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40화 (140/232)

제 3장 상하복명 절대복종

문득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조직에서는 너무 나서지도 말고 너무 숨지도 마라. 적당한 선에서 얼굴을 비추고, 적당한 선에서 일 처리를 하라. 단 일에 있어서만큼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라.

" 제길!"

사검천사 나박은 우뚝 솟아 있는 대문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정말로 그동안 열과 성을 다해 궐주를 모셨다.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한 달에 보름은 밤을 샜고, 궐주부터 시작하여 상관들의 생일은 물론이고 가족의 생일까지 챙겼다.

그러면서 빚은 또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마을에서 최고 부자였던 집안은 지금은 가세가 기울어 부자라는 말을 하기가 무색할 정도다.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모셨는데 결과는 파견이다.

물론 핑계는 그럴싸하다.

등천대룡 담대무궁 공자를 잘 보필하면 수년 안에 최고의 자리에 앉을 거라는 언질이 있었다. 하지만 나박은 수년 후 높은 자리가 아니라 지금보다 한 직급 승진하여 안정된 삶을 영위하길 원했다.

그런데 그 꿈이 물거품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 빌어먹을! 백오십 명을 데리고 뭘 하라......"

" 웬 놈들이냐?"

바로 그때 대문 위쪽 난간에서 내공이 가득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런 죽일 놈이!"

나박의 눈초리가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그는 대문 위를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내공을 실어 고함을 내질렀다.

" 관등성명을 대라!"

" 흐흡!"

나박은 크게 심호흡을 하여 끓어오르는 노화를 진정시켰다. 잠룡대로 들어가는 첫날부터 사고를 칠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잠룡대로 들어가는 첫날부터 사고를 칠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나박의 삶에 사고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항상 결과를 생각하고, 나쁜 결과가 나올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가 그동안 쌓아두었던 고가점수를 전부 까먹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나박은 다시 소리를 질렀다.

" 난 야궐의 야전대 부대주 사검천사 나박이다! 문을 열어라!"

신분을 밝히면 곧바로 문을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 대기하라!"

차가운 목소리만 들려올 뿐 문은 열릴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이 많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야궐 야전대의 부대주면 이제 갓 잠룡 딱지를 뗀 자들과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난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사건건 반말을 지껄이고 있다.

파앗!

' 궐주님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실 거야.'

잔뜩 화가 난 와중에도 나박은 머리를 굴렸다.

그는 삼 장 높이의 담을 향해 곧바로 몸을 날렸다. 굳이 녀석들을 없앨 의도가 없었기에 검은 뽑지 않았다.

휙!

바로 그 순간 담 위쪽에서 검은 옷을 걸친 자가 몸을 날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자 나박은 급하게 검을 뽑았다.

" 늦어, 새꺄. 그 따위로는 잠룡대에서 키우는 개도 잡지 못해."

부웅!

강한 바람소리가 흘러나오며 기다란 무기가 허공을 갈랐다. 약 일 장 길이의 그 무기는 군무옥의 육참낭아곤이었다.

나박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곤처럼 생긴 기다란 무기를 휘두르는 자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검에 실었다.

카앙!

바로 그때 육참낭아곤과 검이 부딪치며 강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 허억!"

나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검이 중간에서 뚝 부러지며 쇠 가시가 돋은 곤의 끝이 왼쪽으로 무자비하게 파고 든 것이었다.

퍼억!

" 크아악!"

나박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훨훨 날아갔다.

오 장여를 날아간 나박은 부하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 저럴 수가........."

야궐 무인들은 넋을 잃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나박은 강기를 펼치는 고수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단 일 초 만에 왼팔이 부러지고 기절하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나박을 공격한 상대는 다시 허공을 날아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나박보다 한 단계 위의 고수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담 위에서 조금 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잠룡대는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이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는 그런 조직이 아니다. 입문이 허락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라! 돌아가고 싶은 놈은 말리지 않겠다."

야궐 무인들은 황당한 얼굴로 군무옥을 보았다.

대주인 연우강이 요청을 하였고, 벌주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파견 명령서를 가지고 이곳까지 왔는데 돌아가라니.

" 돌아가라는 건 무슨 말이오?"

그때 야궐 무인들 오른편 옆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궐 무인들은 고개를 돌렸다. 마치 패잔병을 연상케 하는 자들 삼백여 명이 무질서하게 서 있었다. 나박이 당하는 바람에 너무 정신이 없어 다른 자들이 와 있다는 사실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 질문을 할 때는 반드시 본인의 관등성명을 대라."

