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진식 안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하오밀문 무인들은 마지막 전쟁 준비를 했다. 무기조차 잡아본 적이 없던 자들이 무기를 들었다.
그들이 든 무기는 다양했다.
주방에서 일하던 자는 식도를 허리춤에 꽂았고, 소작을 붙이던 자는 파를 들었다. 광산에서 일을 하던 자는 곡괭이를 들었고, 배를 타던 자는 갈고리를 들었다.
무기가 다르고 이동 수단이 달랐지만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결연했다.
시월 보름.
그들이 각 거점에 도착한 날짜였다.
일을 나가는 사람처럼 움직였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금세 율령궁 시야에 잡혀들었다. 하오밀문 문도들이 움직이자 율령궁 무인들 또한 바빠졌다. 그들 중 가장 바쁜 쪽은 당연 지휘부였다.
“ 상황을 보고하게.”
우담보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지금 악양에서 형양의 석수 산장으로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 각 지역에서 하오밀문 문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인원은 대략 삼천입니다.”
보고자는 유선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듯 그의 얼굴은 추레하기 그지없었다.
“ 삼천이면 우리가 예상한 인원의 삼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구먼.”
“ 호남 남부와 중부에서 파악한 수치입니다. 북부는 아직 정확한 집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하오밀문 거점은 북부에 더 많이 몰려 있습니다.”
“ 좋네. 그건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도록 하세. 그보다 아군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 각 거점 당 사백 명씩 배치했습니다.”
“ 하오밀문 놈들을 전부 안으로 몰아넣어야 하는데 가능하겠는가?”
“ 그래서 거점 안보다는 외부에 신경을 더 썼습니다. 거점 안에는 집행사자 이십 명이 들어가 있고 나머지는 전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놈들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면 압박해 들어갈 참입니다.”
“ 잠룡 십 조는 어떻게 됐는가?”
“ 그들 또한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 각 거점 당 인원은?”
“ 잠룡이 사십칠 명이고 노인들은 삼십사 명입니다.”
“ 총 팔십일 명이니까 각 거점 당 세 명이 되지 않는군.”
“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이번엔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 묘강독존의 독에 대한 대비는 했는가?”
“ 바로 그 독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겁니다.”
“ 밀천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하네.”
“ 그들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 거의 완벽한 작전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 그렇습니다. 이번 전투로 인해 우린 땅에 떨어졌던 자존심을 회복함은 물론이고, 임무 완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렇게 돼야지. 그보다 연우강 놈의 위치는 찾았는가?”
우담보는 지도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여깁니다.”
지도 앞으로 다가간 유선은 지금 있는 형양 아래쪽의 담백을 짚었다.
“ 용케도 알아냈구먼.”
“ 복장 때문에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 여전히 검은 옷을 걸치고 궤짝을 메고 다닌다고 하던가?”
“ 그렇습니다. 엉덩이 쪽에 묵사를 걸친 것도 그대로라고 합니다.”
“ 담백의 책임자는 누군가?”
“ 천살원 원주가 나갔습니다.”
“ 이 원주가 나갔다고?”
우담보는 깜짝 놀랐다. 이청문으로부터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연우강이 담백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올라오자마자 바로 출발했습니다. 궁주님께는 돌아와서 용서를 빌겠다고 하였습니다.”
“ 천살단 대원을 데리고 갔는가?”
“ 그렇습니다.”
“ 쯧! 그 친구.”
우담보는 혀를 찼다.
백리자성과 천잔성의 죽음으로 이청문이 충격을 많이 받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도 없이 이렇듯 급작스럽게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백리자성과 척살단 대원들의 머리는 아직 보관 중입니다.”
“ 장사도 지내지 못하게 했단 말인가?”
“ 연우강의 머리를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겠다고 맹세를 했답니다.”
“ 그랬군. 아무튼 소식이 올라오는 대로 미루지 말고 즉시 보고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분석실로 향했다.
그 후로도 각 지역으로부터 빠르게 소식이 올라왔다. 그리고 사월 초순이 되면서 소식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 이 정도면 거의 칠천 명에 가깝겠군.”
보고서를 정리하던 유선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칠천. 율령궁에서 파악하고 있는 하오밀문의 전력과 거의 비슷한 숫자였다.
“ 이제 끝이다, 놈들!”
