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30화 (130/232)

제 3장 만남

가족들의 죽음과 납치.

그 사건이 가져온 충격은 엄청났다.

하오밀문 수뇌들은 망연한 얼굴로 앉아,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을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탁자 위를 수북하니 적셨다.

연우강은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하오밀문 수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연우강의 시선이 허일구에게로 향했다.

허일구 역시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 결정되면 알려줘.”

결국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무슨 결정을 말인가?”

허일구는 초점 없는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죽을 건지, 살 건지. 결정되며 알려달라는 거야.”

“ 잔인하군.”

“ 뭐가 잔인하다는 거지?”

“ 최소한 위로의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 내가 위로의 말을 하면 죽은 가족들이 돌아올까? 아니 가족이 어디로 납치됐는지 알 수 있을까? 우린 아무것도 몰라. 달라질 게 없단 말이야.”

“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했네.”

“ 그건 말 만들기 좋아하는 새끼들이 지어낸 말일 뿐이야. 영감. 기쁨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자랑하고, 그 말을 들은 자들이 부러워했을 때 배가 되는 거야. 그리고 지독한 슬픔은 누군가 위로를 해준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아. 슬픔은, 슬픔일 뿐이야.”

연우강은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 어딜 가는가?”

“ 숨도 돌리지 않고 왔잖아. 쉬어야지.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들 있으라고.”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본관 건물을 나서 곧바로 별관으로 향했다.

“ 어서 오세요.”

별관으로 들어가자 수여설이 그를 맞았다.

수여설을 비롯한 잠룡들이 이곳 장화루로 오게 된 것은 율령궁 상부에서 내려온 철수 명령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배로 온 율령궁 감찰사자는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작전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는, 어디로 철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장소를 물었다. 하지만 평소 집행사자들에게 감정이 있었던 듯,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면서 직접 들으라는 말을 남기고 감찰사자는 떠나고 말았다.

그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은밀하게 배를 가라앉히고 장강 남쪽으로 나갔다.

그런데 노구포 동서남북을 치밀하게 포위하고 있던 율령궁 무인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 동정호로 왔다.

전에 머물렀던 화선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곳엔 이미 담대무궁이 이끄는 잠룡대 대원들이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정호에서 가까운 객잔에 들어와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 돌아온 잠룡들은 있어요?”

가문으로 떠났던 잠룡들에 대해 묻는 말이다.

“ 아직은 없어요.”

수여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문으로 간다며 떠난 잠룡들은 저눕 스물여덟 명의 잠룡들은 아직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 무시했으면 좋겠는데......교랑은 어디 있습니까?”

“ 적랑 일행이 악양루를 구경시켜 달라고 해서 데리고 나갔어요.”

“ 촌놈들, 악양루에 뭐 볼 게 있다고.”

“ 그럼 저도 촌년이네요.”

“ 안 가봤어요?”

“ 가 봤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 하긴 갈 시간이 없었겠네요. 함께 갈래요?”

“ 좋기는 한데.......”

수여설은 계단 위로 시선을 주었다.

[언니, 잠깐 올라와요.]

그때 귓전으로 남궁운화의 전음이 들려왔다.

[ 올라오라고?]

[ 잠깐만 왔다가 가요.]

[ 아, 알았어.]

“ 잠깐 올라갔다 올게요.”

수여설은 계단으로 뛰어올라 남궁운화와 몽요가 머물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 왜 그래요?”

“ 목욕은 했어요?”

“ 아침에 했는데.... 왜요?”

“ 그럼 이거 입어요.”

남궁운화가 가리킨 침상에는 연녹색의 옷이 펼쳐져 있었다.

“ 옷을 갈아입으라고요?”

“ 그렇게 하고 나갈 수는 없잖아요.”

남궁운화는 수여설의 옷을 턱으로 가리켰다. 수여설은 검은 무복을 걸치고 있었던 거였다.

“ 하지만 지금 하오밀문은 초상집인데......”

“ 남궁 가주 말대로 하세요. 수 소저. 옆집에 초상이 났다고 해서 함께 식음을 전폐할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이 옷은 화려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 그래도.....”

