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33화 (133/232)

제 6장 이번이 마지막이네.

“ 거참!”

백발광자 포정선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연우강이 이끄는 하오밀문 이백여 명이 북망 산장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에 이어 율령궁 무인들도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

처음엔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건 잠시 잠깐에 불과햇다. 최소한 칠백여 명 정도가 뒤엉켜 있으면 아무리 빨리 끝난다고 해도 반 시진 이상은 걸려야 옳다. 아니 시간은 차치하고라도 비명은 끊임없이 흘러나와야 한다.

그런데 한 식경 가량 지나고 나자 비명이 뚝 그쳤다.

그리고 지금은 인기척조차 감지되지 않는다.

“ 연우강 놈이 그렇게 쉽게 당할 놈이 절대 아니다.”

포정선은 다시 한 번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금의팔영 중 이영인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연우강 때문이었다. 일영이자 대형이었던 일수구주섬 섭광이 어이없게 죽임을 당하고 복수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놈이 이곳 담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주인 나천후에게 이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하여 밀천무영대 이백 명을 이끌고 오게 됐다.

연우강의 실력에 대해 말을 들었던 터라 굳이 처음부터 나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율령궁 무인과 하오밀문 전투가 끝나갈 무렵, 쌍방이 지쳤을 때 쳐들어갈 작정으로 부하도 이백 명만 끌고 왔다.

그 시기는 새벽녘을 예상했다.

그런데 새벽이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 북망 산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싸우는 소리나 비명이 아니라 정적이다.

“ 들어가 봐라.”

포정선은 옆에 있는 부하에게 신호를 보냈다.

“ 알겠습니다.”

밀천무영대 무인은 빠르게 내달려 북망 산장 담을 넘었다.

포정서는 조용히 부하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부하는 한 식경이 지나고, 반시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여전히 북망 산장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이런 미친!”

결국 포정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 은밀하게 들어간다.”

그는 명령을 내리고는 북망 산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십 여장을 빠르게 날아간 그는 훌쩍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담을 넘자마자 곧바로 엎드렸다. 뒤따라온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엎드린 자세로 날아 내렸다.

포정선은 전 내공을 동원하여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 미치겠군.”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으로 들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휙!

이번엔 진입하라는 수신호를 내렸다.

엎드려 있던 밀천무영대 무인들이 은신술을 펼치며 산장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를 수색했을까, 밀천무영대 무인들은 북망 산장의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남쪽 건물 앞으로 모여들었다.

“ 아무도 없습니다.”

“ 없습니다.”

“ 텅 비었습니다.”

밀천무영대 대원들은 은신술을 푼 채였다.

“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포정선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칠백여 명이나 됐다. 그런데 그 많던 무인이 증발하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같은 편도 아니고, 서로 싸우던 자들이 한꺼번에 숨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가거나 하지 않았느냐?”

그는 주변을 감시하던 자들을 보며 물었다.

“ 아닙니다. 제가 지키던 곳으로 나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 저도 마찬가집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을 맡았던 자들이 차례로 고개를 저었다.

“ 빌어먹을! 한 번 더 둘러봐라.”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아 포정선은 다시 수색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건물 안쪽은 물론이고 지하실까지 뒤졌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나오지 않았다.

“ 돌아간다!”

결국 포정선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철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밀천무영대 무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규모의 전투라고 해도, 무인들끼리 싸움을 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게 된다. 그런 상황을 피하게 됐으니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명령이 번복될까 봐 밀천무영대 무인들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대문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 쯧!”

포정선은 혀를 찼다.

부하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철수하라는 명령에 저렇듯 도망치듯 나가는 걸 보니 공연히 씁쓸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문으로 향했다.

그런 그들을 쳐다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그 눈동자의 주인은 남쪽 건물 이층에 있는 몽요였다.

“ 알아서 거미줄 안으로 들어가네.”

몽요는 활짝 웃었다.

연우강은 밀천 무인들이 들어오면 진식 안으로 밀어 넣는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밀천 무인들은 알아서 진식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 이제 두 시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뭘 하고 시간을 보내나.”

몽요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 가만! 아까 어디까지 했더라?”

그녀는 조금 전 하다만 상상을 다시 이어갔다.

“ 맞다. 그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끝났지.”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시 공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광풍파랑십삼절은 흐름의 무공이다.

