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26화 (126/232)

제 8장 차가운 광기

파삭!

우담보의 손에 들렸던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찻물이 얼굴로 튀었지만 우담보는 뜨겁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 다, 다시 말해보게.”

우담보는 다그쳤다.

“ 잠룡대로 보이는 자들과 십이 조, 십구 조 대원들과 전투가 있었는데 집행사자들이 거의 전멸당했답니다.”

유선은 굳은 얼굴로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 잠룡대로 보이는 자들이라고 했는가?”

“ 그곳에서 살아 나온 자들 중에 담대 공자를 본 집행사자가 있었습니다.”

“ 왜?”

우담보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 쌍방간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 어떤 오해가 있었단 말인가?”

“ 집행사자들은 잠룡대를 밀천 무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답니다.”

“ 잠룡대는?”

“ 그들 또한 같은 이유인 걸로 압니다.”

“ 그럼 서로가 상대방을 밀천 무인으로 오해하고 전투를 치렀단 말인가?”

“ 그랬답니다.”

“ 우린 이미 담대 공자에게 이곳은 우리 작전 구역이라 말했네. 유 원주.”

“ 이건 제 생각인데.....”

“ 말해보게.”

“ 아무래도 담대 공자의 잠룡대 장악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 못한 듯합니다.”

“ 그래서 대원들을 막지 못했다는 말인가?”

“ 윤허, 이지약, 사유성, 이라파 등은 담대 공자 못잖은 강자들입니다. 더구나 아직 잠룡강호행은 진행 중이고요.”

“ 자네가 언급한 그들이 담대무궁을 견제하고 있다는 건가?”

“ 만일 이번 일이 대야벌에 알려지게 되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사람은 지휘관인 담대 공자입니다. 순위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 그럼 잠룡대의 각 조장들이 담대무궁을 끌어내리기 위해 힘을 합쳤다고 봐야겠군.”

“ 제 생각입니다.”

“ 자네 생각이 맞을 거네. 하지만 지휘관이라면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야 했네. 그리고 율령궁 무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못한 건 능력 부족이네. 당장 벌로 서찰을 보내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 지금 잠룡대는 어디에 있는가?”

“ 십삼 조와 십팔 조가 있는 부근에서 흔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 자칫 잘못하다간 그 쪽에서도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겠구먼.”

“ 그렇습니다.”

“ 최우선적으로 그들의 위치를 찾게. 그리고 담대무궁을 데려오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분석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금세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이 손에는 서류 뭉치가 잔뜩 들려 있었다.

“ 무슨 일인가?”

“ 이런 게 올라왔습니다.”

급하게 우담보 앞으로 앉은 유선은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우담보는 유선이 내민 서류 뭉치를 한 장씩 훑어나갔다. 서류를 읽어나가던 우담보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이윽고 마지막 장을 내려놓고는 유선을 보았다.

“ 어디서 얻은 건가?”

“ 우연히 하오밀문 안가를 습격했다가 책자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 사실 여부는 확인했다고 하던가?”

“ 명령을 내려달라는 첩지와 함께 왔습니다.”

“ 지금 당장 모든 인력을 동원하여 거점과 하오밀문 수뇌들의 가족 상황을 확인하도록 하게. 단 절대 손을 대서는 안되네. 만일 손을 대는 자가 있으면 죽음으로 다스릴 거라는 말을 반드시 전하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급하게 분석실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수백 명의 전서단 대원들이 악양의 서밀 장원을 나서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의 품에는 하오밀문 거점이 표시돼 있는 작은 지도가 한 장씩 들려 있었다.

“ 각 수뇌들을 전부 불러들이도록 하게.”

그렇게 말하고 우담보는 거처를 나섰다. 그가 나서자 이청문이 천살단 무인들에게 은밀히 따르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우담보를 따라나섰다.

“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담보는 따르는 이청문에게 물었다.

“ 설사 그 정보가 사실이라고 해도 하오밀문의 모든 전력은 이곳 악양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궁주님.”

“ 거점은 의미없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가족을 잡아와서 놈들을 유인한 다음 정리하면 전쟁을 한달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 정보가 사실이라면 우린 하오밀문 수뇌 오십 명의 생명줄을 쥐게 되네. 하지만 잠룡 십 조는 아니네.”