“ 잔말 말고 입어요. 언니.”

남궁운화가 달려들어 수여설의 옷을 강제로 벗겨냈다.

“ 아, 알았어요. 가주. 내가 벗을게요.”

수여설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침상에 놓여 있던 옷을 걸쳤다.

“ 이제야 좀 여자답네.”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바지 대신 치마를 걸친 수여설은 수수한 듯 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뽑냈다.

“ 괘, 괜찮아요?”

수여설은 어색한 듯 제 모습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만에 치마를 입어보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니 속곳 위에 바로 치마를 입으니 마치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 파릉전어석을 사달라고 하세요, 언니!”

“ 파릉전어석이 뭐죠?”

“ 동정호 명물이에요. 배를 타고 나가서 먹는 파릉전어석은 맛이 이거예요.”

남궁운화는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 그렇게 맛있어요?”

“ 일단 드셔 보세요.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남궁운화는 수여설의 등을 떠밀었다.

수여설은 여전히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며 밖으로 나갔다.

“ 예쁩니다. 수 소저.”

연우강은 수여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괜찮을까요?”

“ 하오밀문 때문에 그래요?”

“ 그것도 있고, 잠룡들도 가족을 잃었잖아요. 공연한 짓을 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 전투는 함께 치르지만 슬픔은 각자의 몫입니다. 남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대신 해서도 안됩니다.”

“ 함께 슬퍼하면 안된다는 건가요?”

“ 네.”

“ 왜죠?”

“ 남은 사람은 전쟁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는 최대한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두고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부대장을 비롯해서 부대원이 이성을 잃게 되면 남는 건 전멸 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이성과 냉철함으로 임하는 겁니다. 분노는 결코 승리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 어렵네요.”

수여설은 고개를 저었다.

“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는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술을 마시고, 여자를 안고 싶으면 기루로 가서 처박히고, 글을 좋아하는 미친놈들은 책을 보면 되고, 죽고 싶은 놈들은 생사결을 하면 됩니다.”

“ 그래야 다음 전투에서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 죽어도 후회가 남지 않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 전투가 끝나고 다시 술을 마시고, 기녀를 안고, 글을 읽고, 생사결을 해야 하니까요.”

“ 소박하군요.”

“ 전쟁터에서는 그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만 나갈까요?”

“ 알았어요.”

두 사람은 객잔을 나섰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듯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갔다.

“ 우릴 유인하려고 한 짓일까요?”

여태 전쟁 상황을 떨쳐내지 못한 수여설은 다시 납치 이야기를 꺼냈다.

“ 그럴 겁니다.”

“ 어떻게 알았을까요?”

“ 수뇌들의 신상을 말하는 겁니까?”

“ 하오밀문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돼 있잖아요.”

감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직 언급한 사람은 없었지만 하오밀문 수뇌들의 신상이 노출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수뇌 본인이 아니고 가족이.

“ 수뇌들 중 한 명이 빠져 있었습니다.”

“ 하오밀문 수뇌들 중 빠진 자가 있었다고요?”

“ 산발 남광일이란 잔데 정보를 담당한 자였습니다.”

“ 그럼 그가 배신했다는 말이에요?”

“ 적에게 당했는지 배신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회의에 나오지 않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 만일 배신했다면 지금껏 연 공자가 세웟던 작전은 어떻게 되는 거죠?”

“ 그대로 진행됩니다.”

“ 진행된다는 건?”

“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작전은 항상 배신자를 염두에 두고 세워야 합니다. 수 소저.”

“ 누군가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 팔자를 바꿀 수 있는 유혹이 온다면 거절하기 쉽지 않은 게 인간이니까요.”

“ 그럼 대책도 이미 세워두었겠네요?”

“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옷을 갈아입은 거예요?”

연우강은 수여설을 빤히 보았다.

“ 그,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요.”

“ 남자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라는 건 책에 나와 있지 않았던 모양이죠?”

“ 무슨 소리죠?”

“ 전에 그랬잖아요. 남녀 관계를 책으로 배웠다고.”

