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14화 (114/232)

제 5장 알고도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은?

“ 화야불이를 아시오?”

나천후는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며 물었다.

갸름한 얼굴에 거의 완벽하다 싶을 만치 반듯한 이목구비의 이 절세 미녀는 환밀가의 가주인 사유성의 동생이자 나천후의 정혼녀인 사유라였다.

“ 전에 있는 장원의 장주가 화야불이였어요.”

“ 그의 돈을 훔쳤소?”

“ 그 당시 우리 가문은 파산 직전이었어요.”

“ 그렇다고......”

나천후는 할 말이 없었다.

환밀가를 파산 직전까지 몰아간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물론 사유라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절세 미녀였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사유라를 얻으면 환밀가가 절로 굴러 들어오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사유라가 화야불이란 자의 집에서 돈을 훔친 모양이었다.

“ 어쩔 수 없었어요. 대가!”

“ 알았소. 그건 그렇고. 화야불이라는 자는 도대체 누구요?”

설사 일류라고 해도 현기환사죽영진 내에서 무영환사대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단 두명이 오십 명의 무영환사대를 해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금 전 들려온 외침, 그 외침에 내포된 내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자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 나도 궁금하구나.”

옆에 있던 나적리 역시 궁금한 얼굴로 사유라를 보았다.

“ 그는.....”

똑똑똑!

“ 데리고 왔습니다, 천주님.”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총관 성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두 사람을 둘러싼 채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들은 밀천금의대 무인들이었다.

“ 응?”

밀천금의대 무인들에 의해 포위돼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나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쪽에 있는 자는 아주 잘 아는 자였던 것이다.

“ 어?”

연우강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천후를 보았다. 마치 이곳에 나천후 네가 왜 있느냐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더불어 그의 등에 매고 있던 백령과 백무탈혼유마검이 들어 있던 봇짐도 보이지 않았다.

“ 연우강!”

“ 나천후!”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입을 다물었다. 나천후와 연우강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연우강이었다.

“ 밀천의 재정이 그렇게 어렵냐?”

“ 무슨 말이냐?”

“ 저 계집이 훔쳐간 내 돈이 삼백만 냥이거든, 저런 계집을 열 명 정도만 내보냈다면 삼천만 냥은 거뜬히 벌어들였을 거잖아.”

“ 그러니까 네 말은 유라를 내보낸 사람이 나라는 말이냐?”

“ 난 조금 전에 ‘훔쳐간 내 돈 찾으러 왔다’고만 했어. 그런데 넌 사유라 저 계집을 네가 있는 이곳까지 바로 불러들였어. 그 말은 곧 너도 저 계집이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되고,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지시를 내린 사람이 너라는 뜻이 되잖아.”

“ 유라는 내 정혼녀다, 놈!”

“ 그럼 넌 더 나쁜 놈이지. 아니 아주 치사하고 비열한 놈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치사하고 비열한 놈은 마누라에게 몸을 팔아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놈이고, 그보다 더 나쁜 놈은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정혼녀에게 몸을 팔아 돈을 벌어오라는 놈이라고.”

“ 개자식!”

나천후는 벌떡 일어났다.

“ 됐어, 인마. 그건 너와 저 계집 일이니까, 돈이나 줘.”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 네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나천후는 연우강을 쏘아보며 비아냥댔다.

“ 여기 있는 이 허수아비들을 믿는 거야?”

연우강의 입에서 허수아비라는 말이 나오자 밀천금의대 무인들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와 연우강과 염자생의 몸을 거미줄처럼 옭아맸다. 천주 앞이라 말도 하지 않고 나서지도 못하고 있지만 밀천금의대 무인들은 지금 연우강과 염자생을 난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두 사람을 옭아맨 살기는 그들의 심정이었다.

“ 물론이지. 너를 포위하고 있는 그들이면 너희 둘은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거다.”

“ 네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난 최근에 엄청난 기연을 얻었어, 나천후.”

