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구리돈 일 문
- 율령궁이 전멸했다.
-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하고 전멸을 당했다!
- 율령궁과의 전쟁에서 하오밀문이 승리했다!
처음엔 말 만들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남에 들어갔다가 온 자들은 한결같이 율령궁이 전멸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였고, 더 이상 헛소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강호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고 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됐으니 쉽게 믿어진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었다. 하오밀문이 어떤 문파인가.
아니 그들을 무림문파라고 여기는 자들이 과연 있기나 하는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율령궁은 지상 최강 단체인 대야벌의 머리 역할을 했던 단체가 아닌가. 두 세력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율령궁이 하늘이라면 하오밀문은 땅, 아니 땅속에 있는 지하동굴이다. 그런데 지하 동굴이 하늘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소문이 강호 전역을 강타하자 비로소 세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가 천하 무림 동도께 고하오.
과연 지금 무림이 제대로 된 무림인지 나는 묻고 싶소. 왜 무림인이 됐소?
검을 손에 쥔 이유가 도대체 뭐요?
자유롭고 싶어서였을 거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상식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 검을 들었을 거요.
하지만 현실은 어떻소.
“ 대야벌이라는 거대한 어둠은 우리를 짓누르며 복종을 강요하고 있소. 대야벌의 말은 곧 법이고, 대야벌의 행태는 곧 정의가 됐소.
과연, 이게 올바른 세상이오?
대야벌이 우리보다 더 가지고 있는 건 힘밖에 없소.
그들은 그 힘으로 강호 무림을 핍박하면서, 감히 자신들이 사는 조그마한, 전체 무림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한 그곳을 무림이라고 말하고 있소.
그래서 난 그곳으로 들어갔소.
과연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스스로 무림이라 칭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소.
하지만 내가 본 대야벌은 썩어 가는 오물에 지나지 않았소. 음모와 귀계가 난무하고,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그곳은 결코 무림이 아니었소.
그곳에서 나는 한 곳에 고인 물은 언젠가는 썪는다는 절대 명제를 확인했소.
아울러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무림 동도 여러분.
나는 감히 나설 수밖에 없었소.
우리 밀천의 먼 조상들이 시작하였으며 밀천의 천주였던 우주만옹 혁세걸 그분이 대야벌 벌주를 패배시키면서까지 이루고자 하였던 일을 시작할 참이오.
그 첫 번째 일이 밀천의 개파대전이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되고자 하는 동도들이여.
부디 많이 참여하여 자리를 빛내주기를 바라오.
위치: 호남 만양산
날짜: 명년 청명절
밀천 천주 무무대야 나천후 배상.
그것은 밀천의 개파대전을 알리는 방이었다.
강호인들이 주목한 부분은 구구절절 늘어놓은 말이 아니라 마지막에 쓰인 호남 만양산이란 글자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율령궁이 전멸 당했다는 호남이었다.
율령궁의 전멸과 함께 느닷없이 개파대전을 선언한 밀천의 행보는 공교로운 시점에 나온 선언이라고 보기엔 작위적인 냄새가 너무 심하게 풍겼다. 즉 율령궁을 전멸시킨 밀천이 자신감을 얻고 개파대전을 선언했다고 단정 짓는 자들이 더 많았다.
아무튼 대야벌에서 일어난 대규모 벌내쟁투와 율령궁의 전멸 그리고 밀천의 개파대전까지, 쉬지 않고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강호 무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으로 변한 것만은 분명했다.
침울한 기운이 실내를 감싸고 들었다.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이세 천마 제석강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병한 잠룡대 대원들이었다.
잠룡대 대원들의 입을 닫게 만든 사건은 대야벌에서 벌어진 벌내쟁투도 아니고, 밀천의 개파대전 소식도 아니었다. 이들이 이렇듯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이유는 율령궁의 멸망 소식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고, 비록 담대무궁을 통했다고 하지만 수시로 연락을 취했던 율령궁이 멸망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지상 최강의 단체인 대야벌의 직속 문파가 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눈치였다.
