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저주악마지심
영빈관 건물 중 가장 외곽에 있는 삼 층 건물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맨 위층 방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 세 명과 중년인 한 명이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만일 대야벌 무인들이 네 사람을 보았다면 기절했을 것이다. 창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앉아 있는 자는 패천림 금강역사 장육철이고, 그 오른편에 앉아 있는 중년인은 천무비고의 유였다. 그리고 유 옆으로 자주색 도복을 걸친 사유와 검은색 도복을 걸친 마유가 앉아 있었다.
연우강의 말처럼 비고를 맡았던 천기팔유는 패천림과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자들이었다.
장육철을 비롯한 네 명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장차 패천림도 개파대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강호 동정을 살필 겸 사전답사를 나온 것이었다.
" 마유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마유를 쳐다보는 사유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만양평을 채운 무인들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이렇듯 많은 무인들이 모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 보니 실로 엄청나다는 말밖에 다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바꿔 말하면 대야벌에 대한 원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지."
" 자네 생각도 그런 모양이군."
사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우리가 개파대전을 할 때도 강호 무림이 이런 반응을 보일지는 심각하게 고려를 해 봐야 하네."
" 그렇지. 반응은 원래 처음 시작할 때가 가장 열렬한 법이니까. 유 네 생각은 어떠냐?"
사유는 유를 돌아보았다.
" 이곳에 모인 자들을 보면,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대야벌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 대야벌은 담대만승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벌주가 바뀌고, 새로운 벌주의 새로운 강령이 발표된다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대야벌이 가진 장점이었다.
큰 잘못을 한 벌주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임기를 마치기 전에 끌어내려지고, 용서할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른 벌주에게는 임기만 보장한다.
더불어 자리에서 내려오는 벌주는 그동안 저질렀던 모든 잘못을 가지고 떠난다. 즉 차기 벌주는 전대 벌주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무림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임기제 벌주.
그 전통은 대야벌이란 거대 단체가 천오백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 그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 무슨 방법 말이냐?"
" 이곳을 지옥으로 만드는 겁니다."
" 설사 우리가 이곳을 지옥으로 만든다고 해도 강호 무인들은 대야벌의 짓이라고 할 거란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더불어 밀천의 기세도 꺾을 수 있습니다."
"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통 무인으로는 불가능하고 천년마인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 일은 천주님의 재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재가는 이미 떨어졌습니다. 어르신."
" 천주께서 허락하셨단 말이냐?"
사유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천년마인은 비록 이지를 상실했다고 하지만 천주의 옛 동료들이다. 그런 그들이 희생될지도 모르는데 허락하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제 생각에는......"
유는 말끝을 흐렸다.
" 말해 보거라."
"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 과거를 잊고 싶어 한다고?"
" 고금제일인이자 전설의 천마가 아닌 제석강이라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 그러니까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 클클클!"
사유는 낮게 웃었다.
전설의 천마가 아닌 인간 제석강.
그를 비롯한 만기팔유 여덟명이 가장 바라는 바였다. 인간적이라는 건 곧 야망을 꿈꾼다는 뜻이고, 무인으로 갖는 야망의 끝에는 강호 정복이 있다. 그가 꿈을 꾸기 시작했다면 대야벌 같은 거대 단체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은가?"
사유는 마유를 보며 물었다.
" 최하 삼년이네."
" 난 삼 년도 길다고 생각하네. 최대 이 년이면 가능할 거네."
" 죽기 전에 이룰 수만 있다면 난 만족하네."
마유는 유를 바라보았다.
" 전부 데려왔습니다."
" 그분이 전부 주셨단 말이냐?"
마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완전한 천년마인이 되지 못하고 회혼마인과 천년마인의 중간 상태인 일백마는 제석강의 유일한 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을 전부 내주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최소 이만 정도는 모일 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 무인의 수가 많다고 해도...."
마유는 여전히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 그분이 그들을 왜 내주었는지 그건 따질 필요 없습니다. 어르신. 일백마를 제게 주셨고, 전 그것들로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면 그뿐입니다."
" 그, 그렇지."
마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의 말 대로다. 굳이 의중을 따질 이유가 없다. 제석강은 엄청난 무인들을 주었고, 그들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원하는 바를 성취하면 그만일 테다. 마유는 유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조정하는 방법도 배웠겠구나?"