“ 연 공자!”

수여설은 붉어진 얼굴로 연우강을 흘겼다.

“ 하하하! 일 이야기는 이제 그만. 갑시다.”

연우강은 수여설의 손을 덥석 쥐고는 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를 달렸을까. 멀리 고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 저기만 넘어가면 동정호입니다.”

연우강은 더욱 속도를 냈다.

바로 그때였다.

“ 얌전하게 포박을 받으시오. 그럼 당신을 죽이는 일은 없을 거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런 나쁜 새끼!”

수여설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잠룡대의 대주 담대무궁이었던 것이다. 모처럼 연우강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잠룡대 대원들 때문에 마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 다른 곳으로 가면 되잖습니까?”

성벽 아래로 내려선 연우강은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 악양루에는 적랑 일행이 있잖아요.”

“ 그 녀석들은 도망치는 덴 선숩니다. 상대가 안 된다 싶으면 도망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연우강은 사마윤 일행과 잠룡대 대원드과 시비가 붙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사마윤 일행은 원하지 않으면 싸움을 피할 정도로 경험도 많다. 걱정할 이육라 없었다.

“ 대야벌이란 단체가 나 제석강을 핍박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하단 말인가?”

연우강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제석강, 그는 다름 아닌 천마의 본명이었다.

“ 왜 그래요?”

“ 그잡니다.”

“ 그자라니요?”

수여설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저 때문에 세상에 나온 사람입니다.”

“ 연 공자.”

수여설의 숨결이 또다시 거칠어졌다. 수여설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천마 제석강이란 말입니다.”

일순 수여설은 멍해졌다.

천마 제석강.

그는 무려 천오백 년 전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 정말요?”

수여설은 여전히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 그렇습니다. 방금 그자는 고금제일인이면서 마도의 전설인 천마 제석강입니다.”

“ 그 말 믿어도 되는 거예요?”

“ 믿어도 됩니다. 일단 잠룡들부터 구하고 보자고요.”

연우강은 수여설의 손을 잡은 채 몸을 날렸다. 성벽 위로 올라서자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잠룡들이 모여 있는 곳은 악양루 근처였다.

천마 제석강으로 보이는 자와 일행 한 명은 잠룡대 잠룡들에 의해 포위된 형국이었고, 사마윤 일행은 악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절 데리고 가 주십시오. 수 소저.]

[ 연 공자가 상당한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대부분 눈치 채고 있을 겁니다.]

[ 확실히 아는 것과 상당한 무공을 익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천지 차이입니다.]

[ 풋! 알았어요.]

수여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우강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렸다. 연우강은 잠능패혈대법을 끌어올려 이 할 정도의 내공을 남기고 나머진 전부 폐쇄시켰다.

수여설과 연우강이 날아오자 잠룡대 대원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 세월 좋네요.]

연우강임을 알아차린 이지약이 전음을 보냈다.

[ 좋은 세월을 망친 장본인이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연우강은 이지약을 향해 눈을 찡긋 했다.

[ 좋은 분위기를 우리가 망쳤다는 건가요?]

[ 수 소저 옷을 보세요. 화선을 타고 파릉전어석을 먹을 참이었단 말입니다.]

[ 호호호! 전 오히려 즐거운 데요?]

[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닙니다. 이 소저가 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운 자니까 물러서에요.]

[ 무슨 소리죠?]

[ 무림사 이래 가장 강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연우강과 수여설은 잠룡대 대원들 삼 장 거넌편으로 내려섰다.

[ 무림사 이래 가장 강한 사람이라면?]

[ 천마 제석강 본인입니다.]

[ 정말이에요?]

수여설과 마찬가지로 이지약 또한 질겁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주변에 있던 대원들이 그녀를 쳐다볼 정도였다.

[ 천년마인이라고 아십니까?]

[ 무, 물론 알죠. 천마삼가으이 하나... 그럼 저자가?]

[ 그렇습니다. 공연히 잠자는 사자 코털 건드리지 말고 물러나세요.]