" 난 무궐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던 놈으로 이름은 척자빈이고 별호는 적수요."

" 저, 적수 척자빈?"

야궐 무인들 진영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궐 무인들이 적수 척자빈을 알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십지십룡에 올랐던 기재였다는 사실과 십지십룡 중 가장 빨리 몰락한 자라는 사실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그의 몰락은 비무에서 비롯됐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비무만 하면 상대방을 잔인하게 죽였고, 그 일로 인해 적수라는 별호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 난 마귀괴옹 지을덕이오."

" 난 장백마도 여홍삼이오."

" 난 인요 백자홍이에요."

" 난 환요인마 철홍이에요."

이어지는 외침에 야궐 무인들은 넋이 빠졌다.

마귀괴옹 지을덕, 장백마도 여홍삼, 인요 백자홍, 환요인마 철홍. 먼저 이름을 밝힌 척자빈만큼이나 유명한 자들이었다. 금옥이나 천옥에 투옥된 죄수들보다 더 죄수 같은 자들. 마인보다 더 마인 같은 자들이 전부 이곳에 와 있는 것이었다.

야궐 무인들은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 간단하게 대답하겠다. 갈 놈은 가고 남을 놈은 남으라는 뜻이다."

" 우린 파견 명령서를 가지고 왔소."

" 우리는 이곳에서 자고 먹고 싸는 대원을 달라고 했지 손님을 보내달라고 한 적 없다, 척자빈."

" 자신이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돌아가란 말이에요? 참! 난 인요 백자홍이에요."

" 그렇다. 백자홍."

" 난 인요 백자홍이에요, 대주의 뜻인가요?"

" 대주가 아니라 총대주님이다."

" 정정할게요. 총대주님의 뜻인가요?"

" 그렇다."

" 난 환요인마 철홍이에요, 언제쯤 들어갈 수 있나요?"

" 다른 대원들이 오고, 이곳에서 간단한 입소식을 거친 다음에 원하는 자들만 들여보낼 것이다."

" 그럼 기다려야겠네요."

환요인마 철홍은 싱긋 웃으며 그 자리에 앉았다.

" 우리도 앉자고."

야궐에서 온 무인을 제외한 나머지 무인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자기네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놀았다.

" 저기요!"

백자홍이 손을 번쩍 들었다.

" 말해라, 백자홍."

" 직책이 어떻게 되죠? 참! 난 인요 백자홍이에요."

" 너희들의 대장인 총군장이고 이름은 군무옥이다. 앞으로 지겹게 욕을 하게 될 테니까 잘 기억하도록."

" 나이는 어떻게 되죠? 참! 난 인요 백자홍이에요."

" 잠룡대에는 나이가 없다. 오직 상관과 부하만 있을 뿐이다."

" 호호호! 그거 아주 좋은 규율이에요, 총군장님."

깔깔거리며 웃을 때마다 커다란 가슴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 앞으로는 꽉 묶어라, 인요 백자홍, 너무 심하게 흔들리면 훈련받을 때 불편하다."

" 이걸 말하는 건가요?"

백자홍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 물건이 큰놈도 마찬가지다. 매일 아침 연무장으로 집합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확실하게 묶어라. 줄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지급해 주겠다."

" 클클클!"

" 크크크!"

앉아 있던 자들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 저 친구 우리와 같은 과라는 생각이 드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마귀괴옹 지을덕이 바싹 밀어버린 머리를 쓰다듬으며 척자빈을 보았다.

" 개종자 과란 말인가?"

" 그런 것 같구먼."

" 그럼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재미있을 것 같은데 산적 자네는 어떤가?"

척자빈은 녹의를 걸친 자를 보며 물었다.

그 사내는 대야벌 소속이 아니라면 당장 산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얼굴에 털이 숭숭 나 있었다.

녹혈마 피적인 또한 전적은 화려하다.

전대 녹사련 련주의 아들이면서 이곳에 있기를 거하고 실제로 산적 노릇을 했다. 녹혈마는 그때 얻은 별호였다.

" 전에 있던 곳보다는 나을 것 같구먼."

피적인은 픽 웃었다.

