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좋은 술 안주
쏴아!
장대비가 거칠게 지면을 후려쳤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지면에는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 구멍은 다른 빗방울에 금세 메워졌다.
비 때문인 듯 사내들은 방갓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짚으로 만든 도롱이 끝으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빗속에 서 있는 자들은 약 백여 명 가량이었다. 차가운 시선이 방갓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높은 담이 있고, 담 너머에는 수십 채의 건물이 지붕만 내놓고 있었다.
“ 두 번째다!”
선두에 서 있던 사내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척살단을 이끌고 잠룡들의 가문을 돌고 있는 무정마검 백리자성이었다.
백리자성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그 지도에는 만금종리가 내부의 각 건물과 길이 그려져 있었다.
“ 일 조는 북쪽, 이 조는 남쪽, 삼 조는 서쪽, 사 조는 나를 따른다. 모이는 장소는 중앙의 만금전이다.”
“ 존명!”
“ 존명!”
“ 존명!”
나직한 외침과 함께 척살단 대원들은 만금종리가를 향해 내달렸다. 대문 앞까지 간 그들은 담을 따라 좌우로 흩어졌다. 잠시 동안 척살단 대원들을 지켜보던 백리자성은 대원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비로소 걸음을 옮겼다.
만금종리가 대문 앞에 멈춰 선 그는 위쪽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대문 위쪽에는 만금종리가라고 음각된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금박을 입힌 글은 별빛조차 없은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빛났다.
휙!
뒤편에 있던 대원 한 명이 몸을 날려 현판을 뜯어 바닥으로 내려섰다.
“ 열어라!”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지고 다른 대원 한 명이 튀어나와 대문을 걷어찼다.
콰앙!
두 짝의 문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백리자성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천의 유지답게 집안은 상당히 넓었다. 대문에서 본관 건물이 있는 곳까지 거의 오십 여 장에 달했다. 부를 자랑이라도 하듯 대문에서 본관까지 이어진 길은 폭이 일 장에 달했는데 돌이 깔려 있었다.
길 좌우측에는 정자와 인공 연못 그리고 인공으로 만들어진 작은 동산들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바위와 아름드리나무로 조경이 돼 있었다.
“ 조용하군.”
백리자성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물렸다.
각 건물의 처마 밑에 걸려 있는 등들은 비가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밝히고 있다. 등 또한 방수처리가 돼 있다는 의미였다.
“ 시작하라!”
그는 뒤따르는 자들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스릉! 스릉! 스릉!
척살단 대원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러고는 좌우측으로 흩어지며 몸을 날렸다. 그들을 지켜보던 백리자성은 느릿느릿 본관 건물을 향해 걸었다.
“ 너무 조용해. 인기척도 없고.”
백리자성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만금종리가의 거주 인원은 사백오십이 명이고 개는 다섯 마리를 기른다고 하였다. 그런 집안에서 외부를 지키는 자가 없다는 것도 이상할 뿐 아니라 대문까지 부서지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아무도 나와 보지 않는다.
백리자성은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하지만 만금종리가에서는 인기척이 감지되지 앟았다.
본관 건물 앞에 있는 구름다리를 건널 때도 마찬가지였다. 개 짖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하지만 사백 명이란 인원이 이사를 간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더구나 불까지 켜놓은 상태에서.”
백리자성은 피식 웃으며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열자 널따란 대전이 그를 맞았다.
휙! 휙휙! 휙휙!
곧이어 각 방향으로 흩어졌던 척살단 대원들이 다가왔다.
“ 개미새기 한 마리 없습니다. 단장님.”
“ 없습니다.”
“ 없습니다.”
세 명은 동시에 소리쳤다.
“ 집안에는 들어가 봤느냐?”
“ 급하게 떠난 듯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방갓 사내가 대답했다.
“ 급하게 떠났단 말이지.”
백리자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전 안은 비교적 깨끗하여 떠난 흔적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 주방에 음식이 남아 있습니다. 단장님.”
건물을 수색하던 척살단 단원 한 명이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 안내하라.”
백리자성은 척살단 대원을 향해 걸어갔다.
주방은 대전 오른편으로 나 있는 쪽문과 통하도록 돼 있었다. 간이 주방인 듯 석탄으로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작은 조리대, 차 종류가 즐비하게 놓여 있는 선반이 다였다. 백리자성의 시선이 솥이 걸린 아궁이로 향했다.
솥바닥에는 야채와 고기가 뒤섞인 볶음 요리가 남아 있었다.
