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42화 (142/232)

제 5장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건

문파가 문을 여는 행사인 개파대전은 축제 성격이 짙다. 따라서 굳이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많은 무인들과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밀천 개파대전도 다르지 않았다.

배에서 내려 개파대전 장소인 규동으로 향하는 군웅들의 얼굴은 모처럼 찾아온 무림 축제로 한껏 상기돼 있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둘러 규동으로 길을 잡았다. 일단의 무리가 떠나고 선착장에는 이십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군웅들에 섞여 배를 타고 왔던 연우강 일행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십 명은 선발대라고 볼 수 있었다.

" 마중을 나올 때가 됐는데...."

연우강은 이마 위로 손갓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 누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어요?"

옆에 있던 남궁운화가 물었다.

" 아뇨?"

" 그런데...."

" 대야벌 벌주가 행차하셨는데 중소 문파의 수장으로서 당연히 마중을 나와야지요. 그리고 여기서 하루거리라는 데 어떻게 걸어갑니까?"

" 풋!"

남궁운화는 픽 웃었다.

전에 동정호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항상 최고급만 고집한다. 배를 타고 올 때도 최고급 요리사가 있는 배를 골라 탔으며 삼일 내내 가자 좋은 음식만 시켜 먹었다.

물론 값도 비쌌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루거리나 되는 곳을 어떻게 걸어가느냐며 주저앉는다.

" 한심해 보여요?"

" 마냥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요?"

" 돌아가야지요."

" 돌아가요?"

남궁운화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벌주 대행이란 중책을 맡고 이곳까지 왔으면서,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고 돌아가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신분이 높은 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뭔지 아세요?"

" 글쎄요.... 전 아직 높은 신분이 돼 보지 못해서......"

" 세인들의 눈입니다. 남궁 가주."

" 타인의 시선이라고요?"

" 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봐주느냐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는 겁니다. 많은 군웅들이 모인 곳에서는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통해서나, 지금처럼 어떤 행사에 참여했을 때 행사를 개최하는 쪽이 어떻게 대접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됩니다."

" 그러니까 밀천에서 마중을 나오지 않으면 연 공자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예요?"

" 내가 아니라 벌주의 심기가 불편해진다는 겁니다."

" 하지만 이제 막 정식 제자가 된 연 공자를 벌주 대행이라고 보낸 것 자체가 실례되는 행동이잖아요."

" 그래서 미리 나와 있지 않은 겁니다."

" 미리 나오지 않는 걸로 해서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운다는 건가요?"

" 그런 거죠. 그렇다고 완전하게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마차를 끌고 나타나지요. 그러고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늦었다고 둘러대는 거예요."

" 유치해요."

" 그건 유치한 축에도 끼지 못해요."

" 그보다 더 유치한 것도 있어요?"

" 평소 자신보다 더 아래라고 생각했던 자를 더 대접ㅎ새주면, 즉 자리배치를 그 자보다 뒤쪽에 한다든가, 숙소의 층수가 더 낮다든가, 마중을 나온 자의 신분이 더 낮거나 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도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 정말 그래요?"

"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행사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어요."

" 사람 접대하는 것도 쉬운 이이 아니군요."

" 그런 걸로 싸움을 붙이기도 하니까 어려운 일이라고 봐야지요."

" 싸움을 붙인다고요?"

" 아마 무궐 궐주 공손정우는 마중만 나왔을 뿐, 마차 같은 건 가지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 그럼 연 공자는 마차로 모셔간다는 말이에요?"

" 저기 오잖습니까."

연우강은 멀리 보이는 언덕을 가리켰다.

" 정말이네."

남궁운화는 멍한 얼굴로 마차를 보았다. 연우강의 말처럼 마차가 이편을 향해 오고 있었다.

여덟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맨 앞으로 나오고 그 뒤로도 세 대의 마차가 더 나타났다. 뒤쪽에서 오고 있는 세 대는 사두마차였다.

" 저기서 마차를 끄는 말의 수와 마차의 높이와 넓이 그리고 외부와 안쪽을 장식한 자재는 곧 신분을 나타내는 겁니다."

" 무궐 궐주는 사두마차로 마중을 하겠네요."

" 우리가 탄 팔두마차를 보면 공손정우는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겁니다."

연우강은 다가오는 마차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하하하! 오랜 만이네, 연 형."