" 저런 빌어먹을 개새끼들. 추워죽겠구먼 빨리 좀 오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커다란 목소리가 왼편에서 흘러나왔다. 등에 커다란 도를 메고 있는 노인은 방백마도 여흥삼이었다.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막 묵야련, 사해림, 사자림 무인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 쟁쟁한 놈들만 골라서 보냈네요."

그들을 쳐다보던 환요인마 철흥이 나직이 말했다.

" 누군데 그런가?"

" 맨 앞에 있는 놈은 묵야련 무적철검대 부대주 조양마검 단고웅이고 그 옆에 있는 놈은 붕악사자대 부단주 사자검 운악 그리고 맨 끝에 있는 놈은 사해림의 폭풍파랑대의 부대주 만묘신수 봉추라는 자네요."

" 손바닥에 주름이 없는 놈들만 골라서 보냈네?"

그들을 쳐다보는 백자홍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아부하던 자들과 상관의 말이라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자들.

정 반대의 성향을 지닌 두 세력이 한데 모여 어떻게 생활을 할지. 아니 그런 자들을 어떻게 끌어갈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럼 난? 회색분자네.'

백자홍은 담 위에 있는 군무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 다 모인 것 같소이다!"

야궐 일행이 있는 곳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조양마검 단고웅이었다.

단고웅은 지금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담대무궁이 잠룡대를 장악할 때까지만 파견을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기간은 일 년 정도를 잡았다. 그래서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묵야련을 나섰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사검천사 나박이 그의 검은 물론이고 왼팔이 부러진 채 기절해 있었다. 나박을 단 일 초 만에 쓰러뜨린 자가 바로 저 위에 있는 자라고 하였다.

작은 키에 곤처럼 생긴 무기를 들고 있는 자, 멀리서 보기에는 마치 돌이 서 있는 것처럼 탄탄한 느낌을 준다. 그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나박은 죽었을 거라는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고웅은 어두운 얼굴로 군무옥의 대답을 기다렸다.

" 다시 말하겠다. 상관에게 질문을 할 때는 반드시 관등성명을 대라. 이름이 없는 놈은 짐승으로 간주할 테고, 짐승은 때려 죽이거나 패 죽인다."

꿈틀!

단고웅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단공웅은 나서지 못했다. 기절해 있는 나박이 그보다 더 강자이기 때문이었다.

“ 난 묵야련 무적철검대 부대주 조양마검 단고웅이외다. 이제 할 일을 말해 주시오.”

“ 또 한가지 알아둘 게 있다. 관등성명을 댈 때는 앞에 있는 수식어는 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해라.”

군무옥은 단공웅을 빤히 쳐다보았다.

“ 난..... 조양마검 단공웅이외다. 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 알고 싶소.”

단고웅은 시뻘게진 얼굴로 물었다.

“ 총대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라!”

군무옥은 몸을 날려 담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 제기랄!”

“ 젠장! 이게 무슨 꼴인지.”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룡대 무인들은 이제 막 대야벌 정식 무인이 됐고, 서열로 따지자면 대야벌 최 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자들로 구성된 잠룡대로 들어가는 데 이렇듯 홀대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낄낄낄! 아무튼 재미있는 친구들이야.”

척자빈은 네 문파 무인들을 보며 키들키들 웃었다.

양측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갈렸다.

야궐을 비롯한 네 문파의 무인들은 불만이 잔뜩 어린 얼굴로 담 위에 있는 잠룡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무궐이나 군마련 등에서 온 자들은 겨울바람이 생생 불어오는 곳에서도 자기네들끼리 낄낄거리며 놀았다.

“ 술 있는 사람 있는가?”

척자빈은 일행을 보며 물었다.

“ 술이라면 내게 좀 있지.”

마귀괴웅 지을덕이 허리춤에 걸고 다니던 호리병을 꺼냈다. 평소엔 술을 담아 다니지만 싸움을 할 때는 무기로 변하는 호리병이었다. 항상 피를 담고 다닌다고 하여 혈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 피가 아니고 술이란 말인가?”

녹혈마 피득인이 물었다.

“ 싸울 일도 없는데 피는 왜 준비하겠나, 오늘은 술일세.”

지을덕은 피식 웃으며 뚜껑을 땄다. 그러자 독한 주향이 호리병에서 흘러나왔다. 일행은 술을 나눠 마시며 연우강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도 연우강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양측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이번 소요는 야궐 무인 측뿐만 아니라 무궐 무인 측에서 일었다. 아침에 도착했는데 어느새 저녁 무렵이 다 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주둥이 닥치고 기다리거라!”