“ 요리는 물론이고 아궁이에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습니다.”
주방을 살피던 대원이 백리자성을 향해 보고했다.
“ 그렇군.”
백리자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금종리가 밖에서 보았던 지도를 다시 꺼냈다. 한동안 지도를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만금종리가 북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야산이었다.
백리자성은 지도를 아궁이로 던졌다. 그러자 확, 불길이 올랐다.
“ 따라와라!”
백리자성은 건물을 나서 북쪽으로 향했다.
지금 가고 있는 길도 바닥엔 돌이 깔려 있었다. 설사 비가 온다고 해도 만금종리가에서는 신발에 흙을 묻힐 일은 없을 듯했다.
“ 그래서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발자국이 남지 않은 거겠지.”
백리자성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집안에는 급하게 떠난 흔적이 남아 있는데 밖에는 발자국조차 없다. 물론 집안에서는 돌이 깔려 있는 길을 따라 움직이면 발자국이 남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문 밖에는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들어올 때 확인했지만 대문 주변에는 발자국이 없었다.
“ 대문 밖에 발자국이 없다는 것은 이곳을 나간 적이 없다는 뜻이지.”
밖은 여전히 비가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친 척살단 대원들은 높이가 오 장 가량 되는 야산 앞에 당도했다. 야산이라고 하기보다는 바위산이라고 해야 옳을 듯 했다. 움푹 들어간 부분에 나무 몇 그루가 솟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야산 아래쪽에 동굴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백리자성은 천리지청술을 끌어올려 동굴 안쪽을 살폈다. 이곳 역시 조금 전 건물들처럼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 주변을 살펴라!”
“ 존명!”
백리자성의 명령이 떨어지자 척살단 대원들은 야산 위쪽과 주변으로 흩어졌다. 부하들이 야산을 살피고 있는 동안에도 백리자성은 천리지청술로 동굴 안쪽을 살폈다.
“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이곳 밖에는 없습니다.”
“ 진입하라!”
부하들이 돌아오자 그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굴 안쪽은 불이 없으면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캄캄했다. 대원들을 따라 들어온 백리자성은 동굴 벾을 살폈다.
곧이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벽에 횃불이 걸려 있었던 거였다.
“ 벽에 횃불이 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굴 벽을 더듬어 간 대원이 삼매진화를 불을 붙였다. 그러자 비로소 동굴 안쪽의 모습이 드러났다. 동굴의 폭은 이 장 가량이고, 오 장 가량 이어지다가 왼편으로 꺾여 있었다.
일행은 벽의 횃불을 켜면서 전진했다.
꺾인 부분을 지나자 시야가 확 열리면서 십여 장 폭의 광장이 나타났다. 먼저 들어왔던 척살단 대원들은 백리자성을 보았다.
딸깍!
“ 쉿! 죽고 싶어!”
천리지청술을 풀지 않고 있던 백리자성의 귓전으로 작은 소리가 잡혔다. 백리자성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 횃불을 전부 가져와라.”
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을 뽑아왔다. 여섯 개의 횃불이 주변을 밝히자 광장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 상태에서 백리자성은 광장을 살폈다.
먼저 살핀 곳은 바닥이었다.
바닥에는 마치 바둑판처럼 줄이 그어져 있었다. 한참을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바닥을 훑은 그는 이번엔 벽면을 살펴보았다.
“ 찾았다.”
안쪽으로 걸어갔던 백리자성의 입에서 희열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멈춰 선 곳으니 벽은 벽돌을 아무렇게나 박아 놓은 것처럼 직사각형의 단면을 가진 돌들이 들쭉날쭉 박혀 있었다.
백리자성은 그것들 중 하나로 손을 가져갔다.
다른 돌들에 비해 유달리 반질거리는 돌이었다. 아마도 그 반질거림이 횃불의 불빛에 반사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백리자성은 천천히 돌을 돌려보았다. 내공을 가하지 않고 본연의 힘으로만 돌렸다. 하지만 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안쪽으로 밀어보았다.
약간 멈칫한 느낌이 들더니 쑥 들어갔다.
“ 쿡!”
백리자성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그르릉!
그가 물러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광장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광장 중앙의 한쪽은 위로 올라오고 한쪽은 아래로 쑥 꺼졌다. 천천히 올라오던 바위는 바닥과 수직이 되더니 멈췄다.
“ 대단한 기관이군.”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수직으로 서 있는 바닥의 두께는 거의 세 자에 달했다. 저 정도 무게의 바위를 끌어내리려면 고도의 기관장치가 있어야 할 듯했다.
