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완벽함은 허점을 부른다
작은 배 한 척이 물살을 따라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비바람을 피할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듯 배의 양쪽 측면에는 벽이 있고, 벽 위에는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처마에 걸린 붉은 등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배 후미를 비추고 있었다. 불빛 아래 작은 탁자 위에는 파릉전어석과 모대주 세 병이 놓여 있었다.
나란히 앉아 호반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연우강과 수여설이었다. 벌써 상당한 술을 마신 듯 수여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그가 정말 무림 일에 관여할까요?”
수여설은 술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물었다.
천마 제석강.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대야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만일 그가 강호 정벌을 선언한다면 밀천의 개파대전보다 더 큰 폭풍이 몰아치게 될 것이다.
대야벌 때문에 숨죽이고 있었던 수많은 무인들이 나설 테고 그를 중심으로 뭉치게 될 것이다. 강호무림에서 그를 막아설 자가 과연 있을는지.
대야벌만 해도 버거운 상대인데 천마까지 적이 된다면 그땐 정말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 두 가지 각본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각본이죠?”
“ 하나는 천오백 년 전 꿈을 이루기 위해 강호 정벌에 나서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경웁니다.”
“ 그 두 가지에는 어떤 차이가 있죠?”
“ 전자를 원하면 우린 마웅을 상대해야 하고, 후자를 원한다면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려고 발악하는 신을 상대해야 합니다.”
“ 후자가 더 어렵다는 말이군요.”
“ 그렇습니다. 마웅이라면 승리에 집착하겠지만,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신이라면 승패에 상관없이 오직 자극을 즐기게 됩니다. 그런 자에겐 계략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지요.”
“ 정면충돌밖에 없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 어떻게 상대할 거죠?”
“ 그때를 대비해서 안면을 튼 거 아닙니까, 그리고 뇌물도 약간 쐈구요.”
“ 뇌물?”
“ 원래 사람은 뭔가를 받게 되면 선물을 준 사람이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거든요.”
“ 십만 냥으로 인식이 달라질 거라고 보는 거예요?”
“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게 되면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되지만, 사소한 선물은 마음에 담아만 두게 됩니다.”
“ 그래서 금릉 연씨 세가 장자라는 사실을 밝힌 거예요?”
“ 십만 냥 정도는 우습게 줄 수 있는 재력을 지녔다고 하면 받는 사람도 그다지 부담을 갖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기억에는 담아두게 되죠.”
“ 대화공황증처럼?”
“ 물론이지요. 곡해하면 욕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관심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 피이! 바람둥이!”
수여설은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 그래도 우린 행복한 겁니다. 수 소저.”
연우강은 모대주 병을 들어 올렸다.
“ 왜요?”
“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연우강은 술병을 입에 대고는 쏟아 붓듯 마셨다.
“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말.......”
그녀의 말이 중간에서 끊어졌다. 느닷없이 연우강이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춰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약간 벌렸다.
그러자 입 안으로 술이 조금씩 흘러들어 왔다.
‘ 어머!’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수여설의 눈이 번쩍 떠졌다.
[ 이런 게 바로 사람 사는 겁니다.]
‘ 풋! 나빠요!’
수여설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한 가운데,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 세인들의 눈을 신경쓸 이유가 없는 곳. 이곳은 연우강과 자신만의 세계였다.
수여설은 슬며시 눈을 감고 입으로 건네는 술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입 안의 술을 금세 목으로 넘기고 다시 술을 찾았다. 하지만 술은 너무 감질나게 들어왔다. 그녀는 과감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갑자기 봇물이 터진 듯 술이 입 안으로 넘어왔다. 그녀는 웃으면서 꿀꺽꿀꺽 술을 목으로 넘겼다.
술을 전부 빼앗아 마셨지만 여전히 갈증이 나는 듯했다. 이번에는 술이 남아있는 입 안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 음!’
잇새를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연우강의 손이 가슴 안으로 파고들어 온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약간 틀어 연우강의 손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옷으로 손을 올렸다.
연우강의 옷을 잡아가는 데 몸이 둥실 떠올랐다. 연우강이 마라천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뒤로 뻗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열린 문 안으로 두 사람의 신형이 빨려가듯 들어갔다. 천장에는 밖과 마찬가지로 붉은 등이 걸렸고, 바닥엔 금침이 깔려 있었다.
