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22화 (122/232)

제 4장 증발

콰앙!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강호인이 선실로 뛰어 들어갔다.

“ 무슨 일이냐?”

잠을 자던 철담마도 정인극은 침상 옆에 두었던 도를 잡아챔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적이 침입해 돌어온 경우가 아니면 강호인이 이렇듯 급하게 들어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 배,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강호인은 선실 창 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 정말이냐?”

정인극은 질겁한 얼굴로 밖으로 튀어나갔다.

“ 맙소사!”

밖으로 나온 정인극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배는 이미 삼분의 이 가량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갑판으로 물이 넘어올 판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왜 이제야 보고했냐며 나무랄 상황이 아니었다.

“ 적은?”

정인극은 갑판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조원들은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갑판에 서 있다. 적의 위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오히려 당한다는 것을 알고 취한 행동일 터였다.

“ 아직은 보이지 않습니다. 조장님.”

“ 물속에 숨어 있다는 말이구나.”

“ 그런 것 같습니다.”

“ 오십 명이라고 했던가?”

“ 그렇습니다.”

“ 우리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데.....”

정인극은 이번엔 수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물속에 숨어 있다면 배 주변을 둥글게 포위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곳을 향해 무작정 뛰어들었다가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당하고 말 것이다.

“ 흩어지지 마라.”

“ 어디로 가실 겁니까?”

“ 우리에겐 북쪽보다는 남쪽이 더 유리하다. 그리고 배가 완전하게 잠길 때까지 기다린다.”

물에 뛰어들기보다는 물에 익숙해진 다음 이동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인극이 꿈에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배를 물에 잠기게 하였떤 그 구멍으로부터 지옥청화독공의 정수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새 물은 갑판을 넘어 차오르고 있었다.

발이 물에 젖고 다리가 젖고 허리가 젖고 가슴까지 차올랐다. 집행사자들은 일제히 숨을 들이키고는 머리를 담갔다. 사방은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 잡랑.”

수여설은 장사덕을 불렀다.

“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할아버지.”

“ 알았다.”

수천월을 비롯한 사마윤 일행은 얼음 수조를 천천히 남쪽으로 밀었다. 배는 얼음으로 만든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어 수조와 배가 통째로 이동하는 형국이었다.

당연 수조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집행사자들과 수보의 벽은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남궁 가주!”

수여설은 남궁운화를 불렀다.

“ 네, 언니.”

“ 환영축골공은 어느 정도까지 익혔쬬?”

“ 체격은 몰라도 얼굴을 바꾸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거예요.”

“ 좋아요. 그럼 붙잡은 자의 얼굴로 바꾸도록 해요.”

“ 알았어요. 그렇게 지시를 내려놓을 게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솟아올랐다.

머리가 나오고 어깨가 나오고 허리가 나오고 급기야 그녀는 두 발로 물을 밟고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잠룡들을 향해 지시사항을 알려주었다.

“ 욱 할아버지는 철담마도 정인극을 잡아주시고요.”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수여설은 물 위를 걸어 얼음 수조의 남쪽으로 향했다.

“ 응?”

정인극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들어온 것처럼 물이 차가웠다. 지금은 한여름. 설사 흐르는 물이라고 해도 이렇듯 차가울 리가 없었다.

‘ 설마 빙공?’

문득 잠룡 십 조에 빙공을 익힌 수여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서둘러라!’

정인극은 바로 옆에 있는 부하의 어깨를 툭 치며 빨리 나아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더불어 그 또한 빠르게 나아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차갑게 웃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지옥청화독공을 펼친 갈인효였다.

정인극을 쳐다보던 갈인효는 양손을 오므렸다가 가볍게 튕겼다. 그의 손끝에서 쏘아진 지풍이 물을 가르며 정인극을 향해 쏘아져갔다.

“ 헉!”

정인극은 질겁하여 물러나며 검을 차가운 기운을 향해 검면을 들이댔다. 다행히 빨리 감지하고 방어한 덕분에 정인극은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옆에 있는 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갈인효의 지풍에 당하고 말았다.