회의실로 향하는 유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생쥐박멸 작전’의 마지막 보고서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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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마을이 들어서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무덤을 북쪽에 많이 쓰곤 한다. 북쪽을 하늘 남쪽을 땅이라고 여긴 습관 때문이었다.
담백도 다르지 않았다.
담백의 북쪽엔 야트막한 야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데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묘지들이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묘지를 올려다보는 위치에, 주변 전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당한 규모의 장원이 서 있었다.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에 각각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세 건물은 전부가 공동묘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북망 산장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장원이 상식을 벗어난 형태로 지어진 이유는 건물을 지은 목적이 바로 공동묘지에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북경의 유지가 여행을 하다가 이곳에서 임종을 맞았는데, 그는 임종 직전에 이곳에 무덤을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였다. 유지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무덤을 쓰고, 제를 올릴 장소로 지은 건물이 바로 북망 산장이었다.
하지만 유지의 아들이 북망 산장을 찾은 건 사오 년에 불과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그때부터 장원은 버려지게 되었다.
“ 거지같은 놈들이 거지같은 곳에 거점을 마련했군.”
이청문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청문을 비롯한 천살단 대원들이 은신해 있는 곳은 공동묘지였다. 이청문이 서 있는 장소에서는 북망 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북망 산장 안쪽에 머물고 있던 이청문의 시선이 주변을 더듬었다. 산에서 자라야 할 나무가 공동묘지로 인해 옮겨 간 듯 산장 주변은 크고 작은 나무로 울창하다. 그 나무들 사이에 율령궁 무인 사백 명이 북망 산장을 포위한 채로 은신해 있다.
“ 이제 놈들만 오면 된다.”
이청문은 그 자리에 앉았다. 바로 뒤쪽엔 무덤이었다. 오래된 무덤인 듯 비석도 없고, 봉분은 반쯤 무너져 있다.
“ 네놈도 저렇게 만들어주겠다. 연우강.”
이청문의 눈에서 차가운 광망이 쏘아져 나왔다. 백리자성을 비롯한 척살단 일백 명은 머리만 돌아왔고, 천잔성을 비롯한 잔살단 일백 명은 머리가 사라지고 몽뚱이만 남아 있었다.
“ 최소한 시체를 모욕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이청문은 마른 풀잎을 주워 질겅질겅 씹었다.
“ 네놈의 머리와 몸뚱이를 분리시켜 주겠다.”
산 너머에서 천천히 어둠이 밀려오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도 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이익!
바로 그때 북망 산장 부근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이청문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내공을 모았다.
멀리 이백여 장 밖에서 이편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이 시야에 잡혔다.
“ 왔구나, 놈!”
다른 자들은 몰라도 맨 앞에 있는 연우강의 모습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검은 방갓을 쓰고 검은 옷을 걸친 놈. 그는 연우강이 분명할 터였다. 더불어 연우강을 따르는 자들은 이백여 명 남짓이었다.
‘ 하늘도 우릴 돕는다.’
이청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바람이 불고 있으니 은신해 있는 자들을 발견해 내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놈들이 오고 있는 곳은 비워둔 방향이었다. 이청문은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연우강과 함께 온 자는 군무옥과 몽요 그리고 하오밀문 문도 이백 명이었다. 하오밀문을 이끌고 있는 자는 장사 소지부장 강칠우였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북망 산장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 어떻습니까?]
천리지청술을 펼쳐 주변을 살피던 군무옥이 물었다. 상당수의 무인이 매복해 있는 듯한데 바람소리가 너무 거세 인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비었다. 적랑.]
[ 일부러 빈자리로 가고 있는 겁니까?]
[ 빈자리로 가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 되잖아.]
[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 이 자리를 비워두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 거라고 생각해?]
[ 북망 산장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이곳을 비워두었단 말입니까?]
[ 그렇지. 우린 속아주는 척하면 돼. 그런데 진식은 확실하게 익힌 거냐?]
[ 바위 하나 놓는 건데 뭐가 어렵다고 그러십니까. 저 친구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을 겁니까?]
군무옥은 뒤편에서 따르고 있는 하오밀문 문도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악양을 떠나올 때 연우강은 잠룡들에게 진식에 대한 사항은 끝까지 숨기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 또한 이곳까지 오면서 진식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당연 하오밀문 문도들의 얼굴이 잔뜩 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하오밀문 문도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사라지면 적이 눈치를 채게 된다. 끝날 때까지 모르는 게 나아.]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강칠우를 보았다.
