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멈출 수 없는 자들
촛불이 위태로인 깜빡거리는 실내에 네 명의 중년인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있다.
탐스러운 수염이 턱밑까지 내려와 관운장을 연상시키는 자는 황궐의 궐주 구룡금창 공야일우고, 구레낫이 무성하고 왕방울만 한 눈을 가진 자는 금황련의 련주 칠기대장군 남옥, 왜소한 자는 풍운련의 련주 풍사제군 지충일 그리고 문사 차림을 하고 있는 자는 천추림의 림주 천주신장 유일천이었다. 탁자에 놓인 찻잔을 응시하고 있는 네 명의 얼굴은 침울하게 굳어 있었다.
시시각각 목을 조여오고 있는 벌내쟁투 때문이었다.
“ 이틀 후면 동창 소제독 유설연이 도착하게 될 거요.”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구룡금창 공야일우였다.
그를 비롯한 네 명은 벌내쟁투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들이 목표가 됐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은밀하게 준비를 했다. 세 문파의 무인은 황궐로 옮겨와 적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다.
하지만 네 사람은 아직 싸움을 해야 할지 퇴각을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 우리 적은 대야벌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야 궐주.”
금황련 련주 칠기대장군 남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남옥은 이번 벌내쟁투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설사 벌내쟁투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금황련은 와해 직전까지 갈테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게 될 게 뻔하다. 그럴 바엔 밖으로 나가 다시 시작하는게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대야벌을 떠나자는 말이오?”
풍운련의 련주 풍사제군 지충일이 남옥을 보며 물었다.
“ 꼭 떠나자는 말이 아니라 그것도 방안 중의 하나라는 말이외다. 지 련주.”
“ 우리 집은 여기요, 남 련주.”
“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남옥은 말끝을 흐렸다.
이곳이 집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를까. 하지만 상대가 너무 거대하다. 대야벌 전부가 이곳으로 몰려올 텐데, 과연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는지.
“ 나간다면 득보다 실이 더 많습니다. 남 련주.”
나이가 가장 어리면서 유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유일천이 말했다.
“ 어떤 면에서 그렇단 말이오?”
남옥은 유일천을 보았다.
“ 우린 지난 세월 동안 대야벌 벌주 자리를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불어 우리는 황실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곳이 대야벌이기 때문입니다.”
“ 이곳을 나가면 황실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오?”
“ 단절이 아니라 버림을 받게 됩니다.”
“ 우린 네 개 문파의 연합이오. 유 림주. 뭉쳐 있기만 한다면 누구도 우릴 무시하지 못하오.”
“ 하지만 그렇게 끝나겠지요. 변방의 한 세력으로 말입니다.”
“ 유 림주 말이 맞소. 남 련주. 이곳을 나가게 되면 우린 대야벌을 쳐다보며 한숨만 쉬면서 삶을 마감하게 될 거요.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소이다.”
공야일우가 유일천의 말을 받았다.
“ 여기서 승부를 내겠다는 말씀입니까?”
남옥은 공야일우를 보며 물었다.
“ 훗날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소이다.”
“ 우린 훗날을 기약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공야 궐주.”
“ 바로 그 나이 때문이오. 남 련주. 설사 이번 벌내쟁투로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여러본과 나의 후손은 이곳 대야벌에서 살게 될 거요. 물론 쉽지 않은 삶이 될 거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익힌 무공을 익혔고,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네 문파는 벌주 자리를 놓고 다른 문파와 경쟁했던 역사를 기억할 것이오. 그리고 우리가 가졌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오. 그럼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가 있소. 하지만 우리가 대야벌을 나가게 되면 우리 후예들은 현실에 안주하고 말 거요. 난 그들에게 계속 꿈을 꾸도록 해주고 싶소.”
대야벌을 떠난다는 것.
말은 너무 쉽다. 아니 다른 사람이 보면 왜 그렇게 대야벌에 집착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야일우는 대야벌을 떠날 수가 없다.
