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밤이 두려운 남자
둥글게 타원을 그리며 탁자가 놓여 있었다.
각각의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열일곱 명이다. 그들은 선영에 대한 신년 하례를 마치고 회의실로 들어온 각 문파 수뇌들이었다. 이미 이런저런 덕담이 오간 듯 분위기는 비교적 밝았다.
" 그런데 막 림주는 어디 아프오?"
담대만승은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며 물었다. 패천림의 림주라는 명패가 적힌 자리에 앉아 있는 노인은 패천오노 장육철이었다. 사실은 하례를 올릴 때부터 묻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꾹 참고 있었다.
" 림에 약간의 일이 있었소이다. 벌주. 그래서 내가 림주 대행으로 회의에 참석한 거요."
"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면 좋겠소이다. 장 대행."
담대만승은 슬쩍 미소를 베어 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참으로 다사다난이란 말이 어울리는 한 해였소이다. 많은 문파를 잃었지만 빈자리는 금새 채워질 거라는 걸 나는 믿소이다. 올해 또한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소이다. 가장 큰 일은 코앞으로 닥친 밀천의 개파대전이오."
" 거기에 대해 준비한 거라도 있소이까?"
공손정우가 물었다.
" 하하하! 우리 대야벌이 군소 문파의 개파대전에 대해 어떤 준비를 한다면 세인들이 비웃소이다. 공손 궐주."
" 그럼 공공연하게 우리 대야벌을 비난한 그들을 그대로 두자는 말이오?"
" 그럴 순 없지요."
" 하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오?"
" 대접을 해 주어야지요."
" 어떤 대접을 말하는 거요?"
" 다행히 우리에겐 밀천과 격이 맞는 단체가 있소이다."
" 격이 맞는 단체라고요?"
공손정우는 의아한 얼굴로 담대만승을 보았다. 격이 맞는 단체라는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수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담대무궁의 대답을 기다렸다.
" 밀천의 천주가 우리 잠룡 출신 아니오. 그런 자와 격이 맞는 자들이 누가 있겠소."
" 아!"
공손정우는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담대만승의 술수가 뻔히 보였다. 결국 장황하게 꺼낸 이야기와 결론은 잠룡대에 무인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차피 알고 있는 사항이니까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소. 난 연우강 대주의 요청을 들어주자는 쪽이외다."
" 나도 찬성이외다."
뒤이어 야궐의 궐주 야제 혁련무극이 찬성표를 던졌다.
" 나도 찬성이오."
" 나도......"
동시에 찬성표를 던진 자들은 묵야련의 련주와 사자림, 사해림 림주 세 명이었다.
" 담대 련주의 생각은 어떻소?"
담대만승은 담대천호를 보았다.
" 나도 찬성입니다. 벌주님."
" 찬성이라고?"
담대만승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담대천호와 공손정우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문파는 반대표를 던질 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럼 야궐을 비롯한 네 문파에서 파견 형식으로 무인을 보내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들인 담대무궁에게 훨씬 유리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담대천호가 무인을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담대만승은 시선을 돌려 공손정우를 보았다. 둘 사이에 어떤 묵계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 우리 무궐에서도 무인을 보내기로 했소이다, 벌주."
역시 예상했던 답이 들려왔다.
" 그럼 다른 문파들도 마찬가지겠구려."
" 그렇소이다. 새해 첫 안건인데 반대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소이다."
" 좋소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 우리는 보낼 수 없소이다. 벌주."
패천림 대표로 참석한 금강육사 장육철이 담대만승의 말을 잘랐다.
" 이유라도 있소?"
담대만승은 얼굴을 찌푸렸다.
총회 안건으로 올라온 사안은 찬반을 가려 절반 이상이 찬성하면 통과된다. 총회에서 통과된 안은 본인의 의견과 상충된다고 해도 따라야 하는 게 대야벌의 율법이다. 그런데 장육철의 어투에서는 절대 따를 수 없다는 강경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 우리도 패천림과 같소이다. 벌주."
" 우리 만독림도 마찬가지요. 벌주."
장육철에 이어 봉황림 림주와 만독림 림주도 강한 어조로 말했다.
" 이거... 심각한 일인가 보오이다."
담대만승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 우리 패천림은 대야벌에서 탈퇴하기로 하였소이다."