[ 옷도 부탁해요.]
수여설은 양팔을 벌리며 혜광심어를 보냈다.
[ 물론입니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수여설과 자신의 옷을 동시에 벗겼다. 옷을 벗어 치운 두 사람은 곧바로 금침위로 몸을 뉘었다.
“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요.”
수여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연우강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겉으론 왜소해 보이지만 옷 속에 감춰진 그의 몸은 탄탄하기가 준마보다 더했다.
“ 옷을 벗을 땐 최고죠.”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수여설의 가슴 사이에 입을 맞췄다. 수여설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불길은 그의 손과 입술이 스치는 곳에서만 이는 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도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투라도 하듯 서로를 탐했다.
“ 나....”
문득 눈송이를 굴리면서 산 아래로 내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송이가 커짐과 비례해서 느낌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나며 굴려왔던 눈송이와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낭떠러지가 얼마나 깊은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은 캄캄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이 경지되면서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수여설은 연우강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먼저 떨어진 눈덩어리처럼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낭떠러지로 떨어진 후유증은 오래갔다.
그녀는 연신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 성격이 너무 급하죠.”
수여설은 마지막 숨을 토하듯 말을 뱉었다.
“ 우린 사람이니까요.”
연우강은 수여설의 몸을 가만히 보았다.
그녀의 몸매는 완전한 색목인이다. 외부적인 특징이 금발에 푸른 눈이라면 내적인 특징은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그리고 만월처럼 확 퍼진 엉더이와 매끈하게 뻗어 내린 다리까지.
더하거나 뺄 곳이 전혀 없는 완벽한 몸매다.
더불어 그녀는 격정적이다.
둘만이 있는 장소에서는 결코 감정을 억압하지 않는다. 본인의 감정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빙공을 익힌 그녀의 몸 내부에 활화산이 숨어 있다는 건 의외였다.
“ 맞아요, 사람이죠. 조그마한 행복에 기꺼이 만족하는 사람 말이에요.”
수여설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이 너무 좋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처럼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다. 지금 이 순간 현재만 생각하면 된다. 과연 지금과 같은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까.
앞으로 삼십 년도 채 남지 않았을 테다. 아니 당장 몇 년만 지나면 설사 그를 안는다고 해도 지금과 또 다른 감정일 것이다. 단 한 번의 느낌, 단 한 번의 감정.
사랑은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다.
굳이 쉬쉬할 이유도 없다. 사랑이 없다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없고,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된다.
그런 행위를 왜 부끄러워 해야 하는지.
정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자들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랑을 욕하는 자들이다. 그들 또한 그 사랑을 통해 자식을 낳지 않는가. 그런데 그 행위를 더럽다고 하고 퇴폐적 또는 향락적이라고 하면서 금기시 한다.
심지어 욕을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면서 기루에 가면 기녀들의 옷을 가장 먼저 벗기고, 신고식 운운하며 눈을 빛낸다.
웃기는 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중이 될 것이지.
“ 전 제 자신을 속이지 않을 거예요. 좋은 건 좋다고 할 테고 싫은 건 싫다고 할 거예요.”
“ 좋아요?”
“ 네, 아주 좋아요. 좋아 죽을 것 같아요. 매일매일 지금처럼 살았으면 좋겠어요.”
수여설은 배시시 웃으며 연우강을 내려다보았다.
“ 무서운 말을 하네요.”
연우강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쥐었다.
“ 무서운 건 밤이 아니라 낮이에요. 연 공자. 너무 밝아 숨을 곳이 없는 낮 말이에요.”
눈 내린 벌판에 나는 홀로 섰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왼편을 봐도, 오른편을 봐도 온통 눈으로 뒤덮인 벌판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입니다.
나는 너무 무서워 차마
발자국을 확인하지 못합니다.
돌아보면
눈이 삼켜버릴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걸었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삶에 지쳐 때로는 눕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눈발에 누우면 그대로 잠이 들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눕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잠을 자면 아버지가 울 것 같아서
그래서 눕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두렵지 않습니다.
