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차가운 분노
< 허허허! 내가 보기 좋게 한 방 먹었구나, 연우강.
정말 대단하다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네 녀석을 경시했다.
만마림의 철마당, 사월림 살수, 천상천 장생전의 원로들, 만마림의 현의당, 무면 천군단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도 네 주변에 있는 자들이 강해서 그런 거라고 애써 폄하했다.
사실 네 녀석을 이용해서 금릉 연씨 상단을 대야벌 산하로 만들려고 하였던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연우강 너에 대해 조사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넌 군에만 다녀왔을 뿐 무공도 익히지 않은 걸로 돼 있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잣집 업둥이에 불과했거든. 아마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널 그런 하찮은 놈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넌 앵속쟁이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이젠 널 인정하기로 했다.
널 인정하고,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너와 잠룡 십조를 없앨 방침이다.
난 이번 일에 내 목을 걸었다. 연우강.
지금껏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겠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난 척살령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장사 지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철응방의 방주 귀조 전무웅이 있다.
전무웅은 오른팔과 왼쪽 다리를 잃은 상태다.
앞으로 삼 일 정도는 더 살 것 같구나.
전무웅을 만나면 너는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삼 일 안에 전무웅을 구해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연우강은 서찰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서명도 없고, 중간에 이름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누가 보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서찰을 보낸 자는 율령궁 궁주 우담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금껏 많은 자들과 전투를 치렀고, 그들은 모두 대야벌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잠룡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피해를 준 적이 없다.
잠룡 가문들 중 유일하게 공격을 받았던 곳이 금릉 연씨 세가다. 하지만 금릉 연씨 세가는 두 숙부와 대야벌 벌주 간의 묵계가 있었다.
다른 가문들은 금릉 연씨 세가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그들으 존재한다고 해도 강호 무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뿐더러, 없어진다고 해도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살짝 왔닥, 느낄 사이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바람과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그런데.......
“ 왜 그러느냐?”
이자승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가 받은 건 서찰에 불과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연우강의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우담보 그놈이 규칙을 어겼습니다.”
무쇠보다 더 무거운 목소리가 연우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자승은 얼른 연우강이 가지고 있던 서찰을 받아들었다.
“ 규칙을 어겼다고?”
“ 적선을 못 해줄망정 쪽박을 깨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야벌이 곧 무림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자들이, 단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만으로 잠룡들의 가족을 공격한다는 것은 아주 비열한 짓입니다. 더불어 율령궁과 하오밀문의 전쟁은 무인과 무인의 전쟁입니다. 가족들을 끼워넣어서는 안 되죠.”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맙소사!”
서찰을 읽어가던 이자승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 연우강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 왜 그러십니까?”
선실로 오고 있던 두작군이 이자승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 그놈이 미쳤어,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이자승은 서찰을 두작군에게 건네주구는 연우강의 처소인 이층 선실로 올라갔다.
연우강은 궤짝을 열고 사망묵의를 걸치고 있었다.
사망묵의를 천천히 쓰다듬던 그는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사망월반을 조립하여 허리에 찼다.
철컥!
사망월반을 걸치고 사망궤 한편 구석에 놓인 사망마립을 머리에 눌러썼다. 사망마립의 방향을 조정하여 앞이 잘 보이도록 하고 사망지환을 왼손 약지에 끼웠다. 해골 문양에 먼지가 묻어 있는 듯 뿌예 보이자 입으로 바람을 불어 털어냈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이자승이 들어왔다.
“ 놈이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연우강은 사망묵환을 오른손 손목에 끼워 넣으며 물었다.
“ 사실이라고 보느냐?”
이자승은 되물었다.
계단을 올라오다가 문득 우담보가 잠룡들을 유인하기 위해 그 서찰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글씨체를 제대로 보지 않았군요.”
“ 글씨체가 어쨌단 말이냐?”
“ 그건 우담보 그놈이 직접 쓴 겁니다. 영감님.”
“ 그래서 사실이란 말이냐?”
“ 그건 영감님께서 확인해 보십시오. 그보다 제 질문에 대답부터 해 주십시오.”
“ 우담보 그자는 잠룡 십 조를 노리고 있다.”
“ 맞습니다. 영감님. 그놈은 잔살단 놈들을 시켜서 남쪽의 주루 주변을 돌며 건달들을 통해 하오밀문 조직원을 알아낸 다음 무차별하게 살상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건 누군가는 그놈들을 막기 위해 호남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그곳으로 갈 사람은 영감님들밖에 없습니다. 즉 영감님들은 남쪽으로 잠룡 십 조는 장사로 가야 합니다.”
“ 하지만 율령궁 장사 지부로 가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다.”
“ 물론 그럴 겁니다. 더불어 처음부터 몰살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겁니다. 응랑 아버지에게 다음 행선지를 알려줬다는 것은 그곳까지 따라오란 말이 됩니다. 잠룡 십 조 대원들을 전부 없앨 때까지 끌고 다닐 생각입니다. 잠룡 십 조 조원들의 가문을 멸망시키면서 말입니다.”
연우강은 사망정주를 꺼내 목에 걸었다. 그러자 사망정주는 자석처럼 옷에 장착됐다. 그리고 그가 꺼낸 것은 죽음의 꽃인 사망사화였다. 사망사화 역시 가슴에 가져다 대자 자석처럼 장착됐다. 이어 꺼낸 무기는 열여덟 자루의 사망마비였다.
“ 함정이 있는 곳으로 잠룡 십 조 대원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말이냐?”
“ 그건 우담보 그놈이 바라는 겁니다. 영감님.”
사망정주와 사망사화가 제대로 장착됐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 사망마비를 하나씩 꽂기 시작했다.
“ 하면?”
이자승은 연우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서찰을 보는 순간 미친 듯이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우담보가 서찰을 보낸 이유를 가늠하고, 대처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런 모습이 더 무섭다. 신중하게 암기를 꽂고 있는 모습이 마치 분노를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망마비의 장착을 끝낸 연우강은 사망혈삭과 사망혈궁을 장착하고 있었다.
“ 장사로 가는 사람은 저 혼잡니다. 영감님. 나머지 대원들은 집으로 돌아가든지, 대야벌로 가게 될 겁니다.”
“ 잠룡 십 조 조원들이 흩어지는 걸 우담보가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할 테냐?”
“ 물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족과 관련된 일입니다. 대원들에게 대야벌로 돌아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남궁세가 무인들하고 하오밀문 무인들은 대야벌로 가게 될 겁니다. 욱 영감, 수 영감, 갈 영감을 함께 보내주십시오.”
연우강은 마지막으로 사망낭조를 집어들었따. 그러고는 하나씩 손가락에 끼워넣었다. 왼손 약지, 사망지환이 끼워진 손가락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홉 손가락에 전부 사망낭조를 끼우고는 내공을 주입했다.
찰칵! 찰칵! 찰칵!
사망낭조가 일제히 발톱을 곧추세우며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 그리고 대원들이 대야벌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크게 내야 합니다.”
“ 이번 전쟁에서 잠룡 십 조가 빠진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는 말이냐?”
“ 그 소문을 듣는 즉시 우담보는 잠룡 십 조의 가족을 공격하는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멈추지 않으면 그놈은 정말로 큰일 납니다. 영감님.”
연우강은 사망궤를 어깨에 걸치며 차갑게 웃었다.
