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27화 (127/232)

제 9장 이숙경, 무공에 입문하다.

늦게 자든 빨리 자든 연우강이 일어나는 시간은 항상 같다. 인시에 잠을 깬 연우강은 간단하게 옷을 챙겨 입고 객잔 뒤뜰로 나갔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천천히 몸을 풀었다. 다리를 내림고, 손을 뻗어내고, 그가 늘 하던 동작이었다.

“ 그건 언제까지 할 겁니까?”

약을 가지고 간 염자생이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개가 다가올 때까지.”

“ 전엔 개가 다가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다시 멀어지고 있어.”

“ 살기가 강해지고 있다는 말이군요.”

“ 그런 셈이야.”

연우강은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쉬며 동작을 멈췄다. 연우강이 멈춰 서자 염자생은 약을 내밀었다.

“ 이 약 너무 강한 거 아냐?”

약 사발을 입으로 가져가던 연우강이 물었다.

“ 약효가 셉니까?”

“ 센 정도가 아니라 아침마다 죽을 맛이야. 도무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아.”

“ 제게는 복에 겨운 소리로 들립니다.”

“ 복에 겨운 소리라고?”

“ 전 장주님이 부럽습니다.”

“ 벌써 맛이 간 거야?”

“ 사내라는 상품의 유통기간은 오십 년이라는 것도 모르십니까?”

“ 그렇게 짧아?”

“ 오십이 넘어가면 성의 구분이 사라진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전 육십이 넘었습니다.”

“ 그럼 이건 귀노가 먹어야겠네.”

연우강이 반쯤 남은 약사발을 염자생 앞으로 내밀었다.

“ 전 아직 몽요 아가씨의 살수를 피할 자신이 없습니다. 장주님.”

염자생은 어깰르 으쓱하며 물러났다.

“ 맞다. 이건 몽요가 지은 거지.”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다시 약사발을 입으로 가져갔다.

[ 흥!]

그때 귓전으로 몽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그러십니까?]

[ 전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모양이죠?]

[ 보릿자루는 또 뭡니까?]

[ 처갓집에서 꾸어온 보리는 먹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돌려주자니 배가 고프고, 결국 침만 삼키면서 한구석에 처박아 두잖아요.]

[ 그래서 몽요가 보릿자루란 말인가요?]

[피이! 본인이 더 잘 알면서.]

[ 배고픈데 밥 먹으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 뭘 했다고 밥을 먹어요!]

“ 하하하!”

연우강은 멋쩍게 웃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이미 노인들이 내려와 있었다. 그들 또한 아침 몸풀기 운동을 한 듯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 응랑은?”

연우강은 종리웅을 보며 물었다.

“ 그것들을 마차에 싣고 표랑과 함께 떠났습니다.”

“ 그랬군. 그리고 소식 들어온 건 없어?”

“ 여기 있네.”

적리세우가 중지 손가락 길이의 대나무 통을 건네주었다. 대롱을 받아든 연우강은 뚜껑을 열고 둘둘 말린 첩지를 꺼내 펼쳤다.

< 나다.>

첩지를 보낸 사람은 무원이었다.

< 사월림은 파산했다.

잡아 놓았던 사월림이 재산은 전부 동창에 넘겼다.

넌 이번 사기로 일천만 냥을 벌어들였다.

좋으냐?>

“ 좋은 정도가 아니라 기분 째집니다. 영감님. 그런데 이천만 냥이 돼야 하는 거 아뇨?”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첩지를 읽어 내려갔다.

<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제거하기 위한 벌내쟁투가 시작도리 모양이다. 각 문파들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네 부모님들은 잘 계시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특히 네 아버지와 창노는 죽이 척척 맞아서 형님 동생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얼마전 범천뇌격단이 출병했다는 정보를 접했다. 목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너희들을 목표로 움직인 건지 모르니까 잘 대처해라.>

“ 무슨 내용인가?”

목을 길게 빼고 첩지를 쳐다보던 적리세우가 물었다.

“ 내가 떼부자가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범천뇌격단인가 하는 놈들이 우릴 없애기 위해 출병했다는 소식.”

“ 그럼 우리 월급이 올라가는 건가?”