“ 기연?”

나천후의 시선이 순식간에 연우강의 몸을 훑었다.

물론 동정호 지하에서, 백독수 일행을 없앨 때 그가 보여준 실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실력보다는 운이 더 많이 작용한 판이었다. 녀석의 진짜 실력은 삼합평에서 드러났는데, 담대무궁의 손에 죽임을 당한, 유명계의 공격에 나려타곤 수법으로 피할 정도로 쩔쩔 맸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동정호 지하에서 보았을 때보다 상당히 강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기연을 얻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 못 믿는 모양인데, 내가 얻은 기연은 말이다. 귀노!”

연우강은 염자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 뭡니까?”

염자생은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이 말한 기연이란 백령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죽림에 슬쩍 버리고 왔다. 그런데 지금 와서 봇짐을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 저 놈이 그걸 보고 싶어 하잖아.”

“ 장주님이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 무슨 소리야. 그게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강호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고 잘 가지고 있으라면서 배에서 줬잖아.”

연우강은 버럭 소리쳤다.

“ 다시 장주님이 가져가셨습니다.”

“ 내가 가져갔다고?”

“ 그렇습니다. 장주님.”

염자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 난 귀노가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 배에 두고 내린 건 아닙니까?”

귀노는 태연스럽게 연우강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 그랬나?”

“ 보이지 않게 잘 싸두었으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일반 양민들에게는 필요도 없는 물건 아닙니까.”

“ 그렇긴 한데, 우리가 타고 왔던 배 기억해?”

“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주님.”

“ 그럼 나중에 찾아가지 뭐. 모처럼 무공으로 목에 힘 좀 줘 보려고 했는데, 아쉽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나천후를 보았다.

“ 이제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느냐?”

나천후는 피식 웃엇다.

“ 계속 세워놓을 거야?”

연우강은 나천후 건너편 자리로 시선을 주었다.

“ 앉아서 이야기하고 싶단 말이냐?”

“ 지금 내 신분은 금릉 연씨 상단 가주이자 상단주잖아. 신분으로 따지면 삼백만 냥이 없어서 지 마누라에게 도둑질을 시킨 놈보다는 훨씬 높다고 할 수 있지. 비켜라.”

연우강은 앞을 막고 있는 밀천금의대 무인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밀천금의대 무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 있었다.

연우강은 밀천금의대 무인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너 그러다 죽는다!”

“ 감히!”

밀천금의대 무인은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 혹시 가족 있어?”

연우강은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사내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따.

“ 없다!”

싸늘한 목소리가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그럼 죽어도 울 사람은 없겠네. 셋까지 센다. 나천후가 말리지 않거나 네가 비키지 않으면 죽일 거야.”

연우강은 사내의 검에 머물고 있던 시선을 나천후에게로 향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시선을 받든 나천후는 갈등했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이곳까지 데리고 오라고 했다는 건 죽일 마음이 없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놈 또한 그걸 알기에 순순히 따라온 것일 테다.

그런데 문득 놈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기연을 얻었는지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더불어 놈의 앞을 막고 있는 자는 밀천금의대 최고 무인이라 불리는 금의팔영의 한 명인 일수구주섬 섭광이다. 섭광의 실력 정도면 놈을 죽이지 않고도 모욕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금의팔영의 다른 무인들을 보았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 죽이지는 마라, 섭광. 단, 팔은 잘라내도 상관없다.]

결국은 시험해 보기로 했다.

나천후의 명령이 떨어지가 섭광의 기세가 돌변했다. 그는 곧이라도 연우강을 덮칠 듯한 기세였다.

“ 죽음을 택한 모양이구나.”

연우강은 섭광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 얼마든지 공격해 보거라.”

섭광은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차갑게 맞받아쳤다.

놈과의 거리는 네 자. 손은 닿지 않으면서 검을 뽑기에는 너무 가까운 애매한 거리다. 하지만 검을 뽑는 동작이 바로 공격으로 이어지는 쾌검수들에게는 가장 좋아하는 거리다. 뽑는 순간 들어 올리기만 하면 놈의 팔을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 거절하지 않을게.”