회풍류, 사풍류, 폭풍류, 광풍류의 전사식과 회수류, 사수류, 폭수류, 광수류의 중사식, 회풍회수류, 사풍사수류, 폭풍폭수류, 광풍광수류의 후사식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십삼절은 열 두 개의 초식을 총망라하는 만류폭풍수다.

전사식, 중사식, 후사식, 그리고 만류폭풍수의 네 가지로 구분하고 열 세 개의 초식이 있지만 광풍파랑십삼절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흐름이다. 그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춤처럼 이어나갈 수 있을 때 최고의 위력이 나타난다.

휙!

윢참낭아곤이 둥글게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군무옥의 육참낭아곤은 느렸다. 고개만 숙이면, 무기만 들어 올리면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군무옥의 육참낭아곤은 정확하게 천살단 무인의 목을 잘랐다.

“ 크악!”

천살대 대원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천살단 대원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렇게 느려터진 적의 무기를 왜 피하지 못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왼편으로 향했던 육참낭아곤이 다시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오른편으로 다가오고 또 하나의 머리가 떠올랐다.

“ 경험보다 더 강한 무공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놈들!”

군무옥은 비릿한 조소를 물었다.

자신 또한 전에 들어와 보지 않았더라면 이곳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눈은 빠르고 동작은 느린 곳.

이곳 상황이 그렀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어야 살아남는다.

동작을 눈에 맞추면 손발이 꼬이고, 적의 무기에 맞추면 늦고 만다.

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초식에 맡겨야만 완전한 무공을 펼칠 수 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흐름으로 무공을 펼치는 곳. 그곳이 바로 팔괘만상대진 안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광풍파랑십삼절을 익힐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군무옥이 굳이 적을 상대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이건?”

이청문은 경악한 얼굴로 군무옥을 보았다.

그의 동작을 피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늦다. 그런데 느리게 휘두르는 특이한 무기에 천살단 대원들이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놈의 무기가 느린 만큼 천살단 대원들이 피하거나 막는 동작도 느리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동작을 보면 마치 경극 같다.

걸음도 느리고 무기를 휘두르는 동작도 느리고, 막거나 피하는 동작도 느리다.

하지만 결과는 경극과 다르다.

경극은 방어하는 자가 반드시 막아내지만 눈앞에서는 잘려나간 머리와 피가 남는다. 벌써 놈에게 당한 천살단 대원들의 수가 삼십 명이 넘었다.

“ 한꺼번에 쳐라!”

이청문은 뒤편에 있는 율령궁 무인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율령궁 무인들은 군우목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십여 장에 불과한 거리를 가는 데도 한참 걸렸다.

“ 나도 이젠 쉬어야겠다.”

군우목은 싱긋 웃으며 아래쪽에 꽂혀 있는 뇌섬으로 왼손을 뻗으며 사망낭조를 폈다. 그러자 땅속에 박힌 뇌섬이 불쑥 튀어나와 사망낭조를 감아 돌았다.

사망혈삭이 사망낭조를 친친 감아 돌자, 그는 왼손을 안쪽으로 당겼다.

“ 좀 쉬었다가 다시 하자, 다음에 봐!”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흔들며 이청문 일행을 따돌리고 빠르게 멀어졌다. 사망혈삭을 감는 건 진식 안에 퍼진 무거운 기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쫓아라!”

이청문을 비롯한 율령궁 무인들은 군무옥을 쫓아 몸을 날렸다. 그러나 율령궁 무인들은 연우강과 군무옥을 따라잡지 못했다.

“ 오냐 놈들!”

이청문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가장 강자인 이청문이 속도를 내자 다른 자들 또한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단전을 완전하게 개방하여 연우강과 군무옥이 아닌 이청문을 쫓아 몸을 날려야 했다.

“ 놈들도 힘이 빠졌다. 힘을 내라!”

율령궁 무인들은 일제히 눈에 내공을 모았다. 이청문의 말처럼 이십여 장 앞서 가던 자들과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좁혀져 있었다.

율령궁 무인들은 더욱 힘을 내 몸을 날렸다.

조금만 더 가면 연우강과 군무옥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처럼 십 장의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 빌어먹을!”

힘이 쭉 빠져 멈추려고 하는 순간 십 장에 달했던 거리가 칠 장으로 좁혀졌다.

“ 놈들이 더 빨리 지친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놈들을 잡을 수 있다.”

이청문은 부하들을 독려하며 몸을 날렸다.