마차 안에서 나온 자는 환밀천의 가주 사유성이었다.

" 엇!"

" 허!"

" 어?"

잠룡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사유성을 보았다. 교육이 끝나고 대야벌을 탈퇴했던 그를 밀천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었다.

" 얼굴이 훤해졌네? 살 만한 모양이지?"

" 집으로 돌아왔으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그리고 동생 일은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겠네."

" 사과는 무슨. 돌려받았으니까 그걸로 됐지. 그보다 돈 필요하지 않아?"

" 필요하다면 빌려줄 참인가?"

" 삼백만 냥까지는 빌려줄 수가 있어. 물론 이자는 이 할이고."

" 하하하! 역시 부자라 다르군. 필요하면 그때 말하겠네. 타게."

사유성은 마차를 가리켰다.

" 공손정우도 마중을 나왔어?"

" 일개 궐주인 내가 직접 나올 수는 없잖아. 부하를 시켜서 마중을 내보냈네."

" 사두마차였겠지?"

" 잘 아는구먼."

" 그렇게 싸움을 붙이고 싶어?"

연우강은 사유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 무슨 소린가?"

" 모른 척하기는."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외부와 마찬가지로 마찬 안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좌우 측 벽에 의자가 맞붙어 있고, 가운데에는 옥으로 만들어진 무릎 높이의 탁자가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안에는 시중을 드는 시비까지 있었다.

연우강이 오르자 시비는 재빨리 차를 준비했다.

" 남궁가주와 수소저도 오르시지요."

사유성은 다른 마차를 타려고 하는 남궁운화와 수여설을 불렀다.

" 우린 뒤에 있는 마차를 타겠어요. 사 소협."

수여설이 사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 다 태우기에는 자리가 부족합니다. 이 마차에 오르십시오."

" 알았어요."

수여설은 남궁운화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녀들에 이어 짐을 매고 있던 염자생이 타고, 사유성이 오르자 마차는 출발했다.

" 말해 보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수여설은 물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할 때 늘 그렇듯 연우강을 보는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 요즘 대야벌에 돌고 있는 소문 아세요?"

" 무슨 소문요?"

수여설은 되물었다.

" 지금 대야벌 수뇌가 돼 있는 어떤 인물에 대한 소문 말입니다."

" 잠룡쟁패를 빼앗기 위해 친구를 해치고, 친구의 부인을 강간해서 살인멸구를 했다는 소문?"

" 네."

" 그 소문이 어쨌다는 거죠?"

" 그 소문의 주인공이 공손정우, 적환규, 육사이, 설야입니다."

" 정말?"

수여설을 깜짝 놀랐다.

" 그 넷은 대야벌로 들어오기 전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대야벌 앞 천하평에 도착할 때까지도 공손정우는 잠룡쟁패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만 잠룡쟁패를 얻은 상태였죠. 그때 촌에서 올라온 듯한 젊은 청년이 그들의 눈에 띈 겁니다."

" 청년이 가지고 있던 잠룡쟁패를 빼앗았다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웃는 얼굴로 접근해서는 어느 정도 친해진 다음 으슥한 곳으로 유인해 젊은 청년의 목에 검을 박아 넣고 땅에 묻어버린 겁니다."

" 천하평까지 오면 더 이상 잠룡쟁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대야벌 율법을 어긴 거군요."

" 하지만 놈은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십지십룡의 일인이 됐고, 팔황정벌 때에는 신진들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 그 당시 벌주가 실종되지 않았나요?"

" 맞아요. 낭인 벌주와 그를 따르던 자들이 몽땅 실종되는 사건이 터진 거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 재미있는 일?"

" 살아서 돌아온 자들은 범천담대세가 가주였던 담대만승, 범천담대세가 출신 담대천호, 무당파 제자 공손정우, 화산파 제자 적환규, 점창파 제자 육사이, 종남파 제자 설야 등이었습니다."

" 그게 왜 재미있다는 거죠?"

수여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 차이점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연우강은 물었다.

" 글쎄요...."

" 넌?"

연우강은 사유성을 보았다.

"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단한 가문 출신이나, 유수문파 출신들만 살아 돌아왔다는 말인가?"

" 아!"

사유성의 말을 들은 수여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그곳에서 무궐 궐주였던 남궁우문도 실종됐네."

사유성이 의문을 제기했다.