“ 주변을 수색하도록 해.”
“ 알겠습니다. 연공자.”
강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명령을 받은 하오밀문 문도들은 빠르게 흩어져 주변을 살피고 다녔다.
“ 저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청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하오밀문 문도들이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수색을 벌이게 되면 은신해 있던 자들이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오밀문 문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될 테고 이곳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청문은 숨죽인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 휴우!”
사방으로 흩어졌던 하오밀문 문도들이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자 이청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오밀문 문도들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자 하오밀문 진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끝났다. 놈들!”
이청문은 벌떡 일어났다.
하오밀문 문도들이 북망 산장을 이십여 장 앞둔 지점에서 멈췄지만 그곳은 포위망 안쪽, 이젠 어떤 짓을 한다고해도 놈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터였다.
지금부터는 놈들이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것이다.
“ 가자!”
이청문은 주변을 향해 나직이 말하고는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북망 산장 근처에 도착한 하오밀문 문도들은 세 패로 나뉘어 장원 담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연우강은 여전히 대문 앞에 머물고 있었다.
“ 그곳에서 북쪽으로 치고 갈 모양인데, 여긴 내가 있다, 놈! 서둘러라!”
이청문을 비롯한 천살단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 확인했어?”
연우강은 군무옥을 보며 물었다.
이젠 굳이 전음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 저 놈입니다.”
군무옥은 대문 오른 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켰다. 바위 표면에는 북망산장이라는 글씨가 크게 씌어 있었다. 대문 위에 현판을 달지 않고 바위로 대신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바위 오른편에는 깊게 패인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 바위를 옮겨 놓으면 진식이 발동된다고 하였다.
[ 몽요!]
연우강은 어깨에 매달려 있는 몽요를 불렀다.
[ 말하세요.]
[ 먼저 강칠우 가족을 잡고 있는 놈들을 제압하세요.]
[ 알았어요.]
몽요는 연우강의 어깨를 슬쩍 그러쥐고는 북망 산장 안으로 몸을 날렸다. 몽요가 들어가자 연우강은 천리지청술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방금 자신들이 걸어왔던 곳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감지됐다. 열어두었던 곳의 빗장의 확실하게 채운 모양이었다. 더불어 삼엄한 기운이 점점 이편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 전랑, 넌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확보해.”
“ 알겠습니다.”
군무옥은 메고 있던 봇짐을 내리며 북망 산장으로 향했다.
“ 들어간다!”
연우강은 손을 휙 저으며 북망산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북망 산장을 향해 달려간 그는 대문 앞에 다다르자 오른발을 사정없이 내질렀다.
콰앙!
둔탁한 소성과 함께 대문이 부서져 나갔다.
“ 와아!”
“ 우와아!”
“ 와아!”
“ 크악!”
“ 아악!”
“ 으아악!”
우렁찬 함성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장원 안에서 흘러나왔지만 함성에 묻혀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못했다.
대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선 연우강은 안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연우강이 몸을 날려 가는 순간, 군무옥은 왼편에 잡초가 우거진 곳으로 가서는 잔뜩 웅크리고 앉은 채 육참낭아곤을 조립했다.
육참낭아곤 조립을 마친 그는 고개를 들어 연우강이 간 곳을 보았다. 연우강 일행은 이미 동쪽 건물 주변에 당도해 있었다.
“ 크악!”
“ 아악!”
또다시 어둠을 뚫고 비명이 들려왔다.
“ 놈들이네.”
군무옥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무인은 죽어 가는 순간에 내지르는 비명에서 내공이 실리기 마련이다. 하오밀문 문도라면 결코 저런 비명을 지르지 못할 터였다.
“ 놈들이 전부 들어갔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주살하라!”
휙휙! 휙휙!
대문 밖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오더니 검은 그림자들이 담을 너머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군무옥은 내공을 끌어올려 대문 밖 상황을 살폈다.
거의 다 들어온 듯 인기척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 가족을 구했다. 남쪽으로 이동하라!”
“ 하오밀문 문도들은 남쪽으로 이동하라!”
“ 빠르네.”
어둠 속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군무옥은 벌떡 일어났다.
“ 북쪽은 전부 들어왔다. 으아악!”
“ 서쪽은 다 들어왔다. 아악!”
“ 동쪽은 다 들어.... 크아악!”
곧이어 세 곳에서 외침과 더불어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 비명의 주인은 하오밀문 문도들이었다.
