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41화 (141/232)

제 4장 지푸라기

" 무슨 소린가?"

담대만승은 의아한 얼굴로 만우량을 보았다.

잠룡궁에 무인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몇 가지 보고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일상적인 내용들이라 특별히 신경 쓸 건 없었다.

" 사실 별 일 아니라고 간주하고 그동안 보고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만우량은 고개를 숙였다.

" 뭘 보고하지 않았단 말인가?"

" 입소 첫날 사고가 있었습니다."

" 어떤 사고 말인가?"

" 야궐 무인을 이끌고 갔던 사검천사 나박이 팔이 부러지는 수모를 당했고, 그의 심복인 대검자 호일융은 오른팔을 잘렸습니다."

"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전 기존 잠룡들과 무인들 간에 기세 싸움 정도로 간주했습니다."

" 그런데?"

" 그들을 개처럼 굴리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개처럼 굴려?"

" 지난 한 달 동안 파견 무인들이 한 거라고는 체력 훈련이 전부였습니다."

" 무인들을 상대로 체력 훈련을 시킨단 말인가?"

담대만승은 황당했다.

물론 무인에게 체력은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기본적인 체력만 갖춰진다면 그때부터는 강한 체력보다는 운기행공을 통해 내력을 증진시켜야 한다. 즉 같은 조건이라면 체력 훈련이 아니라 운기행공을 하는 게 훨씬 낫다.

" 그렇습니다. 달리기, 통나무 들어올리고, 기마 자세 취하기 등 매일 매일 기절하는 자만 오십여 명씩 나온다고 합니다."

" 그러면서도 계속 받고 있단 말인가?"

기초 체력 훈련을 받는다는 말보다 더 황당하다. 하루에 오십여 명 정도가 기절한다면 체력 훈련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할 게 분명하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있는 무인들이 더 이상했다.

" 사실은 저도......"

만우량은 말끝을 흐렸다.

" 이상하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그들은 기절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면서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훈련장으로 나간답니다."

" 거참...... 그럼 무궁을 지원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하겠구먼."

" 그건 아닙니다. 벌주님."

" 아니라고?"

" 사검천주 나박, 조양마검 단고웅. 사자검 운악, 만묘신수 봉추는 수시로 담대 공자와 만나고 있습니다."

" 하면?"

" 세를 불리는 건 무리가 있겠지만 독자적인 세력이 될 단초는 마련된 듯 합니다."

" 그렇게 보이던가?"

" 대외담당관이 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 시간이 많단 말이군."

" 그렇습니다. 연우강을 비롯한 다른 대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어서 편하게 무인들을 만날 수 있는 모양입니다."

" 자네 생각은 어떤가?"

" 담대 공자가 잠룡대를 장악할 수 있을지 그걸 묻는 겁니까?"

" 그렇네"

" 연우강 그놈은 군에서 정천호를 지냈습니다. 장악력은 탁월할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 쉽지 않을 거란 말인가?"

" 지금 당장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의미없는 행동입니다."

" 의미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 초대장이 왔습니다. 벌주님."

" 밀천 개파대전 초대장인가?"

" 네."

" 그 초대장으로 뭔가를 꾸며보겠다는 말 같은데 맞는가?"

의미 없다는 말의 의미를 물었는데 초대장 이야기를 꺼내서 하는 말이었다.

" 그렇습니다. 초대장은 우리뿐만 아니라 각 문파에도 전달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계속해 보게."

" 우선은 초대장을 이용해서 잠룡대 지위를 격상시키는 겁니다."

" 다른 문주들이 인정할 거라고 보는가?"

" 벌주님을 대신해서 밀천의 개파대전에 참석하는 겁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할 걸로 봅니다."

" 최소한의 예의가 어느 정돈가?"

" 림주 대우 정도입니다."

" 연우강에게 림주 대우 직책을 주면 천호나 공손정우가 긴장하겠군."

이제야 비로소 만우량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 듯 했다.