약간의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무궐 무인들 측에서 흘러나왔다. 무인들을 향해 소리친 사람은 적수 척자빈이었다.

" 이렇게 마냥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뭘 조급하게 굴고 그러느냐. 혹시 술 가진 거 있느냐?"

척자빈은 불만을 터뜨린 사내를 보며 물었다.

" 다 마시고 없소."

" 술이 떨어져서 그랬구나."

척자빈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 나왔다."

바로 그때 건너편에 있는 무인들 사이에서 낮은 외침이 흘러나왔다. 척자빈이 먼저 바라본 곳은 서쪽이었다. 해가 막 서산 너머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 정확하군."

그는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문 위쪽 난간에는 화려한 옷을 걸친 연우강이 올라와 있었다.

끼이익!

그리고 대문이 열리고 대여섯 명이 걸어나왔다.

앉아 있던 무인들은 벌떡 일어났다.

" 아직 멀었어. 이놈들아!"

척자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밖으로 나온 자들의 손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두둑한 종이뭉치를 들고 있었다.

" 본인이 책임자라고 생각하는 놈은 앞으로 나와라!"

"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전부 놈이네."

척자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행과 함께 앞으로 나왔다. 대문 근처로 나온 자들은 전ㅂ 열 명이었다. 그들은 마장승을 필두로 하는 잠룡 십 조 대원들이었다.

" 몇 명이냐?"

마장승은 맨 왼편에 있는 조양마검 단고웅을 보며 물었다. 단고웅은 말없이 마장승을 쏘아보았다.

" 주둥이가 얼어버린 모양이구나.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라."

마장승은 차갑게 말하고는 단고웅 옆에 있는 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자는 사자검 운악이었다.

" 나를 포함해서 백오십 명이오."

" 줘라!"

마장승은 옆에 있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사내는 가지고 있던 종이 묶음 하나를 운악에게 건넸다.

" 맨 위에 있는 건 본인이 가지고 나머진 한 장씩 주면 된다."

마장승은 자리를 옮겨 세 번째 중년인 앞에 섰다. 장사덕 앞에 선 사람은 만수신묘 봉추였다.

" 백오십 명이오."

" 쓰레기들을 많이도 보냈네. 줘라!"

이번에도 역시 백오십 장의 종이가 건네졌다.

종이를 받아들고 몸을 돌린 봉추의 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쓰레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다. 그런데 새파란 놈에게 그 말을 들은 것이다. 당장 종이를 태워버리고 사해림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곳으로 돌아가는 순간 무능력자로 찍히고 만다. 평생 일궜던 평가를 이번 일로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봉추는 고개를 돌려 운악을 보았다.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일 테다. 참아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백팔십 명이네."

" 대답을 할 때는 항상 '다'나 '오'로 끝내는 습관을 들이도록 해라. 그래야 편하게 살 수 있다."

마장승은 척자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백팔십 명이오."

척자빈은 순순히 따랐다.

" 훌륭한 사고방식이다. 줘라!"

마장승은 히죽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 백삼십 명이오."

" 백 사십 명이오"

" 백오십 명이오."

" 백삼십 명이오."

" 백오십 명이오."

차례로 인원수를 말하고 종이가 배분됐다. 종이를 전부 배분한 마장승을 몸을 돌렸다.

" 우리도 주시오."

마장승은 몸을 돌려 단고웅을 보았다.

" 오늘은 첫날이고, 아직 정식 대원이 되지 않았으니까 용서하겠다. 하지만 잠룡대 대원이 된 후에도 그 눈빛을 고치지 못하면 훈련기간이 끝나기 전에 넌 죽는다. 흑랑일호, 줘라!"

마장승은 차갑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자리로 돌아온 척자빈은 첫 장을 빼고 나머지는 뒤편으로 돌렸다.

가입 요청서

나 흑랑천일호 (  ) 는 총대주게 엎드려 바라옵니다.

나 흑랑천일호 (  )는 받아만 주신다면 잠룡대 율법을 준수할 것이며, 율법을 어겼을 때 받는 정신적, 신체적 처벌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나 흑랑천일호 (  )는 잠룡대 생활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고에 대해, 설사 목숨을 잃는 사고라고 해도( 맞아 죽는 것 포함.) 전적으로 책임을 질 것이며, 그 어떤 책임도 잠룡대 총대주께는 묻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기회를 주신다면 결초보은하는 심정으로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잠룡대 제 1 율법 상하복명

날짜.