“ 잠룡 십 조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단 말입니까?”

“ 물론 올 거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잠룡 십 조가 아니라 지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이네. 그들 중 욱일승, 수천월, 갈인효는, 만일 과거의 무공을 되찾았다면 나도 감당하기 힘든 고수네.”

“ 한꺼번에 들이닥치면 저희가 불리하단 말이군요.”

“ 집행사자 이백 명이 잠룡대 이백여 명에게 당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가.”

“ 그렇군요.”

이청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룡 십 조와 지옥에서 탈출한 노인들이 함께 온다면 율령궁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을 없애지 못하고 율령궁만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 설사 그들을 없앤다고 해도 우리가 없앨 수 있는 하오밀문 문도는 오십 명 밖에 되지 않네. 그동안 우리가 들였던 노력이나, 우리 측이 입었던 피해를 생각하면 쥐새끼들 머리 오십 개로 승리했다고 할 수가 없네. 그 말은 곧 생쥐 박멸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의미하네.”

“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 우리가 떨어진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는 받은 대로 돌려줘야 하겠지.”

“ 놈들의 거점을 이용할 생각이십니까?”

“ 거점이 아니고 귀구멍이네. 즉 생쥐들의 안방이지. 놈들의 안방에서 사냥을 해서 없애야만 우린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네. 더불어 잠룡 십 조와 지옥의 죄수들을 흩트려 놓으려면 거점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네.”

“ 만일 그 정보가 놈들이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흘린 거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그건 전서단 대원들이 돌아오면 알게 되겠지.”

“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방금 말씀하셨던 그 방법으로 놈들을 없애실 겁니까?”

“ 그동안 시간을 너무 끌었네.”

“ 그랬지요.”

이청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동안 하오밀문을 박멸하지 못한 것만 해도 율령궁으로서는 수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율령궁이 당하고 말았다. 이번 작전에 몪숨을 걸겠다고 하였지만 궁주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하지만.......’

갑자기 호위를 하고 있던 대원들이 긴장한 듯 삼엄한 기운이 몰아쳤다. 이청문은 시선을 들었따.

오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짐을 잔뜩 실은 마차 한 대가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확인하라.”

“ 존명!”

이청문의 명령에 천살단 대원 다섯 명이 빠르게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마차가 있는 곳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우담보 대협께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요.”

우담보와 이청문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 누가 보냈느냐?”

“ 연우강이라면서,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휙! 휙!

연우강이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담보와 이청문은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마차 앞으로 다가간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보았다. 휘장으로 둘러싸인 마차에서는 심한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걷어라!”

이청문은 대원을 향해 소리쳤다.

이청문의 명령에 천살단 대원은 몸을 날려 마차를 덮고 있던 휘장을 걷어냈다. 마차에서는 서너 개의 관을 합쳐 놓은 듯한 커다란 상자 네 개가 실려 있었다.

“ 전......”

“ 정말로 연우강이라고 하더냐?”

우담보는 마차를 몰고 온 노인을 보며 물었다.

“ 그, 그렇습니다, 대협.”

노인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 돌아가도 좋다.”

“ 가,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듯 노인은 주춤거리고 서 있었다.

“ 왜 그러고 있느냐?”

“ 그분 말씀이 운송비를 줄 거라고 해서.......”

“ 이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예가 어디라고 감히!”

천살단 대원 한 명이 살기를 흘렸다.

“ 저, 전 다만......”

“ 그래도 이놈이!”

“ 됐다. 심부름한 노인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느냐. 그래 얼마를 받아가라고 하더냐?”

“ 서른 냥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르신.”

“ 개자식.”

우담보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서른 냥은 연우강이 화장실을 펐을 때 지불하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서슬 퍼런 우담보늬 모습에 질겁한 노인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우담보는 씁쓸한 얼굴을 하며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노인에게 던졌다.

“ 오십 냥은 될 거다. 가지고 가거라.”

“ 가, 감사합니다. 대협.”

노인은 황급히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끼익!

그때 마차 위에서 상자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 허억!”

상자 뚜껑을 열었던 대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무슨 일이냐?”

우담보는 위쪽을 보며 물었다.

“ 그, 그게......”

사내는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 대답을 못했다.

“ 에잉!”