범천뇌격단이 출병했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적리세우는 기대 어린 얼굴로 월급을 들먹였다.

“ 지금 받고 있는 돈이 부족해?”

“ 연 공자 덕에 입고 먹고 자는 게 고급으로 변했다네. 게다가 나이 값 한다고 이리저리 쓰다 보니 간혹 부족할 때가 있네.”

“ 그건 돈이 들어오면 그때 생각해 보자고, 귀노!”

연우강은 염자생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장주님.”

“ 식사 이 인분 주문해서 내 방으로 올려놔.”

“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염자생은 주방으로 향했다.

[ 전 괜찮아요. 우강.]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달라고 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몽요가 전음을 보냈다.

[ 밤 일이 부실하다고 밥도 함께 먹지 않을 생각입니까?]

[ 킥!]

몽요는 픽 웃었다.

원래 아침을 잘 먹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면 먹지 않을 수가 없다.

[ 알았어요, 그런데......]

몽요의 눈에 반짝 광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느닷없이 객잔 주변에서 강한 기운이 감지된 것이었다.

[ 느꼈어요?]

몽요는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 청소하러 온 놈일 겁니다.]

[ 청소라고요?]

벌컥!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객잔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자색 무복을 걸친 그들의 선두엔 남철진이 있었다.

“ 너희들을 살인 혐의로 체포하겠다! 얌전하게 포박을 받아라!”

남철진은 일행을 보며 차갑게 소리쳤다.

“ 처녀가 애라도 낳냐, 아침 댓바람부터 웬 호들갑이야?”

연우강은 남철진을 보며 물었다.

“ 자수보호대 건물에 있는 목 없는 시체들이 너희들 짓이 아니라고 할 테냐?”

“ 대부분 내가 죽인 거 맞는데, 왜?”

남철진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런 경우엔 아니라고 발뺌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녀석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시인을 하고는 ‘왜’라고 묻는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 앉아라!”

연우강은 앞 자리를 가리켰다.

“ 난 널 체포하러 왔다, 연우강.”

“ 말은 똑바로 해, 자식아. 내가 아니고 저들을 체포하러 온 거잖아.”

연우강은 주변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가리켰다.

“ 잘 아는구나, 연우강. 저하께서 살려주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네놈도 저놈들과 함께 체포했을 거다.”

남철진은 연우강 앞자리에 앉았다.

“ 어젯밤에 우리가 몇 명 죽였겠냐?”

연우강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백 명을 죽였더구나.”

“ 너도 알겠지만 그놈들은 율령궁의 잔살단 놈들이었어. 머리가 없는 시체 중에 등에 혹이 있는 그놈이 단주인 마악추 천잔성이야.”

“ 살인을 시인 했으니 체포해도 할 말이 없겠구나. 뭐하고 있느냐?”

남철진은 뒤편에 있는 부하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는 처음부터 연우강을 손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과 함께 다니는 노인들은 얼마든지 체포할 수가 있고, 훌륭한 압박 수단이 될 것이다.

“ 내 말 마저 들어, 새꺄.”

연우강은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 그래도 부하들 앞에서 대장 노릇은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할 말 있으면 해라.”

남철진은 비아냥댔다.

“ 간밤에 살인을 한 우리는 지금 잔뜩 흥분해 있어. 남철진.”

“ 그래서?”

“ 여차하면 다시 검을 뽑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 우릴 없애겠다는 말이냐?”

남철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 백이라는 숫자에 몇 십 정도를 더한다고 해도 크게 표시가 나지 않아.”

“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협박이구나.”

“ 협박이 아니고 살고 싶으면 조용히 꺼지라는 말이야, 그리고 우린 자수보호대 건물에 쉬러 들어갔을 뿐이야.”

“ 쉬러 들어갔는데 그놈들이 쳐들어 왔다는 거냐?”

“ 그럼 천잔성 그놈이 그곳에 있는데 우리가 쳐들어갔을 거라고 보는 거야?”

“ 하지만 넌 살인을 했다.”

“ 정당방위야.”

연우강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 정당방윈지 아닌지는 금의위에서 판단한다. 연우강. 너를 비롯한 저들은 죄인에 불과하다. 체포하라!”