" 더구나 공손정우는 과거의 일로 인해 연우강을 제거하고 싶어 합니다."

" 동료를 살해하고 대야벌 잠룡이 됐다는 그 소문 말인가?"

" 그렇습니다. 그 소문을 퍼트린 자가 연우강이었습니다."

" 소문을 약간 키울 참입니다. 동료를 살해하고, 그 일을 덮기 위해 동료의 부인마저 강간하여 살해했다고 말입니다."

" 공손정우 입장에서는 반드시 연우강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겠구먼."

" 거기다 두어 가지만 추가하면 공손정우는 연우강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될 겁니다."

" 연우강 엎에는 이자승과 지옥 출신 고수들이 있고, 연우강이나 공손정우 둘 중 아무나 죽어도 나에겐 좋은 일이구먼."

" 일석이조지요."

" 그럼 그렇게 추진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벌주님."

" 그리고 천무비고와 승천비고는 확인했는가?"

" 중요 비급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 전부 가지고 갔다는 말이군."

" 그들을 감시하지 못했던 게 실수였습니다."

" 비급이야 어차피 만들면 되니까 잊어버리도록 하게. 그리고 밀천과의 전쟁은 팔황새 녀석들에게 맡길 참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게."

" 그들도 선물을 준비하고 싶을 겁니다. 벌주님께서 가장 좋아할 만한 선물이 밀천 천주의 목이라는 것도 알 테고요."

" 그렇겠지."

담대만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 올해까지 마무리를 지어야 하네."

" 걱정 마십시오. 벌주님. 벌주를 선출하는 백인위원회는 더 이상 소집할 일이 없을 테니까요."

" 그래야지."

담대만승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때부터 꾸었던 꿈이지.'

그 생각을 하게 된 건 장만보를 사지로 몰아넣고 이곳으로 돌아오면서부터다. 황제는 대를 잇는데 대야벌은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 또한 장만보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구집권을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 이제 그 결실을 보는 거야."

담대만승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

" 줘."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 내가 네 부하야?"

유설연은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그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연우강의 호출 때문이었다.

" 시간이 넘쳐나는 네가 움직여야지 내가 움직일 수는 없잖아."

" 대야벌로 들어오는 게 얼마나 힘든 줄이나 알아?"

" 뭐가 힘들어 인마. 야장을 통해서 들어오면 되는데."

" 아무튼 그런데 뭘 달라는 거야?"

" 범천조화신기지 뭐겠냐?"

" 그건 왜?"

" 네가 황궐 궐주를 할 게 아니잖아."

" 그럼 네가 황궐 궐주를 하겠다고?"

" 못 할 것 같아서?"

" 네가 궐주를 하면 좋긴 하지만 너무 드러나는 것 같아서 그래."

" 당분간은 비밀로 할 거야."

"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범천조화신기만 있으면 되는 거야?"

유설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공야일우는 범천조화신기에 머리를 조아리긴 했지만, 거건 동창의 힘을 이용하려는 속셈에서였다. 아무리 망해 가는 문파라고 해도, 오백 년 전 약조를 지킨다는 것은 무리일 터였다.

" 범천조화신기만 가지곤 힘들지."

" 그럼?"

" 범천조화신기에 이자승 영감님이 더해지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 아!"

유설연은 탄성을 내뱉었다.

전에 벌주를 지냈던 이자승을 잊고 있었다. 범천조화신기와 이자승이 있다면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 네 문파를 하나로 합치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 가만?'

" 혹시 너 지금 상황을 노리고 이걸 내게 줬던 거야?"

유설연은 범천조화신기를 꺼내며 물었다.

문득 범천조화신기를 녀석으로부터 얻기 전에 녀석 옆에 이자승이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범천조화신기가 나타나면서 공야일우는 힘을 얻었고, 그를 경계한 자들에 의해 벌내쟁투가 일어났다. 그 결과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는 철저하게 괴멸됐다.