그는 대야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벌주가 되는 꿈을 꾸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백대고수 서열 일 위에 오르면서 벌주의 꿈을 꾸었다.
대야벌은 그 자체가 그의 삶이었던 것이다.
“ 내게 대야벌은 무림 세력이 아니라 삶이오. 남 련주. 설사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난 떠날 수가 없소.”
“ 잘 알았소이다. 련주. 내 생각이 짧았소이다.”
남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말이 맞다. 지금 당장 위험하다고 하여 이곳을 떠나게 되면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은, 과거 황천이 그랬던 것처럼 대야벌의 역사에서 지워질 것이다.
아니 장차 대야벌의 적이 돼, 대야벌 체재 유지를 위한 희생양이 될 것이다. 지난 일천 년 동안 팔황새가 당해왔던 것처럼.
하지만 이곳에 무덤 자리를 만들게 되면 후손은 그 무덤을 보면서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선대가 이루지 못했던 벌주의 꿈을.
“어떻게든 이틀만 버텨 봅시다. 그가 오면 뭔가 수가 생기겠지요. 자, 작전을 다시 점검해 봅시다.”
공야일우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의 손에서 서너 개의 지풍이 연속적으로 쏘아지고 그것들은 벽면에 있는 촛불에 불을 밝혔다.
삼매진화를 지풍으로 변화시킨 고도의 수법이었다.
실내가 환해지자 공야일우는 둘둘 망라 한편에 치워두었던 종이를 펼쳤다. 그것은 황궐 주변을 그려놓은 개략적인 지도였다.
황궐은 하늘 천 자의 맨 위쪽 한 일 변 중앙에 위치해 있다. 정북으로는 천상천이 있고, 서쪽에는 풍지림에 둘러싸인 야궐이, 동쪽에는 검지곡을 내려다보는 무궐이 있다. 정남으로는 승천곡이 있으며 승천곡이 끝나는 지점 좌우 측으로 묵야련, 철무련, 구중련, 금황련, 풍운련, 군마련, 녹사련의 일곱 개의 련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천상천을 포함하면 황궐은 열 개의 세력에 둘러싸인 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벌내쟁투가 시작되면 놈들은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몰려올 거요.”
공야일우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적을 맞이할 준비는 진작 끝났다.
남쪽을 맡고 있는 천추림은 천오백 명의 무인을 동원하여 대혼천파멸진세를 구축하고 있다.
서쪽에는 금황련의 반천역행만마진이 구축돼 있는데 참가 인원은 천추림과 마찬가지로 천오백 명이다. 북쪽은 풍운련이 맡았고, 천오백 명으로 대폭풍화륜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동쪽을 맡은 문파는 황궐이다.
삼백육십회회겁륜진.
삼백육십 명을 기본 단위로 하는 진식으로 황궐이 지닌 최고의 방어진임과 동시에 공격 진식이다. 그 진식 일곱 개가 동쪽 외곽에 구축돼 있다.
“ 문제는 그들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부터요.”
“ 단순하게 방어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유일천이 지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 방어만 했다가는 이틀을 버틸 수가 없네. 유 림주.”
“ 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 반격을 생각하고 있네.”
“ 반격이 가능할 거라고 보십니까?”
“ 우린 각 문파 당 오백 명의 여유 병력을 두었네. 그들을 이곳으로 보낼 참이네.”
공야일우는 각 문파를 손가락으로 짚어나갔다.
“ 여유 병력을 전부 합친다고 해도 이천 명에 불과합니다. 궐주.”
“ 우릴 공격해 올 문파는 크게는 야궐, 묵야련, 사자림, 사해림의 벌주파와 군마련, 철무련, 만마림, 사월림의 담대천호가 이끄는 파벌, 무궐, 구중련, 녹사련, 낭인림의 공손정우가 이끄는 파벌 세 곳이네. 그들 중에서 사월림과 만마림을 빼면 문파는 열 곳으로 줄어드네.”