" 남궁우문은 장만보 벌주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사람이야."

" 그럼 팔황정벌은?"

" 이름난 가문 출신도, 문파 출신도 아닌 자가 벌주에 오른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무리가 획책한 반란이었어. 그 반란을 주도했던 자가 담대만승과 담대천호 그리고 무성 무인들, 즉 지금껏 권력을 향유해왔던 기득권층이었어."

" 하지만 대야벌에는 많은 무인들이 있고 그 일에 대해 조사가....."

사유성은 말끝을 흐렸다. 그 사건을 조사하던 자들이 바로 연우강 곁에 있던 지옥 무인들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 맞아. 조사는 오 년 동안 이루어졌고, 그 사건을 조사하던 자들은 하나둘 지옥으로 수감됐어. 특히 궐주를 잃은 무궐은 타격이 컸지. 수뇌들이 대부분 수감되는 바람에 빈집이나 다름없게 됐으니까."

" 그때 공손정우가 궐주가 됐다는 건가요?"

이번엔 수여설이 물었다.

" 맞아요. 수 소저. 이제 막 벌주가 된 담대만승 입장에서는 기존 무인들보다 신진을 앉히는 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고, 공손정우도 야망이 컸으니까요. 아무튼 팔황정벌은 그렇게 일단락이 되고, 담대만승은 벌주로, 공손정우는 무궐 궐주가 됐어요. 그때부터 공손정우는 동생들을 련주와 림주로 앉히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 작업이라고요?"

" 쉽게 말하면 영웅 만들기죠. 공손정우는 권력을 이용해서 사건을 만들고, 적환규, 육사이, 설야는 공손정우가 만든 사건을 해결하는 거죠.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자 세 명은 어느새 영웅이 돼 있었던 거죠."

" 그렇게 해서 세 명은 구중련, 녹사련, 낭인림의 수장이 됐단 거군요."

" 그렇습니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십여 년 전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 문제라고요?"

" 잠룡쟁패를 탈취하고 나서 살인멸구를 했던 염자생이란 자가 느닷없이 나타난 겁니다."

" 염자생이라면......"

수여설은 곁눈질로 염자생을 보았다.

" 염자생이라는 이름보다는 혈잔마수로 더 알려져 있죠. 아무튼 그가 나타나서 그때의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자 공손정우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염자생을 무림 공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 맙소사! 그럼 그를 공저긍로 만든 자가 공손정우란 말이세요?"

" 동생들을 영웅으로 만들 때보다는 더 쉽죠. 이번엔 네 명이 작업을 했으니까요."

" 결국 그는 강호공적이 될 수밖에 없었군요."

" 권력을 쥔 자들이 힘없는 자를 공적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 공손정우가 똥줄이 탈 만하군."

사유성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잠룡쟁패 하나로 두 사람의 인생은 극과 극을 달렸다. 가해자는 승승장구하면서 평생 동안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피해자는 강호 공적이 되고 말았다. 마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 아마 놈은 그때 사건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야."

" 하지만 자네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이라 할 수 있겠지."

" 벌주 대행을 공격하는 것은 벌주를 공격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그가 그렇게 나올까?"

"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 신세네."

"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

" 그가 직접 이곳까지 온 이유가 그 때문 아니겠나."

" 그럼 난 칼날 위에 목을 얹어 놓은 셈이네?"

" 난 그 상황을 즐기면 되고."

사유성은 빙그레 웃었다.

" 그럼 이건 어때?"

" 뭘 말인가?"

" 내가 살아날 수 있도록 네가 힘을 쓰는 거야."

"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치고 고개가 너무 빳빳한 거 아닌가?"

" 내가 부탁하는 것처럼 보여?"

" 아니란 말인가?"

" 공손정우를 없애면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 우리란 말인가?"

" 아냐."

" 그럼?"

" 담대천호가 가장 좋고 밀천은 두 번째야."

" 자넨?"

" 그놈이 죽는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 도움 될 일도 없다는 말인가?"

" 밤에 약간 편하게 잘 수는 있다는 게 전부잖아."

" 내 생각과는 다르군."

"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 자넨 잠룡 십 조 만 이끌고 수많은 적을 격파했네. 이번에도 그런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이네."

" 그러면 너희 밀천은 손 하나 대지 않고 코를 푼다는 거야?"

" 이번엔 그럴 참이네."