지풍은 한 번에 죽을 정도로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은 입을 쩍 벌리게 만들었다.

벌어진 입으로 물이 벌컥벌컥 쏟아져 들어가고 이미 중독돼 있던 집행사자들은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러한 와중에도 계속해서 지풍은 물살을 갈랐다.

갈인효가 지풍으로 적을 공격하고 있는 사이에 수여설은 얼음으로 수조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수조의 지붕을 만들고 있는 그 시각 물속을 헤엄쳐간 정인극은 마침내 얼음벽과 마주했다.

“ 이건?”

미끈한 벽을 발견한 정인극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급하게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갔다.

턱!

위쪽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만졌던 것보다는 얇았지만 그곳도 얼음으로 막혀 있었다.

“ 그냥 물 속에 있는 게 나을 텐데, 아쉽구나.”

위쪽에서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정인극은 시선을 들었다. 그 순간 얼음 속에서 뭔가가 뚫고 나와 정인극이 목 아래쪽으로 파고들어갔다. 그것은 욱일승의 검이었다.

“ 커억!”

정인극의 입이 쩍 벌어지고, 강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대항할 틈도 없이 정인극의 숨이 끊어졌다.

욱일승은 얼음을 도려내고 정인극의 시체를 꺼냈다. 그러고는 정인극이 얼굴을 보며 환영축골공을 끌어올렸다. 욱일승의 얼굴 근육이 밀가루 반죽처럼 움직이더니 잠시 후 욱일승은 사라지고 철담마도 정인극이 서 있었다.

“ 네 역할은 잘하고 있으마.”

욱일승은 싱긋 웃으며 정인극의 시체를 얼음 위로 놓았다. 시체를 건져 낸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여설이 얼려 놓은 얼음 위로는 수십 구의 시체가 끌려나왔고, 환영축골공을 익힌 자들은 얼굴을 바꿨다.

“ 끝났습니다. 백랑!”

얼음 위쪽으로 끌어올려진 집행사자들의 수를 헤아리던 장사덕은 수여설에게 보고했다.

“ 그럼 지금부터 강바닥으로 가서 돌을 주워 오세요.”

“ 알겠습니다. 백랑.”

장사덕을 비롯한 하오밀문 잠룡들과 남궁세가 잠룡들은 강바닥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굳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강바닥에서 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이리저리 더듬다가 커다란 돌을 주워들고 올라왔다. 그 돌들은 곧 시체로 변해 있는 집행사자들의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갈인효는 물속에 풀어두었던 독기를 빨아들였다. 독공의 최고 경지라는 독성지체에 거의 다가선 그는 독의 발출과 흡수가 자유로웠다.

갈인효가 독기를 흡수하자, 이자승, 욱일승, 수천월은 물 속으로 들어가 수조의 밑판을 제외하고 나머지 벽은 제거했다. 물속 얼음판 위에는 가라앉아 있던 배만 남아 있었다. 세 사람은 곧바로 얼음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거리를 벌린 다음 거대한 얼음판을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배가 가라앉아 있는 얼음판이 위로 올라가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 적랑도 내려가서 도와주세요.”

“ 알았습니다. 형수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배를 질린 듯한 얼굴로 쳐다보던 사마윤 일행과 남궁세가 잠룡들은 아래쪽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 백 대협.”

수여설은 욱일승으로부터 받은 둥근 나무판을 백인에게 내밀었다.

“ 널빤지가 있어야 할 텐데.”

판을 받아든 백인은 배 위로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잘라낸 부분을 원래 자리에 끼워 맞추고 위쪽과 아래쪽에 널빤지를 대못을 박으면 완전하진 않더라도 운행에 지장은 없을 터였다.

문제는 쓸 만한 판자였다.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물을 보며 백인은 선실 아래쪽 노를 젓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직 물이 빠지지 않은 그곳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백인이 찾는 널빤지도 있었다.

백인은 널빤지와 각목을 골라 다시 갑판으로 나왔다. 널빤지를 내려놓고 각목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나무못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부하를 불러 널빤지와 함께 건네주었다.