" 우리 봉황림도 마찬가지요."
" 우리 만독림도 대야벌을 떠나기로 했소이다."
찬물을 끼얹은 듯 실내가 조용해졌다.
가히 폭탄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대야벌이 창설되고 천오백 년이 흘렀지만 세 문파가 한꺼번에 탈퇴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밀천의 개파대전을 앞두고 세 문파가 나간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것이다.
" 사실이오?"
담대만승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 우리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소, 벌주."
장육철이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 뭐가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이오?"
" 생사림,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 중 우리 패천림보다 약하다고 할 수 있는 문파는 한 곳도 없소이다. 심지어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는 파벌을 이루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그들이 멸문을 당했소. 대야벌은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벌내쟁투를 통해 깨달았소."
" 벌내쟁투 때문에 나간단 말이오?"
" 살아남기 위해 나간다고 생각해 주시오."
" 두 분도?"
담대만승은 만독림과 봉황림 림주를 보았다.
" 문도들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고 하오. 그들을 달래보았지만 역부족이었소. 그래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소이다."
봉황림 림주는 음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 그렇구려."
담대만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정을 내리고 통보하려 온 자들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할 수는 없다. 깔끔하게 보내주는 게 나을 듯했다.
" 알았소. 바쁜 일이 많아 배웅은 못할 것 같소이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까지의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거요."
담대만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 나도 그렇소이다. 벌주. 그동안 즐거웠소이다."
장육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 대야벌을 잊지 않겠소. 벌주."
" 잊지 않겠소이다. 벌주."
이어 봉황림 림주와 만독림 림주가 고개를 숙였다.
"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겠소."
" 그럼!"
세 사람은 다른 수뇌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회의실을 나갔다. 세 사람이 나가고도 한참 동안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 허허허! 깊게 생각할 필요 없소이다. 여러분. 내가 늘 강조했던 것처럼 대야벌은 드록 나는 게 자유로운 곳이고 그들은 이곳이 싫어서 떠나는 것뿐이외다."
" 만일 그들이 밀천으로 들어가면 그땐 어떻게 할 거요?"
공손정우가 물었다.
벌내쟁투가 무서워 떠날 수는 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만일 세 문파가 밀천으로 들어간다면 단순히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대야벌의 위명에 치명타가 될 게 뻔하다.
"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오. 하지만 우리의 적이 된다면 그들에게 남은 건 멸문밖에 없을 거요.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소. 공손 궐주."
" 하하하! 그건 벌주 말이 맞습니다. 떠날 자는 떠나는 거고 남는 자는 남는 거요. 이제 그들은 잊어버리고 잠룡대에 대한 안건을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담대천호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기분이 좋았다. 패천림, 만독림, 봉황림의 탈퇴는 형님인 담대만승에게 치명타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훗날 벌주를 선출할 때가 되면 최대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그게 낫겠네. 담대 련주. 그럼 인원수부터 정하도록 하세."
" 인원은 굳이 백 명으로 한정할 게 아니라 최하 백 명으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 나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 우리도 찬성이외다. 벌주."
" 좋소. 그럼 무인을 보내는 형식은?"
"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파견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공손정우가 말을 받았다.
" 그렇게 합시다. 그럼 그 안건은 결정 난 걸로 하겠소. 인원은 공사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서 보내도록 합시다."
" 알겠습니다. 벌주."
세 문파가 탈퇴한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듯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반 시진이 흐른 후 새해 첫 총회는 막을 내렸다.
" 무궁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각 문파 수뇌들이 전부 나가자 담대만승은 만우량에게 물었다.
" 생사림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벌써 그곳에 갔단 말인가?"
" 연우강 그놈이 오늘 아침까지 생사림으로 들어온 자에 한해서만 잠룡대 대원으로 받아준다고 했답니다."
" 기고만장했군."
" 놈으로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무궁을 의식한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 자네 생각은 어떤가?"
" 무궁 공자가 잠룡대를 장악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십니까?"
" 그렇네."
" 우리가 보내는 무인들이 얼마나 해주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 지원이 절대적이란 말이군."
" 그렇습니다."
" 무궁에게는 중책을 맡기지 않겠지?"
" 제가 그놈 입장이라고 해도 맡기지 않을 겁니다."
" 말단으로 굴린단 말인가?"