" 이번엔?"

" 자네가 저번에 율령궁과 싸을 때 때렸던 뒤통수가 아직도 낫지 않았네."

세간에는 율령궁만 멸망한 걸로 알려졌지만 실제 밀천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그때 율령궁 무인들을 쫓아 들어간 밀천 무인의 수만 천오백 명가량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살아 나온 자는 백 명도 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연우강은 나천후를 찾아가 동업을 제의했던 것이다.

" 말은 바로 해야지. 뒤통수를 친 쪽은 내가 아니라 나천후였어. 난 밀천 무인들이 그곳으로 들어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 정말 몰랐단 말인가?"

" 그렇다니까. 아무튼 이미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 게 좋아. 특히 좋지 않은 일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내일을 생각해야지."

" 하하하! 역시 자넨 입이 매끄러워. 아무튼 이번에 우리 밀천은 구경만 할 참이네."

사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문을 열었다.

" 가려고?"

" 함께 갔으면 좋겠지만 두 소저의 눈치가 장난이 아니라서 말이네. 아무튼 밀천에서 보도록 하세."

" 대문 앞에서도 맞이해 줄 거지?"

" 물론이네, 연 형. 어떤 사람의 입이 쩍 벌어지도록 최고 대우를 해주라는 방침이 내려왔다네."

" 공손정우를 의식한 환대인가?"

" 그건 자네 편할 대로 생각하게. 그럼 좋은 시간 보내게. 연 형."

" 저 여자도 데리고 가."

연우강은 시중을 들고 있는 여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 저 아니는 시비네."

" 난 세 여자씩이나 데리고 잘 자신은 없어."

" 알았네. 가자."

사유성은 시비를 보았다.

" 알겠습니다. 부천주님."

시비는 고개를 숙이고는 마차 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다음에 보세."

사유성은 시비의 손을 잡고 마차 밖으로 몸을 날렸다.

" 교랑!"

사유성이 모습을 감추자 연우강은 이철상을 불렀다.

" 네!"

이철상은 그가 타고 있는 마차를 나가 연우강이 타고 있는 마차에 올랐다.

" 규동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 그곳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남쪽에는 팔면산과 제면산이 있고 서쪽에는 만양산과 무공산이 있습니다."

" 나소산맥에 포함된 산들이야?"

" 그렇습니다."

" 밀천 총단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 나포애에서는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 가서 그림을 그려와. 주변도 둘러보고."

" 알겠습니다. 총대주님."

이철상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철상, 마장웅, 장사덕. 신도영. 사후린 다섯 명이 먼저 떠났다.

" 밀천이 이곳에 총단을 세운 이유를 아세요?"

남궁운화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그녀가 아는 밀천 총단은 군산이기 때문이었다.

"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까 대규모 병력이 출병한다고 해도 들킬 염려가 없고, 서쪽이나 남쪽으로 뻗어나가기가 좋습니다."

" 지정학적 위치가 좋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불어난 식구를 감당하기엔 군산은 너무 좁습니다."

" 이번 개파대전으로 많은 무인들이 가입할 거라고 보시는군요."

" 아닙니다. 밀천은 이미 만 명 이상의 새 식구가 생겼습니다."

" 만 명 이상이라면?"

" 봉황림고 만독림 말입니다."

" 그들이 밀천으로 왔을 거라고 보세요?"

" 아마 원래부터 밀천 소속이었을 겁니다."

" 그럼 벌내쟁투 때문에 짐을 쌌다고 볼 수 있겠군요."

" 가족가지 쳐죽이는데 그런 곳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겠지요."

" 그렇군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 쉬지 않고 달린 마차는 다음 날 저녁 무렵 개파대전이 열리는 장소인 규동에 도착했다. 밆천 총단은 규동 서쪽 만양산 최남단 만양평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르고 비탈길을 올라간 마차는 만양평 입구로 들어섰다.

" 접니다. 총대주님."

그때 먼저 떠났던 이철상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 어때?"

" 건물만 해도 오백 채가 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철상은 산 위에서 그렸던 건물 배치도를 내밀었다.

" 어디 보자.... 쿡!"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건물이 팔괘 문양을 따라 지어져 있었다. 문득 군산에서 보았던 죽림이 떠올랐다. 몽요는 그 진식을 현기환사죽영진이라고 했다.