" 이걸 주셨습니다."
유는 품속에서 피리를 꺼냈다.
" 그건?"
" 무음마소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천년마인을 부릴 수 있는 피립니다."
"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 나긴 나는데 살아 있는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습니다."
" 그렇구나. 그럼 날짜는 언제로 하면 좋겠느냐?"
" 삼 일 후가 좋겠습니다."
" 삼 일 후라면 개파대전 전야제가 있는 날이구나."
" 그렇습니다."
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따로 준비할 건 없느냐?"
" 없습니다."
" 알았다. 그렇게 알고 있으마."
" 그럼, 전 들어가 쉬겠습니다."
유는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 술 있느냐?"
마유는 장육철을 보며 물었다.
" 술 생각이 나십니까?"
장육철은 소리없이 웃었다.
" 갑자기 유 그 녀석이 무서워져서 그래."
마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추세라면 개파대전 전날엔 대략 삼만에서 사만가량이 모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천년마인을 전부 풀어놓겠다고 말하면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문득 지금까지 녀석을 잘못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전엔 그러지 않았거든. 아주 온순한 녀석이었는데 승천비고를 나오면서부터 변한 것 같아."
" 변한 게 아니라 본래 모습을 되찾은 거네, 마유."
사유가 말했다.
" 무슨 소린가?"
" 저 녀석 어린 시절에 개와 고양이를 키운 사실을 알고 있는가?"
" 물론 알지. 녀석이 짐승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 그럼 그 고양이와 개들이 잔인하게 살해된 것도 알고 있겠구먼."
" 범인을 찾겠다고 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마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광경이 떠올랐다. 개와 고양이 시체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네 다리가 전부 잘리고 머리가 잘리고 사방으로 흩어진 내장마저도 조각조각 잘려나가 있었다. 그 범인을 찾기 위해 며칠 동안 밤을 새곤 했다.
" 하지만 우린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지."
" 설마 그 범인이?"
" 맞네. 바로 유였네."
" 저, 정말인가?"
" 그렇다네. 유는 저주악마지심을 타고났네."
" 저, 저주악마지심이란 말인가?"
마유는 경악했다.
저주악마지심.
그것은 천지신맥이나 천강지체처럼 하늘의 힘을 부여받고 태어난 신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구음절맥이나 오음절맥처럼 맥이 막혀 오래 살지 못하는, 육체적인 병도 아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체질을 말하는데 죽음에 무감하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생명체가 죽어가는 광경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고 하였다.
악마의 자질을 타고난 자, 그런 자를 일컬어 저주악마지심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런데 유가 그런 자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 녀석은 고양이 다리 하나를 자르고 지혈을 하네. 그런 다음 어떤 상태인지 관찰을 하지. 그러다고 고양이가 고통에 적응할 즈음이면 또 다른 다리를 잘라내네. 그리고 지혈을 하고는 다시 관찰하네. 두 다리가 잘린 상태에서도 고양이는 녀석에게 안기가 위해 안간힘을 쓰곤 했네. 고양이를 돌봐주었던 유일한 주인이 그 녀석이었거든. 하지만 녀석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계속 고양이를 잘라나갔네. 네 다리를 자르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고 또다시....."
" 그만!"
마유가 버럭 소리쳤다. 갑자기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 빌어먹을!"
속이 진정되자 손을 떼어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 신유가 그 녀석을 제자로 기르면서 그 기운을 여지껏 억누르고 있었다네."
" 그럼 천주께서?"
" 그런 모양이네."
" 왜?"
마유는 멍한 얼굴로 사유를 보았다.
" 웃고, 울고, 먹고, 마시는 걸로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네."
" 하면?"
"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거라네."
" 미치겠군."
" 미칠 것까진 없네. 그분을 기다렸던 사람은 우리니까. 함께 미치면 되는 거네."
사유는 담담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 한 가지만 더 대답해주게."
" 말하게."
" 그 녀석의 무공은 어느 정돈가?"
" 나도 모르네."
" 몰라?"
" 스무 살 때 이후로는 측정을 포기했으니까."
" 그럼?"
" 아무튼 이 년 안에 끝날 거네."
사유는 휘적휘적 걸어 밖으로 나갔다.