또다시 지루한 추격전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율령궁 무인들은 힘을 냈다.

칠 장이면 한 번의 도약 거리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기에 좀더 힘을 내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어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칠 장에 불과한 거리는 마의 거리였고, 율령궁 무인들은 그 짧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하지만 율령궁 무인들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거리가 오 장까지 좁혀져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진 후에는 오 장이었던 거리가 삼 장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율령궁 무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죽어라 펼치고 있는 경공의 속도가 걸어가는 것보다 더 느려졌다는 사실을 율령궁 무인들은 물론이고 이청문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이제 다 왔다! 조금만 힘을 ....헉!”

고함을 내지르던 이청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바로 앞에 있던 놈들이 꺼지듯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 이럴 수가!”

그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두 놈은 보이지 않았다.

“ 놈들이 사라졌다. 주변을.....”

뒤편을 돌아보았던 이청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껏 잘 따라오는 걸로 여겼던 부하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녀석들은 입으로 코로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 우,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단주님. 내공이 바닥났습니다.”

부하 중 한 명이 힘없는 얼굴로 말했다.

“ 내, 내공이 바닥났다고?”

이청문은 급하게 몸을 점검했다.

“ 맙소사!”

이청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단전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손은 물론이고 다리를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운기행공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어떻게 운기행공을 한단 말인가. 운기행공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고 조그마한 충격에도 주화입마로 직행한다. 지금 상태로 움직이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게 뻔하다.

‘ 갈 수밖에 없다.’

이청문은 이를 악물었다.

현재로서는 전진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앉아 있으면 이곳에서 죽는다!”

그는 부하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천살단 대원들과 율령궁 무인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지친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놈들도 지쳤다. 움직여라!”

그는 부하들을 독려했다.

천살단 대원과 율령궁 무인들은 다시 힘을 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어두운 기운이 잔뜩 깔려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 힘을 내라, 우린 대야벌 최강 문파인 율령궁 무인들이다!”

이청문은 소리를 지르며 선두에서 걸어가는 부하들을 관찰했다. 그들 역시 조금 전 두 놈이 그랬던 것처럼 부하들 또한 꺼지듯 사라지고 있다.

이청문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진식을 설치한 자나 아군에게 같은 변화를 보인다는 것은 놈들이 진식의 변화를 이용하여 아군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냥 주변의 무거운 대기처럼 일상적인 변화일 뿐인 것이다.

“ 봤느냐? 일상적인 진식의 변화일 뿐이다.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청문은 재차 고함을 치며 독려했다.

이청문의 말 때문이 아닐 연우강과 군무옥이 겪은 진식의 변화가 아군에게도 그대로 일어난다는 사실 때문에 고무된 율령궁 무인들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걸음을 옮겼다.

먼저 율령궁 밀정과 감찰사자 사백 명이 먼저 움직이고 그 다음에는 천살단 대원들이 움직였다. 갑자기 사라졌던 곳으로부터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기에 천살단 대원들은 의심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칠십여 명이 모습을 감추고 진식 안에는 이청문만 남았다. 부하들이 사라졌던 곳에 발을 딛고 선 이청문은 심호흡을 했다.

께름칙하다고 해야 할까, 알 수 없는 기운이 자꾸만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는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 이번 전투가 끝나면 승리와 함께 돌아간다. 더 이상 율령궁의 전투는 없을 거다.”

그는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발을 내밀었다.

문득 내민 발끝이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간다!”

그는 힘껏 몸을 내밀었다.

몸을 내민 이청문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비릿한 혈향이었다.

그리고.

“ 허억!”

이청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나온 곳은 대문 앞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수백 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 시체는 조금 전 꺼지듯 사라졌던 율령궁 밀정과 감찰사자 그리고 천살단 대원들이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시체로 변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시체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시선을 돌리자 바로 옆에 연우강이 서 있었다.

연우강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이 들려 있었다.

“ 벌주가 준 묵사야.”

연우강은 묵사를 들어 보이며 싱긋 웃었다.

“ 네놈이 다 죽인 거냐?”

이청문은 연우강을 노려보며 물었다.

“ 원래 힘든 일은 상관이 해야 하는 거잖아.”

“ 악마 같은 놈!”

“ 너나 우담보나 나나 별 차이 없어. 그러니까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가급적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 마음의 상처?”

“ 악마 같다는 말 말이야. 나 스스로는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여기거든.”

