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17화 (117/232)

제 8장 머리를 올리겠네.

공동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이름난 곳이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계곡들조차 선경이 따로 없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속세를 떠난 수도승이나 도인들이 많이 찾는다.

더불어 알려지지 않은 계곡 깊숙한 곳에는 무림 문파가 똬리를 틀기도 했는데 조운곡의 철응방도 그 중 한 곳이었다.

철응방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무림 문파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전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새 때문이다.

그들이 키우는 설산신조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천산이 서식지며, 비응마조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곤륜산이 서식지라 사막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인적이 드물고, 수림이 울창한 공동산은 새를 키우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철응방의 생계 수단은 당연 새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관상용 새나, 사냥용 새 등 갖가지 새를 키우고 있다. 조운곡이란 명칭 또한 새가 구름처럼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조운곡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계곡을 가득 채우는 새 소리에 놀란다. 비둘기 소리, 참새 소리, 앵무새 소리, 매 울음소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만은 새 소리가 들려온다. 가히 새들의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랬던 곳에 활활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불빛이 비추는 곳에는 처참하게 잘려나간 시체가 뒹굴고, 그 시체들 주변에 흥건하게 피가 고여 있었다.

“ 악독한 놈들!”

시체들 사이에서 원한에 사무친 외침이 흘러나왔다. 오른 팔과 왼다리를 잃은 채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이 사람은 철응방의 방주 귀조 전무웅이었다.

전무웅은 길게 늘어서 있는 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들이닥친 건 한 식경 전이었다.

철응방으로 난입해 들어온 그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놈들은 어른과 아이 아녀자를 가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놈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 이곳에 쳐박혀서 새나 길렀어야 했다. 전무웅.”

꼽추 노인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낫을 들고 있는 노인은 천살원 삼대 고수의 한 명인 마악추 천잔성이었다.

“ 대야벌이란 말이냐?”

천잔성을 알아본 전무웅은 고함을 내질렀다.

설마 대야벌에서 철응방을 공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들을 잠룡으로 받아주었던 곳이 대야벌 아니었던가.

“ 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말았다. 전무웅.”

“ 내가 무슨 일을 했단 말이냐?”

“ 율령궁의 전서구를 없앤 사실을 모른다고 할 테냐?”

“ 율령궁의 전서구를 없앴다고?”

문득 아들이 설산신조와 비응마조를 가지고 가던 날이 떠올랐다. 녀석은 이번 일로 인해 어쩌면 핍박을 받을지도 모르니 잠시 몸을 피해 있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전서구나 잡아먹는 비조일 뿐인데 무슨 핍박을 받겠냐며 웃었다. 그러면서 집 걱정은 하지 말고 잘하라고 했다.

“ 네놈이 기른 비조들이 우리 율령궁의 전서구를 몽땅 잡아먹었다.”

“ 그러니까 전서구를 잡아먹었다고 우리 철응방을 공격했단 말이냐?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기껏 비둘기를 없앴다고.”

“ 맞다. 놈! 철응방이 멸망한 이유는 네놈이 말한 기껏 비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한다. 너희들은 그 비둘기보다 못한다는 걸 말이야. 대야벌의 풀 한포기보다 못한 놈들이 너희들이란 말이다.”

“ 언젠가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천잔성, 반드시.”

전무웅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 대야벌이 하늘인데 누가 천벌을 내린단 말이냐.”

천잔성은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보았다.

“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라!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죽여라!”

“ 존명!”

천살원 무인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조운곡 곳곳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비명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사백여 명에 달했던 철응방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 압송하라!”

부하들이 돌아오자 천잔성은 차갑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천잔성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살원 무인등른 커다란 자루에 전무웅을 담았다. 그러고는 그 자루를 나무에 달아 묶어 사냥감을 매고 가는 것처럼 나무를 어깨에 걸치고 몸을 날렸다.

천잔성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밀천의 천주인 나천후와 그의 부하들이었다.