" 술!"
마유는 장육철을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여, 여기 있습니다."
장육철은 깜짝 놀라 술병을 내밀었다.
술병을 받아든 마유는 단숨에 비웠다. 빈 술병을 내려놓은 그는 다시 장육철을 보았다.
" 더 필요하십니까?"
" 넌 마시고 싶지 않아?"
" 저, 저도 한잔 하고 싶습니다."
장육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엄청난 말을 들은 탓에 술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백 살이 넘은 마유 앞에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함께 한잔하자고 하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 그럼 우리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보자고."
" 준비하겠습니다. 어르신."
장육철은 헤벌쭉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 강호 무림이 살아남든 멸망하든 우리가 천하제패를 하는 건 변함이 없겠군."
마유는 창 밖으로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
축제 분위기는 개파대전 전날 절정을 이루었다. 만양평 수백 곳에 모닥불이 밝혀지고, 경극단과 악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모닥불 주변에는 장사꾼들이 갖가지 기구를 만들어 손님을 유혹했다.
" 자! 이 비수를 던져서 과녁을 맞추면 인형을 드립니다. 자! 오세요!"
" 자! 이 쇠를 잘라내면 건 돈의 두 배를 드립니다."
" 이 돌을 가루로 만들면 건 돈의 두 배를 드립니다."
" 재미있는 친구들이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구 할은 무인이고 일 할은 양민들이다. 그런데 무인들을 상대로 비수를 던지거나 쇠를 잘라내는 내기를 하고 있다.
대단한 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 저기로 가봐요."
놀이가 신기한 듯 수여설이 연우강을 이끌었다.
" 처음 봐요?"
" 네."
" 남궁 가주도?"
" 물론이죠. 이런 걸 언제 구경이나 했겠어요."
" 좋아요. 가요. 제가 멋진 인형 하나 뽑아줄게요."
연우강은 둘을 데리고 비수를 던지는 곳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무인들 상당수가 모여 비수를 던지고 있었다. 인형을 뽑기 위해 비수를 던지는 게 아니라 자기네들끼리 내기를 하고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손님. 이걸 던져서 과녁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맞추며 두 냥 상당의 인형을 드립니다."
연우강이 다가가자 장사꾼은 활짝 웃으며 맞았다.
" 거는 돈은?"
" 한 냥입니다."
" 도둑놈!"
연우강은 장사꾼을 빤히 쳐다보았다.
" 험! 장사꾼은 원래 다 도둑놈입니다. 연 공자."
" 나를 알아?"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장사꾼을 보았다.
이제 오십대 초반이나 됐을까, 주름이 자글자글 하긴 했지만,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할 인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 십여 년 전에 금릉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 십여 년 전에 본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 전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어먹지 않습니다."
" 그런 사람이 왜 망한 거지?"
" 제가 망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 날 기억하고 있다면 십여 년 전에 작은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을 테고, 얼굴엔 아직 부티가 남아 있으니 망한 건 삼사 년 되겠네."
" 귀신이시네요. 전 이치상입니다."
" 치상 상단?"
" 기억하고 계시네요."
이치상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상단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하는 거지?"
" 이 비수를 던져 과녁에 맞추면 됩니다."
이치상은 비수 하나를 들어 연우강에게 주었다.
" 휘었잖아."
연우강은 이치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직선으로 돼 있는 비수가 아니고 이처럼 휘어 있는 비수는 숙달된 자가 아니면 원하는 곳으로 던질 수가 없다.
" 무인들을 상대로 하는 장산데 똑바로 된 비수를 사용할 수는 없잖습니까. 이건 실력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 운을 시험하는 놀입니다. 공자."
" 그렇군."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들끼리 내기를 하고 있는 저들도 비수가 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여흥일 뿐이다.
" 한 냥을 걸면 된다고 했지?"
연우강은 품속에서 돈을 꺼내 이치상에게 건넸다.
" 던지십시오. 공자."
이치상은 한편으로 물러났다.
연우강은 과녁을 몇 번 겨냥하고는 휙 던졌다. 하지만 그가 던진 비수는 과녁에서 한참 벗어났다.
" 하하하! 실패하셨습니다. 공자."
" 한 번 더 할게."