휙!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편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연우강의 왼손이 섭광의 얼굴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섭광도 검을 뽑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검 뽑는 연습을 하는 무인은 검이나 또는 몸에 미세한 이상이 생겨도 금세 알아차린다.

지금 섭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때에 비해 검이 묵직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미세하여 거의 느낄 수 없는 정도지만 검이 무겁다는 건 곧 속도의 저하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연우강이 왼손을 들어 올린다고 해도 거리가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을 격하고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권강을 발출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면 자신의 검은 이미 연우강의 팔을 잘라내고 난 다음일 것이다.

섭광은 검이 약간 무겁다는 느낌을 무시하고 동작을 이어갔다. 밀천금의대 최고 쾌검수라는 칭호가 어울릴 정도로 섭광이 검을 뽑는 동작은 빠르고 부드러웠다.

연우강의 왼손이 섭광의 얼굴로 향하는 순간 그의 검 또한 연우강의 왼팔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 내가 .....”

번쩍!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던 순간, 검은 광채가 시야에 들어오고 이마에서 뜨끔한 느낌이 왔다. 섭광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의 검은 연우강 왼팔 바로 아래쪽에 머무럴 있었다.

“ 이건?”

아주 짧은 순간 섭광이 뱉어낸 말이었다.

연우강을 보는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 비해 약간 느리다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늦진 않았다. 그런데 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시선을 들었다. 연우강의 왼손 집게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비가 보였다. 그런데 반지 위쪽에 뭔가가 빠져나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 내가 한 발 빠른 모양이구나.”

“ 비, 비겁한......”

툭!

섭광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파앗!

다시 검은 광채가 섭광의 이마에서 빠져나가 연우강의 왼손 약지로 자리를 잡았다.

사망지환으로 펼치는 일지소였다.

털썩!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섭광의 신형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 허!”

누군가의 입에서 허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섭광이 당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탓이다.

그들은 멍한 얼굴로 시체로 변한 섭광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 섭광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섭광이 비겁하다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사인은 암기였던 것이다.

“ 명심해, 귀노. 무공은 자랑하거나 제압할 목적으로 펼쳐서는 안 돼. 무공을 펼치는 목적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야. 그렇다가 운이 없으면 팔을 잘라내거나 다리를 잘라내는 거라고, 처음부터 팔이나 다리를 자르겠다고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 명심하겠습니다. 장주님.”

“ 계속 무공 자랑하고 싶어?”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나천후를 보았다.

“ 온몸을 비열함으로 둘렀구나. 연우강.”

“ 하지만 저놈은 저승으로 갔고, 지금 이렇게 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우린 앞으로도 계속 대화를 나누게 될 거야. 하지만 나천후 너를 비롯한 저들은 앞으로 육 개월이 지나기 전에 이놈의 이름을 까맣게 잊게 될거야. 언제 그런 놈이 있었느냐 하면서 말이야.”

연우강은 나천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연우강과 염자생이 움직이자 금의팔영은 일제히 살기를 쏟아내며 무기를 잡아갔다. 나천후가 손을 들어 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연우강과 염자생을 공격했을 것이다.

“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살아 있는 게 최고란 말이냐?”

금의팔영을 제지시킨 나천후는 연우강의 왼손으로 시선을 주었다. 왼손 약지엔ㄴ 해골 문양으로 된 검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다. 조금 전 섭광을 살해한 무기였다.

“ 최고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선이라는 뜻이야. 그리고 암기는 무기의 한 종류일 뿐이다. 나천후. 대바히지 못한 놈이 멍청한 거지, 암기는 비열한 무기가 아냐. 암기를 비열한 무기로 치부하면 권장지각을 사용하는 무인 앞에서는 검도 비열한 무기가 되는 거잖아.”