“ 내가 먼저 막고 나면 아래쪽에서 그걸 대고 나무못을 박아라. 못은 어르신들보고 박아달라고 하면 된다.”

“ 알겠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널빤지와 나무못을 챙겨들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 조장님께서 도와줘야겠습니다.”

백인은 배 위로 올라온 수여설을 보며 말했다.

“ 알았어요, 가요.”

두 사람은 선저로 내려가 구멍이 난 곳으로 갔다.

백인은 구멍 난 곳에 잘라낸 판을 끼워 맞추고 그 위로 널빤지를 댔다.

“ 저 끝에 나무못을 박아주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수여설에게 나무못을 건넸다.

“ 알았어요.”

수여설은 널빤지 가장자리에 나무못을 대고 지그시 밀어넣었다. 마치 두부에 손가락을 꽂아 넣는 것처럼 나무못은 쉽게 들어갔다. 그렇게 가장자리 네 곳에 나무못을 박아 넣자 위쪽은 마무리가 됐다.

푹!

작업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아래쪽에서 나무못이 튀어나왔다. 백인은 두 자루의 도 중 소도를 뽑아 뾰족한 부분을 잘라내고 바닥과 닿아 있는 부분에 둥글게 홈을 파내고는 줄로 둘둘 말아 묶었다. 그렇게 아래쪽에서 튀어나온 나무못을 고정시키고 나자 작업은 끝이 났다.

“ 솜씨가 뛰어나군요.”

“ 배를 다루지 못하면 백 가 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장님.”

“ 백가라면 몽요 언니와는 어떻게 되죠?”

“ 가까운 친척입니다.”

“ 그랬군요. 그만 나가도록 하죠.”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 끝났느냐?”

물속에서 고개를 내민 수천월이 물었다.

“ 끝났어요, 할아버지.”

“ 알았다.”

수천월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배 아래쪽에 있던 얼음을 깨트렸다. 약간의 출렁거림이 있고, 배는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배가 자리를 잡자 물속에 있던 잠룡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갑판으로 올라왔다.

“ 지금부터 배를 청소한다. 선실은 물론이고, 이불이나 요도 깨끗하게 빨아서 삼매진화를 말린다. 날이 밝아오고 있다, 서둘러라.”

사마윤은 잠룡들을 향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 알겠습니다.”

잠룡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낸 겁니까?”

잠룡들을 쳐다보던 사마윤은 수여설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의 얼굴엔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길이만 해도 십 장에 달하는 상당히 큰 배다. 그런 배를 가라앉혔다가 다시 끌어오렬 물에 띄웠다.

배는 물론이고 물속에 던져 넣은 닻조차 그대로인데 사람만 바뀐 것이다. 마치 기적의 한 장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 무공의 응용이죠.”

“ 응용이라고요?”

“ 물론 무기를 만들어 적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걸 보고 배웠어요. 그나저나 음식이 전부 물에 젖어서 어떡하죠?”

“ 말릴 수 있는 건 말리고, 부족한 건 가서 사와야지요. 저 쪽이 텅 비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사마윤은 뒤편을 가리켰다. 동쪽에 있는 배를 탈취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은 훨씬 넓다고 할 수 있다.

“ 일단 부족한 게 있나 둘러봐 주세요.”

“ 알았습니다. 형수님.”

사마윤은 후미로 걸음을 옮겼다. 잠룡들은 앞쪽의 선실은 청소를 마치고 뒤편 선실과 갑판 아래쪽 선실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 언니!”

그때 앞쪽 선실에서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여설은 남궁운화가 있는 선실로 들어갔다.

선실은 벌써 청소가 끝난 듯, 침상의 이불까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 여긴 벌써 끝났네요?”

“ 제가 힘 좀 썼어요.”

“ 쓸 만한 게 있어요?”

“ 차 종류는 물에 젖어서 다 버렸고, 이불하고 요만 간신히 건졌어요.”

남궁운화는 침상을 가리켰다.