한 냥을 꺼내 놓고는 이번엔 신중하게 과녁을 겨냥했다.
휙! 소리와 함께 비수가 그의 손을 떠났다. 연우강은 비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더니 과녁에 틀어박혔다.
" 헉!"
이치상은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두 번만에 과녁을 맞춘 사람은 연우강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 저기 있는 걸로 줘."
연우강은 상당히 고급스럽게 보이는 도기 인형을 가리켰다.
" 운이 좋으시군요. 한 번 더 하시겠습니까?"
" 그거 좋지. 그런데 어떻게 해서 망한 거야?"
연우강은 한 냥을 더 꺼내 놓으며 물었다.
" 치상 상단은 친구와 동업을 했습니다."
" 동업은 좋은 게 아닌데."
연우강은 신중하게 비수를 겨냥하며 말했다.
" 시작할 때 자금이 조금 부족해서 친구 녀석에게 빌렸습니다."
휙!
연우강의 손에서 비수가 날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이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과녁을 빗나간 것이었다.
" 이런! 한 번 더할게."
연우강은 다시 한 냥을 꺼내놓고 비수를 받았다.
" 그럼 그 친구가 들고 튄 거야?"
연우강은 신중하게 겨냥하며 물었다.
" 주문 받은 물건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났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더군요."
" 원래 문서는 마누라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건데."
휙!
또다시 그의 손에서 비수가 떠나고 이번엔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 운이 좋으시군요....... 불알친구라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
이치상은 인형들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가며 말했다.
" 같은 걸로 줘."
" 여기 있습니다."
이치상은 인형 두 개를 가져왔다. 인형을 받아든 연우강은 남궁운화와 수여설에게 하나씩 주었다.
" 호호호! 고마워요. 살다가 이런 선물도 받아볼 때도 있네요."
수여설은 활짝 웃었다.
이쪽으로 오기는 했지만 공연히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선물을 받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선물을 받는 느낌이 이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저도요."
남궁운화도 덩달아 웃었다.
" 좋아요?"
" 네."
" 네!"
두 여자는 질세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이 좋다니까 저도 좋네요."
연우강은 다시 이치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혹시 나랑 동업할 생각 있어?"
" 동업이라고요?"
이치상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 내 아버진 상관없이 나랑 하는 거야."
" 정말입니까?"
" 자금은 내가 대고, 자넨 머릿속에 들어 있는 사업 계획과 몸을 대."
" 진심이군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이치상의 얼굴이 점차 심각해졌다.
" 동업하자는 말을 장난으로 하는 놈은 장사꾼이 아니라는 것도 몰라?"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공자."
이치상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 정말 동업할 거예요?"
수여설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연우강이 이렇듯 즉읗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건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조금 전 대화로 짐작하면 이치상이라는 사람은 십 년 전에 잠깐 보았을 뿐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루가 꽂혀 있었다. 그는 단검을 천천히 뽑았다.
" 아직 결정한 건 아닙니다. 수 소저."
" 결정되지 않았다고요?"
" 마지막 시험이 남았습니다."
" 시험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이치상이 뛰어왔다.
" 됐습니다. 공자님. 가시죠."
" 뭐 하고 온 거지?"
" 저쪽에서 쇠 잘라내는 걸로 장사하는 녀석에게 사업체를 넘기고 왔습니다."
" 구상하고 있는 사업비용은 어느 정도로 잡고 있지?"
" 이백만 냥입니다."
" 접대비를 포함한 금액?"
" 그 중 오십 만냥이 접대빕니다."
" 성공 확률은?"
" 팔 할입니다."
" 귀노!"
연우강은 주변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 부르셨습니까?"
주변에 머물고 있었던 듯 연우강이 부르자마자 염자생은 바로 나타났다.
" 지금 가진 돈이 얼마나 있지?"
" 삼백만 냥 있습니다."
" 우리 쓸 돈만 남기고 나머진 전부 이 친구에게 줘."
" 알겠습니다. 장주님. 계약서는 어떻게 할까요?"
" 귀노가 작성해."
" 알겠습니다. 따라오게."
염자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치상을 향해 눈짓을 했다.
" 상단 명칭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치상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자넬 배신한 친구에게 멋지게 복수해."
" 치상 상단으로 해도 괜찮단 말입니까?"
