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지옥의 한자리를 예약한 자들
장사 지부를 떠난 율령궁이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남쪽 형양이었다. 형양은 상강 중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동쪽으로는 형산 최고봉인 축융봉을 껴안고 있다. 형양에는 장사 지부 다음으로 큰 안가가 있는데 우담보는 그곳을 지휘본부로 삼았다.
안가의 이름은 석수 산장이었다.
석수 산장이 자리해 있는 곳은 사방 수십 리에 거쳐 바위와 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석수평이라고 불렸다. 집채만 한 바위와 커다란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그 사이로 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아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율령궁의 입장에서는 적당한 장소였다.
호정전, 화월전, 수정전, 칠성전, 명옥전의 다섯 개 건물로 이루어진 석수 산장은 여타 다른 장원과 마찬지로 평온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축융봉과 이어져 있는 산장 뒤편으로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은밀하게 들어갔다가 소리없이 나가곤 한다. 그들은 다름 아닌 호남 각처에서 소식을 가져오고 가져가는 전서단 대원들이다.
축융봉 바로 아래쪽, 장원으로 보면 북쪽에 위치한 호정전이 우담보의 거쳤였다. 이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중 일층에는 회의실과 우담보의 집무실이 있고, 이층은 침실로 사용 중이다.
우담보의 일상은 어둠과 함께 시작된다.
전서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상황이라면 굳이 밤에 활동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정보가 인편으로 오가고, 정보를 전송하는 전서단 대원들의 무공이 그다지 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아니 그보다는 정보의 안전한 전송을 위해 밤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차를 마시며 하루 일정을 대충 살펴본 우담보는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은 두 부분으로 나위어 있다.
절반은 각 지역에서 올라온 정보를 수합하여 분석하는 분석실이고, 나머지 절반은 수합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립하는 작전실이다.
우담조가 들어간 곳은 작전실이었다.
작전실의 내부는 단출하다. 출입문을 중심으로 오른편 벽에 호남의 지도와 중원 전도가 걸려 있고, 중앙에는 지도를 마주 보고 있는 커다란 원형 탁자가 놓여 있다.
그 탁자 주변으로는 천안원 원주 유선과 천법원 원주 이사진 그리고 천살원 원주 이청문이 앉아 우담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 오십니까.”
우담보가 들어가자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좋지 않은 소식이라도 올라온 겐가?”
우담보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세 명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던 거였다.
“ 사 조가 전멸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유선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 사 조라면...... 장사 지부를 맡았던 조를 말하는 건가?”
“ 그렇습니다.”
“ 잠룡 십 조가 장사로 갔다는 말인가?”
문득 질문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룡 십 조가 장사로 가는 경우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일이 예상대로 돼 가는데 저들의 얼굴이 굳어 있을 이유가 없을 터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 말해보게.”
우담보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 집행사자를 비롯한 밀정들을 살해한 수법은 네 가지에 불과했습니다.”
“ 정말인가?”
“ 시체를 조사하고 얻은 결론입니다.”
“ 시체를 가져왔는가?”
“ 이십 구를 수정전 지하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가보세.”
우담보는 벌떡 일어났다.
네 가지 수법이라면 네 명을 의미하고 삼백 명의 무인이 당했다면 그 네 명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뜻이다. 아니, 강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렇듯 강한 자였다면 위중악은 철수 명령을 내려야 옳다. 경험이 없는 자도 아니고, 위중악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삼백 명이 죽어갈 동안에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건 대처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터였다.
호정전을 나선 네 사람은 장원 서남쪽에 위치한 수정전으로 향했다. 이십 구의 시체는 수정전 지하에 안치돼 있었다. 살해 수법에 따라 분류한 듯 시체를 담은 관은 네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선 일행이 걸어간 곳은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 있는 관이었다.
“ 열어라!”
따라 들어온 부하를 향해 유선이 입을 열었다. 명령을 받은 천법원 감찰사자는 관 뚜껑을 열었다.
“ 으음!”
시체를 본 우담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관 안의 시체는 목이 잘려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도에 당한 흔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마기가 어려 있군.”
잘려나간 단면을 살피던 우담보가 이사진을 보며 말했다.
“ 그렇습니다. 궁주님. 도에 당한 시체들에는 한결같이 마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시체가 백이십 구였습니다.”
“ 다른 무기는 뭔가?”
“ 이 시쳅니다.”
이사진은 왼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 저건 뭔가?”
우담보는 시체와 함께 놓여 있는 낫과 괭이 형태의 나뭇조각을 가리키며 물었다.