“ 그냥 보내는 겁니까?”

총관 성군은 아쉬운 얼굴로 멀어지는 천살원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성군을 비롯한 밀천무영대가 천살원 무인들을 뒤따른 이유는 그들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천주가 주살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이었다.

“ 전무웅마저 죽였더라면 저들도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네. 총관.”

“ 전무웅 때문에 살려주었단 말입니까?”

“ 전무웅은 잠룡 십 조에 소속돼 있는 전관수의 아비네. 그런 그를 살려서 데려갔다는 것은 율령궁에서도 이번 일에 연우강이 관련돼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 아닌가. 굳이 나설 이유가 없지.”

“ 연우강이 율령궁을 상대로 버텨낼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 율령궁의 서방사자영이 괴멸됐다는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 정보를 다루는 부서에서 정보 기능이 마비된다는 건 치명적입니다. 천주님. 전서구가 정상적인 기능을 했더라면 그렇게 당하진 않았을 겁니다.”

“ 설사 그렇다고 해도 서방사자영이 보유한 밀정의 수는 이천 명이네. 만일 자네가 연우강 입장이라면 할 수 있겠는가?”

나천후는 계곡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그건.....”

성군은 할 말이 없었다.

이천 명의 율령궁 밀정들 중 얼굴에 밀정이라고 써놓고 다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을 어떻게 하면 일반 양민들과 똑같이 보일지를 연구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 자들을 찾아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거늘, 전부 없애버렸다. 물론 작전을 펼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준 자들은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하오밀문 문도들일 것이다. 하지만 하오밀문 문도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한 사라은 연우강이다. 그보다 더 나은 조건이라고 해도 연우강처럼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없었다.

“ 대야벌로 들어온 지 삼 년이 됐지만 아직 놈이 생각보다 훨씬 강한 고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없네. 총관. 단지 대야벌에서 배운 몇 가지 잡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만 알고 있네.”

“ 대야벌에 그의 무공만 알려도 상당한 타격을 줄 것 같은데, 왜 알리지 않은 겁니까?”

“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꼭두각시를 부수는 자라네.”

“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고 있는데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 그렇지. 그보다 이세 천마라는 자에 대해서는 알아 봤는가?”

“ 사심마유 구양, 잔결마유 사풍한, 냉천탈명 석방연, 독안마협 이철웅 등 내로라하는 무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 그 정돈가?”

나천후는 깜짝 놀랐다. 방금 성군이 말한 자들은 중원 전역에 큰 이름을 날리진 못했지만 한 지역의 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 전부가 죽임을 당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 또 있는가?”

“ 최근엔 광혈사마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 광혈사마까지?”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광혈사마는 개세혈마 조람, 혈마왕 주자양, 광혈사제 보추, 탈백신도 지용명의 네 명을 일컫는 말로, 경천사마 이래 가장 강한 마도고수로 알려진 자들이다.

하지만 놀라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 삼 초 걸렸답니다.”

“ 사, 삼초라고?”

입이 딱 벌어지는 말이었다. 다른 자들도 아니고 광혈사마를 없애는 데 삼 초밖에 걸리지 않다니. 설사 나천후 그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 정말인가?”

나천후는 확인하듯 물었다.

“ 소문이라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자들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잠룡들이 그 둘을 쫓고 있는 모양입니다.”

“ 잠룡대라는 단체를 만들었다고 했는가?”

“ 그렇습니다. 대주는 담대무궁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게 담대무궁이 왼팔을 잃은 곳이 동정호 지하가 아니라 삼합평이었다고 하더군요.”

“ 하하하! 세상은 원래 그런 거네.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없는 자들이 세상을 향해 외치면 공허한 공염불이 되는 것이고, 거짓이라고 해도 가진 자들이 외치면 사실이 된다네. 아마 이제는 담대무궁이 팔을 잃은 장소가 동정호 지하라고 외치면 그 사람은 몰매 맞을 거네.”

“ 그러게 생겼습니다.”

