들을 대야벌의 한 축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벌내쟁투가 필요하단 말이지?”

“ 대신 넌 황궐을 버려야 해.”

“ 황궐을 버리는 건 쉽지 않아.”

“ 그래도 해야 해. 설연. 그동안 많이 쳐죽인 것 같지만 그놈들은 빙산의 일각도 안 돼. 대야벌은 여전히 철옹성이야. 그리고 황궐의 공야일우가 버티고 있는 이상 넌 절대 그들을 거느릴 수 없어.”

“ 일단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의 힘을 약화시키고 범천조화신기를 이용해서 그들을 하나로 합치라는 말이구나?”

“ 바로 그거야.”

“ 그럼 체포할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네?”

“ 물론이지. 만마림 사월림 림주는 물론이고 목에 힘깨나 준다는 놈들은 전부 체포 명단에 집어넣어. 그런 다음 슬쩍 정보를 흘려.”

“ 정보를 흘리라는 건?”

“ 굳이 네가 동창 무인을 데리고 대야벌로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그 정보가 흘러나가면 놈들은 바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 어느 정도 타격을 줄까?”

“ 우선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은 박살날 테고, 그들을 공격한 자들 또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거야. 더불어 잦아진 벌내쟁투는 대야벌 내의 불안을 야기할 테고 몇몇 문파는 무서워서 못살겠다며 기다렸다는 듯 떨어져 나가겠지.”

“ 떨어져 나갈 문파가 있을 거라고 보는 거야?”

“ 최소한 두 곳 이상일 거야.”

“ 대충 정리가 됐다 싶으면 이번엔 진짜 동창 무인들을 데리고 대야벌로 밀고 들어가. 그런 다음 옥처인과 양도욱을 비롯한 죄인들을 끌고 나오는 거야.”

“ 그럼 몇 개가 작살나는 거지?”

“ 황궐을 비롯한 네 개 문파는 치유 불가능할 테고, 그들을 공격하는데 선봉을 선 만마림이나 사월림도 거의 끝장난다고 봐야 하고, 대야벌을 떠나는 자들까지 합치면 쇠초 여덟 개 문파가 박살난다고 봐야지.”

“ 오늘밤 나랑 자자, 우강.”

유설연은 의뭉스런 웃음을 흘렸다.

“ 난 사내하고는 안 자, 인마.”

“ 난 사내가 아냐, 자식아. 구할 이상은 여자라고.”

“ 그래도 싫어, 새꺄! 아무튼 서둘러.”

연우강은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정말 싫어?”

“ 싫다니까.”

“ 넌 호기심도 없어?”

“ 있을 리가 없잖아.”

“ 왜?”

“ 네가 가지고 있는 걸 나도 다 가지고 있잖아. 가슴도 있고, 물건도 있고, 그리고 항문도 있고, 다 있는데 궁금한 게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자식아. 아무튼 잘해.”

잠시 주변을 살피던 연우강은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열린 사고를 좀 가져봐, 자식아!”

[ 난 세상이 전부 여자로 이루어졌으면 하고 매일 바라는 놈이야, 새꺄!]

“ 그러게 새꺄, 누가 그렇게 멋있으라고 했어?”

천리전음으로 연우강의 목소리가 귀에 와 꽂히자 유설연은 자기 가슴을 와락 움켜쥐었다.

“ 아얏! 이런 씨팔!”

가슴에서 고통이 밀려오자 유설연은 욕설을 내뱉었다.

“ 아니지, 이런 경우엔 이 소리가 아니지?”

유설연은 틀어쥐었던 손을 놓고 다시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 하악!”

‘ 바로 이거야 이 소리가 나야 하는 거라고.’

유설연은 활작 웃으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 헉!”

“ 좀 잘해라, 유설연, 그것밖에 못해?”

“ 헤엑!”

“ 그건 무슨 개소리야?”

“ 히익!”

“ 야! 썅!”

“ 헥!”

“ 지랄을 해요, 지랄을 해.”

“ 엑!”

“ 에이 병신 같은 놈, 아니 년!”

“ 아니 다시 한 번!”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면서 유설연은 부드럽게 가슴을 그러쥐었다.

“ 하악! 폐, 폐하!”

“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문득 창문 쪽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설연은 동작을 멈췄다.

“ 웬일이야?”

유설연은 연우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 호기심.”

“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돌아왔다는 거야?”

“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끈적끈적했거든.”

“ 괜찮았어?”

유설연은 방긋 웃으며 물었다.

“ 마지막 건 그럴싸했어. 그런데 폐하라는 건 무슨 소리야?”

사실 연우강이 돌아온 건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폐하라는 말 때문이었다.

“ 황제 폐하가 드디어 여자에게 물렸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 남색을 밝힌다는 거야?”

“ 그럴 땐 남색을 밝힌다고 하는 게 아니라 취향의 다변화라고 하는 거야.”

“ 그래서 이젠 황제까지 꿀꺽하려고?”

“ 내 나이가 좀 많지?”

유설연은 조금 풀 죽은 얼굴을 했다.

“ 네가 익힌 무공하고, 특이한 걸로 밀고 들어가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

연우강은 유설연의 가슴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 뭘?”

“ 아무래도 잠자리 경험을 더 쌓아야 할 것 같아서.”

“ 사내는 널리고 널렸잖아.”

“ 마음에 드는 스승에게 배우면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오잖아.”

“ 미친 년!”

휙!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짓이야, 인마.”

유설연은 창 밖을 향해 버럭 소리를 치고는 다시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 아니, 이번엔 벗고 해봐야겠다.”

유설연은 신중한 손길로 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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