이곳 또한 건물을 현기환사죽영진을 바탕으로 세운 듯했다.

" 왜 그러십니까?"

" 이걸 보면 느끼는 거 없어?"

" 진식에 바탕을 두고 건물을 지었단 말입니까?"

" 현기환사죽영진이라는 방어진이야."

" 해진 방법은 있습니까?"

" 건물을 전부 날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 단순히 방어를 위해 진식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거 같군요."

" 그건 두고 봐야겠지."

연우강은 밀천 총단 건물이 그려진 종이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이철상을 보았다.

" 없습니다."

" 없어?"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 샅샅이 훑은 거야?"

" 네, 밀천 총단을 중심으로 주변 십 리는 샅샅이 훑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 그럴 리가 없는데....."

" 와아!"

그때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남궁운화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연우강과 이철상은 동시에 남궁운화를 보았다.

" 엄청난 인파에요, 연 공자."

남궁운화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만양평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평원이었다. 그런데 그 안쪽이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 얼마나 될 것 같아?"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며 물었다.

" 최하 이만 정도는 될 겁니다."

" 그 정도면 개파대전을 안쪽에서 하는 것도 무리겠지?"

" 정문 근처에 단을 세우고 있더군요. 밖에서 개파대전을 열 모양입니다."

" 대야벌의 시대가 가긴 간 모양이네."

" 무슨 소리죠?"

창 밖을 보고 있던 남궁운화가 고개를 돌렸다.

" 나천후는 대야벌과 척을 지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 그랬죠."

" 그 말은 즉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구름 인파가 모였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 이곳에 모인 대다수가 대야벌의 멸망을 원한다는 말인가요?"

"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은 안 된다는 뜻이겠지요. 아무튼 우리 입장에서는 나쁘진 않네요."

" 대야벌 벌주 대행이다!"

어느새 대문 앞에 도착했는지 신분을 밝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좋은 여행이 됐는지 모르겠소이다."

전날 먼저 떠났던 사유성이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 사람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연우강은 사유성을 보며 물었다.

" 하하하! 나도 개파대전에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모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네. 지금 저들을 수용할 임시막사를 짓느라고 정신이 없네."

사유성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비롯한 나천후는 이렇듯 많은 사람이 모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많이 모인다고 해도 오천 정도일 거라고 예상을 했는데, 벌써 이만 명이 넘는다. 사람 불어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 그러다 입 찢어지겠다. 사유성 그만 들어가자고."

" 알았네. 연 형."

사유성은 일행을 안내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는 곧바로 직진하여 커다란 건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 여기가 영빈관이네."

연우강이 내리자 사유성은 바로 앞 건물을 가리켰다.

연우강은 고개를 들었다. 고풍스럽게 지어진 구 층 건물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 이 근처에서 가장 높겠지?"

" 물론이네. 그리고 이 건물에는 벌주 대행을 비롯한 그 수행원들만 받기로 했네. 식당은 일층에 있고, 전문 요리사 상시 대기하고 있네."

" 우리 말고 도착한 사람은?"

" 무궐 궐주 공손정우와 구중련 련주 철혈매화검 적환규, 녹사련의 녹림마제 육사이, 낭인림의 구천검제 설야가 왔고, 팔황천에서는 대혈마 북청강이 대표로 왔네. 그리고 과거 패천림에서는 금강역사 장육철이 참석했네. 일반 무인들 중에서는........"

" 됐어. 필요한 건 다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공손정우 일행이 있는데도 내게 이 건물을 주는 건 팔두마차를 보내 마중을 나온 것과 비슷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면 되는 건가?"

" 천주께서 저녁을 함께하자고 초대를 했는데 괜찮겠는가?"

사유성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물론 가야지. 마부에게 시간을 알려 놓도록 해."

" 그럼 저녁 식사 때 보세."

사유성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각 군장들은 방을 배정해 줘."

연우강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의 처소는 맨 꼭대기 층인 구층이었다. 구층은 아래층과 구조가 달랐다. 계산을 하고 올라서면 왼편으로 복도가 길게 나있고, 좌우 측으로 방이 배치돼 있다. 방의 개수는 한편에 세 개씩 여섯 개였다.

그리고 복도 끝에는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 방은 어디로 할까요?"

" 저기 문 앞으로 하자고."