" 장차 최대 경쟁자가 될 사람에게 중책을 맡길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요."
" 바보는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그릇이 큰 사람은 경쟁자에게 중책을 맡긴다네. 뇌천."
" 중책을 맡길 거라고 보십니까?"
"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담대만승은 연우강이 담대무궁을 결코 무시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자신이 벌주이기 때문이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잠룡대로서는 보급품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다른 부서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그런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인맥이 넓은 자를 중용해야만 하는데 그런 조건을 갖춘 자는 아들인 담대무궁밖에 없다. 설사 담대무궁을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해도 중요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가 확신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 대외담당 군장이라고?"
담대무궁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 쉽게 말하면 대외담당군이라는 조직의 대장을 말하는 거야."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직책이 뭐지?"
" 아주 다양해."
" 구체적으로 말해라."
" 넌 사람이 사는 데 기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 그거야......"
" 입고 먹고 싸는 거, 간단하게 의식주라고 하지."
" 그러니까 나보고......"
" 끝까지 들어. 대외담당군장. 네가 할 일은 첫째는 예산 편성, 둘째는 보급, 셋째는 대외홍보야."
" 그, 그런 일을 나보고 하라는 말이냐?"
담대무궁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넘실댔다. 녀석이 좋은 자리를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룡대의 살림을 맡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물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나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난쟁이 똥자루 대머리, 아니 조양궁 범일승 궁주와 사이가 아주 나빠. 이곳에 들어와서 사이가 틀어졌으면 그나마 나을 텐데, 잠룡패를 가지고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싸웠단 말이야. 아마 기회가 오면 그 난쟁이 대머리 똥자루 새끼는 날 묻어버리려고 할 거라고. 그런 상황인데 내가 그 난쟁이 대머리똥자루 새끼를 찾아가서 예산을 달라거나 보급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넌 내 대신 그 일을 맡아 하는 거야. 쉽게 말하면 대주 대행이라고 할 수 있어."
" 대주 대행이라고?"
" 물론 예산 편성, 보급품 수령, 대외홍보, 이 셋에 한해서겠지만. 그리고 대장은 일을 하는 게 아냐.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거지."
" 개자식!"
담대무궁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번지르르하게 포장은 했지만 결론은 잠룡대 살림을 맡아 하라는 말이다.
" 만일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 참! 그거 깜빡했군. 잠룡대에는 규칙이 딱 하나 있어. 그게 뭐냐면, 상하복명 절대복종이야."
" 상하복명 절대복종이라고?"
" 흑랑기에 있을 땐 그걸 지키지 않은 놈은 죽여서 묻었는데 여기선 그렇게 할 수가 없잖아."
" 나가야 한다는 말이냐?"
" 나가면 잡지 않을 테고 나가지 않으면 죽일 거야. 물론 죽이는 건 내가 아니고 백발랑군이 맡겠지만."
" 백발랑군?"
"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백발랑군은 사실 지옥에 있던 죄수들이야. 가장 연장자는 신주제일검 욱일승인데, 혹시 알아?"
" 정말 지옥의 죄수들이란 말이냐?"
사실 그들에 대해 말이 많기는 했지만 정말로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일 정말 그들이라면 이 또한 중요한 정보였다.
" 그곳에서 기연을 얻어서 주화입마를 풀었다고 하더라. 아무튼 욱 영감의 십육마환무정검을 견식했는데......."
연우강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을 터인데 숨긴다호 해서 숨겨지는 것도 아닐 듯했다.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었다.
" 담대무궁 네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아무튼 그래. 이제 결정해라."
" 하, 하겠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잠룡대를 장차 림이나 련으로 키울 생각을 하고 계신다. 요청은 연우강이 했지만 기꺼이 무인을 보낼 생각을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계획을 전부 세워두었는데 지금 당장 자존심이 상한다고 나갈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할 터였다.
" 고마워."
연우강은 담대무궁의 어깨를 툭 치며 활짝 웃었다.
" 그리고 이건 잠룡대의 조직도야."
연우강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담대무궁에게 내밀었다.
" 읽어본 다음에 일을 시작해. 한 달 후면 공사가 마무리 될 거니까 그때까지는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땐 말투가 바뀌었으면 좋겠어. 그럼 수고해."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담대무궁이 종이를 펼쳤다.