슈아악!
“ 크아악!”
“ 아악!”
“ 으악!”
광포한 기운이 전방에서 몰아치고 비명이 줄을 이었다.
“ 개독새도 시작했고.”
군무옥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대문 밖을 흘끔 쳐다보았다.
“ 얼레?”
대문 밖에서 또다시 인기척이 감지된 것이다.
“ 율령궁은 병력의 여유가 없을 텐데......”
군무옥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 이건?”
군무옥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속에서 밀천무영대란 말이 섞여 있었던 거였다. 놀랍게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들은 밀천무인이었던 것이다.
군무옥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설사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하오밀문 문도들은 밀천 무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게 뻔하다.
“ 살려면 뛰는 수밖에.”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군무옥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육참낭아곤을 한편에 꽂아두고 바위를 옮겼다.
“ 됐는지 모르겠네.”
군무옥은 안쪽과 바깥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식이 설치됐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 안으로 들어올 때 약간 차가운 느낌이 든다고 했지.”
육참낭아곤을 챙겨들고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 됐네.”
입가에 싱긋 미소가 맺혔다. 문턱을 넘는 순간 소름이 돋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던 것이다.
“ 전랑!”
바로 그때 멀리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미를 뚫으라는 명령이었다.
“ 알겠습니다.”
군무옥은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연우강의 공격 때문인 듯 남쪽에서 진입했던 율령궁 무인들이 연신 밀리고 있었다.
둥둥둥둥! 둥둥둥둥!
피 냄새를 맡자 심장이 급격하게 뛰며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혈류 속도가 빨라졌다.
또다시 사막의 모래가 보이고 건조한 바람이 가슴속에서 불어 나왔다.
“ 킬킬킬! 나보다 더 큰 새끼들은 전부 죽는다!”
군무옥은 살기 어린 외침을 토해내며 전방으로 쏘아졌다. 육참낭아곤을 들고 내달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야차를 연상시킬 정도로 광포했다.
철컥! 철컥!
낫 형태로 만들어진 칼날ㄹ이 육참낭아곤 끝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육참낭아곤이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서걱!
“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잘려나간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 켈켈켈! 좋다. 씨팔!”
군무옥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는 좌우측으로 빠르게 오가며 육참낭아곤을 휘둘렀다. 마치 폭풍이 불어닥치는 것처럼 그의 기세는 흉포했다.
말로만 목을 잘라내겠다고 하였을 뿐, 그의 육참낭아곤은 목과 몸통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양손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앞뒤 날이 적을 도륙했다. 팔이 잘리고 목이 잘리고 허리가 잘리고, 다리가 잘려나갔다.
허공으로 떠올랐던 머리가 팔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육참낭아곤은 다른 자를 도륙하고 있었다. 군무옥이 펼치는 무공은 연우강으로부터 전수 받은 광풍파랑십삼절이었다. 마치 광풍파랑십삼절은 그를 위해 창안된 무공 같았다. 그가 익힌 정도는 이제 오 성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하나가 됐다.
팔과 다리와 머리가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속에서 군무옥은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의 광분 때문인 듯 율령궁 후미는 금세 열렸다.
“ 하오밀문 무인들은 전력을 다해 달려라!”
후미가 열리자 강칠우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강칠우!”
적을 도륙하던 군무옥이 강칠우를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군 대협”
강칠우는 걸음을 멈췄다.
“ 죽기 싫으면 무조건 달려야 해.”
“ 무슨 말씀이십니까?”
“ 뒈지기 싫으면 앞만 보고 달리라고.”
“ 알겠습니다. 군 대협!”
강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렸다. 하오밀문 무인들 선두는 이미 대문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 놈들을 잡아라!”
“ 막아라!”
“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지 마, 새끼들아!”
군무옥의 신형이 좌우로 움직이며 율령궁 무인들을 향해 육참낭아곤을 휘둘렀다.
“ 광랑!”
그는 적을 도륙하면서 연우강을 불렀다.
“ 왜?”
[ 놈들을 막아야 합니다.]
이번엔 전음으로 소리쳤다.
[ 무슨 소리야?]
문득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했음을 눈치 챈 연우강 역시 전음으로 물었다.
[ 진식을 발동했습니다.]
[ 왜?]
[ 밖에 밀천 무인 놈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진식 안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정말 밀천 무인들이 있었어?]