[ 저와 구림세가 잠룡들은 물러나겠지만 다른 잠룡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 담대무궁 때문에?]

[ 그래요. 연 공자. 담대무궁은 지금 사면초가에요. 저 사람을 잡아야 할 급박한 상황이라고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담대무궁은 연우강의 등장이 못마땅한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천마 제석강을 잡을 생각을 한 것은 노구포에서 집행사자를 공격한 사건 때문이었다. 물론 쌍방의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기는 하지만, 능력 부재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하다. 그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혜성처럼 등장하여 강호 무인들을 없애고 다니는, 자칭 천마라는 자를 생포하여 대야벌로 끌고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연우강 놈이 나타난 것이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 네놈이 여긴 웬일이냐?”

담대무궁은 차갑게 물었다.

“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거든.”

“ 누굴 만나기로 했다고?”

“ 그래 인마. 여기서 기다리기로....... 아 저기 있네.”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강의 시선이 한가운데 서 있는 제석강에게서 멈췄다.

“ 아이고, 형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한참을 찾았습니다.”

연우강은 잠룡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며 반갑게 소리쳤다.

“ 엉?”

“ 어?”

“ 응?”

잠룡들은 일제히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지금껏 쉬지 않고 천마 제석강을 쫓아왔다. 그런데 형님이라니.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이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천마 제석강이었다.

워낙 과묵한 성격이고, 어지간한 일에도 놀라는 성격이 아니라 얼굴엔 어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지만 내심은 사뭇 달랐다.

패천림을 나선 지 수 개월.

이곳까지 오면서 한 거라고는 싸움밖에 없었다.

대부분이 가타부터 설명도 없이 죽이려 들었는데 처음으로 호의적인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대뜸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 화선이 있는 곳에서 만나자고 했으면 그곳으로 오셔야죠. 참 형님은 악양루가 처음이지 악양루는 나중에 설명해드릴 테니까 우선 화선을 타러 갑시다.”

연우강은 제석강의 손을 덥석 쥐고 끌어당겼다.

“ 화선?”

“ 동정호에서 손님을 태우고 떠다니면서 영업하는 배를 말합니다. 그 화선을 타고 모대주에 파릉전어석을 밧봐야 동정호에 왔다 갔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 파릉전어석은 요리를 말하는 겐가?”

“ 그렇습니다. 형님. 무려 열일곱 종류의 물고기로 만든 스무 가지의 생선 요리를 말하는 겁니다. 동정호에 들르면 반드시 먹어봐야 할 요립니다. 가시죠.”

“ 저들은 어떻게 할 참인가?”

“ 혈잔수 한 방이면 가루로 흩어질 피라미들입니다. 죽여봐야 손만 더럽힐 텐데 너그럽게 용서하고 그냥 가시지요.”

‘ 응?’

혈잔수란 말에 제석강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혈잔수 한 방이란 말은 곧 천마 제석강이란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문득 어떤 녀석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 파릉전어석이 맛이 없으면 어떻게 할 테냐?”

“ 그럼 요리를 한 녀석을 물고를 내야지요.”

“ 하하하! 그렇구나. 요리를 산 사람이 아니라 요리를 만든 녀석 잘못이지. 좋다. 가서 한잔 하자꾸나.”

천마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갈 수 없다. 연우강!”

담대무궁이 연우강 앞을 막아섰다.

“ 그건 네 생각이고 다른 잠룡들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지 않아?”

연우강은 담대무궁을 빤히 쳐다보았다.

“ 잠룡들의 의견도 나와 같다. 저들은......”

“ 난 물러나겠어요. 담대공자.”

담대무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지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소리요, 이 소저.”

“ 난 처음부터 이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소문만으로 한 사람을 매장하려고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저자는 본인 입으로 천마 제석강이라고 했소이다.”

“ 천마 제석강 아니라 부처님이나 원시천존이라고 해도 우리가 나설 일은 아니지요. 설사 무법 천지에서도 특정인을 사칭했다고 해서 그를 잡아 가두는 법은 없어요. 나는 물론이고 사 조는 빠질 거예요, 물러서요.”