“ 넌 무공조차 펼치지 못한 자들 오백 명을 죽였다.”

“ 좀더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기는 해. 그리고 이건 진심인데 난 너 싫어하지 않아. 그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연우강은 천천히 묵사를 들어올렸다.

“ 난 무공을 펼칠 여력이 되지 않는다. 연우강.”

“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가 너를 싫어해서 죽이는 게 아니라고.”

스악!

“ 크아악!”

둥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이청문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 휴우......!”

연우강은 길게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앉았다.

“ 이제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광랑.”

보다 못한 군무옥이 대문 앞을 막아섰다. 밀천 무인 이백 명이 들어갔다고 했으니까 아직 없애야 할 놈들이 이백 명이나 남았다. 그들까지 연우강에게 맡길수는 없었다.

“ 들어가도 돼?”

“ 물론입니다. 광랑, 들어가서 쉬십시오.”

군무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가서 차나 한 잔 해야겠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로 향했다.

남쪽 건물 일층에는 진식 안에서 도망쳐 나온 하오밀문 문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을 쳐다보던 연우강은 사망궤를 내리고 뚜껑을 열었다.

“ 차보다는 술이 낫지 않아요?”

몽요가 모습을 드러내 물었다.

“ 그대로 있어요.”

깔끔하게 밀어버린 머리가 나타나자 연우강은 손으로 지그시 밀며 말했다.

“ 괜찮아요.”

몽요는 만화은신사영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를 없애는 게 더 힘들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은 편안해 보이지만 밤이 되면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지금은 차보다는 술이 필요한 때였다.

“ 처음도 아닌데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차와 찻잔 두 개 그리고 찻주전자를 꺼냈다.

“ 연 공자.”

그때 강칠우가 다가왔다.

“ 몸은?”

“ 절 받으십시오.”

강칠우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연우강이 아니었더라면 그나마 살아남은 가족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건 알지?”

“ 알고 있습니다. 연 공자.”

“ 그래, 그럼 가서 쉬어.”

연우강은 물병을 꺼내 찻주전에 물을 붓고는 삼매진화로 데웠다. 그가 물을 데우는 사이에 몽요는 찻잔에 찻잎을 넣었다.

물을 따르자 향히 피어올라 코끝을 간질였다.

연우강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 안고 맛을 음미해가며 천천히 마셨다. 그렇게 두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 밖에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밀천 무인들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 나보다 키가 작은 놈은 살려주겠다!”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비명이 줄을 이었다. 두 잔째 차를 마시고 있는데, 군무옥이 안으로 들어왔다.

“ 끝난거야?”

연우강이 물었다.

“ 진식도 해진했습니다.”

“ 수고했어.”

연우강은 찻잔을 군무옥에게 건넸다.

“ 술은 없습니까?”

“ 모대주가 있는 데 마실래?”

“ 화주는 없습니까?”

“ 난 그런 싸구려 술은 안 마셔.”

“ 사막에 있을 땐 안 그랬잖습니까?”

“ 그땐 고급 술이 없었잖아. 인마. 강칠우!”

연우강은 모대주 한 병을 꺼내 군무옥에게 내밀고는 강칠우를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연 공자.”

“ 철수해. 그리고 지금부터는 우담보를 찾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

“ 알겠습니다.”

강칠우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북망 산장으로 들어왔던 하오밀문 문도들은 조용히 길을 나섰다.

“ 우리도 일어날까?”

연우강은 꺼내놓았던 용품을 사망궤 안에 집어넣고 등에 걸머졌다.

“ 어디로 가실 겁니까?”

“ 가지치기는 끝났으니 이젠 몸통을 잘라야지.”

“ 그놈이 대야벌 백대 고수 서열 육 위라고 했습니까?”

“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무공 서열이 아니고 아부 서열 같아.”

“ 손을 열심히 비벼서 그 자리까지 올라갔단 말입니까?”

“ 완전히 맹탕은 아니니까 덤빌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그러다가 그 실한 물건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 수가 있으니까.”

“ 아부로 그 자리에 오른 게 아니구먼.”

대문 앞에 다다른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조립하여 싸우기 전에 놔두었던 자루를 찾아 안에 집어넣고 둘러맸다.

“ 아부와 실력을 겸비해야 성공하는 거야, 인마. 실력 조금 있다고 목에 힘주는 놈이나,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아부만 능한 놈은 절대 성공 못해.”