‘ 저 놈?’
이자승은 흠칫 몸을 떨었다.
사망궤를 걸치자 녀석은 온통 살기 덩어리로 변해 있다. 그러면서도 웃는다. 아니 웃는 건 입뿐이다. 이편을 빤히 쳐다보는 녀석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선도 악도, 동정도 연민도, 차가움도 따스함도 없는 완전한 무감의 상태.
바로 악마의 눈이다.
“ 귀노!”
연우강은 나직이 염자생을 불렀다.
“ 준비 끝났습니다. 장주님.”
“ 가자.”
연우강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이철상 그리고 사마윤 일행이 서 있었다.
“ 교랑, 넌 여기에 남아라.”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며 말했다.
“ 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이철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남으라는 말은 이번 전쟁을 지휘하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교랑. 놈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면 잠룡들은 전멸한다. 살아남는 길은 그들의 허를 찔러야 한다. 그리고 잠룡대의 움직임을 주시해라.”
“ 잠룡대를 주시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주시하면 해야 할 일이 보일 거다. 그리고 시간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그럼 우리가 이긴다.”
연우강은 이철상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고는 두작군을 돌아보았다.
“ 할 말 있느냐?”
“ 할 일은 영감님께 일러두었으니까 그렇게 해.”
그렇게 말하고 연우강은 염자생과 함께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곧 일행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 작군.”
이자승은 두작군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형님.”
“ 서찰 잠깐만 줘 보게.”
이자승은 두작군이 들고 있는 서찰을 낚아채서는 다시 보았다.
“ 으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공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게 되면, 걸음걸이나 호흡 또는 식사를 하는 등의 일상적인 행동에서도 무공 경지를 알아낼 수 있다. 글씨 또한 그러한 것들 중 하나다.
그런데 우담보가 보낸 서찰에 쓰인 글씨는 마치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보는 것철머 섬뜩하다.
그가 살기를 머금은 채 이 글을 썼다는 의미였다.
연우강이 우담보가 직접 썼다고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 지금 잠룡들은 어디에 있는가?”
“ 각 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당장 귀환시키도록 하게. 허 문주도 오라고 하고.”
“ 알겠습니다. 형님.”
두작군은 빠른 걸음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황룡호 주변을 비롯한 동정호 남쪽 곳곳에 숨어 있던 쾌속선들이 빠르게 수면을 가르며 농수와 원강, 지수로 흩어져 갔다. 가장 먼저 황룡호로 돌아온 사람은 하오밀문 문주 허일구였다.
“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
“ 이걸 보게.”
이런 저런 설명보다 서찰을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이자승은 서찰을 건네주었다. 허일구는 서찰을 읽어내려갔다.
“ 사실이라고 보십니까?”
허일구 또한 이자승이 연우강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했다.
“ 난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네. 잠룡들을 유인하기 위한 말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네.”
“ 그럼 연 공자는?”
“ 장사로 갔네.”
“ 혼자 갔단 말입니까?”
“ 귀노를 데리고 갔네. 그보다는 지금 당장 잠룡 십 조가 대야벌로 귀환한다는 소문을 크게 내주게.”
“ 알겠습니다. 어르신.”
“ 문주님!”
이철상이 허일구를 불렀다.
“ 말하게.”
“ 하오밀문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호남에서 밖으로 나가는 천살원 집행사자들을 찾아주십시오.”
“ 자넨 이 서찰이 사실로 보이는가?”
“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단은 조사를 해 주십시오. 문주님.”
이철상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오문도 문도들은 죽임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고, 적의 눈을 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사람에게 다른 일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다.
연우강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말없이 혼자 장사로 간 것일 테다. 하지만 연우강이 부탁을 하지 않았다고 자신까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기적이라고 욕을 할지도 모르지만 부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 이 서찰이 사실이라면 놈들은 이미 호남을 빠져나갔을 거네. 범위를 넓혀 보겠지만 첫 번째 공격할 가문을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을 거네.”
이철상의 내심을 눈치 챈 허일구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자리를 떴다. 각 처에 흩어져 있던 잠룡들이 황룡호로 돌아온 건 저녁 무렵이었다.
회의실로 들어서는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하지만 느닷없이 호출을 받고 왔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라고 해서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 전 군장, 나 좀 보세.”
이철상은 전관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무슨 일입니까?”
전관수는 불안한 얼굴로 이철상을 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설산신조를 통해 철응방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십여 일 전부터 연락이 끊겼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설산신조와 비응마조를 다루는 장로들을 공동산으로 보냈지만 아직 돌아올 시간이 되지 않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느닷없는 호출에 이철상이 자신을 보자고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 우담보가 미친 모양이네.”
“ 미쳐요?”
전관수는 의아한 얼굴로 이철상을 보았다.
“ 이런 게 왔네.”
이철상은 수십 명이 더 봐서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서찰을 내밀었다. 서찰을 받아든 전관수는 차분하게 읽어 내렸다.
서찰을 읽고 난 전관수는 말없이 이철상에게 건네주었다.
“ 이 서찰을 보자마자 광랑은 혼자 장사로 갔네.”
“ 사실일 겁니다.”
전관수는 강물로 시선을 던졌다.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려하여 아버지께 잠시만 피해 있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겠느냐며 허허 웃기만 하셨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 전 군장.”
“ 아닙니다. 교랑. 짐작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하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그리고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요.”
“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네. 전 군장.”
“ 아닙니다. 교랑. 저도 잠룡들 옆에 있어야 하는데...... 자식된 도리로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선물로 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철상에게 포권을 취한 전관수는 몸을 날렸다. 곧 전관수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쯧!”
위쪽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철상은 고개를 돌렸다. 이층과 연결된 선실 계단을 통해 사마윤 일행이 내려오고 있었다.
“ 혀만 차지 말고 좀 도와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 그래서 이렇게 준비하고 왔잖아.”
마장승이 어깨에 맨 도를 툭 쳤따.
“ 그럼 응랑을 따라가 주십시오.”
“ 전관수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너희들 코가 석 자다. 철상.”
“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랑도 혼자 갔습니다.”
“ 필요했으면 함께 가자고 했겠지 혼자 갔겠냐? 그리고 그 인간은 지옥에 던져놔도 잘 먹고 잘살 인간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
마장승은 연우강이 몸을 날려간 곳을 더듬어보았다. 벌써 일다경 전에 떠난 그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아마 그는 지금쯤 수십 리 밖을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공에 연우강의 체취가 남아 있는 듯 했다.
마장승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문득 참 더럽게 꼬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 간신히 사람처럼 사는 것 같더니 그걸 못 봐주고 다시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네. 아무튼 하늘이란 놈은..... 에라! 이거나 처먹어라, 개자식아!”
마장승은 공연히 심통이 나 하늘을 향해 주먹 감자를 먹였다.
“ 킬킬킬! 전쟁터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벌받는 거야. 인마. 광랑 손에 뒈진 놈들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아마 그놈들의 피를 합치며 동정호를 채울거다.”
군무옥이 키들키들 웃으며 말했다.
“ 그럼 무옥 네놈도 벌을 받아야지. 넌 살인할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 새끼잖아.”
“ 그래서 다시 이 거지 같은 곳으로 기어들어 왔잖아. 새꺄!”
“ 그렇게 되는 거냐?”