“ 아무튼 그 이세 천마라는 자를 주시하도록 하게.”

“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 만날 수만 있다면 나쁘진 않겠지.”

“ 지금 이쪽을 향해 오는 중이랍니다.”

“ 호남으로 온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천주님.”

“ 그럼 굳이 날을 잡지 않아도 자연스레 보게 되겠구먼.”

“ 그자를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 그렇게 하게. 그리고 하오밀문에 대한 건 어떻게 돼 가는가?”

“ 워낙 점 조직이라 전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 포섭도 힘든가?”

“ 포섭할 수 있는 자는 몇 명 골라놨습니다.”

“ 그자들의 팔자를 바꿔주게.”

“ 연우강이 펼치는 작전 내용을 알아오란 말입니까?”

“ 내가 원하는 건 율령궁과 연우강이 함께 몰락하는 거네. 어느 한쪽도 놓치고 싶지 않네. 총관.”

“ 알겠습니다. 천주님.”

“ 빨리 가서 쉬세.”

밀천 무인들이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곧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우담보는 망연자실했다.

전서구가 마비된 지 이십 일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서방사자영 밀정들이 몽땅 사라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몽땅 사라졌다는 건 땅속에 묻혀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자들도 아니고, 상대는 하오밀문이 아닌가. 아무리 잠룡 십 조가 측면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우담보뿐만이 아니었다.

각 원위 원주들은 물론이고 이번 일로 인해 호출당한 수뇌들까지도 멍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사실 현장에서 몸으로 뛰는 그들로서는 더더욱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십여 일 만에 이천 명이 사라졌는데 아직 시체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벌컥!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천안원 원주 음양뇌 유선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첩지가 잔뜩 들려 있었는데, 원래는 첩지를 바탕으로 일목요연하게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럴 경황이 없이 바로 들어온 것이다.

“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는가?”

“ 시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입니다.”

“ 어딘가?”

“ 호남 전역입니다.”

유선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서방사자영 밀정들의 시체가 아니란 말이군.”

“ 그렇습니다. 궁주님. 서방사자영 소속 밀정들은 아직 오리무중이고 다른 부서의 밀정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확인된 수만 오백 명 정도입니다.”

“ 어떻게 죽었나?”

“ 대부분이 극심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 결국 고문으로 다른 밀정을 알아내고 다닌다는 말이군.”

율령궁의 약점이었다. 점 조직으로 이루어진 하오밀문과 달리 율령궁 밀정들은 대부분 동료들의 위치를 알고 연락을 취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 최대의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 그렇습니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 다른 건 없는가?”

“ 오늘부터는 정보가 정상적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 정보가 올라오는 속도는 어떤가?”

“ 전서구로 소식을 주고받을 때보다는 최소 사흘에서 나흘 정도는 늦다고 봐야 합니다.”

“ 나흘이라.....”

정보를 다루는 부서에서 나흘은 엄청난 시간이다.

아니 그 시간이면 이곳에서 소식을 접하고 있을 때 사건은 이미 종료돼 있을 것이다.

“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적을 궤멸시킬 수 없습니다. 궁주님.”

천법원 원주 만법 이사진이 입을 열었다.

“ 말해보게.”

우담보는 이사진을 보았다.

“ 지금까지 우리는 적의 위치를 찾고, 그 다음엔 천살원 집행사자를 보내 없애는 방법을 써왔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이유는 전서구였습니다. 전서구를 통해 적의 위치를 알아내고, 집행사자가 출병하는 식이었죠. 하지만 전서구가 사라진 지금 우린 그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적을 끌어들여서 처리해햐 합니다.”

“ 유인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현재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 하지만 놈들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 없네.”

“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 방법이 있는가?”

“ 함정입니다.”

“ 정보를 흘리자는 말이구먼.”

“ 그 수밖에 없습니다.”

“ 좋네. 일단 의견을 모아서 작전을 세워보도록 하게. 단, 작전 보고서에는 자네들 머리도 올라가 있어야 한다는 걸 명심하게.”