이지약은 대원들에게 말하며 악양루 쪽으로 물러났다.

“ 조장 직위를 박탈할 수도 있소, 이 소저.”

“ 나도 물러나겠소. 일 조는 물러나라.”

일 조 조장인 사유성이 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뒤편으로 물러났다.

“ 나도 물러나겠소.”

“ 나도.”

이어 이 조와 삼 조 조원들이 물러나고 연우강과 제석강 주변에는 담대무궁과 그를 따르는 자들만 남았다.

“ 나도 물러날 수밖에 없겠군.”

이번엔 윤허가 뒤로 자리를 피했다.

“ 넌?”

연우강은 줌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담대무궁의 시선이 연우강의 손이 들어간 줌버니로 향했다.

“ 개자식!”

저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녀석의 손이 들어간 주머니가 불쑥 튀어나와 있다. 놈에게 두 번이나 당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그 십뢰가 분명할 터였다.

“ 계속 서 있으면 대가리에 구멍이 날 거야. 담대무궁.”

“ 넌 십뢰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놈이었느냐?”

모욕을 주면 주머니에서 손을 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도발을 해보았다. 손을 빼는 순간 곧바로 제압할 참이었다.

“ 응! 이 손은 절대 빼지 않을거야.”

연우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비열한 자식.”

“ 패거리로 몰려와서 두 사람을 공격하는 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저들은 죄인이다, 놈!”

“ 무슨 죄를 지었는데?”

“ 감히 이세 천마를 자칭했다. 그것만 해도 죽어 마땅하다.”

담대무궁은 버럭 소리쳤다.

“ 형님이 이세 천마라고 해서 네게 피해 준 거 있어? 아니 강호 무림이 피해 받은 거 있으면 말 좀 해봐라.”

“ 벌써 백여 명 가까운 무인들이 저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놈!”

“ 야! 자식아. 형님이 그놈들을 찾아가서 죽였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찾아와서 죽여 달라고 목을 디밀었잖아. 그것까지 책임져야 하는 거야? 제발 부탁인데 남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해라. 지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 누굴 위한다고. 진짜 나라를 위하고 강호 무림을 위하고, 양민들을 위해 살고 싶으면 전쟁터로 나가, 인마! 갑시다, 형님.”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담대무궁을 비롯하여 그 곁에 있던 잠룡들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잡지 못했다. 다만 주먹을 불끈 틀어쥔 채 연우강의 등을 보려보고 있었다.

[ 어디 가는 거죠?]

연우강을 지켜보던 이지약이 전음으로 물었다.

[ 방금 듣지 못했습니까?]

[ 정말 파릉전어석을 안주로 모대주를 마실 참이에요?]

[ 원래 한가락 하는 양반들과는 친분을 쌓아두는 게 좋습니다.]

[ 모대주는 저도 좋아하는데.]

[ 당분간은 바쁩니다. 이 소저.]

[ 옆에 있는 수 소저 때문에?]

[ 수 소저 때문이 아니고 하오밀문 수뇌들의 가족이 전부 납치됐거든요.]

[ 정말요?]

[ 그렇습니다. 앞으로 며칠 간은 정신없이 바쁠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범천뇌격단을 상대해야 하고요.]

[ 버, 범천뇌격단까지 잠룡 십 조를 노리고 나왔다는 말이에요?]

[ 노구포에서 놈들을 맞이할 참입니다.]

[ 도와달라는 거예요?]

[ 집행사자들을 없앴을 때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면 될 겁니다.]

[ 제가 집행사자를 공격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 그 정도를 모르면서 어떻게 황금백수의 꿈을 꿉니까? 아무튼 바람 부는 날 뵙도록 하죠.]

연우강은 주머니에 넣었던 오른손을 뽑아 흔들었다.

“ 풋!”

이지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빼고 난 주머니는 편평했다. 즉 연우강의 주머니에는 십뢰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려 담대무궁을 보았다.

담대무궁 또한 연우강에게 십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분노로 인해 그의 발이 발목까지 땅을 뚫고 들어가 있었다.

“ 환노, 가요.”