우담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마차 위로 몸을 날렸다. 뒤이어 이청문도 날아올랐다.

“ 헉!”

“ 억!”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는 사람 머리가 위를 올려다보는 형태로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이미 부패가 진행된 듯 관 아래 쪽에는 머리 위에서 흘러나온 썩은 물이 홍건하게 고여 있었따. 그 물이 바로 악취의 근원이었다.

“ 배, 백리 단주!”

이청문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머리는 척살단의 단주인 백리자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리자성의 머리에 작은 대롱이 하나 묶여 있었다. 그것은 율령궁 전서단 대원들이 지니고 다니는 전서를 담는 통이었다.

우담보는 대롱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대롱은 그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왔다. 우담보는 부들부들 떨며 뚜껑을 열었다.

< 이 세상에는 법이 아니더라도 상식이라는 것이 있고 규율이라는 게 있다. 우담보. 그러한 것들은 굳이 법이라는 장치로 강제하지 않아도 생각이 있는 놈이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너는 그 보편적인 상식과 무인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지켜야 할 규칙을 어겼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놈이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든다.

이 내기에 내 전 재산을 걸겠다. 우담보>

푸스스!

가루로 변한 첩지가 우담보의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 우담보는 다시 관 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 거점을 만든 자가 연우강 그놈이겠지?”

우담보는 백리자성의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궁주님.”

“ 놈이 만든 거점으로 하오밀문 수뇌들의 가족을 전부 던져 넣게.”

“ 그들이 거점으로 몰려 갈 거라고 보십니까?”

“ 가족을 끌고 올 때 두 명씩 머리를 자르도록 하게.”

“ 전서단 대원들이 돌아오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궁주님.”

“ 이들은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주도록 하게.”

우담보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네 개의 관에 하나씩 눈을 맞췄다.

“ 넌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연우강. 이건 내기해도 좋다. 아니 내 재산 전부를 걸겠다.”

우담보는 짓씹듯 말하며 몸을 돌렸다.

마차 위에 있던 이청문은 물끄러미 우담보를 쳐다보았다. ‘ 내 재산 전부를 걸겠다.’는 우담보의 말. 그 말은 연우강이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말이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빠르게 서쪽을 향해 쓸어가고 있었다.

“ 우리 내기하겠소?”

“ 무슨 내기 말이냐?”

“ 당신은 한 달 안에 날 찾아와서 애원하게 될 거요.”

“ 제발 함께 나가달라고, 네게 애원을 한단 말이냐?”

“ 내 전 재산을 걸겠소.”

“ 방장인 두보관이 누구인지 아느냐?”

“ 내가 알 필요가 있소?”

“ 혈악 두보관은 일천 명의 무인으로 구성된 패천림의 전대 림주였다. 그리고 부장장인 사악 일잔풍은 사월림에서도 오 위 안에 드는 초강자였다.”

“ 옛날엔 나도 정천호였소, 원주.”

“ 과거는 의미가 없단 말이냐?”

“ 당연히 그렇지 않겠소.”

“ 두보관은 몰라도 사악 일잔풍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고, 내기를 할 거요. 말 거요?”

“ 만일 네 말처럼 내가 이곳으로 찾아와서 애원을 하게 되면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주겠다.”

“ 남아일언? ”

“ 중천금.”

“ 일구이언?”

“ 이부지자.”

“ 아니오, 원주 이부지자가 아니고 견부지자요. 즉 개새끼란 말이오, 됐소?”

“ 됐다.”

“ 당신, 괜찮은 사람이오, 이 원주.”

문득 과거 지옥으로 가면서 녀석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한번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나올 수 없다는 감옥인 지옥으로 들어가면서도 녀석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쉬러가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기 그리고 도박.

처음엔 가볍게 시작하여 돈을 잃어도 허허 웃고 만다. 그러다가 계속 돈을 잃게 되면 흥분하여 판돈을 늘여간다. 하지만 선수에게 걸린 도박꾼이 본전을 찾기란 요원하다. 그러다 소위 ‘한탕’이라고 부르는 한 방을 노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패가망신이다.