“ 이마에 난 상처를 바탕으로 만든 무깁니다.”
이사진은 나무를 들어 올렸다.
천법원에서 사인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빙공이다. 무기에 찔린 부위에 물을 붓고, 빙공을 이용해 얼리면 상처의 모양을 본뜰 수 있는데, 그 모양을 바탕으로 무기의 모양을 추론해 내고 나무로 깎아 살해 무기를 만들어 낸다. 낫과 작은 괭이는 그 과정을 거쳐 만든 것이었다.
“ 눈에 익군.”
“ 그렇습니다. 이 낫과 손괭이는 전에 연우강이 지옥 죄수들을 없앨 때 사용했던 무기와 비슷합니다. 낫과 손괭이에 당한 시체는 백두 구입니다.”
“ 네 명 중 한 명이 연우강이란 말인가?”
“ 사인을 바탕으로 추론해 냈을 뿐입니다. 궁주님.”
“ 가능하다고 보는가?”
우담보의 시선이 이청문에게로 향했다.
“ 그건.....”
이청문은 말끝을 흐렸다.
지옥에서 연우강을 데리고 나올 때 분명 무공을 확인했다. 내공은 내세울 정도는 되지 않았고, 익힌 무공은 칠보귀둔필사가 다였다. 물론 그 후엔 흑철마신을 익혔다고 하지만, 그 실력으로 백두 명이나 되는 무인을 없앴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 설사 그 날 이후에 기연을 얻었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궁주님.”
이청문은 확신하듯 말했다.
“ 하지만 백두 명이 당한 건 사실이네. 청문.”
“ 전 묘강독존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할 때는 반드시 근거를 만들어 놔야 한다는 건 보고자의 기본이다. 시체를 살피면서 이미 준비해 두었던 대답이었다.
“ 무혼독을 말하는 건가?”
무혼독은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군자산의 일종이지만 효과는 전혀 다르다. 군자산은 단전에 쌓여 있는 내공을 온몸으로 흩어지게 하여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하게 하는 반면 무혼독은 단전의 내공은 그대로인데 무공을 펼칠 때 문제가 생긴다.
단전에 쌓인 내공 중 일 할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무공을 펼치기 전까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산공독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독이 무혼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혼독을 개발한 사람이 묘강독존 갈인효였다.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궁주님.”
“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우담보는 고개를 돌려 이사진과 유선을 보았다.
“ 저는 연우강에게 파천육기의 하나인 묵사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유선이 대답했다.
“ 그러니까 유 원주 자네 말은 쇠를 두부처럼 자르는 묵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손괭이와 낫을 사용한 것은 거믕ㄹ 사용할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라는 건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군 생활을 오 년동안이나 했다면 검 정도는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묵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 무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집행사자들이 무리하게 달려들지 않았을 겁니다.”
“ 결국 유원주 자네도 무혼독에 중독된 상태라고 보는군.”
딴에는 두 사람의 말이 일리가 있다.
아무리 무혼독이라고 해도 집행사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피하기보다는 공격을 감행했다는 건 네 명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그 약점을 공격하다가 결국엔 전멸을 당한 것일 테다. 네 명의 최대 약점은 바로 연우강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 다음 시체를 보세.”
우담보는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 이건 암기에 당한 시체들입니다.”
관 앞으로 서자 이사진이 시체에 대해 설명했다.
“ 어떤 암긴가?”
“ 끝이 뭉툭하고, 가공할 속도로 회전한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 형태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그랬군. 저건 어떤 무기에 당한 건가?”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는 시체를 가리켰다. 그것은 얼굴이 망가진 시체였다.
“ 조에 당했습니다.”
“ 그럼 무기는 다섯 종류가 사용됐고, 연우강은 낫과 손괭이를 사용하니까 인원은 네 명이란 말이 되는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이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여긴 냄새가 너무 심하구먼. 일단 밖으로 나가도록 하지.”
지하를 나온 우담보는 곧바로 호정전으로 향했다.
“ 대책은 뭔가?”
자리에 앉자마자 우담보는 세 사람을 보며 물었다. 상황을 알았으니 이제는 대처방안을 세워야 할 때였다.
“ 백리 단주에게 놈들이 무혼독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유선이었다.
“ 그들이 척살단을 따라잡을 걸로 보는가?”
“ 지금 하오밀문의 정보력은 우리와 비슷하다고 봐야 합니다. 만일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척살단의 다음 행선지는 어딘가?”
“ 사천입니다.”