“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냐, 자식아. 시체를 처먹던 놈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아무튼 개같은 세상이야.”
군무옥은 낄낄 웃으며 회의실로 내려갔다.
이철상을 비롯한 사마윤 일행이 내려오자 잠룡들은 궁금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온 이철상을 보았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지금 우담보는 척살령을 발동했다.”
“ 척살령이 뭡니까?”
낙일사검 마장웅이 물었다.
“ 척살령은 천살원 집행사자의 임무 중 기한이 없는 임무를 말한다.”
“ 그 척살령의 대상이 우리란 말입니까?”
“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아니라 우리들 가문이다. 이미 응랑의 가문인 철응방이 궤멸된 걸로 알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생존자는 전무하고, 응랑의 아버지만 율령궁 장사 지부에 잡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더하고 빼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잠룡들이 현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이철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겨들었다. 율령궁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가문에 해가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노릇이었다. 잠룡쟁투를 통해 대야벌로 들어갔고, 암살대전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대야벌의 문도가 된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대야벌은 철저하게 방관자였다.
심지어 잠룡들이 속한 가문들끼리 전쟁을 한다고 해도 대야벌은 지켜보기만 할 뿐 나서지 않았다. 그랬던 그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잠룡들이 속한 가문을 직접 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철응방이 멸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다.
잠룡들을 지켜보던 이철상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우리는 율령궁과의 전쟁을 포기했다.”
“ 가문이 없는 사람은 남아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하오밀문 출산 염왕수 장사덕이 물었다.
“ 그건 안 된다. 잡랑. 우담보가 노리는 대상은 잠룡 십 조지 개개인이 아니다. 우리 잠룡 십 조는 빠져도 상관없는 사람은 혼자라도 적과 전쟁을 해야 하는 광랑과 응랑, 그리고 잠룡 십 조에서 빠진 걸로 돼 있는 환랑, 그리고 이곳에서 상황을 점검해야 하는 나까지 세 사람이다.”
“ 어떻게 할 참입니까?”
“ 그 전에 먼저 묻겠다. 가문으로 돌아갈 사람은 손을 들어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 볼 필요 없다.”
“ 돌아가면, 가문을 구할 수 있는 겁니까?”
하남 신검세가 유성비검 신도영이 물었다.
“ 율령궁 척살단이 들이닥치지만 않으면 피할 수 있는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
“ 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목에 율령궁 천살원 집행사자가 기다리고 있겠지요.”
“ 그럴 가능성이 구 할 이상이다. 율령궁의 최종 목표물은 하오밀문이 아니라 우리다. 그들이 척살령을 발동한 이유 또한 우리를 없애기 위해서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도영은 재차 물었다.
“ 그래서 이 자리에 모이라고 한 거다.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각자 흩어져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피신시키는 거고, 다른 하나는 함께 모여 대야벌로 돌아가는 것이다.”
“ 대야벌로 가자는 건 가족을 포기하라는 게 됩니다. 교랑.”
“ 잠룡 십 조가 대야벌로 돌아간다는 소문과 더불어 전관수의 가문인 철응방이 율령궁 척살단에게 당했다는 소문을 크게 낼 참이다.”
“ 소문으로 율령궁을 압박하겠다는 말입니까?”
“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자네들이 어떤 방법을 택하든 말리지 않겠다.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고, 남아서 함께 대야벌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도록 한다.”
“ 대야벌로 돌아가는 것도 순탄한 길이 아닐 것 같은데 아닌가요?”
듣고 있던 수여설이 물었다.
“ 그렇습니다. 백랑. 어쩌면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
“ 율령궁의 집행사자가 이천 명이라고 했던가요?”
“ 그렇습니다. 아울러 대야벌로 간다고 해도 우리 잠룡 십 조만 갈 겁니다. 어르신들은 남아서 계속 하오밀문과 합동작전을 펼쳐야 합니다.”
“ 그럼 우리들의 실력을 시험해볼 수 있겠군요.”
“ 무슨 말입니까?”
“ 우린 광랑으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아 익히면서 많은 전투를 치렀어요. 그때마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을 뿐 아니라 사망자도 없었죠. 과연, 우리 실력이 뛰어나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르신들과 광랑이 지켜줘서 그랬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 함께 대야벌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 나에게 지켜야 할 가족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니까 곡해하지 말았으면 해요.”
“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백랑 말하십시오.”
“ 먼저 대야벌은 무림이라는 의미를 알아야 해요. 그 말은 단순히 대야벌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강호무림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에요.”
“ 대야벌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 그래요, 교랑. 강호 무림이 무림 문파를 공격하는 경우가 없는 것처럼. 대야벌도 그렇게 해왔어요. 물론 대야벌의 존림이 위태로운 경우에는 힘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대상은 결코 잠룡이 될 수가 없죠.”
“ 하지만 우담보는 그 불문율을 어기고 잠룡들의 가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교랑. 지금 시점에서 우담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야벌 벌주 담대만승밖에 없어요. 우리가 각 가문으로 흩어진다면 잠룡 십 조가 대야벌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문은 거짓으로 판명될 테고, 우담보는 더욱 광분하여 잠룡들의 가문을 없애고 다닐 거예요. 우선은 우리가 단체로 모습을 드러내고 그 다음에 대야벌 벌주의 판단을 기다려야 해요.”
“ 하지만 벌주가 회피하고자 한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소문인 줄 알았다고 할 수도 있고,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끝난 뒤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방법은 수천 가지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가 대야벌 벌줍니다.”
“ 그럼 정말로 가문을 구할 생각을 버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으음!”
이철상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만일 벌주의 묵인 하에 이번 일이 진행되고 있다면, 가문을 구할 생각은 정말로 버려야 한다. 대야벌에서 가문을 없애려고 하는데 무슨 수로 살아남는단 말인가.
“ 난 벌주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 우담보를 말릴 거라고 보십니까?”
“ 그래야 대야벌이니까요.”
“ 좋습니다. 이제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요.”
이철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룡들을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떠난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 대야벌로 갈 사람은 오른쪽으로 서고 가문으로 돌아갈 사람은 왼편으로 서라.”
잠룡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오른편으로 선 잠룡은 남궁운화를 비롯한 남궁세가 잠룡 열두 명. 하오밀문 잠룡 다섯 명, 수여설, 그리고 사마윤 일행까지 스물 두 명이었다. 하남 신검세가 신도영을 비롯한 스물여덟 명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 놈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함께 가는 게 더 낫다는 건 알지만.... 일단은 집에 알려볼 생각입니다.”
신도영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 아니다. 유성랑. 우리는 네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너희들은 반나절이나 하루 정도 늦게 출발하도록 해라.”
이철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자신의 가문이 신검세가처럼 대단한 가문이었다면 자신 또한 대야벌이 아니라 가문을 택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언니!]
수여설은 허공에 숨어 있는 몽요를 불렀다.
[ 잠룡들의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 네!]
[알았어. 바로 대기시켜 놓을게.]
고개를 끄덕인 몽요는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 대야벌로 가는 잠룡들을 백랑이 이끌어 주십시오.”
이철상은 수여설을 보며 말했다.
“ 알았어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욱 어르신과 수 어르신, 갈 어르신은 대야벌로 가는 잠룡들과 함께 움직일 겁니다.”
“ 그나마 좀 낫네요. 그럼 살아서 봐요.”
