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12화 (112/232)

제 3장 살아 있다는 증거

기골이 장대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머리는 깔끔하게 정리하여 가마 부분에서 둥글게 말아 올려 검은 천으로 묶었다. 이마에는 흑요석처럼 새카만 보석이 달린 유생건을 둘렀다.

짙은 눈썹과 호목처럼 부리부리한 눈, 코는 오뚝하면서 매끄럽게 뻗었다. 두두룩한 이마와 사각형의 얼굴은 강인한 인상을 풍기지만 계집의 그것처럼 붉은 입술은 묘한 부드러움을 더욱 각인시켰다.

게다가 사내의 주변에는 정확하게 어떠한 기운인지 알 수 없는 특이함이 분포돼 있다. 마치 폭풍이 치기 직전의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살짝 건들기만 해도 폭발해 버릴 것만 같다.

노치은은 어깨를 활짝 폈다.

비록 대야벌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나름 호북에서는 상대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다.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 난 두주패권 노치은이다. 네가 정말로 이세 천마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노치은은 제석강을 노려보며 약간은 거만하게 말했다.

“ 나는 천마네.”

제석강은 빙그레 웃으며 중년 사내를 보았다.

내공은 일류라고 칭할 정도는 돼 보인다. 하지만 하나만 익히지 않고 이것저것 잡식으로 익힌 듯 몸 주변에 흐르는 기운이 정순하지 못했다. 저렇게 무공을 익힌 자는 초반에는 반짝 강함을 보이지만, 근육만 발달시킨 외공 무인처럼 금세 힘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 천마라고?”

노치은은 어이없는 얼굴로 제석강을 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정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세 천마도 아니고 천마 본인이라니. 과대망상증 환자거나 아니면 미친 놈이 분명할 터였다. 그것도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는, 제대로 미친놈 말이다.

“ 자네 관상을 보니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어.”

“ 살아나는 방법은 없겠느냐?”

노치은은 비릿한 조소를 물며 비아냥댔다.

“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십 년 이상은 거뜬하게 살 수 있을 거네.”

“ 나는 그렇다치고 그럼 넌 어떨 것 같으냐?”

“ 나는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잠만 잤다네. 앞으로는 세상을 즐기면서 백 년 정도만 더 살 참이네.”

“ 안타까운 일이구나. 넌 지금 이 순간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노치은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부웅! 소리와 더불어 그의 의복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마저 잔뜩 붉어진 그는 제석강을 쏘아보며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휙!

바로 그 순간 제석강 옆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노치은의 공격에 손을 쓴 사람은 백강이었다.

백강의 오른손이 장난치듯 허공을 가르자, 그의 손에서 뇌전 문양의 검은 광채가 노치은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갔다. 그것은 가히 섬광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빨랐다.

노치은이 펼친 권풍이 제석강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노치은의 가슴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 컥!”

노치은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그의 손을 떠난 권풍이 제석강 가슴 바로 앞에서 스러졌다. 권풍을 유지시켜 주는 원천인 몸에 이상이 생기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노치은은 고개를 숙여 가슴을 보았다.

엄청난 기운이 몸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거만 가슴은 전혀 이상이 없다.

“ 이건?”

“ 무례하면 죽는다!”

백지 위에 선을 죽 그은 것처럼 억양 없는 소리가 백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퍼억!

“ 크아악!” 한 얼굴로 물었다.

백강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노치은의 신형이 폭발했다. 폭발한 노치은의 신형은 산산조각으로 변하여 커다란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 쯧!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부디 극락왕생하길 바라네. 노 대협.”

제석강은 혀를 차며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그리고 다시 백강을 보았다.

“ 그것밖에 안 되는가?‘

백강은 상당히 많은 종류의 무공을 익혔고, 방금 펼친 백강마뢰도 그 중 하나다.

백강마뢰는 흑뢰, 혈뢰, 백뢰의 삼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까지 오십여 번 이상을 싸웠지만 백강이 펼친 무공은 흑뢰 한 가지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 모릅니다.”

“ 자넨 모르는 것 투성이지. 아니 나도 그런가?”