설사 상대가 ‘선수’라는 사실을 알아도 패가망신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지금 율령궁 처지가 선수에게 걸려든 호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놈들이 선수가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

자수는 일 년 내내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 많은 배가 오가는 강이다 보니 항구는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ㅇ벗고, 호남 남부에서 가장 큰 항구를 가진 소양의 발전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인들이 모여들면 그들을 상대하는 숙박업이 성황을 이루게 되고 덩달아 기루와 주로도 발전하게 된다.

소양에서 가장 번화가는 자수로 나가는 선착장 주변에 형성된 자수대로였다. 선착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는 숙박 시설이 주를 이루고 숙박 시설 뒤편으로는 대로를 따라가면서 좌우 측으로 주루와 기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휘황찬란한 등이 걸려 있는 자수대로는 흥겨운 음악과 주객들의 소음으로 왁자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풍악 소리와 웃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오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나타난 숲처럼 불안한 기운만 구름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그 불안감의 실체는 금세 드러났다.

“ 아악!”

어디선가 들려온 뾰족한 비명이 풍악을 대신하여 자수대로를 채웠다. 하지만 창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집에 있는 자들 또한 조금 전 비명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불쑥 나타난 맹수로부터 습격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제, 제발 살려주세요.”

얼굴이 피로 점철된 중년 여인이 꼽추 사내의 발 앞에 엎드려 애원했다. 그녀가 애원하고 있는 꼽추 사내는 잔살단의 단주 마악추 천잔성이었다.

“ 살려달라고 애원할 게 아니라 놈들이 살고 있는 곳을 불어라. 네가 살길은 그것밖에 없다. 계집.”

천잔성은 중년 여인의 머리채를 천천히 틀어쥐었다.

“ 사, 살려주세요. 전 모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대협”

중년 여인은 바들바들 떨며 애원했다.

그녀 옆에는 머리가 뜯겨나간 여자 시체 두 구가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의 머리를 뜯어냈던 손이 이번엔 자신의 머리를 틀어쥐고 있다.

“ 그럼 살아 있을 이유가 없구나.”

“ 하, 하지만 건달은 알고 있습니다. 대협.”

“ 건달?”

뿔뚝 불거졌던 손등의 힘줄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 자수대로 끝에 가면 자수보호대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에....”

“ 건달드이 있단 말이냐?”

“ 그, 그렇습니다. 자수파라는 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의 두목인 철면이 초저녁에 왔다 갔습니다.”

“ 그놈은 알고 있단 말이냐?”

“ 그,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손님이 찾아오곤 하면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 조직원은 몇 명이나 되느냐?”

“ 서른 명 가량입니다.”

“ 들었느냐?”

천잔성은 옆에 있는 잔지괴마 피적인을 보았다.

“ 들었습니다. 단주님.”

피적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제발.....”

중년 여인은 천잔성을 올려다보며 빌었다. 하지만 천잔성의 눈은 더욱 차갑게 변했다. 그는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오른손에 힘을 가했다. 더불어 내공을 끌어올려 여자의 몸을 아래로 눌렀다. 머리카락을 잡은 손은 들어올리고 내공으로 몸을 아래로 밀면 그 결과는 뻔하다.

“ 아아악!”

여자의 머리가 천천히 뜯겨나가며 처절한 비명이 텨져나왔다.

“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라, 계집.”

“ 처, 천벌을 받을 거다. 넌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거다. 이 꼽추새끼야.”

삶에 대한 희망이 살자ㅣ면 그 다음에 남는 건 악이다. 여자는 머리가 뜯겨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천잔성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천잔성의 눈에 악독한 기운이 어리고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뜯겨나간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 난 꼽추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계집.”

천잔성은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방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와 주루를 나선 그는 자수대로를 따라 걸었다.

자수보호대란 건물은 대로 끝에 위치해 있었다.

대로를 따라 서 있는 기루들과 달리 자수보호대 건물에는 불이 밝혀져 있지 않았다. 잔살단 대원들은 건물을 포위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 오십니까?”

천잔성이 다가가자 육지인마 청성일이 고개를 숙였다.

“ 놈들은?”

“ 지금 찾고 있습니다.”

“ 위엔 없단 말이냐?”

천잔성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은 이층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천리지청술을 펼쳐도 아무런 인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 지하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모양입니다.”

“ 안내해라!”

“ 알겠습니다. 단주님.”

청성일은 건물 안으로 천잔성을 안내했다.