그들에게는 구심점이 필요한 상황이다.

만일 벌주를 지낸 적이 있던 이자승이 범천조화신기를 가지고 나타난다면 그들은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노리고 준 건 아냐?"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 바라고 준거지."

" 같은 말이잖아."

유설연은 버럭 소리쳤다.

" 그래서 싫은 거야?"

" 누가 싫다고 그랬어?"

" 그럼 됐잖아. 그건 그렇고 그 치하고는 잘 돼가?"

" 누구?"

" 황제."

" 지금 다리를 놓고 있어. 조만간 성사될 것 같아."

" 잘해.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이거니까."

연우강은 목을 스윽 그어 보였다.

" 걱정 마. 난 한번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는 거머리니까. 그보다 상당하겠다는 건 뭐야?"

실은 이곳으로 직접 온 이유 중의 하나가 연우강이 상담할 게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 병 때문에 그래."

" 무슨 병?"

" 못 해."

" 뭘 못 한다는 건데?"

" 밤일을 못해."

" 고자야?"

" 그건 아냐. 허우대는 멀쩡하고 물건도 아주 실해. 겉보기에는 멀쩡해."

" 그런데 안 된다는 거야, 못 하는 거야?"

" 평소엔 안 그러는데 옷만 벗으면 서질 않는데."

" 언제부터 그랬는데?"

" 거의 삼 년이 돼가는 것 가아. 처음엔 긴장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 지금도 안된다는 말이지?"

" 응!"

" 여기 때문이야."

유설연은 제 머리를 툭 쳤다.

" 정신적인 문제라고?"

" 응! 여자 앞에만 서면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려서 그래."

" 기루에도 가 봤는데 그때도 안 됐다는데?"

" 기루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으로 가도 마찬가지야. 그 사내를 얼게 만드는 건 벗은 여자 몸이니까."

"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 자신감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어."

" 예를 들면?"

" 옛날에 여자와 관계를 가졌던 광경을 끊임없이 떠올려본다든지 뭐 그런 것들."

" 아직 총각이야."

" 그럼 문제 심각하네. 누구야?"

" 나다!"

그때 밖에서 막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시간 맞춰서 왔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막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 정말 허우대는 멀쩡하네?"

유설연은 막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 오셨습니까?"

연우강의 친구라고 하지만 상대는 동창의 소제독.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바지를 내려봐요."

유설연은 막장을 보며 다짜고짜 말했다.

" 네?"

막장은 뜨악한 얼굴을 했다.

" 일단 상태를 봐야 하잖아요. 물건이 없다 뿐이지 나도 남자니까 신경 쓰지 말고 바지를 내려봐요."

" 그, 그게 무슨........"

막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지, 연우강이 오라고 해서 온 것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지를 내려 보라니.

" 널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저 녀석이야. 그러니까 믿고 맡겨."

연우강은 범천조화신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 어디 가려고?"

막장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 일하러 가야지."

연우강은 범천조화신기를 들어 올렸다.

" 나, 나만 놔두고?"

" 호호호! 나도 있어요. 막 대협 그리고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우강, 침실 좀 써도 돼?"

" 이곳에 있는 건 다 사용해도 된다. 나갔다 올게."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 여기서 내리기가 뭐하면 침실로 갈까요?"

" 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 사랑하는 부인과 자는 게 싫어요?"

" 그럼?"

" 우강이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그거 빨리 고치지 않으면 평생 가요, 막 대협."

" 펴, 평생 간다고요?"

막장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 평생 비밀로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저, 정말입니까?"

" 빨리 고치지 않으면 장가가는 것도 포기해야 해요. 지금 있는 여자도 도망칠 거고요. 그래도 상관없으면 바지를 내리지 않아도 돼요."

" 내, 내리겠습니다."

막장은 요대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의원이란 의원은 다 들러보고 심지어 기루는 물론이고 유곽까지 가보았다. 하지만 멀쩡하던 녀석이 여자 앞에만 서면 고개를 사정없이 숙이고 말았다.