“ 흐흐흐! 알았습니다. 그놈은 광랑이 알아서 하십시오.”

“ 방해하면 너도 죽여버릴 거다.”

“ 그런데 그놈 저보다 키가 큽니까?”

“ 당연히 크지 인마. 남자 중에 너보다 작은 놈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아직 몰랐냐?”

“ 그럼 양보 못합니다.”

“ 네가 죽는다니까.”

“ 전 저보다 키가 큰 놈에게는 절대 패하지 않습니다.”

“ 그럼 네가 천하제일이겠네.”

“ 아마 머잖아 그렇게 될 겁니다.”

“ 그런 놈이 천마 앞에서 오줌을 지렸냐?”

“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 가만있어도 들리더라.”

“ 광랑은 토하는 걸로 영역표시를 하지만 전 오줌으로 영역표시를 합니다. 그리고 맹수들은 영역표시를 반드시 오줌 으로 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 악양루를 네 영역으로 만들어서 뭐 할 건데?”

“ 그 앞에 담을 치고 돈을 받아볼까 생각 중입니다.”

“ 돈벌이하려고?”

“ 누군가 그렇게 하면 평생 돈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 어떤 미친놈이 그런 소릴 했는데?”

“ 광랑입니다.”

“ 나?”

“ 그렇다니까요.”

“ 그땐 난 미쳐 있었잖아.”

“ 아무튼 악양루는 이제 제겁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말을 하면서 북망 산장에서 멀어졌다.

***********

“ 저, 전멸이라고?”

우담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는 확인을 구하는 눈빛으로 유선을 보았다.

“ 이번 작전에서 살아남은 자는 대략 오백여 명입니다.”

오백여 명이란 유선의 말이 이명처럼 들려왔다.

눈앞이 노래지고 머릿속은 캄캄해진다.

오백여 명 가량입니다. 오백여 명 가량입니다. 오백 여 명가량입니다. 이명은 계속됐다.

쿠웅!

“ 저, 전멸이라고.....”은 소리가 가슴팍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엄청 우담보의 동체가 한편으로 기우는 듯하더니 풀썩 쓰러졌다.

“ 궁주님!”

우담보를 안아 일으키는 유선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성공을 장담했던 작전이었다. 이번 작전에 율령궁의 모든 것을 걸었고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율령궁의 전멸이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설사 적에게 머리를 디밀어도 나올 수 없는 그런 참혹한 결과였다.

“ 진식이었습니다. 궁주님. 놈들은 서른 곳의 거점에 진식을 설치해두고 율령궁을 뜰어들인 겁니다.”

살아남은 자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 진식으로 들어가게 되면 엄청난 압력이 온몸을 짓누르고, 그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기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내공이 바닥날 때 즈음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곳엔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고 전부 목이 잘렸다고 하였다.

만이천명이 전부.

“ 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유선은 우담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 최선을 다했습니다. 놈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고, 놈들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따졌습니다. 우리가 인원 수도 많고 무인의 수도 더 많았습니다. 결코 패할 수가 없는 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이없게도 패했습니다. 완벽하게.”

유선은 허리로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는 단검을 천천히 뽑았다.

“ 안 되오. 유 원주.”

분석실에서 유선을 지켜보던 이사진이 황급히 다가가며 소리쳤다.

“ 말리지 마시오. 이 원주.”

“ 아니 되오. 우리에겐 아직 오백 명이 남았고, 대야벌이 남았소. 다시 시작하면 되오.”

“ 뭘로 다시 시작한단 말이오?”

유선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절어 있었다.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요, 유 원주. 우리가 있고 궁주님이 있소. 아직 끝난 게 아니외다.”

“ 이 원주 말이 맞네. 유 원주.”

나직한 목소리가 탁자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정신을 차린 듯 우담보가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우린 이 작전을 시작할 때 작전 계획서에 머리를 얹었네. 그 말은 곧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네.”

“ 전 자신 없습니다. 궁주님.”

“ 죽을 각오로 다시 시작하면 되네. 다행히 우리에겐 좋은 친구들이 많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열심히 뛰면 다시 일어설 수 있네. 단.....”

우담보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뒤 확고하게 말했다.

“ 이대로 갈 수는 없네.”

일만 명이 넘는 인원으로 실패한 일을 오백 명으로 한다는 건 무리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 지금 어디에 있는가?”

“ 궁주님!”