“ 우리도 율령궁의 멸망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겠군요.”
조장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잠룡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이지약이었다.
“ 무슨 책임 말이오?”
담대무궁은 이지약을 보며 물었다.
“ 우리가 밀천 무인이라고 오해했던 자들을 말하는 거예요, 담대공자.”
“ 쌍방이 서로 오해를 했던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소. 우리 잠룡대 또한 그곳에서 열다섯 명을 잃었소.”
“ 하지만 우린 살아남았고, 집행사자들은 전부 죽었지요. 지금은 율령궁이 전멸을 당했고요.”
“ 율령궁을 전멸시킨 놈들은 밀천이오. 이 소저. 우리가 집행사자를 없앤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 잠룡궁에서도 그렇게 믿어줬으면 좋겠군요.”
“ 믿어줄 거요.”
단호한 듯 했지만 담대무궁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결여돼 있었다. 이미 잠룡대 대주 자리가 날아갔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 일을 무마시킬 수 있는 공을 세운다면 모를까 지금과 같은 경우에 벌주 아들인 자신에게 잠룡대 대주 자리를 주게 되면 역효과만 날 뿐이다. 줘서도 안 되고, 설사 준다고 해도 받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 내가 받지 못하면 아무도 받지 못할 테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범천룡 직위를 받지 못한다면 이곳에 있는 잠룡들 중 한 명을 골라서 범천룡 직위를 내려야 하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잠룡대에 속한 잠룡들 또한 집행사자들을 공격한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범천룡 직위는 허공에 떴다고 봐야 한다. 어쩌면 십지십룡 자리마저 취소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이제 어떻게 할 거죠?”
이지약의 못고리에 담대무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이세 천마를......”
“ 그는 이미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어요.”
“ 이제 돌아가는 게 낫겠소. 대주.”
윤허가 담대무궁과 이지약을 보며 말했다.
“ 무슨 소린가, 부대주. 우린 아직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네.”
“ 삼 년 연공은 이제 두 달 남았소. 정식 무인이 되면 그땐 정말로 바빠질 텐데 남은 기간만이라도 편히 쉬고 싶소.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잠룡들도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담대무궁은 윤허를 쏘아보았다.
쉬고 싶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이미 율령궁 집행사자를 공격한 일은 대야벌로 보고가 됐을 테고 평가에 반영됐을 것이다. 윤허를 비롯한 조장들은 그 평가가 그대로 고착되길 바란다. 그래서 그만 돌아가자고 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딱힌 거절할 명분이 없다. 이세 천마라는 자는 증발하듯 사라져버렸고, 율령궁은 전멸했다. 밀천의 텃밭인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 좋소, 돌아가도록 합시다. 어느 길로 갔으면 좋겠소?”
담대무궁은 결국 돌아가는 걸 택했다.
“ 난 가는 길에 서릉협을 구경했으면 싶소, 대주.”
듣고 있던 사유성이 대답했다.
“ 서릉협?”
담대무궁은 의아한 얼굴로 사유성을 보았다.
“ 구당협, 무협, 서릉협은 장감삼협으로 불릴 정도로 절경으로 소문난 곳이 아니오. 조금 전 윤 조장 말처럼 대야벌로 들어가면 최말단일 텐데,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런 곳을 구경할 수 있겠소. 머리도 식히고 장래 구상도 할 겸 서릉협으로 갔으면 좋겠소.”
“ 그쪽은 안 돼요, 사 조장.”
이지약이 고개를 저었다.
“ 왜 안 된단 말이오?”
“ 그쪽은 위험해요.”
“ 하하하! 장강삼협의 물살이 거칠다고는 하지만 유능한 사공은 능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조장.”
사유성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 거친 물살 때문이 아니에요.”
“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 저희 구림세가는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과 조금 친분이 있어요. 개방 거지들 또한 정보를 취급하곤 하는데 최근에 이상한 말을 했어요.”
“ 어떤 말을 했는데 절경 구경을 마다하신다는 겁니까?”