유설연이 마지막인데 그마저 치료 방법이 없다면 정말로 중이 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와우!"

유설연은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혀를 찼다.

" 두 소저가 불쌍하네요. 저런 명품을 두고...."

" 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얼굴이 벌게진 막장이 물었다.

" 일단 만져 보고요."

" 마, 만진다고요?"

" 그럼 만져 보지도 않고 어떻게 증상을 파악하죠? "

유설연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었다.

막장은 질끈 눈을 감았다.

' 난 환자다. 난 환자다. 난 환자다.'

막장은 불경을 외는 것처럼 내심 중얼거렸다.

" 으아악!"

느닷없이 막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그, 그, 그, 그렇게 만지면......"

막장은 게거품을 토해내며 벌러덩 넘어갔다.

" 골 때리는 녀석이네. 물건 좀 만졌다고 기절하는 건 또 뭐냐?"

유설연은 어이없는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 얼레레! 자식, 취향도 특이하네."

유설연은 허허,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이제 한 가지만 더 실험해 보면 되겠네. 아무튼 특이한 녀석 옆에는 똑같이 특이한 종이 꼬이는 게 맞는 것 같아."

유설연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 이런! 식었잖아."

그는 슬쩍 내공을 가했다. 그러자 찻잔 위로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호호 불어가며 차를 마셨다.

" 무궐, 야궐, 연우강의 삼파전이 된 것 같은데. 어차피 야궐과 벌주는 맨 마지막이 될 테고 이번엔 무궐이 되는 건가? 아는 거 없어요?"

유설연은 막장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막장에게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면 그 병은 절대 나을 수 없어요. 자신의 성향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 내, 내가 어떤 성향이란 말입니까?"

막장은 마지못해 눈을 떴다.

" 그건 좀더 깊은 치료를 해봐야 해요. 그보다 방금 내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 그건......"

" 바지는 올리지 말고 그대로 둬요."

" 하지만......"

" 시키는 대로 해요, 막대협."

" 알았습니다."

막장은 체념한 듯 바지에서 손을 뗐다.

" 말해 봐요."

" 이번에 잠룡대가 잠룡림으로 될 거라고 했습니다."

" 이제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잠룡림이 된다는 말이에요?"

" 벌주 대행으로 밀천의 개파대전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신분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 밀천 개파대전에 벌주 대행으로 참석하게 되는 거예요?"

유설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이미 천상천에서 초대장이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재미있네요. 누구를 데려갈 거죠?"

" 최소 인원으로 꾸리라는 명령도 같이 왔기 때문에 과거 잠룡 십 조 대원들만 데리고 갈 것 같습니다."

" 담대무궁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죠?"

" 그는 뺐습니다."

" 역시."

유설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이유를 아십니까?"

" 우강이 말하지 않았어요?"

" 네."

" 초대장과 함께 림주 대우라는 직책이 오지 않았나요?"

" 그것도 함께 왔습니다."

" 그 말은 곧 이곳을 잠룡림으로 만들겠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림주 자리는 우강이 아니라 담대무궁에게 돌아가야 하고요."

" 연우강이 밀천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 그래요. 막 대협. 다만 직접 공격하지 않고 차도살인을 통해 제거하려고 할 거예요."

" 차도살인이라고요?"

" 무궐 궐주 공손정우가 우강을 제거하도록 한다는 거예요."

" 그가 왜......"

문득 떠오른 게 있어 막장은 말끝을 흐렸다.

" 이제 알겠어요?"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일 년 육 개월 전부터 은밀하게 돌았던 무궐 궐주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이용할 셈이에요. 이제부터는 그 소문이 확대 재생산 될 거예요."

" 연우강이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까?"