제석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백강은 지금껏 연우강의 흔적을 더듬어 왔을 뿐 어디를 어떻게 지나쳐 왔는지 알지 못했다. 백강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 또한 중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 네놈의 무덤 자리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여섯 명이 제석강과 백강을 포위하는 형태로 날아내렸다. 그들은 오 일 전 백강으로부터 막내를 잃은 광동칠마였다. 방금 소리친 자는 광동칠마의 첫째 신풍마 상문기였다.

상문기는 살기 어린 눈으로 제석강을 노려보았다.

그를 비롯한 광동칠마가 이세 천마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 십 일 전이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광동칠마의 이름을 강호 무림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그래서 곧바로 동생들을 이끌고 강서성으로 향했다. 백발 사내가 강서성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리고 칠 일 전, 강소성과 호남의 경계지역에서 백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이세 천마라는 자의 실력도 알아볼 겸하여 이틀 동안 뒤를 따랐다. 그동안 많은 무인들이 놈에게 도전을 하였고, 그들 모두는 백발 사내가 아닌 시종으로 보이는 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말투도 어눌하고 눈동자도 흐릿하게 풀린 듯 보이지만 시종의 무공은 엄청났다. 그는 도전을 빙자해 공격해 온 자들을 일 초 만에 없애버린 것이다.

물론 그에게 죽임을 당한 무인들 중 이름을 기억할 만한 자는 없었다.

그러던 중 막내가 도전을 했다.

내심 막내는 약해빠진 자들과는 다를 걸로 믿었다. 그런데 막내도 일초를 받아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수법도 조금 전 노치은이란 자를 죽인 것과 같은 무공이었다.

“ 혹시 나와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제석강은 상문기를 가만히 보며 물었다.

“ 너희들은 내 동생을 해쳤다.”

“ 나는 자네 동생을 모르는데, 혹시 도전자 중의 한 명이었는가?”

“ 그렇다. 천마. 내 동생은 오 일 전에 네놈에게 도전했다!”

“ 특이한 사고를 가진 친구군. 자네는 도전을 하고 나서 패하면 원수가 되는가?”

“ 물론 정상적인 대결이었다면 나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사술을 썼다.”

“ 사술?”

제석강의 눈초리가 치켜 올랐다.

문득, 아주 오래된, 이제는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아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그랬다.

두 번째로 천등십관을 통과하고 나자 누군가 비무를 청해왔다. 아마도 담대세가 무인이었을 것이다.

그자는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막무가내로 비무를 하자고 했다. 몇 번을 거절하다가 결국 비무를 하게 됐고, 결과는 사내의 죽음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 정확한 신분을 알았다. 그는 담대세가의 큰아들이었던 담대천룡이었다.

정당한 대결이었다고, 먼저 도전을 해왔다고, 몇 번이고 거절했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담대세가는 그들의 자식이 정당한 비무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사술이라고 밀어붙였다. 담데세가의 무공이 근본도 없는 자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그들은 범천의 탄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저놈이 동생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것처럼.

제석강은 시선을 들어 상문기를 보았다.

“ 사술이 아니면 내 동생이 그렇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할 리가 없다, 놈!”

“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나 보군.”

제석강은 백강을 보았다.

“ 죽이겠습니다!”

고저가 전혀 없는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백강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했다.

퍼억!

“ 크악!”

퍽!

“ 아악!”

백강의 신형이 전후좌우에서 번쩍번쩍 나타날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뒤를 이었다. 그가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제석강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가세.”

제석강은 시체로 변한 광동칠마를 둘러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주변엔 아직 많은 무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신경 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돌아가는 대로 그대로 둘 참이었다.

“ 누가 소문을 냈을 거라고 보는가?”

제석강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며 묻는 말이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의미 없이 던졌을 뿐.

“ 모릅니다.”

역시 예상했던 답이 들려왔다.

“ 생각을 하기 싫은 건가 아니면 못하는 건가?”

제석강은 모호한 눈으로 백강을 보았다.

말더듬이보다 더 답답한 어투는 고쳐졌지만 이번엔 억양이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말투의 높낮이는 그 사람의 감정을 나타내곤 하는데, 높낮이가 없다는 말은 곧 감정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 모릅니다.”

“ 자넨 어떤가?”

제석강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양손을 팔소매 안으로 넣은 채 그 사이에 검을 끼우고 있었는데, 마치 잘 벼려진 검이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 본인들이 낸 소문이 아니란 말인가?”