유선은 답답한 얼굴로 우담보를 불렀다.

“ 다른 자는 손댈 생각 없네. 연우강만 잡겠네. 이 손으로. 그런 다음 연우강의 머리와 내 왼팔을 벌주께 바치겠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하세.”

우담보는 마지막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빈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최소한 하나 정도는 건져서 돌아가야 할 터였다. 우담보가 염두에 둔 그 목 하나가 바로 연우강의 머리였다.

“ 이번이 마지막이네, 유선.”

“ 알겠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검을 집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 원주 자넨 연우강 놈의 소재를 파악하게. 동정호 주변을 뒤지면 놈에 대한 단서가 나올 거네.”

“ 알겠습니다. 궁주님.”

이사진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분석실로 들어갔다.

그 날 밤.

오백 명 남은 율령궁 무인들이 전부 악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담보가 연우강의 소식을 접한 건 사흘 후였다. 우담보는 무복을 걸치고 그의 애병인 구천뇌혼검을 허리에 찼다.

“ 오랜만이군.”

그는 구천뇌혼검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율령궁 궁주가 되면서 구천뇌혼검은 거의 뽑지 않았다. 구천뇌혼검을 뽑을 정도로 강자를 만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굳이 순위 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전력을 다한 적도 없다. 하지만 이번엔 구천뇌혼검을 뽑아야 할 듯했다.

석수 산장을 나선 우담보 일행은 형양 선착장에서 배에 올랐다. 배가 동정호를 향해 출발하자 우담보는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선과 이사진 또한 선실로 들어가 조용히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운기행공을 끝낸 일행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차를 마셨다. 물길 따라 흘러 내려가는 길이라 어두워질 즈음하여 동정호에 도착했다.

악양루 근처에는 이미 감찰사자가 마중 나와 있었다.

“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이사진은 감찰사자를 보며 물었다.

“ 계속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 술을 마셔?”

“ 낮에는 자고, 밤에는 술을 마십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습니다.”

“ 축배를 들고 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원주님.”

“ 하오밀문 문도들은?”

“ 전부 철수하고 장화루에 남은 자들은 잠룡 십 조 일행뿐입니다.”

“ 상태는 어떤가?”

“ 장화루 술이 부족해서 다른 주루에 있는 술까지 전부 가져다 퍼마시고 있습니다.”

“ 궁주님!”

보고를 받은 이사진은 우담보를 보았다.

“ 안내하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감찰사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앞장을 섰다. 우담보는 걸음을 옮기며 악양루를 보았다. 바쁘게 살아온 탓에 악양루 구경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쳤다.

‘ 나중에 하면 되겠지. 이번 일이 끝나면......’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악양루를 지나쳐 갔다.

악양루 서쪽 성벽을 넘어 달려가던 일행은 멀리 장화루가 보이는 곳에서 속도를 늦췄다.

“ 하하하!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광랑!”

“ 그러게 말이야. 삼 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아무튼 생각지도 않은 즐거움을 얻었어.”

장후루에서 떠드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우담보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방금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연우강이었다.

감찰사자의 말처럼 술이 많이 취한 듯 목소리에조차 취기가 느껴졌다.

“ 우엑!”

“ 야! 구토는 나가서 해, 인마.”

“ 나가긴 어딜 나가, 자식아. 대야벌로 들어갈 때까지 여기서 먹고 싸기로 했는데.”

“ 어르신. 제 술 한 통 받으십시오.”

“ 이놈아, 이걸 다 마시면 난 죽어.”

“ 술은 관록으로 만신다고 하신 분이 어르신입니다. 단숨에 비우셔야 합니다. 남기면 벌칙으로 두 통을 마셔야 한다고 하신 거 아시죠?”

“ 허허허! 물론이다. 녀석아. 이 정도야......”

이번 목소리의 주인은 이자승이었다.

우담보는 구천뇌혼검을 사정없이 틀어쥐었다.

“ 자리를 확보했습니다. 궁주님.”

“ 어디냐?”

우담보는 감찰사자를 보며 물었다.

“ 장화루 건너편 기루 삼층입니다. 감찰사자 대원이 장기 투숙한 곳이라 들킬 염려는 없습니다.”

“ 전망은?”

“ 장화루가 한눈에 보입니다.”

“ 안내하라.”

“ 따라오십시오.”