성명 지장

장인

" 허!"

척자빈은 어이없는 얼굴로 대문 위를 보았다.

자신들은 분명 파견 명령서를 가지고 왔고, 소속은 원래 문파다. 그런데 가입 요청서라는 걸 보면 잠룡대에 새로 가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것도 가입 요청서를 작성하는 본인이 간절히 바라는 걸로 돼 있다.

그리고 결초보은 견마지로.

쉽게 말하면 잠룡대에서 받아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개나 말처럼 열심히 하겠다는 말이다. 더불어 이름을 쓰는 난 위에 있는 여덟 자는 이곳에 앉아 있는 자들이 가장 말단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 다 읽어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대문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듣고 싶은 사람은 알아서 들으라는 말이군.'

척자빈은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무려 천오백여 명이 있는 곳에서 그는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직이 말하고 있다. 그 말은 결국 알아서 들으라는 말인 것이다. 척자빈은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다른 이들 또한 전부 천리지청술을 펼친 듯 주변엔 정적이 흘렀다.

" 동의하는 놈은 지장을 찍고 장인을 찍어라. 그럼 잠룡대 대원으로 받아준다."

무인들은 서로를 보았다.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런 조건이면 무인이 아니라 숫제 노예가 아닌가.

" 난 못 해!"

누군가 소리쳤다.

" 동의하지 않는 놈은 조용히 일어나서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 우린 파견 나왔소! 파견이란 말을 모르시오."

조금 전 못한다고 하였던 무인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는 야궐 무인으로 군무옥에게 당한 사검천자 나박의 심복 대검자 호일융이라는 자였다.

" 사랑!"

파앗!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장승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하며 사내를 향해 날았다.

" 나도 기다렸다, 개자식아!"

호일융은 검을 뽑아들고 마장승에게로 몸을 날렸다.

" 집에서 푹 쉬게 해 줘."

" 존명!"

마장승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등에 있던 곤오신도를 뽑았다. 그는 도를 뽑자마자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 차앗!"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은 호일융이었다.

" 공격은 네가 먼저 시작했다. 타앗!"

마장승은 나직이 말하고는 곤오신도를 내리찍었다. 단순하게 내리찍는 것 같지만 그가 펼치는 무공은 구유잔백일천도였다. 곤오신도 형상 수십 개가 나타나 동시에 호일융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빠르기는 호일융이 더 빨랐다. 그의 검 끝은 마장승의 가슴에서 한 자 가량 남겨두고 있었다.

그대로 진행하면 그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호일융은 갈등했다.

설사 놈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는다고 해도 위에서 내려오는 도는 자신의 머리를 박살낼 것만 같았다. 아니 심장을 정확하게 찌르지 않으면 일검에 상대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한 자가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한다.

" 빌어먹을!"

결국 그는 욕설을 뱉어내며 검을 들어올렸다.

놈의 가슴을 찌르는 것보다 머리를 막는 게 더 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슈캉!

검을 들어 올리자마자 중간에서 잘려나갔다.

" 허억!"

호일융은 얼굴이 해쓱해졌다. 검을 잘라낸 도가 가공할 속도로 오른파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 아, 안..... 크아악!"

호일융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잘려나간 팔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마장승은 비명을 지르는 호일융의 몸통을 사정없이 차고는 다시 원래 위치로 몸을 날려갔다.

" 크악!"

호일융의 입에서 두 번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십여 장을 훨훨 날아간 그는 무인들 뒤편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무인들은 멍한 얼굴로 마장승과 연우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싫다 좋다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지장과 장인을 찍고, 싫은 사람은 돌아가면 된다. 난 강요하지 않는다."

연우강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무인들의 귓전에 와 박혔다.

' 진퇴양난이군.'

척자빈은 야궐을 비롯한 네 문파 무인들이 있는 곳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단순한 파견이 아니고 담대무궁을 지원하기 위해 나온 자들이다. 저들은 이곳이 싫다고 해서 돌아갈 형편도 아니다.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데 이곳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문파 무인들은 이제 막 잠룡 딱지를 뗀 신참들에게 당했다면 조롱할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은 림주나 궐주도 마찬가지일 테다. 저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 아무튼 대단한 친구네.'

척자빈은 시선을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그는 이곳에 있는 무인들이 잠룡대가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그래서 이런 노예 계약서를 준비했을 테다.