눈 내리는 벌판에 선다고 해도 얼마든지 뒤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곳엔, 당신이 서 있을 테니까요.
“ 우는 거예요?”
문득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숨결이 눈에 와 닿았다.
어느새 연우강이 상체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 아니에요, 좋아서 그래요, 너무 좋아서.”
“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납니다. 수 소저.”
“ 그래도 상관없어요.”
‘ 당신이 있으니까요.’
수여설은 활짝 웃으며 연우강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두 사람이 동정호를 나선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장화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남궁운화는 할 말이 있다며 수여설을 데리고 이층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잠룡 십 조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연우강이 머물고 있는 반대편 건물이었다.
그곳 역시 분위기는 어두웠다.
일행은 찻잔을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 분위기가 왜 이래?”
안으로 들어선 연우강이 물었다.
“ 어두울 수밖에 없잖습니까?”
이철상이 대답했다.
“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납치된 자들을 구할 수 있는 거야?”
“ 하오밀문에서 결론이 나지 않아서 아직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 어디로 납치됐는지 그것도 아직 올라오지 않은 거야?”
“ 그렇습니다. 광랑.”
“ 각 대원을 서른 곳으로 나누는 작업부터 시작해.”
“ 서른 곳으로 나누라는 건?”
이철상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진 않는다. 서른 곳으로 나누라는 말은 곧 납치된 자들이 하오밀문 거점에 있을 거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잠룡 십 조와 하오밀문 수뇌들을 노리고 납치 사건을 획책했다면 빠져나갈 수 없는 장소를 골라 함정을 팔 것이다.
그런데 연우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 작전을 세울 땐 아군의 입장이 아니라 적 입장에서 생각해야 해.”
“ 우담보 입장에서 생각했기 때문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 적에 대해 공부가 부족했다.”
“ 무슨 말씀입니까?”
“ 작전을 세우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뭐지?”
“ 적이 어떤 상황인지 먼저 살피고 그 다음에 아군의 상황을 살피는 겁니다.”
“ 그럼 적의 상황이 지금 어떤지 그것부터 말해 봐.”
“ 서방사자영이 몰살을 당했고, 집행사자들은 천삼백여 명이 죽었으며, 감찰사자 또한 사망자 수가 이천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 총 얼마나 되지?”
“ 최소 오천, 최대 칠천입니다.”
“ 맙소사!”
“ 세상에!”
여기저기서 놀람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잠룡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사실 크게 전투를 치른 적도 별로 없다. 그런데 결과를 종합해 보니 율령궁의 삼분의 일을 궤멸시킨 것이다.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이자승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껏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엄청난 전과를 올렸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능력 있는 지휘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최소의 움직임응로 최대의 결과를 도출해내는 자, 그런 사람이 바로 연우강이었다.
그는 다시 연우강의 말에 집중했다.
“ 우리 잠룡 십 조와 하오밀문 수뇌를 전부 합치면 몇 명이지?”
“ 백오십 명 내외입니다.”
“ 같다고 생각해?”
“ 뭐가 말입니까?”
“ 네가 우담보라면 잠룡 십 조를 비롯한 하오밀문 수뇌들의 목을 잘라내면 기분이 풀릴 것 같냐고. 아니 대야벌에 가서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할 수 있겠어?”
“ 아! 임무!”
이철상은 제 머리를 툭 쳤다.
가장 중요한 사항을 잊고 있었던 거였다.
율령궁이 출병한 가장 큰 이유는 하오밀문의 몰살이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면 하오밀문 수뇌들만 없애는 꼴이 된다. 만일 누군가 나서 다시 조직을 정비한다면 하오밀문은 머잖아 다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하오밀문을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 그래야 ‘생쥐박멸작전’을 완수했다고 보고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우담보는 우리가 만든 거점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 하지만.......”
“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을 경우엔 가장 먼저 살펴야 할 쪽은 적이 아니라 내 부하야.”
“ 하오밀문에 배신자가 생겼다는 겁니까?”
“ 우리 잠룡 십 조는 물론이고 노인들은 그리고 인사대 대원들은 하오밀문 수뇌들의 가족이 있는 곳을 몰라. 그걸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자는 하오밀문 문도밖에 없어.”