“ 하지만 이젠 소용없게 됐지.”
“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습니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대원 한 명이 나직이 소리쳤다.
“ 다섯 명은 이곳에 남고 나머진 내려가라.”
“ 알겠습니다. 단장님,”
척살단 대원들은 일제히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은 상당히 깊어 십여 장에 달했다.
부하들이 내려가자 백리자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일 안으로 들어갔을 때 누군가 이곳을 무너뜨린다면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사람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니까.’
‘ 쉿! 죽고 싶어?’ 그 소리는 분명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 이곳으로 들어오는 놈들은 무조건 척살하라!”
백리자성은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고는 아래 쪽으로 몸을 날렸다. 계단 아래쪽은 처음 들어왔던 곳처럼 폭이 이 장 가량 되는 동굴 길로 돼 있었다.
“ 주변을 살피며 전진하라!”
백리자성은 조금 전 내려왔던 문으로 시선을 주며 명령을 내렸다.
푸스스!
두어 걸음도 전진하기도 전에 들고 있던 횃불이 일제히 꺼졌다.
“ 무슨 일이냐?”
백리자성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 기름이 다한 모양입니다. 단장님.”
“ 기름이 다했다고?”
“ 그렇습니다.”
횃불이 꺼지자 주변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척살단 대원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좌우를 살피며 나아갔다.
그르릉!
“ 억!”
“ 엇!”
“ 헉!”
나아가던 척살단 대원들이 신음과 함께 우뚝 멈췄다. 벽을 타고 들려오는 울림은 조금 전 열었던 출구가 닫히는 소리였다.
“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뒤편에 있던 대원 한 명이 계단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하지만 척살단 대원이 다가서는 시간보다 한 발 빨리 출구는 봉쇄됐다.
“ 누구냐?”
척살단 대원은 버럭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벽과 천장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출구 위체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기관 장치를 다시 원 상태로 만들어 입구를 닫은 사람은 허일삼이었다. 허일삼 앞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 옆에는 두작군이 웃고 있었다.
“ 함정?”
아래쪽에 있던 척살단 대원은 급하게 앞쪽으로 몸을 날렸다. 일행은 진행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 함정인 것 같습니다. 단장님.”
대원은 백리자성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우린 대야벌 율령궁 척살단이다. 자중하라!”
백리자성은 엄하게 소리쳤다.
내공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가 공간을 강타했다.
그의 목소리는 한동안 지하 광장 안을 맴돌다가 천천히 스러졌다.
“ 조용히 해라, 자식아. 밥 먹는데 체하겠다.”
백리자성의 목소리가 스러지는 순간 약간은 비아냥대는 듯한 목소리가 광장 벽을 타고 들려왔다.
“ 억!”
“ 헉!”
“ 가자!”
척살단 대원들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십여 장 전진하여 오른편으로 꺾인 모퉁이를 돌자 위쪽과 마찬가지로 확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의 폭은 십여 장 가량으로 상당히 넓었다.
척살단 대원들의 시선이 광장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요리가 담긴 커다란 접시와 술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주변으로는 세 명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왼팔이 없는 불구고, 그 옆에 앉은 자는 검은 방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세 사람은 연우강, 염자생, 종리웅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는 것은 요리 접시 옆에 놓인 야명주였다.
“ 웬 놈들이냐?”
세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백리자성은 차갑게 소리쳤다.
“ 귀노!”
연우강은 염자생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 이래도 되는 거야?”
“ 뭐가 말입니까?”
“ 도둑놈 새끼가 집주인에게 누구냐고 묻는 게 말이 되냐고?”
“ 예의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 금랑 넌?”
이번엔 종리웅을 보며 물었다.
“ 원래 대야벌 놈들은 위아래도 모르는 쌍놈들인데 그들 중 가장 질 나쁜 놈들이 척살단이라고 들었습니다.”
“ 내가 알기로는 잔살단 놈들이 더 질이 나쁘다고 하던데?” 찾으러 왔다아!”
“ 그놈들은 병신들이니까 이해해줄 수도 있지만 저놈들은 정상 아닙니까.”
“ 너는 정상이라고 생각해?”
“ 제가 어때서요?”
“ 삼 년이 다 돼 가는데 너는 살을 한 근도 빼지 못했잖아.”
“ 살이 빠진 종리웅은 종리웅이 아닙니다. 광랑. 이 종리웅 무게는 반드시 이백 근이 나가야 합니다.”