슈캉!

“ 억!”

남철진은 질겁했다. 느닷없이 그의 허리에 있던 검이 뽑혀 나오더니 목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잘려나갈 지경이었다.

창! 창창창!

안쪽으로 들어왔던 금의위 위하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 이럴 때를 일컬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는 거지.”

연우강은 남철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당겨보아라.”

남철진은 연우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물어뜯을 놈이 바로 연우강이기 때문이었다.

“ 단순히 위협용일 뿐 당길 생각은 없어. 남철진. 하지만 저놈들은 얼마든지 없앨 수 있어.”

연우강은 이편을 쳐다보고 있는 금의위 위사를 가리켰다.

“ 할 수 있을까?”

“ 넌 운이 없구나, 위사. 상관이 죽여도 좋다고 허락했으니까 날 원망하지 마.”

휙!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철진 목 앞에 있던 검이 공간을 단축하며 위사를 향해 날아갔다. 위사는 질겁하여 검을 휘둘렀다.

위사의 검은 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 그가 후려치는 검은 살아 있었다. 위사의 검이 날아오는 검을 치려는 순간, 검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사내의 심장으로 박혔다.

푸욱!

“ 커억!”

위사는 멍한 얼굴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피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남철진을 보았다.

스윽!

바로 그때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던 검이 빠져나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쿠웅!

위사는 피를 쏟아내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금의위 위사는 물론이고 말없이 지켜보던 노인들마저도 멍한 얼굴로 연우강과 남철진을 보았다. 마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를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 이젠 어쩔 거야?”

연우강은 남철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 정녕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연우강.”

남철진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북진무사가 하라고 한 일을 했을 뿐인데, 내가 잘못한 거야?”

남철진은 말없이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그러게 여긴 뭐 하러 기어 들어와. 인마. 조용히 잔살단 대원들의 시체만 치우고 떠났으면 아무 일 없잖아.”

“ 이번엔 빠져나가지 못한다, 연우강.”

“ 또 바보 같은 소리 한다. 잘 들어. 남철진. 누군가를 엮어 넣으려면 상황과 여건이 따라 줘야 해.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성숙되지 않았고, 여건도 따르질 않고 있어. 너희들의 유일한 사냥꾼이 난데 내 손발을 묶어버리면 사냥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남경왕이 날 두고 보는 게 아들 친구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는 건 네놈도 알잖아. 날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 빌어먹을 놈의 상황과 여건이 되지 않아서 참고 있는 거야. 즉 내 머리보다는 권력이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라고. 그걸 아는 놈이 왜 그래, 더 이상 있어봐야 너만 초라해지니까 애들 데리고 나가 봐.”

연우강은 손을 휘 저었다.

으드득!

남철진은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의 말이 맞다.

놈은 일이 끝날 때까지는 부려야 할 꼭두각시다.

일이 끝나기 전에 놈을 없앴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욕을 먹게 될 것이다. 사실 이곳에 온 것도 놈을 체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놈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놈에게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 오늘 일 결코 잊지 않을 거다. 연우강.”

“ 참!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여기서 일어난 일은 절대 보고하지 마, 알았지?”

“ 그래도 겁은 나는 모양이구나, 연우강.”

“ 나 때문이 아니고 너 때문이야. 인마. 조직에서 가장 무능한 놈은 임무를 수행하러 가서 부하만 잃고 돌아오는 놈이데, 그놈보다 더 무능한 놈은 부하를 잃었다고 상관에게 보고하는 놈이야. 그런 무능한 놈으로 찍히고 싶지 않으면 주둥이 꼭 닫아걸어. 부하들도 입단속 잘 시키고.”

“ 개새끼.”

남철진은 차갑게 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본전조차 건지지 못한 완전한 패배다. 놈의 말처럼 공연히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미 놈에게는, 남경왕이 권력을 쥘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어 있긴 하지만, 면죄부가 주어진 상황이다. 그런 놈을 협박하려 하다니.

잘못된 판단이었다.

더불어 부하의 죽음을 보고하지 말라는 말도 맞다.