“ 사천이면 만금종리가가 있는 곳인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 백리 단주에게 첩지를 전달하는 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네.”
자칫 잘못하면 하오밀문에게 꼬리를 밟힐 수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 지금 하오밀문의 모든 시선은 동정호와 악양에 몰려 있습니다. 첩지를 쥔 밀정이 호남을 빠져나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소 두 명 이상을 보낼 생각입니다.”
“ 그건 유 원주가 알아서 하게. 그보다 잠룡 십 조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악양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북쪽이 아니고 동쪽이란 말인가?”
그건 좀 의아했다. 대야벌이 있는 산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장강으로 빠져나간 다음 북상해야만 한다. 그런데 장강이 아닌 동쪽이라니.
장사 지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예상을 빗나간 행보였다.
“ 동쪽으로 이동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선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 소문 때문인가?”
“ 그렇습니다. 지금 강호에는 율령궁에서 잠룡 십 조는 물론이고 그들의 가문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 그건 이미 예견했던 일이네, 유원주.”
“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지나칩니다. 대야벌을 성토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밀정들이 정보를 얻는 장소는 주로 객잔과 주루 시장 등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잠룡 십 조나 하오밀문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하게 사라졌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밀정들이 몰매를 맞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 일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혀질 거니까 신경 쓰지 말게. 그건 그렇고 놈들은 한꺼번에 흩어지지 않았는가?”
“ 그렇습니다. 전부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답니다.”
“ 소문을 내고 움직이면 우리가 그만둘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로군.”
“ 그런 것 같습니다.”
“ 바로 그 점 때문에 작전을 바꿀 수가 없네. 유 원주. 만일 지금 시점에서 공격을 멈추게 되면 또다시 놈들의 의도대로 끌려가게 되네. 그럼 우리 서방사자영을 잃었던 것과 같은 상황을 맞게 될 거네.”
“ 저희들은 상관없습니다만 궁주님의 위명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궁주님께서 건재해야 저희들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유선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번 작전에 목을 걸겠다고 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이지 정말로 죽겠다는 건 아니다. 아니 하오밀문과 전쟁을 하면서 목숨을 버린다면 죽어서도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은 맞고 싶지 않았다.
“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하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 그럼 이 모든 걸 밀천에게 뒤집어씌우게.”
“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유선은 물론이고 두 명의 원주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밀천을 이번 전쟁에 끼어들게 할 수도 있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궁주가 직접 그에 대한 결정을 내려준 것이다.
“ 어차피 소문인데 무슨 소용인가. 그렇게 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곧바로 밀천의 소행이라는 소문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 좋네. 그건 그 정도로 넘어가고 아군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 북방사자영은 장강 건너편에 포진 중이고 동방사자영은 동정호 일대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천법원 감찰사자 이천 명은 악양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천살원 집행사자는 십일조부터 이십 조까지 투입돼 있습니다.”
“ 남쪽으로 가 있는 잔살단의 상황은 어떤가?”
“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 건달들이 몸을 피했단 말이군.”
“ 그런 것 같습니다. 대부분 몸을 피해버리고 걸려든 자들이라고 해도 하오밀문에 대해 정보를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랍니다.”
“ 그럼 객잔이나 주루를 직접 치라고 하게.”
“ 그건.......”
유선은 굳은 얼굴로 우담보를 보았다.
“ 이미 시위는 당겨졌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네. 그리고 북진무사 남철진에게도 이야기가 된 상황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말게.”
“ 접니다. 원주님.”
바로 그때 옆방과 이어지는 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분석실에서 올라온 정보를 분석하는 자들의 수장인 제운이었다.
“ 들어오게.”
문이 열리고 보고서를 든 제운이 들어왔다.
“ 뭔가?”
“ 그게.....”
제운은 가져온 보고서를 유선에게 건넸다.
“ 사실인가?”
첫 장을 살펴본 유선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보고서에는 천법원 감찰사자를 비롯한 천안원 밀정 칠백여 명이 살해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쪽에는 적의 정체에 대해 적혀 있었는데 극고한 은신술을 사용하는 자들이라고만 돼 있었다.
“ 각처에서 올라온 첩지를 기준으로 작성한 보고섭니다.”
“ 첩지가 거짓일 리는 없을 테니까 사실이란 말이군.”
유선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보고서를 들춰보았다.
그 보고서에는 잠룡 십 조와 함께 움직였던 지옥 죄수들에 대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 알았네. 수고해 주게.”
“ 알겠습니다. 원주님.”