순간 실내가 싸늘하게 변했다.

보고서 위에 머리를 올리라는 말은 이번 작전에 목숨을 걸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유선 일행은 말없이 우담보를 보았다.

“ 난 잠시 나갔다 오겠네.”

우담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한낮의 열기가 스러지지 않은 듯 밖은 후끈하다. 미풍이 불고 있기는 한데 눅눅한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 오히려 짜증만 불러일으킨다.

“ 쥐에게 물린 셈이군.”

우담보는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보 기능이 마비된 후 기껏 이십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오밀문을 상대하면서 이천이나 되는 밀정을 잃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다. 이제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목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 결국 이 우담보의 목을 거는 수밖에 없게 됐군.”

우담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는 듯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었다.

“ 접니다. 궁주님.”

그때 어둠 속에서 총관 유악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담보는 고개를 돌렸다.

“ 무슨 일인가?”

“ 공동산으로 갔던 천 사자가 돌아왔습니다.”

“ 그렇군. 그걸 잊고 있었군 난 이미 악마가 되기로 했다는 사실을.”

우담보는 피식 웃었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악태는 의아한 얼굴로 우담보를 뚫어지게 보았다.

“ 아니네, 가세.”

우담보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전무웅은 전서구를 다루는 지하에 있는 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 다녀왔습니다. 궁주님.”

우담보가 들어가자 천잔성이 고개를 숙였다.

“ 수고했네. 천 사자.”

우담보는 감옥으로 시선을 주었다. 감옥 안에는 팔과 다리가 하나씩 잘린 자가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철응방의 방주 전무웅이었다.

전무웅은 고개를 들어 감옥 밖을 보았다.

“ 천벌을 받을 거다, 우담보. 너희 대야벌은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 어떻게 처리했는가?”

우담보는 전무웅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저놈만 살려 두었습니다.”

“ 그랬군. 지금 ..... 피곤한가?”

“ 아닙니다. 궁주님.”

아직 할 일이 더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천잔성을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 그럼 가세.”

우담보는 성큼성큼 걸어 감옥을 나갔다.

건물을 나선 우담보는 천잔성을 데리고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 차 한 잔 할 텐가?”

우담보는 한편에 준비돼 있는 찻잔을 탁자 앞으로 놓으며 물었다.

“ 괜찮습니다. 궁주님.”

“ 피곤할 텐데, 한 잔 하게.”

우담보는 삼매진화로 물을 데워 찻잔에 따랐다.

찻잔으로부터 뿌연 수증기가 올라오자 준비한 찻잎을 넣어 천잔성에게 건넸다.

“ 감사합니다. 궁주님.”

“ 하오밀문 문도들이 숨어 있는 곳을 아는가?”

우담보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본론을 꺼냈다.

“ 그것까지는......”

천잔성은 말끝을 흐렸다.

“ 맞네. 그놈들은 거의가 점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알아내기가 쉽지 않네. 하지만 알아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것도 아니네.”

“ 밀정들을 통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 물론이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반드시 피를 동반한다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 있네.”

“ 피를 통한 해결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입니다.”

“ 그래서 자네를 불렀네.”

“ 말씀해 주십시오. 궁주님.”

“ 하오밀문의 쥐새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 바로 기루와 객잔에서 기생하는 건달들이라네.”

“ 그놈들을 족치면 하오밀문 쥐새끼들의 신상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는 말이군요.”

“ 그렇다네.”

“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궁주님.”

“ 아니네, 천 사자. 자네를 비롯한 잔살단은 굳이 지부로 돌아올 필요 없네. 건달들로부터 얻은 정보만 전해주면 되네.”

“ 알겠습니다. 궁주님.”

천잔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잔살단이 도착한 곳은 군악대로였다. 군악대로는 장사의 최고 번화가로 약 이백 장 가량 되는 대로를 중심으로 좌우 측은 물론이고, 작은 골목길 주변까지 전부 유곽과 기루로 들어차 있는 곳이었다.