수여설은 일행을 찬찬히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선실을 나선 수여설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배 두 척에 나눠 탔다. 배에는 이미 욱일승 일행이 타고 있었다.
배는 선착장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남은 잠룡들은 착잡한 얼굴로 멀어지는 배를 지켜보았다.
********
천살원 집행사자 일백 명. 수준 급의 무공을 펼치는 밀정 이백 명, 삼백명의 무인으로 함정을 파기는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금껏 많은 자들이 잠룡 십 조를 공격했다가 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불안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만일 잠룡 열 명을 없애면 퇴각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위중악은 결코 이번 임무를 맡지 않았을 것이다.
“ 잠룡 열 명이라.....”
위중악은 창 밖으로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서른 명 당 한 명씩 없애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게다가 잠룡들은 대야벌 정식 무인도 아니고 아직 교육을 받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 자들을 없애는 데 이런 압박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어이가 없다고 해야 옳다.
“ 아무튼 열 명만 없애고 퇴각하면 되니까.”
위중악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율령궁 장사 지부는 상당한 규모의 장원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우 폭 백 장, 안쪽까지 거리 백 장인 널따란 정원이 나온다. 정원 곳곳에는 소위 기암괴석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바위들이 놓여 있고, 바위 주변으로는 가지가 사방으로 뻗은 소나무와 잎이 넒은 활엽수와 크고 작은 단풍나무들이 바위와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슬쩍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나무들은 가지를 요란하게 흔들어대며 마른 잎을 떨궈낸다. 갖가지 나무에서 떨어진 잎은 일부는 담 쪽으로 굴러가고, 일부는 정원 한 가운데 파인 지름 십 장의 인공 호수 안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인공 호수의 이름은 팔색호였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호수 바닥에 쌓이면 금색으로 변하고 붉은 단풍잎이 쌓이면 붉은색으로 변하고, 갈색 잎으로 채워지면 갈색으로 변하는, 물속에 쌓이는 낙엽에 따라 물색이 변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사 지부의 자랑이었던 팔색호에는 낙엽 대신 집행사자 이십 명이 은신해 있었다.
위중악은 수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수면에는 막대같은 것들이 조금씩 나와 있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그것들은 대나무로 만든 대롱이다. 물속에 은신해 있는 집행사자들이 숨쉬는 장치였다.
위중악은 대롱을 주시하며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주변에서 상당한 인기척이 감지됐다. 위중악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함정을 만들면서 주안점을 둔 것은 들키는 자와 들키지 말아야 할 자들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확실하게 받아내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쉽게 말하면 인기척이 감지되는 자들은 호수 안에 있는 집행사자를 숨기기 위한 미끼라고 할 수 있다.
“ 난 단 한 번의 허점을 노릴 테고, 그 허점을 향해 모든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연우강.”
싸움은 대문을 넘어서면서 시작될 테고, 아군의 전력 또한 대부분 그곳에 몰려 있다.
그들을 물리치고 온다고 해도 이곳에 도착할 즈음이면 약간 느슨해진 상태가 될 것이다. 위중악이 노리는 시점은 바로 그때였다.
휙!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위중악은 고개를 돌렸다. 검은 인영 하나가 이편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대문을 맡고 있는 밀정의 수뇌 오작균이었다.
무기보다는 암기를 주로 사용하는 그를 율령궁에서는 나는 검이라고 하여 비검이라는 별호를 붙여주었다.
“ 놈들인가?”
굳이 물어볼 이유가 없다.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오작균이 이곳으로 달려올 이유는 잠룡 십 조의 출현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이상합니다. 조장님.”
그런데 오작균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위중악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한 놈입니다.”
오작균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 한 놈이라고?”
다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정문 너머에서 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도 아닌 특이한 운율이 들려왔다.
간~다! 가~라!
새카만 이리가 사막을 달린다!
부순다! 부숴라!
우리를 막~는 적군을 부순다!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긴다!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달린다! 달려라!
미~친 이리가 적진을 달린다.
죽인다! 죽여라!
한놈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라!
마셔라! 마셔라!
적군의 피~로 갈증을 식혀라!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 설마.....”
위중악의 신형이 대문을 향해 폭사돼 갔다.
제 10 장 깨끗하게 지워버리게
위중악은 눈을 비볐다. 잘못 보았지 싶었다. 장사 지부의 대분 앞은 상당히 넓은 벌판이다. 사실 지금은 벌판이지만 원래는 논이었다. 지부 앞에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꺼린 대야벌에서는 지부를 세우면서 논까지 함께 사들였다. 논을 벌판으로 만드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만 하면 잡조 무성한 벌판이 된다.
장사 지부 또한 그렇게 하여 벌판을 만들었다.
풀로 뒤덮인 벌판에는 하얀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을 가로지르며 두 사람이 이편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한 명은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은 옷을 걸치고, 등에는 검은 궤짝을 둘러메고 있고, 한 명은 외팔이인데 등에 무기를 메고 있다.
위중악은 오작균을 돌아보았다.
“ 후미를 돌아보고 오게.”
“ 그쪽에 경계를 세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을 해올 겁니다.”
“ 맞아, 그랬지.”
위중악은 다시 벌판을 가로질러 오는 연우강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일정한 보폭으로 걷고 있지만 속도는 상당히 늦다. 한 번의 노래가 끝나자 녀석은 두 번째 노래를 부르는 중이다. 목청을 돋우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데도 바로 옆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 미친 거냐, 아니면 자신이 있다는 거냐?”
위중악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놈은 분명 서찰을 받았을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곳에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 두 명이 오다니.
게다가 저 자신감은 뭐란 말인가?
“ 난 미치지 않았어. 다만 규칙을 어긴 우담보의 행동에 극도로 화가 났을 뿐이야.”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와 꽂혔다.
“ 그럼 자신감이란 말인데, 이곳에 몇 명이 있는 줄 아느냐?”
“ 너도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느끼게 될 거야. 숫자란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야.”
“ 허풍은 이미 심검의 경지에 올랐구나. 연우강. 그런데 정말 둘만 온 거냐?”
“ 잔살단의 공격을 막아야 하고, 척살단의 공격도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라 우리 둘밖에 남지 않더라고.”
“ 흐흐흐! 정말 혼자 온 모양이구나. 아무튼 배짱 하나만큼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위중악의 얼굴이 환해졌다.
단 두 명.
삼백 명이나 되는 무인이 두 명을 없애지 못한다면 무인이라 불릴 자격도 없을 것이다.
위중악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위중악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군은 삼백 명인데 적은 두 명이라면 누가 두려워할 것인가. 설사 어린아이들이라고 해도 삼백 명이 있다면 어른 두 명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위중악의 얼굴이 달빛을 받은 대지처멀 환해진 건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다름 아닌 연우강의 무공 때문이다.
율령궁에서 조사한 연우강의 무공은 똥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익힌 칠보귀둔필사와 막장으로부터 얻은 흑철마신 두 가지다. 물론 연우강도 승천비고에 들어가 무공을 얻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연우강이 관심을 보였던 무공은 고만고만한 도법이 전부다. 일류라고 불릴 만한 무공은 단 한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낸 그의 능력에 대해 율령궁에서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하지만 무공은 형편없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저들은 두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고 해야 한다. 이제는 잠룡 십 조에 대한 두려움보다 오히려 단 두명밖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담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걸 걱정해야 할 판이다.