이지약은 화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어디로 가실 겁니까?]

천마환환신공을 펼쳐 허공에 몸을 숨긴 채 따르던 독고철응이 물었다.

“ 갑자기 파릉전어석이 먹고 싶어졌어요.”

[ 모대주도 곁들이는 겁니까?]

“ 제가 살게요.”

이지약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 내가 한 잔 살 테니까 사 조 대원들은 따라오세요.”

이지약은 대원들을 향해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 알겠습니다. 조장님.”

사 조 조원들은 희희낙락하며 이지약을 따라 나섰다.

“ 우리도 파릉전어석을 안주 삼아 모대주 한잔할까?”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마윤이 이철상을 향해 물었다.

“ 누구라고 보십니까?”

“ 누구?”

“ 광랑과 함께 갔던 그 사람 말입니다.”

“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사랑. 네 생각은 어떠냐?”

사마윤은 마장승을 돌아보았다.

“ 글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 그게 뭔데?”

“ 광랑이 꼬리를 잔뜩 말 정도로 강한 자라는 거.”

“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 광랑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나설 성격이야?”

“ 그건 절대 아니지. 그 인간이 이익도 없는데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

“ 전랑, 네 생각은?”

이번엔 군무옥을 보았다.

“ 쌌다.”

“ 무슨 소리야?”

“ 그 괴물이 뿜어내는 기운에 맞서보려다가 쌌다고.”

네 사람은 고개를 숙여 군무옥의 바지를 보았다.

“ 맙소사!”

“ 허!”

네 사람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장난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군무옥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그렇게 강했던 거냐?”

백을상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쌌다고 했잖아. 자식아.”

“ 그 괴물 말고 네 무공을 묻는 거야, 새꺄!”

백을상은 빽 고함을 질렀다.

원래 세상은 아는 것만큼만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들이 보지 못한 무인의 무공을 군무옥은 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그 무공에 맞서다가 두려움에 오줌을 지린 것이다.

“ 내가 잘하는 건 싸움밖에 없잖아. 자식아.”

군무옥은 백을상을 흘겨보았다.

“ 그렇게 강해?”

“ 말했잖아. 난 싸움.....”

“ 네 녀석 말고 네가 괴물이라고 했던 그 사람 말이야. 새꺄!”

“ 그럼 말을 똑바로 해야지. 자식아.”

“ 얼마나 강한 거냐?”

“ 광랑이 꼬리를 만 게 맞는 것 같다.”

“ 광랑은 우리가 봐도 괴물 수준이었다. 그보다 강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 보는 거야?”

“ 있습니다. 형님들.”

이철상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있다고?”

“ 네.”

“ 누군데.”

“ 조금 전에 잠룡들이 말했던 그 사람입니다.”

“ 이세 천마라고 했던 놈?”

“ 이세 천마가 아니고 천마 제석강 본인입니다.”

퍼억!

이철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군무옥은 그의 뒤통수를 갈겼다.

“ 장난말이 아닙니다. 형님. 천마 제석강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사람은 바로 광랑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얼마 전에 패천림 관문에 도전했던 거고요.”

“ 정말?”

“ 그렇습니다.”

“ 사람이 천오백 년 동안 사는 게 가능하다고?”

“ 천년마인으로 환생하면 가능합니다.”

“ 천년마인이라고?”

“ 그렇습니다. 형님들. 그는 천마 제석강 본인입니다. 우린 지금 전설과 조우하고 있는 겁니다.”

이철상은 동정호로 시선을 주었다.

제법 커 보이는 화선 한 척이 수면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 가자!”

군무옥은 아래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 어딜 간단 말입니까?”

“ 세탁비 받아야 할 거 아냐.”

“ 오줌 싼 사람은 형님입니다.”

“ 저치가 없었으면 안 쌌어, 인마!”

군무옥은 그대로 동정호를 향해 몸을 날려갔다.

“ 우리도 가보자.”

이어 마장승이 뛰어내렸다.

“ 괜찮을까?”

사마윤은 백을상을 보며 물었다.

“ 광랑이 있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가자.”