“ 서릉협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하더군요.”
“ 수상한 움직임이라면, 이를테면 무인들이 출몰한단 말입니까?”
“ 출몰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동하는 일행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들의 출발지는 이곳 호남이라고 하더군요.”
“ 그러니까 이 소저 말은........”
“ 좋네. 사 조장, 서릉협 구경을 가도록 하세.”
담대무궁이 사유성의 말을 잘랐다.
그가 사유성의 말을 중간에 끊은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올 말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남에서 출발한 무인들.
그들은 밀천 무인이 분명할 터였다.
담대무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포기한 순간 찾아온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쟁의 당사자는 율령궁과 하오밀문 무인들이었지만 세간에서는 율령궁을 멸망시킨 자들로 밀천을 꼽고 있다.
대야벌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사 하오밀문에게 멸문을 당했다고 해도 대야벌에서는 쉬쉬할 수밖에 없다. 하오밀문 같은 삼류문파에게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불명예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밀천 무인을 토벌하여 전과를 세우게 되면 집행사자를 없앤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
아니 집행사자와 싸웠던 행위는 밀천 무인을 토벌한 전과에 묻히고 말 것이다. 삼합평에서 대승을 거두자 잠룡 십 조의 활약이 묻혔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묻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집행사자들을 공격한 행위는 묻히고 밀천 무인을 토벌한 영웅 담대무궁만 남게 될 것이다.
“ 담대 공자.”
이지약이 못마땅한 얼굴로 담대무궁을 불렀다.
“ 정히 불안하면 이 소저는 다른 길로 오도록 하시오.”
“ 꼭 서릉협으로 가야겠다는 말인가요?”
“ 서릉협뿐만 아니라 무협과 구당협도 구경할 참이오. 장강삼협에 대한 말만 들었지 나도 한 번도 보지 못했소.”
담대무궁은 단언하듯 말했다.
그러고는 사유성을 돌아보았다.
“ 출발 준비를 서두르게. 사 조장. 이건 여비네. 얼마든지 써도 좋네.”
담대무궁은 사유성 앞으로 돈주머니를 던졌다.
“ 알았소이다. 대주.”
사유성은 벌떡 일어나 조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나도 서릉협의 절경을 구경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지약은 찌푸린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한 얼굴로 담대무궁을 보았다.
그로부터 반나절 후.
출발 준비를 마친 잠룡대 대원들은 배에 올랐다.
잠룡 대원들이 떠나는 그 시각 다른 곳에서도 출발 준비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연우강을 비롯한 십 조 대원들이었다.
“ 섭섭하지 않아?”
연우강은 허일구를 보았다.
“ 뭐가 말인가?”
“ 일은 하오밀문이 다했는데 열매를 딴 자들은 밀천 무인들이잖아.”
소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천후가 개파대전에 대한 걸 밝히면서 율령궁을 멸문시킨 자들이 밀천이란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이제는 하오밀문이 관여됐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하더군.”
“ 하지만 진실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법이지.”
“ 우리 하오밀문에서 율령궁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언젠가는 드러날 거란 말인가?”
“ 아냐, 앞으로도 결코 세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대야벌 수뇌들이나 밀천 수뇌들 그리고 강호 무림에서 목에 힘깨나 준다는 놈들은 전부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하오밀문은 함부로 대할 문파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테고.”
“ 복수만 한 게 아니라는 말이군.”
“ 물론이야. 이제 하오밀문이 할 일은 전에 내가 말했던 그거야.”
“ 정보의 고급화란 말인가?”
“ 중원 최강의 정보단체였던 율령궁이 멸문했으니까 정보를 다루는 문파는 하오밀문 밖에 없잖아.”
“ 대야벌의 각 문파나 밀천 등은 독자적인 정보 조직이 있네.”
“ 당연히 있어야지. 안 그러면 정보를 팔아먹을 곳이 없는데.”
“ 그들이 우리 손님이란 말인가?”
“ 손님이 아니고 고객이지.”