“ 아니다. 연우강을 없앤다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을 게 분명하다. 난 율령궁 뿐만 아니라 대야벌의 골칫덩어리인 연우강을 없앤 사람이 되는 것다.”
“ 오작균!”
“ 하명하십시오.”
“ 스무 명을 보내라!”
“ 알겠습니다. 일 조는 나가고, 이 조는 대기하라!”
오작균 또한 위중아고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휙! 휙휙! 휙!
정문 안쪽 좌우 측에 은신해 있던 밀정들이 빠른 속도로 뛰쳐나갔다. 밀정이라는 업무의 특성상 경공에 유독 강한 그들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십 명의 밀정들은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날아가 연우강과 염자생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자신들의 신법을 믿고 벌인 행동이었다.
설사 연우강과 염자생의 실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월등한 신법이 있으니 얼마든지 몸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밀정들은 확신했다.
“ 캬캬캬!”
염자생의 입에서 괴소가 터져 나오고, 어깨에 있던 광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놀라 도망치게 만들면 죽을 줄 알아.”
연우강은 허리에 꽂아 두었던 손괭이와 낫을 뽑아들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 알겠습니다. 첫날밤 새색시처럼 조심스럽게 죽이겠습니다. 장주님.”
대답은 장난스럽게 했지만 염자생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강호 공적으로 지목돼 쫓기면서 많은 살인을 했다. 그때 죽어간 자들 중에는 무공이 형편없이 약한 자들도 있었고, 무림과 상관없는 자들도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을 죽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강한 무공을 몇 번 펼치고 나면 적은 겁을 먹고 도망칠 테고, 싸움은 싱겁게 끝낼 수 있다. 분명 자신이나 연우강은 그럴 능력이 있다. 그런데 연우강은 적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이편을 우습게보면 적은 설사 많은 동료가 죽는다고 해도 계속 덤벼올 것이다.
그리고 이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끝난 후가 될 것이다.
강호 공적인 자신보다 더 잔인한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연우강이었다.
차앙!
염자생은 머리를 향해 날아오던 검을 막았다.
십 자로 얽힌 두 무기 사이에서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상대의 검이 중간에서 잘려나갔다.
“ 억!”
사내의 입에서 낮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 놀라기보다는 먼저 피해야지.”
염자생은 광인의 방향을 바꾸며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광인이 사내의 사타구니로 빠져나오는 순간 염잣애은 손날이 위로 향하도록 손의 방향을 틀었다.
“ 크아악!”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광인은 검은 궤적ㅇ르 남기며 오른편 허공을 갈랐다.
슈캉!
검이 잘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물고기가 미낄르 물었을 때처럼 가벼운 느낌이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살과 뼈를 잘라내는 느낌이다.
염자생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광인이 신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살을 가르고 뼈를 잘라내는 데도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다는 건 움직임이 그만큼 빨라진다는 뜻이다.
촌각을 다투는 싸움에서 반 초 차이의 빠름은 곧 여유다. 상대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고, 설령 한 박자 늦었다고 해도 그 빠름으로 막아낼 수 있다.
‘ 이렇게.’
그는 밖으로 휘두르던 광인의 방향을 바꿔 다시 안으로 휘두르며 고개를 숙였다.
휙!
머리 위로 검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으로 휘두르던 광인이 슬쩍 내기를 더하자, 광인의 표면에서 희미한 광채가 솟구쳐 올랐다. 광인은 더욱 날카롭게 변하고 나아가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번엔 아무런 느낌이 없다. 광인은 허공을 베는 것처럼 검을 찔러 넣었던 사내의 목을 갈랐다.
“ 아악!”
차앙!
마침 시선이 그쪽을 향해 있어 연우강의 모습이 보였다. 연우강은 왼손에 든 손괭이로 적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손괭이를 든 왼손 손목이 비틀어졌다 싶은 순간 사내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비무장 상태가 된 사내의 이마로 오른손에 든 낫이 독오른 뱀처럼 쏘아져갔다.
“ 커억!”
낫은 꺾인 부분까지 순식간에 파고들어 갔다.
연우강은 사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오른손을 앞으로 당겼다. 피를 뒤집어쓴 낫이 나오자 곧바로 들어 올려 빠르게 다가오는 검을 향해 뻗었다.
빠르게 나아가던 낫이 기묘하게 움직이고, 사내의 검을 잡아챘다. 꺾인 앞부분은 바깥쪽 검면에 걸치고, 뒷부분은 검면 안쪽에 걸치는, 단순히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낫으로 검을 물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 상태에서 연우강은 손목을 슬쩍 비틀었다.
쥐고 있던 검이 갑자기 비틀리면 힘을 줘서 버틴다. 그러다가 어느 한계가 넘어서면 손목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검을 놓아버리게 되는데 지금 사내의 행태가 그랬다. 검을 움켜쥘 겨를도 없이 사내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빈손으로 변한 사내의 이마로, 땅을 파는 용도보다 사람 죽이는 용도로 더 많이 쓰이는 괭이 날이 파고 들어갔다.
“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피가 사방으로 확 튀었다.
연우강은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피는 좌우 측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휘이익!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려오고, 검 두 자루가 다가왔다. 하나는 목을 향하고 있고, 하나는 가슴 방향이었다.
연우강의 시선이 검으로 향했다.
“ 억!”
“ 허!”
부지불식간에 지르는 낮은 비명이 공격하고 있는 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기세 좋게 나아가던 검이 연우강 바로 앞에서 방향이 틀어져버린 것이었다. 아니 좌우로 흘렸다고 해야 옳다. 목을 향해 나아가던 검은 연우강의 왼팔로 향했다.
연우강은 왼팔을 살짝 벌렸다. 그러자 옆구리와 팔 사이에 작은 공간이 생겨났다. 사내의 검은 그곳으로 쑥 밀려 들어갔다. 먼저 움직인 손은 들어올린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었다. 이미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이마로 낫이 파고들고, 곧이어 왼손의 손괭이가 왼편 사내의 이마를 찍었다.
쉬익!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두 자루의 검이 앞에서 다가왔다. 뿌연 광채가 어려 있다.
검을 찔러낸 두 사내는 확신했다.
연우강의 양손에 쥔 특이한 두 무기는 동료의 얼굴에 박힌 상태고, 시체로 변한 두 동료는 연우강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다. 몸을 피하는 것도 어렵고, 무기를 뽑아 방어하는 것도 쉽지 않다.
두 밀정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어쪄면 당연했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잡고 있던 손괭이와 낫을 놓아버린 연우강이 양손을 쭉 뻗었다.
푹! 푹!
연우강 바로 앞에서 방향이 틀어진 검 두자루는 낫과 손괭이를 이마에 박고 있는 두 사내의 몸으로 파고들어 갔다.
철컥! 철컥!
질겁한 얼굴로 자신들의 검을 쳐다보는 두 사내의 얼굴로 사망낭조가 잔뜩 독이 오른 독사처럼 파고들어 갔다.
“ 크악!”
“ 아악!”
생의 마짐가 비명을 지르는 사내의 얼굴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이 휘어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마지막 순간에 방향을 바꿀 수 있는지.
평생 무공에 정진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반탄 강기나 호신 강기를 모를 정도로 무공을 등한시한 적도 없다.