제운은 고개를 숙이고는 분석실로 돌아갔다.
“ 무슨 일인가?”
우담보는 보고서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아무래도 밀천이 본격적으로 관여한 모양입니다.”
유선은 보고서를 우담보에게 건네주었다. 우담보는 빠르게 보고서를 읽어내려 갔다.
“ 끄응!”
보고서를 쳐다보던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 지금 여유 병력이 사 조와 십 조까지인가?”
“ 그들 중 오 조와 육 조는 잔살단에서 올라온 정보를 바탕으로 하오밀문 문도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 그럼 칠 조, 팔 조, 구 조, 십 조가 남는군.”
“ 그렇습니다.”
“ 칠 조, 팔 조에게는 각 지역을 맡기고, 구 조와 십 조는 지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을 처리하도록 하게.”
“ 이백 명으로 그들을 없애는 건 불가능합니다. 궁주님.”
“ 감찰사자 삼백 명을 투입하게. 그리고 잠룡 십 조에 대한 공격은 잠시 미루게.”
“ 왜.....?”
유선은 의아한 얼굴로 우담보를 보았다.
“ 놈들이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이동하는 이유를 알아낸 다음에 처리해도 늦지 않네.”
신중한 자가, 아니 머리로 먹고 사는 자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였다. 완벽한 일 처리가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사건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더불어 이번 일에 개입됐다는 소문을 밀천에 흘리기로 한 터라 굳이 급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 밀천에 대한 소문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겠다는 말씀입니까?”
“ 그것도 있고.”
“ 알겠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고개를 숙이고는 분석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 시진 후, 품속에 첩지를 넣은 전서단 대원 이십여 명이 석수 산장 후문으로 빠져나와 축융봉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빌어먹을 전서구.”
빠르게 빠져나가는 전서단 대원들을 바라보는 우담보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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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에는 커다란 탁자가 하나 놓였다.
그 탁자 뒤에는 두 개의 탁자가 놓였고, 두 개의 탁자 뒤에는 네 개의 탁자가, 맨 끝에는 여덟 개의 탁자의 놓여 있었다. 뭔가를 하는 작업대인 듯 탁자 주변으로는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이 분류하는 것은 정보였다.
이곳은 하오밀문 최심처인 정보 분석실이었다.
정보 분석실은 원래 악양에 있었는데, 율령궁의 감찰사자들이 들어오면서 황룡호 선실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더불어 황룡호 또한 원래 있던 자리를 떠나 동정호를 떠다니는 중이었다.
정보 분석원들이 하는 일은 간단했다.
맨 앞에 있는 탁자에서는 대롱 안에 들어 있는 첩지를 꺼내 하오밀문의 내부 일과 외부 일로 분류하여 뒤 탁자로 전달하고, 뒤 탁자에서는 다시 그것들을 분류하여 뒤편으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네 단계를 거치면 각 지역에서 올라온 정보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최고위 선으로 보고되는 것이다.
최종 정보를 받아보는 사람은 허일구와 이철상이었다.
“ 석수 산장을 떠난 밀정이 각처로 흩어졌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문주님.”
첩지를 보던 이철상이 허일구를 보며 말했다.
“ 호남에서 광서, 귀주, 사천으로 나가는 길목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네. 어느 누가 됐든 그곳을 통해 나가는 자가 있다면 우리 눈에 걸려들 거네.”
“ 이곳보다는 영주에 나가 있는 흑천노신군 영감님들께 먼저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 그것도 이미 지시를 내려두었네.”
“ 그리고 잠룡 십 조는 노구포로 이동하라고 하십니다.”
“ 노구포라면?”
허일구는 한편 벽에 걸린 지도를 보았다.
악양 북동쪽이면서 장강 남쪽에 위치한 노구포는 습지로 유명한 곳으로 몸을 숨기기엔 적당한 장소지만 잠룡 십 조가 가려고 하는 산서성 쪽은 아니었다.
“ 이것 때문입니다.”
이철상은 들고 있던 첩지를 허일구 앞으로 내밀었다.
허일구는 첩지를 보았다.
< 잠룡대 악양으로 들어옴>
내용을 확인한 그는 이철상을 보았다.
잠룡대가 악양으로 들어온 것과 잠룡 십 조가 노구포로 가는 게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철상의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 혹시 그들이 나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지약 소저는 나설 겁니다.”
“ 상대는 다른 곳이 아니라 율령궁이네.”
“ 그건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 그렇습니다. 하지만 잠룡대 대원들이 보기엔 아닙니다.”