상부에서 보는 위사의 죽음은 시시콜콜한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오히려 연우강보다는 그런 일조차 제대로 처리 못했다면 자신이 욕을 먹게 될 것이다.

“ 오늘 일은 잊어라!”

남철진은 모여든 부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 알겠습니다. 진무사.”

금의위 위사들 또한 남철진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동료를 지키지 못한 것은 그들 책임이었다. 조용히 사건을 덮는 게 상책이었다.

“ 가자!”

다시 한 번 객잔을 흘끔 쳐다본 남철진은 몸을 날렸다.

“ 접니다, 진무사!”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호위인 절패검 관정수가 다가왔다. 이곳에 시체를 치우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금의위 지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 전했느냐?”

“ 시체는 오늘 중으로 치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 특이한 소식?”

“ 연금석과 비슷하게 생긴 자가 대야벌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입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 하급 정보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폐기 직전에 발견한 정본데, 다른 말은 일절 없었습니다.”

“ 어떻게 생각하느냐?”

대답을 기대하며 물은 말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던져본 말에 불과했다.

“ 놈에게 대야벌은 적진이나 다름없습니다. 진무사.”

“ 하지만 누구도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겠지. 심지어는 나도.”

“ 그곳에 있을 거란 말입니까?”

“ 중원에서 금의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나?”

“ 대야벌이란 말이군요.”

“ 맞아, 대야벌이야. 그걸 잊고 있었어.”

남철진은 고개를 돌려 다시 객잔을 보았다.

“ 영악한 놈!”

“ 어떻게 할까요?”

“ 먼저 연금석이 확실한지 확인해서 보고해.”

“ 그대로 두시는 겁니가?”

“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 차라리 그들을 잡아 두고 협박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 그건 남경왕 전하와 상의를 해 봐야 해. 일단 연금석이 맞는지 확이부터 해.”

상관에게 하는 보고는 정확성이 생명이다. 우선은 연금석의 소재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 알겠습니다. 진무사.”

“ 다른 사항은?”

“ 대야벌에 곧 벌내쟁투가 일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답니다.”

“ 생각보다 늦군. 벌내쟁투를 하든 말든 그건 그놈들의 일이니까 신경 꺼. 우선은 술이나 한잔 하고 싶다.”

“ 준비시키겠습니다.”

관정수는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 드디어 네놈의 최대 약점을 잡았다, 연우강. 지금까지는 네놈이 칼자루를 쥐었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쥐게 될 것이다. 이 남철진이 말이다.”

남철진은 차갑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모욕을 줘도 괜찮아요?”

몽요는 밥을 먹다 말고 물었다.

조금 전 상황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상대는 다름 아닌 금의위 최고 권력자인 남철진이다. 그런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위협을 했음은 물론, 부하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뒤탈이 없을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놈은 아직 깃털에 불과합니다. 깃털에 머리를 숙이기 시작하면 몸통은 상대할 수도 없습니다.”

“ 몸통은 남경왕이란 말이에요?”

“ 진짜 몸통은 남경왕 주진무고 그 옆에 서 있는 자들은 금의위 영반 공오인, 구림세가 가주 이연입니다.”

“ 그들 셋이 전부 저이란 말이에요?”

“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 하지만 지금까지 정황으로 보면 적이 될 가능성이 높잖아요.”

“ 지금 우린 남철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몽요.”

“ 아무튼, 괜찮냐고요.”

“ 아직은 제게 손을 댈 입장이 아니니까 괜찮지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때가 아니면 언제 권력자 앞에서 목에 힘을 줘보겠습니까.”

“ 네?”

“ 하하하! 그렇게 심각한 얼굴 하지 마세요. 난 남경왕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 어떤 약속을 했는데요?”

“ 내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놈들은 전부 없애버리겠다고 말입니다.”

“ 남철진이 우강을 쫓아왔다는 거예요?”

“ 내가 언젠가는 잔살단을 없애려 할 거라는 걸 알고 따라 다니고 있었을 겁니다.”

“ 살이 사건이 일어나면 할아버지들을 체포할 생각이었나 보죠?”

“ 그렇습니다. 남경왕이 날 내버려두겠다고 하였으니까 제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르죠.”