" 물론이야."
" 감사합니다. 공자님."
이치상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사업은 북경에서 시작할 거야?"
" 그렇습니다."
" 그럼 하북팽가를 찾아가서 내가 보냈다고 해."
" 팽운을 아십니까?"
이치상은 놀라 물었다.
하북 팽가는 일 처리가 깔끔할 뿐 아니라 상당한 무력을 겸비하고 있어 운송 도중에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거의 없다 해서, 얼마 전부터 상단주들이 가장 신뢰하고 일을 맡기고 싶어하는 표국중의 한 곳이 됐다.
" 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계산도 정확하고 사람도 아주 괜찮아."
" 알겠습니다. 그를 찾아가겠습니다."
" 그리고 돈 받는 즉시 이곳을 떠나. 있어봐야 좋을 일 없으니까."
" 네."
" 가세"
염자생은 이치상을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 우린 차나 한잔하러 갈까요?"
연우강은 둘을 데리고 찻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천막을 치고 탁자와 의자를 놓은 노천 찻집이었다.
여전히 연우강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듯 수여설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 마음에 들지 않아요?"
차가 나오자 연우강은 수여설을 보았다.
" 사람을 믿는 성격이 아니잖아요."
" 사람을 믿는 게 아니고 그가 처한 상황을 믿습니다."
" 그가 처환 상황이라고요?"
" 불알친구라는 말은 고향 친구라는 말이 되고, 고향 친구면서 동업을 했다는 건 최소한 삼십 년 이상 친구로 지냈다고 봐야 해요. 그 정도면 형제보다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런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잖아요. 일반적인 동업자에게 배신을 당한 것보다 훨씬 타격이 크죠. 그런 사람은 성공보다는 복수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마련이죠."
"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 네. 그리고 상계에서 성공하게 되면 금릉 연씨 세가의 눈을 절대 피할 수가 없죠. 이치상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요."
" 좋아요. 연 공자를 배신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쳐요. 하지만 그가 성공하지 못하면 연 공자는 이백만 냥을 그냥 날리게 되잖아요."
" 그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수 소저."
" 설마 막연한 직감으로 그러는 거예요?"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그와 동업을 할 생각을 한 것은 다섯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 다섯 가지나 있어요?"
수여설은 깜짝 놀랐다. 이치상과 대화를 나눈 시간은 기껏해야 일 각 정도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다섯 가지 이유를 찾아내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남궁운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조금 전 만남을 떠올리며 연우강이 그를 선택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이치상이란 자의 능력을 평가할 만한 단서는 없었다. 그녀는 결국 단서 찾는 걸 포기하고 연우강의 말을 기다렸다.
" 첫째는 눈썰미입니다."
" 눈썰미라고요?"
" 장사를 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사람을 알아보는 눈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가가에 들르는 사람이라도 자기를 알아봐 주면 금방 단골이 되지요. 단골손님이 많은 집은 설사 불황이 온다고 해도 망할 일은 없고요. 그런데 이치상은 십 년 전에 스치듯 만났던 나를 기억해 냈을 뿐만 아니라 며칠 전 만났던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했습니다. 그의 눈썰미는 최고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럼 두 번째는요?"
" 장사를 하는 태돕니다."
" 태도라고요?"
" 제가 기억하기론 십 년 전 그는 상당히 큰 규모의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중원의 상단 중 열 개를 추린다면 그 속에 낄 정도는 될 거예요. 그랬던 자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 대부분 술로 세월을 보내거나 폐인이 된다는 말이군요."
" 맞아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요. 그런데 그는 점포도 없이 장사를 하면서도 눈빛이 살아 있었어요. 그건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 세 번째는?"
" 결단력과 추진력입니다."
" 결단력이라고요?"
" 성공할 수 있는 자의 첫 번째 조건이 눈썰미라면 두 번째 조건은 결단력입니다. 기회가 왔다는 느낌이 올 때 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어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순간 망설이게 되죠. 그런데 그는 ' 동업이라고요?', ' 정말입니까?', ' 진심이군요.' 라고 간략하게 확인하고는 곧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 기회를 알아차리고 잡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말이네요?"
" 그렇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치밀함입니다."
" 어떤 점을 두고 하는 말이죠?"