‘ 종리웅?’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리자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 보니 세 놈 중 뚱뚱한 놈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아니 뚱뚱한 체구 때문에 이름을 듣자 바로 기억이 났다. 만금종리가 장자이면서 잠룡 십 조 조원이었던 놈, 환비도 종리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검은 옷을 걸친 자는.....
“ 큭큭큭!”
백리자성은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단 세 명. 그것도 두 명은 잠룡이고 한 명은 왼팔이 없는 외팔이다. 그런 자들을 두고 긴장했던 것이다.
“ 저 자식이 웃어, 금랑.”
“ 저 같아도 저놈 입장이라면 웃었을 겁니다.”
“ 왜?”
“ 생각해 보십시오. 염 대협은 왼팔이 없죠. 광랑은 야장의 똥지게죠. 저는 잠룡들 중 가장 뚱뚱한 놈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무게 잡고 앉아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 그럼 설까?”
“ 아무래도 그런 게 낫겠습니다. 광랑.”
“ 그렇게 하지 뭐.”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으로 가서 섰다.
그가 일어나자 염자생이 일어나 오른편으로 섰고, 종리웅은 왼편으로 자리했다.
“ 너희들 셋이서 우릴 막아보겠단 말이냐?”
백리자성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 너희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려고 내가 한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백리자성.”
연우강이 말을 받았다.
“ 무슨 고생을 했단 말이냐?”
“ 처마 밑을 기어 올라가서 힘들게 불을 켰지.”
“ 처마 밑을 기어 올라간 사람은 저고 불도 제가 켰습니다. 광랑.”
종리웅이 장단을 맞추듯 끼어들었다.
“ 막 나간 것처럼 살림살이를 흩트려 놓아야 했지.”
“ 살림은 집주인이 아는 것 아니냐며 제게 시켜서 그것도 제가 했습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폈지.”
“ 조장이 어떻게 불을 지피느냐며 그런 건 부하가 해야 하는 거라고 하면서 제게 시켰습니다. 광랑.”
“ 소고기 볶음도 해야 했고.”
“ 광랑이 하면 광랑 어머니께서 해준 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그것도 제게 시켰습니다.”
“ 횃불도 준비하고.”
“ 기름의 양을 적당하게 조절해야 한다며 수백 번도 더 불을 피우게 한 사람도 광랑입니다. 그을음은 제 콧구멍에서 살림을 차렸고요.”
“ 내가 한 게 아냐?”
“ 광랑은 전부 입으로만 했습니다.”
“ 그래서 출세를 하라고 하는 거야. 금랑. 출세를 하면 일은 입으로 하면 되거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백리자성을 보았다.
“ 그러니까 우리를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꾸몄단 말이냐?”
“ 마지막엔 네 녀석이 들어오지 않을까 봐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면서 죽고 싶냐는 말도 했는데, 나쁘지 않았지?”
“내가 당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주 절묘한 방법이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른 누구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는 절묘한 방법이었다.
집안에는 얼마 전에 나간 흔적이 역력하고, 밖에는 발자국이 전혀 없으며, 밖으로 도망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곳에 적이 매복하고 있었더라면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됐을 것이다.
“ 우담보 입에 똥물을 던져 넣은 머린데 어련하겠어?”
“ 그것도 일부러 한 일이란 말이냐?”
우담보가 똥물을 먹고 기절한 사건은 율령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율령궁 무인들은 독한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전부 놈이 꾸민 일이라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 똥물을 먹이는 건 아주 쉬워. 적당히 흥분시켜 놓으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그 상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든.”
“ 그렇게 머리가 좋은 놈이 오늘은 실수한 것 같구나.”
“ 내가 무슨 실수를 했다는 거지?”
“ 너희 셋밖에 없다는 게 실수란 말이다. 연우강. 더불어 문을 닫아버리는 건 아주 치명적인 실수라고 할 수 있다.”
“ 난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문을 닫은 건데?”
“ 도망?”
“ 응! 너희들이 도망치면 우담보에게 일러바치러 갈 거잖아. 그럼 복잡해지거든.”
“ 프! 하하하!”
“ 웃을 일이 아냐, 인마. 너 같으면 뒈질 게 뻔한데 이런 일을 꾸미겠어?”
뚝!
연우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리자성이 웃음을 그쳤다. 틀리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사방이 꽉 막히고, 도망칠 곳도 없다. 게다가 이 안에 있는 자들은 세 명이 전부다.
그르릉!