일층에서는 먼저 안으로 들어온 대원들이 벽과 바닥을 두드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찾았습니다.”

안쪽에서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천잔성은 그곳으로 갔다. 대원 한 명이 가로 세로 각각 세 자 가량 돼 보이는 문짝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제법 머리를 쓴 모양이구나.”

천잔성은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문짝은 바닥과 같은 재질로 돼 있고, 두께 또한 상당히 두껍다. 바닥이 비어 있다는 흔적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두껍게 만든 듯했다. 하지만 일반 양민들은 속일 수 있겠지만 무인을 속인다는 건 무리다.

그는 문 안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래쪽으로 나 있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 살펴라!”

천잔성의 명령에 천살단 대원들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삼 장 정도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육중해 보이는 석문이 있었다. 중간 위쳉 끼어 계단을 내려온 천잔성은 내기를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그러자 귓전으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러니까 그 꼽추 새끼가 병신춤을 췄단 말이야?]

꿈틀!

꼽추 새끼라는 말에 천잔성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랐다.

[ 그렇다네. 어찌나 서럽게 추던지 주머니에서 돈이 절로 나와. 그 꼽추 새끼의 돈 통으로 들어가지 뭔가.]

또 꼽추 새끼란 말이 들려오자 이번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 이렇게 한 거야?]

[ 아주 잘 하고 있네 그려.]

“ 죽일놈!”

천잔성의 몸에서 차가운 냉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 비켜라!”

천잔성의 목소리에 어린 살기를 감지한 대원은 불에 덴 듯 비켜섰다.

“ 개자식!”

천잔성은 석문을 향해 양손을 사정없이 내밀었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석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파앗!

환한 불빛이 확 끼쳐오자 천잔성은 내공을 끌어올려 경계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어떤 공격도 해오지 않았다. 환한 불빛에 적응되자 안쪽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는 상당히 넓었다. 좌우 폭은 칠 장 가량이고 안쪽까지는 십 장 가량이었다. 출입문에서 오 장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부터는 벽면을 따라 탁자가 줄을 맞춰 놓여 있고, 그 탁자 뒤편으로는 무복을 걸친 자들이 앉아 있다. 무복을 걸친 자들은 한 곳을 쳐다보며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머물고 있던 중앙에는 검은 옷을 걸친 자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등에 뭔가를 집어넣어 불룩하게 만들고 허리를 약간 구부려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꼽추다. 느닷없는 침입자에 놀란 듯 놈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편을 쳐아보고 있었다.

“ 응?”

살기를 뿌려대던 천잔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하에 숨어 있는 걸 보면 놈들 또한 잔살단에 대해 들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녀석들이  깜짝 놀란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 이것들이 호랑이 간을 삶어먹은 건 아닐 테고,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인데.....’

천잔성은 손에 내공을 모았다.

그때 한 가운데서 꼽추 모습을 하고 있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적리 영감!”

“ 말하게.”

“ 아니잖아.”

“ 뭐가 아니란 말인가?”

“ 저 새낀 꼽추면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잖아.”

“ 등에 혹이 작으면 간혹 허리를 세우고 다니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네.”

“ 저 꼽추 새끼도 그렇다는 거야?”

“ 그런 모양이네.”

“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가 추는 춤을 잘 봐. 마음에 들면 여기에 돈을 던지고.”

연우강은 발치에 놓아둔 사망철립을 발로 툭 차더니 몸을 잔ㄸ그 구부린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왼편으로 쓰러질 듯 몸이 기울고, 오른 다리가 엉거주춤 허공으로 올라갔다. 들어 올려진 오른손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엉거주춤 허공을 감아 돈다. 오른 다리와 오른손을 내린 그의 몸이 왼편으로 한참을 기울더니 왼발과 왼팔이 동시에 허공으로 올라갔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연우강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 뭐 해, 인마.”

연우강은 춤을 추면서 천잔성을 보았다.

“ 죽일 놈!”

천잔성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 놈의 면상을 찍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알 수 없는 기운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명 위험 신호였다.

천잔성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조금 전 흥분하여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보였다. 벽면에 기댄 형태로 빙 둘러앉아 있는 자들은 대부분 나이를 지그시 먹은 노인들이다. 젊은 놈은 춤을 추는 놈까지 합쳐 네 명에 불과했다.