“ 오는 중에 임무는 충분히 숙지했을 거라고 믿는다. 지금부터 건달들에게 핍박받는 기녀와 건달들을 구하는 임무를 시작한다. 하오밀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놈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죽이고, 모르는 놈은 바로 죽여라! 단 한 놈도 남기지 마라.”

“ 존명!”

집행사자들은 낮게 소리치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잠시 후 후미진 골목 안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비명은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았다. 하지만 그 비며에는 고통스러움뿐만 아니라 아주 지독한 공포가 어려 있었다. 천잔성은 좌우측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유곽 앞에 나와 있던 몇몇 기녀들이 손님으로 착각하고 다가왔지만 천잔성의 몸에 어린 진득한 살기에 진저리를 치며 멀어졌다. 이백 장에 달하는 길을 천천히 걸어 대로 끝에 당도했다. 대로는 좁은 길로 나뉘어 좌우 측으로 이어져 있었다.

“ 여깁니다. 대주님.”

오른편 어둠 속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엔 살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방갓을 눌러쓴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오른손 손가락이 하나밖에 없어 잔지괴마라고 불리는 피적인이었다.

천잔성은 피적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피저인이 서 있는 주변엔 건물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 장사파라는 건달 조직이 이곳을 장아갛고 있답니다.”

“ 두목은?”

천잔성은 피적인을 보며 물었다.

“ 잡아두었습니다.”

“ 안내해라.”

“ 모시겠습니다.”

피적인은 허름한 이층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시체가 즐비했다. 건물에 모여 있던 건달들의 시체들이었다.

장사파의 두목 장룡이라는 자는 이층에 있었다.

그 역시 이래층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정육점 고기처럼 난자돼 있는 그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 알아낸 것은?”

장릉이란 자를 흘끔 쳐다본 천잔성은 피적인을 보았다.

“ 여기 있습니다.”

피적인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 위에는 피로 쓴 듯 붉은색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 몇 명이지?”

“ 삼십 명에 대한 신상정보가 적혀 있습니다. 맨 위에 적혀 있는 강칠우라는 놈이 장사 총책입니다.”

“ 이건 밀정에게 전달하고 우린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 알겠습니다. 단주님.”

곧이어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천잔성과 피적인의 신형이 실내에서 모습을 감췄다.

잔살단이 알아낸 명단은 곧바로 장사 지부로 전해지고, 우담보의 손으로 들어갔다.

“ 이래 가지곤.”

우담보는 얼굴을 찌푸렸다.

건달이 몇 명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을 전부 없애고 얻어낸 하오밀문 문도들의 수는 기껏해야 서른 명. 물론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곳 또한 이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들이는 공에 비해 효과가 너무 미약하다.

“ 빌어먹을 놈들!”

이번 상대는 하오밀문이 아니라 잠룡 십조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하오밀문이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대항을 해온다고 해도 서방사자영이 몰살당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우습게 됐어.”

잠룡 십 조는 일 년 전부터 많은 문파에서 없애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심지어 담대천호가 성주로 있는 무성의 무영이나 천상천 무인들마저도 실패했다. 그들이 실패한 일을 율령궁이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을 듯했다.

“ 결국은 그 수밖에 없는......”

“ 접니다. 궁주님.”

그때 밖에서 유악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인가?”

“ 범 궁주께서 오셨습니다.”

“ 모시게.”

“ 허허허! 정신없이 바쁘구먼.”

안으로 들어온 범일승은 미소를 지으며 우담보 건너편으로 앉았다. 우담보는 유악태가 가져온 찻잔에 찻물을 따라 건넸다.

“ 이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녀도 되는가?”

대야벌 또한 사월림과 만마림 림주 사건 때문에 상당히 급박하게 돌아가는 걸로 알고 있다. 이렇듯 한가하게 나돌아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 정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네.”

“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건가?”