바로 그때 또다시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백리자성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뒈질 게 뻔한데 이런 일을 꾸몄겠냐는 연우강의 말에 이어 들려온 석문이 열리는 소리. 그건 녀석이 이번 일을 위해 준비한 무인들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 후미를 막겠습니다.”
척살대 대원들이 뒤편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백리자성은 긴장한 얼굴로 부하들이 간 곳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싸우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아무도 없습니다. 단장님.”
부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전엔 이곳 사천엔 산적들이 많았어. 그래서 돈깨나 있는 가문은 집안에 비밀 장소를 만들어두곤 하지. 위엔 창고로 사용하고 그 아래쪽에 이런 장소를 만들어 두면 도둑들은 창고 안에 있는 물건에 눈이 뒤집혀서 그 아래쪽에 비밀 공간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지.”
“ 다른 통로가 있단 말이냐?”
“ 원래 약한 토끼는 도망칠 굴을 여러 개 파놓고 살잖아.”
“ 그럼 우리가 들어온 곳 말고도 통로가 있다는 말이구나.”
백리자성은 빙그레 웃었다. 적이 세 명밖에 없고, 방수로 보이는 자들이 들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끌었던 이유는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답을 방금 들은 것이다.
그르릉!
백리자성의 말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연우강 일행이 서 있는 뒤편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석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석문 밖으로 산발한 머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내의 품에는 오른팔과 왼 다리가 잘려나간 중년인이 안겨 있었다.
산발한 사내는 광동차가의 차남승이었다.
“ 기다렸다.”
차남승 앞으로 다가간 연우강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 고맙습니다. 광랑.”
“ 그거 알아?”
“ 뭘 말입니까?”
“ 복수란 원수와 함께 죽는 게 아니라는 말 말이야.”
“ 제가 저놈들을 없애는 데 목숨을 걸어버릴까 봐 그러십니까?” 차남승은 척살단을 가리켰다.
“ 넌 지금 잔뜩 흥분해 있잖아.”
“ 흥분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잔가지 몇 개 쳐내는 데 목숨을 걸 바보는 아닙니다. 광랑. 그리고 그럴 거면 아버지를 모시고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 그럼 다행이고, 다오.”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 아버지, 잠깐 쉬고 계십시오.”
차남승은 안고 있던 차기울을 연우강에게 건넸다.
“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버님.”
연우강은 차기울을 안고 자리고 가며 말했다.
“ 자네가 연우강인가?”
차기울은 연우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그렇습니다. 식사를 준비해 두었는데 드시겠습니까?”
먼저 차기울을 내려놓은 연우강은 그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우리가 올 줄 알았단 말인가?”
“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을 테니까 배가 많이 고프실 겁니다. 아직 왼손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테니 제가 먹여드리겠습니다. 먼저 술 한잔 하시지요.”
연우강은 술잔에 술을 따랐다.
“ 난 며칠 전 모든 걸 잃었네.”
“ 그럼 입맛을 돌게 할 뭔가가 필요하겠군요.”
연우강은 가볍게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스악!
그러자 그가 쓰고 있던 사망철립이 가공할 속도로 날아갔다. 사망철립의 목표는 백리자성이었다.
느닷없는 기습에 백리자성은 질겁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뒤편에 있던 자가 날아오는 사망철립을 향해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기습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그들의 모습은 역시 대야벌 무인이라는 칭찬이 나올 정도로 깔끔했다. 하지만 사내가 잘라내려고 하는 물체는 단순한 방갓이 아닌 사망철림.
사내의 검이 사망철립을 잘라내려는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빙글빙글 돌며 날아간 사망철립이 두 개로 분리된 것이었다. 사내의 검은 빈 공간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더 놀랄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둘로 나뉘어진 사망철립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더니 사내의 목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 헉!”
사내는 질겁한 얼굴로 사망철립을 보았다.
급하면 손이 올라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
스악!
“ 크아악!”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먼저 들어올린 왼손이 잘리고, 그 다음엔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머리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사망철립은 사내의 머리를 태운 채 계속 비행을 하고 있었다. 허공으로 솟아 오른 사망철립은 커다랗게 원을 그리고 비행하더니 다시 연우강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고는 탁자 위로 내려앉았다.
사망철립 위쪽의 머리는 깜짝 놀란 듯 아직 눈을 치뜨고 있었다.
“ 귀노!”
연우강은 사망철립 위쪽의 머리를 쳐다보며 염자생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장주님.”
“ 백리자성만 맡아.”