“ 우강 주변인들을 체포해서 모욕을 주려고 했는데 무위로 돌아간 거군요.”

“ 권력이 가진 힘은 권력을 쫓는 자에게 통하는 겁니다. 권력을 원하지 않는 자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 하지만 우강에게 강한 무공이 없었다면 당했겠지요.”

“ 그래서 들이대는 것도 잘해야 하는 겁니다. 아무렇게나 들이대면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니까요.”

“ 기루에서 여자를 고를 때처럼?”

“ 갑자기 기루 이야기는 왜 나오는 겁니까?”

“ 백설의 장부를 봤다고 했잖아요.”

“ 그땐 들이댈 필요도 없었습니다. 눈빛만 보내면 서로 따라나서려고 난리법석이었으니까요. 그땐 정말 좋았는데.”

그때를 떠올리듯 연우강은 밥을 먹다 말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콰악!

“ 커억!”

대뜸 눈을 크게 뜨며 비명을 내질렀다. 몽요가 그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꼬집어버린 것이었다.

“ 모, 몽요!”

“ 예의를 지켜주세요. 우강, 머리를 잘랐다고 해도 전 여자라고요.”

“ 그렇다고 이렇게 꼬집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를 떠올리는 법도 없네요.”

“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 사람은 몽요입니다.”

“ 식사 다 했으면 치울게요.”

“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연우강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려 밥을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 이제 동정호로 돌아가는 건가요?”

“ 이제 전쟁의 대미를 장식해야지요.”

“ 동정호로 갈 때 따로 가요.”

“ 저와 함께 가는 게 싫습니까?”

“ 우리 둘만 가자는 거예요.”

“ 침대가 있는 배를 구해서.”

“ 네.”

“ 대환영입니다.”

연우강은 짓궂게 눈을 찡긋했다.

***********

큰일이 일어날 조짐은 사람보다는 짐승이나 벌레가 먼저 알아차린다고 하였던 말은 틀리지 않아다.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사방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랴와야 하는데, 대야벌 전역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마도 머잖아 벌어질 벌내쟁투를 벌레들이 미리 감지하고 피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권력다툼에서 한 발 비켜 서 있는 야장은 달랐다.

“ 허허허! 자네 많이 늘었구먼. 어느새 십 년 공력이 모아졌어.”

나직한 웃음소리가 담을 넘어 흘러나왔다.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는 사람은 창노였다. 그 앞에는 연우강의 가족인 연운상과 연금석 그리고 이숙경이 상기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 십 년 공력이면 빠른 겁니까?”

연금석은 기대어린 얼굴로 물었다.

“ 젊었을 때 보약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맞는가?”

“ 보약이야 수도 없이 먹었지요. 이 사람이 얼마나 보약을 많이 지어왔는지......”

연금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당신이 건강한 체질이었으면 보약을 왜 해 먹여요.”

이숙경은 톡 쏘아붙였다.

“ 그래도 그 덕에 십 년이나 되는 내공을 축기했으니까 오히려 전화위복 아닙니까. 그보다 제수씨는 어떻습니까?”

창노는 이숙경을 보며 물었다.

“ 비슷하겠지요. 뭐. 그런데 이런 걸 왜 하는 겁니까. 시숙.”

“ 꼭 필요해서 하는 것보다는 매일 매일 운기행공을 하게 되면 잔병치레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우강이 그 녀석이 장가갈 때까지는 건강하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엔 연운상을 보았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연금석이나 이숙경과는 다릴 연운상은 약간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 그건 자네 말이 맞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이유가 자승이 녀석에게 배운 호흡법 때문이니까. 그런데 자네 손녀가 이제 열하옵이라고 했는가?”

“ 생일이 십이월 말이라 실제로는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르신.”

“ 열여덟이면 너무 어린 거 아닌가?”

“아이고, 어르신. 나이만 어릴 뿐입니다. 몸은 이미 성숙한 어른입니다. 웬만한 처자들은 운화 앞에 서면 어린애라고 해야 합니다.”

“ 손녀딸이 목욕하는 걸 훔쳐보기라도 한 건가?”

“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르신.”

“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는가.”

“ 사실은 추궁과혈을 해 주었습니다.”