창노한 목소리가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나는 이 친구를 데리고 유람을 나왔을 뿐이네. 게다가 난 강호 무림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다네.”

“ 소문을 낼 이유가 없다는 말인가?”

“ 소문을 낼 이유도 없을뿐더러 굳이 싸움을 원하지도 않네.”

“ 그럼 지금껏 그대 손에 죽어간 오십이 명의 무인들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 그들의 죽음이 내 책임이란 말인가?”

“ 아니라고 할 참인가?”

“ 난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이네.”

“ 그들은 하찮은 무공을 지닌 자들이 대부분이었네. 손바닥은 마주치지 않으면 절대 소리가 나지 않네. 그대 무공 정도로 보면 피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네.”

“ 자네는 길을 갈 때, 산에 오를 때, 바람이 불어오면 피해가는가?”

“ 그들은 바람이 아니고 사람이네.”

“ 내가 보기에는 바람이었네. 그런데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뭔가?”

“ 그만 살행을 멈추고 돌아가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네.”

“ 쿡!”

제석강은 픽 웃었다.

“ 돌아갈 텐가?”

“ 박수를 치기 위해서는 손바닥이 두 개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가?”

제석강이 되물었다.

“ 방금 내가 한 말이네.”

“ 그럼 둘 중 하나를 치우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군.”

“ 그래서 돌아가라고 한 거네.”

“ 그 말을 왜 내게 하는가?”

“ 무슨 말인가?”

“ 지금 내 주변에는 반대편 손바닥이 백여 명이나 있다는 말이네.”

“ 그, 그러니까 그들을 돌려보내란 말인가?”

노인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여긴 왜 온 건가?”

“ 나는 수십 년 동안 강호에서 활동을 해왔고, 무림동도들은 내게 운학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주었네. 나는 무림 동도들이 나에게 준 별호에 보답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네.”

운학이란 말이 나오자 주변 대기가 급격하게 요동쳤다.

운학도장. 검학도장.

그는 두 가지 별호를 지닌 무인이었다.

그는 원래 무당파 무인이었다. 무당파에서 무공을 익히고 다른 도인들의 그런 것처럼 대야벌로 들어갔다.

그의 진가가 발휘된 곳은 바로 대야벌이었다.

들어갈 때만 해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대야벌의 각 무고를 거치면서 점점 일취월장 하더니 삼 년이 지났을 때는 신진 중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때 그가 얻은 별호가 검학이었다.

검법을 펼칠 때 학처럼 고고하다고 하여 얻은 별호였다. 검학은 승승장구했다. 여기저기서 그를 칭송하는 말들이 들려왔고, 곧 무궐의 요직에 기용될 거라는 섣부른 소문까지 돌았다. 그랬던 그가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대야벌을 뛰쳐나갔다.

‘ 부귀공명은 뜬구름이요, 입신양명은 마음의 짐이라. 아서라, 내 생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 집착하느뇨. 그저 부평초처럼 살아가면 될 것을......’

그가 대야벌로 들어간 지 이십 년 만이었다.

그를 깊이 아는 몇몇은 검학이 금세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검법을 학처럼 고고하게 펼치는 사람이지만 명예에는 상당히 집착을 보였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검학은 대야벌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강호를 종횡하면서 많은 협행을 했다. 그런 그에게 세인들은 구름 위에서 살아가는 학이라며 운학이란 별호를 다시 지어주었다.

그런 그가 나타난 것이다.

상황을 주시하던 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러니까 무림 정의라는 이름으로 날 처단하기 위해 왔단 말인가?”

“ 그대를 처단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무의미한 살생을 막기 위해 온 거라네.”

“ 그런데 왜 하필 난가?”

“ 지금 강호 무인들과 드잡이를 벌이고 있는 당사자가 그대가 아닌가?”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드잡이를 벌이고 있는 당사자는 나와 주변에 숨어 있는 자들 두 부류네. 하지만 난 내 길을 가고 있는 중이고, 주변에 숨어 있는 자들은 일부러 먼 길을 찾아왔다네. 자네도 그들 중 한 명이고. 자네가 정말로 이 싸움을 말리고 싶다면 나에게 돌아가라고 할 게 아니라 주변에 숨어 있는 자들을 설득해야 이치에 맞는 일 아닌가. 내 말이 틀렸는가?”