“ 하오밀문 문도 또한 완벽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 하지만 정보 담당자는 다르지.”
“ 정보를 담당하는 자가 배신을 했단 말입니까?”
“ 회의장에 산발 남광일이 없다. 교랑.”
“ 그자가 배신했을 거란 말입니까?”
“ 아직은 정확하지 않아. 하지만 숨어 있던 가족이 납치되고, 정보 담당자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가장 먼저 그자를 의심해야 하잖아.”
“ 좋습니다. 남광일이 배신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가 배신했다고 해서 우담보가 우리가 만든 거점을 이용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 그건 자존심 때문이다.”
“ 자존심이라고요?”
“ 실패에 대한 경험이 적은 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바로 전쟁에 자존심을 개입시키는 거다. 즉 그동안의 패배를 만회하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승리와 동시에 자존심까지 회복하려고 한다는 말이지.”
“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 적이 파 놓은 함정을 이용해서 적을 없애는 거야. 놈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거점에 하오밀문 가족들을 감금해 두었다. 이건 내기해도 좋다.”
“ 그럼 지금 당장 가서 구해와야겠구나.”
듣고 있던 이자승이 벌떡 일어났다.
“ 그건 안 됩니다. 영감님.”
“ 왜 안된다는 거냐?”
“ 놈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연우강은 차갑게 웃으며 이철상을 보았다.
“ 맙소사! 거미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 이철상은 얼결에 팔을 비볐다. 팔괘만상미혼대진을 구축하고 잠룡들에게 교육을 시킨 건 여름의 문턱을 막 넘는 무렵이었다.
그런 다음 전장이 이곳 동정호로 옮겨지면서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걸 써먹을 기회가 온 것이다.
연우강.
그는 대하면 대할수록 소름이 끼치는 사람이었다.
“ 거미줄이 뭐냐?”
이자승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그건 교랑에게 듣도록 하십시오.”
“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광랑!”
이철상은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 그리고 응랑과 표랑이 오면 회의실로 오라고 해. 아버지를 업은 채 와야 해.”
“ 알겠습니다.”
“ 그럼 수고하고.”
연우강은 밖으로 나갔다.
연우강이 나가자 이자승이 이철상 곁으로 다가갔다.
“ 무슨 말이냐?”
“ 율령궁 서방사자영을 몰살시킬 때 써먹었던 방법을 아십니까?”
“ 팔괘만상대전을 말하는 거냐?”
“ 그 진을 전 거점에 설치하라고 명령을 받고 제가 설치해 두었습니다.”
“ 진식을 설치해 두었다고?”
“ 완벽한 상태는 아닙니다. 하지만 돌 하나만 가져다 놓으면 팔괘만상대진은 발동합니다.”
“ 그 안으로만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 율령궁을 전멸시킬 수가 있습니다.”
“ 으음!”
이자승은 신음을 뱉었다. 지금껏 없앤 율령궁 무인들이 칠천에 가깝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이젠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인간의 머리로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영감님.”
한편에 있던 군무옥이 나직이 말했다.
“ 신이란 말이냐?”
“ 무공이 형편없을 때에도 일천 명의 혈도부대를 혼자 없앤 사람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죽여 없애는 데에 있어서는 그는 신입니다. 담대만승 그 병신 같은 놈이 상대를 잘못 고른 겁니다.”
“ 뒈지려고 환장한 거지.”
“ 저승사자 아가리에 대가리를 처넣은 놈을 무슨 수로 말려. 아마 담대무궁 그놈을 살려주고 있는 것도 마지막 한 방을 먹여주기 위해서일걸?”
“ 허!”
“ 맙소사!”
일행은 멍한 얼굴로 군무옥을 보았다.
“ 아무튼 다른 사람은 다 건들어도 좋으니까 개독새는 절대 건들지 마쇼. 오죽 했으면 아군도 아니고 적이 개독새라고 불렀겠소. 개 씨부랄 놈의 독종 새끼라고 말이오.”
군무옥은 따라두었던 차를 단숨에 비웠다.
“ 킬킬킬! 그래도 난 그 인간이 살 생각을 더 많이 하니까 훨씬 기분 좋다. 인마.”
마장승이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활짝 웃었다.