잠룡대 조직도
총대주: 광랑 연우강.
대주: 철장마도 막장
군사: 이철상( 교랑 )
광랑수호대
단장: 빙마후 수여설.
백발랑군
군장: 벽력패왕 두보관
흑랑군
총군장 : 전랑 군무옥
제 1흑랑군: 낙일사검 마장웅
제 2흑랑군: 낭혼 북리태우
제 3흑랑군: 다라밀영 이라파
제 4흑랑군: 구룡대군 윤허
제 5흑랑군: 마웅신조 전관수
제 6흑랑군: 유성비검 신도영
제 7흑랑군: 표풍마권 차남승
제 8흑랑군: 사자신권 사후린
제 9흑랑군: 환비도 종리웅
교정군
적랑 사마윤
사랑 마장승
귀랑 백을상
대외담당군
군장 : 등천대룡 담대무궁
잠룡대 율법
제 1령 상하복명 절대복종
" 으음!"
조직도를 훑어보던 담대무궁은 신음을 내뱉었다.
조직도만 호고 보면 마치 거대한 세력 같다. 총대주가 있고, 대주가 있고, 전투조가 있고 훈련을 담당하는 조직이 있다. 거기다 방금 자신의 자리라고 하였던 대외담당군까지 있다. 이백여 명이 전부인 조직치고는 조직도가 너무 방대했다.
하지만 담대무궁이 신음을 뱉어낸 건 방대하게 만들어진 조직도 때문이 아니었다. 벽력패왕 두보관과, 철장마도 막장이란 이름 때문이었다.
두보관은 패천림 전대 림주였고, 막장은 최근까지 문주였다. 한 조직 내부에 림주를 지녔던 무인이 두 명이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놈과 친분이 있는 이자승은 황궐의 궐주를 역임한 적이 있고 지옥의 죄수인 신주제일검 욱일승은 사십여 년 전 철무련의 련주, 묘강독존 갈인효는 만독림의 림주였다.
북해어옹 수천월 또한 십대 고수에 들 정도로 강자였고, 속내는 어쩔지 모르지만 겉모습만큼은 그 어떤 조직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인원 구성이었다.
작지만 큰 조직, 잠룡대의 모습이 그랬다.
" 하지만......"
담대무궁은 멀어지는 연우강의 등에 시선을 꽂았다.
" 주화입마는 말이다. 깨진 도자기와 같다는 걸 알아야 한다. 연우강. 도자기는 한 번 깨지면 아무리 잘 붙인다고 해도 원래의 모습이 될 수가 없다. 곳곳에 금이 가 흉물스러운 건 기본이고, 깨질 때 가루로 변한 것들은 붙이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한 번 주화입마에 들면 절대 고칠 수 없는 게 무인의 몸이다, 놈!"
담대무궁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지옥에서 나온 죄수들을 놓고 하는 말이다. 설사 과거가 화려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발톱 과 이가 빠진 늙은 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라고 담대무궁은 생각했다.
" 우선은 원하는 대로 해주마. 하지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넌 조직을 키워주기만 하면 된다. 연우강."
담대무궁은 조직도가 씌어 있는 종이를 와락 구겼다. 잠시 후 담대무궁은 과거 생사림 본관 건물이었던 생사전으로 향했다.
벌내쟁투로 불탔던 생사전에는 수십 명이 달라붙어 한창 보수 공사 중이었다.
그때 연우강은 이철상과 함께 생사림 곳곳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 주요 건물은 열네 채고, 부속 건물은 백사십 채입니다. 부속 건물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오십 명 가량이고요."
" 건물의 배치는 어떻게 돼 있지?"
" 주요 건물은 정중앙에 본관이 있고, 정동, 정서, 정남, 정북에 한 채씩 중간 건물이 있으며 최 외곽엔 세 채씩 외벽과 일직선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각 건물은 본관이 오 층, 중간에 위치한 건물이 사 층, 외곽에 있는 건물이 삼 층입니다. 그리고 각 건물에는 열 채씩 부속 건물이 딸려 있습니다."
" 보수 작업은?"
" 현재 야장 인원 삼천 명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한 달에 전부 끝낼 수 있습니다."
" 금액은 어느 정도를 예상하지?"
" 인건비는 일인당 다섯 냥씩 해서 만 오천 냥 정도고, 자재비는 삼만 냥 정도를 잡았습니다."