연우강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을 가리키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은 정원처럼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는 공간 가장자리로 갔다. 십여 장 건너편에 다른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연우강이 서 있는 곳에서 보면 한참을 내려다봐야 하는 삼층이었다.

" 대단한 규모네."

연우강은 혀를 내둘렀다.

이곳에 서자 비로소 밀천의 규모가 한 눈에 들어왔다. 구층 높이의 건물만 해도 수십 채에 달했고, 건물들 주변으로는 삼 층 높이의 건물 십여 채가 늘어서 있다.

고루거각이란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 응?"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연우강의 입매가 길게 늘어났다.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공손정우를 발견한 탓이었다. 연우강은 손을 들어 올렸다.

" 여어!"

연우강을 보는 공손정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밀천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그였다.

그가 밀천 행을 서둘렀던 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를 방지하고 위해서였다. 연우강보다 늦게 도착하면 그에게 높은 층을 준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미리 도착하여 담대만승의 대행인 연우강보다 더 좋은 건물과 츠을 배정 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구 층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옆 삼 층 건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손님 된 입장에, 게다가 공짜로 숙박을 하면서 따지기까지 하면 오히려 자신만 우습게 되기에 꾹 참았다. 그때 건너편 건물 꼭대기에 나와 있는 연우강을 보게 된 것이다.

" 오랜만이야!"

' 개자식!'

그동안 얼굴을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대화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놈은 대뜸 반말이다. 주둥이에 검을 박아 넣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구쳤다.

" 기분 나빠?"

" 난 나이가 예순다섯이다. 연우강."

공손정우는 가까스로 노화를 삭이며 말을 내뱉었다.

" 아! 반말 때문에 그런 거군. 전에도 나이 가지고 내게 지랄하던 새끼가 있긴 했는데..... 내가 뭐라고 했게?"

" ....!"

공손정우는 말없이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 나이 처먹은 게 자랑이다 새꺄! 라고 말해줬어."

으드득!

공손정우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공손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강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 옛날 같으면 너 같은 새끼가 눈을 치뜨고 노려보면 눈알을 빼버렸을 거야, 자식아' 라는 말도 해줬어. 그랬더니 그 자식이 이를 으드득 갈더라고. 하지만 지가 어쩔 거야. 난 정천호고 지는 양민인데. 사실 대야벌 감투는 관리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개자식!"

급기야 공손정우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짝!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 영감 말이 맞아. 그 자식이 나보고 '개자식'이라고 했어. 그러고는 콧김을 씩씩 뿜어대며 날 노려보는데, 완전히 미친 개새끼 같더라. 그런데 어디 아파?"

" 죽여버리겠다. 연우강."

" 그 자식도 그런 말을 했는데. 아무튼 영감은 그 자식하고 비슷한 구석이 많은 것 가아.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연우강은 다시 손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 쌍노무 새끼!"

졸지에 상대를 잃어버린 공손정우는 진득한 욕을 내배었다. 그는 연우강이 사라진 건물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담대무궁이 이끄는 잠룡대 이 진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였다. 그들에게 방을 배정해 준 연우강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 함께 갈래요?"

연우강은 정원에 나와 있는 수여설을 보며 물었다.

" 제가 따라가면 남궁 가주가 심심하잖아요."

" 그럼 함께 가면 되잖아요."

" 그래도 돼요?"

" 음식이 여기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 그럼 함께 가요."

수여설은 남궁운화의 손을 잡고는 마차에 올랐다. 세 사람이 타자 마차는 영빈관을 나서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로를 질주하던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수십 개의 등이 화려하게 밝혀진 거대한 건물 앞이었다.

층수는 십 층이고 좌우 폭은 다른 건물에 비해 두 배 가량 넓었다. 마차가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 연우강은 수여설과 남궁운화를 동반한 채 내렸다.

" 하하하! 어서 오게, 연 림주."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천후가 다가왔다.

"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

" 지금까지 모인 인원이 이만오천 명이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강호 무인들의 민심이란 말이야?"

밀천으로 들어올 때 이만 명가량이었는데 어느새 오천 명이 더 늘어난 모양이었다.

" 그렇지. 대야벌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면 그렇듯 많은 무인들이 모여들 리가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들어가세."

그는 연우강 일행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연회실은 대전 왼편에 있었다. 문을 열자 화려한 불빛이 일행을 반겼다.