반탄 강기는 상대의 힘을 되돌려주는 걸 말하고, 호신강기는 받아들여 무력화시키는 무공을 말한다.
하지만 연우강의 무공은 그 두 가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이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힘으로 불리는 마라천력이란 사실을 알 리 없는 사내는 의문을 안은 채 죽음을 맞았다.
철컥! 철컥!
사내의 얼굴에서 빠져나온 사망낭조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연우강은 이제는 동료의 검에도 찔린 시체들의 얼굴에서 손괭이와 낫을 뽑아들었다.
두 명이 얼굴에 손괭이와 낫을 박아 넣고, 손잡이를 놔버리고 다시 두 명의 적을 없애는, 일련의 한 순간에 일어났다. 연우강은 손괭이와 낫을 뽑아들자마자 달려오는 적의 이마에 두 무기를 꽂아 넣었다.
눈에 보이는 그의 동작은 그다지 빠르게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낫과 괭이는 정확하게 적의 무기를 막아낸다. 멈춤이 없는 움직임. 가장 짧은 거리를 찾아내는 능력, 그리고 마라천력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이 손의 움직임까지 느린 것은 아니었다. 가공할 속도를 보이며 움직이는 지점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그의 무기가 적의 이마에서 한 자 가량 떨어진 지점이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듯하던 그의 무기가 적의 이마와 한 자 거리까지 접근하면 그때부터 손의 움직이는 속도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빨라진다.
연우강과 염자생이 지나가는 곳 뒤편으로는 시체로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염자생 뒤편은 목이나 허리가 잘려나간 시체들이 쌓이고 연우강 뒤편에는 얼굴이 훼손된 자들의 시체가 쌓였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게 연우강과 염자생은 달려드는 자들을 없애며 장사 지부를 향해 걸어갔다.
어떻게 보면 힘겹게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느긋한 것 같고, 육안으로는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 광경이었다.
동료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보면서도 율령궁 밀정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조금만 집중하면, 반 초만 빠르면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계속해서 달려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밀정들뿐만이 아니었다.
정문 앞에서 싸움을 주시하고 있는 위중악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조금만 빨랐으면.”
몇 번이나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는지 모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보기에는 밀정들의 검이 연우강의 가슴이나 목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그런데 딱 한 치 앞에서 밀정들의 무기가 튕겨진다.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조금만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연우강을 없앨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확신으로 굳어진다. 밀정들을 상대로 저 정도라면 집행사자들이 나섰을 때는 금세 없앨 수 있을 거라는 그런 확신 말이다.
어느새 오작균이 조원들을 데리고 나갔지만 위중악은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뒤편으로 물러났다.
오작균이 거느린 조도 다른 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약간만 집중하면 없앨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미세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 크아악!”
‘ 병신 같은 놈!’
오작균의 비명이 들려오자 위중악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측과 우측에 있는 바위와 나무들 사이에 집행사자들이 은신해 있다.
[ 문제없습니다. 조장님.]
[ 마음 푹 놓으십시오.]
몇몇 집행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준비하라!”
위중악은 나직이 소리치며 팔색호가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그곳에 은신해 있는 자들 역시 정문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들은 듯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 놈을 죽이면 머리를 가지고 감옥으로 와라.]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곧바로 전무웅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몸을 날려갔다. 위중악이 몸을 날려 가는 그 순간 정문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집행사자들은 전면을 노려보며 출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영독군이란 별호로 불리는 자영진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마영독군이란 별호를 얻은 이유는 빠른 신법에 있었다. 그림자가 춤을 춘다는 영무보가 그것이었다. 자영진은 자신의 신법이면 연우강을 없애고도 남을 거라고 자신했다.
‘ 문턱을 넘는 순간 너는 죽는다. 연우강.’
그는 호흡을 고르며 문턱에 시선을 고정했다.
걸음을 옮기려고 들어 올렸던 발이 바닥으로 내려오는 그 순간은 뒷발에 있던 중심이 앞으로 이동하게 된다.
찰나라고 할 만큼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에 무인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반 초 차이로 목숨을 잃었던 밀정들을 보며 자영진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 와라!”
내심 중얼거리고 있는데 검은 물체 하나가 문턱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영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검은 앞으로 뻗은 상태고 내공도 바닥까지 긁었다. 자영진의 신형은 비호처럼 정문을 향해 날았다.
그의 신형이 대문이 시작되는 부분에 멈춰 서는 순간 검은 동체가 안으로 들어왔다.
“ 놈!”
자영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미 검 끝은 놈의 몸으로 파고들기 직전이다. 이제는 설사 신이라고 해도 검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 끝.... 억!”
끝났다는 외침 대신에 질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앞은 좁고 뒤편은 넓은 뭔가가 몸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몸으로 파고들던 검이 옆으로 밀리더니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그리고 꺽쇠처럼 꺾인 물체가 이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ㅏ
그것은 연우강의 무기인 손괭이였다.
퍽!
“ 으아악!”
비명은 연우강을 공격했던 자영진과 염자생을 공격했던 자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머리에 손괭이가 박히고 목이 잘린 두 사람은 지금껏 그랬던 다른 자들처럼 연우강과 염자생 뒤편으로 쓰러졌다.
파앗! 팍! 파앗!
좌우 측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튀어나와 연우강과 염자생을 향해 쏘아져 갔다.
하지만 결과는 밖과 달라진 게 없었다.
연우강은 양손을 휘둘러 집행사자의 이마에 손괭이와 낫을 박아 넣고, 염자생은 목과 허리를 잘라냈다.
정문 밖과 차이가 있다면 연우강과 염자생의 움직임이었다. 염자생의 광인에서 거북살스러운 소성이 간혹 흘러나오곤 했고, 연우강의 시선도 더 빨라졌다.
하지만 걸음걸이는 같았다.
두 사람은 일정한 속도로 걸으며 좌우 측에서 몸을 날려오는 자들을 척살했다. 천천히 나아가던 두 사람의 눈에 팔색호가 들어왔다.
“ 차앗!”
“ 타앗!”
“ 이야합!”
팔색호 주변에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집행사자들이 몸을 날렸다. 팔색호 주변에 숨어 있던 자들은 전부 이십 명이었다.
“ 이젠 괜찮아?”
“ 차앗!”
까까까! 끼이익!
번쩍 들어올린 광인에서 저도 모르게 동작을 멈추게 하는 거북살스러운 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둥글게 호선을 그리는 광인에서 검붉은 고리가 튀어나와 사방으로 비산해 갔다.
퍽! 퍽퍽퍽! 퍽퍽! 퍽!
들어 올린 무기가, 장력이, 권이 박살나며 집행사자들의 몸 안으로 틀어박혔다.
“ 크악!”
“ 아악!”
“ 아악!”
집행사자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자들은 호수로 날아가 빠졌고, 아래쪽에 있던 자들은 가슴 부분에 구멍이 뚫린 채 죽임을 당했다.
일도에 죽어간 자들은 열 명 정도였다. 염자생 앞쪽에 열 명밖에 없었기에 그 정도였지 더 많은 자들이 있었더라면 그들마저도 전주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염자생의 구유잔백일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 죽여라!”
“ 없애라!”
남은 집행사자들은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며 염자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이 몸을 날려가자 연우강 앞은 텅 비었다.
“ 쿡!”
촤악! 촤악!