" 그럼 오만오천 냥이네."
" 잡다한 비용까지 합쳐서 육만 냥으로 책정햇습니다."
" 청구서를 담대무궁에게 줘."
" 그가 한다고 했습니까?"
" 지가 안 하면 어쩔 건데."
" 큭!"
이철상은 낮게 웃었다.
대외담당군. 직책은 그럴싸하지만 사실 돈을 끌어오는 직책이다. 벌주의 아들이자 차기 벌주로 키워지고 있는 담대무궁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대외담당군의 군장이라는 말을 듣고 똥 씹은 얼굴이 됐을 그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 그 녀석은 잠룡대가 지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남을 수밖에 없지."
" 망상이라는 걸 언제쯤 깨닫게 될까요?"
"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해. 교랑. 여길 제 소유처럼 생각해야 우리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어. 그보다 흑전으로 해."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생사전의 현판을 흑전으로 바꾸라고."
" 다른 건물은 어떻게......"
" 그곳은 각 군장들에게 맡겨야지."
" 알겠습니다. 총대주님."
" 흑전 공사는 언제쯤 끝날 것 같아?"
" 가장 빨리 끝내달라고 했습니다."
" 오지 않은 사람은 누구 누구지?"
" 이지약 소저. 전마 사유성, 혼무영 나웅 세 명이 오지 않았습니다."
" 그럼 다 온 셈이네."
" 그들이 오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 응! 아무튼 지금쯤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연우강은 정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 무슨 소식 말입니까?"
" 저기 오네."
연우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야장의 창노가 남궁운화와 함께 이편을 향해 오고 있었다.
" 오랜만이다, 녀석아."
창노는 활짝 웃었다.
"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 손녀딸을 찾았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 지금까지 함께 있었던 거요?"
" 밀린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그랬다. 아무튼 고맙다."
" 내가 한 일이라도 있소. 남궁 가주가 착해서 복 받은 거지. 그나저나 어떻소?"
" 여기서 이야기할 거냐?"
" 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소."
" 네 침실 가구는 내가 전부 채워주마."
" 무슨 소리래?"
연우강은 뜨악한 얼굴로 창노를 보았다.
" 망한 놈이 쓰던 살림을 쓰게 되면 오던 복도 달아난다고 하더라. 더구나 새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가구라도 새 걸로 장만해야지."
" 흑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 흐, 흑심은 무슨. 어른이 해주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여,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창노는 뜨끔했다.
사실 녀석의 방에 들여주려는 가구는 혼수다. 아니 녀석을 역을 올가미라고 해야 옳다. 나중에 혹시라도 이런저런 말이 나오면 혼수도 다해줬는데 무슨 소리냐고 큰소리를 칠 참이었다.
창노가 이렇듯 서두르는 것은 전날 연우강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사업채의 이름을 흑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흑벌.
그 말은 곧 대야벌을 흑벌로 바꾸겠다는 의미다.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 난 최고급 아니면 안 되는데?"
" 물론 네 녀석의 수준에 맞춰서 최고급으로 장만해야지."
" 그래주면 좋고. 그런데 살림 넣어주겠다는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 그건 아니다. 오늘 아침에 패천림, 만독림, 봉황림이 짐을 쌌다."
" 그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고, 만기팔유는 어떻게 됐는데?"
" 귀신같은 놈!"
창노는 혀를 내둘렀다.
아직 천상천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만기팔유를 비롯한 천무비고와 승천비고에 있던 자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런데 녀석은 이미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 앉아서 천리를 본다고 하더니 녀석이 그랬다.
" 천마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당연한 거잖아."
" 그가 정말로 강호에 뜻을 두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 강호에 뜻을 둔게 아니라 놀고 싶은 거요."
" 놀고 싶다고?"
" 내가 전에 만족공황증에 대해 이야기 했잖소."
" 복에 겨운 놈들이 하는 심심풀이 말이냐?"
" 그렇소. 하지만 일반적인 만족공황증 환자들의 심심풀이완 엄청난 차이가 있소."
"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이냐?"
" 부자가 한 번에 돈을 쓰는 것과 가난뱅이가 한 번에 돈을 쓰는 차이라고 보면 되오."
" 강호 무림에 큰 파장이 올 거란 말이구나."