“ 그렇군.”
“ 그건 그렇고 놈들은 지금 어디 있지?”
“ 맨 입으로는 안 되겠네.”
허일구는 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내게도 돈을 받겠다는 거야?”
“ 이런저런 사정을 전부 들어주면 우리 입에는 거미줄을 쳐야 하네.”
“ 건전한 사고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구리돈 한 문을 꺼내 허일구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 너무 작은 거 아닌가?”
“ 그놈들은 그 정도 가치밖에 없는 것들이야. 그 이상 지불하면 사람들이 비웃어.”
“ 헐!”
허일구는 피식 웃었다.
연우강이 한 문이라고 말한 그들은 대야벌 천상천의 범천뇌격단을 말한다. 오백 명으로 이루어진 범천뇌격단에 대한 정보 가치가 한 냥도 아니고 구리돈 한 문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범천뇌격단 단주가 이 사실을 알면 게거품을 물 것이다.
“ 인원은?”
“ 총 오백 명으로 구성돼 있네.”
“ 단주는?”
“ 단주는 뇌정도제 담대진승이고 부단주는 무정마혈도 담대찬승이네.”
“ 승 자 돌림이네?”
“ 둘은 담대만승의 사촌으로 알고 있네.”
“ 무공 정도는?”
“ 둘 다 백대 고수 서열 십 위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강자라고 알려져 있네. 담대진승의 무공인 대범천뇌정도법과 담대찬승이 익힌 혈라무정도법은 대야벌 삼대도법 중 일위와 이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강한 도법이라고 하였네.”
“ 그렇단 말이지. 그 외 주의할 자들은?”
“ 뇌격팔마라는 자들이 있네. 범천담대세가 무인들로 구성돼 있는 자들인데, 그들 무공 또한 백대 고수 안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고 하였네.”
“ 주의할 자는 총 열 명이란 말이네. 그건 됐고, 다른 건?”
“ 범천뇌격단이 펼치는 진식이 있네.”
“ 어떤 진식인데?”
“ 연환오도천살진이네. 운무 속에서 펼쳐지는 진식인데 기본 단위는 다섯 명이네. 동서남북 네 방향과 하늘에서 공격을 가해온다고 하네.”
“ 적이 공격해 올 때 한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 공격해 오는 걸로 보면 된다는 말이네.”
“ 뒤에 있는 자가 가장 강하고 전면에 있는 자가 가장 약한 자네.”
“ 지금 놈들은 어디 있지?”
“ 뇌정도제 담대진승이 이끄는 일 진은 서릉협에 있고, 무정마혈도 담대찬승이 이끄는 이 진은 무한에 있네.”
“ 우리가 출발하면 바로 따라붙겠다는 말이구먼.”
“ 그렇네.”
“ 잠룡대는 어디로 갔지?”
“ 그들의 목적지는 서릉협이네.”
“ 그럼 우리도 서릉협으로 가야겠구먼.”
“ 신도 공자로부터 연락이 왔네.”
“ 집은?”
“ 무사히 피신시켰다고 하더구만.”
“ 나머진 아직 연락 없어?”
“ 아직.”
“ 연락 오면 담대찬승 그놈들 뒤를 따르라고 해.”
“ 알았네.”
“ 대야벌은 어때?”
“ 거긴 완전히 초상집이네.”
“ 초상집이라는 건 나도 알지. 다른 문파 상황이 어떠냐고 묻는 거야.”
“ 다른 문파라면?”
“ 봉황림과 만독림, 패천림을 말하는 거야.”
“ 그 세 문파는 조용한데... 그들에게도 뭔가 일어날 거라고 보는 건가?”
“ 조만간 뭔 일이 터져도 터질거야. 잘 주시하고 있어.”
“ 알았네.”
“ 그동안 수고했어, 영감.”
“ 그런데 삼 년 연공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건가?”
“ 잠룡대 대주로 다시 보게 될 거야.”
“ 대야벌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 나야 백 번 그렇게 하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 황실 때문이구먼.”