사월림과 만마림은 유설연이 이곳으로 오면 끝장날 문파들이라 설사 자신들의 문파가 공격당한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을 자들이라 일단은 제외시켰다.
“ 이백 명씩 분할하여 공격하잔 말입니까?”
“ 그래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네. 우린 힘을 집중해 한 곳을 쳐야 하네.”
“ 어딜 친단 말입니까?”
“ 여기네.”
공야일우는 군마련을 짚었다.
유일천은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열 개 문파에 포위된 상태인 황궐이 불리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공격하고 있는 여덟 개 문파 중 아무 곳이나 골라 반격을 할 경우엔 오히려 유리한 지형이었다.
“ 군마련을 치게 되면 담대천호는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시켰던 병력을 철수해야만 하고, 그가 철수를 하게 되면 철무련도 덩달아 철수하게 될 거네.”
“ 그럼 우리를 공격하던 곳 중 한 곳이 비겠군요.”
유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가 노려야 할 때는 그 때네. 우리 넷 중 담대천호와 싸우게 될 사람이 누가 될지 아직 모르지만 담대천호가 빠져나간 쪽에 있는 사람은 누가 됐든 병력을 이끌고 직진해야 하네.”
“ 직진이라면?”
“ 지도를 보게. 북쪽을 맡고 있는 풍운련을 빼면 나머지 세 방향은 직진하면 각 문파로 가게 돼 있네. 금황련은 야궐과 마주 본 상태고, 우리 황궐은 무궐과 마주 보고 있네. 그리고 천추림은 천좌산을 넘어가면 곧바로 구중련이 있고.”
“ 그렇군요. 병력을 바로 이동시켜 놈들을 공격하고 이곳을 공격하는 자들이 쫓아오면 그땐 몸을 빼서 다른 문파를 치면 되겠군요.”
유일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군마련을 공격하던 이천 명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무궐을 친다면 공손정우 또한 황궐을 공격하던 병력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을 테다.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아니 지금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작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지금껏 벌내쟁투가 한 문파를 대상으로만 이루어진 이유가 그 때문이네. 적어도 세 문파 이상이 힘을 합치면 쉽지가 않다네.”
대야벌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였다.
큰 틀로 보면 대야벌은 하나지만 그 틀 안으로 들어가면 이십 개의 무림 세력으로 분리돼 있고, 그들은 별개다. 지금처럼 벌내쟁투가 벌어지면 공격하는 자들은 하나로 뭉치지만, 공격하던 문파 중 한 문파가 반격을 당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벌내쟁투에 참가하는 것도 반격해 오는 자들을 없애는 것도 철저하게 자신들이 책임져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대야벌이다.
“ 좋습니다.”
서롤르 쳐다보는 네 명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이틀.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잘만 하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 서두릅시다.”
공야일우는 오른편 구석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휙! 소리와 함께 구룡금창이 손 안으로 빨려들어왔다. 네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진식에 참여하지 않은 무인 이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곁으로 다가간 네 사람은 조금 전 결정한 작전을 빠르게 전달했다. 그렇게 일 각 정도가 지나고 작전을 숙지한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행운을 빌겠다.”
“ 궐주님도!”
“ 림주님도!”
“ 련주님도!”
“ 돌아와서 뵙겠습니다.”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어둠을 뚫고 몸을 날렸다.
“ 우리도 시작합시다.”
무인들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공야일우는 세 명을 보며 말했다.
“ 일 각 후에 불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게 해주시오. 행운을 빌겠소.”
“ 행운을!”
“ 행운을!”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한 후 각자가 맡은 장소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황궐 동쪽 끝에 도착한 공야일우는 삼 장 높이로 쌓아 올린 성벽 위로 올라갔다.
남쪽은 검지곡이고, 그 너머에는 천우산이 있다. 그리고 전면에는 나무와 바위가 난마철머 어우러져 있다. 저 안에 이천오백여 명의 황궐 무인이 일곱 개의 삼백유십회회겁륜진을 펼치고 있다.