이철상은 또 다른 첩지를 허일구 앞으로 내밀었다.
< 잠룡 십 조를 공격하는 자들이 율령궁이 아니라 밀천 무인이란 소문이 급속하게 돌고 있음..
“ 끝장을 볼 셈이구먼.”
물론 밀천이 관여됐다는 소문이 돌면 잠룡대 대원들에게 움직일 수 있는 구실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우담보는 잠룡 십 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구나 삼합평에서 잠룡들에게 당한 전력이 있는 밀천이 잠룡 십 조를 공격한다는 소문은 아주 그럴싸하다.
오히려 율령궁이 공격한다는 말보다 밀천에서 공격한다는 말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야말로 잠룡 십 조 입장에서 보면 사면초가인 상황이었다.
“ 우담보는 처음부터 그럴 셈이었습니다.”
문득 잠룡대를 주시하라고 하였던 연우강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들이 악양에 나타날 걸 염두에 두고 그 말을 한 것일 테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 틀림없다.
“ 화급입니다.”
느닷없이 탁자가 있는 곳에서 하오밀문 문도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전체적으로 붉은색이 칠해진 대롱이 들려있었다.
“ 이리 주게.”
연우강으로부터 온 첩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철상이 대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내의 손에 들려있던 대롱이 허공을 날아 이철상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 왔다.
이철상은 급하게 뚜껑을 따고 첩지를 꺼냈다.
< 광동차가는 포기한다. 귀양에 있을 테니까 척살단으로 소식을 전하러 가는 놈은 무조건 잡아서 다음 행선지를 알아내. 닷새 후 귀양에 도착할 예정. 하오밀문 지부에 있을 것임.>
“ 무슨 소식인가?”
“ 광동차가를 포기한다는 서찰입니다. 아울러 척살단으로 가는 놈을 무조건 잡아서 다음 행선지를 알아내라고 합니다.”
“ 그 친구가 율령궁에서 척살단으로 소식을 보낸다는 걸 어떻게 알고 그런 서찰을 보낸 건가?”
“ 장사 지부를 박살낼 때 우담보가 척살단으로 소식을 보낼 수밖에 없도록 미끼를 던져 놓았겠지요.”
“ 무슨 미끼를 던져 놓았단 말인가?”
“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것보다는 척살단으로 가는 전서단 대원을 무조건 찾아내야 합니다. 문주님.”
“ 그건 다시 한 번 명령을 내려놓도록 하겠네. 그보다 차라리 석수 산장을 공격하는 건 어떤가?”
“ 율령궁은 머리를 잘라낸다고 해도 다른 머리가 금세 생겨나는 괴물입니다.”
“ 우담보가 죽는다고 해도 다른 자가 금세 올 거란 말인가?”
“ 범일승도 있고, 혁세군도 있습니다. 지휘관이 바뀌면 부하들은 긴장하게 되고, 우리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더불어 모든 작전을 적 수뇌에게 맞춰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하고요. 그런 괴물을 완벽하게 없애는 방법은 잔뿌리부터 제거하면서 조금씩 큰 뿌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머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 그건 나도 아는데 답답해서.....”
“ 이번 싸움은 초조해하는 자가 패한다고 한 말을 잊으셨습니까?”
“ 알고 있지만 답답해서 그런 거 아닌가?”
“ 하나씩 풀려갈 테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우선 일부터 하시지요.”
“ 그렇게 하세.”
허일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서 보낼 준비를 했다.
허일구가 일어나자 이철상은 첩지를 다루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 지금부터는 형양 남쪽에서 올라오는 첩지를 최우선적으로 선별하되, 잔살단과 관련된 사항을 제외해 주시오.”
“ 알겠습니다.”
하오밀문 문도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하지만 전서단으로 보이는 자들의 소식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밤이 훌쩍 지나고 다음 날 점심 무렵이 됐지만 전서단에 대한 첩지는 없었다.
“ 빌어먹을......”
이철상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 나흘.
아니 귀양까지 소식을 전해야 하니까 저녁 무렵에는 척살단으로 가는 전서단 대원의 소재를 파악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연우강은 귀주, 광서, 운남, 사천 중 한 곳을 택해야 할 테다. 다행히 심각한 상황임을 알고 가문들이 피한다면 문제가 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광동에 이어 또 한곳의 가문이 초토화될 것이다.
“ 나왔습니다. 교랑.”
“ 나왔습니다.”
“ 여기도 있습니다.”
동시에 다섯 명이 첩지를 들며 소리쳤다.