“ 가능하면 남철진도 감시를 해 줬으면 좋겠어.”
“ 알았네. 힘들겠지만 시도는 해보겠네. 그런데 무슨 수로 잠룡대 대주가 된단 말인가?”
“ 대주 좀 하라고 떠밀면 당연히 해야지 별수 없잖아.”
“ 자네에게 대주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고?”
“ 응!”
“ 누가?”
“ 담대만승이지 누구겠어. 아무튼 밀천 개파대전 때 보자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허일구는 황룡호에 오르는 연우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담대만승이 연우강에게 잠룡대를 맡긴다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연우강을 비롯한 잠룡 십 조를 없애기 위해 범천뇌격단까지 출병시킨 자가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두고 보면 알겠지.”
“ 다음에 봐!”
배 위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허일구는 손을 흔들었다. 방향을 돌린 황룡호는 북편으로 천천히 멀어졌다.
********
잔뜩 흐린 날처럼 회의실은 침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담대만승, 만우량, 범일승, 혁세군. 혁련무군의 다섯 명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전멸이라는 한 단어였다. 천오백 년 역사 동안 대야벌은 크고 작은 많은 사건을 겪었다. 하지만 대야벌에서 전멸시킨 무림 문파는 있어도, 대야벌에 속한 문파가 외부 단체에 의해 전멸당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대야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율령궁이.
“ 우린 장님이 됐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담대만승이었다.
우담보라는 인재를 잃은 게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 더 문제는 정보 선이 끊어졌다는 사실이다. 대야벌 같은 거대 단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인 사항은 무인이 아니라 정보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 있다고 해도 적재적소에 투입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적재적소를 파악하게 해주었던 수단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담대만승은 만우량을 보았다.
“ 최하 삼 년은 잡아야 합니다.”
만우량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삼 년도 짧게 잡은 것이었다. 이곳에 있던 일만오천과 중원 각처에 퍼져 있던 오천 명까지 무려 이만 명이 몰살을 당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정보 단체가 아니고 무인을 구하는 거라면 삼 년 아니라 삼 개월 안에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야 할 조직은 무인 조직이 아니라 정보 조직이다. 정보를 다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정보를 활용 가능한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눈이 있어야 하고, 그런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교육이 필요하다.
만우량이 최소 삼 년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삼 년이 걸리든 삼십 년이 걸리든 해야 하는 일이니까 당장 율령궁 재건을 시작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벌주님.”
“ 그리고 밀천에 대한 건은 어떻게 처리하기로 하였는가?”
“ 그들의 개파를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 공개적으로 우릴 비난했네.”
“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율령궁이 와해된 상태에서 그들과 전쟁을 치룰 수는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궐이나 야궐 또는 군마련에서 나서주는 것인데 그들 또한 이번 벌내쟁투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담대만승은 다른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 만 군사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을 치기 위해서는 호남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호남은 밀천의 안방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정보 선까지 와해된 상태고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룡궁의 궁주 혁세군이 대답했다.
“ 강호 무림에서 우리 대야벌을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비웃을 텐데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 그렇게 둘 수는 없지요.”
“ 하면?”
“ 밀천을 대야벌의 하부 단체처럼 보이도록 하면 될 듯합니다.”
“ 그렇게 할 수 있는 방안이라도 있단 말인가?”
“ 잠룡들의 교육이 끝날 때 나천후에 대한 언급만 해주시면 될 겁니다.”
“ 어떤 식으로 언급하란 말인가?”
“ 대야벌 잠룡이 밀천의 천주가 됐다는 사실을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고, 잠룡 직위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거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 제명시키지 않고 대야벌 무인으로 그대로 두자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그럼 나천후는 대야벌 잠룡 신분이면서 밀천의 천주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로선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 거기에다 잠룡대를 축하사절로 보내면 더욱 멋진 그림이 그려지겠구먼.”
“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 좋네, 그건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세. 연설문은 혁 궁주가 적당히 작성해 보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벌주님.”