[ 확인했습니다.]
“ 그랬단 말이지, 그런데 어땠어?”
“ 뭐가 말입니까?”
“ 전에 진식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잖아.”
“ 사막의 모래 안에서 싸운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 사막의 모래 안?”
“ 네!”
“ 그럼 저 안은 우리 세상이네?”
“ 그렇습니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저놈들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 나쁘지 않네.”
“ 율령궁 문도들은 물러나라!”
바로 그때 뒤편에서 내공이 잔뜩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령궁 무인드은 일제히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백여 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청문을 비롯한 천살단 무인들이었다.
“ 이런! 난 우담보가 올 줄 알았는데.”
연우강은 이청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 궁주님을 기다렸다는 건..... 일부러 소문을 냈다는 말이냐?”
이청문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이 옷만 입고 돌아다니면 금세 표시가 나잖아.”
연우강은 손으로 사망묵의를 툭 쳤다.
“ 앵속을 복용했느냐?”
이청문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하오밀문 문도들이 전부 나가고 단 두 명만 남아 있다. 반면에 율령궁 무인들은 천살단을 포함하면 오백 명이나 된다.
그런데 녀석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아무튼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연우강.”
이청문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 난 도망치는 덴 선순데 어떡하지?”
연우강은 뒤편을 가리켰다. 그와 군무옥이 서 있는 곳에서 문까지는 십여 장 거리였다.
“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 둘만 왔을 땐 그만한 준비를 하고 왔다고 생각해야지. 인마. 아무 준비도 없이 오는 놈이 어딨냐?”
연우강은 군무옥의 손을 잡았다.
“ 도망치잔 말입니까?”
오 년 동한 한솥밥을 먹은 관록은 금세 나타났다.
연우강의 손을 잡자마자 군무옥은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줄행랑이었다.
“ 쫓아라!”
이청문은 버럭 소리치며 지면을 박찼다.
“ 놈의 퇴로를 차단하라!”
천살단 대원들이 이청문을 따라 몸을 날려가자 남아 있던 율령궁 무인의 책임자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율령궁 무인들은 신속하게 좌우 측으로 흩어졌다.
[ 몽요! 이곳에서 하루만 기다리면 나와 군무옥이 나올 겁니다.]
진식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연우강은 허공에 숨어 있는 몽요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 나 혼자만 있으라고요?]
[ 진식 밖으로 나오면 기진맥진해 있을 겁니다. 그때 목만 그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밀천 무인들도 있는 것 같으니까 가능하면 진식 안으로 밀어 넣어 주세요.]
[ 열두 시진이란 말이죠?]
이미 진식 안으로 들어가 버린 듯 연우강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끄응!”
몽요는 만화은신사영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 열두 시진이라고 했으니까 쉬어도 되겠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로 향했다.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지만 가재도구들은 비교적 말짱했다.
몽요는 건물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대문이 보이는 창문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 아이고, 추워라.”
그녀는 팔을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침상에 이불이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듯 곳곳에 좀이 슬기는 했지만 추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침상으로 가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는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쉬지 않고 양을 세어보았지만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질 뿐이었다.
“ 돌아버리겠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차라리 밀천 무인들이 들어오는 걸 감시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따라 들어갈 걸 공연히 남아서는.....”
그녀는 연우강이 들어간 진식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곳은 여전히 담이 있고, 부서진 대문이 있다. 문득 진식이란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무튼 머리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 그런 식으로 율령궁 무인을 처리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도대체 그 사람은 못하는 게 뭐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연우강도 못하는 게 있을까.
돈, 무공, 인간성 등 아무리 생까해도 그는 부족한 게 없다. 심지어는 사랑을 나누는데도 최고다.
그렇듯 완벽한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
“ 이건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 그런 게 아니고 정말로 그는 완벽해, 그렇다니까.”
공연히 멋쩍어 몽요는 허공에 대혹 변명처럼 지껄였다.
“ 난 진짜 그를 좋아해. 그가 그런 요구를 할 리는 없겠지만 목숨을 달라면 기꺼이 내줄 거라고, 정말이라니까. 아! 자고 싶다. 그와 함께 불같이 뜨거운 밤을 그냥.. 히잇!”
몽요는 킥킥거리며 혼자만의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한편.
진식 안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운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개도 아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기묘한 압력이다. 그런 기운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다. 그런 기운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진식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연우강은 걸음을 옮겨보았다.