" 그건 아니에요. 그 소문을 키울 자는 담대만승이에요. 그의 입장에서 보면 공손정우가 죽어도 좋고 연우강이 죽어도 좋아요. 공손정우가 죽으면 그는 대야벌의 팔 할 이상을 장악하게 되고, 연우강이 죽으면 담대무궁을 잠룡림의 림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 하지만 그 녀석이 패할 리가 없죠."

" 그래서 대답해 보라는 거예요. 무궐 궐주를 없애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지."

" 그건 나도 모릅니다."

" 아직 거기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 네."

" 아무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았으니까 됐어요. 이제 긴장이 좀 풀렸어요?"

유설연은 생긋 웃으며 막장의 하체를 보았다.

" 헉!"

막장은 재빨리 양손으로 아래를 가렸다.

" 이제부터 본격적인 치료를 해 봐요. 막 대협."

혀 끝으로 입술을 스윽 핥은 유설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어둠 속에서 검은 야행복을 걸친 두 명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풍운련의 풍운금의대 대주 운검 표상진과 천추림의 천추제일대 용무검 강일남이었다. 그들은 황궐에서 연락이 와 은밀하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빠르게 몸을 날리던 두 사람이 커다란 바위 옆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천리지청술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 어떻소?"

표상진이 돌아보며 물었다.

" 아무도 없소."

" 갑시다."

두 사람은 다시 몸을 날렸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를 달린 두 사람은 황궐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 오십니까?"

두 사람이 내려사자 어둠 속에서 황궐 무인이 걸어나왔다.

" 어디 계신가?"

표상진은 무인을 보며 물었다.

" 지하실에 계십니다."

" 지하실?"

표상진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몇 번의 만남을 가지긴 했지만 지하실에서 만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 손님이 오셨습니다."

" 어떤 손님이 왔는데 그러나."

" 일단 안으로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대주님."

" 알았네."

황궐 무인을 따라간 곳은 본관이 아니라 후미진 곳에 뚫린 지하였다.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처음 본 노인과 얼마 전 잠룡대 대주가 된 연우강이 소식을 보냈던 황룡질풍대 대주 환우광마창 나도욱과 금황련의 금혼영웅대 대주 대제 과일우가 앉아 있었다.

" 어서들 오게."

나도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

" 그런데....."

" 저분은 태황야 이자승 전대 궐주님이시네."

" 저, 정말입니까?"

표상진과 강일남은 경악한 얼굴로 이자성을 보았다. 그가 잠룡 십 조에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망해버린 자신들을 찾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그리고 연 공자는 범천조화신기의 기주네."

" 난 풍운금의대 대주 운검 표상진입니다. 전대 궐주님과 기주님을 뵙습니다."

" 난 천추제일대 대주 용무검 강일남입니다. 전대 벌주님과 기주 뵙습니다."

두 사람은 이자승과 연우강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 반갑네."

" 반갑소."

이자승과 연우강은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받았다.

" 앉게."

이자승이 자리를 권하자 두 사람은 나도욱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이미 나 대협과 과 대협과는 이야기가 끝났으니까 두 분께 바로 묻겠소."

연우강은 범천조화신기를 들어 올렸다.

" 깃발을 인정하시오?"

" 인정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이오?"

강일남이 날카로운 눈으로 연우강을 보며 되물었다.

"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외다. 강 대협."

" 우리더러 머리를 숙이라는 말이오?"

" 대신 네 가지를 주겠소. 첫째는 범천조화신기에 적힌 범천조화신공을 줄 것이며, 둘째는 무너진 문파를 복구할 자금, 셋째는 복수할 기회. 넷째는 앞으로 일 년 후, 황궐을 대야벌 최고 단체로 만들어 줄 거요."

강일남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이 준다는 네 가지는 다 불가능해 보였다. 설사 이자승이 옆에서 돕는다고 해도 그는 이제 막 잠룡대 대주에 오른 신참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무슨 수로 그 네 가지 일을 해준단 말인가?

강일남은 고개를 돌렸다.