“ 주변에 숨어 있는 자들이 백명도 넘는다고 한 사람은 그대네.”

“ 강호 정의를 위해 싸움을 말리고 싶다면 인원수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혹시 싸움을 말린다는 건 핑계고 나와 비무를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건 아닌가?”

“ 허허! 벌써 사십 년 전에 검학이라 불렸던 노도였네. 이미 사검을 버린 지 오래라네.”

“ 오!”

“ 아!”

운학도장의 입에서 사도를 버렸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나직한 탄성이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사검을 버렸다는 말은 곧 활검을 얻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 사검은 버렸을지 몰라도 공명은 버리지 못했군.”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 공명을 버리기 위해서는 무를 버려야 하는데 자넨 지금껏 무를 놓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네 무인은 죽을 때까지 공명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라네.”

“ 무를 버려야 공명을 버린다고?”

운학도장은 얼굴이 흠칫 굳었다.

“ 허허허! 무의 끝을 본 나 천마도 버리지 못한 게 공명이라네, 너무 자학하지 말게.”

“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구나.”

운학의 말투가 반말로 바뀌었다.

“ 난 말짱하다네. 운학. 천오백 년 전에 태어났고, 지천에서 만든 천등십관을 통과하여 범천이 됐고, 그 후에는 일백 마와 함께 중원을 놓고 영세오천과 싸웠던 그 천마가 맞네.”

“ 그 말을 믿으라는 말이냐?”

“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무시하면 그만이네. 운학. 내가 천마라는 데 굳이 그대가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 네가 천마라고 외치고 다니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강호 무림에 혼란을 야기한 행위는 책임져야 한다.”

“ 누가 감히 나 천마에게 책임을 묻는단 말이냐?”

제석강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어깨를 쫙 폈다.

“ 헉!”

느닷없이 거대한 산악이 덮쳐오는 듯한 기분에 운학도장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내며 물러났다.

‘ 이런.’

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자칭 천마라고 한 자는 한 걸음 다가왔을 뿐인데 자신은 다섯 걸음이나 물러난 것이다. 물러나면서 저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올렸는지, 앞에는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발자국을 본 그는 굴욕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인의 세계에서 늘 그렇듯 굴욕은 곧 분노를 불러왔다.

“ 죽일놈!”

평소의 그라면 결코 내뱉지 않을 그런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분노했다는 의미였다.

“ 공명의 껍질을 벗어 던지지 못하면 절대 무공 고수가 될 수 없다. 운학. 무공의 끝은 수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성의 마지막에서 나온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상태, 짐승이되 짐승이 아닌 상태, 삶이되 삶이 아닌 상태를 겪지 못하면 절대 무공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운학.”

“ 그건 마공이다.”

차앙!

운학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져 나왔다. 하지만 검집을 벗어난 그의 검은 제석강을 향해 날아가지 않았다. 이기어검술로 뽑힌 검이 아니라 허공섭물로 뽑은 검이기 때문이었다. 검을 뽑은 운학도장은 제석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무에는 정도 없고 마도 없다! 오직 생과 사만 있을 뿐이다!”

제석강은 오른 발을 내밀며, 활짝 편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 허억!”

제석강을 향해 몸을 날리던 운학도장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수십 개의 팔이 달린 거대한 천마상이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천마상의 크기는 이 장에 달했다. 그는 천마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천마상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그대로 달려왔다.

“ 처, 천마수!”

운학도장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대한 천마상 형태를 띠며 날아오는 수강. 그것은 전설로만 내려오는 천마수였던 것이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름 짜는 기계에 갇혀 있는 것처럼 가공할 기운이 온몸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리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퍼억!

“ 크아악!”

처절한 외침이 운학도장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운학도장의 몸은 압착기에서 빠져나온 기름이 빠진 열매처럼 완전하게 으스러져 있었다.

벌레가 울음을 그치고 바람이 그쳤다.

그리고 주변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무인들은 숨을 그쳤다. 너무 엄청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 가세, 백강.”

제석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그거 아는가?”

“ 모릅니다.”