“ 쉽지 않을 거다. 담대만승.”
공야일우는 천상천 쪽을 쏘아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 불을 밝혀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일제히 횃불에 불을 붙였다. 성벽 위와 아래쪽 그리고 각 건물에 불이 밝혀지자 황궐 서쪽 하늘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쪽에 이어 남쪽과 동쪽 북쪽 하늘이 동시에 환하게 밝아지면서 황궐은 불빛으로 둘러싸인 형국이 됐다. 공야일우가 밤을 밝힌 이유는 군마련을 공격하기 위해 황궐을 빠져나간 별동대 이천 명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밝혀진 강렬한 불빛은 시선을 끌게 되고 그사이에 이천 명의 별동대는 검지곡으로 이동하여 천우산을 넘어 군마련으로 가게 될 것이다.
“ 이제 시작이다.”
공야일우는 구룡금창을 불끈 틀어쥐었다.
적의 이목을 끌어들이기 위해 불빛을 사용한 공야일우의 작전은 맞아떨어졌다. 황궐에 피운 불빛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세력은 살수로 이루어진 사월림이었다.
사월 양도옥을 비롯한 사월림 살수가 은신해 있는 곳은 황궐 남쪽에 있는 승천곡이었다.
“ 빌어먹을!”
양도욱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늘 그래왔듯이 벌내쟁투는 달이 없는 그믐날이나 구름이 잔뜩 낀 날 이루어진다. 오늘 역시 하늘엔 달도 별도 없다. 공격을 하기엔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 날인 것이다.
“ 어쩌다가......”
양도욱이 이렇듯 한숨을 내쉬고 있는 이유는 벌내쟁투 때문이 아니었다. 벌내쟁투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의 처지 때문이었다.
별것 아니었던 청부.
그 청부를 맡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청부자가 보증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도 기꺼이 내주었고, 관부를 공증인으로 세우는 것도 흔쾌히 수락했다. 아니 청부자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믿을 만한 공증인은 관부였다.
청부자는 관부에 일천만 냥을 맡기고, 자신은 일천만 냥에 상응하는 부동산 문서를 맡겼다. 원래는 실패했을 경우 이천 만냥을 배상해야 하는데, 모든 부동산을 통틀어도 일천만냥 가치밖에 되지 않았다.
청부자 또한 그 정도면 상관없다고 하여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관부에 맡겼던 문서가 통째로 팔려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직 기간이 남았다고 항변을 해보았지만 공증을 맡았던 자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놈들 또한 청부자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보상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결국 그 건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이고 사월림은 내일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파산의 상처는 뼈아팠다.
유설연을 피해 도망을 치고 싶어도 자금이 없어 나갈 수도 없다. 그때 손을 뻗어온 자가 군마련 련주 담대천호와 무궐 궐주 공손정우였다.
“ 연우강!”
양도욱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황궐을 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불빛 속에서 연우강 놈이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접니다. 림주님.”
그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운자준이 다가왔다.
“ 시작인가?”
“ 그렇습니다. 림주님.”
“ 그럼 시작해야지. 출발시키게.”
양도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알겠습니다. 림주님!”
휘이익! 휘이익! 휘이익!
곧이어 운자준의 입에서 세 번의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오고, 조용한 움직임이 일었다. 마치 어둠이 밀려오는 것처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살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편에 있던 만마림 무인들도 그들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둥! 둥! 둥둥! 둥둥!
약 삼백여 장 가량 이동했을까, 황궐로부터 북소리가 들려오며 삼엄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고돌았다.
“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승천곡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공격하라!”
“ 시작하라!”
“ 놈들을 지워라!”
사방에서 벌내쟁투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 들려오고 진득한 살기가 승천곡을 가득 채웠다.
“ 아악!”
“ 으악!”
“ 크아악!”
그리고 살기로 들어찬 틈을 비집고 비명이 파고들었다.
“ 공격하라!”
“ 시작하라!”
“ 공격하라!”