" 지금까지 수 소저의 손에 열 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백만 냥이라는 거금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럼 열 냔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 돈으로 보이지 않겠지요."
" 하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앞으로 할 사업에 비하면 인형 뽑기 놀이는 장난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친구에게 그 사업을 넘겼습니다. 그건 곧 버릴 사업이라고 해도 함부로 정리하지 않고 뽑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챙긴다는 걸 의미합니다."
" 들을수록 일리가 있네요. 마지막은 뭐죠?"
"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 직감입니다."
" 그렇군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강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단순하게 인사를 하는 걸로 알았다. 그런데 연우강은 그 사이에 이치상이라는 사람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럼 연 공자의 직감이 잘못됐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번엔 남궁운화가 물었다.
" 이백오십만 낭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거죠."
" 그래도 상관없다고요?"
" 상관이 없는 게 아니라 깨끗하게 잊어야 합니다. 그걸 잊지 못하고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게 되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됩니다. 자신감을 잃게 되면 의사 결정을 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이백오십만 냥보다 더 큰 걸 잃을 수도 있습니다."
" 그렇군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렸으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추진하고,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잊어라. 그리고 자신을 믿어라.
중요한 걸 배운 시간이었다.
" 하지만 이치상이 성공하면 전 평생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만 일어나죠."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복불복이네요."
남궁운화는 웃으며 따라 일어났다.
" 크아악!"
" 아악!"
느닷없이 먼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놈이 될 거다.
" 크크크!"
" 키키키!"
곧이어 진득한 살기가 담긴 괴소가 들려왔다.
" 응?"
" 어?"
세 사람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비명과 괴소가 들려온 곳은 벌판 동쪽이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그리고 동쪽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 교랑!”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고 낮게 소리쳤다.
“ 하명하십시오, 총대주님.”
“ 대원들을 불러 모아.”
“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이철상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 잠룡대 대원들은 이편으로 모여라! 잠룡대 대원들은 모여라!”
그의 외침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놀고 있던 잠룡대 대원들이 일제히 연우강 근처로 달려왔다.
“ 누군지 아십니까?”
윤허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
연우강은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동하자 다른 대원들도 일제히 따라 나섰다.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만양평은 순식간에 비명이 난무하는 장소로 변했다. 호기심에 동쪽으로 달려가는 자들, 동쪽에서 도망쳐 오는 자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쪽으로 갈수록 비명이 들려오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 크크크!”
“ 캬캬캬!”
“ 아악!”
“ 으아악!”
“ 크아악!”
“ 저건?”
“ 뭡니까?”
연우강을 비롯한 잠룡대 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망치는 자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는 자들은 백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몸에서는 딱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잠룡 십 조 대원들은 그 기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 기운은 바로 죽은 자이면서도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강시들이 뿜어내는 기운이었다.
“ 강시군요.”
마장웅이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 강시라고?”
연우강 옆에 있던 윤허는 고개를 갸웃하며 검은 인영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가 알고 있는 강시는 관절이 굳어 개구리처럼 통통 튀면서 다니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군웅들을 무차별하게 도륙하고 있는 저들의 움직임은 일반 무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무릎을 굽히고, 손목을 비틀고, 몸을 날리는 모양새가 일반 무인들보다 더 부드럽고 빠르다.
그런데 강시라니.
윤허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무인들이 다가가고 있으니까 좀더 지켜보자고.”
연우강은 전면을 지켜보며 말했다.
“ 놈들을 막아라!”
벌판에 있던 자들인 듯 백여 명이 검은 동체를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 난 원비금도 육청풍이다!”
“ 난 사인도 소자명이다!”
“ 난 독룡비검 후난정이다!”
“ 난 설산비검 조유다!”
“ 난 철혈...!”
“ 난 혈선....”
“ 뭐하는 거죠?”
지켜보던 수여설이 물었다.
“ 본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잖습니까.”
“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요.”
“ 여긴 밀천의 개파대전 장입니다. 내일이면 개파대전을 시작하고요.”
“ 그래서요?”
“ 저들은 기회를 잡으러 온 자들이란 뜻입니다.”
“ 그러니까 강시들과 싸워서 공을 세우면 특별한 절차 없이 밀천 무인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저들을 푼 놈은 상당히 머리가 좋은 잡니다.”