" 천오백 년 최강 무강이었던 일백마가 강시 상태로 살아날 거요."
" 으음!"
창노는 신음을 내뱉었다.
일백마의 일인인 무불 백강의 무공에 대해서는 들었다. 그의 일초를 제대로 받아낸 무인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런 자가 백 명이면 아마도 막아낼 자가 거의 없을 듯했다.
" 비급은 어떻게 됐소?"
" 중요한 비급은 대부분 가져갔다."
" 덜 중요한 것들은?"
" 야장으로 전부 옮겨왔다."
" 잘했소, 영감."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 그가 어느 선까지 원할 거라고 보느냐?"
" 내가 바라는 건 그가 적당한 선에서 끝내는 거요."
" 정확하게 말해라."
" 삶의 활력소를 얻는 정도에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가 재미를 붙이거나 미쳐버리면......"
" 미치면?"
" 우린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거요."
"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 난 상황을 보고 판단할 뿐이지 사람을 보고 판단하진 않소, 영감."
" 그를 이길 수 있겠느냐?"
" 상대는 마의 조종이라 불리는 고금제일인이오."
" 너도 상대가 안 된단 말이냐?"
창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아는 한 천하제일인은 연우강이다. 그런데 연우강이 안 된다면 천마를 막을 사람이 없다.
" 혹시 살림을 넣어준다고 했던 거 취소하는 건 아니겠지요?"
" 그거야 저 아이 팔잔 걸 낸들 어떻게 하겠냐?"
창노는 남궁운화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 할아버지가 넣어준다는 살림하고 저와 관계가 있어요?"
남궁운화는 멀뚱한 얼굴로 물었다.
" 그럴 리가 있느냐, 저 녀석과 특별한 인연도 잏고 해서 넣어주려는 것뿐이다. 공사장 구경이나 가자꾸나."
[ 방법을 찾아내라, 연우강.]
창노는 걸음을 옮기며 전음을 보냈다.
" 내가 무슨 수로?"
[ 아무튼 내 손녀딸을 과부로 만들면 지옥까지 쫓아갈 테니까 그리 알아, 녀석아.]
창노는 그렇게 말하고 생사전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교랑!"
" 말씀하십시오."
" 내가 그렇게 잘났냐?"
" .......?"
이철상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말을 못하는 걸 보니까 잘났다는 거구나. 하긴 내가 봐도 난....."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노가 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혹시 그것도 만족공황증 증상의 하납니까?"
" 천마와 같아지려면 비슷한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연우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겻다.
인간의 힘은 대단했다.
수천 명이 달라붙어 작업을 하자 진척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공사를 시작한지 보름이 지나자 건물들의 보수공사는 끝나고 그로부터 오 일이 경과했을 때는 정원을 비롯한 환경정리까지 마무리됐다.
그리고 일월 이십오일.
드디어 잠룡대 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룡대 대원들이 가장 먼저 모여든 곳은 늑대들이 노는 곳이라는 이름의 회의장인 낭희전이었다.
본관이 흑전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낭희전에는 이백여 석의 좌석이 비치돼 있고 각종 차를 비롯한 음료수와 골패나 마작 등 놀이거리가 준비돼 있었다. 근무 인원은 다섯 명이었다.
연우강이 들어서자 앉아 있던 잠룡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앉아."
연우강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하지만 잠룡들은 연우강이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앉았다.
" 잠룡대 조직도는 봤어?"
" 봤습니다. 총대주님."
"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 손!"
하지만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하는 게 좋아. 한번 확정되면 내손에 맞아죽는 경우가 아니면 바뀔 경우가 거의 없을 거니까."
" 불만 없습니다. 총대주님."
" 정말?"
" 그렇습니다. 총대주님."
" 좋아, 그럼 이대로 하지. 나중에 신입들이 들어오면 그때 다시 말하겠지만, 밖에 나가서 사고를 쳐도 상관없고, 사람을 죽여도 정당방위만 인정된다면 내가 구해줄 거야. 즉 대부분 자유란 말이야. 단 조직도의 맨 마지막에 있는 조항만 확실하게 지켜, 그럼 잠룡대 생활이 아주 즐거울 거야."
잠룡들은 고개를 숙여 조직도를 보았다.