“ 방법은 있는데 시간이 없네. 며칠 있으면 화화호 그 계집놈이 명령서를 가지고 출발할 거라는 소식을 받았네.”

“ 하면?”

“ 놈이 대야벌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처리할 참이네.”

“ 유설연 그놈에게 대야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군.”

“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놈에게 좋은 선물이 될 거네.”

“ 그런 일이 있으면 더더욱 벌에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 그거야 어차피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와 나머지 문파들의 싸움인 벌내쟁투가 아닌가. 굳이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벌내쟁투를 지켜보는 것보다는 사후 처리에 더 신경을 써야지.”

“ 사후 처리라면........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없앴을 때 동창에서 해올 압박을 무마시키기 위한 조치를 말하는 건가?”

“ 그렇다네.”

“ 이곳 호남에 누군가가 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데 아닌가?”

동창에서 해올 압박을 무마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껏 공을 들였던 금의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더불어 막후 교섭을 위한 장소로는 동창 무인들이 깔려 있는 북경보다는 한적한 외곽이 좋다.

범일승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금의위 실력자 중 누군가가 이곳에 와 있다는 의미였다.

“ 천리포영 남철진이 호남에 들어와 있네.”

“ 그랬군.”

우담보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대야벌에서는 중원은 물론이고 강호 무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자들을 주시해왔다. 남철진 또한 그동안 주시했던 자들 중 한 명이다. 그가 어디로 어떻게 움직였는지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은 정보단체의 수장인 자신인데, 오히려 범일승에게 듣고 있다.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 허허! 너무 그렇게 심란해하지 말게. 난 정보단체 같은 건 키우지 않을뿐더러 앞으로도 키울 생각이 없으니까.”

“ 그럼 남철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자가 누군가?”

“ 우리 모르게 정보 단체를 운용하고 있는 자가 누군겠는가?”

“ 만 군사란 말인가?”

“ 그렇다네. 그리고 자칭 천마라고 하는 자에 대해서도 알아봐 달라고 했네.”

“ 그자는 잠룡대에서 맡기로 하지 않았는가?”

“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무인 상당수가 그 두 명에게 죽임을 당했네. 그런데 그 두명은 지금까지 삼 초 이상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더구먼.”

“ 영웅 탄생이 임박했단 말인가?”

“ 그렇다네. 이미 이세 천마의 위명은 등천대룡 담대무궁의 이름을 눌렀네. 대야벌에서조차도 이세 천마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에 오를 정도네. 누구도 담대무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네.”

“ 벌주의 속이 타겠구먼.”

“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편할 리가 없겠지.”

“ 그럼 어떻게 할 참인가?”

“ 일단은 잠룡대에 맡겨두고 그들로 안되면 천상천에서 나서기로 했네.”

“ 무슨 명분으로 그를 처리한단 말인가?”

천상천에서 나서기로 했다는 것은 자칭 이세 천마라는 자를 강호 공적으로 만들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세 천마라는 자는 지금껏 도전해 온 자들과 비무를 해서 승리했을 뿐이다. 그 광경은 수많은 무인들이 지켜보았다. 즉 강호공적으로 몰기에는 이세 천마는 너무 드러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자를 강호 공적으로 몬다면, 오히려 떠오르는 영웅을 질시하여 강호 공적으로 만들었다며 역공을 받게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득보다 실이 많은 결과가 나온다.

“ 클클클! 어차피 무림공적이나 영웅은 우리 대야벌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뭐가 걱정인가?”

“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이번 일은......”

물론 범일승의 말을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껏 강호상에 나타났던 무림공적들은 공분을 살 정도로 잔악한 자들도 있었지만 대야벌 체제 유지를 위해 만들어 낸 자들이 더 많았다. 무림공적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 강호 무인들의 대야벌에 대한 신망과 경외감을 동시에 얻어낼 수 있다. 즉, 무림 공적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아니 느낌이 좋지 않다고 해야 했다. 어쩌면 이세 천마라는 자를 건드리는 것이 자충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그건 그렇고, 지부 분위기가 왜 이런가?”