연우강은 나천후 건너편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 그렇다고 권장할 만한 무기는 아니지.”

“ 자! 무기에 대한 논쟁은 그만하고, 돈이나 줘. 넌 모르겠지만 나도 바쁜 사람이야.”

“ 설사 내가 돈을 준다고 해도 넌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 어떡하나?”

나천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비아냥댔다.

“ 그건 네가 걱정할 게 아니잖아. 인마. 넌 일단 삼백만 냥만 내게 두면 돼.”

“ 내가 대금전자에서 가져온 돈은 삼십만 냥에 불과해요, 연 공자.”

듣고 있던 사유라가 끼어들었다.

“ 내 방에서 훔쳐간 금붙이는 어쩌고?”

“ 그것까지 합친다고 해도 오십만 냥 정도죠.”

“ 일 년 이자가 오 할이고 기한은 삼 년이다. 그걸 복리로 계산하면 백육십팔만오천냥이 나오고, 거기에 귀노의 팔을 자른 값까지 합치면 정확하게 삼백만 냥이야. 한 푼도 깎아줄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테냐?”

“ 그럼 넌 암기를 사용하는 나보다 더 비열할 놈이 되는 거고, 지 마누라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아주 질이 더러운 포주 놈이 되겠지.”

“ 소문을 내겠단 말이냐?”

“ 조금 전에 그랬잖아. 난 금릉 연씨 상단의 상단주라고. 그것뿐이라면 괜찮은데 하오밀문의 문주인 허일구하고는 한 때 동업한 적도 있어서 인간적으로 꽤나 친해. 중원 최대 상단과 하오밀문이 합치면, 중원 무림엔 금세 너에 대한 소문이 날 테고, 밀천으로 들어오려고 했던 무인들은 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될 거야.”

“ 소문을 내는 것도 여기서 나가야 가능하지 않을까?”

“ 날 죽이겠다고?”

“ 살인멸구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이 무림이라고 알고 있다. 연우강.”

“ 쯧! 밀천의 천주라는 녀석이 이렇게 통이 작아서야. 이것보슈, 영감.”

연우강은 나천후 오른편에 앉아 있는 나적리를 보았다. 나적리는 말없이 연우강의 시선을 받았다.

지금 나적리는 연우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없애버리고 싶다. 하지만 뭔지 모를 찜찜함이 가슴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잇어 망설여진다. 마치 발을 내딛었는데 아래쪽에 인분이 있는 것처럼.

거기가 아니면 발을 디딜 곳이 없는데도 디딘 후 더러워질 신발과 인분 냄새가 싫어 몸을 피하고 마는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 혹시 저 녀석을 대야벌 같은 거대 세력의 수장으로 앉혀놔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거요?”

“ 최소한 너보다는 나은 것 같구나.”

“ 쯧! 그 나물에 그 밥이네.”

“ 놈!”

나적리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쏘아져 나왔다.

“ 원래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좋은 충고는 마음에 쓴 법이야, 영감.”

“ 좋다. 뭐가 부족한지 말해보거라. 단, 네 녀석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사 천후가 널 살려준다고 해도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내 기운을 푼 나적리는 연우강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 씨팔 새끼들. 이놈저놈 할 것 없이 만나는 새끼들마다 내 목이 지들 손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

연우강은 중얼거리듯 투덜댔다. 하지만 그의 말을 바로 앞에 있는 나적리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 지금 뭐라고 했느냐?”

“ 들었으면서 뭘 물어. 지금까지 내게 뒈진 놈들이 전부 영감 같은 말을 했다는 거야. 단 한 놈도 예외 없이.”

“ 그래서 나도 그럴 거란 말이냐?”

“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런데 계속하고 싶어?”

연우강은 나적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 계, 계속해라.”

나적리는 심호흡을 하여 끓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가 이렇듯 노화를 참고 있는 건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찜찜함 때문이었다. 우선은 저렇듯 놈이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 그런데 우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 이러 개자식, 도저히.....”