“ 그럼 그 거지같은 곳에서도 살아왔는데 악착같이 살아야지. 또 죽을 생각을 하면 그건 인간도 아냐.”
“ 그딴 소린 집어치우고 작전이나 세우자.”
사마윤이 두 사람을 보며 버럭 소리쳤다.
“ 하오밀문 문도들이 전부 몰려가지 않으면 작전을 세워봤자 아무런 의미 없어. 인마.”
마장승이 툭 쏘아붙였다.
“ 그건 광랑이 알아서 할 거니까, 우린 각 거점을 어떻게 빠져나올 건지 그것만 생각하면 돼.”
사마윤은 이철상을 보았다.
“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각 거점을 맡을 사람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삐걱!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전관수와 차남승이 들어왔다. 전관수의 등에는 그의 아버지인 전무웅이 업혀 있었다.
“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 수고했다.”
“ 수고했소, 응랑.”
“ 수고했네.”
모두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
“ 장사는 잘 지냈느냐?”
이자승이 일행을 대표하여 물었다.
“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치렀습니다.”
이자승은 전관수 등에 업혀 있는 전무웅을 보며 말했다.
“ 감사합니다. 어르신.”
“ 광랑은 어디 있습니까?”
전관수는 안쪽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다 있는데 연우강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본관 건물 지하에서 보자고 하더구나.”
“ 가서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전관수와 차남승은 밖으로 나갔다.
한편.
연우강이 들어간 지하 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있을 뿐 하오밀문 수뇌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덜컹!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하오밀문 문도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굳은 얼굴로 허일구 앞으로 다가갔다.
“ 뭐냐?”
“ 가족들에 대한 소식이 왔습니다.”
그는 첩지 뭉치를 내밀었다.
허일구는 재빨리 첩질ㄹ 펼쳤다.
< 유불리의 가족은 송백 거점에 감금돼 있음.>
허일구는 빠르게 첩지를 읽어 내려갔다. 첩지를 읽어갈수록 그이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삼십여 장의 첩지를 전부 읽은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하오밀문 수뇌들을 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가족들은 우리가 만든 거점에 감금돼 있네.”
“ 정말입니까?”
유불 리가 다그치듯 물었다.
“ 그렇네.”
허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 가겠습니다.”
유불리는 벌떡 일어났다.
“ 가서 어떻게 하려고?”
막 나가려고 하는데 연우강의 목소리가 유불리의 발목을 잡았다.
“ 가족을 구해야죠.”
“ 무슨 수로 가족을 구하겠다는 거지?”
“ 그건....”
유불리는 할 말이 없었다. 송백으로 달려간다고 해도 그곳은 이미 적에게 장악돼 있을 것이다. 무공도 변변치 않은 자신이 가족을 구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 도와주십시오.”
유불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족이 납치된 수뇌들은 전부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들이 기댈 사람은 연우강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우린 전부 합친다고 해도 백 명이 안 돼. 서른 곳의 거점으로 나누면 한 거점당 세 명 가량 갈 수 있어. 반면에 적은 한 거점 당 최소 사백 명에서 최대 오백 명까지 은신해 있어. 가 봐야 개죽음밖에 안돼.”
“ 도와줄 수 없단 말입니까?”
“ 도아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거야. 호랑이 입 안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곳으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
“ 그럼?”
“ 스스로 나선다면 지원은 가능할 것 같아.”
“ 우리 하오밀문엔 무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유불리는 버럭 소리쳤다.
“ 그래서 우리더러 대신 죽어달라는 거야?”
유불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됐든 안으로 들어가면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감금돼 있는 곳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벌컥!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혹시 다른 소식을 가져온 자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하오밀문 수뇌들의 얼굴은 금방 실망으로 어두워졌다.
문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은 전무웅, 전관수, 차남승이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리려던 하오밀문 수뇌들의 시선이 전무웅에게서 멈췄다.
그들 또한 철응방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오밀문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몰살을 당했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전무웅. 오른팔과 왼 다리를 잃은 그는 아들인 전관수에게 기대에 이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유불리는 저도 모르게 전무웅의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웠다. 사백 명의 식솔을 전부 잃고 불구가 된 전무웅. 하오밀문 때문에 저리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망의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있다.