분위기가 무겁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수백 명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면 설사 전쟁 중이라고 해도 이런저런 소음이 나야 한다. 그런데 경비를 서던 무인들부터 시작하여 이곳으로 안내해 주었던 총관 유악태까지 마치 상을 당한 사람처럼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만 군사가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던가?”

“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 서방자사영이 괴멸당했네.”

범일승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서방사자영이라면 천안원 네 조직 중 한 곳이고, 인원은 이천 명이다. 그런 곳이 괴멸당했다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범일승은 우담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 사실이군.”

범일승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먼저 전서구들이 몽땅 사라지고, 정보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공격을 받은 모양이네.”

“ 그래서 대야벌로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은 거군. 연우강인가?”

“ 그렇네.”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끝까지 말썽을 부리는군.”

문득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영감. 대야벌 무력이 머리 털도 없는 그 머리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며 당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요.’

놈은 대야벌 조양궁 궁주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놈이 제 집안의 돈만 믿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뛴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놈이 점점 강력한 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그것도 삼년도 지나지 않아서.

“ 말썽이 아니네. 범궁주. 놈은 장차 우리의 최고 적이 될 놈이네.”

“ 그렇게까지 보는가?”

“ 더 이상 내 자신을 속이지 않기로 했네. 그놈은 지금껏 내가 겪어보았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두려운 놈이네. 놈을 없애지 못하면 우린 먹히게 될 걸세.”

겪어보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천 명의 부하를 잃고 나자 우담보는 이제야 연우강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군.”

“ 물론이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할 거네. 설사 그것이 비열한 짓이라도 말이네.”

“ 자칫 잘못하면 매장될 수도 있네. 우 궁주.”

“ 이천 명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묻어버린 놈이네. 자칫 잘못하면 매장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죽네. 난 비로소 그걸 깨달았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이나 잘해 주게.”

우담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회의실로 가는 건가?”

범일승은 절로 얼굴이 굳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이나 잘해 주라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었다.

“ 작전을 어떻게 세웠는지 알아봐야지.”

“ 난 여기서 기다리겠네.”

범일승은 찻잔에 다시 물을 따랐다.

어떤 작전을 세웠는지 궁금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남겠다고 한 것은 율령궁의 일에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하게.”

집무실을 나선 우담보는 아래층 회의실로 내려갔다.

우담보가 들어와 빈자리로 앉자, 유선은 곧바로 보고서를 가져왔다.

“ 일단 설명부터 들어보세.”

우담보는 받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유선을 비롯한 수뇌들을 보았다.

“ 우리가 가장 빠른 시간에 하오밀문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잠룡 십 조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그건 나와 생각이 같군. 계속하게.”

“ 하지만 잠룡 십 조에는 오십 명의 잠룡을 제외하더라도 지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이 있고, 전대 황궐 궐주였던 태황야 이자승이 있습니다.”

“ 우리 율령궁에서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조직은 천살원 밖에 없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문제는 천살원의 덩치가 너무 커서 이동을 시작하면 금세 눈에 띈다는 겁니다.”

“ 그래서 조를 나눈 건가?”

우담보는 보고서로 시선을 내렸다. 천살원은 전부 스무 개 조로 나뉘어 있었다.

“ 그렇습니다. 궁주님. 각 조 당 일백 명으로 하였고, 지원이 필요한 경우는 천안원과 천법원 밀정들 중 무공 실력이 출중한 자들을 뽑아 조달하기로 하였습니다. 무인을 뽑는 작업은 지금 진행중입니다.”

“ 작전 범위를 동정호 주변으로 한정한 이유는 뭔가?”

“ 그동안 올라온 정보들을 종합한 결과, 하오밀문 수뇌들은 물론이고 잠룡 십 조가 머물고 있는 곳이 동정호 주변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 율령궁의 모든 역량을 동정호 주변으로 집중하겠단 말인가?”