“ 이 벌판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달려들겠군요.”
“ 공을 세우는 순간 성공은 보장되니까요.”
“ 크악!”
“ 아악!”
“ 으아악!”
“ 저럴수가!”
“ 엄청나군.”
전방을 주시하던 잠룡대 대원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자신 있게 달려들었던 무인들이 일 초를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강시들의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그래도 한 지역에서는 이름깨나 날린다는 무인을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빠르게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 물러나!”
연우강은 나직이 말하며 뒤편으로 물러났다.
잠룡대 대원들이 물러나는 순간에도 많은 무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강시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일 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강시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무인들의 머리가 떠오르고 두 조각으로 잘려 지면으로 쓰러졌다.
“ 멈춰라!”
바로 그때 내기를 잔뜩 머금은 외침이 주변을 강타했다. 소식을 들은 밀천에서 무인들이 나온 것이었다. 전면을 향해 소리친 자는 풍밀가의 가주 일섬무영참 원세군이었다. 그러나 강시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전과 다름없이 달려드는 무인들을 공격하며 다가왔다.
“ 우리가 처리하겠소!”
밀천 무인들이 나서기도 전에 또 다른 무인들이 강시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 또한 얼마 버티지 못했다.
아니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서둘러 달려든 자는 빨리 죽고, 나중에 달려든 자는 늦게 죽었다. 강시들은 기계처럼 무인들을 없애며 다가왔다. 수많은 시체가 강시들 뒤편으로 남고 만양평은 점차 피로 물들어갔다.
“ 없애라!”
결국 원세군은 부하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미나모토 가문의 인자들이 은신술을 펼치며 강시들을 향해 달려갔다.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강시 근처에서 흘러나왔다.
“ 헉!”
그리고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그곳을 쳐다보던 무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방금 그 소리는 미나모토 가문 인자의 검이 강시의 목을 치면서 나온 소리였다. 놀랍게도 강시들은 도검이 먹히지 않는 신체였던 것이다.
“ 그, 금강불괴다!”
누군가 소스라쳐 고함을 내질렀다.
“ 믿을 수 없다. 금강불괴가 어디 있느냐!”
무인들은 고함을 지르며 강시들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하지만 강시들은 금강불괴지신이란 사실은 그 후루도 계속 확인됐다. 무인들의 검이 강시의 몸을 수도 없이 후려쳤지만 검이 부러지거나 검날이 나갔을 뿐 강시들은 손톱만큼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 무궐 궐주다!”
“ 대야벌 무인들이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렸다.
공손정우를 비롯하여 영빈관에 머물고 있던 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 어떻소?”
근처까지 온 공손정우는 원세군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 모르겠소이다. 검으로도 잘리지 않는 자들이오.”
“ 금강불괴란 말이오?”
공손정우는 깜짝 놀랐다.
“ 한두 명이 아니라 전부가 불강불괴지신이오.”
“ 무슨 소리요?”
금강불괴지신.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환골탈태를 거쳐야 하고, 최소한 이기어검술의 막바지에 이르러야 했다. 그런데 백여 명 전부가 금강불괴지신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 사실이외다. 궐주.”
“ 설마.....”
공손정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심검의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 아니면서 금강불괴지신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강시가 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들은 강시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관절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순간동작이 보통 무인보다 더 빠르다. 강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동작인 것이다.
“ 크크크!”
“ 캬캬캬!”
“ 케케케!”
강시들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오며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짓쳐들며 미나모토 가문의 인사들과 무인들을 도륙했다.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비릿한 혈향이 주변을 덮었다.
“ 교랑!”
“ 하명하십시오. 총대주님.”
“ 철수해!”
“ 알겠습니다.”
이철상은 잠룡대 대원들을 향해 철수 명령을 내렸다.
“ 무슨 소리냐.... 소립니까?”
철수 명령에 담대무궁이 발끈했다.
“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연우강은 담대무궁을 보며 물었다.
“ 우린 대야벌 무인이오, 총대주.”
“ 그래서 저들과 싸우자고?”
“ 저들을 없애서 우리 대야벌과 밀천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주여야지요.”
“ 재들이 누군지 알아?”
연우강은 강시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 모르오. 하지만........”