“ 네놈들은 누구냐?”

천잔성은 차갑게 물었다.

노인들이 건달 노릇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 직접 알아보는 게 어때?”

연우강은 왼편으로 한껏 기운 상태에서 천잔성을 보며 이죽댔다.

“ 지척진!”

천잔성은 오른쪽 끝에 있는 사내를 불렀다.

그는 손가락이 아홉 개 밖에 없다고 하여 구지마군이라고 불리는 지척진이었다.

“ 하명하십시오, 단주님.”

“ 확인하라!”

“ 존명!”

지척진은 낮게 소리치며 연우강을 향해 폭사돼 갔다.

“ 방금 이 춤을 육갑춤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어때?”

연우강이 날아오는 지척진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저승에 가서 물어봐라 놈!”

일 장 앞까지 다가간 지척진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척진의 손끝으로 검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마치 검처럼 생겨난 그것은 지척진의 성명절기인 흑검수였다.

휙!

바로 그때 연우강 발치에 있던 사망철립이 둥실 떠올랐다. 허공으로 솟구친 사망철립은 지척진의 하체를 향해 빠르게 쏘아져 갔다.

“ 이까짓 걸로!”

지척진은 날아오는 사망철립을 향해 오른발을 내질렀다.

핑!

지척진의 발끝이 사망철립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사망철립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했다.

“ 헉!”

지척진은 질겁한 얼굴로 발을 거둬들였다.

느닷없이 회전하는 방갓에서 섬뜩한 느낌이 감지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번 내지른 말이 쉽게 거둬질 리가 없었다. 한 방에 부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내지른 발질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사망철립 또한 가공할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스악!

사망철립은 지척진의 발목을 자르며 지나갔다.

“ 크아악!”

지척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연우강의 몸이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더니 왼발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행동을 보면 꼽추 춤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춤을 출 때와는 달랐다.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던 왼발이 빠르게 나아가더니 지척진의 목을 후려갈겼다.

“ 커억!”

지척진은 피를 토하며 훨훨 날았다.

휙!

지척진의 신형이 날아가는 곳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의자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먹이를 쫓는 매처럼 지척진의 안면을 향해 오른손을 찍어 넣었다. 그는 철응방의 장자 전관수였다.

“ 크아악!”

지척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공격하라!”

지척진이 당하자 육지인마 청성일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연우강과 전관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잔살단 대원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 클클클!”

“ 낄낄낄!”

노인들은 낄낄대며 아래쪽에 두었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창! 창창창! 창창!

스악! 슥! 사악!

“ 크악!”

“ 아악!”

“ 으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노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던 잔살대 대원들은 뛰어들었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튕겨나갔다.

털썩! 털썩! 털썩!

수십 구의 시체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중앙으로 떨어져 내렸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게 되면 너무 놀라 할 말을 잃는다고 했던가.

지금 잔살대 대원들이 그런 상황이었다.

잔살단 대원들 사이에서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노인들을 보았다. 그다지 강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자들에게 잔살단 대원들이 단 일 초에 당하고 만 것이다.

잔살단 대원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도망치려는 생각에 출입문을 본 것이 아니라 강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자신들도 모르게 도망칠 곳을 확인한 것이었다.

“ 천잔성, 넌 무인도 아냐, 무인이라면 최소한 양민은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 거야.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불구들이 욕을 먹는 거야. 정상인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너 같은 ‘병신’ 때문에. 그리고 내가 추는 이 춤은 병신육갑춤이라고 이름을 지어봤는데, 어때?”

연우강은 다시 허리를 숙이고는 덩실덩실 춤을 췄다.

“ 날 알고 있는 걸 보면 기다렸다는 말이구나.”

“ 물론이야. 전잔성. 넌 날 본 적이 없겟지만 나는 널 아주 잘 알고 있어. 율령궁 삼대 고수 중 한 명이선서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병신’들이 모여 있는 잔살단의 단주지.”

“ 넌 누구냐?”

천잔성은 다시 물었다.

“ 그건 알 것 없고. 그것보다는 하던 짓을 마무리하자고. ‘병신’이라고 해서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 천잔성.”

“ 개새끼.”

천잔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바로 꼽추, 아니 병신이었다. 실력이 부족하여 모욕을 당하는 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 하지만 불구라는 이유로 치욕을 당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비단 천잔성뿐만이 아니었다.