마치 강풍을 전면으로 받으며 나아가는 것처럼 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이철상의 말처럼 늪 속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움직이지 않으면 압력이 점점 강해집니다. 광랑.”
“ 그래? 재미있는 곳이네.”
연우강은 뒤편을 돌아보았다.
안개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을 보는 것처럼 이청문 일행이 희미하게 보인다. 진식 때문에 당황한 듯 이편으로 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어이!”
연우강은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러보았다.
“ 죽여버리겠다, 연우강.”
소리를 들은 듯 살기가 잔뜩 내포된 이청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편을 향해 몸을 날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경공을 펼치고 있는 듯하지만 천살단 무인들이 다가오는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늦었다.
“ 소리는 더 명확하게 들리는 것 같지 않냐?”
연우강은 군무옥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런 것 같습니다. 동작은 늦고 소리는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군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도 슬슬 이동해 볼까?”
연우강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건 쉽지 않았다. 금릉 연씨 세가에서 검왕, 도왕, 권왕 독왕이 초주검이 됐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 정도 압력이면 걸음을 옮기는 데만 해도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하물며 급한 마음에 경공을 펼친다면 이중 삼중 고를 겪게 될 것이다.
견뎌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 같았다.
“ 어떻게 견딘 거냐?”
전에 군무옥이 안으로 들어갔던 때가 떠올라 물었다.
“ 저야 가진 거라고는 힘밖에 없는 놈 아닙니까.”
군무옥은 어깨를 으쓱했다.
“ 압력을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연우강은 손에 잡히 것처럼 떠다니는 운무를 보며 물었다.
“ 빨리 나아가는 방법 말입니까?”
“ 응!”
“ 또 신발 던질까요?”
“ 여긴 동서남북이 전부 똑같잖아.”
“ 너무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 그럼 간단한 질문을 할게.”
“ 하십시오.”
“ 땅속에 갇혔을 때 빠져나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뭐지?”
“ 그거야 굴을 뚫어야죠.”
“ 만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놈이 땅과 비슷하다면?”
“ 하지만 굴을 뚫을 방법이 없잖습니까. 흙은 퍼서 한편으로 치우면 되지만 이것들은 퍼낸다고 해도 금세 채워지고 맙니다.”
“ 그럴까?”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끌어올려 방패처럼 앞에 세웠다. 그런 다음 가운데 쪽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방갓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그러고는 물을 뒤편으로 퍼내는 것처럼 자신과 군무옥을 감싸고 있는 기운을 밀어냈다.
“ 그건 뭡니까?”
군무옥은 놀라 물었다.
바로 옆에 있으니 연우강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연우강이 사용하는 힘은 내공이 아니었다.
“ 마라천력!”
“ 염력이란 말입니까?”
“ 내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야.”
“ 그랬군요.”
군무옥은 경이로운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가 처음 흑랑기에 들어왔을 때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는 류사은과 함께 들어왔다. 그 당시 흑랑기는 ‘예쁜이’ 이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원 십여 명을 살해했다는 소문도 함께 돌았지만 흑랑기 대원들 또한 살인자가 아닌 자가 없어,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소문은 소문 측에 끼지도 못했다. 다만 예쁜이다 라는 말만 무성하게 돌았다.
원래 신참이 들어오면 생김새에 상관없이 이놈 저놈 치근덕거리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쁜이’가 들어왔드니 난리가 아니었다.
먼저 잡는 놈이 임자라는 생각에 몇 놈이 연우강에게 작업을 걸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연우강이 허리춤에 꽂고 다니는 낫에 물건이 잘리고 손괭이에 머리가 부서졌다. 첫날 죽어간 자가 다섯이었고 그 후로도 계속 죽어나갔다. 연우강의 살인 행각이, 아니 흑랑기 대원들의 치근덕대는 행동이 멈춘 건 십 일 후였다. 그 후로는 흑랑기 대원들은 연우강만 보면 피해 다녔음은 물론이고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렇게 연우강의 흑랑기 생활은 시작됐다.
하지마 흑랑기 생활 내내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연우강이 어떻게 산전수전 다 겪은 흑랑기 대원들을 없앨 수 있었는지.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지금 펼치고 있는 마라천력이었다.
악마의 힘 말이다.
“ 어때?”
“ 한결 낫습니다”
군무옥은 빙긋 웃었다.