“ 어디요?”
이철상은 첩지를 잡아챘다.
< 적의 밀정으로 보이는 자 발견, 흑천노산군에 알림.>
< 적의 밀정으로 보이는 자 발견, 흑천노산군에 알림.>
< 적의 밀정으로 보이는 자 발견. 흑천노산군에 알리고 따르는 중임. 소양>
< 적의 밀정으로 보이는 자 발견, 흑천노신군에 알리고 따르는 중임. 강회>
< 적의 밀정으로 보이는 자 발견, 흑천노신군에게 알리고 따르는 중임. 황토.>
“ 잡았다!”
이철상은 첩지를 불끝 틀어쥐었다.
앞에 나온 두 장의 첩지는 알 수 없지만 뒤쪽 세 장은 척살단의 전서단이 분명했다. 첨지 아래쪽에 쓰인 지명은 율령궁의 지부가 있는 석수 산장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방향이었다. 더불어 그들이 아직 호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척살단 또한 광동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첩지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철상은 허일구를 보며 물었다.
“ 잠룡 십 조 쪽으로 갈 첩지와 남쪽으로 갈 첩지 열 개를 따로 만들었네.”
“ 먼저 그들을 출발시키십시오.”
“ 흑천노신군으로 갈 첩지는 어떻게 할 참인가?”
“ 배로 보내는 게 가장 빠릅니다.”
“ 하지만 선박은 율령궁에서 감시하고 있을 거네.”
“ 그럴 줄 알고 수공에 능한 자들을 배치시켜 두었습니다. 그들이 이 첩지를 가지고 상덕까지만 가면 그 다음부터는 쾌속선으로 이동할 겁니다.”
이철상은 조금 전 당도한 세 장의 첩지와 연우강에게서 온 첩지를 한꺼번에 대롱에 넣고 밀봉했다. 쾌속선을 동정호 밖으로 배치한 것은 율령궁 밀정들이 동정호 주변으로 올라오자 곧바로 시해안 조치였다.
“ 장 대협!”
그는 황룡호 옆에 붙어 따라오고 있는 소선을 보며 소리쳤다.
“ 말하시오, 교랑!”
수공을 익힌 무인들이 주로 입는 수어피를 걸친 자가 이편을 돌아보았다. 그는 과거 장강수룡 육대와 함께 장강수로채를 이끌었던 장강어룡 장유삼이란 자였다.
“ 홍강으로 가야 하오. 이걸 가지고 가시오.”
네 장의 첩지가 든 대롱을 허공섭물로 장유삼을 향해 던졌다.
“ 어떻게 하면 되오?”
대롱을 받아든 장유삼이 물었다.
“ 홍강 시장으로 가시오. 그곳에 가면......”
그 다음 말은 전음으로 이어졌다.
“ 알았소이다. 교랑.”
고개를 끄덕인 장유삼은 노 저을 준비를 하고 있는 부하들을 보았다.
“ 목적지는 원강 상류의 홍강이다. 내일 아침까지는 무조건 도착해야 한다.”
“ 알겠습니다.”
노를 잡고 있던 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배 좌우 측에서 여덟 개의 노가 나오더니 힘차게 물살을 갈랐다. 빠른 속도로 동정호를 가로지른 쾌속선은 한 시진 후 원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당도했다.
원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횃불을 밝힌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하오밀문에서 나가는 정보원을 잡기 위해 동원된 율령궁 밀정들이었다.
“ 너희들은 여기서 돌아가라.”
장유삼은 대롱을 갈무리한 후 조용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 조심하십시오.”
노잡이들은 장유삼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배를 돌려 다시 동정호로 향했다.
“ 신기록을 세우게 생겼네.”
장유삼은 피식 웃었다.
평소엔 이곳에서 상덕까지 두 시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은 한 시진 안에 주파해야 할 듯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장룡어룡이라는 별호를 얻게해 주었던 해룡잠수공을 끌어올렸다. 온몸에 진기가 넘치자 허리춤에서 오리발 형태의 신발을 꺼내 신고, 손에도 역시 오리발 형태를 띤 장갑을 끼었다.
“ 간다!:”
장유삼은 양발과 양손을 힘차게 저었다. 그의 손과 발이 움직일 때마다 물살은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어둠 속에서 검은 모자까지 쓰고 있는 그는 아무리 눈이 좋은 자라고 해도 쉽게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은밀했다.
더불어 선박이 있는 곳에서는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가 한참 후에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장유삼을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쉬지 않고 손발을 움직인 그는 원했던 시간 안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반 시진을 앞당길 수 있었다.