천잔성 주변에 있던 잔살단 대원들은 살기를 풀풀 쏟아내며 몸을 날렸다. 그들 또한 천잔성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 바로 그거야, 병신들. 이젠 너희들은 절대 도망치지 않을 거야. 너희들처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병신들은 누군가가 병신이라고 놀리면 머리가 확 돌아버리지. 그래서 뒤를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놀린 놈이 죽거나 본인이 뒈질 때까지 말이야. 난 그걸 노린 거야. 너희 병신들을 전부 죽이기 위해서 일부러 도발하는 거라고. 너희들이 도망치지 않고 내게 덤벼들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병신육갑 한다고 하는 거라고.”

“ 크아악!”

“ 으아아!”

“ 캬아아!”

잔살단 대원들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불구의 설움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모른다. 죽을 수 없어서, 죽지 못해서 이를 악물고 주먹을 틀어쥐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무공을 익히고 정상인보다 더 강해졌다.

하지만 불구라는 꼬리표는 영원히 뗄 수가 없었다.

정상인의 팔을 잘라내고 다리를 잘라내도 그들은 부상자일 뿐 자신들과 같은 불구가 되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병신이라고 부르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달랐다. 정상인보다 더 힘이 세고, 더 빨리 달리고, 감각이 더 뛰어나도, 병신일 뿐이었다.

병신, 병신, 병신.

“ 크아아!”

“ 으아아!”

잔살단 대원들은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지르며 연우강을 향해 달려갔다.

“ 아주 좋아!”

철컥! 철컥! 철컥!

연우강은 차가운 눈으로 잔살단 대원들을 바라보며 양손을 폈다. 순간 사망낭조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싸늘한 살기를 뿌려댔다.

스악!

“ 크아악!”

가장 먼저 천잔성이 사망낭조의 제물이 됐다.

천잔성의 낫을 피한 연우강은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천잔성의 얼굴로 박아 넣었다. 사망낭조가 깊숙이 파고들어 가자 물건을 틀어쥐는 것처럼 손가락을 오므리면서 뽑아냈다. 빠져나온 사망낭조 안쪽에는 피와 살과 뼈가 잔뜩 들려 있었다.

휙!

연우강의 허리가 굽혀지고, 왼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잔살단 대원 한 명의 얼굴이 뜯겨나가고, 또 다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바로 그거다. 병신들. 진짜 싸움은 분노에 몸을 맡기는 거야. 잔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단 말이야. 분노를 태우고 또 태우면 광기가 돼. 그 광기와 함께 돌진하는 거야. 그러다 죽이면 내가 살고,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지, 그게 바로 싸움이다, 병신들!”

츄아악!

사내의 이마로 파고들었던 사망낭조가 네 줄의 깊숙한 자국을 남기며 아래로 내려가더니 가슴에서 빠져나온다. 이어 연우강의 고개가 가볍게 숙여지고, 오른손이 아래로부터 긁어 올려진다. 이번엔 다섯 줄의 깊은 고랑이 파이며 그곳으로부터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옆구리로 상대의 검을 흘리며 잔살단 대원의 정수리에 사망낭조를 꽂아 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잡아당기며 물구나무를 선다. 몸을 튕겨 재주를 넘으며 다시 오른손을 긁어내린다.

피와 비명과 죽음이 난무했다.

연우강이 움직일 때마다 잔살단 대원들은 얼굴에 네 줄과 다섯 줄의 깊은 고랑을 남기며 죽어갔다.

“ 싸울 때는 늘 목숨을 걸고, 전 재산을 거는 거야. 싸움이 끝난 다음은 생각할 필요 없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대로 뒈지면 뒈지는 대로 맡겨두는 거야. 싸움은 그런 거야. 병신들. 자격지심이나 자존심 따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고.”

“ 저 친구?”

양손을 휘둘러 잔살단 대원을 격살하던 적리세우는 동작을 멈추고 연우강을 보았다.

목소리가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분노한 것처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비수보다 더 잔인하고 날카롭다. 불구라는 신체적인 결함을 끊임없이 들먹여 잔살단 대원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다.