“ 추궁과혈이라면 혈도를 타통시켜 주는 걸 말하는 건가?”

“ 그렇습니다. 녀석이 내공이 워낙 빈약해서 제가 가진 걸 조금 넘겨주었습니다.”

“ 그랬군.”

연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습니까, 어르신.”

“ 하지만 우린 몽요 그 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기로 했네. 그래도 상관없단 말인가?”

“ 그게...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녀석이 좋다는데요.”

“ 그 아이가 우강이 녀석을 좋아한다고 하던가?”

“ 남궁세가가 안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잠룡 십 조를 쫓아간 녀석입니다.”

“ 잠룡 십조를 따라간 이유가 우강이 때문이란 말인가?”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 그놈 참! 재주도 좋네. 알았네. 손녀딸과는 상관없이 자네 의지라면 안 된다고 하겠지만, 그 아이가 우강이 녀석을 좋아한다면 고려해 보겠네.”

“ 고려해 보겠다는 건.”

“ 그동안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지 않나. 인력으로 안 되는 일도 있으니까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세.”

“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리고 이거.......”

창노는 탁자 위에 있던 책자를 연운상에게 내밀었다.

“ 이건 뭔가?”

“ 환영축골공이라고 얼굴을 바꾸는 무공입니다.”

“ 얼굴을 바꾸란 말인가?”

“ 이곳에 갇혀 있으니 갑갑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랬지.”

“ 그걸 익히면 멀리 나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곳 주변에서 소채를 키우는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 정말 못 알아보는가?”

“ 이렇습니다.”

창노는 연운상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환영축골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 근육이 밀가루 반죽처럼 움직이더니 연운상의 얼굴로 변했다.

“ 대단하군.”

연운상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마치 동경을 보고 있는 듯했다.

“ 당장 익혀야겠네.”

연운상은 바로 책자를 펼쳤다.

“ 그런데 십 년의 내공 가지고도 그렇게 하는 게 가능해요?”

보고 있던 이숙경이 물었다.

“ 체형은 바꾸기 힘들겠지만 얼굴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제수씨.”

“ 괜찮은 무공이네요. 그런데 제 내공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 단전에 자리하 덩어리가 어느 정돕니까?”

창노는 이숙경의 맥문을 쥐며 물었다.

“ 덩어리 같은 건 없는데......”

“ 억!”

창노는 깜짝 놀랐다.

“ 왜 그러세요?”

이숙경 또한 덩달아 놀랐다.

“ 이 정도면 거의 일 갑자 수준인데..... 혹시 전에 영약을 드신 적 있습니까?”

창노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이숙경을 비롯한 세 사람에게 전수해준 내공심법은 창궁대연신공의 바탕이 됐던 대연신공이다.

이미 남궁세가에서도 사장된 무공이라 부담 없이 전수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대연신공을 운기한 이숙경의 단전에는 무려 일 갑자에 달하는 내공이 축기돼 있었던 거였다.

“ 저 양반이 먹지 않고 남긴 약을 먹은 적은 있어도, 영약이라고 할 만한 건 없는데....”

이숙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 그거였나?”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 기억나는 거라도 있습니까?”

“ 우강이가 군에서 번 돈으로 지었다며 보약을 지어온 적이 있었어요.”

“ 아, 그거!”

연금석도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보약인지 아십니까?”

“ 그건 저도 몰라요. 다만 약을 복용하면 몸에서 열이 심하게 난다고 하니까, 약효 때문이라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 같아요.”

“ 그럼 그것 때문인 모양입니다.”

창노는 빙그레 웃었다.

사망마제 가립하의 유품과 함께 영약을 얻은 모양이었다. 보통 무공을 익히지 않는 사람이 영약을 복용하게 되면 대부분의 약효는 날아가고 일부만 남게 되는데 그걸 알고 있던 녀석이 배출되는 약효를 줄이기 위해 보약에 섞어 복용시킨 듯했다.

이숙경의 몸속에 일갑자에 달하는 공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복용 방법 때문이었다.

“ 그런데 일 갑자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죠?”

“ 무공을 익히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 날아요?”