감찰사자를 따라 나선 우담보는 일 각 후 기루의 삼층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확보해 둔 곳이라는 말은 맞았다. 방안에서는 기녀의 지분 냄새가 아니라 홀아비 냄새가 떠다니고 있었다.

우담보는 창가로 다가갔다.

대원의 말처럼 장화루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잠룡 십 조 일행은 마당으로 나와서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술통을 돌리고 있었다. 절반 정도는 술에 늘브러져 있고, 제대로 앉아 있는 자들 또한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흐느적 거렸다.

“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그때 이자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건 생각 중입니다. 영감님. 담대만승 그놈은 제게 범천룡 자리를 줄 것 같은데... 딸꾹!”

“ 꿈 깨라. 녀석아. 담대만승 그놈이 네게 범천룡 자리를 주면 내가 평생 네 종이 되겠다. 녀석.. 우욱!”

느닷없이 이자승이 벌떡 일어나더니 구석진 곳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우담보는 천리지청술을 끌어올렸다.

정말로 술에 취해 토하는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슈악!

“ 정말 취했군.”

토사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우담보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 그것 좀 마셨다고 토를 하는 법이 어딨습..... 우욱!”

연우강은 더했다.

입을 틀어막았음에도 불구하고 토사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놈을 비롯한 잠룡 십 조 대원들은 술에 절은 상태였다.

“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우담보는 유선을 보며 물었다.

“ 술에 취한 게 틀림없습니다. 궁주님. 하지만 고수는 내기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금세 몸을 원래 상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 함정일 수도 있단 말인가?”

“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가라 하였습니다.”

“ 놈은 날 죽일 생각이 없었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백리 단주의 목이 왔을 때를 기억하는가?”

“ 연우강이 보낸 서찰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 서찰에 이런 내용이 있었네.”

<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놈이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든다.

이 내기에 내 전재산을 걸겠다. 우담보>

우담보는 서찰 내용의 일부를 읊었다.

“ 놈이 원하는 게 지금 우리 모습이란 말입니까?”

“ 그렇다네. 놈은 우리를 죽이는 것보다 살려둬서 벌주로부터 버림받게 만들 생각이었네. 사실 놈의 입장에서 보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네.”

“ 그럼 놈은 우리가 대야벌로 귀환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 아마 처음엔 술을 마시지 않았을 거네. 우리가 기습해 오기를 기다렸을 테지. 그러다가 날짜가 흘러도 나타나지 않자 은밀하게 귀환했다고 생각했을 거네.”

“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유선은 말끝을 흐렸다.

연우강을 모른다면 모를까. 그동안 수없이 당했다. 목을 잘라낼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놈이었다.

“ 일단은 기다리도록 하세.”

“ 냄새나, 녀석아.”

또다시 혀가 잔뜩 꼬인 이자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술 냄새밖에 안 나는데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십니까?”

“ 술 냄새가 아니라 똥 냄새가 나, 그러니까 나가서 씻고 와.”

“ 밖에 물이 없습니다. 영감님.”

“ 물이 왜 없어. 녀석아. 동정호에 가면 온통 물 천진데.”

“ 거기까지 다녀오란 말입니까?”

“ 가서 술 좀 깨고 와. 그래야 계속 마실 거 아냐. 다섯 통에 가는 놈이 어딨어, 녀석아.”

“ 영감님하고 마신 게 다섯 통일 뿐입니다. 저 녀석들하고 마신 건 그보다 훨씬 더 많단 말입니다.”

“ 아무튼 새벽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가서 씻고 와.”

“ 그건 그렇고. 손녀딸 저 주기로 한 약속 잊으면 안 됩니다. 영감님.”

‘ 쿡!’

우담보는 피식 웃었다.

이자승의 손녀딸이라면 이지약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일반 가정집 며느리도 아니고 황제의 친동생인 남경왕 주진무의 며느리다. 설사 남편이 없고, 상대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시집간 손녀딸을 준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공개석상에서.

술이 취하지 않으면 오갈 수 없는 말들이었다.

우담보는 고개를 돌려 유선을 보았다.

“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게 맞는 거 같습니다. 궁주님.”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우담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 놈이 나옵니다. 궁주님.”

그때 긴장한 이사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장화루를 보았다.

정말로 동정호로 갈 생각인 듯 연우강이 비틀거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 고맙다, 연우강.”

우담보는 차가운 눈으로 연우강을 노려보며 검 손잡이를 지그시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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