“ 일백마야.”
“ 무슨.......”
담대무궁은 말끝을 흐렸다.
" 천오백 년 전에 천마의 수족이었던 그 일백마라고, 인마. 만일 저놈들이 강시 상태가 아니고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잠룡대 대원들 중에 저들의 일검을 막아낼 자는 별로 없어."
" 말이 되는 소릴 하시오."
" 말이 되든 안 되든 명령이니까 철수해."
" 그렇게는 못하오."
담대무궁은 연우강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 명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 난 대야벌 무인이오. 대야벌에 해가 되는 행위인 줄 알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소."
" 우린 손님으로 여기에 왔어. 그리고 이곳은 대야벌이 아니라 밀천이고."
" 하지만 이번 일의 책임은 전부 대야벌에서 지게 되오. 그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없애야 하오."
담대무궁이 강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무공을 뽐내기 위한 호승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는 건 대야벌에 대한 인식이었다.
만양평을 가득 채운 무인들을 보면서 강호 무림의 현 주소를 확인했다. 그들은 과거처럼 대야벌을 강호무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대야벌과 비슷한 무림 단체가 생겨 견제를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들이었다. 그런 자들 앞에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괴물들은 대야벌 무인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저들은 양민과 무인을 가리지도 않고 무차별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대야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데, 이번 일까지 벌어지면 대야벌은 그야말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대야벌 무인이 저들을 막는 수밖에 없었다.
" 만일 대야벌에서 보냈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데?"
" 무슨 소리요?"
" 벌주가 이곳을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보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 그럴 리가 없소. 총대주."
" 넌 원래 이번 밀천 행에 포함되지 않았잖아?"
" 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요?"
" 우린 희생양으로 선택됐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 말도 안 되오."
" 이제 막 정식 문도가 된 내게 벌주 대행이란 직책을 준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야, 인마. 그리고 대야벌의 위신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저놈들이야."
연우강은 원세군 옆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공손정우 일행을 가리켰다.
" 그래서 그냥 들어가겠단 말이오?"
" 정 싸우고 싶으면 네가 잠룡대 대표로 남아. 우린 갈 테니까."
연우강은 남궁운화와 수여설의 손을 잡았다.
" 가요, 언니."
" 알았어요, 가주."
둘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몸을 날렸다. 마치 남궁운화와 수여설이 연우강을 데리고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 공자님."
담대무궁의 심복인 호풍검 막동이 그를 불렀다.
" 우리도 철수한다. 막동."
" 어디로......"
" 돌아갈 것이다."
" 대야벌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 물론이다."
담대무궁은 밀천 건물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공손정우의 공격을 받을 터인데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시기를 봐서 빠지려고 했는데, 지금이 그때인 듯했다.
" 하지만 저들은......."
막동은 강시를 가리켰다. 조금 전 담대무궁이 연우강에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 이미 일은 벌어졌다. 설사 우리가 저들을 막는다고 해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밖엔 되지 않는다."
" 밀천에서 공자님을 노릴 수도 있겠군요."
막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밀천에서 저들을 대야벌 무인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가장 먼저 벌주의 아들인 담대무궁을 노릴 것이다. 머물러서 좋을 일이 없었다.
" 노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날 잡아서 아버지께 따지려고 하겠지. 그리고 잠룡대는 공손정우의 표적이 됐다. 굳이 함께 있을 이유가 없다."
" 알겠습니다. 공자님."
고개를 끄덕인 막동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물러나는 담대무궁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그를 비롯한 열네 명은 곧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놈들이 밀천으로 간다! 막아라."
그때 어둠 속에서 외침에 터져 나왔다. 백 구의 강시들은 달려드는 무인들을 격살하며 밀천 건물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자가 있었다.
밀천이 위치한 만양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포애 위에 백의를 걸친 사내가 서 있었다.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승천비고의 유였다.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피워진 모닥불로 인해 만양평 상황은 비교적 명확하게 보였다. 검은 인영 백여 명이 지나가는 곳에는 시체로 만들어진 길이 생겨나고 있었다.
" 아름답군!"
유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 크아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그러자 유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너무 아름다워."
극한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 듯 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먹을 너무 세게 틀어주었을까.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유는 손을 들어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바닥의 피를 핥았다.