피식 웃고 있는데 물속으로부터 수십 명이 튀어나와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물속에 숨어 있던 이십 명이었다. 팔색호를 벗어난 집행사자들의 첫 번째 공격은 물방울이었다. 더불어 그들은 물방울을 암기처럼 날릴 수 있는 강한 무인들이었다.
수십, 수백 개의 물방울이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파앗!
연우강의 신형이 뒤편으로 쭉 밀려났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물방울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수십 개의 물방울이 그이 전신을 때렸다.
약간의 충격.
아직은 물방울로 상대를 살상할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었다. 만일 일반 무인이었다면 자세가 흐트러지며 허점을 보였을 것이다. 집행사자들 또한 그러한 상황을 원하고 물방울을 발출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상대는 일반 무인이 아니라 연우강.
약간의 충격에 연우강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 올라가며 진득한 살기 가득 담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지옥탄.”
새가 날갯짓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동작이었다.
약간 내밀고 있던 가슴이 안쪽으로 수축되고, 다시 밖으로 튀어나가면서 활짝 펴졌다.
가슴이 앞으로 튕겨진 순간 목 주변에 장착돼 있던 백팔 개의 사망정주가 허공을 갈랐다.
더불어 연우강의 신형 또한 사망정주를 따라 달려 나갔다. 검은 광채가 연우강 전면을 장악하고 달려들던 집행사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통나무를 일렬로 세우고, 맨 앞에 있는 통나무를 넘어뜨렸을 때 뒤쪽에 있는 통나무들이 순차적으로 넘어지는 광경과 같았다.
앞서가던 집행사자가 비명과 함께 쓰러지면 바로 뒤에 있는 자가 쓰러지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자들이 쓰러진다. 그렇게 한 명씩 쓰러지던 집행사자들은 어느새 한 명도 남지 않았다.
파앗!
연우강은 멈추지 않았다.
나아가는 탄력을 이용하여 팔색호를 건너뛰어 장원 깊숙한 곳으로 내달렸다.
위중악 또한 밖으로 달려 나오는 중이었다.
그의 뭄에는 팔과 다리가 잘린 전무웅이 안겨 있었다.
“ 머, 멈춰.....”
직감적으로 연우강임을 알아차린 위중악은 속도를 늦추며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연우강은 나아가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속도를 내며 위중악의 품에 안겨 있는 전무웅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둥실!
마라천력이 발휘되면서 전무웅의 동체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전무웅을 쳐다보던 연우강의 시선이 왼편 허리춤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번쩍! 검은 광채가 폭발했다.
쐐액!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뇌섬은 어둠을 뚫고 섬광처럼 위중악을 향해 날아갔다.
“ 헙!”
위중악은 헛바람을 삼켰다.
등줄기에서 얼음 덩어리가 흐르고, 머리털이 곧추섰다.
전무웅의 동체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뭔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육감이 주는 신호는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걸 실전을 통해 깨달은 지 오래. 위중악은 급하게 지면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쐐액!
“ 억!”
소리가 계속 따라오자 위중악은 아래쪽을 향해 검을 휘둘러 강기막을 쳤다.
푹!
그러나 그가 친 강기막은 거미줄처럼 뚫리며 화끈한 기운이 아래쪽에서 느껴졌다. 회음혈을 통해 파고들어온 기운은 단전을 부수고, 내장을 부수고, 폐와 심장을 부수고, 머릿속을 부수고 정수리를 뚫고 나왔다.
그리고 상체를 가르며 튀어나갔다.
“ 어떻.........”
말을 끝내기도 전에 머릿속이 검게 변했다. 힘을 잃은 위중악의 동체가 지면으로 추락했다.
척!
연우강은 날아오는 전무웅의 동체를 안았다. 전무웅은 살아 있었다.
“ 잠룡 십 조 조장 연우강입니다.”
“ 관수에게 말 많이 들었네. 돈 많은 부자면서 머리도 좋고, 무공도 엄청난,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더구만.”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고, 오른팔과 왼다리가 없는 불구까지 됐다. 어쩌면 그 모든 일이 눈앞에 있는 연우강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 때문일 테다. 그가 아니었다면 관수가 설산신조와 비응마조를 가지러 오지도 않았을 테고, 철응방의 멸망도 없었을 것이다. 실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밉지 않았다.
“ 직접 보시니 어떻습니까?”
연우강은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관수 말이 맞는 것 같네. 자넨 비정상이네.”
“ 화나지 않습니까?”
“ 내가 화를 내야 하는 건가?”
“ 제가 아니었다면 철응방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 그렇게 따지면 관수를 대야벌로 보낸 내 잘못 아닌가. 내가 대야벌로 관수를 보냈기 때문에 자네를 만나게 됐으니까.”
“ 말씀해 주십시오.”
“ 뭘 말인가?”
“ 율령궁 소속 부인들도 상당수가 가족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대야벌에 머물고 있는 자들만 해도 대략 천여 명이고 외부에 살고 있는 자들까지 합치면 만 명 이상입니다.”
“ 그들을 다 죽이겠다는 말인가?”
“ 앵속의 힘을 빌려야겠지만, 아버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그 집안의 개까지 죽여 없애 조운곡에 올리겠습니다.”
“ 그럼 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 편하지 않겠지만 미안함이 덜어질지도 모르지요.”
“ 내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말하는 건가?”
“ 네!”
어느새 두 사람은 장사 지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대문 밖에는 온몸이 땀에 젖은 관수가 서 있었다.
“ 아버지!”
전관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아마... 저 녀석마저 죽었다면 난 일만 개의 머리를 원했을 거네. 하지만 그럴 수 없네. 대신 관수를 최고로 만들어주게.”
“ 그건 약속하겠습니다. 아버님. 일어나라, 응랑!”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전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네겐 할 말이 없다. 응랑. 하지만.....”
“ 아닙니다. 광랑. 이번 일은 광랑의 잘못이 아니라 제 잘못입니다.”
“ 네 잘못도 아니다. 관수야. 강호 무림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고, 우린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 아버지!”
“ 내 아들의 품에 안기고 싶네. 연 공자.”
“ 알겠습니다. 아버님.”
연우강은 안고 있던 전무웅을 전관수에게 건넸다.
“ 척살단의 다음 일정은 광동차가네, 연 공자.”
전관수의 품에 안긴 전무웅은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 척살단을 이끌고 있는 자는 누굽니까?”
“ 무정마검 백리자성이네.”
“ 알겠습니다. 아버님. 몸 조리 잘하십시오. 그럼.”
연우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남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이어 염자생이 몸을 날리고, 두 사람은 순식간에 검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내가 원하면 율령궁 무인들의 가족을 전부, 아니 키우던 개까지 없애주겠다고 하더구나.”
전무웅의 눈은 멀어지는 연우강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 싫다고 했다.”
“ 왜 그러셨습니까?”
“ 글쎄다. 내 앞에서 가족들이 죽어갈 때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 그런데요?”
“ 문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 복수를 포기하겠단 말입니까?”
“ 그건 절대 아니다.”
“ 그럼?”
“ 복수의 대상은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마악추 천잔성 그놈 말이다. 그리고 연 공자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한다는 사실도.”
“ 지금부터 천잔성 그놈이 어르신들 손에서 살아남기를 빌고 또 빌겠습니다. 아버지.”
전관수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틀어쥐었다.
“ 그놈을 비롯한 조운곡에 왔던 백 명의 머리는 가지고 돌아가고 싶구나.”