" 복수를 한 다음에 결정하기로 하겠소."

강일남의 시선을 받은 나도욱이 대답했다.

" 범천조화신공을 받고, 자금을 받고, 복수를 하는 것까지 이루어지면 그때 결정하겠단 말이오?"

" 그렇소이다. 강 대협. 그리고 전대 궐주이신 태황야께서는 우리 네 문파가 하나로 합쳐진다면 고문을 맡아주기로 하셨소."

" 그랬군요."

이자승이 고문을 맡아준다는 말을 듣자 강일남과 표상진의 얼굴이 많이 누그러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 어떻게 하시겠소?]

강일남이 전음으로 물었다.

[ 나를 비롯한 풍운련 무인들은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준비가 돼 있소. 강 대협.]

표상진의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 난 따르겠소. 연 공자."

표상진은 벌떡 일어나더니 포권 대신 고개를 숙였다.

" 잘 생각했소. 표 대협."

연우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강일남을 보았다.

"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나도 따르겠소이다."

강일남 역시 고개를 숙였다.

무공이나 자금 또는 미래에 대한 것보다는 복수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 좋소. 강 대협. 그럼 임시직에 불과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네 문파 연합의 문주를 맡도록 하겠소. 그리고 이 범천조화신기는 이 고문께 맡겨놓겠소."

연우강은 범천조화신기를 이자승에게 건넸다.

' 무섭고 잔인한 놈!'

범천조화신기를 받아들며 이자승은 내심 중얼거렸다.

녀석이 찾아와서는 갈 곳이 있다고 했을 때 무슨 일인가 했다. 그런데 은밀하게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사전에 나도욱에게 연락을 해놓은 듯 나도욱과 과일우는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강이 두 사람을 향해 한 말은,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조금 전 강일남과 표상진에게 했던 말 그대로다.

그런데 나도욱과 과일우는 강일남과 표상진이 그랬던 것처럼 두말도 않고 수락했다. 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네 사람을 비롯한 네 문파 무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수일 테다. 하지만 지금 저들의 힘으로는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한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영혼을 팔라고 해도 팔 사람들에게 그걸 해주겠다고 하였으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남들은 수 년이 걸려도 하지 못할 그런 일을 녀석은 단 한순간에 해치운 것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사람을 놀라게 하는 녀석.

그놈이 바로 연우강이었다.

"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게 해줄 건지 그걸 알고 싶습니다. 기주님."

강일남의 어투가 대번에 공대로 바뀌었다.

" 우선 네 분에게 줄 선물은 공손정우를 비롯한 수뇌들의 머리가 될 거요."

" 어떻게......"

" 적의 규모를 비롯하여 상세한 소식이 야장으로부터 올 거요. 그때까지 칼을 갈고 기다리면 되오. 시기는 밀천의 개파대전이 끝날 즈음이 될 거요."

" 믿겠습니다. 대주님."   전에는 공격해 오지 않을 테니까 신경 꺼도 돼.”

강일남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고개를 숙였다.

" 난 마악추 천잔성을 비롯한 잔살단 대원 일백 명의 머리를 조운곡으로 보냈소. 네 분. 날 믿으시오."

" 알겠습니다. 기주님."

네 사람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 오늘 이야기는 일 년 후까지는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모든 연락은 야장을 통해 이루어질 거요."

" 우리 넷만 알고 있겠습니다."

" 좋소. 그럼 수고들 하시오. 가시죠, 영감님."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고들 하게."

" 살펴 가십시오."

인사를 받으며 두 사람은 지하에서 나왔다.

밖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황궐 무인의 안내를 받아 황궐을 벗어난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 넌 정말 대단한 놈이다."

" 전 물에 빠진 자들에게 지푸라기 하나를 던져줬을 뿐입니다. 영감님."

" 그들을 물에 빠뜨린 사람이 너지."

" 전 설연 그 녀석에게 범천조화신기를 줬을 뿐이라고요."