“ 알겠습니다. 장주님! 하지만 장담은 못합니다.”
염자생은 광인을 뽑아들며 척살단을 향해 걸어갔다.
“ 금랑, 표랑.”
“ 말씀하십시오. 광랑.”
“ 두 번째 안주는 너희들이 장만해.”
“ 알겠습니다. 광랑!”
종리웅과 차남승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척살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몽요!]
연우강은 허공에 숨어 있는 몽요를 불렀다.
[ 말하세요.]
[ 아주 위급한 경우에면 저 녀석들을 도와주세요.]
연우강은 종리웅과 차남승을 가리켰다.
[ 알았어요. 우강.]
몽요는 은밀하게 종리웅과 차남승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갔다.
“ 통로는 확보됐다. 죽여라!”
백리자성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염자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먼저 염자생을 없애고, 대장인 연우강을 없앨 참이었다. 순식간에 염자생 앞으로 온 그는 들어 올린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새하얀 달빛 광채가 염자생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갔다. 그것은 단천섬류검법의 일 초인 단월섬이었다.
“ 킬!”
염자생은 픽 웃으며 광인을 휘둘렀다.
슈킹!
“ 억!”
백리자성은 헛바람을 삼키며 뒤편으로 물렀다.
단순하게 부딪쳤을 뿐인데, 자신의 검 끝이 잘려나간 것이다. 검이 잘려나간 이유는 두 가지다. 상대가 신검 신도라고 불리는 무기를 가졌거나, 내공이 배 이상 높은 경우다. 문득 앞에 있는 자가 보통 무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함께 공격한다!”
백리자성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가 부하들에게 소리친 이유는 결코 염자생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서가 아니었다. 자꾸만 엄습해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전부 당할지도 모른다는 미지의 불안감.
“ 크악!”
“ 아악!”
“ 으아악!”
하지만 대답 대신 부하들의 비명만 들려왔다.
“ 빌어먹을, 차앗!”
그는 욕설을 뱉어내며 염자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에 펼친 무공은 이 초인 단양섬이었다. 초식을 펼치는 순간 태양처럼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상대는 그 광채 속에서 죽어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들어 올린 그의 검에서 새하얀 광채가 쏟아져 나와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 타앗!”
염자생의 입에서도 광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들어 올린 광인이 허공을 가르고 검붉은 고리가 쏟아져 나갔다. 새하얀 광채와 검은 고리가 염자생과 백리자성 사이에서 부딪쳤다.
콰콰쾅! 쾅쾅!
폭음 속에서 튀어나온 광채와 검붉은 고리가 천장과 바닥으로 박혀들고,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지하 광장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쿵쿵쿵! 쿵쿵!
“ 으음!”
“ 음!”
동시에 물러난 두 사람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염자생과 백리자성의 실력은 백중지세라 불릴 정도로 차이가 거의 없었다.
“ 놀랍군.”
백리자성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바위로 된 바닥을 뚫고 들어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대야벌 백대 고수 서열 삼십구 위, 천살원 삼대 고수의 일인인 자신이다. 대야벌 내부를 제외하고는 상대가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자와 동수를 이룬 것이다.
“ 이름을 알 수 있나?”
“ 한때 혈잔마수란 별호로 불렸다.”
염자생은 광인을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 혈잔마수 염자생이란 말이냐?‘
백리자성은 깜짝 놀랐다. 혈잔마수 염자생에 대해서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육 년 전에 강호 공적으로 지목된 자로 그 당시 천살원 또한 염자생을 추격했다. 일 년 동안이나 추격했지만 사막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놓쳤는데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 맞다. 백리자성. 난 네놈들이 강호공적으로 지목하여 사냥했던 그 염자생이다.”
염자생은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 간이 부었구나. 염자생. 강호공적 놈이 중원으로 들어오고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백리자성 또한 태만하지 못했다. 그는 염자생이 움직인 거리만큼 반대로 이동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비슷했다. 염자생은 검을 들어 올린 채고 백리자성은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걸음걸이는 마치 비질을 하는 것처럼 바닥을 스치듯 움직이고 있다.
발을 높게 들게 되면 중심이동이 일어나게 되고 그 순간 허점이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쏘아보며 기회를 노렸다.
“ 크아악!”
주변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고, 잘려나간 머리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머리에서 쏟아지는 피가 두 사람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 차앗!”
“ 타앗!”
우렁찬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 이제 입맛이 도실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연우강은 사망철립 위에 있는 머리를 들어오른편으로 놓으며 물었다.