“ 그럼 당장 입을 옷도 문제네요.”

수여설은 고개를 숙여 옷을 보았다.

삼매진화로 물기를 말렸다고 하지만 밤새도록 물속에 있었던 터라 물 냄새가 심하게 났다.

“ 그래서 사람을 보냈어요.”

“ 또 물로 보냈단 말이에요?”

“ 제가 보낸 게 아니고 가주가 너무 초라해서 창피하다며 다녀오겠다는 걸 어떡해요.”

남궁운화는 입을 쭉 내밀었다.

“ 우 소협이 갔나보죠?”

“ 다섯 명이 갔어요.”

“ 그곳에 묻어 둔 걸 전부 가져올 참이군요.”

“ 그것 때문에 뗏목 한척을 남겨두라고 한 거 아니었나요?”

남궁운화는 선실 한편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 그렇긴 해도, 좀 쉬었다가 가도 되는데, 그런데 거긴 뭐하는 곳이죠?”

“ 욕실이에요.”

“ 배에 욕실까지 있어요?”

“ 짐과 손님을 함께 싣고 다니는 배였나봐요. 우리 남궁세가도 상단을 운영할 때는 이런 배를 가지고 있었어요.”

“ 그럼 이 선실은 상단주나 가문의 고위급이 승선했을 때 사용하는 곳인가?”

“ 그래요, 언니.”

그녀는 안에서 물통 두 개를 들고 나오며 대답했다.

“ 물통은 뭐라고요?”

“ 온몸에서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요. 옷이 오면 목욕부터 하려고요.”

“ 굳이 통이 필요해요?”

“ 통없이 어떻게 물을 길어요?”

“ 무공은 사람 없애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라고 연 공자가 그랬잖아요.”

수여설은 선실을 나가며 말했다.

“ 창문 열어요. 남궁가주.”

“ 허공섭물로 물을 끌어당기려고요?”

남궁운화는 욕실과 연결된 창문을 열며 물었다.

“ 물론이죠.”

빙그레 웃어 보인 수여설은 강물을 보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츄악!

곧이어 그녀의 시선이 향하던 곳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더니 열린 창문을 통해 물통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 와우! 이런 방법도 있었네요.”

남궁운화는 헤벌쭉 웃으며 급속하게 차오르는 물통을 보았다. 한동안 물을 쳐다보던 그녀는 물통이 채워지자 내기를 끌어올려 허공섭물을 펼쳤다. 물통의 물이 솟구쳐 오르더니 이번엔 나무 욕조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 아직 멀었어요?”

“ 다 됐어요. 언니.”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안쪽으로 들어오던 물줄기가 끓어졌다.

똑똑똑!

“ 들어오세요.”

“ 짐 가져왔습니다.”

우창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수여설은 문을 열었다.

“ 빨리 다녀왔네요.”

“ 날이 밝으면 가지 못할 것 같아서 서둘렀습니다.”

우창준은 커다란 보자가 하나를 선실 안으로 들여놓으며 말했다.

“ 수고했어요. 우 조장!”

밖으로 나온 남궁운화는 짐을 옮기며 활짝 웃었다.

“ 청소를 빨리 끝낸 조는 전부 지금부터 씻어라! 냄새가 심하게 나니까 깨끗이 씻어야 한다.”

“ 저도 씻어야겠습니다. 가주님.”

사마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창준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씻어요, 언니.”

우창준이 나가자 남궁운화는 보자기를 풀어 옷을 펼쳤다. 남궁운화가 꺼낸 옷 또한 며칠 동안 땅속에 묻어 둔 것들이라 눅눅했다. 남궁운화 곁으로 다가간 수여설은 옷을 잡고 슬쩍 내기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따스한 기운이 옷 전체로 퍼져나가며 뽀송뽀송해졌다.

수여설이 삼매진화로 옷의 눅눅함을 제거하는 사이 남궁운화는 조두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 물 데워놓을 게요. 언니.”

욕실로 들어간 남궁운화는 욕조의 물을 데운 다음 옷을 활활 벗어부치고는 빨래를 시작했다.