" 하지만 그것 대문에 네 문파는 멸망 지경까지 갔지."

" 그건 제 잘못이 아니지요. 다리 건너편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며칠을 굶었다고 해도, 다리를 건너기 전에 썩은 부분이 있는지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합니다. 특히 무인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지요. 그래야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 그들은 다리 상태를 확인할 시간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썩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건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연우강이 짜는 작전의 가장 놀라운 점이다.

연우강의 목표가 된 자들은 자신이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한편은 야망을 위해 다른 한편은 상대의 야망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연우강이 서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제 녀석이 범천조화신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창소제독 유설연에게 주었고, 결국엔 벌내쟁투를 유발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자 이번엔 범천조화신기를 앞세우고 네 문파를 접수했다.

벌내쟁투에서 패하여 지리멸렬해졌다고는 하지만 네 문파를 합치며 무인의 수는 삼천을 넘는다. 그 또한 약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 그래도 늘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확인을 해야 하고요."

" 그래야겠지. 그보다 공손정우는 어떤 방법으로 던져줄 셈이냐?"

문득 궁굼해 물었다.

" 놈은 이번에 밀천의 개파대전에 참석할 겁니다."

" 확신하느냐?"

" 세 가지 이유가 있으니까요."

" 세 가지라고?"

" 날 제거해야 하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담대무궁 제거 그리고 세 번째는 밀천의 개파대전에 힘을 실어주어 담대만승을 압박하기 위해섭니다."

" 과거를 지우기 위해 널 없애려고 한다는 건 알겠는데 담대무궁을 없앤다는 건 무슨 소리냐."

이미 담대무궁은 밀천 개파대전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하였던 말이 떠올라 물었다.

" 그건 잠룡대를 잠룡림으로 승격시키기 위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이제 목적달성을 했으니까 담대무궁을 데리고 나가야지요."

" 공손정우는 너와 잠룡대를 제거하기 위해 출병을 감행할 거라고 보는 거냐?"

" 하지만 잠룡대는 백 명으로 없앨 수 있는 그런 약한 조직이 아니지요. 공손정우는 그를 믿고 따르는 최정예를 투입해야 할 겁니다. 아마 그와 형제처럼 지내는 세 놈도 함께 나오게 될 겁니다."

" 그곳에서 공손정우를 비롯한 네 문파의 수뇌들을 없애겠다는 말이냐?"

" 그렇게 되면 무궐, 구중련, 녹사련, 낭인림은 선장을 잃은 배가 되지요."

" 그땐 어떻게 할 셈이냐?"

" 영감님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 야장에 있잖습니까?"

" 창노를 말하는 게냐?"

" 창노가 아니라 창궁무제 남궁우문이지요."

" 그의...... 이름을 찾아줄 셈이구나."

" 무궐 무인들 중 상당수는 아직 그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일이 제대로 된다면 무궐까지 네 손아귀에 들어오는 거로구나."

" 제대로 되면 그렇겠지요."

어느새 두 사람은 야장이 있는 곳까지 와 있었다.

"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할 참이냐?"

" 뭘 말입니까?"

" 묘아 말이다."

" 이 소저가 어쨌단 말입니까?"

" 네가 책임져라."

" 유부녀를 무슨 수로 책임을 집니까. 더구나 그녀는 남경왕의 며느리가 아닙니까."

" 네가 책임을 지겠다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겠다."

" 제가 황궐을 손아귀에 넣고 무궐을 장악하면서 대야벌에 지푸라기를 만드는 이유가 바로 남경왕 때문입니다. 영감님. 그와 저는 언젠가는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 일단 약속만 해라."

" 약속이라고요?"

연우강은 이자승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아들이자 이지약의 아버지인 이연도 원하지 않고 남경왕도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무슨 수로 이지약을 남경왕부에서 빼내오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아무튼 약속한 걸로 알겠다. 가자."

이자승은 연우강의 어깨를 툭 치며 무원의 처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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