백을상과 사마윤이 몸을 날리고 맨 마지막에 이철상이 악양루에서 내려와 동정호를 향해 몸을 날려갔다.

제석강은 앞에 앉은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굴로만 보면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의 몸에서 감지되는 기운은 하늘이었다. 녀석 옆에 앉아 있는 여아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 또한 나이에 비하면 엄청나다.

놀라운 아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 보이시오?”

제석강의 술잔을 채운 연우강은 술병을 건네주며 물었다.

“ 어느 경지를 넘어서게 되면 저절로 보이네.”

“ 금제를 가한 것까지 보인단 말이요?”

“ 그렇다네.”

“ 그럼 놀랐겠소이다.”

“ 왜 놀랐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 아무리 뜯어보아도 서른은 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하늘에 다다라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잖소.”

“ 허허허! 자기 얼굴에 금칠을 아주 매끄럽게 잘하는 친구무먼.”

제석강은 빙그레 웃었다.

“ 사실은 나도 내가 이렇게 강해질 줄은 몰랐소이다. 기연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보니 어느새 이렇게 강해지고 말았소.”

“ 운이 좋았던 모양이구먼.”

“ 중원 최고 갑부라는 금릉 연씨 세가에 업둥이로 들어갔으니 태어날 때부터 운을 타고났다고 봐야 하지 않겠소.”

“ 그러니까 자네가 바로 온갖 소문을 몰고 다니는 연우강인 모양이구먼.”

제석강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열어 두었다. 그런데 무림에 관한 소문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연우강이었다.

중원 최대 상단인 금릉 연씨 세가 장자이면서 업둥이고, 무공도 특출나지 않은 자가 대야벌 제자들을 이끌고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앵속을 복용하여 폐인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대야벌에 의해 죽임을 당할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 실제로 보니까 어떻소?”

“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네.”

“ 하지만 그 소문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일도 종종 일어나는 곳이 세상이죠.”

“ 하지만 자넨 인생을 망칠 일은 없겠구먼.”

“ 소문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서 말이오.”

“ 그렇군. 그보다는 그곳에서 나를 구해준 이유를 듣고 싶구먼.”

“ 내가 어찌 천마 제석강을 구하겠소. 그들 중에 친한 사람이 있어서 나섰을 뿐이외다.”

“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를 말린 거란 말인가?”

“ 그렇소.”

“ 내가 천마 제석강이란 사실을 믿는가?”

“ 사실은 반반이오.”

“ 반반이라면?”

“ 사람인 이상 천오백 년을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천년마인이란 존재를 부정하지 못할 처지니 말이외다.”

“ 흥미롭구먼. 그런데 부정하지 못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 풍천마인과 회혼마인을 잠재운 적이 있소이다. 그들이 전부 나타났는데 천년마인이라고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소.”

“ 그걸 확인하기 위해 천등십관에 도전한 건가?”

“ 그렇소이다. 그런데 그 도전이 끝나자마자 이세 천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소이다. 더구나 그 이세 천마는 혈잔수를 알고 있었고.”

“ 혈잔수를 들먹인 게 나를 떠보기 위해서였구먼.”

“ 그렇소.”

“ 나를 본 느낌이 어떤가?”

제석강은 순순히 시인했다.

“ 이걸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소.”

연우강은 품속에서 종이 다발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만 냥짜리 전표 열장이었다.

“ 뭔가?”

제석강은 전표로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 돈이오.”

“ 돈?”

“ 늙어서 가장 필요한 건 친군데. 친구도 돈이 있어야 만날 수 있소이다.”

“ 난 이 친구 말고는 친구가 없네.”

제석강은 옆에 앉아 있는 백강을 가리켰다.

“ 이제부터 친구를 만들어 보시오. 필요하면 내가 노인네들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소.”

“ 요즘 들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네.”

“ 어떤 생각 말이오?”

“ 친구를 만드는 것보다는 부하를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네.”

“ 애들 노는데 끼어들겠단 말이오?”

“ 자네도 끼어들고 있잖나.”

“ 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것뿐이외다.”