“ 풋!”

뒤따라 들어간 수여설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달더잉 같은 엉덩이를 흔들며 빨래에 몰두하고 있는 남궁운화를 보고 있자니 그녀가 정말 남궁세가의 가주가 맞나 싶었다.

“ 왜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돌려 수여설을 보았다.

“ 가주가 빨래를 하는 걸 보면 남궁세가 가솔들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해서.”

“ 코딱지만한 가문의 가주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요. 더구나 제가 입은 옷인데요. 언니도 얼른 빨래나 해요. 구정물이 장난 아니게 나와요.”

남궁운화는 웃으며 다시 옷을 비볐다.   갔을까. 이번엔 이 장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 “ 그렇긴 하네.”

수여설은 옷을 벗고 남궁운화 옆으로 앉았다.

“ 어떻게 하면 피부가 그렇게 하애질 수 있어요?”

남궁운화는 빨래를 하다 말고 부러운 듯 수여설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우유처럼 투명한 피부와 적당한 넓이의 어깨, 가슴골이 깊게 패일 정도로 풍만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슴, 매끈한 아랫배와 잘록한 허리 그리고 육감적인 엉덩이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기다란 다리까지. 그녀는 완벽이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 조물주가 빚은 몸매 같아요.”

“ 난 남궁 가주의 몸이 더 부러운데?”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기 마련인 듯 수여설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 새카맣기만 한 몸이 뭐가 부러워요? 더구나 키는 요만하면서 가슴과 엉덩이만 비정상적으로 크고.”

남궁운화는 자신의 가슴과 엉덩이를 번갈아 가리키며 불만스러운 듯 투덜댔다.

“ 건강해 보이고 좋은데 뭘 그래요. 그런데 가슴 큰 게 싫어요?”

“ 제 체구를 보세요. 언니. 이 몸에 이런 가슴이 어울리기나 해요. 동경을 볼 때마다 제가 암소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요.”

“ 호호호! 별걸 다 걱정하네요. 보통은 가슴이 크면 처지기 마련인데 가주는 공처럼 탄탄하잖아요. 그런 가슴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복이라고요. 전혀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닌 게 아니라 옷을 입고 잇으면 남궁운화는 한없이 나약하게 보인다. 하지만 벗겨 놓으면 건강미 물씬 풍기는 몸으로 돌변한다. 그녀의 말처럼 가슴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크지만, 그렇다고 아래로 처지거나 모양이 이상하지도 않다.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당당하게 솟아 있고 톡 건드리면 터져 버릴 것처럼 탄력이 넘친다.

가슴뿐만 아니라 그녀는 온 몸이 그렇다.

둥글게 말아 던지면 통통 튈 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몸매였다.

“ 더구나 유연하기까지 하잖아요.”

남궁운화가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이었다.

그녀의 몸은 마치 연체동물처럼 자유롭게 움직인다. 두 다리를 일 자로 벌리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심지어 등 뒤로 꺽어 올려 발가락 끝으로 코를 긁기도 한다.

꾸준한 집중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유연성은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다른 이들은 철판교 수법을 동원해야 상대의 검을 피할 수 있지만 그녀는 허리를 젖히는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그 두가지가 이제 스무 살에 불과한 그녀를 이기어검술까지 펼치는 최고의 무인으로 만든 원동력인 것이다.

“ 이게 뭐가 좋은 거라고 그래요.”

남궁운화는 그 자리에 철버덕 앉더니 다리를 좌우로 벌렸다. 그녀의 다리는 일 자를 넘어, 삿갓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형태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쫙 펴고 있던 다리가 구부러지는 듯하더니 목 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궁운화는 그 상태로 허리를 숙여 빨래를 한다.

“ 아무튼 유연하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거예요. 그나저나 구정물 정말 많이 나오네요.”

“ 날마다 땅속에서 자고, 물속을 제집처럼 들락거렸으니 오죽하겠어요.”

두 사람은 열심히 손을 놀렸다.