“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잠룡들에 대한 건을 마무리하고 가세.”
“ 어떤 마무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이제 두 달 후면 삼 년 연공이 끝나네. 그들의 직위에 대한 구체적인 사안들을 논의돼야 하지 않겠는가?”
“ 그건 따로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일단 지금까지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부적인 조건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성적으로만 보면 일 등부터 오십 등까지는 연우강을 비롯한 잠룡 십 조 대원들이 전부 차지했습니다.”
“ 잠룡대가 집행사자를 공격한 건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비록 쌍방이 밀천 무인으로 오해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집행사자 이백여 명이 몰살당했습니다. 만일 율령궁의 출병 목적이 잠룡대였다면 그들은 최고 평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령궁의 목표는 잠룡대가 아니라 하오밀문이었습니다. 더불어 잠룡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아군을 공격해 곤란에 빠지게 했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만에 하나 율령궁이 멸문당하지 않고 하오밀문이 멸문했다면 구제할 여지가 있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최악의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잠룡 십 조는 하오밀문과 손을 잡고 율령궁과 전쟁을 치렀던 자들이네.”
“ 지금껏 잠룡 십 조는 대야벌 내의 많은 문파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율령궁과의 전투 또한 그 일환으로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렇군.”
담대만승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잠룡강호행은 어느 누구라도 해도 공격해 온 자들은 전부 적이 되고 물리쳐야만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더불어 혁세군의 말처럼 그동안 만마림, 사월림 등 몇몇 문파와 전쟁을 치렀다. 율령궁과 전쟁을 치렀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했다고 할 이유가 없다.
잠룡 십 조는 잠룡강호행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행동을 하였고, 최고 평점을 받는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 하지만 잠룡 십 조는 논공행상의 모든 부분에서 제외하기로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따라서 다른 잠룡들 또한 십지십룡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하면 잠룡대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주가 필요하네.”
“ 대주는 잠룡대 대원 스스로 뽑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 오! 그런 방법이 있었구먼.”
담대만승은 빙그레 웃었다.
잠룡들 스스로 대주를 뽑도록 하면 다른 누구보다 아들인 담대무궁이 유리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 그건 그 정도면 됐고......”
담대만승은 범일승을 돌아보았다.
“ 연말에 잠룡들의 교육 이수를 축하하는 연회와 더불어 대야벌 전체 회의가 있다는 소식을 각 문파에 전달했습니다.”
“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해 주게.”
“ 물론입니다. 궁주님.”
“ 그리고 새롭게 창설된 정보 단체도 우선은 범 궁주 자네가 맡도록 하게.”
“ 영광입니다. 벌주님.”
“ 오늘 회의는 이만 하도록 하세.”
담대만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쉬십시오.”
“ 쉬십시오.”
회의실을 나선 일행은 담대만승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들을 배웅한 담대만승과 만우량은 담대만승 집무실로 들어갔다.
“ 단주로부터 연락은 왔는가?”
“ 뇌정도제는 서릉협에 대기 중이고, 무정마혈도는 무한에서 대기 중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마저도 마지막 전서구였습니다.”
“ 앞으로 범천뇌격단의 소식도 알 수 없다는 말이군.”
대야벌을 나갈 때 전서구를 가져간 덕에 범천뇌격단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지막이라고 한다.
“ 그렇습니다.”
“ 하면 놈들은?”
“ 그들에 대한 소식은 물론이고 잠룡대에 대한 소식마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만우량은 고개를 저었다.
“ 타격이 크군.”
담대만승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율령궁의 부재가 가져온 타격은 곧바로 나타나고 있다. 잠룡 십 조의 움지임뿐만 아니라 잠룡대에 대한 소식도 현재로선 알 수가 없을 터였다. 아마도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아나야 소식이 들어올 것이다.
“ 다른 곳은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은 호남과 대야벌 사이의 정보망이라도 복원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벌주님.”
만우량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당분간은 힘들 겁니다. 벌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만우량의 눈가엔, 원한으로 가득 찬 차가운 광채가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