그곳에는 상하복명 절대복종이라는 여덟 글자가 씌어 있었다.
" 알겠습니다. 총대주님."
대원들은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 좋아, 그럼 차나 한잔씩 하자."
연우강은 계산대처럼 만들어진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그곳에 서 있던 다섯 명이 찻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각 탁자를 돌아다녔다.
" 질문 있습니다."
대원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 지금은 이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우리 잠룡대 대원의 수는 일천을 넘어가게 될 거야.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모두의 이름을 기억할 수도 없어. 질문을 할 때는 반드시 관등성명을 먼저 대는 습관을 들여줬으면 좋겠어."
" 전 염왕수라고 불리는 장사덕입니다."
" 좋아, 알고 싶은 게 뭐지?"
" 방금 말씀 중에 신입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싶습니다."
"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이를 잊어. 잠룡대의 서열은 나이나 무공이 아니라 누가 먼저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느냐에 따라 달라져. 잠룡대에서는 먼저 들어온 놈이 이거야."
연우강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만약 그들이 거부하면 어떻게 됩니까?"
장사덕은 다시 물었다.
" 잠룡대에서 나가던지 맞아 죽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
" 알겠습니다. 총대주님."
장사덕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잠룡들 도한 장사덕과 다르지 않았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편히들 쉬어."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때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막장이 다가왔다.
" 정말 그렇게 할 거냐?"
" 뭘?"
" 네 성격에 내보낼 리는 죽어도 없을 테고, 결국엔 패 죽인다는 건데 정말 그렇게 학ㄹ 거냐고?"
" 그건 막장 네 일이야."
" 내 일이라고?"
" 응! 총대주가 그런 일까지 할 수 없잖아."
" 야, 자식아. 난....!"
" 잘 들어. 우리 잠룡대로 오는 놈들은 두 부류야."
" 담대무궁을 지원하기 위해 오는 놈들은 충성스런 자들이고, 나머지는 반항적이어서 기존 문파에 적응하지 못한 놈들이라는 거냐?"
" 바로 봤네. 그놈들 중 우리가 데리고 가야 할 놈들은 후자야. 그들을 쉽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시범적으로 몇 놈 죽여야 해. 물론 무조건 패죽이는 게 아니고 말을 듣지 않으면 그렇게 하라는 거야."
"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 각서를 받을 거니가 상관없어."
" 어떤 각서?"
" 우리가 잠룡으로 대야벌에 들어왔을 때 썼던 그런 각서가 되겠지. 죽어도 상관없다는 내용의 각서 말이야."
" 그래도....."
" 그 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거야. 넌 죽이기만 해."
" 에라, 나쁜 새끼야!"
막장은 주먹을 들어 올려 때리는 시늉을 했다.
문득 녀석과 함께 잠룡쟁투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룡대전엔 내가 참석할 거야. 넌 실전 경험을 쌓아.' 그 소리에 미친 듯이 싸움을 했던 것이다.
" 아무튼 그 일은 놈들이 오면 그때 다시 생각하기로 하자고, 그런데 그건 어때?"
연우강은 흑전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 뭐?"
" 형수씨하고는 잘되어가는 거야?"
" 지금은......."
" 아직도 안되는 거냐?"
" 글쎄 그게....."
막장은 말끝을 흐렸다.
" 넌 새꺄! 어떻게 된게...."
" 나도 답답해 죽겠어. 새꺄. 누군 하기 싫어서 안 하는 줄 알아?"
" 으이그, 병신. 하여간 줘도 못 먹어. 아직 남아 있냐?"
" 남아 있냐는 건 무슨 소리야?"
" 형수씨 아직 네 곁에 있냐고."
" 그럼 자식아, 있지 어딜...... 혹시 그것 때문에 도망치기도 하냐?"
막장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 막장."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마, 말해라."
" 밤엔 마음을 편하게 가져. 무공 같은 건 절대 생가하지 말고, 오직 형수씨만 생각해. 못한다는 생각도 버리고."
" 그게 마음처럼 되면 얼마나 좋겠냐, 이젠 밤이 두렵다."
" 그 정도냐?"
연우강은 심각한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녀석은 아직 총각딱지를 떼지 못했다. 그런 녀석이 밤이 두렵다고 말할 정도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 알았다. 심각하게 연구해 보마."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를 툭 쳤다.