연우강은 안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스무 명가량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탁자 위에는 음식이 담긴 접시가 가득 있었다. 그리고 열 명이 탁자를 빙 둘러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은 비어 있었는데, 빈자리 오른편에는 나천후의 조부인 나적리가, 왼편에는 사유성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사유성 옆에는 왜인으로 보이는 자가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적리 옆으로는 공손정우, 적환규, 육사이, 설야가 나란히 앉았고 그들의 건너편에는 패천림의 장육철, 막북혈마성의 북청강, 북천지옥부의 탈라하가 앉아 있었다.

연우강이 들어서자 북청강과 탈라하는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 벌주 대행은 여기에 앉으면 되네."

나천후는 빈 자리를 가리켰다. 그 자리는 나천후와 마주보는 자리였다. 연우강이 자리에 앉자 수여섥과 남궁운화는 좌우 측으로 자리를 잡았다.

" 대부분 알고 있을 테고, 저기 있는 풍밀가의 가주만 모르니까..."

나천후는 왜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 난 풍밀가와 은밀가의 통합 가주 원세군이오."

나천후의 눈빛을 받은 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우강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원세군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반갑네. 난 연우강이네."

연우강은 담담하게 원세군의 눈빛을 받아냈다.

꿈틀!

원세군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나름 예의를 지킨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포권을 취하고 고개까지 숙였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반말이다.

" 중원인은 원래 예의가 없는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원세군은 버럭 소리쳤다.

" 중원인이 예의가 없는 게 아니라 내 신분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네. 원 가주. 우리 중원에서는 이런 경우를 일컬어 호가호위라고 한다네."

" 호가호위?"  새끼가 놀고 자빠졌네.”

" 벌주보다는 벌주 대행의 위세가 더 크단 말이네. 그리고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 목에 힘을 줘 보겠는가. 그러니 고깝더라도 앉게."

원세군은 할 말을 잃었다. 본인 입으로 호가호위하고 있다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쳐다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원세군이 앉자 연우강은 나적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대야벌 벌주께서는 밀천의 개파를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나천후 잠룡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으니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소."

" 허허허! 대야벌의 벌주는 우리 밀천을 인정하지 않을 모양이군."

"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고 인정하기 싫은 거요, 영감."

" 그것도 대야벌 벌주의 말인가?"

" 아니오. 벌주의 말은 끝났소. 지금부터는 연우강 개인의 말이외다."

" 자넨 어떤가?"

" 우리 금릉 연씨 세가는 매년 백만 냥을 대야벌에 뇌물로 바쳤소."

" 문파가 늘어나면 뇌물을 바쳐야 할 돈도 늘어나겠구먼."

" 앞으론 그런 일이 없을 거외다. 정 내 돈을 쓰고 싶으면 년 이 할의 이자를 내고 빌려 써야 하오."

" 뇌물을 받았던 문파에서 섭섭하다고 여길 텐데 그땐 어떻게 할 참인가?"

" 없애버릴 참이오."

" 없앤다고?"

" 무인이나 일반 양민이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아시오?"

" 글쎄?"

" 영감 앞에 놓인 그런 걸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거요."

" 그 문파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끊어버리겠다는 거군."

" 그동안 몰라서 하지 않았던 건 아니오. 다만 귀찮은 게 싫고, 백만 냥 정도는 버려도 상관없는 돈이기 때문에 던진거였소. 그런데 그 결과가 금릉 연씨 세가의 멸문이었단 말이오."

" 밥을 던져주던 개에게 물린 꼴이라는 건가?"

" 바로 그거요, 영감."

연우강은 서늘하게 웃으며 접시에 음식을 덜었다.

" 그럼 앞으로 각 문파들은 금릉 연씨 세가의 눈치를 봐야겠구먼."

" 굳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소. 지금처럼 물건을 사 쓰고, 결재 날짜에 맞춰 결재만 해주면 되오. 그럼 나도 돈놀이나 하면서 조용히 황금백수로 살아갈 거요."

" 허허허!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밀천도 금릉 연씨 세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을 적극 이용하도록 하겠네. 연 소협. 그런데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들어봤는가?"

나적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혹시 염자생에 대한 소문을 말하는 거요?"

" 그렇네."

" 그 소문은 내가 냈소."

" 왜 그런 건가?"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염자생이란 노인이 있는데 그가 하소연을 해 와서 그렇소."