하지만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물을 짜고 다시 조두를 묻혀 빨자 비로소 제 색깔이 나왔다. 빨래를 마친 둘은 물기를 짜 탈탈 털어서 한편에 널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은 비좁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워낙 몸에서 냄새가 심해 누가 먼저 목욕을 하고 나오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비좁은 욕조에서 머리를 감고 등을 밀어주면서 둘은 목욕을 마쳤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 후미로 가자 사마윤이 다가오며 말했다.

“ 다 씻었어요?”

“ 네, 형수님.”

세 사람은 곧바로 갑판 아래쪽 선실로 내려갔다

원래 짐을 적재하던 창고에 탁자 등을 놓고 선실로 개조한 듯, 곡식 냄새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두 사람은 코를 킁킁거리며 가운데 탁자로 다가갔다.

“ 신수가 훤해졌구나. 어서 오너라.”

탁자 주변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이자승이 웃으며 맞았다. 수여설과 남궁운화는 빈 찾산이 놓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궁운화와 수여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이자승은 빈 찻잔에 물을 채우고 찻잎을 넣었다. 군산은침의 향긋한 다향이 퍼져나가자 남궁운화는 허겁지검 찻잔을 들었다.

“ 죽인다!”

남궁운화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허허허! 녀석!”

이자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들 사이에서 오래 있어 그런지 하는 행동이 사내들처럼 변해 가는 듯했다.

그는 남궁운화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제 열아홉 살에 불과한 소녀.

이성에 대한 환상의 나래를 펴며 살아야 할 소녀가 죽음을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껏 남궁운화의 손에 죽어간 자들은 또 엄라나 많은가. 다른 가문의 자식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그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그녀를 보면 대견함보다는 측은함이 앞선다.

“ 열심히 죽이고, 아니 열심히 일하고 마시는 한 잔의 차가 이거잖아요.”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맞다. 녀석아. 열심히 일하고 마시는 한 잔의 차가 최고다. 한잔 더 하거라.”

이자승은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 고마워요, 할아버지.”

남궁운화는 혀를 쑥 내밀고는 찻잔을 내밀었다.

“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이자승은 차를 따르며 수여설에게 물었다.

“ 우리가 증발했으니까 우담보는 당황할 거예요. 밀정과 감찰사자를 총동원해 우리를 찾을 겁니다. 하지만 우린 북으로도 가지 않았고, 빠져나가지도 않았으니까 결코 찾아낼 수 없죠. 더구나 뗏목은 앞으로도 계속 떠내려 갈 테고요.”

“ 뗏목을 계속 만들어 떠내려 보낸단 말이냐?”

“ 그래요, 할아버지. 우린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될 거예요.”

“ 그럼 당분간은 편히 쉬면 되겠구나.”

“ 네.”

“ 율령궁에서 연락을 해올 경우에 어떻게 대처할 건지 생각해둬야 한다.”

“ 참! 얼굴을 바꾼 사람은 몇 명이죠?”

수여설은 철담마도 정인극의 얼굴을 하고 있는 욱일승을 보며 물었다.

“ 나까지 합치면 열 명이다. 하지만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철담마도 정인극과 그의 심복인 혼검 강호인밖에 없다.”

“ 강호인으로 변장하고 있는 사람은 잡랑인가요?”

수여설의 시선이 강호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 그렇습니다. 조장님.”

“ 강호인의 검은 챙겼어요?”

“ 저도 챙기고 욱 어르신도 챙겼습니다.”

강호인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툭 쳤다.

“ 율령궁과의 접촉은 잡랑이 맡고, 욱 할아버지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겠네요.”

“ 오래 가진 못한다.”

욱일승이 말했다.

“ 우리가 이곳에서 집행사자들을 공격한 이유는 율령궁의 모든 전력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였어요. 할아버지.”

“ 율령궁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였다고?”

이자승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 하오밀문과 율령궁의 싸움은 첩지전이에요. 첩지전에서는 뭉쳐 있는 쪽이 불리하고요.”

“ 하지만 우린 인원이 한정돼 있다.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면 피해는 우리가 더 많이 받게 된다.”