“ 물론입니다. 아버지.”
휙!
아버지를 안은 전관수는 다시 왔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곧 그의 신형도 연우강과 염자생처럼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
콰앙!
문을 거칠게 밀어젖히며 범일승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북진무사 남철진과의 대화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대야벌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벌내쟁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설명했다. 더불어 그 대상이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루미 네 문파가 될 거라는 말도 했다.
태연하게 말은 했지만 내심 걱정도 많았다.
금의위에서도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눈엣가시로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관부의 자존심을 들먹이며 반대할 경우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일 금의위에서 반대하면 대야벌은 사면초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철진은 대야벌 일을 왜 자신에게 상의하느냐며 크게 웃었다. 더 이상은 대야벌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를 술집으로 옮겨 이번에는 장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하오밀문과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수시로 생겨나는 시체에 대한 처리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슬쩍 연우강에 대한 건을 흘렸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철진은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였다. 좋은 기분으로 술집을 나와 이곳으로 왔는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겐가?”
범일승은 우담보 곁으로 가며 다그쳤다. 우담보는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 한잔하겠는가?”
우담보는 마시던 잔에 술을 따라 범일승 앞으로 밀었다.
“ 한 잔이 아니라 통으로 비울 생각이네.”
범일승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 응?”
목으로 넘어가는 거친 느낌에 범일승의 시선이 술병으로 향했다. 아주 오래 전, 하류 무인으로 밑바닥을 전전할 때 수시로 마셨지만,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과거와 함께 버렸던 그 술이었다.
“ 화주네.”
“ 화주를 마실 정도로 절실했는가?”
범일승은 우담보 건너편으로 앉으며 물었다.
“ 난 대야벌 율령궁 궁주고 백대고수 서열 육위네. 삼궐칠련십림의 이십 개 문파가 있지만 난 단 한 번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네. 왜냐면 우리 율령궁보다 강한 문파는 없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네. 마음만 먹으면 율령궁의 힘만으로 문파 한두 곳은 없앨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단 말이네. 그런데.....”
우담보는 빈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 난 우물 안 개구리였네. 하오밀문조차 이기지 못하는 놈이 그들을 우습게 봤단 말이네.”
“ 서방사자영이 몰살당한 건 하오밀문이 아니라 잠룡 십 조 때문이었네. 우 궁주.”
“ 전에도 말했지만 그놈들을 없애지 못하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네.”
“ 하지만 율령궁은 대야벌 소속이네. 잠룡들이 속한 가문을 공격하는 건 대야벌이 무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되네.”
“ 무림엔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네. 범 궁주. 잠룡들의 가문이 멸망하는 사건 또한 그러한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네. 더구나 지금 잠룡들은 암살대전을 치르는 중이네.”
“ 상관없다는 말인가?”
“ 우리만 입을 다물면.”
“ 우리 둘이 입을 다문다고 해서 될 일이라고 보는가?”
“ 그 우리에는 벌주도 포함돼 있네, 범 궁주.”
“ 미치겠군.”
범일승은 우담보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르고 한 일이라면 호통이라도 치겠지만, 이번 일의 결과는 누구보다 우담보가 더 잘 알고 있다. 화주를 마시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일로 인해 대야벌에서 버림을 받는다면 과거 화주를 마셨던 그 시질로 돌아가겠다는 각오다.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난 평생 동안 대야벌을 위해, 아니 벌주를 위해 살았네. 범 궁주. 이번 일 또한 ‘생쥐박멸 작전’과 병행해서 벌이고 있는 무림 말살 작전의 한 맥락이라고 봐 주면 좋겠네.”
“ 빌어먹을 친구.”
범일승은 앞에 놓인 술병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열려 있는 벽장으로 가 화주를 집어넣고 최고급 술과 술잔을 가지고 나왔다.
생각해보니 변명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오밀문과 동맹을 맺은 가문이라고 해도 되고, 밀천에 가입하기로 맹세한 가문들이라고 해도 된다. 아니 굳이 변명거리를 만들 필요도 없다. 대야벌에서 그렇다면 그게 바로 진실ㅇ리다. 약간의 술렁거림은 있겠지만,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범일승은 가져온 술잔과 원래 있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채워지면서 향긋한 주향이 풍겨 나왔다.
“ 벌주는 어떻게 나올 걸로 보는가?”
범일승은 술잔을 우담보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 글쎄.....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이 날 거네.”
“ 자네가 원하는 거라면?”
“ 그건 벌주께서 알고 계시네.”
우담보는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 벌주께서 알고 계시는 게 아니라 머리를 싸매고 누웠을 거네. 이 사람아.”
“ 허허허! 그동안 우리가 벌주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운 적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가. 벌주도 그런 경험을 해 봐야 우리 심정을 알 것 아닌가?”
우담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만우량의 보고를 받고 있는 담대만승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 그러니까 이미 철응방은 몰살을 시켰고, 다른 가문으로 갔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 하하하! 그 친구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군.”
담대만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웃을 일이 아닙니다. 벌주님. 잠룡 십 조는 대야벌로 귀환하고 있는데, 율령궁 무인들이 그들의 가문을 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 확인된 사실도 아닌데 웬 호들갑인가?”
“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는 건?”
만우량은 의아한 얼굴로 담대만승을 보았다.
“ 매일매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소문이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곳이 강호네. 뇌천. 그것들 또한 그 소문들 중 하나일 뿐이네.”
“ 하지만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며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자칫 잘못하면 강호 무림이 우리 대야벌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 그럼 우 궁주를 불러들이란 말인가?”
“ 그래야 합니다.”
“ 불러들여서, 그 다음엔?”
“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사실로 드러났을 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 그럼 난 평생을 나를 위해 헌신했던 부하를 잃게 되네. 뇌천.”
“ 그를 보호하려다가 더 큰 걸 잃을 수도 있습니다.”
“ 대야벌을 말하는 건가?”
“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벌주님.”
“ 대야벌이 분위기에 좌우되는 그런 단체라고 생각하는가?‘
“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천상천을 노리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깝게는 벌주님의 동생이신 군마련 련주가 있고, 멀게는 황실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들에게 약점을 잡힐 때가 아닙니다.”
“ 대야벌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는가?”
“ 올해로 사십 년입니다.”
“ 사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 대야벌을 제대로 모르는가?”
“ 벌주님!”
“ 잘 듣게. 뇌천. 여긴 대야벌이네. 흰 걸 검게 만들고, 검은 걸 희게 만들고, 소문을 사실로 만들고, 사실을 소문으로 만드는 그런 곳이 대야벌이네. 대야벌은 무림의 법이고, 질서고, 존재 이유네. 대야벌이 없으면 무림도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 벌주님!”
만우량은 다시 담대만승을 불렀다.
“ 범천뇌격단을 보내게.”
“ 네에?”
만우량은 뜨악한 얼굴로 담대만승을 보았다.
범천뇌격단은 천상천 세력 중의 한 곳으로 음지에서 활동했던 무면천군단과 달리 드러내놓고 활동하는 단체였다. 더불어 무면천군단보다 더 강한 무인들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그들을 내보내라니.
“ 완전하게 지우라는 말이네. 아니 명령이네.”
담대만승이 알고 있을 거라고 하였던 우담보늬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 제 12권 끝>
황금 백수 1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