“ 상대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그제야 비로소 차기울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절한 비명이 이어지고 있지만 종리웅이라고 하였던 청년과 아들이 맡고 있는 자들의 수가 너무 많은 듯 보였다.
“ 그래서 이걸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연우강은 바닥에서 술병 하나를 들어 탁자 위에 놓았다.
“ 술병으로 뭘 하겠단 말인가?”
“ 이겁니다.”
연우강은 뚜껑을 따고 술병을 거꾸로 기울였다.
병 안에 있던 술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술은 탁자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뭔가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허공에 머물렀다. 잠시 그 상태를 유지하던 술은 원반 형태로 변했다.
“ 지금부터 진짜 술을 마시게 될 겁니다. 아버님.”
연우강은 원반 형태를 띠고 있는 술을 가볍게 튕겼다.
슈욱!
술은 조금 전 사망철립이 그랬던 것처럼 가공할 속도로 날아갔다. 원반 형태의 술이 향하는 곳은 차남승과 종리웅이 등을 맞대고 싸우고 있는 곳이었다.
차남승의 양손은 가공할 기세를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권을 사용하는 차남승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왼팔과 오른팔에 각각 방패를 차고 있었다.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휘두를 때마다 방패는 척살단의 검을 막아내고, 상대의 빈자리를 향해 방패의 날과 주먹이 동시에 박혀들었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이었다. 완벽하게 익힌 듯 뻗어낸 양손에는 투명한 광채가 맺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강이었다. 오른손의 권강이 적의 머리를 부수고, 왼손ㅇ 방패가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그럴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광장 안을 가득 메웠다.
“ 표랑, 아버지 술 안주가 떨어졌다!”
바로 그때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겠습니다. 광랑!”
차남승은 고함을 내지르며 머리를 숙였다.
숙인 머리 위쪽으로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천독행신을 펼치던 차남승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가고 검을 휘둘렀던 사내는 검 손잡이를 이용하여 차남승의 등을 찍었다.
“ 늦어!”
차남승은 버럭 소리치며 오른손을 횡으로 휘둘렀다. 불끈 틀어쥐고 있던 주먹이 펴지며 손 날에 뿌연 광채가 어렸다.
스악!
“ 아악!”
검날처럼 솟구친 권강이 사내의 목을 스쳐 지나가고 잘려나간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 배달은 내가 하겠다. 표랑!”
이백 근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가 허공으로 솟았다. 순식간에 솟구친 종리웅은 몸을 뒤집으며 떠오른 머리를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차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손에서 무엇인가가 쏘아져 나갔다. 금색 광채를 번뜩이며 날아가는 그것은 종리웅의 무기인 금환비였다. 종리웅을 향해 달려들던 두 명의 이마로 금빛 광채가 박혀들었다.
“ 컥!”
“ 큭!”
나직한 비명과 함께 두 명이 풀썩 쓰러졌다.
“ 차앗!”
바로 그 순간 척살단 대원 한 명이 종리웅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는 방향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시도한 공격이었다.
“ 흥!”
종리웅은 차갑게 웃으며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이 가슴으로 들어갔다.
큰 덩치 때문에 평소 동작은 굼뜨게 보이지만 그의 손놀림은 잠룡 십 조 조원들 중 가장 빠르다고 정평이 나 있다. 품속으로 향한다 싶은 손이 어느새 밖으로 나왔고, 손에는 금빛 광채를 발하는 작은 비도가 들려 있었다.
차앙!
왼손의 방패로 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오른손을 횡으로 쓸었다. 쓸어가는 그의 금환비 끝에는 한 자 길이의 금빛 검강이 튀어나와 있었다.
스악!
“ 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척살단 대원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 이놈은 내가 배달하마!”
차남승은 자신 앞으로 떨어진 머리를 사정없이 차댔다
“ 죽인다!”
바로 그때 뒤편에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세 명이 검과 하나가 돼 차남승을 향해 짓쳐들어 갔다. 동료들의 죽음에 그들은 이미 이성을 상실한 듯 거의 동귀어진 수법이었다.
“ 쿡!”
차남승은 그대로 몸을 굴렸다.
스악!
뭔가 잘려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싸늘한 느낌이 등에서 느껴졌다. 앞으로 구른 그는 자세를 잡기도 전에 또다시 오른편으로 몸을 굴렸다.
차앙!