“ 갑자기 배가 고프네. 백강.”

“ 저도 그렇습니다. 주공.”

억양도, 쉼도 없는 말투다.

“ 우리 어디 가서 밥이나 먹세.”

“ 어디로 가는 겁니까?”

“ 이쪽으로 가다보면 그 녀석이 나올 거네.”

“ 모시겠습니다.”

“ 자넨 뒤따라오면서도 항상 모시겠다고 하는군.”

“ 모르겠습니다.”

“ 당분간은 따라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둘러볼 필요 없네.”

“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석양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이 완전하게 모습을 감추자 일단의 무리가 운학도장의 시체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대야벌을 떠나온 잠룡대였다.

“ 무공에 대해 알겠는가?” 운학도장의 시체를 살피던 담대무궁이 윤허를 보며 물었다. 그가 본 건 자칭 천마라고 하였던 자의 손바닥이 다였다. 그런데 운학도장의 신형은 꽉 쥐어짠 빨래처럼 변해 있다. 도무지 어떤 무공에 당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나도 처음보는 무공이네.”

윤허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럼 그 시종이란 자가 펼친 무공은 어떻든가?”

“ 그것도....”

이번에도 역시 윤허는 고개를 저었다.

“ 천마수에요.”

대답은 이지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천마수?”

일행의 시선이 이지약을 향해 모여들었다.

“ 우연히 천마의 무공에 대해 설명한 책을 본 적이 있어요. 그 책에 나온 무공 중에 천마수가 있었는데, 그 무공에 당하면 압착기에서 기름을 짜내고 난 열매처럼 변한다고 돼 있더군요.”

“ 천마의 무공이란 말이오?”

“ 내가 알기로는 그래요, 담대공자.”

“ 하면, 광동칠마를 죽인 무공은 뭐라고 생각하시오?”

“ 일백마의 수장인 무불 백강의 무공인 백강마뢰의 흔적철머 보여요. 검은색 뇌전 문양의 강기는 아마 흑뢰라는 초식일 거예요?”

“ 아!”

담대무궁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무불 백강에 대해서는 범천담대세가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최초로 격공장을 창안한 무인이라고 하였고, 흑뢰, 혈뢰, 백뢰의 삼 초식으로 이루어진 그의 무공을 백강마뢰라고 하였다.

“ 자칭 천마라고 하였던 자는 시종을 향해 백강이라고 불렀네. 대주.”

윤허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천마의 무공과 일백마의 수장이라는 무불 백강의 무공. 그들이 설사 가짜 천마와 가짜 일백마라고 해도, 무공은 실제 그들이 아닐까 할 정도로 엄청나다.

문득 자신들이 어떻게 해볼 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가세!”

담대무궁은 제석강과 백강이 사라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먼저 벌에 보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윤허는 담대무궁을 따르며 물었다.

“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윤형.”

담대무궁은 전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보고할 마음이 없었다. 굳이 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건이 심각해지면 저절로 알게 될 터인데 굳이 알릴 이유가 없다. 더불어 이번 임무는 잠룡대의 첫 임무가 아닌가. 시작부터 대야벌에 손을 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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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시작은 후텁지근한 바람이 확인시켜 준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눅눅한 습기를 품고 있어 여간 불쾌한 게 아니다.

염자생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왼팔을 잃었던 곳.

연우강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이후 화야장 총관으로 지내면서 알게 모르게 무공에 몰두했다. 그런데 그곳으로 들어 가는 입구조차 뚫지 못했다.

그랬던 이곳에 다시 왔다.

“ 몽요!”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이 몽요를 부르는 소리였다.

“ 말하세요.”

마치 허공에, 이편과 단절시키는 막이 있는 것처럼 몽요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가 매끈했다. 최근에 연우강으로부터 전수받은 만환은신환환신공 때문이었다. 만환은신환환신공은 이미 완벽하게 익히고 있던 만환신사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하지만 두 무공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만화은신사영은 허공으로 녹아 들어가 몸을 숨기고, 적을 암살할 수 있는 공격 무공이다. 단점이라면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온다거나 하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상쇄시켜 주기도 한다.