“ 적을 공격하는 건 우리만이 아니잖아요. 밀천 무인이 들어왔다는 소식이 왔고, 잠룡대도 이곳으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인사대 또한 악양으로 들어오게 될 테고요. 사면초가의 입장에 처한 자들은 우리가 아니고 율령궁이 되겠지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엔 포위망 안에 있었지만 지금은 최 외곽에 위치해 있고, 악양 남쪽으로 우회하면 동정호도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첩지를 받아보는 시간이 전보다 더 걸리긴 하겠지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만은 틀림없다.

“ 이제 놈들은 투명인간들과 싸워야 할 거예요.”

수여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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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어먹을!”

동방사자영의 영반 쇄안 요장남은 벽면에 걸린 지도를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놈들이 노구포 주변에 있는 건 분명하다. 하루에 두 번씩 흘러내려오는 뗏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게다가 갈대 숲 주변에는 머물렀던 흔적도 남아 있다. 그런데 땅으로 꺼진 듯 하늘로 솟은 듯 놈들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그쪽은 어떻소?”

요장남은 시선을 돌려 앞에 앉은 자를 보며 물었다.

살이 상당히 찐 사내는 북방사자영을 맡고 있는 광안 양정일이었다. 장강 북쪽에 있던 그가 강을 건너 남쪽으로 온 이유는 궁주인 우담보가 악양으로 들어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상황을 서면보고가 아닌 직접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이었다.

“ 증발했소.”

양정일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당한 것도 아니고 증발이란 말이오?”

혼자만 곤란한 지경에 처한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 듯 요장남의 얼굴이 살작 펴졌다.

“ 십자 조 조장인 독안마도 작나인과 십칠 조 조장인 혈옥 장군성의 무공이 어느 정도라고 보시오?”

“ 최소한 우리보다 강하겠지요.”

“ 그들을 포함해 집행사자는 이백 명이었소. 그런데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잇지 않았소.”

양정일은 양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행동을 해 보였다.

“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건 무슨 소리요?”

“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무인끼리 전투 아니오. 그럼 손톱만한 흔적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단 말이오?”

“ 그렇소. 요 영반. 그곳엔 발자국은 고사하고 핏방울조차도 없었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설사 무공을 전혀 모르는 양민이라고 해도 이백 명을 없애게 되면 싸움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만일 비가 왔더라면 비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최근엔 비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증발이었다.

“ 어떻게 할 참이오?”

“ 난 전달할 뿐이오. 그들의 증발엔 아무런 책임이 없소이다.”

“ 그대로 보고하겠단 말이오?”

“ 그렇게 해야지 별 수 있겠소?”

“ 불호령이 떨어지겠군요.”

요장남은 다시 지도로 시선을 주었다.

그가 그토록 노구포 주변을 훑었던 것은 보고 때문이었다. 궁주는 틀림없이 잠룡 십 조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테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 접니다. 영반.”

바로 그때 밖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인가?”

요장남은 문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적색 전서가 무차별하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 적색 전서라고?”

요장남은 벌떡 일어났다.

적색 전서는 적에 대한 소식이 아니라 아군의 사망 소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었다. 처소를 나선 요장남과 양정일은 황급히 전서를 분석하는 곳으로 향했다.

“ 어느 정돈가?”

들어가자마자 요장남은 물었다.

“ 동방사자영 밀정이 삼백 명, 감찰사자가 이백 명, 남방사자영 소속 밀정이 백 명입니다.”

“ 총 육백 명이란 말인가?”

“ 지금까지 올라온 걸로 종합하면 그렇습니다.”

“ 하면 적은?”

“ 그건......”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 제길!”

요장남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냈다.

다음부터는 없애는 적의 수까지 함께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싶다. 아군의 사망 숫자만 파악하고 있으니 매일 매일 패배 소식만 접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일단 아군을 공격한 자들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집중하라고 하게.”

“ 알겠습니다. 영반.”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 갑시다. 양 영반.”

요장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 난감하네.”

그는 잔뜩 흐려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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