“ 마악추 천잔성이 이끄는 삼 조는 남쪽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 이유는?”

“ 이번 작전의 관건은 잠룡과 지옥의 죄수를 떼옪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그들을 떼어놓을 수 있다고 보는가?”

“ 잔살단이 남쪽에서 하오밀문 문도들을 없애고 다니면 지옥의 죄수들은 남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 지옥의 죄수들만 간다고 확신한다는 말이군.”

“ 잠룡들은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무슨 수로 잠룡들을 이곳에 잡아둔다는 말인가?”

“ 척살령을 발동해 주시면 가능합니다.”

“ 척살령?”

우담보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척살령은 그도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척살령.

붉은 색으로 척살이란 글이 음각돼 있는, 평범하게 보이는 둥근 패. 하지만 손바닥 절반 크기의 둥근 패가 주는 무게는 상당하다.

‘ 척살령의 이름으로!’

척살령은 그 한 마디로 대변된다.

집행사자로서 임무는 대부분 기간이 정해져 있고, 목표물이 찾아낼 수 없는 곳이나 중원 밖으로 도망치게 되면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 그런 경우엔 보통 ‘미결’로 분류하여 임무를 종료하곤 한다.

하지만 척살령으로 내려진 임무는 다르다.

임무를 완성할 때까지 주어지는 시간은 무제한인 것이다. 즉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 이걸 봐 주십시오. 궁주님.”

유선은 오른편에 두었던 종이 뭉치를 들어 우담보 앞으로 놓았다. 우담보는 몇 장의 종이를 들어 올렸다.

하남 신검세가

가주 칠양검 신도장오

가솔 총 삼백오십 명.

섬서 섬서마가

가주 금귀 마주영

가솔 총 사백이십 명.

호복 마룡전가

가주 쌍검 사관정.

가솔 총 삼백 삼십 명.

광동 광동 차가.

........

몇 장을 읽어본 우담보는 다시 유선을 보았다.

“ 척살령의 이름으로 집행해야 할 대상입니다.”

“ 계속해 보게.”

“ 먼저 이곳에 철응방의 방주 전무웅이 수감돼 있다는 사실을 연우강에게 알리고, 전무웅에게는 척살단이 갈 행선지를 가르쳐 줍니다.”

“ 연우강이 척살단의 다음 행선지를 알기 위해서는 전무웅을 구해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 그리고 우린 이곳 장사에 함정을 파고.”

“ 철응방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잠룡 십 조의 선택은 이곳으로 달려오거나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 두 가집니다.”

“ 잠룡 십 조가 이곳으로 달려오면 어떻게 되는 건가?”

“ 이곳 장사엔 제 사 조와 천살원과 천안원에서 선발한 무인 이백 명이 놈들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삼백 명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 굳이 전부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씩 줄여나가면 됩니다.”

“ 다른 곳이 남았으니까 급할 필요가 없단 말이군.”

“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척살단이 섬서마가를 택한다면 그곳을 초토화시키고 가주 마주영만 살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전무웅에게 그랬던 것처럼 척살단의 다음 행선지를 마주영에게도 가르쳐 줍니다.”

“ 놈들을 끌고 다니면서 조금씩 줄여나가는 작전이군. 좋네 유원주. 그럼 놈들이 각자의 가문으로 돌아갈 경우엔 어떻게 되는가?”

“ 동정호 주변에 친 천라지망 속에서 죽게 됩니다.”

“ 나쁘지 않군. 하지만......”

우담보는 유선 일행을 찬찬히 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 만일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 우린 파멸이라는 걸 아는가?”

“ 보고서에 저희들 머리를 올렸습니다. 궁주님.”

“ 그럼 자네들 머리 위에 내 머리만 올리면 되는 거군.”

우담보는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유선을 비롯한 수뇌들이 짠 작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아니 좀 더 세밀하고 계획적이다.

“ 좋네. 나도 머리를 올리겠네.”

우담보는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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