“ 아! 맞다. 저놈이 대야벌 같은 거대 세력을 손에 쥐어줘도 이끌어 갈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지. 잘 들어, 영감.”

연우강은 나적리의 말을 잘랐다.

“ 오냐, 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당장 네놈을 쳐죽이겠다. 나 나적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나적리는 이를 부드득 갈며 연우강강을 쏘아보았다

‘ 도대체 어쩌려고.’

곁눈질로 연우강을 보는 염자생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슬쩍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그는 지금 살얼음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곳은 밀천의 최 심처인 천주전이다. 명령이 떨어지면 수천 명의 무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철통같이 포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대야벌 같은 거대 세력은 다스린다고 하는 게 아니라 경영한다고 하는 거야. 경영의 기본은 인적 자원과 자본이야. 그리고 밀천 입장에서 보면 삼백만 냥은 그야말로 푼돈이잖아. 더구나 그 돈은 다른 돈도 아니고 지 마누라가 훔친 돈이고. 그 정도 돈을 결제하는 데 쩔쩔매는 녀석에게 대야벌 같은 거대 세력을 맡기면 경영이 될 거라고 생각해?”

“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돈을 쓰는 건, 쓰지 않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이다. 연우강.”

“ 그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돈을 쓴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두 번째 이유야, 영감.”

“ 유라는 네 집에 굴러다닌 돈을 주웠다. 연우강. 주운 돈을 돌려주지 않는 건 도덕적으로 욕을 먹을 수 있지만 반드시 돌려줘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 그거 알아?”

“ 뭘 말이야?”

“ 여기 귀노가 전에 들어왔다가 대나무 숲에 있는 그놈들에게 왼팔을 잘렸다는 사실 말이야.”

“ 방금 네놈이 말해서 알고 있다.”

“ 그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곳으로 올 때 귀노만 데리고 왔어. 그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해?”

“ 네가 이곳으로 온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렸단 말이야?”

연우강의 말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놈은 대야벌에서도 없애지 못해 안달이다. 무림에서 놈을 도와줄 세력은 단 한 곳도 없다.

“ 영감은 그래도 저놈보다는 낫네.”

“ 무림에서 네놈을 도와줄 세력이 없다는 건 무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놈.”

“ 왜 무림에서 찾지?”

“ 무슨.....”

“ 전에 내가 대야벌에 있을 때 도독동지 양성일 장군이 찾아온 적이 있는데 몰라?”

“ 으음!”

나적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놈에게는 무림 세력보다 더 강한 오군도독부라는 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을 아느냐?”

“ 물론 잘 알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울리는 말이 아냐.”

“ 난 지금 상황에 아주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넌 아닌가 보구나.”

“ 물론이야. 영감. 보통 그런 경우엔 악착같이 버티는 놈이 이기게 돼 있잖아.”

“ 그래서 하는 말이다. 연우강. 넌 버틸 여력이 없다. 왜냐면 가장 소중한 목숨을 잃을뿐더러, 죽으면 금릉 연씨 세가의 재산을 전부 잃게 된다.”

“ 하지만 영감은 천 년 세월을 잃게 되겠지. 물론 손자를 안아보지 못하는 건 부가적으로 따를 테고.”

“ 내가 더 손해란 말이냐?”

“ 나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설사 도독동지라고 해도 네가 이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고, 그 정도 시간이면 얼마든지 무마가 가능하다.”

“ 내가 양성일 장군을 믿고 버틴다는 거야?”

“ 그럼 아니란 말이냐?”

“ 혹시 범천조화신기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

“ 화화호 유설연으로 알고 있다.”

“ 그럼 유설연에게 범천조화신기를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해.”

“ .... 너란 말이냐?”

“ 맞아, 영감. 영감의 손자는 내게 범천조화신기를 줬고, 난 다시 설연에게 줬어. 그런데 며칠 전에 그 녀석을 만났는데 나랑 자자고 하더라.”