바닥에서 불꽃이 튀며 검은 동체가 보였다. 몸을 반쯤 일으켜 앉은 자세가 된 그는 무릎을 중심으로 빙글 돌며 왼 다리를 쭉 내밀었다.
퍼억!
우둑!
“ 아악!”
둔탁한 느낌이 오는 듯하더니 다리가 부러진 척살단 대원 한 명의 몸이 차남승을 덮쳤다.
차남승은 왼손을 불쑥 들어올렸다. 방패 끝에 나와 있던 날이 쓰러지는 사내의 목을 뚫고 들어가고, 동맥을 건드린 듯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차남승은 시체로 변한 척살단 대원의 몸을 방패 삼아 벌떡 일어났다.
스악! 푹!
검 하나는 척살단 대원의 몸을 자르고, 남은 한 자루는 사내의 몸을 뚫었다. 차남승은 급하게 엉덩이를 뒤로 빼며 상체를 숙였다. 척살단 대원의 몸을 뚫고 들어온 검이 그의 배에 상처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상처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시체를 방패로 삼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스악!
바로 앞에서 희뿌연 광채가 움직이는 듯하더니 머리 없는 시체 두 구가 생겨났다.
“ 이놈들은 전부 제 겁니다. 손대지 마십시오.”
“ 표랑 말이 맞습니다. 광랑. 한 번만 더 손대면 광랑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차남승에 이어 종리웅이 고함을 내질렀다.
두 사람의 몸은 엉망이었다. 자신들의 피와 적의 피가 뒤섞여 피로 목욕을 한 사람들 같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 안주가 부족해서 그래, 인마.”
연우강은 잘린 머리가 올려진 채 날아온 술 원반을 바로 앞에 잡아두며 소리쳤다.
“ 지금부터 계속 갈 테니까 준비하십시오.”
“ 전 손 떼야겠습니다. 아버님.”
연우강은 술로 만든 원반 위에 있는 머리를 들어 한편으로 놓으며 말했다. 술 원반 위에는 잘려나간 머리에서 떨어진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 그래야 할 것 같구먼. 한잔 주게.”
차기울은 빈 술잔을 내밀었다.
연우강은 원반 형태를 띠고 있는 술에서 조금 덜어 차기울의 술잔에 담았다. 피가 섞인 술이 채워지자 차기울은 술잔을 응시했다.
“ 이곳에 오기 전에 장사에서 철응방 방주님을 만났습니다.”
“ 광동착보다 먼저 당한 그 철응방 말인가?”
“ 그렇습니다.”
“ 살아 계시던가?”
“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오른팔과 왼 다리를 잃은 상태셨습니다.”
“ 뭐라고 했는가?”
“ 전 율령궁 소속 무인들도 상당수가 가족을 거느리고 있고 대야벌에 머물고 있는 자들만 해도 대략 천여 명이며 외부에 살고 있는 자들까지 합치면 만 명 이상이라고 하였습니다.”
“ 원하기만 하면 그들의 머리를 가져다주겠다고 했는가?”
“ 그랬습니다. 만 명이 아니라 십만 명이라고 해도 전주 가져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할 수 있습니다.”
“ 그분은 뭐라고 하던가?”
“ 아들인 전관수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일만 개의 목을 원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 아들을 최고로 만들어 달라고 했겠군.”
“ 그렇습니다.”
“ 나도 마찬가지네. 연 공자. 내 아들놈을 최고로 만들어주게. 내 부탁은 그거네.”
“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아니 녀석의 품에 안겨 대문을 나설 때만 해도 자넬 만나면 저주의 말을 퍼부어 줄 참이었네. 빌어먹을 네 녀석 때문에 우리 집안이 멸망했다고 말이네. 하지만.....”
차기울은 피가 섞인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 자네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네. 그리고 광동차가를 포기하고 이곳으로 달려온 자네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도, 한 잔 더 줄 수 있겠나?”
차기울은 술잔을 내밀었다.
“ 물론입니다. 아버님.”
연우강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고 있는 원반 형태의 술에서 약간 떼어내 차기울의 잔을 채웠다.
휙!
바로 그때 머리 하나가 두 사람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로 시선을 내렸다. 이미 탁자 바닥은 머리가 꽉 차 있어 공간이 없었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머리를 다른 머리 위로 놓았다.
“ 한 잔 더 주겠는가?”
잔을 비운 차기울은 술잔을 다시 내밀었다.
“ 오늘은 술이 당기는 모양입니다. 아버님.”
“ 원래 좋은 안주는 술을 부르기 마련 아닌가.”
“ 그렇군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