[ 어떻게 할 참이오?]

그때 귓전으로 지을덕의 전음이 들려왔다.

[ 우린 문파에서 쫓겨났소. 저기 아니면 갈 곳이 없소. 괴옹.]

[ 끌끌끌! 우리도 저놈들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구려.]

[ 그렇소.]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척자빈은 손을 들었다. 종이는 받았는데 붓과 먹이 없었다.

" 말하라!"

" 적수 척자빈이오. 필기구가 필요하오."

" 필기구는 너희들에게 있다. 흑랑 801호."

" 다른 사람은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난 없소이다."

" 네겐 부모님이 주신 훌륭한 필기구가 있다."

" 이걸 말하는 거예요? 참! 나는 인요 백자홍이에요."

백자홍이 손가락을 펴 보였다.

" 바로 그거다. 흑랑 천육백일호."

" 그렇군요. 하지만 먹은 없는데 어떡하죠?"

" 먹 또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게 있다."

"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죠?"

" 붉은색이다."

" 개새끼!"

제 예상이 맞았다는 듯 백자홍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결국 혈서를 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욕설과는 달리 그녀는 작은 소도를 꺼내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이름을 쓰고 난 그녀는 손바닥에 피를 묻히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지장을 찍고 장인을 찍었다.

[ 들어갈 거예요?]

그녀를 지켜보던 철홍이 물었다.

[ 여긴 너무 추워요, 철 소저.]

백자홍은 발딱 일어나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 누구에게 제출하면 되죠 참! 난 인요 백자홍이에요."

대문 앞에 도착한 백자홍은 마장승을 보며 물었다.

" 앞으로 이름은 잊어라. 훈련이 끝날 때까지는 넌 흑랑 천육백일호다."

" 알았어요."

백자홍은 생글거리며 종이를 들어올렸다.

" 내게 주면 된다."

마장승은 손을 내밀었다.

" 따뜻하게 쉴 곳은 없나요?"

" 잠룡대로 들어온 걸 환영한다. 흑랑 천육백일호. 넌 신참 중 서열 일 위다. 일 위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안으로 들어가면 불이 피워져 있다."

" 고마워요."

백자홍은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 와우!"

안으로 들어간 백자홍은 활짝 웃었다. 수백 개의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모닥불 옆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찻주전자가 놓였고, 아래쪽에는 술병 수십 개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 옆에는 오전에 사검천사 나박을 일 초에 무너뜨린 군무옥이 서 있었다. 그녀는 얼른 불 옆으로 뛰어갔다.

" 술이나 차 중 선택해라."

군무옥은 백자홍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가 일 등으로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여자는 매달 피를 보기 때문에 피에 둔감해요. 첫 만남인데 술을 마시면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니까.... 차가 좋겠어요."

백자홍은 찻잔을 집어 들었다.

" 서호용정, 항주벽라춘, 군산은침, 황산모봉, 노산운무, 운남보이차가 있는데....."

" 명차로 도배를 했네. 서호용정으로 부탁해요."

차 뿐만이 아니었다. 탁자 옆에 놓인 술통도 명주 아닌 것이 없었다.

" 죽기 전에 마음껏 누려봐야 하니까."

군무옥은 서호용정차를 조금 덜어 백자홍의 잔에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불 위에 올려두었던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라 주었다.

음미하듯 차를 마시고 있는데 두 번째 대원이 들어왔다. 그녀는 환요인마 철홍이었다.

그녀 역시 차를 선택했다.

그 뒤로 줄줄이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쪽은 죄수를 비롯한 죄수 취급을 받언 자들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모닥불 옆으로 자리를 잡으며 술통을 땄다.

" 그들도 들어올 거라고 보세요? 참! 난 흑랑 천육백일호에요."

"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는 놈들이 어딜 가겠냐."

" 본래 문파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 그럼 대야벌 최하급 무인도 다루지 못한 무능한 놈으로 낙인찍히게 되지. 그건 여기서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걸?"

" 호호호! 그렇겠네요. 아무튼 대단하네요. 그런데 몇 살이죠? 참! 난 흑랑 천육백일호에요."

" 나이는 잊어라. 흑랑 천육백일호. 지금부터 너희들은 전부 훈령병이다."

" 훈련병?"

" 내일이면 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이번엔 야궐 무인을 비롯한 네 문파의 무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온 자들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안쪽에 모닥불이 피워지고 차와 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잰걸음으로 불 옆으로 모여들었다.