하지만 만화은신환환신공은 오직 숨는 기능만을 극대화시킨 무공이다. 마치 도마뱀이 주변 환경과 같은 색으로 피부색을 변화시켜 적의 공격을 피하는 것처럼 만화은신환환신공도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된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올 때, 밝은 곳에서 숲으로 들어갔을 때,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마치 같은 환경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적응 속도가 빠르다.

물론 만화은신환환신공 또한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급격하게 변하는 주변 환경에 가공할 속도로 적응하는 대신 적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만화은신환환신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원초적인 상태라야 한다.

주변 색에 따라 몸 색을 변화시키는 도마뱀처럼 천을 씌워 놓으면 금세 드러나는 것처럼, 옷을 걸친 채 만환은신환환신공을 펼치면 만화은시사영을 펼쳤을 때보다 못하게 된다. 만화은신환환신공을 완벽하게 펼치는 최적의 조건은 몸에서 나풀거리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머리를 민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아니,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의 털이란 털은 전부 밀어야 했다. 만일 이곳이 밀천이 아니고, 미나모토 가문의 잔당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미나모토 가문의 인자들 역시 만화은신사영을 바탕으로 창안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상태라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조치가 필요했다.

소중하게 길렀던 머리를 자르는 게 아쉽긴 해도 만화은신환환신공은 최고의 대안이었다.

“ 절대 나서지 마세요. 이번 일은 나와 귀노에게 맡기고 몽요는 밀천 총단을 머릿속에 담는 데 주력하세요.”

“ 나서고 싶어도 방법이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런데 어때요?”

“ 얼굴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무공을 말하는 겁니까?”

“ 둘 다.”

“ 머리카락 없는 얼굴은 중으로 살아도 어울릴 것 같고, 만환은신환환신공은 반 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비로소 희미하게 감지될 정도로 완벽합니다.”

“ 둘 다 괜찮다는 말이에요?”

“ 그렇습니다. 몽요. 그런데 우리 몸에 만리추종향은 뿌렸어요?”

“ 이미 우강과 염 할아버지의 몸에 잔뜩 뿌렸어요. 군산을 벗어나지 않으면 우강이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 좋아요, 그럼 가요.”

연우강은 염자생을 돌아보았다.

“ 따라오십시오. 장주님.”

염자생은 군산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 식경 정도 달렸을까, 세 사람 앞에 울창한 죽림이 나타났다. 십 장 높이의 대나무에는 갈색 반점이 나 있었다. 군산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반죽이었다.

“ 저 안으로 들어가면 지형이 변한단 말이지?”

연우강은 죽림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딱히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기운이 죽림에서 느껴졌다. 그 기운은 상당한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고 해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했다.

“ 경관을 즐기러 들어가는 경우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 그래?”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죽림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는지 대나무 사이로 오솔길처럼 작은 길이 나 있었다. 연우강은 주변을 감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어나가고 잇는 곳은 원래 나 있던 오솔길이 아니었다. 일부러 길이 없는 곳을 택하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 아니에요?]

몸을 은신한 채 연우강을 따라붙은 몽요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전음을 보내기 위해 내기를 끌어올리자 마자 매끈한 나신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만화은신환환신공을 펼치면서 내기를 끌어올리는 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주는 순간이었다.

[ 이곳에 진식이 펼쳐 있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밀천 총단에 대해 아는 거 없어요?]

연우강이 몽요를 데려온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밀천 총단의 지도를 그리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이고 두 번째 목적은 가급적이면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 우리 은밀세가는 칠백 년 전에 이들과 연을 끊었어요. 설사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해도 쓸모가 없을 거예요.]

바로 귓전에서 몽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매미처럼 연우강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연우강은 손을 뻗어 몽요의 허리를 감았다.

[ 아는 것만 말해 보세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매끈한 피부가 주는 감촉을 음미했다.

[ 현기환사죽영진이에요.]

[ 특징은?]

[ 몇 가지가 나와 있기는 한데 제가 알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아요.]

[ 아는 것만 말해 보세요.]

[ 허허실실 진이라고 돼 있었어요.]

[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다는 말인가요?]

[ 그런 것 같아요.]

[ 칠백 년이 넘었으니까 몸으로 직접 부딪쳐 보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걷자 어느새 방향감각이 사라지며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느낀 거 있어요?]

방향감각을 잃자 연우강은 몽요에게 물었다.