“ 잠을 자자고 했다고?”

“ 그 녀석은 가슴이 이만큼 나와 있어, 영감.”

연우강은 주먹을 쥐어 양쪽 가슴에 댔다.

“ 서, 설마 남색?”

“ 여기선 남색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랑 하룻밤 운우의 정을 쌓고 싶어 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영감. 하룻밤 자고 싶어 했던 사내가 빚을 받으러 간다고 하고선 갔다가 실종이 됐어. 그럼 영감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아마 운우의 정을 나누려고 했던 사내가 실종된 곳으로 가서 찾기 시작할 거야. 그러다가 잔인하게 살해됐다는 걸 알게 되겠지. 그럼 밀천은 어떻게 될까?”

나적리는 말없이 연우강을 보았다.

“ 설연 그놈은 내시가 되기 전에 북경의 개작두라고 불렸던 놈이야. 요희나찰섭혼공을 끌어올리고 있을 때는 화화호 유설연이지만, 정말 화가 나면 북경의 개작두로 변한다는 걸 알아야 해. 그 녀석이 동정호 지하에서 군마련의 지옥군마대를 없애는 모습을 밀천의 무인들도 봤을 걸?”

나적리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분명 그때 보고를 받았다.

유설연 그놈은 미친개처럼 지옥군마대 무인들을 없앴다고 하였다.

“ 그리고 밀천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나도 한가락 해. 영감. 귀노처럼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잃을 각오를 한다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고.”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 난 믿을 수 없다. 놈!”

나적리는 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실려 있지 않았다.

도독동지 양성일, 동창 소제독 유설연

밀천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두 사람을 막아낼 방법은 없다.

“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에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을 쓰는 거야. 영감. 내가 이 자리에서 영감을 쳐죽여도 찍소리도 못한 그런 경우 말이야.”

와락!

나적리는 주먹을 틀어쥐었다. 연우강을 쏘아보는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하지만 그는 틀어쥔 양손을 휘두르지 못했다. 조금 전 가슴 한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찜찜함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놈이 바로 후처리가 더러워 피해가곤 하는 인분이었던 것이다.

“ 돈을 주겠다. 연우강.”

“ 빚은 입으로 갚는 게 아니라 돈으로 갚아야 하는 거야. 영감. 그래야 깔끔한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 가져와라.”

나적리는 나천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천후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전표 묶음을 가지고 나와 연우강 앞으로 던졌다.

“ 확인해 귀노.”

연우강은 전표 다발을 염자생 앞으로 밀어놓고 나천후를 보았다.

“ 볼일이 끝났으면 그만 꺼져라. 연우강.”

“ 이왕 왔는데 한 가지 더 처리하고 싶어.”

“ 아직 남은 게 있단 말이냐?”

“ 아까 내가 말했잖아. 하오밀문의 문주인 허일구 영감하고 친분이 있다고.”

“ 그래서?”

“ 지금 허일구 영감이, 아니 하오밀문이 곤란에 처했는데 마땅히 기댈 곳이 없잖아. 그래서 네가 나서줬으면 해서.”

“ 지금 내게 도움을 청하는 거냐?”

나천후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밀림에서는 오십 명의 무영환사대를 해쳤고, 여기서는 섭광을 죽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조부 면전에서 대놓고 협각을 일삼던 놈이 이제는 도와달란다. 이건 뻔뻔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몰염치, 아니 파렴치하다.

“ 호남은 밀천의 안방이니까 가장 알고 있는 자도 너희들이잖아.”

“ 내가 나설 걸로 보느냐?”

“ 응!”

연우강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허!”

나천후의 얼굴이 멍해졌다.

너무 쉽다. 오랜 세월을 살진 않았지만 이렇듯 쉽고 간단명료한 대답은 처음이다. 녀석을 보면 마치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충고 하나 할까?”

“ 충고?”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다스리는 것과 경영한다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넌 영원히 대야벌과 같은 단체의 수장이 될 수가 없다.”