그때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장사는 잘 지낸 거야?”
“ 잘 지냈습니다.”
“ 합장한 거야?”
“ 네, 가져간 머리 백 개를 올리고 제사를 모셨습니다.”
“ 그래 수고했어. 들어가서 쉬어.”
“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전관수는 무릎을 꿇고 있는 하오밀문 문도들을 보며 물었다.
“ 가족이 납치됐어.”
“ 납치된 곳은 알아냈습니까?”
“ 우리가 만들어 놓은 거점에 감금돼 있대.”
“ 하오밀문 문도 전부를 없앨 생각이군요.”
“ 우담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는 없으니까.”
“ 그럼 하오밀문 전부가 몰려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 그게 쉽지가 않아. 저들은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검을 들 팔과 달릴 수 있는 다리는 멀쩡하죠.”
“ 응랑, 목숨은 하나밖에 없어.”
“ 하지만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엔 다 죽습니다. 놈들에게 당한 철응방 식솔 중에는 갓 태어난 아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후회 없는 결정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관수는 하오밀문 수뇌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고 몸을 돌렸다. 전관수 일행이 나가자 하오밀문 수뇌들은 일제히 허일구와 연우강을 보았다.
“ 이제 무기를 잡을 마음이 생겼어?”
“ 그렇습니다. 광랑.”
연우강의 물음에 유불리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 율령궁 놈들이 기다리는 건 하오밀문 문도 전부야.”
“ 부하들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 절반 살아 나온다고 해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어.”
“ 한 가지만 약속해주시면 죽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유불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말해.”
“ 제 무덤 앞에 율령궁 무인 머리 열 개만 올려주십시오.”
“ 그건 분명하게 약속할 게. 이번 작전이 끝나면 강호 무림에서 율령궁이라는 말은 더 이상 듣지 않게 될 거야.”
“ 정말이십니까?”
“ 날 믿어, 유불리.”
“ 믿겠습니다. 연 공자. 그럼 작전을 말해 주십시오.”
유불리는 다시 의자로 가 앉았다. 그가 앉자 무릎을 꿇고 있던 다른 수뇌들도 자리에 앉았다.
“ 먼저 우담보가 가족들을 납치한 이유를 알아야 해.”
“ 잠룡 십 조와 우리 수뇌들을 노리고 저지른 일이 아니란 말인가?”
듣고 있던 허일구가 물었다.
“ 지금까지 우리에게 당한 율령궁 무인들은 오천에서 칠천 사이야.”
“ 잠룡 십 조와 우리들의 머리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다는 말이군.”
“ 맞아. 우담보 그놈이 원하는 건 하오밀문 전 문도와 우리 잠룡 십 조의 머리야. 즉 이번 작전에 투입돼야 할 인원은 우담보가 인정할 수준이 돼야 한다는 거야.”
“ 어느 정도면 놈이 인정할 거라고 보는가?”
“ 놈들은 하오밀문 문도의 정확한 신분이나 위치는 모르겠지만 개략적인 규모는 파악하고 있을 거야. 그 수준에 맞춰야지.”
“ 그럼 한 거점당 최소 이백 명이군.”
“ 이백 명을 이끌고 각 거점 근처로 가.”
“ 그곳에서 바로 공격을 받으면?”
“ 우담보가 원하는 건 하오밀문 문도는 물론이고 잠룡 십조 대원들을 전부 없애는 거야. 전부 없애기 위해서는 한 곳에 몰아넣어야 하고, 전부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공격해 오지 않을 테니까 신경 꺼도 돼.”
“ 그 다음엔 어떻게 하면 좋은가?”
“ 그 다음엔 함께 온 잠룡 십 조 대원의 지시에 따르면 될 거야.”
“ 알았네. 지금부터 준비하도록 하겠네.”
“ 인원이 편성되면 알려줘. 그리고 우담보 그놈의 위치를 추적해.”
“ 직접 갈 텐가?”
“ 그래야지.”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지하를 나선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완벽한 작전이란 없다. 우담보. 완벽을 꿈꾸는 순간, 허점이 드러나고 몰락이 찾아온다. 넌, 내 손에 반드시 죽는다.’
연우강은 내심으로 중얼거리며 별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