[ 전혀.]

몽요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럼 일단 나가야겠네요.]

[ 어떻게 나간다는 거죠?]

[ 제 예상이 맞다면 이쪽으로 가면 될 겁니다.]

연우강은 전면을 가리켰다.

[ 피이! 방향 감각도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요?]

[ 절 믿으십시오. 몽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역시 반 시진 정도를 걸었을 터였다. 갑자기 눈 앞에 확 열렸다.

[ 정말 나왔네요?]

몽요는 깜짝 놀랐다.

어디가 어딘지 확인하지도 않고 무작정 직전했는데 밖으로 나온 것이다.

“ 어때요?”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 분명 계속해서 직전하였고, 내기를 끌어올려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다. 방향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단 한번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온 곳은 들어간 곳과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아니 삼십여 장 건너편에 염자생이 서 있는 걸 보면 들어간 곳으로 다시 나온 셈이다.

“ 지금까지 계속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어요. 방향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핶고요.”

몽요 역시 연우강과 같았다.

연우강이 방향을 바꿔 이동한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 들어갔던 남쪽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진식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진식이 맞네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염자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지금 들어가실 겁니까?”

연우강이 다가가자 염자생이 물었다.

“ 너무 늦었지?”

연우강은 서쪽 하늘로 시선을 주었다. 서쪽 하늘 구석에 곧 떨어질 듯 해가 가까스로 걸려 있었다.

“ 내일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쉴 곳은 있어?”

“ 저 산을 넘어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염자생은 왼편으로 이백여 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을 가리켰다.

“ 그럼 그곳으로 가지. 짐 주고 먼저 가서 빈 집 있나 알아봐.”

“ 알겠습니다. 장주님.”

염자생은 지고 있던 봇짐을 내려 연우강에게 건네고는 몸을 날려갔다. 연우강은 염자생으로부터 받은 봇짐을 몽요에게 건네주었다. 몽요는 봇짐을 들고 곧바로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자른 머리가 어색한 듯 몽요는 제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 힘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보다 절차를 밟아 방문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연우강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율령궁을 치는 데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는 진식을 뚫고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한다. 물론 강한 무공이 있으니 일이 잘못 됐을 때 몸을 피하는 건 문제가 아닐 테다.

하지만 몸을 피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지 그게 더 문제다. 잘될 수 있을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 협조를 구하는 것 못지않게 밀천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그들을 알아낼 기회를 얻을 수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뇌물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 뇌물이라면.......”

“ 거기에 들어 있는 겁니다.”

연우강은 몽요가 가진 봇짐을 눈으로 가리켰다.

“ 이 안에 들어 있는 건 검 아닌가요?”

“ 맞습니다. 녀석 입장에서는 보물은 물론이고 대야벌의 한 축인 율령궁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그걸 포기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죠.”

“ 공짜로 주기는 싫어서 약간의 손해를 끼치겠다는 말인가요?”

“ 사실 백령은 공짜로 주기엔 좀 아까운 무기거든요. 팔면 수백만 냥은 벌어들일 수 있는데....”

연우강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 어차피 돈도 받을 거잖아요.”

“ 그건 원래부터 내 돈이었습니다. 몽요. 빚을 받는 건 돈버는 게 아니지요.”

“ 아무튼 아무일도 없이 잘 끝났으면 좋겠어요.”

연우강은 빙긋 웃으며 염자생이 말했던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다음날.

민가에서 하루를 보낸 세 사람은 이른 아침 다시 죽림으로 왔다.

“ 어떻게 할 참이죠?”

만화은신환환신공을 펼치며 허공과 하나가 된 몽요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죽림 안에 펼쳐진 진식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궁금했다.

“ 보면 압니다.”

연우강은 왼편 허리춤을 툭 쳤다.

슈악!

바로 그 순간 그의 왼편 허리춤에서 새파란 뇌전 기운이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빛처럼 대나무 숲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그것은 오십 장 길이의 사망혈삭 끝에 달린 뇌섬이었다. 뇌섬은 앞을 가로막는 숲을 뚫고 들어가며 좁은 길을 만들어냈다.

“ 전 직진을 가장 좋아합니다. 몽요.”

연우강은 허공을 보며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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