“ 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네. 조금 전에 자네도 보았겠지만 자네가 말한 그 애들이 나를 우습게보고 깔아뭉개고 있네. 인내하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네.”

“ 하긴 나 같아도 참지 못하긴 하겠소. 아무튼 그건 영감님 알아서 하시고 이 돈이나 챙기시구려.”

“ 날 말리려고 한 거 아닌가?”

제석강은 전표로 시건을 주며 물었다.

“ 다 큰 어른을 무슨 수로 말리겠소. 단지 진짠지 가짠지 확인하고 싶어서 술을 산 것 뿐이오.”

“ 그랬군. 그런데 자네 사문은 어떻게 되는가?”

“ 흑천의 천주가 나요.”

“ 흑천이란 말인가?”

옆에서 천둥이 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제석강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금세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 흑천은 그 후루도 계속 번성한 모양이군.”

제석강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후예를 남긴다는 것. 그때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천오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보니 후예라도 있었으면 훨씬 덜 쓸쓸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 아니요. 난 가립하 그분의 유전을 얻었을 뿐이고, 남아 있는 흑천 무인은 네 명이 전부요.”

“ 가립하는 어떻게 죽었는가?”

“ 노인장한테 여인을 빼앗기고 부하와 함께 사막에서 쓸쓸하게 죽었소.”

“ 그럼 수연은?”

“ 마총으로 들어간 게 아니었던 모양이구려.”

“ 천오백 년의 시간이 흐른 이유가 그녀 때문이었네. 만일 그녀가 마총으로 들어왔다면 난 최소한 오십 년 안에 깨어났을 것이네.”

“ 그렇게 된 거였구려. 희수연이 가립하 영감을 찾아다녔는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가립하 영감 곁에 그녀는 없었소.”

“ 결국 그 친구나 나나 희수연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구먼.”

“ 그런 모양이외다.”

“ 대야벌은 지천의 후예인가?”

제석강이 화제를 돌렸다.

“ 그럴 가능성이 높소이다.”

“ 밀천은 저기에 똬리를 틀고 있고.”

“ 그렇소.”

“ 황천은 변경에 있다고 했는가?”

“ 영세오천에 관심이 많구려.”

“ 나와 싸웠던 자들이니까. 아무튼 이 돈은 잘 쓰겠네.”

“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돕니다. 영감님. 혹시.....”

“ 허허허! 난 내가 깨어난 이유를 심까하게 고민하고 있었다네.”

“ 결론이 나왔소?”

“ 그 동안에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자넬 보니까 비로소 내가 깨어난 이유를 알 것 같네.”

“ 왜 깨어났다고 생각하시오?”

“ 바로 자네들 때문이네.”

“ 우리들?”

“ 흑천, 지천, 밀천, 황천 말이네. 천오백 년 전에 내지 못한 승부를 이번엔 가리라고 다시 깨어난 모양이네. 그래서 난 아주 기쁘다네.”

제석강은 활짝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 이건 혹 떼려다가 혹을 붙인 꼴이네.”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제석강을 보았다.

“ 자넨 훌륭한 적이 친한 친구보다 낫다는 말을 모르는가?”

“ 내가 정신병잔줄 아쇼? 난 친구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외다.”

“ 하하하! 자넨 나랑 다르군. 난 멋진 적을 친구보다 더 좋아한다네. 친한 친구는 날 술집으로 이끌지만, 멋있고 강한 적은 날 연공관으로 이끌기 때문이네.”

“ 영감은 평생 무인으로 살다가 죽을 팔자요.”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려는가?”

“ 영감이 사람답게 살 생각을 한 걸 확인했으니까 가야 하지 않겠소?”

“ 난 자네와 한잔 더 하고 싶네.”

“ 지금부터 나는 수소저와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하오.”

연우강은 수여설을 데리고 물 위로 걸음을 옮겼다.

“ 하하하! 그래서 배를 한 척 더 예약을 한 거로군. 아무튼 오늘 만남은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네. 그리고 이 돈은 잘 쓰겠네.”

제석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우강과 수여설을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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