상덕에 도착해 갈대가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부엉이 소리를 냈다. 세 번에 걸쳐 부엉이 소리를 내자 갈대 숲에서 쾌속선 한 척이 나왔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자는 장강수룡 육대였다.
“ 급한 일인가?”
숨을 몰아쉬는 장유삼을 보며 육대는 물었다.
“ 화급을 다투는 일이네.”
장유삼은 이철상으로부터 들었던 말을 빠르게 전했다.
“ 알았네. 탈 텐가?”
“ 아닐세.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배가 빨리 갈 것 아닌가. 난 이곳에서 쉬고 있겠네.”
“ 알았네. 그럼 먼저 가겠네.”
육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뱃전에 앉아 있던 자들이 노를 내렸다.
“ 돛을 올려라!”
육대는 나직이 말했다.
마침 바람이 남쪽으로 불고 있었다. 돛을 올리자마자 쾌속선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갔다. 거기에 여덟 개의 노가 더해지자 쾌속선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강을 따라 빠르게 나아가던 배가 처음으로 멈춘 곳은 한 시진 반이 지난 후였다. 그곳 역시 울창한 갈대 숲 천지였다. 갈대 숲이 보이자마자 육대는 부엉이 소리를 냈다. 그러자 상덕에서 그랬던 것처럼 안에서 쾌속선이 나오고, 육대는 그 배에 옮겨 탔다.
두 시진 거리로 쾌속선을 배치하였는데 돛을 올린 바람에 반 시진을 단축한 것이다. 그렇게 밤새도록 달린 육대는 다음날 새벽에 홍강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하오밀문 문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오밀문 문도의 거처는 강변에 위치한 홍강 시장 안 대장간이었다.
육대는 주변을 살피며 느긋하게 걸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강과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허름한 대장간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 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간 육대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 중 두 노인은 아는 사람들이었다. 허리를 한껏 숙인 채 시골 노인 행세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은 두작군과 허일삼이었다.
“소식을 가져온 건가?”
육대를 알아본 두자군이 호미를 살피는 것처럼 하면서 물었다.
“ 그렇습니다. 어르신.”
육대는 품속에 있던 대롱을 꺼내 재빨리 곁에 있는 허일삼에게 내밀었다.
“어디 보자.”
허일삼은 대롱의 뚜껑을 열고 안에서 첩지를 꺼냈다.
“ 귀양으로 가야 한단 말이군. 아무튼 알았으니까 자넨 돌아가 있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어르신.”
육대는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지금 놈들이 어디 있다고 했는가?”
두작군은 대장간 주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사내에게 물었다. 그 사내는 호남 남주 지역을 맡고 있는 소지부장 남악이란 자였다.
“ 반나절 거리에 있습니다. 어르신.”
“ 나갈 수 있겠는가?”
“ 물론입니다.”
남악은 망치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섰다.
“ 일단 물건을 봐야 알겠습니다. 어르신들.”
“ 따라오게.”
세 사람은 대화를 주거니받거니 나누며 시장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향했다. 시장을 완전하게 벗어난 지점에 도착하자 남악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전부 세 놈이라고 했는가?”
두작군은 남악을 따르며 물었다.
“ 아닙니다. 한 명은 중간에 빠지고 두 명만 서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서두르게.”
“ 알겠습니다.”
하지만 남악의 무공으로 두작군과 허일삼의 경공을 따라잡기엔 무리였다. 결국 두작군이 남악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려야 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린 세 사람은 하오밀문 문도가 쫓고 있는 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율령궁의 전서단으로 보이는 자들을 쫓고 있는 하오밀문 문도는 두 사람이었다.
두작군 일행이 도착하자 두 사내는 객잔을 가리켰다.
“ 저자들입니다.”
객잔에서 사내 두 명이 밥을 먹고 있었다.
“ 확실한가?”
두작군은 하오밀문 문도를 보며 물었다.
“ 확실합니다. 어르신. 오른쪽의 청의를 걸친 자는 소양에서부터 쫓아왔고, 왼편의 갈색 옷을 걸친 자는 강회에서부터 쫓아왔습니다. 저 둘은 홍강에서 만나 동행하고 있습니다.”
“ 그럼 틀림없겠군. 그만 돌아가도록 하게.”
두작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악을 보았다.
“ 수고하십시오. 어르신.”
남악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 잔살단 놈등리 움직이고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평소에 다니던 곳은 피하도록 하게.”