" 어떤 하소연을?"

나적리의 얼굴에 슬쩍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은 소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공손정우와 연우강 둘을 싸움 붙이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연우강이 대뜸 그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스스로 말한 것이다.

슬쩍 공손정우의 얼굴을 살핀 나적리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공손정우의 얼굴이 급작하게 궁더지고 있었다.

" 잠룡쟁패를 빼앗아 간 것도 부족하여, 무림 공적으로 만든 놈을 찾아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소이다."

" 그래서 그놈을 찾아줄 생각을 한 건가?"

" 이미 죽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살아 있고, 더불어 성공한 상태라면 그놈은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겠소?"

" 그래서 나타났는가?"

"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조만간 나타날 거라고 보고 있소."

" 나타나면 어떻게 할 참인가?"

" 그 사실을 세상에 알려서 매장을 해야지요. 그래서 아직은 정의가 살아 있는, 살 만한 곳이 강호라는 사실을 널리 알릴 참이오."

' 으음!'

공손정우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놈이 과거 사건을 파헤치고 다닌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놈이 당사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만일 그가 자네보다 무공이 높으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 내 주변엔 고수들이 많소."

" 그렇군. 아무튼 범인을 반드시 잡기를 바라네."

더 이상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본인이 직접 소문을 냈다는 말로 인해 연우강은 공손정우를 없앨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나적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자정 무렵 연회는 끝이 났다.

" 그럼 개파대전이 있는 날 보세."

" 즐거운 시간이었소이다."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마차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어온 마차는 무궐 궐주 공손정우의 마차였다. 그 뒤를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들어왔는데, 두 마차는 말의 수부터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마차를 쳐다보던 공손정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가 오르자 적환규, 육사이, 설야가 뒤따라 오르고 마차는 곧 출발했다.

" 서둘러라!"

공손정우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디.

" 이랴!"

마부는 급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히히힝!

느닷없는 고통에 비명을 지른 말은 빠르게 내달렸다.

" 개자식!"

건물을 벗어나자 공손정우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지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구 층 건물, 팔두마차, 그리고 연회실의 상석.

모든 일이 연우강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물론 나적리와 나천후가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그 영감이 우릴 도발한 겁니다. 형님. 침착하지 않으면 우리가 당합니다."

적환규가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를 흘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 물론 알고 있네. 하지만......"

" 이곳에서는 절대 안 됩니다. 형님. 이 안에서는 놈은 사초 연우강이 아니라 벌주 대행입니다. 그에게 검을 겨누게 되면 벌주에게 검을 겨눈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건 놈이 바라는 겁니다."

" 내가 참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네. 놈이 벌주 대행만 아니었다면 진작 죽여 없앴을 거네."

' 아니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면 놈의 머리는 진작 떨어졌을 거네."

마지막 말은 꿀꺽 삼켰다.

공손정우는 이번을 그의 일생에서 세 번째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첫 번째는 염자생으로부터 잠룡쟁패를 얻은 것이고, 두 번째는 무궐의 궐주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가 몰락하고, 패천림, 봉황림, 만독림이 탈퇴하면서 담대만승은 최대의 위기를 맞은 상태다. 담대만승이 지금 상태로 임기를 마치면 차기 벌주는 담대천호와 그의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담대만승의 동생이라는 약점을 지닌 담대천호보다는 그가 더 유리하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했던 소문이 다시 불거져 나왔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더 확대재생산 된 것이다.

소문을 잡지 못하면 벌주 자리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공손정우는 잘 알고 있었다.

[ 봉합하지 않으면 우린 함께 몰락하고 마네. ]

공손정우는 적환규를 보며 전음을 보냈다.

[ 주변에 은신해 있는 문도들까지 합치면 무인만 이천입니다. 거기다 검혈녹천군 일맥을 더하면 설사 천상천이라고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지만 이번엔 결코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적환규 역시 전음으로 말했다.

[ 놈을 비롯한 잠룡대 대원들이 전부 이곳으로 왔다고 했는가?]

[ 그렇습니다.]

적환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 무조건 놈들을 없애야 하네.]

[ 담대무궁은 어떻게 할 참입니까?]

[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잘못하면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수가 있네. 우선은 연우강에 집중하도록 하세.]

[ 알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적환규는 육사이와 설야에게 조금 전 나눴던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공손정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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