“ 일류 고수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 녀석 그런 거면 저나 먹을 일이지. 다시 건네 줄 방법은 없어요?”

“ 그 녀석은 이미 천하제일인입니다. 제수씨, 굳이 넘겨주지 않아도 됩니다.”

“ 제게 필요 없는 걸 가지고 있으면 뭐 하겠어요. 언제 시간 나면 넘겨주는 바업ㅂ이나 가르쳐 주세요.”

“ 아들 녀석이 효도한다고 준 걸 뭐하러 넘겨 줘. 녀석이 소고기 볶음이 물린다고 할 때까지 오랫동안 해주면 되잖아. 입도 뻥긋 하지마.”

“ 그렇다고 해도......”

“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제가 드린 건 열심히 익히십시오.”

“ 알았어요.”

이숙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 나네.”

그때 문 밖에서 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무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잔뜩 굳어 있는 무원의 얼굴을 보며 창노가 물었다.

“ 드디어 시작한 모양이네.”

“ 시작이라면.... 벌내쟁투를 말하는 겁니까?”

“ 그렇네. 곳곳에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네.”

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 벌내쟁투가 뭔가?‘

연운상이 창노를 보며 물었다.

“ 대야벌에 속한 단체들끼리 하는 전쟁을 말합니다. 어르신.”

“ 심한가?”

“ 표적이 된 문파는 멸문합니다.”

“ 쯧! 무에 그리 싸울 게 있다고.”

연운상은 낮게 혀를 찼다.

“ 이번 전쟁을 일으킨 녀석이 우강입니다. 어르신.”

창노는 웃으며 말했다.

“ 우강이 녀석이 전쟁을 일으켰단 말인가?”

연운상을 비롯한 연금석 부부는 화들짝 놀랐다.

“ 그렇습니다.”

“ 그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호남에 있습니다.”

“ 호남에 있는 녀석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연운상은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창노를 보았다.

“ 그래서 제가 그 녀석을 손녀 사위로 맞아들이려고 난리를 치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약속하셨습니다. 어르신.”

창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우린 이곳에 꼼짝 말고 있어야겠구먼.”

“ 마당엔 나와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사돈어른.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창노는 고개를 숙이고는 무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 믿어져?”

창노와 무원이 나가자 연금석은 이숙경을 보며 물었다.

“ 걔가 원래 머리가 좋잖아요.”

“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여긴 대야벌이오, 부인.”

“ 싸움은 머릿수로 하는 게 아닙니다. 서방님. 그리고 날 닮았으니까 그 정돈 충분히 해낼 거예요.”

“ 험! 부인 닮았다는 건 어폐가 있소. 그 녀석은 부인이 아니라 날 닮았소.”

“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서는 전부 날 닮았다고 했답니다. 서방님. 서방님 닮았다고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날 닮아서....”

“ 우강이 녀석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제 할아버지를 빼박았다는 말이다.”

“ 네?”

“ 네?”

두 사람은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운상을 보았다.

“ 클클클! 뭘 놀라고 그러느냐. 난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했을 뿐인데.”

연운상은 책자를 들고 일어났다.

“ 제 아들이에요, 아버님.”

“ 내 손자다.”

“ 젖 물려 키운 사람은 저예요, 아버님.”

“ 아무튼 날 닮은 게 맞으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말거라. 기공!”

연운상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 부르셨는가?”

그러자 기운상이 안으로 들어왔다.

“ 거참! 말을 놓으라니까 자꾸 그러실 겁니까?”

“ 천주님의 조부신데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데 궁금한 거라도 있는가?”

“ 이걸 익혀야겠는데 설명이 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 그거야 쉽지요. 그런데 밖에서 듣자니까 일 갑자의 공력을 지녔다고요.”

기운상이 이숙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 그렇다고 하네요.”

“ 그럼 무공 몇 가지 익혀보시겠는가?”

“ 무공이라고요?”

“ 힘을 써야 할 때나, 빨리 걷고자 할 때는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많네.”

“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면 배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숙경은 연금석을 빤히 보았다.

“ 왜, 왜 날 보는 거요?”

“ 앞으로 잘해요. 당신! 이건, 진심이라고요.”

이숙경은 활짝 웃으며 허공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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