“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남악은 하오밀문 문도 두 사람을 데리고 왔던 길로 되돌아 갔다.
“ 저놈들이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는 걸 보면 아직 시간이 좀 있다는 말 같구먼.”
허일삼은 객잔 안을 살폈다. 점심 무렵이라 둘을 제외하고도 서너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 그런 모양이다.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자.”
두 사람은 객잔 근처로 자리를 옮겨다.
그곳에서 한 식경 정도를 기다리자 비로소 식사를 마친 두 명이 밖으로 나왔다.
“ 중경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하네.”
청의를 걸친 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 시간은 충분한데 뭐가 그리 바쁜가. 소화나 시키고 가도록 하세.”
“ 우리가 늦으면 척살단이 당할 수도 있다는 말 못 들었는가?”
“ 한 일 각 정도만 걷자는 건데 뭘 그걸 가지고 정색하고 그러나.”
“ 하하하! 알았네. 일 각만 걷다가 그 다음엔.... 응?”
멋쩍게 웃던 청의 사내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쪽에 노인 두 명이 앉아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을 대하는 순간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두 노인을 살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 너무 긴장한 모양이네.”
청의 사내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클클클! 무인은 육감을 믿어야 햐는 거다. 이놈아.]
“ 헉!”
청의 사내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전음이 들려온 것이었다. 그는 황망히 나무 밑에 있는 노인들을 보았다.
하지만 노인들은 피곤한 듯 나무 둥치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 바로 옆에 있는데 뭘 찾기는 찾아, 인마.”
“ 억!”
비명을 지르는 순간 뜨끔한 느낌과 함께 몸이 마비됐다.
“ 다, 당신들이?”
청의 사내는 놀란 눈으로 두 노인을 보았다.
“ 조용한 곳으로 옮겨야겠구나.”
두작군은 허공섭물로 사내를 약간 들어올린 후 숲으로 끌고 들어갔다.
“ 누, 누구요?”
청의 사내는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 질문을 하라고 아혈을 점혈하지 않은 게 아니다. 놈. 넌 지금부터 대답만 하면 된다.”
두작군은 차갑게 말하며 검을 뽑았다.
“ 무슨 대답을 하라는 거요?”
청의 사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 간단하다. 척살단의 다음 행선지만 알려주면 된다.”
“ 난 척살단이 뭔지 모릅니다.”
“ 모르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지.”
번쩍!
두작군의 검이 그대로 사내의 목을 갈랐다.
목을 자르기 전 아혈을 짚은 듯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떨어졌다.
“ 이제 너다.”
두작군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내를 겨냥했다.
“ 저, 정말 난......”
“ 그럼 너도 살아 있을 이유가 없구나.”
두작군은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 사, 사천입니다. 사천의 만금종리가가 척살단의 다음 목적집니다.”
검이 목을 향해 다가오자 사내는 급하게 소리쳤다.
“역시 게으른 놈이 입도 가볍다는 내 생각이 맞았구나.”
하지만 두작군은 검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아혈을 점한 다음 목을 잘라냈다.
사내의 목도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두작군은 그들의 품속을 뒤져 대롱을 꺼낸 다음 시체를 파묻었다. 그러고는 남은 흙을 주변에 뿌려 바닥에 떨어진 피를 지웠다.
“ 이러다 진짜 지옥으로 가는 거 아냐?”
시체를 묻은 곳으로 시선을 주던 허일삼은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 아직도 모르고 있었나?”
두작군은 놀란 얼굴로 허일삼을 보았다.
“ 뭘?”
“ 검을 쥐는 순간 지옥의 한 자리를 맡아놨다는 사실 말이다.”
“ 난 지옥으로는 가는 자리 예약한 적 없어, 인마.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절에 가서 부처님께 빌고, 도교 사원에 가서 원시천존께 빈다고.”
“ 그 양반들도 지옥에 있는데?”
“ 그 분들이 왜 지옥에 있어?”
“ 천당에서는 할 일이 없잖아.”
“ 할 일이 없다고?” “ 천당에 있는 놈들은 법이 없이도 사는 착한 놈들이잖아. 착하다 보니 교화할 건수도 없고, 반면에 지옥엔 교화할 놈들이 넘쳐나잖아. 당연히 지옥에 있어야지.”
“ 일리가 있네. 그럼 부처님이나 원시천존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으로 가야겠네?”
“ 당연하지.”
두작군은 피식 웃으며 몸을 날렸다.
“ 이어 허일삼이 몸을 날리고 두 사람의 신형은 지평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