" 몇 명이냐?"

연우강은 마장승을 보며 물었다.

" 총 천사백칠십구 명입니다."

" 팔이 잘린 놈 빼고는 전부 들어온 거야?"

" 그렇습니다. 총대주님."

" 좋아, 주목하라고 해."

연우강은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 주목하라!"

내공이 잔뜩 실린 마장승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무인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연우강을 보았다.

" 귀만 열고 하던 일 계속해라."

이번에도 역시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무인들은 일제히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 잠룡대 대원이 된 걸 환영한다. 하지만 제군들은 정식 잠룡대 대원이 아니다. 잠룡대에서 실시하는 기초 훈련을 마친 자에 한해서 대원으로 받아줄 것이다."

무인들은 다들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이미 상당한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다. 그런 자신들에게 기초 훈련을 실시한다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 기초 훈련 때는 월 다섯 냥이지만 정식 대원이 되면 너희들에게 지급되는 보수는 월 스무 냥씩 지급할 것이다."

" 세상에!"

무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무 냥. 각 문파의 대주급이 받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 더불어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허락한다. 하루 종일 자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도박을 하는 것도 허락한다. 내가 연설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술을 마시면서 들어도 되고, 차를 마시면서 들어도 된다. 심지어 누워 들어도 상관없다. 모든 것이 허락된다. 너희들이 잠룡대에서 지켜야 할 것은 단 한가지다."

" 상하복명 절대복종."

듣고 있던 척자빈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맞다. 흑랑 팔백일호. 상하복명 절대복종은 잠룡대 첫 번째 율법이고 마지막 율법이다. 아울러 너희들은 잠룡대에서 가장 하급이다."

" 응?"

척자빈은 깜짝 놀랐다.

잠룡대에서 가장 하급이란 말보다 그의 중얼거림을 연우강이 알아들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척자빈은 연우강과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술을 마시기 위해 일부러 맨 후미로 자리를 잡았으니까 십여 장가량이다. 그런데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을 연우강이 알아들은 것이다.

문득 지금껏 연우강에 대해 잘못 판단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상관없지 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총대주님."

무인들은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 좋다, 오늘은 푹 쉬도록 하라."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무인들을 지나쳐 그의 처소로 향했다.

" 지금부터 내가 지휘한다. 아침에도 말했지만 난 앞으로 너희들이 적랑으로 불러야 할 총군장이다. 지금부터 숙소를 알려줄 테니까 따라와라. 술통을 비롯한 차는 가지고 와도 좋다."

" 알겠습니다."

무인들은 탁자 주변에 있던 술통을 들고 군무옥을 따라 나섰다. 잠시 후 그들은 들어왔던 곳 근처에 있는 건물 앞에서 멈췄다.

" 지금은 비었으니까 아무 곳이나 사용해라. 그리고 식당은 저기 보이는 대연무장 옆에 있다. 훈련기간 동안 너희들이 이용할 곳이다. 질문 있나?"

군무옥은 무인들을 보며 물었다.

" 욕조는 있을까요? 참! 흑랑 천육백일호에요."

" 훈련이 거지같아서 그렇지 나머지 부분은 최고급으로 준비돼 있으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식당은 대연무장 오른편에 있다. 식사가 준비돼 있으니까 식사를 하도록. 내일 아침 집합 시간은 인시 말이다."

" 알겠습니다. 적랑!"

무인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 내일 아침에 보자."

군목옥은 몸을 돌려 그의 처소로 향했다.

" 어떻게 할 텐가?"

척자빈은 일행을 보며 물었다.

" 일단 방부터 배정하고 식사를 하러 가세."

녹혈마 피득인은 그렇게 말하고 함께 온 자들을 향해 갔다. 특별히 누구를 지휘관으로 지목한 적은 없지만 가입 요청서를 받았던 이들이 은연중에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처소를 배정 받은 이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백자홍과 철홍은 여자라는 이유로 두 사람만 따로 방을 사용하게 됐다.

" 나 여기가 좋아지려고 해요, 철 소저."

방안을 둘러보고 난 백자홍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자신들이 들어온 건물은 수뇌 급들이 기거할 큰 건물이 아니라 일반 무인들이 기거할 수준의 건물이었다.

그런데 실내를 장식하고 있는 가구들은 상당히 고급스럽다. 다른 문파에서는 대주 급 이상에게나 지급될 법한 수준이었다.