" 나, 가마."
막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처소로 향했다. 그의 처소는 흑전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 거참! 답이 안 나오네. 그 녀석이라면 알려나?"
연우강은 유설연을 떠올렸다. 어쩌면 의원들보다는 그 쪽 방면의 전문가인 유설연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예요.]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이지약의 전음이 들려왔다.
[ 어디 있습니까?]
[ 지하에 있어요. 전에 약제실로 쓰던 곳.]
[ 거긴 어떻게 알았습니까?]
연우강은 빠르게 걸었다.
잠시 후 그는 과거 무사대 건무링 있던 곳으로 가 지하로 들어갔다. 이지약은 자기 말처럼 약제실로 쓰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불까지 준비한 듯 한편 구석에 등이 밝혀져 있고, 바닥에는 요가 깔려 있다.
그리고 그녀 앞에는 조촐한 주안상이 마련돼 있었다.
" 공사하는 걸 지켜봤으니까 알죠,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연우강을 보았다.
" 오늘 무슨 날입니까?"
연우강은 이지약 앞으로 앉았다.
" 얼마 전 연 공자 생일이었는데 선물도 못 줬잖아요. 그래서 선물 대신 술상을 준비했어요."
이지약은 술병을 들어 연우강 앞에 놓인 잔에 따랐다.
" 이제 들어가는 겁니까?"
연우강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이지약을 보았다.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 교육 기간이 끝났으니까요. 북경에 들러서 보고하고 남경으로 가야 해요."
" 보고할 거라도 있습니까?"
" 불행히도 없네요."
이지약은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연우강의 신분을 알아낸 건 이숙경 그분으로부터다. 시아버지인 남경왕이 연우강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분을 찾아갔다. 그곳으로 가서 은밀하게 만나 연우강과 관계를 전부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연우강의 정확한 신분을 물었다.
놀랍게도 연우강의 아버지는 전대 묵사였던 주선엽이었던 것이다. 금릉 연씨 세가의 업둥이었던 그는 황족이었다.
" 제가 하나 드릴까요?"
" 뭔데요?"
이지약은 눈을 반짝였다.
" 주선엽이 전대 묵사였다는 단서를 잡았다고 보고하세요."
" 무슨 말이세요?"
이지약은 깜짝 놀라 물었다.
" 그럼 좀더 자세한 사항을 보고하라고 할 겁니다."
" 그, 그래도 괜찮을까요?"
이지약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숙경 그분은 연우강이 밝히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그분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연우강은 자신의 본래 신분이 드러나면 그분을 잃을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일 테다.
아니 분명 잃게 될 것이다. 황족과 일반 양민은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 지금은 연우강이 그의 아버지를 향해 절을 하지만 그때가 되면 정반대가 된다.
" 죽은 분의 명예는 찾아드리는 게 도리니까요."
"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이지약이 한껏 밝아진 얼굴로 술잔을 내밀자 연우강은 그녀의 술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번엔 이지약이 연우강의 술잔을 채운 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건배를 했다.
" 기본으로 세 잔은 마셔 줘야겠죠?"
" 당연한 말씀을."
서로의 잔을 채운 두 사람은 급하게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마지막 잔을 채 놓기도 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옷을 벗겨냈다.
" 훗!"
연우강의 옷을 벗기던 이지약이 픽 웃었다.
" 왜요?"
" 갑옷이 없으니까 편해서요."
" 갑옷?"
" 사망묵의 말이에요."
" 불편했어요?"
" 마음은 급한데 옷이 벗겨지지 않으니까 당연히 불편하죠."
" 그럼 이렇게 하면 됩니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이용해서 이지약과 자신의 옷을 한꺼번에 벗겨버렸다.
" 진작 좀 이렇게 하지."
이지약은 눈을 흘기며 연우강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발끝으로 섰다. 그러고는 덥석 입을 맞췄다.
" 원래 성격이 이렇게 급해요?"
연우강은 이지약의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 당신 앞에만 있으면 저도 모르게 급해져요."
" 급해질 뿐만 아니라 대담해지기도 하지요."
" 그건 나도 몰라요."
이지약은 급하게 연우강의 입술을 찾았다.
그가 좋다. 좋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다. 느긋하든 급하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고, 가능하면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 오늘 밤이 영원히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지약은 내심 중얼거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