“ 굴을 뚫는 방법이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속도는 이청문 일행이 경공을 펼치며 몸을 날려가는 속도와 비슷했다.
“ 방법을 찾았는데 몇 놈 죽이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 나를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 그건 너무 잔인한 방법입니다. 광랑.”
군무옥은 투덜댔다.
연우강이 싸우는 방식.
그는 절대 전쟁에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당장 밀고 들어가면 적을 전멸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대항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적을 향해 가서는 손괭이와 낫으로 잔인하게 없앤다. 설사 적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을 해도 그는 받아주지 않는다.
적을 생포하게 되면 감시할 자를 따로 둬야 하기 때문에 전력의 공백이 생기고, 밥을 먹여 줘야 하기 때문에 식량이 들어간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공포와 잔인함의 대명사 개독새.
그 별명은 그렇게 탄생했다.
“ 맹수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건 잔인한게 아니고 당연한 거야.”
“ 저들은 맹수가 아니고 토끼에 불과합니다.”
“ 토끼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야. 좋은 방법이 있는데 굳이 어렵고 힘든 방법을 쓰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 전 광풍파랑십삼절을 익혀야 한단 말입니다.”
“ 그럼 가서 싸우고 와.”
“ 저만?”
“ 난 광풍파랑십삼절을 익힐 이유가 없잖아.”
“ 알았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슉!
바로 그때 연우강의 허리춤에서 뇌섬이 빠져나와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 이거 받아.”
연우강은 사망낭조 하나를 꺼내 군무옥에게 내밀었다.
“ 이건 뭡니까?”
군무옥은 사망낭조에 손가락을 끼우며 물었다. 사망낭조가 연우강의 무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지 주는 이유가 궁금했다.
“ 거기 홈 보이지?”
“ 네.”
“ 그 홈에 사망혈삭을 끼워. 그럼 지금보다 두 배 빠르게 도망칠 수 있을 거야. 맨손으로 사망혈삭을 잡으면 잘리니까 주의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세워들고 율령궁 무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군무옥이 멈춰서자 이청문은 부하들을 독려하여 덩구 빨리 내달렸다. 잠시 후 천살단 대원들은 군무옥과 삼 장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이청문은 군무옥의 어깨 너머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는 이편에 관심조차 주지 않고 걸어가는 중이다.
이청문은 시선을 당겨 앞을 가로막은 자를 보았다.
“ 누구냐?”
잠룡들을 전부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잠룡 십 조 대원들의 특성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저런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는 잠룡은 없었다.
“ 광랑의 친구라고만 알아둬라.”
군무옥은 전면을 스윽 훑었다.
앞으로 나선 자는 백여 명이고, 뒤편에는 그 네 배 가량 되는 자들이 늘어서 있다. 대략 눈짐직으로 보건대 오백여 명 남짓 될 것 같았다.
“ 앵속쟁이 친구인 걸 보면 너도 앵속쟁이인 모양이구나.”
도발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흥분하고, 흥분은 곧 치명적인 실수를 불러온다. 그 효과를 노리기 위해 일부러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청문은 군무옥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 킬! 좀만 한 새끼가 놀고 자빠졌네.”
군무옥은 피식 웃으며 육참낭아곤을 들어 올려 수평으로 눕혔다.
와락!
이청문의 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로부터 그렇듯 쌍욕을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 니가 노려보면 어쩔 건데, 좀만 한 새꺄!”
“ 개자식!”
이청문은 좌우측에 서 있는 부하들을 보았다.
이청문의 시선을 받은 천살단 대원들은 군무옥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아니 몸을 날려갔다는 표현보다는 달려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전 내공을 끌어올린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거북이처럼 굼떴다.
“ 난 지금부터 무공을 익혀야 하니까 오랫동안 버텨줘. 일합도 못 버티고 뒈지는 놈은 머리통을 부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 미친 새끼!”
욕도 전염되는 건 분명한 모양이었다.
앞으로 달려가던 천살단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무공을 익히겠다니.
미친놈이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미친놈이 펼치는 무공이 얼마나 가공한지.
아니 얼마나 많은 동료가 죽어나가게 될지는 그때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 광풍 일절은 회풍류라는 무공이야. 강기가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친다고 보면 돼.”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불끈 틀어쥐고는 오른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쿠웅!
둔탁한 소성이 울려퍼지고 그의 신형이 달려오는 자들을 향해 튀어나갔다. 아니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