" 금릉 연씨 세가의 큰아들이잖아요."

철홍 또한 만족스러운 듯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

" 그리고 난 그 치가 마음에 들어요."

" 총군장이라는 자를 말하는 거예요?"

" 네."

" 키가 더 작은 것 같은데....."

" 난 원래 키 작은 사람을 더 좋아해요."

" 그랬군요. 사실 저도 여기가 전에 있는 곳보다는 마음에 들기는 해요. 사람들도 괜찮은 것 같고."

" 우선 짐부터 풀어요. 지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어요."

두 사람은 짐을 풀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전부 다섯 곳이었다.

방안에서 느꼈던 놀라움은 식당에서도 이어졌다. 식사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진수성찬이었다. 고기반찬부터 시작하여 각양각색의 생선까지, 물론 다른 문파에서도 고기반찬도 나오고 생선도 나온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음식이 늘먹는 반찬이라면 이곳은 요리 수준이었다.

" 먹으면서 들어라!"

그때 문이 있는 곳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 난 제일 흑랑군의 군장 낙일사검 마장웅이다. 내 얼굴을 잘 기억해라. 질문 있으면 해라."

" 저기요."

백자홍이 손을 번쩍 들었다.

" 항상 관등성명을...."

" 흑랑 천육백일호에요."

" 말하라. 천육백일호."

" 첫날이라서 이런가요?"

백장홍은 눈으로 식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 총대주님은 입는 거, 먹는 거, 자는 거에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분이다. 앞으로도 너희들은 지금과 같은 식사를 제공받을 테고, 훈련복 또한 일반 무복과 다름없는 것으로 지급 받을 것이다. 너희들은 단 한가지만 지키면 된다."

" 상하복명 절대복종이란 말인가요?"

" 그렇다."

" 만일, 이건 만일인데, 어기면 어떻게 되죠?"

" 야장의 공동묘지를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 죽인단 말인가요?"

" 대검자 호일융의 팔을 잘라낸 건 그땐 잠룡대의 정식 대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잠룡대 정식 대원이었다면 팔이 아니라 목이 잘렸을 거다. 대답이 됐느냐?"

" 알았어요."

" 그럼 즐거운 시간 되길 바란다."

마장승은 안쪽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후로도 십여 명 이상의 군장들이 더 들렀다가 갔다.

" 안면을 익혀 놓으라고 오는 모양이에요."

식사를 마친 백자홍은 느긋하게 차를 즐기며 말했다. 갈수록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 그런 것 같네요."

철홍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자들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흐뭇했던 기억은 그날 밤까지였다.

다음 날.

어떤 기대와 흥분으로 잔뜩 상기된 채 연무장으로 나간 그들을 기다리는 건 거대한 통나무들이었다.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연무장 중앙에 있는 단상을 보았다. 그곳에는 어젯밤 교화군 군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사마윤이 서 있었다.

사마윤의 입이 열리고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들은 본인이 무인이란 사실을 잊어라. 각자 기해혈을 점혈한다. 실시!"

" 기해혈을 점혀라여 내공을 막아라!"

" 기해혈을 점혈하라!"

" 기해혈을 점혈하라!"

곧이어 무인 수십 명이 안으로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손에는 두 자 길이의 몽둥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 기해혈을 점혈한 흑랑은 저기 오른편에 보이는 나무를 돌아온다. 가장 먼저 온 흑랑은 열외다!"

" 무, 무슨....."

무인들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 이건 군 훈련소에서 받는 훈련이에요. 철소저.]

백자홍은 철홍에게 전음을 보냈다.

[ 신병들이 받는 훈련이란 말인가요?]

[ 제가 전에 군에 있는 놈하고 사귄 적이 있는데요. 그놈이 그랬어요. 지금과 같은 경우엔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편하다고요, 서둘러요.]

백자홍은 자신의 기해혈을 눌렀다.

[ 아, 알았어요.]

철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해혈을 눌렀다.

" 가요!"

백자홍과 철홍은 사마윤이 가리킨 곳으로 내달렸다. 두 사람이 먼저 달려가기 시작하자 다른 무인들 또한 본인의 기해혈을 누르고 달렸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가장 늦게 출발한 사람은 척자빈이었다.

" 연장자 우대 같은 건 없소?"

척자빈은 달리며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단상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날 척자빈은 하루종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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