남쪽을 맡은 만마림과 사월림이 먼저 시작하고 서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에서도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 우와!”
“ 와아!”
“ 우와아!”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무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황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쟁이 시작된 대야벌과는 달리 이제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호남에서 하오밀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율령궁이었다.
꽈앙!
둔탁한 소성과 함께 대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도검을 소지한 무인 대여섯 명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내들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방문을 막아섰다.
저벅! 저벅! 저벅!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뒤늦게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율령궁의 삼대 고수 일인이자 천살단 단주를 맡고 있는 새혼권 이청문이었다.
덜컹!
그때 방문이 열리고 반백의 머리를 한 노인이 나왔다.
“ 누구시...”
“ 전부 끌어내라!”
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청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존명!”
무인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이어 먼저 문을 열고 나왔던 노인을 비롯하여 십여 명이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 왜 그러시오? 누구십니까?”
노인은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 유정열 맞느냐?”
“ 그, 그렇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아들이 마장 유불리 맞느냐?”
“ 마장인지는 모르지만 유불리는 맞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습니까?”
“ 아주 큰 일을 저질렀다. 노인. 아니 죽을 죄를 졌다.”
“ 죽을 죄라니 ... 그게 무슨.....”
“ 대야벌에 대항한 죄다.”
“ 우리 아들은 객잔을 운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야벌에 대항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요.”
“ 그건 나중에 네 아들에게 물어보거라. 아들을 잘못 키운 죄는 부모가 대신 받는 건 당연하다. 시행하라.”
“ 존명!”
천살단 한 명이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천살단 무인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자 유정열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검 손잡이를 잡았던 천살단 대원은 움찔했다.
“ 뭐 하고 있느냐?”
“ 조, 존명!”
이청문이 일갈하자 천살단 무인은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고 노인의 목을 향해 내리그었다.
“ 크아악!”
“ 여보!”
“ 아버지!”
“ 할아버지!”
바들바들 떨고 있던 가족들이 일제히 유정열을 향해 다가들었다. 아니 다가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싸늘한 기운이 그들의 사지를 옭아매고 있었던 거였다.
“ 넌 아비를 잘못 둔 죄다.”
차가운 눈으로 유불리 가조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청문의 시선이 열다섯 가량 돼 보이는 소년의 얼굴에서 멈췄다.
아직 치기가 남아 있는 소년은 유불리의 장남 유청이었다.
“ 사, 살려주십시오.”
소년은 부들부들 떨며 어머니 곁으로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이 몸은 땅바닥에 붙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청아!”
유불리의 부인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아들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유청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 부탁입니다. 나리. 제발 살려주십시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아니 저를 죽여주십시오. 아들 대신 저를 죽여주십시오.”
유불리의 부인은 눈믈을 펑펑 쏟아내며 애원했다.
“ 나를 악마로 만든 사람은 바로 네 남편이다. 네 남편을 원망해라. 시행하라.”
이청문은 차갑게 소리쳤다.
“ 존명!”
이미 피를 봐 익숙해진 탓일까. 이번엔 이청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왼편에 있던 천살단 무인이 검을 뽑아 유청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 아악!”
처절함보다는 구슬픔이 더 많이 묻어 있는 비명이 작은 집을 감싸고돌았다. 유불리의 가족은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닥쳐온 불행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머리는 밖으로 내놓고, 나머진 호송하라! 그리고 집은 태워라!”
이청문은 차갑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천살단 대원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유불리의 아버지와 아들의 몸통은 집안으로 던져 넣고 머리를 밖으로 내놓은 다음 가족들의 혈도를 눌러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고는 집에 불을 질렀다.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집은 무섭게 타올랐다.
이청문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어쩔 수가 없다. 연우강. 우린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아니 이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난, 이번 일에 내 목과 재산을 전부 걸었다. 연우강!”
이청문은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 장일선 집으로 간다!”
이청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살기를 차곡차곡 쌓았다가 토해낸 듯 차가웠다.
< 제 13권 끝>
황금 백수 1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