분노라는 감정에 몸을 맡겨버린 잔살단 대원들은 미쳐버린 것처럼 연우강을 향해 달려든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놀라운 사람은 연우강이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육신이 찢겨나가고, 피비가 내린다. 분노하거나 잔뜩 흥분한 상황이 아니면 저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없다. 더불어 몸 주변에는 진득한 살기가 넘실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연우강의 몸 주변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잔살단 대원들을 없애고 있다.

사망낭조라고 하였던 조가 상대방의 신체로 파고들어 가면 반드시 긁어내리거나, 긁어 올려 길게 고랑을 만들고 마지막에는 손목을 튼다. 그러고는 움켜쥔 형태로 뽑아낸다.

부상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단 한 번에 완벽한 죽음을 내리는 잔인한 손속이었다. 문득 젋은 시절 늙은 병사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네.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고

살아남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네.

빌어먹게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자들이 바로 적이라네. 적이 없으면 나라는 사람도 없지.

싸움도 그래.

적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거네.

그냥 그것뿐이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고, 전쟁 말고는 할줄 아는 게 없다고 하였던 노인은 그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런데 연우강의 모습에서 그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삶의 이유가 전쟁이 되어버린 자.

“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살아남는 놈이 정의고, 선이고, 역사다. 뒈진 놈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병신들.”

“ 크아아!”

“ 으아아!”

벌써 수십 명이 죽어나갔고,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시체가 쌓였지만, 잔살단 대원들은 불빛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렇게 반 시진이 흘렀다.

츄아악!

피를 뚝뚝 흘리고 있던 사망낭조가 사내의 얼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섯 개의 깊은 골을 남기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살갗이 찢겨나가며 피가 흘러내렸다.

“ 크아악!”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가장 안락한 상태는, 죽음이야.”

스악!

물건을 틀어쥔 것처럼 움켜쥔 사망낭조가 튀어나아고 핏줄기가 길게 그 뒤를 따랐다.

지하엔 정적이 감돌았다.

벽면에 밝혀진 유등만이 학살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도 함께 동참했지만, 작은 꿈틀거림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학살의 현장에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뚝! 뚝! 뚝!

비가 온 후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소리 같은 소리가 지하 공간의 정적을 깨뜨렸다. 일행은 일제히 물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연우강의 사망묵의 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끄응! 빌어먹을, 이젠 낮에도 전쟁 꿈을 꾸나보네.”

연우강은 툴툴대며 뭍에서 나온 개가 물기를 털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 꿈?”

연우강은 지켜보던 적리세우가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 난 원래 이렇게 잔인한 짓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야.”

“ 그들은 대부분 연 공자가 죽였네.”

“ 그러니까 꿈을 꿨다고 했잖아. 군에서 나올 때 남의 약점을 후벼 파고 또 파서 미치게 만드는, 아주 비열한 짓은 몽땅 버리고 나왔거든.”

“ 비열한 짓이라는 걸 연 공자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 난 감성이 풍부하고 예의와 겸손으로 온몸을 도배한 사람이야, 적리 영감.”

“ 그런 사람이 저렇게 잔인하게 보내준 건가?”

“ 그래도 저놈들 중에 죽어가면서 고통받는 놈은 없잖아.”

“ 숨이 끊어졌는데 고통을 받지 않는 건 당연히 .... 그럼 그것 때문에 단숨에 죽인 건가?”

“ 그건 아냐.”

“ 그럼?”

“ 다시 일어나서 공격해 오면 귀찮아.”

연우강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시체는 어떻게 할 건가?”

적리세우는 계단을 올라가는 연우강을 향해 물었다.

“ 머리는 응랑이 가져갈 테고, 몸통은 처리해줄 놈이 따로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적리세우는 전관수를 보았다.

“ 머리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 전부?”

“ 네.”

“ 조운곡까지 가져가면 전부 썩고 말 텐데?”

“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전관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느 검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앞으로 다가가 목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 혼자 하기엔 너무 많구먼.”

전관수를 지켜보던 차남승과 종리웅이 시체들 사이로 나오더니 검을 주워들었다.

“ 에잉! 아무튼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전부 미쳤어.”

적리세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 어디 가는가?”

밖으로 나온 적리세우는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일을 했으니까 쉬어야지. 선착장 근처에 있는 소하 객잔으로 오라고 해.”

“ 알았네.”

적리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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