“ 큭!”

나천후는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 웃을 일이 아냐, 인마. 이건 진심에서 하는 충고야. 다스린다는 건 사적인 감정이 주가 되는 행위를 말하고, 경영한다는 것은 공적인 감정이 주가 되는 행위를 말하는 거야. 물론 경영한다고 해서 인간인 이상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어. 하지만 최대한 개인 감정을 배제해야 해. 그걸 못 하면 그 조직은 금세 무너지게 된다.”

“ 그게 지금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 네 상대는 내가 아니고 대야벌이잖아. 그리고 율령궁은 대야벌의 눈과 귀고, 그 눈과 귀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빌미로 합작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 난 말이다. 하오밀문 같은 삼류 문파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우리 밀천의 힘으로 그들을 없애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런 거다.”

“ 쓸모없는 자만심이 잘못됐다는 거다. 나천후. 전쟁은 자만심으로 하는 게 아냐.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날씨를 이용하고, 적의 허점을 이용해서 치르는 게 전쟁이야. 아무리 쓸모가 없다고 해도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야 해, 그게 바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길이라고.”

“ 하지만 합작을 했다가 네놈에게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낫겠지.”

“ 낄낄낄! 자식, 눈치는 귀신처럼 빠르네.”

연우강은 키들키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전표를 세고 있는 염자생을 보았다.

“ 정확하게 삼백만 냥 맞습니다. 장주님.”

“ 볼일 끝났으니까 그만 가자고.”

연우강은 휘적휘적 밖으로 걸어 나갔다.

“ 총관 놈을 안내해 주게.”

연우강의 등을 노려보던 나천후는 성군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 알겠습니다. 천주님.”

성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따라오시오.”

이내 연우강을 따라잡은 성군은 앞서 나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연우강과 염자생은 현기환사죽영진의 중심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가면 될 거다.”

성군은 한동안 연우강을 쏘아보다가 오던 길로 몸을 날려갔다.

성군의 신형이 완전하게 사라지자 염자생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 잘된 겁니까?”

지금 염자생은 지옥에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연우강이 그렇게 일을 크게 벌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 돈도 받았고, 놈들도 율령궁과 전쟁을 하겠다고 했으니까 목표는 달성했다고 봐야지. 그런데 긴장한 거야?”

“ 그럼 그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 빠져나올 자신 없어?”

“ 장주님은 두 팔이 멀쩡하지만 전 하나밖에 없습니다.”

염자생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 다리는 아직 두 개잖아.”

“ 왼팔이 없는데 다리까지 포기하란 말입니까?”

“ 한쪽이 다 없으면 보기 흉하니까 오른 다리를 내주면 균형이 맞을 것 같은데, 아냐?”

“ 끄응!”

염자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런데 그거 사실입니까?”

“ 뭐가?”

“ 유설연 소제독에게 이곳에 올 거라고 했습니까?”

“ 그 녀석에게 내 행선지를 일일이 밝히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

“ 그럼?”

“ 상대방이 믿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게 진짜 협박이야. 귀노. 아무리 좋은 패를 쥐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으면 협박은 아무 소용 없어.”

“ 진짜 지옥에 다녀온 게 맞네요.”

염자생은 넋을 잃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염자생 또한 강호 공적이었으니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연우강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살아왔던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연우강은 검을 입에 물고도 제 하고 싶은 말은 다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것도 상대방에 대한 욕을 말이다.

“ 그럼 화화호가 하룻밤 자자고 했다는 말도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이번 질문은 허공에서 흘러나왔다.

허공에서 연우강을 따르고 있는 그녀는 밀천 정탐을 마친 몽요였다.

“ 그건 사실입니다.”

“ 정말 유설연이 자자고 했어요?”

“ 그놈이 황제를 품고 싶은 모양입니다.”

“ 황제를 품어요?”

“ 황제가 드디어 여색에 질려서 남색을 찾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황제를 만족시켜줄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한 겁니다.”

“ 잘 되면 정말로 최고 권력자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 하지만 백령처럼 잘 벼려진 칼날을 밟고 사는 삶이 시작되기도 하죠.”

“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서 그렇다는 거죠?”

“ 그렇습니다. 몽요. 겉으로는 키들키들 웃고 있지만 설연 그 녀석은 지금 목숨을 건 도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들리는 말로는 가만히 있어도 동창제독이 될 거라고 하던데, 아닌 모양이죠?”

“ 새로운 실력자가 등장했거든요.”

“ 황만에서 만났던 남경왕 주진무를 말하는 거예요?”

“ 그렇습니다. 북경 상황도 그만큼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렇군요. 정말 칼날을 밟고 살아가는 게 ... 백령을 선물로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칼이란 말을 중얼거리자 문득 백령이 떠올라 물었다.

“ 이미 나천후 그놈에게 들어갔습니다. 몽요.”

“ 들어갔다고요?”

“ 이곳 어딘가에 버리고 갔거든요.”

연우강은 주변을 가리켰다.

“ 버리고 갔다는 건 무슨 소리죠?”

“ 그냥 주는 건 너무 속보이잖습니까. 그래서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 백령이라는 엄청난 보물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그들이 믿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 이럴 때를 일컬어 알고도 속는다고 하는 겁니다.”

“ 알고도 속아요?”

“ 네, 돌려주기에는 너무 대단한 물건이니까. 아마 저라도 절대 돌려주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백령은 표가 금세 나잖아요.”

“ 검집을 바꾸면 되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 검집을 바꿔요?”

“ 원래는 제가 검집을 바꿔서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습니다.”

“ 우강!”

답답한 듯 몽요가 버럭 소리쳤다.

“ 제천강 그놈의 머리꼭지를 돌게 만들기 위해서는 검집을 바꿔야 하거든요.”

연우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편.

나적리와 나천후는 백령과 백무탈혼유마검이 적힌 비급을 곤혹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연우강기 기연을 얻었고, 그 물건을 배에 두고 내렸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더불어 연우강 걸로 보이는 봇짐을 주웠다며 부하가 가져왔을 때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봇짐 안에서 나온 물건을 보고는 경악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파천육기의 하나인 백령과 백령으로 펼치는 무공인 백무탈혼유마검이었던 것이다.

“ 정말로 놈이 이걸 잃어버렸다고 보십니까?”

나천후가 스스로에게 묻듯 나적리를 향해 말을 건넸다.

“ 그럼 일부러 놓고 갔다고 생각하느냐?”

“ 이건 당장 강호 무림을 혈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절세 보물입니다. 조부님.”

“ 그럼, 놈이 이걸 일부러 놓고 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 그걸 알 수 없기에 답답하다는 겁니다. 조부님.”

나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우강이 백령을 놓고 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놈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곳에 백령과 백무탈혼유마검이 있다는 소문을 내는 것인데, 죽고 싶은 자가 아니라면 백령을 얻겠다고 밀천 총단으로 들어올 리가 없을 것이다.

“ 백령을 지킬 자신이 없는 게냐?”

“ 자신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그럼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 놈이 잃어버렸든 의도적으로 놓고 갔든 파천육기의 하나인 백령이 네 손에 들어왔고, 넌 잘 이용하면 된다. 아니 백령으로 놈의 목을 잘라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너무 표시가 나니까 검집만 바꿔라. 아니, 검집을 검게 칠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구나. 그리고 넌 밀천의 천주다.”

“ 알겠습니다. 조부님.”

나천후는 백령을 불끈 틀어쥐었다.

할아버지 말이 맞다. 놓고 갔든 잃어버렸든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파천육기의 하나인 백령이 손에 들어왔고, 잘 사용하면 될 것이다.

‘ 네놈에게 받은 선물로 네놈의 목을 반드시 잘라주마, 연우강.’

나천후의 잇새로 이가는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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